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om Exclusive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동북3省(흑룡강성ㆍ길림성ㆍ요녕성)의 몇몇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북한과 가까운 곳도 다녀왔습니다. 사스(SARSㆍ급성호흡기증후군)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런 걸 무서워해서는 안되겠죠. 취재는 잘 안됐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중요한 걸 깨닫고 왔습니다. 「통일은 되어야 한다」는 大전제 하에 「북한동포를 살리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통일을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어쩌면 북한문제 해결과 통일 달성을 위해서는 美國보다 中國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우리의 또 다른 동포 중국 조선족 그리고 탈북자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등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내용들은 국내 언론을 통해 수 없이 보도돼 왔던 것들입니다. 기자는 그 동안 이런 문제에 대해 『그려러니』하는 생각만 해 왔습니다. 이번 중국 방문이 제게 준 또 하나의 「충격」이 있습니다. 月刊朝鮮 기자로서의 역사적 사명감입니다. 『북한 인민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金正日 독재 타도』라고 주장하고 있는 한 탈북자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는 이 같은 혁명적 사업을 위해 작지만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탈북자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 월간조선 기자라면 정말 열심히 취재하시오. 월간조선은 우리의 糧食(양식)이오. 투쟁양식 말이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조선(북한)에는 분명 김정일 타도 세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월간조선이 생명수와 같은 것이오. 비록 그들이 월간조선을 접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비밀리에 보내려고 하고 있소.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간다는 생각으로 일 하시오』 이 말을 들은 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탈북자는 몇몇 지인들을 통해 월간조선을 몰래 입수해 읽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순간 기자의 머리를 「때리는」 말들이 생각났습니다. 「극우 보수언론, 반개혁적 언론, 반통일 언론...」 솔직히 기자 주변에는 「안티조선」은 아니지만 「親조선」은 아닌 언론계 선배들이
[심층분석] 駐韓美軍 철수時 戰力 대체 비용은 얼마나 들까? 駐韓美軍의 「하드웨어」 대체 비용만 31조원… 정보수집ㆍ인력 등 「소프트웨어」는 대체가 불가능… 방위비 부담은 두 배로 매년 100억 달러 추가 지출… GDP 2% 감소 ● 오산ㆍ수원 기지 등에 배치된 48基의 패트리어트 미사일 요격 미사일의 가치는 2조원 ● 유사시 사용하는 「전쟁 예비탄」은 10만t 이상… 6조원 ● KH-11ㆍ12 첩보위성, U-2機, 통신감청 장비 등 미군의 정보자산 가치는 돈으로 환산 어려워 ● 주한미군, 운용비 年 30억 달러 ● 한국 국방연구원(KIDA)의 「국방경제모형(KODEM-2)」 시뮬레이션 결과, 『현재 주한미군 철수하면 방위비 약 2배 돼야』 ● 再배치 추진될 경우, 야전부대인 2사단이 옮겨갈 수백만 평의 땅을 물색하기 어렵다 ● 제프리 존스 美 상공회의소 명예회장, 『주한미군에 대해 외국 투자자들은 「투자 보호막」으로 인식. 核문제로 인해 외국인 직접투자가 40% 이상 줄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駐韓美軍 가치는 140~260억 달러 駐韓美軍이 완전 철수할 경우, 그 공백을 메우고 駐韓美軍이 있을 때와 같은 수준의 戰力(전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얼마나 될까. 정부는 駐韓美軍이 당장 철수할 경우 자체능력으로 대체戰力을 구축하기 위해선 3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지난해 9월30일 통일부가 국방부로부터 입수, 국회 통일외교통상委 曺雄奎(조웅규·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駐韓美軍이 보유한 장비와 물자에 대한 평가액만도 약 140억~259억 달러(약 16조8000억~31조원)에 달한다. 물론, 주한미군 장비 및 탄약, 정보 수집 수단과 연간 운영유지비 등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계산에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총병력 3만7000여 명
초여름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계를 담당하는 캠프 보니파스를 찾았습니다. 이 부대는 적과 얼굴을 맞대고 경계근무를 하는 까닭에 부대구호도 forever in front of them all!(최전방에서!)이더군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했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굽어보이는 3초소(찰리초소)에서 바라본 북측 기정동 마을의 모습은 부산해 보였습니다. 논에 물을 대고 트랙터로 밭을 가는 모습이 우리네 모습과 큰 차이가 없더군요. 남측 대성동 농부들은 모내기를 진작 끝냈습니다. 반듯한 논에 물이 넘실거렸고, 모들은 벌써 땅내를 맡은 듯 노릿한 색깔이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은 고요하고 새소리만 들렸습니다. 가장 긴장이 흐르는 곳이 가장 평화롭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고 문득 황지우 시인의 시 '아직은 바깥이 있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
몽클라 장군의 백의종군 기자는 최근 지갑종(池甲鍾ㆍ76)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이 연합신문 정치부 차장시절, 몽클라(Monclar) 장군을 인터뷰한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됐다. 인터뷰를 보면 그가 스스로 ‘계급 강등’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나온다. 기사 全文을 소개한다. 중령 계급장 달고 참전한 몽클라 中將 會見談-연합신문 1959년 1월13일자 “韓國軍은 세계 제1급 군대 조속한 시일내 통일 冀願” 한국참전 16개국중 10번째로 벨기에(白耳義)의 방문을 마친 본 기자는 그 인국(隣國)인 佛불란서(佛蘭西)를 열한번째로 방문하게 되었다. 여정도 초조(焦燥)히 이 나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당지시간(當地時間)으로 1월9일 하오 6시 30분이었다. 드골씨 지도하에 제5공화국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어 디디려는 이 불란서공화국은 오랜 역사를 두고 세계의 중심을 이룬 나라이지만 우리의 기억에 무엇보다도 생생한 것은 6.25동란 당시 용약(勇躍) 한국에 파병하여 그 전통적인 무용을 대공전(對共戰)에 바친 사실이다. 동란이 발생한 해인 8월20일에 일부 지상선발대를 파병하고 계속하여 주력부대인 1개독립 보병대대를 갖고 한국동란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3차에 걸쳐 병력의 교대가 있었는데 이 동안 참전한 용사들은 전부가 지원으로 이루어진 장병으로서 구성되었으며, 제1차 파병은 저 유명한 말세이유 항(港)을 출발하여 1950년 11월24일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에서 좋던궂던 기자가 들은 불란서 파병 이면(裏面)의 일단을 소개하건대, 당시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출혈에 지친 나머지 한국파병의 첫 1개 대대가 ‘말세이유’항을 떠나려던 때 일부 시민들이 부두와 대로에서 트럭을 통과 못하게 방해 메모를 하여 1일간 출발을 연기하여 다음날 새벽 일찌기 승선시켰다는 것이다. 이들 일부 시민들의 파병반대 이유는 세금이 오른다는 것이었다 한다. 그러나 현명한 佛蘭西 지도부는 인류정의의 굳은 신념 밑에 기어코 파병은 단행하고야 말았다. 한편 불
