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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육군 중장인 이병형(李秉衡·77) 초대 전쟁기념관장이 지난 9월23일 오전 6시50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47년 육사 4기로 임관한 李 前 전쟁기념관장은 6·25전쟁에 대대장과 연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6·25 때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130여 차례의 전투 중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不敗의 名將」이었다. 휴전 이후, 그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과 5군단장, 합참본부장, 2군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인민군의 휴전선 도발에 155mm 포탄 400발을 퍼부은 배짱있는 군인이었다. 그는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최초 발상자이기도 했으며, 전쟁기념관 건립사업을 주도했다. 李장군은 「한국판 전쟁론(클라우제비츠)」으로 불리는 名著(명저) 「大隊長(대대장)」 「연대장」등 야전지휘관의 지휘철학을 담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용숙(金容淑·71)씨와 이용운(李龍雲) 다임러크라이슬러 이사 등 1남2녀가 있다. 2001년 3월 기자와 만난 故 李秉衡 장군은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참모습』이라고 말할 만큼 國軍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참군인이었다. 1976년 제2군사령관을 끝으로 군복을 벗은 李장군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같이 은거해 왔다. 당시 기사 「은퇴의 美學」에서 기자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한다.
천혜의 낚시터 가평 중국섬 섬 안에 수로, 늪, 샛강 포인트 즐비 경기도 가평읍 바로 옆에 있는 중국섬. 북한강과 가평천이 만나는 곳에 토사가 쌓여 만들어진 삼각주다. 그런데. 이 중국섬에서 낚시를 해본 이들은 십중팔구 단골꾼이 된다고 한다. 우선, 경치 좋고 돈 안 들고, 차로 섬 곳곳을 누비며 포인트 바로 앞에 차를 대고 캠핑낚시를 즐길 수 있으니 이 만한 천혜의 낚시터가 어디 또 있을까. 어디 이 뿐이랴. 힘 좋은 강붕어들의 힘찬 입질로 찌가 벌렁 드러누우니 그 손맛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섬이라지만 둑으로 연안과 연결돼 있고 그 안엔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저수지 같은 수면과 샛강수로와 늪도 있다. 요즈음 중국섬 하류쪽은 경춘전철 복선 다리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은 무더위가 물러갈 즈음 8~9월부터 시작되는 잉어낚시는 물론이고 장마 후 오름수위의 대물 강붕어낚시 꿈이 한참 영글어 가고 있다. 조황문의 가평낚시 031-582-7155.
가슴이 후련해지는 섬 산행 인천 舞衣島 호룡곡산-국사봉 종주 무의도는 영종도 인천신공항 서쪽 끝에 있다. 인천신공항은 영종도와 용유도는 섬 사이 바다를 ‘벽해상전(碧海桑田)’으로 바꿔 비행장을 닦았다. 동북아시아의 중심공항으로 그 역할을 다할 인천신공항은 영종도와 용유도, 그사이 작은 섬인 신불도와 삼목도를 연결하는 총연장 17.3km의 방조제를 쌓아 조성한 1,700만평의 부지에 건설됐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18배나 된다. 반 인공섬인 영종도 바로 코앞에 무의도에는 서해의 알프스라 불리우는 호룡곡산(虎龍谷山, 244m)과 국사봉(國師峰, 230m)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인천시 중구 무의도동에 속하는 무의도는 섬모양이 춤추는 무희의 옷자락과 같다하여 얻은 이름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오갔던 무의도는 영종도 서남쪽 끝으머리 잠진도 선착장에서 페리호를 타면 5분이면 건너간다. 모든 섬 산행의 멋은 산마루에 올라서서 사방으로 펼쳐지는 바다와 해안을 내려다 보며 걷는데 있다. 국사봉은 옛부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터로 알려져 있다. 1957년 산꼭대기에서 금동불상과 수백개의 토우가 출토되기도 했다. 유서깊은 국사봉과 호룡곡산을 오르면 동쪽 바다 건너로 인천시가지가 보인다. 북쪽으로는 쉴사이 없이 뜨고 내리는 인천신공항을 드나드는 비행기들을 볼 수 있다. 해무(海霧)가 끼지 않는 맑은 날이면 북녘 땅 황해도 연백평야와 더 멀리 장산곶까지 보인다고 한다. 산치고 높이가 이백 몇미터라면 동네 뒷산 정도로 알지만 섬 산들은 해발 0m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데는 에누리가 없다. 육지의 400m-500m쯤 되는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이 든다. 국사봉이나 호룡곡산도 마찬가지다. 야트막한 산이라고 깔보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게다가 산의 생김새가 평범한 육산이 아니라 아기자기한 돌산이다. 바위틈을 비집고 오르내리는 산길과 중간 중간에 늘어선 너럭바위, 마당바위, 부처바위, 호랑
아래 호주제에 관한 글을 읽고 독자분이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참고로 아래 편지를 보낸 독자분은 미국에 거주하는 여성으로 연세가 드신분입니다. 글을 일부 편집해서 실었습니다. --------------아래----------------- 이상흔 기자에게 오랫만입 니다. 호주제에 관한 글 잘 읽었읍니다. 요즈음 호주제 문제로 시끄럽고, 마침 추석이라 각 언론에서 명절 때면 시댁가서 제상 준비 하면서 노예처럼 일하기 싫다면서 목소리 드높이는 며느리들의 글로 넘쳐납니다. 나의 상식으로는 어안이 벙벙한 이야기입니다. 호주제 문제로 한국이 하도 시끄럽기에 인터넷을 뒤져서 관련 글을 자세히 읽어 보았으나 호주제에 대해 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호주제를 꼭 폐지 하여야만 하는 나쁜 제도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읍니다. 만약 법적으로 여자에게 불이익이 있다면 고쳐 나가면 호주제 자체를 폐지하여 생기는 복잡함과 경제적 손실을 막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모든 제도나 법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요즘 여권 운동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워낙 드세다 보니 국회의원이나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견과 자신의 소신이 다른 것이 있어도 표 떨어 질까 봐 숨 죽이고 있는 현실을 보는 것도 웃기는 일입니다. 호주제가 완전 폐지되고 성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반 작용으로 보학(족보학)이 성하여 가족의 승계를 알려주는 족보 만드는 일이 더 극성을 부리리라 짐작됩니다. 역사란 것이 당장은 생산적이지 못한 듯 보이지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라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역사 또한 중요한 게 아닐까요? 호주제 폐지와 함께 한 가족의 역사가 거의 말살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어려서 사랑방에 할아버지 심부름하며 익히 들어온 우리집의 내력과 외갓집 이야기, 진외가, 외외가 그 윗대 이야기들, 대추나무에 연 걸리 듯한 안동, 예천, 봉화, 영양 등 경북 북부 지방 양반가의 혼
