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불편해도 나라 걱정이 앞선다"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포로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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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최근 한 月刊朝鮮 독자로부터 장문의 글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장교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힌 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탈출기」였습니다. 글의 주인공은 올해 일흔 넷인 유창상이라는 분입니다. 대한석탄공사 공무부장을 거쳐 웨스팅하우스에서 상무이사를 지내셨던 분이랍니다. 유씨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9월 서울대 공과대학 재학생으로 있다가, 「연락장교」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불행히도 그 해 11월 그는 북한지역에서 작전 중에 중공군의 포로가 됩니다. 장교신분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상당한 고문을 당할 것 같아 그는 잡히기 직전에 계급장과 서울대학생증, 도민증 등을 숨깁니다. 『5연대, 이등병, 유창상』 유씨는 敵軍의 심문에 이렇게 자신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는 평남 덕천, 신흥, 청천강 서부지역, 온정리 등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추위와 굶주림, 고문, 복구부대에서의 강제노동 그리고 탈출계획까지... 유씨는 글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1953년 포로교환으로 한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유씨는 결론부분에서 『70세 이상의 고령인 그들(국군포로)이 생전에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당국이 정책을 마련하고 강력히 시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고 말했습니다. 유씨는 현재 뇌졸중 증세가 있어 몸이 약간 불편하다고 합니다. 유씨의 부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남편이 나라 걱정을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전쟁에 나가 온갖 고통을 받으며 애국을 했는데 요즘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잘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밤을 새며 글을 쓰더군요』 살아온 날 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유씨. 그는 자신보다 「나라」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젊은이들에게 알리고자 익숙치 않은 컴퓨터 자판을 날이 새도록 두드렸던 것입니다. 아래는 유씨의 글 전문입니다. 「6.25 전쟁 포로수기」 수기를 내면서 여러분께 드리는 글 올해는 6.25 전쟁 발발 53년째를 맞이하는 해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전쟁이 일시 멈추었다. 그후 북의 빈번한 협정위반으로 그때 그때마다 긴장이 고조되었다. 최근에 6.29 서해교전상황을 군 당국이 북한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도발이라고 공식 발표 할 때에는 전시를 방불케 하였다. 6.25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인명피해만도 무려 24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5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포로는 돌아오지 못했고 휴전 후에 7천1백42명만이 포로교환으로 귀환하였다. 전문가들은 그간 사망자를 가만 하드라도 송환되지 못한 수천 명 정도는 함경도 아오지의 특별수용소 기타 여러 곳의 교화소 탄광 등에 수감되어 있거나 억류되어 있으리라 보고 있다. 북한의 일방적인 전략에 끌려만 간 지난 국민정부의 남북협상에서는 포로송환 문제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새 참여 정부는 상황에 따라서 당기는 주도적 협상으로 50년 이상 묻혔던 포로 송환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어 고령 미 송환 포로들이 생전에 가족들 품에 돌아 올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지금은 북핵 문제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온 국민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해결방법은 우선 튼튼한 국가 안보 태세 위에 한미 공조로 통한 양보 없는 북한과의 협상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힘이 강해야한다. 