해군, 한국전쟁 기간중 국산비행기 제작 성공 우리 비행기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공군이 아닌 해군이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발견됐다. 해군본부가 밝힌 해군일화집에 따르면 1951년 8월 해군이 단독으로 국산비행기 '서해호'를 제작했다고 한다. 우리 국산비행기가 어떤 산고를 겪어 태어났고 어떤 벽에 부딪혀 좌절했는가 하는 기록이 해군일화집 제1장 "초창기편"에 나온다. 참고로 전문을 소개한다. 국산비행기 제작의 효시 1951년 8월 우리 해군이 단독으로 국산비행기 '서해호'를 제작 완성한 것은 조경연 중위와 배종민, 김종건 문관을 비롯하여 그밖에 17명의 공창 기술진의 피땀어린 노고의 결정이었다. 1946년 9월에 우리 해군은 처음으로 300톤급의 쾌속정 '충무공정'을 만들어 세인을 놀라게 한바 있거니와 그후 해군은 또다시 국산 비행기를 만들어 공창 기술진의 기량과 기개를 드높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행기를 만든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서 그대의 애로와 난관이란 참으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비행기 제작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조경연(趙敬衍) 중위였다. 조 중위는 일제부터 항공기 연구에 몰두해 온 청년으로서 그는 모형비행기를 만들기를 몹시 좋아하였다. 그가 해군에 입대 PF기관장으로 있을 무렵이었다. 목포지구에 미군 비행기 1대가 추락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 중위는 미군이 버려둔 추락 비행기의 엔진과 그 밖의 부속품을 사모아 어떻게 하든지 비행기를 만들어 놓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후 그는 목포에서 주어온 엔진을 말끔히 수리하는 한편 여러 방면으로부터 자재를 구득하기에 온갖 열성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조 중위를 비롯하여 배종민, 김종건 등 10여명은 수상비행정 1대를 제작,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함대사령부 편제에는 건공반이 새로 생기게 되었고 건공반이 창설되자 대원들은 더욱 분발하여 해군 603정으로 강원도 설악산까지 가서 추락된 비
김정일, 삼지연 별장에 숨어있었다 지난 5월12일자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미군 당국은 지난 2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김정일이 약 50일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미군의 폭격을 두려워하여 은신처에 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북(對北) 정보부서에서 오래 근무했던 한국군 장성은 최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金正日)이 백두산 근방에 있는 양강도의 삼지연 지하 은신처에 숨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1만1000여개 지하갱도 가운데 김정일의 은신처로 추정되는(미군은 확실히 파악중이라 함) 곳은 평양 근방 자모산을 비롯, 묘향산, 삼지연 별장(북한에선 특각이라 함) 등 5~6곳이라고 했다. 은신처는 평양을 중심으로 중국 국경을 향해 종심(縱心)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차하면 김정일이 국경선을 넘어 중국으로 도주하기 쉽도록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북한 김정일은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시설을 1985년부터 건설해 왔다고 한다. 비행기로 대피할 수 있도록 주석궁에서 순안비행장으로 가는 지하통로를 만든 것을 비롯, 각 시군마다 지하갱도를 뚫어 김일성 사적물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했으며, 당ㆍ행정기관의 지휘부가 숨을 수 있는 곳을 만들었다. 그는 金正日의 은신처가 지하 갱도 50m 이하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미군이 이라크전에서 사용한 벙커 파괴 폭탄으로도 파괴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미군은 스텔스 전폭기로 미리 은신처로 파악한 지점을 공격해 입구를 무너뜨리고, 미군 降襲(강습)부대를 침투시켜 환기구(ventilating opening)에 최루가스 등을 넣어 김정일과 지휘부를 제거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했다. 미군은 현재 24대의 B-1, B-52 폭격기를 괌에 배치하여 북한을 작전 반경안에 두고 있다. B-1폭격기는 특히 레이다망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스텔스 기능을 가진 폭격기로서 북한의 방공망을 빠져나갈 수 있다. 최근 미군이 지난 3월 한미독수리연습을 위해 한반도에 와 있던 F-117스텔스
기자는 최근 한 月刊朝鮮 독자로부터 장문의 글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장교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힌 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탈출기」였습니다. 글의 주인공은 올해 일흔 넷인 유창상이라는 분입니다. 대한석탄공사 공무부장을 거쳐 웨스팅하우스에서 상무이사를 지내셨던 분이랍니다. 유씨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9월 서울대 공과대학 재학생으로 있다가, 「연락장교」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불행히도 그 해 11월 그는 북한지역에서 작전 중에 중공군의 포로가 됩니다. 장교신분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상당한 고문을 당할 것 같아 그는 잡히기 직전에 계급장과 서울대학생증, 도민증 등을 숨깁니다. 『5연대, 이등병, 유창상』 유씨는 敵軍의 심문에 이렇게 자신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는 평남 덕천, 신흥, 청천강 서부지역, 온정리 등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추위와 굶주림, 고문, 복구부대에서의 강제노동 그리고 탈출계획까지... 유씨는 글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1953년 포로교환으로 한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유씨는 결론부분에서 『70세 이상의 고령인 그들(국군포로)이 생전에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당국이 정책을 마련하고 강력히 시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고 말했습니다. 유씨는 현재 뇌졸중 증세가 있어 몸이 약간 불편하다고 합니다. 유씨의 부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남편이 나라 걱정을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전쟁에 나가 온갖 고통을 받으며 애국을 했는데 요즘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잘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밤을 새며 글을 쓰더군요』 살아온 날 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유씨. 그는 자신보다 「나라」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젊은이들에게 알리고자 익숙치 않은 컴