大選후 다시 찾은 李弘圭옹의 자택 지난 9월16일 기자는 知人과 함께 서울 종로구 명륜동 2가 75번지에 있는 李弘圭(이홍규)옹 자택을 찾았습니다. 李옹은 한나라당 李會昌(이회창) 前 총재의 부친으로 작년 10월31일 향년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법조계에서는 剛直(강직)한 그를 「대쪽 검사」 또는 「척결 검사」라고 불렀지요. 기자는 李옹이 세상을 뜨기 6개월전인 작년 5월2일 李弘圭옹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마 李옹이 만난 최후의 기자인 셈이지요. 李옹이 작고한 뒤 지금은 李 전 총재의 모친인 金四純(김사순ㆍ92) 여사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균관大 앞에서 청과물상 젊은이에게 『李弘圭옹 댁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길 건너 골목 두번째 집』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선거철인 작년 연말과는 달리 요즘 李옹댁을 찾는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배 한 상자를 포장해 젊은이를 앞세우고 대문 초인종을 누르니 일하는 아주머니가 얼른 나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오후 햇살이 한가로이 마당에 내려와 앉았고, 바둑이가 입구에서 영문을 모른 채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百壽(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李옹은 작년 봄까지 건강하기가 청년 못지 않아 철봉뿐 아니라, 팔굽혀 펴기를 100번씩 할 정도로 건강했었다고 합니다. 李옹의 운동기구인 철봉이 주인을 잃은 채 마당 한쪽에 덩그러니 서 있더군요. 마루 한켠에는 「仲秋佳節 한나라당 대변인 朴振」이라고 쓴 洋蘭(양란) 화분이 놓여있었습니다. 작년에 이곳을 찾았을 때, 입구에서 기자를 반겨주던 金四純 여사는 남편 李弘圭옹이 누웠던 침대에서 누운 채 방문객을 맞았습니다. 지난번 침대에서 차가운 손을 내밀었던 李옹은 어느새 벽면 액자에서 일행에게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日帝시대에 지어진 허름한 한옥집에 낡은 가구들은 집주인의 「淸貧(청빈)」을 無言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金四純 여사의 건강은 일 년전과는 달리 病色(병색)이 완연했습니다. 정감있는 낮은 목소리로 자갈자갈 이야
[추적] 史上 최대의 戰力증강사업 - 岐路에 선 육군 헬기 사업-자체개발이냐 수입이냐 개발·획득에 13조원, 戰力공백 7년을 감수하고도 다목적 헬기 자체개발을 추진하려는 까닭은? ● 국산화 명분下에서 거대한 낭비가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많다 ● 헬기수명 통상 30년… 한국군 공격헬기 코브라의 40%가 20년 이상 운행 ● 헬기 개발 선진국도 개발기간 20년 이상, 개발비용만 10조원이 넘어 ● 기획예산처, KMH 사업 KDI에 타당성 검토 의뢰… 「500대 이상 생산해야 경제성 있다」 ● 코브라 공격헬기는 야간엔 「장님」… 야간 및 악천후 작전 가능한 공격헬기 도입 시급 ● 反美와 햇볕에 눌린 공격용 헬기 도입사업(AH-X)… 2006년 주한미군의 「특수부대 해상침투 저지」임무 인수에 차질 우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建軍 이래 최대의 전력증강 사업 육군의 다목적 헬기(KMHㆍKorea Multi-purpose Helicopter) 사업 추진에 대해 군 안팎에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 육군 헬기사업은 KMH와 차기 공격용 헬기(AH-XㆍAttack Helicopter, X는 기종 미정을 뜻함) 사업 중 KMH 쪽으로 가닥이 잡혀 가는 듯한 양상이었으나 예산 당국에 의해 제동이 걸리고 있다. AH-X 사업은 現 코브라 헬기의 노후화와 야간 작전 능력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대형 공격 헬기를 해외에서 도입하기 위한 사업이다. KMH 사업은 現 500MD와 UH-1H의 노후화에 따른 후속 헬기사업으로 국내 기술로 헬기를 개발하자는 사업이다. KMH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업 타당성 검토 보고서가 나온 뒤 추진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국방부의 공식입장이지만, 이미 내부적으로는 추진 쪽으로 방향을 잡고 세부 추진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KMH는 사업규모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항공산업 발전과 육군 전력보강 및 증강에 매우 중요한 국
『八尾島 등대를 먼저 점령, 10만 병력과 함정 261척을 인천으로 인도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6人의 특공대 1950년 9월15일, 한국전쟁 승리의 轉機(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세계 戰史(전사)에 길이 남을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상륙작전도 지름 2m, 높이 7.9m의 등대 불빛 하나에 의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50년 8월 말, 인민군은 거의 모든 전투역량을 부산 교두보 확보를 위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인민군을 한꺼번에 포위ㆍ격멸하기 위해서는 서울의 敵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이 필요하다고 결심하고, 작전명 「블루 하트(Blue Heart)」를 실행에 옮긴다. 맥아더의 美 극동군 사령부는 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민군 수중에 있던 八尾島(팔미도) 등대를 탈환, 點燈(점등)해야만 했다. 인천지역은 潮水(조수), 水路(수로), 暗礁(암초) 등 해안조건에서 상륙작전에 많은 취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등대의 안내 없이는 야간 상륙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팔미도는 상륙작전에 나설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유엔군 함정 261척이 통과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沙洲(사주)에 의해 연결된 두 개의 섬이 마치 八(여덟 팔) 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 같아 八尾島(팔미도)라 불리는 이 섬은 인천항에서 13.5km 남쪽에 떠 있으며, 면적은 0.076k㎡, 섬의 최고점은 58m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특공대를 조직해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에 나서기로 했다. 이 작전에는 KLO부대(Korea Liaison Officeㆍ美 극동사령부 한국 연락사무소)가 투입됐다. KLO부대는 1948년 미국이 對北 정보수집 등을 목표로 만든 특수부대로 통상 「켈로부대」라 불렸다. 켈로부대는 고트, 선, 위스키 등