이를 위해 자주국방 강화는 물론, 6.25 전쟁 당시 자기나라 젊은이들의 많은 피를 흘린 미국과의 전통적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근간에 일부주도의 촛불 반미 시위로 미국은 한국이 원한다면 철군까지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미군 재 배치문제를 공식적으로 제의하여 한미 쌍방이 1차 협의를 했고 차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특정교원단체의 반미교육 논란에 노 대통령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얼마 전에 브레진스키 미 전략 국제문제 연구소 고문은 인터뷰에서 "동맹 50주년을 맞은 한미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에 "한국에서 새로운 종류의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한미관계가 복잡해 질 것이다. 그 같은 민족주의는 자칫 한국발전에 역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또 "주한 미군장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한국인 스스로가 미군재배치문제를 요구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최근 재배치 논의가 미국에 의해서만 실시되는 것이 아니며 미군 반대를 포함, 한국인들의 장기적인 희망에 따른 대응이다. 결국 한국의 안보와 통일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 한국인들은 자문해 보아야한다."라고 답했다. 그의 미국에서의 위치로 보아 한반도 정세를 잘 아는 입장에서 그 의 답은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유지와 우리 나라 안보를 위해서 우리에게 생각게 하는 현실적인 제언으로 생각한다. 6.25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는 아직 이르다. 53년 전 기습적으로 남침한 북한은 남북 비핵화 공동 선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고 이제는 핵 보유 시인으로 위협하고 있다. 매년 유월에는 각 보도 매체가 몇십 만 명의 6.25 참전 노병들의 체험을 통해 6.25를 체험 못한 세대,6.25를 외면하는 계층에 다양하게 홍보하여 역사적 진실을 알려야한다. 이 수기는 내가 당하고 체험한 기록으로 6.25의 진실을 알리는데 일조가 되기를 바란다. 목차 1 전쟁 발발 2 군 입대와 포로 되던 날 3 죽음의 행진 4 심사를 통한 생사의 가름 길 5 포로의 강제노동 6 복구부대에서 포로수용소로 이송 7 포로교환으로 귀환하던 날 8 결론 1. 전쟁 발발 1950년 6월25일은 주일이고 맑은 초여름 날씨였다. 나에게는 그 날이 졸업후 6년만에 신길동 우신 초등학교 첫 동창모임이고 해서 그 날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어제 일같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남녀 합해서 30명 정도가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 인사하고 새로운 소식을 전하면서 분위기는 한참 천진난만한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떠들썩한 가운데 당직선생님이 출입문을 크게 두드리고 교실에 들어와서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새벽에 전방38선 인근에서 북측 공산군과 우리 국군사이에 무력 충돌사고가 발생하여 모든 집회는 즉시 해산하라는 영등포 경찰서로부터 통보가 있으니 곧 해산하여 귀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는 당부 말씀을 전했다. 긴장감이 감돌면서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오후3시경에 모두 뿔뿔이 헤어졌다. 교실에서 나와 20미터 정도 떨어진 바깥변소로 가는 도중 검은 프로펠러식 쏘련제 전투기가 학교에 가까이 위치한 당시 여의도 간이 군용 비행장을 기총사격 하면서 내 머리 위에 치솟는 것을 똑바로 목격하였다. 영등포시내는 초긴장 상태였고 "외출장병들은 즉시 부대로 돌아가라"하는 가두방송이 계속 이어졌다. 6월28일 새벽 천지를 진동하는 한강교 폭파 굉음에 놀란 시민들은 거의가 피난길에 나섰다. 2. 