美 핵추진 항공모함 칼 빈슨(9만5000t) 탐험기 艦內 탈영해도 찾는 데 며칠이 걸린다 ●수송기 C-2A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 칼 빈슨에 착륙… 『선회비행 때 G5 느껴』 ●1분 간격으로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떠다니는 「전투 기지」… 건조비 40억 달러, 1년 운영 예산만 3570억원 ●5200여 명의 승무원… 5種75대 전투기 실어 ●항모의 3대 요소는 격납고, 캐터펄트, 엘리베이터 ●10여 척의 순양함·구축함·핵잠수함·지원함 거느려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4년 만의 한반도 나들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이튿날인 지난 3월21일, 美 핵추진 항공모함 칼 빈슨(Carl Vinson)호에 승선하기 위해 국내외 언론사 기자들이 새벽 어스름에 국방부 정문 앞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항공모함 칼 빈슨은 지난 3월4일 시작돼 4월2일까지 연례적으로 실시되는 韓美연합 기동연습인 「독수리 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이다. 韓美연합사에 따르면, 美 항모는 한반도 주변 해역으로 이동해 독수리 훈련에 참가해 왔지만, 훈련기간에 한국 항구(부산)를 방문하는 것은 1999년 이후 4년 만의 일이다. 칼 빈슨은 이라크戰에 참가하기 위해 중동지역으로 이동한 7함대 소속 항공모함 키티호크의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난 3월15일 우리 동해에 배치돼 훈련에 참가하게 됐다고 한다. 칼 빈슨의 「독수리 연습」 참가는 최근 북한 핵위기, 美정찰기 위협사건 등으로 西태평양 지역에 미군 전력이 증강배치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주목을 끌 만한 사건이었다. 평양방송은 지난 3월11일 보도를 통해 『美帝(미제)가 우리를 힘으로 압살하기 위해 핵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려고 침략과 전쟁으로 악명을 떨친 항공모함 칼 빈슨호까지 남조선 항구에 끌어들여다 놓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조건에서 우리도 결코 가만있을 수 없게 됐다』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오산 공군기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韓美동맹 50년의 證言 - 白善燁 장군 『우리는 美國을 붙잡아야 산다고 생각했다. 草根木皮의 나라가 세계 최강대국과 손을 잡았기에 안보도, 번영도 가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발상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제의했던 白善燁 장군 ● 美 해군성 전략기획국장(알레이 버크)이 『아이젠하워에게 휴전의 代價로 한미 군사동맹을 요구하라』고 충고… 美 대통령과 단독 면담, 원칙에 합의 ●『한미동맹은 함께 피를 흘린다는 전제에서 출발. 그것이 血盟이다. 입으로만 동맹이 되지는 않는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3·1절 대회장에 나타난 「多富洞의 영웅」 지난 3월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약 10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에서는 歷戰(역전)의 용사들의 함성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이날 사회를 본 奉斗玩(봉두완)씨는 白善燁(백선엽·84) 장군을 단상으로 올라오게 해 『한국전쟁의 영웅 白善燁 장군. 이분이 1950년 낙동강 多富洞 전선에서 버티어 주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생존한 것』이라고 참석자들에게 소개했다. 白장군은 高齡(고령)이 믿기지 않게 힘차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 참석자들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軍歌 「전우야 잘 자라」를 목청껏 불러 대는 歷戰 용사들의 눈시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白善燁 장군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평양사범, 만주군관학교, 군사영어학교, 1사단장, 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한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을 지낸 전쟁영웅이다. 그는 3년1개월간 치러진 6·25전쟁 기간 중 제1사단장으로 平壤(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했고, 그 후 군단장, 육군참모총장으로 60만 大軍을 지휘하면서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에 대한 不敗(불패)의 기록을 남긴 百戰百勝(백전백승)의 장군이었다. 그런 그가 거리로 나온 까닭은 무엇일까? 기자는 지난 3월4일 오후 전쟁
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작사자 兪湖의 노래 인생 『울분과 술기운으로 단숨에 지은 노래』 ● 서울 수복 되던 날 明洞에서 朴是春씨 만나… 단숨에 「전우야 잘자라」 작사ㆍ작곡 ● 작곡가 朴是春씨의 의뢰로 히트곡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63곡 作詞 ● TV드라마「유호극장」5년간 250회 방송… 프로그램 제목에 처음으로 작가 이름 붙여 兪 湖 1921년 황해도 해주 출생. 1939년 제2공립고등보통학교(現 경복高) 졸업. 1942년 東京제국미술학교 도안과 2년 수료. 1943년 동양극장 미술부ㆍ문예부 입사. 1945년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근무. 1949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1954년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ㆍ부장. 1962년 방송작가로 복귀. 1980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1985년 한국방송작가 교육원장. 1968년 방송문화상, 1987년 한국방송 60주년 문화포상, 1993년 서울시문화상, 2002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 작사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삼다도 소식」, 「이별의 부산정거장」, 「고향만리」, 「럭키 서울」, 「맨발의 청춘」, 「님은 먼 곳에」, 「전우야 잘자라」 「진짜 사나이」(군가) 등 63곡.