저는 경주 이씨이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외갓집에 있는 청주 한씨 족보를 보면 됩니다. 외할머니가 어디서 왔는지도 족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가계는 부계를 중심으로 수백년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계가 어디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족보를 따라가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몇년 전 경북 안동에서 수백년 전의 미이라가 발견되었습니다. 미이라와 함께 그 미이라의 부인이 쓴 한글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소개하는 한 TV 프로그램 제작진은 무덤의 주인뿐 아니라 그 부인의 신분까지 찾아냈고, 심지어 그 부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까지 찾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족보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 얼마 전에는 경기도 파주에서 400여 년 전에 아기를 낳다가 숨진 여인의 미이라가 발견됐습니다. 학자들은 이 여자가 문정왕후의 종손녀라고 발표했습니다. 파평 윤씨 일가의 족보가 있었기 때문에 이 여자의 신분을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트남 왕자가 고려 망명하여 화산 이씨 시조가 되었습니다. 후손들이 그들의 조상이 베트남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족보와 성씨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성동본에 속하기만하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이름 석자만 가지고 그 사람이 자기 삼촌 뻘인지 형제 뻘인지 조카뻘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 가면 어떤 하나의 성씨가 많이 몰려 사는 경우가 많은데 그 집안의 족보를 몇 장만 넘겨보면 몇 대 조상 누구가 언제 어디에서 살다 그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족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족보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가계 기록 시스템입니다. 미국인들은 부계성을 따릅니다. 여자는 시집가는 동시에 성이 사라지고 남편의 성씨를 따릅니다. 저는 일년 가까이 미국에 머무르면서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
휴가를 내어 시골에 며칠 다녀왔습니다. 그 동안 우중충 하던 날씨가 개이고 모처럼 무더위 속에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비록 이 삼일 정도의 무더위였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습니다. 한국의 무더위는 원래 유명합니다. 더위가 절정에 이르면 열흘에서 보름 간 열대야가 이어지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이리저리 뒤척이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여름 날씨에 비한다면 금년은 그야말로 여름 같지 않게 지나갔습니다. 7월 한 달과 8월 들어서도 계속 비가 왔기 때문에 무더위를 느낄 사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1993년경 여름에 냉해가 찾아와 농작물에 피해를 준 이래 가장 덮지 않은 여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는 비가 전국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일부 지역에만 비가 몰아쳐 내립니다. 특히 올해 경우, 같은 서울인데도 강남은 비가 오고 강북은 비가 오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 했습니다. 작년에도 장마철에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더니 장마가 끝나자마자 호우가 내려 강원도 일대와 경북 김천 등지에 물난리가 났습니다. 재작년에는 임진강 유역이 물에 잠겼고, 그 전전해는 지리산 유역, 또 몇 년 전에는 경북 상주시가 물에 폭삭 잠기기도 했습니다. 1995년경에는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의 수많은 군막사가 산사태에 매몰돼 많은 군인들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최근 이런 물난리는 예전의 태풍이나 장마철 때 생긴 물난리와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당연히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습니다. 예전에 물난리만 났다하면 『남미 어디 앞바다에 기온이 예전 같지 않아 발생하는 「엘리뇨 현상」때문』이라고 말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시 일기예보가 맞지 않는 날이면 친구들 사이에 『또 엘리뇨 핑계 되면 되겠네』하는 농담을 자주 했었습니다. 휴가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오기 전 모든 방송 뉴스가 서울 지방에 비가 많이 내렸다는 것을 톱뉴스로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7월과 8월 내내 남부지
서울의 경복궁, 경운궁(덕수궁), 창덕궁의 정문 등지에서 매일 수문장 교대식이라는 것을 합니다. 더운 날 임무에 열중하는 군인 아저씨나, 이런 아이디어를 낸 서울市와 기타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힘 빠지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한마디로 아무 감흥없는 교대식입니다. 경운궁의 수문장 교대식의 경우, 교대 시간이 되면 스무 명 남짓의 군졸과 이를 이끌고 있는 무관이 북소리를 울리며 등장합니다. 그 다음 이들은 대형 북소리에 따라 서로 암호를 확인하고 궁궐의 열쇠를 인수하는 등 교대 의식을 진행합니다. 교대를 하는 군졸의 행동은 마치 요즘 군인들의 制式(제식) 훈련을 보듯이 절도가 넘칩니다. 조선시대 복장에 현대 군인들의 제식 동작을 섞어 놓으니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아 어색합니다. 군졸이 든 무기와 복장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합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끝에 은박지를 두른 곤봉 막대기와 칼날이 몽땅해서 전혀 위엄이 없는 가짜 청룡도 몇 자루, 守將(수장)이라는 글자가 적힌 대형 깃발 두어 개가 전부입니다. 이런 조잡한 무기로 왕궁을 어떻게 지켰을 지 의문이 듭니다. 군졸이 신고 있는 고무 장화는 낡아서 뒤축이 접히고 기울여져 발에서 벗겨질 듯 위태하고, 걸을 때 질질 끌립니다. 무관 복장을 한 사람은 활과 칼을 가지고 있으나 칼을 등뒤에 둘러매고 교대식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무관은 칼을 겨드랑이 아래 부분에 찼습니다. 교대의식 자체도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너무 작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냄새가 납니다. 어차피 고증이 어렵고, 관광객에게 단순히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주 목적이라면 차라리 멋있는 갑옷을 입고, 위엄 있는 무기를 든 군졸들을 늘여 세워 놓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경운궁에서 만큼이라도 舊한국의 신식군대 제복과 무기를 갖춘 군사를 함께 배치하여 이 궁궐이 가진 역사성도 살리면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경운궁은 舊한국의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