군 입대와 포로 되던 날 1950년 9월 15일에 미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면서 나는 그 악몽과 같은 골마루 밑의 은신처 생활에서 해방 된지 한달 여만에 연락 장교 후보생 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10월에 명당성당에서 후보생 교육을 받았다. 후보생가운데 당시 공대 재학중인 나를 포함한 공대 생 5명만이 임관 식 직전에 차출되어 11월 초순경에 전방에 배치되었다. 그후 병력 수송차편으로 평양, 순천을 거쳐 2군단 사령부가 위치한 평남 북창에서 일박을 하고, 7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평남 덕천에 도착했다. 사단 인사참모의 안내를 받아 참모장에게 도착신고를 하고 다음날 7사단 미군사고문단에 배치 발령을 받았다. 나는 사단사령부 G-2, G-3 담당 미군사 고문관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와는 단지 몇 일을 같이 지낼 뿐 이여서, 그가 육군소령이며 입대 전 고등학교 수학 선생 이였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만이 어렴풋이 날 뿐, 그의 이름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연락장교 전원은 사령부에서 수분거리에 위치한 민가에 합숙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에 11월 25일경이었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합숙 문을 두드리면서 "연락 장교 님 계십니까? 저는 사령부 작전 상황실에서 왔습니다." 하는 소리에 모두가 불길한 예감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방안에서 한 장교가 "어디서, 누가 찾느냐"고 물었더니 "상황실에서 작전참모가 찾는다"고 했다. 군단 사령부 소속으로 보이는 선임장교가 나에게 "속히 가십시오"라고 했다. 그날 밤은 바람이 강하게 불고 뺨을 깍듯이 매섭게 추웠다. 헌병의 안내를 받아 상황실에 도착하니 작전 참모는 하급자인 나에게 긴장된 모습으로 상황판 상에 적색으로 표시된 중공군의 여러 공격방향과 포위된 7사단 3, 5, 8 연대와 인접 미군부대의 위치를 가르치면서 "연락 장교 님, 상황이 긴급하니 속히 작전 담당 고문관에게 보고하여 오늘밤중으로 전방부대가 포위망을 뚫고 후퇴해야 한다"고 했다.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부대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마음이 떨렸다. 작전 참모는 1초가 급하다는 듯, 전화기를 나에게 넘기며 연락을 독촉했다. 그때가 11월 26일 새벽 2시경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문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적에게 포위된 전방 부대를 포위망에서 속히 후퇴시켜야 한다는 작전 참모의 계획을 전하니, 고문관 자신도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 날이 밝는 대로 얘기하자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작전 참모는 완전히 놀란 표정으로 "안돼요, 안돼! 다시 연락하시오." 하고는 안절부절 한다. 나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며 상당히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고문관을 다시 불렀다. 고문관은 "괜찮다는데 왜 서두느냐?" 고 하면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작전 참모도 그때는 체념한 듯이 "그럼, 할 수 없지요. 돌아가 보세요."라고 했다. 나는 혼자서 무거운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 왔다. 그날 밤의 암호는 "지뢰", "탐지"였다. 숙소에 돌아와 긴급 상황을 모두에게 설명했다. 군단 소속 선임 장교는 군단 사령부와 연락 후 손수 운전으로 북창으로 돌아간 듯했다. 날이 밝았을 때, 사령부로 돌아가는 길가의 미군사 고문단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없는 것을 목격하고 당황했다. 그런데, 잠시 후 미 고문관 차들이 전날밤 중공군 기습으로 부상당한 미군들을 후송시키고 무사히 돌아왔다. 시간이 갈수록 전방 연대 병력은 전열이 흐트러져 전의를 상실한 듯 지휘계통 없이 무질서하게 시내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내에 모여든 병력을 사단 사령부 지휘아래 재정비하여 전차 등 군 장비를 앞세우고 북창 방향으로 후퇴작전을 여러 번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시내는 분지형태로 생겼는데, 고지의 요지마다 나뭇가지로 위장한 중공군이 이미 배치되어 있어서 7사단 산하 전 연대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시내 소 광장에 미군사고문관 전원과 연락 장교 전원이 모였다. 