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반세기 만에 돌아온 「전우야 잘자라」 지난 3월24일,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兪湖(유호·본명 兪海濬·83) 선생은 반세기 전의 감격이 느껴지는 듯 조용히 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3월1일,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서울시청 광장)에 참석한 참전 용사들이 그의 노래 「전우야 잘자라」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에게 『「전우야 잘자라」를 다시 부르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콧날이 시큰했다』고 했다. 1950년 10월은 국군장병과 민족 전체를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통일이
남대문이란 말은 일제가 만들어 유포 시킨 말이기 때문에 그 원래 이름인 「숭례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줄 알고 있고, 몇일 전 모 일간지의 독자투고란에도 같은 주장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대문은 남대문일뿐 일제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 산이름에는 유독 앞산, 남산 이란 이름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동네 앞에 있는 산은 거의 대부분 앞산 혹은 남산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물론 북쪽에 있는 산은 뒷산으로 불렀습니다. 현재 서울의 남산은 조선시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습니다. 목멱산은 「남쪽에 있는 산」이란 말로 남산과 같은 말입니다. 서민들 입장에서는 「목멱산」이란 말 대신 친근한 「남산」이란 말을 더 선호 했을 것이고, 이 말이 오늘날 그대로 이어져 남산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쪽에 있는 「흥인문」은 「동대문」으로, 서쪽의 돈의문은 「서대문」으로, 남쪽의 숭례문은 「남대문」으로 그냥 그렇게 불러 왔습니다. 옛 문헌에도 남대문이라고 기록한 것을 셀 수도 없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흥인문도 굳이 「흥인지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흥인문」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명은 현지 사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사용하면서 굳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백제가 망하고 백제의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이들 유민들은 일본에 정착하면서 주변의 산과 강 고을에 옛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많이 붙혔습니다. 아마 한반도에서 건너간 유민들이 붙인 이름중에는 앞산도 있었을 것이고, 뒷산이란 이름도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 백제나 신라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놓은 지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참고로, 애국가 가사 중에 나오는 「남산」은 서울에 있는 남산이 아니라, 우리 나라 어느 동네에나 있는 「남산」즉 「우리의 산하」로 봐야 할 것입니다. ps: 이 글을 읽고 월간조선 조남준 부국장이 다음과
SUBJ: US Forces Korea Public Relations Officer Speaks on USFK-ROK People Relations SOURCE: Seoul Wolgan Choson in Korean 01 Apr 03 pp 461-476 TEXT: [Article by Wolgan Choson reporter O Tong-yong: "Testimony by US Forces Korea Public Relations Officer Kim Yong-kyu From His 25-Year Career"; bolded subheads as published] [FBIS Translated Text] US Forces Committed Many "Foolish Acts" of Doing Good Deeds But Being Blamed for Them" Without losing his cool-headedness while being caught between the fires of anti-US and anti-ROK sentiment, he stated that "US Forces believe us to be a companion, but we are entrenched in 1960's and 1970's notions and think that they are looking down on us." A Man Who Has Three Official Titles Kim Yong-kyu (age 56) lives with three "official" titles, pubic relations officer for US Forces Korea [USFK] Headquarters, United Nations Command [UNC], and US Forces Combined Headquarters. Mr. Kim has his office in the public relati
駐韓美軍 공보관 - 金永圭의 25년 체험 증언 『美軍들은 좋은 일 하고도 욕 먹는 「바보짓」을 많이 했다』 反美 감정과 反韓 감정의 협공 속에서 냉정함을 잃지 않는 그는 『미군들은 우리를 동반자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1960~70년대식 생각에 매여 그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세 가지 직함을 가진 사람 金永圭(김영규ㆍ56)씨는 세 가지 타이틀을 가지고 산다. 駐韓(주한)미군사령부, 駐韓유엔군사령부, 韓美연합사령부의 공보관이 그의 「공식」 직함이다. 金씨의 사무실은 서울 용산 美8군 메인포스트內에 있는 공보실. 그의 사무실 전화와 휴대전화는 內外信의 문의 전화로 종일 몸살을 앓는다. 남들은 한번 충전하면 며칠씩 사용한다는 휴대전화 배터리도 퇴근 무렵인 오후 5시면 바닥이 난다. 韓美 관계의 「接點(접점)」에 있는 그는 韓美 50년 동맹사상 최악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동맹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전화부터 걸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답변은 대변인의 성명처럼 우렁차고 간단 명료했다. 『내일 외신기자들과 판문점엘 들어가는데 날 만나려거든 오전 9시에 통일대교 입구로 나오시오. 鄭周永(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끌고 들어간 다리 말이오!』 지난 1월29일 설연휴 직전, 기자는 승용차를 몰고 자유로를 달렸다. 간밤에 도로에 쌓인 눈이 영하 14도의 맹추위로 얼어붙어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위태롭게 했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의 주변 산들은 눈을 뒤집어쓴 채 얼어 있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를 상회하는 칼바람 속에서 AP, AFP 등 세계의 주요 통신사의 기자들이 유엔군사령부의 협조로 판문점을 찾은 것이다. 駐韓미군 공보관인 金씨가 外信기자들을 따라나서는 일은 그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