아래 독자 편지는 제가 아래에 쓴 '물귀신을 보다'란 글을 읽고 어느 독자분이 재미있는 이메일을 보내와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글을 약간 편집해서 올립니다.^^; --------------------아래---------------------- 안녕하십니까? 월간조선을 재미있게 읽고 있는 63년생의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상흔 기자 기자클럽에 있는 '물귀신을 보다'란 이야기 중 닭이 10년 묵으면 구렁이가 된다는 내용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일반 닭은 힘들고, 닭중에 비둘닭은 10년 묵으면 구렁이가 된다는 얘기를 스승님으로 부터들은 기억이 나는군요. 뿐만 아니라 개도 병들어 죽지 않고 오래 묵으면 구렁이가 된다네요! 나아가, 사람도 積惡(적악)을 엄청하면 늙어서 구렁이로 변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하시더군요. 내친 김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한 마디 더 하자면, 여우가 200년 이상 묵으면 둔갑하여 장난친다는데 계룡산에 한 마리가 있다네요. 이런 여우가 죽어서 환도인생하면 여자로 태어나서, 나라를 혼탁하게 만드는데 조선시대 정난정,김개시 등이 여우의 후신이라는군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비둘닭이 구렁이가 되고 그 구렁이가 수백년에서 천년이상 살면 어떻게 될까요? 500년 이상 살면 이무기라 부를 수 있겠지요. 이무기 자체로도 변화막측하다고 합니다.폭우를 내리게하는가 하면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 작은 못은 순식간에 용암탕의 온도로 올려버린다고 합니다. 이놈들은 인간에 대한 殺氣(살기)를 키우며 수도하는 것이랍니다.최종에는 인간으로 짠~ 하고 태어나는데 스탈린- 메기1000년, 김일성, 후세인, 김정일,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이상 구렁이 800~1000년 등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 흉물들은 환경만 마련되면, 인간 죽이는데 전력투구하며 자신은 최고의 호사를 추구하게 되는데 다행이 人衆勝天(인중승천)이라 전.노.김 같은 흉물이 큰 힘(?)을 발휘
요도號(일본항공) 납치사건 秘錄 공개 - 공군 관제사 채희석씨 『평양으로 날던 요도號를 북한 상공에서 金浦로 빼돌렸다』 赤軍派가 납치한 요도號(일본항공)를 金浦공항으로 「납치」한 공군 관제사 蔡錫씨, 33년 만의 秘錄 공개 ●『중앙정보부장이란 사람이 전화로 김포유인 지시』 ●『조종사에게 평양공항이라고 속였다. 조종사는 지시를 잘 따랐다』 ●『해주 상공 지날 때 북한軍이 고사포 발사』 ● 金浦에서 승객 전원 풀려나다 ● 金浦 착륙 유도 지시자는 아직 不明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납치당한 요도號를 한국이 다시 납치」 이상이 인천공항이 2002년 발간한 「세계 항공 보안 사건 사례집」에 나오는 내용이다. 우리 정부가 갖고 있는 「요도號 사건」에 대한 공식기록인 셈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기장은 범인들을 속이고 서울 김포공항에 착륙했다」는 대목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요도號 사건이 발생한 지 33년이 지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조차도 「왜 평양으로 가던 비행기가 갑자기 김포에 내리게 됐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30일, 기자는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요도號 사건」 당시 자신이 요도號를 관제해 김포공항에 내리게 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관제사를 만났다. 蔡凞錫(채희석ㆍ63) 前 공군 제7항로보안단 소속 관제사. 蔡씨는 33년이 지난 당시의 일들에 대해 『국가의 체모가 손상될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항공관제사로서 관제범위인 40마일 반경을 넘어선 구역에 들어가 요도號를 관제한 것은 분명한 越權(월권)이고 항공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마치 의사가 자기 전공분야가 아닌 환자를 받아 수술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왜냐하면 조종사에게 해당지역의 정확한 기상정보와 고도, 활주로 정보를 줄 수
1972년 吳源哲 경제수석이 작성, 보고한 核무기 개발의 마스터 플랜; 『1980년대 초, 高純度 플루토늄彈을 완성한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플루토늄彈을 건의 1970년대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 아래 진행된 한국 정부의 核무기 개발 계획이 최근 문서로 확인됐다. 이 核개발 비밀문서는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1972년 9월8일 吳源哲(오원철ㆍ74) 당시 대통령 제2 경제수석(중화학 공업 및 방위산업 담당)이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비밀 보고서는 그간 공공연한 비밀로만 알려져 온 朴대통령의 核개발 계획이 우리 국내 문서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史料的(사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표지를 포함, A4용지 아홉 장 분량인 「보고번호 제48호」의 이 보고서는 「2급 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보고서의 제목은 「원자 核연료 개발 계획」이다. 보고서 첫 페이지에는 비서실장과 대통령의 결재란, 보고관인 吳源哲 수석의 이름, 그리고 職印(직인) 등이 찍혀 있고, 「원자 核연료 사업 계획을 별첨과 같이 작성」, 「별첨 계획의 결론에 의거, 원자핵 연료 사업을 추진할 것을 건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보고서의 전체적인 서술은 ▲核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核무기의 비교(도표) ▲高純度(고순도) 플루토늄 생산과정(그림) ▲우리나라의 核물질 보유를 위한 개발 방향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 방안 비교(도표) ▲결론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을 위하여 개발하여야 할 核연료 사이클(그림) 순으로 돼 있다. 첫 페이지의 제목 「원자 핵원료 개발 계획」과는 달리, 두 번째 장부터는 「核무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 보고서의 둘째 장부터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核무기의 종류로 「核분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우라늄 235폭탄, 플루토늄 239폭탄)과 「核융합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수소폭탄) 중 어떤 것을 선택할까 하는 문제를