간간이 적의 총소리가 들렸다. 고문단 측에서는 우리 장교들에게 손수 운전이 가능한 자는 차편으로 후퇴해도 좋다고 권고했다. 그 당시 손수 운전자는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때가 이미 늦었다. 미군 통신 장교가 군사 고문단장 지시 하에 어디로 계속 통신연락을 하는데 헬리콥터 지원을 구하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소형 헬리콥터 한 대가 소리를 내면서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광장에 착륙했다. 단장과 조종사가 짧게 대화를 나누더니 헬리콥터는 통신 장교만 태우고 이륙했다. 얼마 후 고문관들은 각기 자기 지프차를 로프 줄로 묶고 차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어 서로 건배를 했다. 내 생각에 헬리콥터 구출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고문관도 나에게 이제는 알아서 처신하라는 눈치였다. 헬리콥터지원은 평양에서는 불가능하고 서울에서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질서정연하게 북쪽으로 행진하는 3연대 장병대열 후미에 따라가다가 대학 선배인 연락 장교 한 분이 죽어도 같이 죽자고 돌아오라고 소리 지르며 손짓하기에 고문관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중공군 신호탄 불빛이 머리 위에 서로 교체하면서 스쳐갔다. 소총소리 마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각자 개인 행동으로 흩어져 산등성이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칼빈 총으로 무장하고 미군 방한복 외투와 방한모 차림에 푸른색 농구화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깡통 통조림을 주머니마다 가득 넣었다. 나는 가는 방향도 모르고 어디론가로 걸어가고 있던 많은 병사들의 행렬을 따라갔다. 그들의 걸음은 매우 빨라서 나는 허겁지겁 따라가기가 힘겨웠다. 내가 묻는 말에 그들은 아무 대꾸도 없이 "장교 님, 저희만 따라오십시오" 하고는 걸음을 재촉해 걸어갔다. 그런데, 건너편에서 갑자기 북 치는 소리, 나팔소리가 들리면서 국방 군은 여기 모이라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아군의 소리가 아니었다. 잠시 후 "와-와-" 하면서 단체로 돌격하는 소리와 함께 육탄전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아군의 마지막 작전 같았다. 총대로 치는 소리, 발길질 소리, 신음소리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다른 데로 돌려 옆의 산봉우리로 뛰어 올랐다. 그때 나는 이삼일만 버티면 아군이 곧 덕천 시내에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27일 아침이 되었다. 유엔 제트기는 내가 있던 산봉우리를 선회하면서 시내를 하루 종일 폭격하였다. 손을 흔들어 내가 있는 곳을 알렸다. 공격목표는 미처 철수하지 못한 군 장비 및 병참물자였다. 불행히도 나는 유엔군에게 발견되지 못하였다. 그날 저녁엔 팔다리에 부분적인 피부마비증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끼니는 깡통 통조림으로 겨우 요기만 했다. 영하 30정도 강추위에 팔다리가 점점 굳어지면서 나뭇가지 하나가 두개 세 개로 희미하게 아롱거리면서 초점이 흐려졌다. 그대로 죽는 것은 시간문제 같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소지했던 도민증, 학생증, 중위계급장과 뺏지를 큰 돌 밑에 버렸다. 그리고 무조건 하산했다. 하산하는 길은 모래와 돌로 된 가파른 길이었다. 내려오다 미끄러지면 나뭇가지를 손에 잡고 매달렸다가, 손을 놓으면 또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나뭇가지를 다시 잡는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하고 넓은 곳에 떨어져 멈추었다.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차리고 밑을 내려다보니 절벽 바로 밑에 바닥이 희미하게 보였다. 되돌아 올라갈 수는 없고 죽어도 내려가야만 했다. 순간적으로 그곳에서 직하하여 땅바닥에 떨어졌다.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 그때 꿈같은 것을 꾸었는데, 꿈에서 집안 식구들을 다 만나보았다. 모자도, 총도 다 없어졌다. 아침이 밝았다. 다행히 나무숲이 있어서 낮 동안은 그곳에서 잠복해 있었다. 그곳의 지형도 모르고 죽을 것만 같았다. 해가 지면서 좁은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얼마동안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나무숲에서 중공군 두 명이 나와 뒤에서 나를 덮쳤다. 