행사의 이모 저모는 '카메라 산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현직 대통령들의 정보기관 보고서 취향] 정보기관에 대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의지가 확고해 보입니다. 특히 국정원에 대해서는 「特別」할 정도입니다. 盧대통령은 민주당 大選(대선) 후보시절은 물론 당선자 신분 때도 『국정원 보고서는 한 줄도 보지도 읽지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盧대통령은 검찰인사 파동 당시 「평검사와의 대화」에서도 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국정원 보고서를 직접 보지는 않지만 국정원은 여전히 청와대에 보고서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보고절차와 내용이 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국정원 보고서는 수석비서관들이 참고한다고 합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정책상황실이나 국정상황실쪽에서 보고서를 우선 순위와 중요도에 따라 배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국정상황실 등이 국정원 보고서는 물론 관계기관 정보를 일차로 스크린 한 뒤 청와대 해당부서에 회람ㆍ배포를 하거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절차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盧대통령이 국정원 보고서를 직접 보지는 않지만 사실상 비서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국정원 보고서의 내용은 「정치사찰 성격」을 탈피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와대는 이런 종류의 보고서를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국정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정치정보 외의 경제ㆍ남북관계ㆍ해외정보가 강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국정원뿐만 아니라 경찰청 보고서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경찰청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경찰 정보요원들의 업무가 정치분석ㆍ전망에서 査正(사정) 정보 수집으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한 관계자의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정치동향 수집에서 정치인 非違(비위) 사실을 수집하는 쪽으로 업무 중심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아무튼 盧武鉉 대통령의 정보보고서 취향이 과거와는 좀 달라지고있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며칠 있으면 설날입니다. 설날 풍경이야 전국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설날은 무척 설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설날인가? 어른들에게 세배가 끝나고 나면 또래끼리 짝을 지어 동네 노인들에게 세배를 하러 다니곤 했습니다.어쩌다 백원짜리 하나 건네 주는 노인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탕이나 떡, 과일, 쌀과자 등을 줍니다. 어떤 노인분은 초등학생 꼬맹이들인 우리들에게 정종을 한잔 따라 주기도 합니다. 노인들 위주로 세배를 돌지만 친구 부모님에게는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제일먼저 세배를 하곤 했습니다. 동네 친구 아버지 중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 한분 계셨습니다. 저와 세배를 다닌 친구 일행은 그 친구 아버지 집에 도착해서 안방문을 휙 열고 『세배하러 왔습니다』하고는 방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친구 부모님을 모셔놓고 큰절을 한 것 까지는 좋았습니다. 우리는 뭔가 좀 허전한 것 같아 단체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고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따사롭던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습니다. 깐깐한 친구아버지는 우리가 일어 섰다 앉기도 전에 『어른한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이 아니야. 그러면 자네들 아버지가 욕먹어...』하며 혀를 찼습니다. TV에서 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기에 그 말이 입에 배어있던 차에 한명이 그 말을 하자 모두가 엉겹결에 따라 해버린 것입니다. 『어른들에게 세배할 때는 그냥 절만하는 것이 제일 좋고, 정 한마디 하려면 「건강하십시오」라고 하면 된다』 세배하러 왔다가 우리는 꿇어 앉은 채 친구 아버지의 예절 교육을 무릎이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안동식혜가 한 상 나왔지만 숟가락을 갖다 댈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 우리 할머니에게 세배 오는 사람들을 가만 살펴보니 모두들 그냥 절만 하고 가거나 간혹 『몸 편찮은데 없냐』고 한마디 물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그런 불경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큰 절할때는 무조건 입을 꼭 다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환씨가 이번에는 국정원 도청 의혹과 관련한 글을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는 도청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 대해 『(검찰이)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고 말했습니다. 현재로서 물증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나라당이 지난해 대선 직전 폭로한 도청 문건은 『국정원측이 메모보고서 양식으로 작성한 것을 외부에서 다시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인터넷에 올린 글 중 일부입니다. 김기환씨는 한나라당이 공개한 문건이 국정원에서 작성한 메모보고서와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영일 사무총장이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이 폭로한 문건은 국정원 내부 문건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동일해 보입니다. 