우리 아버지는 옛날 분 치고는 그래도 상당히 합리적인 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를 지내시면서 꼭 한마디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은 뒤에 이러는 게 뭔 소용있나...귀신이 어데 있다고... 죽으면 그만이지』 물론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실 겁니다. 어쨌든 아버지는 귀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크게 인정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귀신중에 꼭 한가지는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십니다. 바로 물귀신입니다. 하루는 저는 물귀신이 없다고 하고 아버지는 있다고 하다가 상황이 험악해 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도 물귀신이 있다고 우기시기에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아부지, 진짜로 물귀신 보셨니껴?』(경북 북부지방은 의문형이 「껴」로 끝납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지시더니, 거의 밥상을 내리칠 태세로, 『이놈의 자식이, 저(자기) 아바이(아버지)가 있다카만 있는 기지... 천하에 못된 놈 같으니라고』 아버지가 물귀신 때문에 그렇게 화내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믿는 또 하나 비 과학적인 것이 있습니다. 닭이 10년 묵으면 구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귀신은 제가 양보할 수 있어도, 이 닭이 구렁이 된다는 것은 저도 도저히 승복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께서 물귀신은 직접 보셨다했지만, 닭이 구렁이가 되는 것은 직접 보시지는 못한 듯 합니다. 아버지는 『왜정 때 닭이 구렁이 되는 것을 너 할배도 봤고 동네 노인도 여럿봤다』는 것을 자꾸 강조합니다. 아버지가 동네 노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10년을 묵은 닭은 구렁이가 되기위해 목을 땅속에 파묻고 버둥댄다는 것입니다. 그때 동네 노인 하나가 닭을 쑥 잡아 빼니 벌써 목과 머리는 뱀이 되었고 몸통은 아직 닭인 채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도 승복을 하지 않고 꼬치꼬치 따져들자 옆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가 한마디 하십니다. 『어째 자(저 아이)는 저 아바이 말을 저래
「돌팔매 싸움」이라 불리는 「투석전」은 우리 민속놀이 중에 하나 였습니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많이 행해 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국세시기 등에도 투석전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고, 구한말 외국 선교사나 여행가들이 한국 풍습을 기록한 책에도 자세하게 나옵니다.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투석전 중에 다치는 것은 예사이고 이중에 몇 명은 실제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투석전을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예사로 하고 자랐습니다. 제가 자란 시골 동네는 행정구역이 안동(풍천)과 예천으로 나누어 지는 곳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우리 마을의 끝자락에 있는 두어 채의 집은 행정 구역상 안동군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을에서 약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을 「건넛마을」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은 우리가 건넛마을이라고 부르는 이 마을 이름도 우리 마을과 같은 이름을 씁니다. 건넛마을 친구들은 우리를 보고 건넛마을이라고 부릅니다. 행정구역이 다르다 보니 두 동네 아이들은 다른 학교에 다녔고, 어려서부터 서로 얼굴 볼 일이 없이 자랐습니다. 언제부터 우리 마을아이들과 건넛마을 아이들이 싸워 왔는지 그 내력은 자세히 모르나 그 역사는 꽤 깊어 보입니다. 우리 또래 아이들을 비롯, 그 위에 형들, 그 위에 삼촌들도 마찬가지로 싸우면서 자랐습니다. 건넛마을과 우리마을 사이에는 나지막한 야산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산은 두 동네 아이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DMZ같은 마을 경계선이었습니다. 어느 동네 아이들이건 이 야산에서 놀기를 결정한 날은 상대편 아이들을 충분히 자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 산에서 아이들이 놀게 되면 그 시끄러운 소리가 양 동네에 울려 퍼집니다. 만약 건넛마을 아이들이 먼저 이 야산을 차지하고 놀게 되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곳은 서로 자기 동네 놀이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편 동네 아이들이 노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어느 한편이 힘이 없
정치와 돈. 동전 양면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상가분양 사기사건에서 비롯된 「굿모닝게이트」가 정치권을 뿌리 채 흔들고 있는 것도 바로 「돈」 때문입니다. 현재 굿모닝시티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시인한 정치인은 민주당 鄭大哲(정대철) 대표와 일부 의원들뿐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대가성이 없는 합법적인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의혹이 날로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굿모닝시티 계약자 협의회」측은 돈을 받았다는 40여명의 정치인ㆍ검찰ㆍ경찰ㆍ언론인ㆍ연예인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청와대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盧武鉉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與野 모두 대선자금을 공개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정치와 돈」의 적나라한 실상은 선거철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민주당측은 지난 大選에서 「희망돼지」를 분양했습니다. 선거 직후 盧武鉉 당선자는 물론 민주당은 『깨끗한 돈을 모아, 깨끗한 선거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돼지저금통으로 들어온 돈은 당초 70여 억원이라던 것이 4억원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상수 사무총장이 기업으로부터 수십 억원을 받았다고 공개했지만 말을 여러 번 바꿔, 듣는 사람조차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과연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지난 대선 당시 돈줄은 한나라당에 더 많이 몰렸다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 시각입니다. 한나라당은 그 돈을 다 쓰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한나라당의 경우는 대선잔금이 더 문제일 것 같습니다. 大選 직후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런 소문이 나 돌았습니다. 한 관계자의 말입니다. 『大選(12월19일) 전 날까지 돈이 각 지구당에 전달된 것으로 안다. 大選 직전 중앙당은 전국 각 시도지부에 돈을 「현금」으로 전달하되, 대면접촉 방식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쪽(중앙당) 관계자가 차에 현금을 싣고 A고속도로의 어느 휴게소에서 시도지부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사항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지방에서는 그