그는 『국정원이 도감청한 내용을 인쇄할 수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그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검찰 수사에 대해 『국정원측이 증거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도감청을 했다는 물증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관련 부서를 없앴을 뿐만 아니라 관련 직원들도 여러 부서로 내보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기환씨는 또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과 신건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도감청 문제에 대해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정원의 도감청 행위에 대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 『오히려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도감청과 관련해 국정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불법적인 도감청은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도청관련 시설도 없다는 것입니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의 말입니다. 『얼마 전 검찰이 불시에 국정원의 감청시설에 대해 현장조사를 벌였습니다. 국정원 입장으로서는 대단히 당황해 할만한 일이었지만 국정원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조사를 받아들였습니다. 현재로서는 불법적인 도청은 없습니다』 감청은 통신비밀보호법 7조에 의해 고등법원 수석 부장판사의 허가나 대통령의 승인 하에 이루어지는
안동식혜는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이 음식은 안동 문화권인 경북 북부 지방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입니다. 같은 문화권인 의성이나 예천 서부지방 등지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안동식혜」라고 이름 붙여도 그다지 큰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안동에서는 흔히 「식혜」라고 하면 이 안동식혜를 칭하는 것입니다. 타 지방에서 식혜라고 부르는 것을 안동에서는 「감주(甘酒)」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해서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따라서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를 안동식혜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식혜라고 합니다. 안동식혜는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속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그 맛이 워낙 독특해서 처음 먹는 사람은 이게 무슨 맛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겨울철에 만들어 먹는다는 것과, 무우채, 생강, 고춧가루가 기본으로 들어가고 그 외에 당근, 땅콩, 잣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발효를 시켜서 만드는데 이 때문에 독특하게 삭인 맛이 나고 많이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안동 지방에서는 설날 식혜를 만들지 않는 집이 없으며, 찾아 오는 손님에게는 꼭 식혜를 대접합니다. 그 맛이 집집마다 천차 만별이라 돌아다니며 맛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안동식혜가 발효식품이라는 점에서 젓갈의 한 종류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경북 북부 내륙지방에서는 생선이나, 새우 등의 젓갈 종류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무 등 야채를 이용해서 젓갈을 담았다는 것입니다. 바다 음식이 얼마나 귀했냐고요? 이쪽 지방 옛날 노인들은 평생 소원이 새우젓하고 밥한번 먹어 봤으면 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구한말 혹은 일제시대 중국 연변 지방으로 옮겨간 안동출신 후손들이 이 식혜를 만드는 것을 보면 매우 걸죽하게 만들어 마치 죽처럼 보입니다. 현재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를 이처럼 심할 정도로 걸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타지에서 온 분들은 안동댐 올라가는 민속촌에 가면 평소에도 안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였습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데 동네 입구에 있던 행상집(상여집)의 문이 열려 있고 안에 있던 행상(상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른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동네 행상을 새로 장만해서 옛날 행상을 오늘 불태웠다』하는 것입니다. 『아뿔사, 하느님 부처님 맙소사...그걸 누가 태웠어요?』 아무리 후회해 봐야 행상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동네의 노인이 귀신 붙어 있는 옛날 행상을 태워버려야 마을이 평안하다며 태우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노인의 말이 곧 법인지라 아무도 대꾸를 못하고 행상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새로 장만한 행상은 알루미늄으로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었습니다. 불타버린 행상은 많은 사연을 간직한 행상이었습니다. 일제시대 말기, 동네에 행상이 없어서 마을 사람들은 초상이 나면 이만 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행상을 멀리 떨어진 이웃 마을에서 빌려와서 사용했는데, 사용하고 나면 사용료를 그 동네에 주어야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 했습니다. 그래서 행상을 하나 마련하기로 결론을 냈지만 문제는 행상을 마련할 만한 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북과 장구, 징, 꽹과리를 메고 임시 광대패를 만들어 예천, 안동 일대 마을을 돌아 다니며 일종의 구걸 공연을 나섰습니다. 이렇게 여름 한철 내내 구걸 공연을 나선 끝에 겨우 행상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안동 풍산 어느 곳에 아주 기술 좋은 목수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노인에게 땅을 얼마간 사주고 행상 제작을 의뢰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미 그 노인을 제외하고는 행상 제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귀했다고 합니다. 노인 혼자 여러 달 동안 매달려 행상을 제작했습니다. 행상을 가져 오는 날 동네에는 성대한 맞이 굿이 펼쳐 졌습니다. 행상의 위 부분은 각종 귀신과 호랑이를 탄 저승사자 등이 死者를 호위하고, 행