저는 미국 독립기념일이 들어있던 지난 6월30일부터 7월5일까지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 다녀왔습니다. 국제라이온스 세계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가뜩이나 절간 같은 도시에 독립기념일이 찾아오니까 더 심심하더군요. 올해는 미국 경기도 별로 안좋은지 불꽃놀이(fire works of display)도 안하더군요. 덴버에서 차로 한 시간 이상 달리면 콜로라도 스프링스가 나옵니다. 이곳에는 미 공군사관학교(Air Force Academy)가 있습니다. 1954년도에 설립된 사관학교로 미국의 하늘을 책임질 공군 사관생도를 양성하는 곳이죠. academy drive를 거쳐 공군박물관, 공사의 대표적 건물인 뾰족 첨탑의 커댓채플(Cadet Chapel)을 둘러보게 된다니 기분이 설레더군요. 그러나 제가 탄 전세버스는 이곳을 멀찌감치서 바라보고 그냥 지나쳐버렸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이 독립기념일 전날(7월3일)로서, 미국이 테러에 대비해 댐이나 군사시설, 주요 국가기관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워싱턴과 함께 미국전역에 세개뿐인 조폐국이 있는 덴버의 미합중국조폐국(U.S. Mint)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 가까운 후버댐도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 없답니다. 함께 한 일행 중 비교적 미국정보에 정통한(?) 사람이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최근 아프리카 지역에서 격납고에 넣어둔 점보기 3대가 아랍 테러범들에게 탈취됐다고요. 미국 정부는 이들 테러범들이 이 여객기로 독립기념일을 전후로 테러를 가하려는 것을 감청했다는 겁니다. 아프리카에서 대서양만 직선으로 건너면 바로 워싱턴, 뉴욕 아닙니까. 미국 언론에도 그런 보도가 있었다고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럴싸한 이야기였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도 유나이티드항공을 타고 왔는데, 혹시 아랍사람들이 이 비행기도 테러하는 게 아니냐고 해서 웃었습니다. 오랜만에 독자여러분께 싱거운 이야기 한마디 해보았습니다.*
『월간조선이죠? 납북자 가족인데 아버지 이름이 있는지 확인 좀 하고 싶습니다』 7월15일 오전부터 月刊朝鮮의 업무가 사실상 마비되고 있습니다. 월간조선이 출간한 「피살자ㆍ피랍치자 명부」 관련 기사가 나간 후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들 때문이었습니다. 16일부터는 수십 명의 납북ㆍ피살자 가족들이 월간조선 사무실을 직접 찾아 슬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기자는 그들 중 한 분을 만나 자세한 사연을 들었습니다. 올해 67세인 나왕식(羅汪植)씨. 사무실 복도에서 우연히 만난 그는 기자에게 『월간조선에서 피살자 명부가 나왔다는 데 어디로 가야됩니까』라고 물어왔습니다. 기자는 나씨를 월간조선 출판부로 안내했습니다. 기자는 나씨로부터 눈물 겨운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순간 기자는 피가 꺼꾸로 솟아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분의 얘기는 대충 이랬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6ㆍ25 때 북의 괴뢰군에 의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몽둥이에 맞아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전쟁 당시 우리 가족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에 살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터진 직후였던 1950년 7월경 경기도 화성을 점령했던 괴로군은 우리 동네 마을 사람들 중에 이승만을 지지한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후 우익청년단체였던 「대한청년단」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괴뢰군은 저의 아버지의 경력을 알고 곧바로 잡아갔습니다. 괴뢰군은 아버지를 포함해 일부 마을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분류한 후 동네 인근에 있는 지하 방공호에 모조리 잡아다 쳐 넣었습니다. 괴로군은 이들 「반동분자」들을 한 명씩 불러내 고문과 구타 등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습니다. 아버지도 괴로군에 의해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괴로군들의 몽둥이에 맞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나씨의 사연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씨 가족은 「몽둥이에 맞아 죽은」 부친의 시신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1950년 7
간첩 잡기 위해 「녹슨 칼」 새로 가는 국정원 高泳耉(고영구) 체제의 국가정보원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高泳耉-徐東晩(기조실장) 체제 출범 당시 제기됐던 親北ㆍ思想的 편향성에 대한 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겁니다(월간조선 6월호는 이 문제에 대한 추적기사를 통해 우려와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高원장은 취임 이후 대대적 내부감사를 실시하는 등 집안단속을 강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직원을 대상으로 국정원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간첩 잡는 데 적극 나서라』고 독려했다고 합니다. 국정원 관계자의 말입니다. 『高泳耉 원장이 요즘 상당히 독이 올라 있습니다. 그는 결코 진보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하다가 그런 쪽에 발을 들여 놨는 지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 모습은 완전히 오른 쪽입니다. 그가 국정원장으로 있는 이상 그 자리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요즘 국정원 수사국 소속 직원들은 「일 할 맛이 난다」고 합니다. 그 쪽 일이 간첩 잡는 것 아닙니까. 林東源(임동원), 辛建(신건) 체제에서는 위축돼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高泳耉 원장에 대해 좋게 말하면 조직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쉽게 색깔을 바꾸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옳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국회 정보위 소속 한 의원도 高泳耉 원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 사람 요즘 완전히 극우가 된 것 같아요. 「국정원에 들어가 보니 (북한 및 남북관계의) 실상이 어떠냐」고 물어보니 「허허」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더군요. 국정원이라는 곳이 그런 곳인가 봅니다. 청와대나 다른 부처에 있는 책임자들도 국정원에서 근무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高泳耉 원장은 국회 정보위에서 「KAL機 폭파 사건이 한국정부의 음모에서 비롯됐다」는 내용의 책을 쓴 著者에 대해서도 『利敵性(이적성)을 검토, 필요하다면 조사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北은 지난 90년 초반 무렵 초기 수준의 핵폭탄 3~4개 정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최근
6월28일 토요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어느 한정식집. 남경필, 원희룡, 이성헌, 권오을, 김성식, 정태근, 고진화, 박종윤, 권영진 그리고 김부겸, 김영춘 등 한나라당 미래연대 소속 회원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탈당파들은 탈당이유를, 대부분의 잔류 회원들은 마지막 설득 작업을 했다. 저녁 식사 자리였지만 술이 밥을 대신했다. 소주, 맥주 그리고 백세주. 술 병이 그들의 식탁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한나라당의 개혁을 위해 우리는 맹세하지 않았나? 미래연대를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닌가? 그런데 왜 나가려고 하는가. 『한나라당에는 희망이 없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나간다』 -희망이 뭔가. 『지금 한국정치는 지역정치에 묶여 있다.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정치를 하고 싶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한나라당도 이제 새 지도부가 탄생했으니 두고 보자. 그리고 개혁을 위해 여기서 같이 일을 더 해보자. 만약 그것이 안되면 내년 총선 이후에 같이 나가자. 지금 나가고자 하는 것은 盧武鉉 정권 이후 나타난 새로운 「권력」의 힘을 빌어 뭔가를 해보겠다는 것 아닌가. 결국 盧武鉉 정권과 같이 하겠다는 것 뿐이다. 『위험도 있다. 내년 총선에서 떨어질 각오도 돼 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왜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가. 한나라당도 개혁노선을 걷고자 하고 있다. 초기 같이 맹세했던 우리의 다짐을 위해 같이 노력하자. 『...』 이들은 식탁 위에 놓여진 술 잔을 하나 둘 비웠다. 일부 회원은 취기가 올랐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허탈감, 아쉬움 그리고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다. 『이대로 탈당하면 우리는 무슨 명분으로 내년에 출마를 하겠는가. 남아 있는 사람들도 생각을 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안된다면 내년 총선 이후 같이 떠나자』 김성식 서울 관악갑지구당 위원장은 눈물로 호소했다. 탈당을 결심한 김부겸 의원은
1990년, 盧泰愚 정부 시절 인신매매가 번지고, 무역수지는 적자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의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조폭과의 전쟁을 하고, 경제를 살리자는 캠페인도 일어 났습니다. 내각은 경제를 살릴 방편을 의논한다며 연일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그러더니 내 놓은 결론이 「노는 날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글날과 국군의 날은 다음해인 1991년부터 국정 공휴일에서 제외됐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한글날 만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며 그 부당성을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글날은 잊혀진 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책 결정자들은 국경일을 포함, 한글날을 단순히 하루 「노는 날」로 인식했던 모양입니다. 한글날은 1970년 공휴일로 지정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현실은 「노는 날」을 걱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보리죽도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달러 한푼 벌기 위해 우리의 누님들의 머리카락까지 잘라서 내다 팔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배고픈 시절에도 조상들은 다 깊은 뜻이 있어서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놓고 특별하게 기념을 했던 것입니다.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은 많은 석학들이 이미 충분히 언급해 놓았습니다. 한글은 문자역사상 만든 날짜와 만든 사람, 만든 목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제자 원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일점 일획도 소리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아 인류가 만든 문자 중 경제성 면에서 단연 앞선 문자입니다. 한글은 소리 생성원리만 잘 연구하면 앞으로도 수많은 소리를 더 만들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입니다. 한글은 天地人의 조화를 표현하여 문자에 철학을 담고 있는 유일의 문자입니다. 공기가 소중함을 잘 모르듯이 우리는 한글이 없이 단 하루도 우리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보화의 강국 대열에 든 것도 한글이란 훌륭한
요사이 시골에 가면 생태계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논둑 길을 걷노라면 사라 졌던 메뚜기, 개구리가 눈에 제법 많이 보입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사라진 솔개, 독수리, 부엉이, 소쩍새 같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었던 날짐승들은 좀처럼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메뚜기와 잠자리 같은 곤충이 많아지면 개구리나 들쥐가 많아지고, 다시 개구리나 들쥐를 잡아 먹는 뱀이나 족제비들이 증가합니다. 뱀, 들쥐, 족제비가 늘어나면 부엉이, 소쩍새, 독수리가 나와야 자연의 이치에 맞는데 유독 이들 날짐승만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메뚜기와 개구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어릴 때 나지막한 야산이나 논둑 길을 걸으면 메뚜기 떼가 좌우로 파도 치듯이 날아 다녔습니다. 풀무치는 「푸르르」하고 날았기 때문에 「푸랭이」, 방아깨비 수놈은 「때때때」하고 날았기 때문에 「때때미」, 눈이 없고 맛없게 생긴 놈은 「문둥이 메뚜기」라고 불렀습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도랑이 있는 둑길을 걸어 갈 때 미쳐 방향을 잡지 못한 개구리들이 발 뒤축에 와서 부딪히곤 했습니다. 흰색계통 개구리는 백개구리, 청색계통 개구리는 청개구리, 손바닥 만큼 커서 두 손으로 잡을 만큼 힘이 센 개구리는 떡개구리, 풀잎이나 나무에 착 달라 붙는 개구리는 철봉개구리(흔히 청개구리라고 하는 이놈은 먹으면 큰 일 남), 연못에 살면서 등이 우둘투둘 징그러운 놈은 오똘(옻)개구리, 배때기가 알록달록 한 놈은 무당개구리라고 불렀습니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대 놓은 논은 올챙이로 논 바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메뚜기 개구리가 많으니 그 위에 포식자들은 먹이 걱정을 하지 않고 번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많던 메뚜기와 개구리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1980년 중반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농약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논 저 논