대구에 있을 때 어느 해입니다. 그 해 비가 많이 내렸고 일부지역에는 물난리가 났습니다. 그 폭우로 대구 인근 산간에 있던 많은 무덤이 무너지거나 훼손되었습니다. 산사태를 만나서 무덤이 쓸려 갔다면 모를까, 산 기슭에 멀쩡하게 있던 무덤이 비가 온다고 힘없이 무너지지다니... 저는 처음에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의 장례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어서 무덤 만드는 과정을 보고 무덤이 왜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 시골에는 사람이 없어서 동네에 누가 죽으면 이웃 동네에서 인부들을 사와야 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반대로 급격하게 도시화가 된 지역에서는 사람은 많을지라도 이웃끼리 서로 무관심하다 보니 인력시장에서 인부를 사와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일당 받고 급하게 조직된 인부들이라 상여소리를 비롯 뭘 하나 제대로 할 리가 없습니다. 그나마 장지부근까지는 영구차로 운반한 고인을 다시 상여에 옮겨 산소까지 이동하는 것을 보니 비록 도시에서 치르는 장례식이지만 가족들이 고인에 대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짧은 거리였지만 상여 없이 시신이 든 관을 메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지에 가니 미리 포크레인이 와서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관을 땅에 묻자 포크레인이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뚝딱 뚝딱 두 번만 흙을 쌓으니 봉분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봉분 위에 올라가 형식적으로 몇 번 다지고 내려오자 포크레인이 봉분을 꾹꾹 눌러 다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봉분에 떼를 입히자 무덤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무덤이라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제대로 다져지지 않아서 비만오면 쉽게 무너졌던 것입니다. 옛날의 무덤 만드는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하관을 하고 나면 「덜구지」가 이어 집니다. 덜구지란 무덤을 다지는 작업을 말합니다. 덜구지는 처음 관을 무덤에 넣고(혹은 관은 불태우고 시신만
어느 날 식당에서 삼겹살을 먹다가 건네 편에 앉은 사람보고『거기, 나물좀 건네 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여자 분은 제가 좀 건네 달라는 나물 바구니는 주지 않고 식탁 위에서 무엇인가 열심이 찾았습니다. 저는 또 다시 『나물 바구니 거기 옆에 있잖아요』했습니다. 그러자 여자 분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하는 말이 『호호호, 이게 나물이에요?. 야채지... 나물과 야채도 몰라서 어떻게 기자하겠어요』하는 것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여자 분들도 『시골서 자랐다면서 나물이 뭔지도 몰라요』하며 덩달아 구박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말을 배우면서부터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물에 대한 개념이 서울에 오니 바뀌었나하며 갑자기 어리둥절 해 졌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고향이 같은 경상도 분이 많아서 『이 바구니에 담긴 것이 나물 아니에요?』하고 응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전부다 하는 말이 『그건 야채죠』하며 제 편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바구니에는 상추가 가장 많았고 그 외 깻잎 등 삽겹살 쌈을 싸 먹는 각종 채소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씩 나물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대부분은 상추와 배추는 야채에 포함되지 나물에 포함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양념으로 무친 것만 나물이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취나물 등 산나물 등이 자기가 아는 나물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럼 『무우청, 시래기 등은 나물이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무엇이 나물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먼저 국어사전에 나온 정의를 보겠습니다. --인터넷 검색 국어사전-- 나물[명사] 1.식용할 수 있는 나뭇잎이나 풀을 통틀어 이르는 말, 또는 그것을 무친 반찬. 2.채소를 여러 가지 양념으로 무친 반찬. 채(菜). 나물은 몇몇의 특정 채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들에서 나는 먹는 풀은 전부 나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상추, 배추, 무청, 취
자치기는 겨울철에 즐겨 하는 놀이입니다. 한번 시작하면 해가 져야 끝을 보는 놀이기도 했고요. 지방마다 노는 법이 조금씩 다르고, 여러 단계로 나누어 놓은 지역도 많습니다. 워낙 전국적으로 놀았던 놀이라서 규칙이 많을 수 밖에 없으니 『이것이 정답이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래 소개 한 자치기는 제가 어렸을 때 놀았던 방법입니다. 이 글을 다 쓰고 어릴 때 자치기를 하면서 놀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여 자치기의 세부적인 규칙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인했으나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이 없더군요. 결국 아래 쓰인 모든 것은 저의 기억에 의존해 썼습니다. -----------아래----------------- 자치기의 놀이 기구는 「큰자」와 「작은자(자치기 부랄:지방마다 이름이 다름)」밖에 없습니다. 큰자의 길이는 대체로 손끝에서 팔꿈치 부근까지 오면 됩니다. 부랄자는 손바닥 길이 만합니다. 부랄자는 평평한 바닥에 놓고 큰자로 한쪽 끝을 내려 쳤을 때 공중으로 튀어 오를 수 있게 양쪽 끝을 어긋나게 깎습니다. (부랄자 양끝의 깎인 모양은 주전자 꼭지를 생각하면 쉽다) 자의 재료가 되는 나무는 아무 나무나 써도 좋지만 어미자로 내려칠 때 부랄자가 자주 갈라지기 때문에 재질이 약한 아카시아 나무는 좋지 않습니다. 부랄자는 갈라지거나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여분으로 두 서너 개 더 준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편을 가릅니다. 놀이 시작 전에 바닥에 부랄자 길이 보다 조금 크게 세로(「ㅣ」) 형태로 땅을 팝니다. 판 홈 주위에 직사각형으로 금을 칩니다. 한번 공격은 야구처럼 세 명까지 할 수 있습니다. 공격수는 먼저 바닥에 난 홈에 가로로 부랄자를 걸쳐 놓고 어미자로 수비가 있는 전방을 향해 힘껏 떠서(튕겨겨) 날려 보냅니다. 날아 오는 부랄자를 땅에 떨어지기 전에 수비수가 손으로 받으면 부랄자를 날린 사람은 죽습니다. 부랄자를 날리는 사람은 어미자로 최소 다섯자 이상을 날리지 못해도 자동으로 죽습니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복장을 한 여러 명의 어른들이 장화를 신고 우리집 안방으로 쳐 들어 왔습니다. 이들은 천정에 못을 박고 벽을 뚫고 하더니 무엇인가 설치를 하고는 사라 졌습니다. 그 날 이후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광창에 호롱불을 얹어 놓고 밤을 밝혔던 산골마을에 전기가 들어 온 것입니다. 지금이야 초를 아주 우습게 알아 하룻밤 촛불시위에 수만 개를 날려 버릴 정도가 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초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고는 매일 밤 촛불을 켠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촛불은 호롱불에 비해 몇 배나 밝습니다. 이렇게 초도 귀하던 시절 갑자기 전깃불이 들어왔으니 동네 노인들의 눈이 휘둥그레 질 만했을 겁니다. 전기가 들어온 후 동네 부잣집에서 TV를 들여 놓았는데, 밤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몰려들어 마당에 멍석을 깔고 TV를 봤습니다. 당시에는 밖에 바람이 불고 이슬비만 내려도 정전이 되었습니다. 1980년 중반에 와서야 기술이 좋아 졌는지 왠만한 태풍이 와도 전기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또 5촉짜리나 30촉 전구를 쓰는 집이 많았는데, 이 싸구려 전구가 툭하면 나가서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의 초가집도 걷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묵은 초가집을 걷어내면 지붕에서 뱀도 나오고 특히 굼벵이가 많이 나옵니다. 마당에 떨어진 굼벵이를 닭이 달려들어 신나게 쪼아 먹습니다. 어느 공무원의 아이디어인지 부근에 있는 하회마을은 초가집을 걷어 내지 않고 그냥 남겨 놓아, 오늘날 훌륭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동네에 대형 마이크가 들어오더니 매일 아침마다 새마을 노래를 틀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밤낮없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길을 넓히고 수로를 만들고 상수도를 놓았습니다. 이렇게 단체 노동을 하는 것을 「부역」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점심도 지급되지 않는 완전한 무보수 강제 노역의 일종입니다. 부
저의 고향에는 아직도 머슴살이를 하는 노인이 있습니다. 지난 설 때 시골에 내려가서 이 노인이 길을 걸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까지 저 노인이 살아 있다니...』 기억 속에 까맣게 잊고 있던 노인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그 노인이 처음 우리동네로 들어왔던 날을 생각했습니다. 제 기억에 이 노인은 제가 초등학교 4, 5학년일 때 우리 동네로 들어 왔습니다. 그때도 지금 살고 있는 주인 집의 머슴으로 왔습니다. 당시 노인의 나이가 50대 초반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백발에 허리가 구부정한 것이 칠십대는 되어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노인이 된 이 사람을 「00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장가를 간 젊은 청년들은 이 머슴 노인에게 높임말을 쓰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머슴살이를 「남의 집 살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에 공장이 적었기 때문에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특별히 할 일이 없는 한 동네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땅은 제한되어 있고 사람은 많으니 항상 가난한 삶이 이어졌습니다. 부모에게 물려 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천하 장정인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품을 팔러 다니거나 남의 집 살이를 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신혼 살림에 젖먹이 마누라에게 맡기고 1년 혹은 3년, 심지어 10년 동안 남의 집 살이를 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머슴이란 비록 계약에 의해 주인집의 농사를 지어주는 신분이지만, 머슴살이는 사실상 종 살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머슴들은 아무리 날이 추워도 수 십리 산 길을 헤매며 나무를 한 짐씩 해와야 했고(1970년초반까지만해도 땔감을 한 지게 얻기 위해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야 했다), 꼭두새벽에 마당을 쓸어야 했으며, 저녁에는 새끼를 꼬아야 했습니다. 남편이 머슴살이를 하면 부인은 아이를 혼자 키우며 온갖 험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일년 열 두 달 쉬지 않고 일을 하고 나면 품값으로 쌀을 몇 가마니를 받았다고 합니다.
호젓한 임도 따라 걷는 가벼운 산행 부목재-대학산-진지리고개-임도 답사 가는 겨울이 아쉬워 배웅을 가기로 했다. 유난히도 춥고 눈도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산골짜기마다 겨울에 내린 눈이 상당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곧 녹아 버릴 잔설을 밟으러 조금 깊은 산을 찾아갔다. 깊기는 해도 쉽게 지난 겨울을 돌이켜 보면서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산을 찾아 나섰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과 화촌면, 횡성군 갑천면을 잇는 길고 꼬불 꼬불한 임도가 나있다. 산악 자전거꾼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산길이다. 산중턱으로 난 임도를 따라 3,4시간 봄속의 겨울을 찾아 나섰다. 나이가 들면 다리부터 늙는다고 하는데 겨우내 움츠렸던 기지개도 펴고 무담없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산행이다. 홍천군 동면 노천리 부목재 마루턱에는 양쪽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대학산(大學山, 876.4m)이고 왼쪽에 솟아 있는 산이 응봉산(鷹峰山, 868m)이다. 그런데 두산은 부목재를 사이에 두고 임도로 이어져 있다. 대학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444번 지방도와 물골 일대. 예방 조치로 산 7,8부 능선을 따라 뚫은 임도는 평소에는 차가 다닐 수 없게 차단기로 가로 막아 놓았다. 2년전에 작고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님은 흥겨운 자리게 가면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라고 자랑을 한단다. 언제 어떻게 영국의 명문인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느냐고 되물으면 학교 구경을 하느라고 뒷문으로 들어 갔다가 앞문으로 나왔으니 옥스퍼드를 졸업한 것이 아니냐고 매 주위 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정회장님의 농담처럼 홍천군내 임도를 따라 대학산에 오르다보면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대학을 나오게 된다. 응봉산과 대학산 줄기를 잇는 부목재에서 응봉산 산행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 대학산 기슭의 임도를 따라 나섰다. 부목재에서 임도를 따라 들어선 대학산 가는 길. 큰골 고갯길로 접어들어 능선을 따라 정상을 오르는 것이 수월하다
'지방선거 구인난' 국민의힘, 추미애에 맞설 경기도지사 후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