特檢이 未完의 수사로 끝났습니다. 對北송금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밝히되 사법처리는 최소한으로 하겠다던 特檢의 다짐이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물거품이 돼 버렸습니다. 宋斗煥 特檢도 아쉬움을 피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特檢은 아쉬움이 많은 수사였습니다. 特檢은 1억 달러가 頂上회담 대가로, 4억 달러는 경협자금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4억 달러가 국정원을 통해 비밀리에 전달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朴智元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150억원은 또 뭡니까? 그리고 궁금한 게 또 하나 있습니다. 特檢은 정상회담이 하루 연기된 것은 「경호 上의 이유」였다고 밝혔습니다. 特檢이 이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은 전적으로 林東源 前 국정원장의 진술에만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난 달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2000년 6월 남북 頂上회담 당시 「대통령의 안전과 경호」를 위해 우리측 선발대로 평양에 먼저 가 있던 한 고위인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인사는 頂上회담 전체의 일정은 물론 대통령의 움직임까지 자세히 알아야 했던 인물입니다. 이 인사는 회담이 연기된다는 사실을 발표 전까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6월12일부터 회담이 시작될 거라 알고 있던 이 인사는 회담이 하루 연기된다는 사실을 평양 현지에서, 발표에 의해 알았던 것입니다. 대통령의 안전과 경호를 위해 목숨까지 받쳐야 하는 사람으로서 회담이 갑자기 연기된다는 것을 통보 받고서는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회담이 하루 연기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회담일정이 6월12일에서 14일 2박3일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기된다는 사실을 6월11일 발표를 전후해서야 알게 됐습니다』 저는 이 인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林東源 당시 국정원장이 일정 조정을 협의하기 위해 2000년 6월3~4일 양일간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했고 북측 고위층와 이를 협의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습니까?』 『林東源 원장
『2002년 12월 19일 제 16대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그 길었든 시간들 속에 일장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마침표가 또 다른 시작이 될 거라 믿었든 저희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12월 20일 한나라당 제 16대 대통령후보 이회창님은 눈물로서 정계은퇴 선언을 하셨습니다. 항상 무언가의 끝에서면 길었다고 생각했든 기간들이 왜 그리도 짧게 느껴지는지 또 아쉬움은 왜 그리도 많은 지요』(「내 마음 속의 대통령」서문 일부)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李會昌 前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네티즌들의 글이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내 마음 속의 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나올 이 책은 대선 이후 한나라당 홈페이지, 창사랑 홈페이지, 다음 카페 등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 글들이 대부분이다. 이 일을 기획하고 출판까지 담당한 이는 「창사랑(이회창씨 지지자들의 온라인 모임)」의 대구지역 대표였던 정해은씨(57ㆍ개인사업). 정씨는 『李會昌씨가 정계은퇴를 발표하던 12월20일 인터넷에 올려진 글을 읽고 무척 많이 울었던 게 생각난다』면서 『좋은 글들을 컴퓨터 속에 사장시킬 수 없어 책을 만들 생각을 했다』며 출판 배경을 밝혔다. 정씨는 최근 한나라당 일각에서 나오는 「이회창 복귀론」을 의식한 듯 『李會昌씨가 다시 정계 복귀하는 데는 반대한다. 세대가 바뀌고 있는데 한나라당도 변해야 할 것 아닌가』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 『李會昌씨를 좋아 하지만 얼굴 한 번 직접 본 일이 없고, 악수 한 번 한 적도 없다』며 「昌」 복귀세력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정씨는 우선 일차로 2000권 정도를 찍을 예정이다. 출간일자는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6월26일. 그는 전당대회가 열리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앞에서 직접 책을 팔 예정이다. 정씨는 『책을 만드는 데 1000만원 정도 들어갔기 때문에 기본 비용 정도는 벌어야 한다』면서 『수익금은 창사랑 기금으로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책 출간과 관련해 한나라당 대표경선에 나선 한 후보측은 『李會昌 총재께서 「
국가인권위에 북한 人權문제 개선 요구 진정서 제출 ‘북한 人權에 대해 위원장이 모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안다는 사람, 나와보라.’ ‘이라크 국민들의 人權을 운운하면서 한 민족인 북한 주민들의 人權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못하는 인권委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가 말이오. 어서 문을 열라우요.’ 지난 6월 3일, 서울 중구 프레스 센터 국제회의실에서 탈북자들과 북한 人權 문제에 관심을 가진 시민, 대학생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가진 후 이들은 곧바로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7층에 있는 인권상담센터로 몰려갔다. 최근 정부의 유엔인권委의 對北 결의안 표결에 불참과 인권위원장의 발언 등으로 3000여명의 탈북자들은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며 金昌國 위원장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金위원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13층에 있는 金昌國 국가위원회장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金昌國 위원장은 지난 4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북한 人權에 관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계량화된 자료가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 의원들의 거센 질타를 받은 바 있다. 이들은 1) 정부는 북한 人權 문제 개선을 남북회담의 최우선 의제로 채택하라. 2) 인권委는 북한의 人權 문제를 다루는 전담부서를 죽각 구성하라는 등의 진정서를 인권委에 제출했다. 이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은 安赫(안혁. 36. 1992년 입국)씨와 姜哲(강철환. 35. 1992년 입국. 朝鮮日報 기자)씨를 비롯한 김성민(탈북동지회 사무국장), 오수룡, 차성수등 5명은 金昌國 위원장 대신 강명득 인권정책국장과 대회를 나눴다. 강국장은 인권委가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고 한것에 대해 ‘충분한 자료와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국장은 또 ‘최근 인권委에 북한 인권연구팀을 만들었다.’며 오는 6월 5일 시민 및 사회단체와 간
'지방선거 구인난' 국민의힘, 추미애에 맞설 경기도지사 후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