나의 기억으로는 11월 28월 저녁 이였다. 중공군 하나가 무엇이라고 지껄이니 젊은 통역관이 왔다. 소속, 계급, 이름을 묻기에 5연대, 이등병 , 유 창상이라고 답했다. 중공군은 머리 위에 큰 나뭇가지를 얹어 위장했고 한사람은 긴 방망이 수류탄을 허리에 찼고 다른 사람은 소총을 메고 있었다. 그들이 내 앞뒤에 서서 나를 감시하면서 학교건물까지 끌고 갔다. 처음에는 작은 교실 한구석에 책상으로 담을 쌓아 그 안에 나 혼자만을 가두고 문을 잠갔다. 잠시 후 다른 통역관이 중공군과 함께 들어와서 장교가 아니냐고 심문을 했다. 계속되는 심문에 나이를 몇 살 줄여서 학교 다니다가 군에 끌려왔다고 했다. 학생 같이도 보였는지 수긍을 하는 것 같았다. 곧 바로 나를 끄집어내어 좀 넓은 다른 교실에 집어넣었는데 거기에는 몇 백 명으로 보이는 포로들이 이미 잡혀와 있었다. 물건을 강제로 밀어 처넣는 식으로 포로들을 한정된 교실에 채우다보니 사람 머리 위에 사람이 앉는 꼴이 되었다. 밑의 사람이 견디다 못해 "아이고 죽겠다"하고 소리를 지르면 위에 있는 사람이 힘껏 움직여서 틈을 내주었다.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몸 어느 한 부분도 억지로 눌리지 않거나 굽혀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유엔 전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학교 위를 선회하였는데 아마도 우리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창 밖에서 경비하는 중공군은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두터운 방한복 팔꿈치가 때 기름으로 반들반들 찌들어 있었다. 총을 팔짱 안에 끼고 왔다갔다하면서 실내를 흘깃흘깃 보았다. 마치 생지옥 같은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며 웃는 꼴이 잔인해 보였다. 웃을 때 싯누렇게 보이는 그의 이빨이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식사 때가 되면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의 본능을 그대로 들어내듯 체면이나 부끄럼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질문의 정답은 먹기 위해서였다. 식사는 물론 밥도 아니고, 삶은 감자도, 옥수수도 아닌 날 강냉이 이었다. 경비병은 날 강냉이를 통에 넣고 들어와 돌아가면서 군데군데 던져준다. 운 좋게 받는 사람은 그 식사에 성공한 경우요, 놓치게 되면 실패하는 경우다. 욕심을 내어 두개씩 받아먹으려 하다가 창피를 당하거나 심지어는 집단적으로 얻어맞는 일까지 있었다. 죽지 못해 강냉이를 씹어먹고 나면 갈증이 심했다. 물 마시는 시늉을 하면서 마실 물을 구걸하다시피 구하면 그 싯누런 이빨을 보이면서 물통을 날라준다. 물통이 놓이면 많은 사람들의 손이 한꺼번에 몰려 먼저 마시려고 다툼질 하다가 반 이상의 물을 쏟아버리고 만다. 이때 "이것이 무슨 짓이냐 질서를 지킵시다"하는 질책이 사방에서 나오면 그 난장판은 일시 수그러지기도 했다. 며칠 후 수백 명으로 추산되는 우리 일행은 평남 덕천 시내에서 좀 떨어진 안동리라는 곳에 이르렀다. 덕천, 맹산등지에서 중공군에게 잡혀 온 국군 제 2군단 소속 각 사단 연대 장병들로 꽉 차 있었다. 억류된 포로들 가운데는 박승일 고근홍 박광혁등 연대장급 고급장교들도 포함됬다고 들었다. 이곳은 중공군 후방지휘소로 포로집결지인 듯 싶었다. 수 천명의 포로들로 민가는 메워졌다. 방마다 콩나물시루 같았고 부엌과 외양간 심지어 화장실까지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얼굴이 퉁퉁 부은 사람, 부상자 그리고 신음하는 병자들로 보기에 참으로 비참했다. 이곳에서도 강추위 속에서 벌벌 떨면서 하루 두끼 주는 삶은 옥수수 타먹기에만 급급했다. 이틀 밤이 지나 중공군 통역을 통하여 자동차 운전사, 전차 병, 포병은 후대할 터이니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우리들 사이에는 수일 안에 포로전원이 최북단 후방으로 이송되며, 출발 전에 포로부상자는 중공군이 그 부상을 확인하여 통행증명을 해주고 석방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통행증을 받기 위하여 자해 자 까지 발생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3. 죽음의 행진 안동리에서 삼사 일이 지난 어느 저녁때에 중공군은 갑자기 국군포로 전원을 넓은 들에 집합시켰다. 수천 명이 한자리에 모이다보니 일대소란이 벌어졌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상대방 이름을 부르는 사람, 서로 붙들고 통곡하는 사람, 소리높이 전우를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중공군은 이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하늘에 위협 사격도 하였다. 소란이 겨우 가라앉자, 중공군 장교가 통역관을 통하여 "동무들을 더 좋은 곳으로 안내하려고 한다. 목적지까지 수일간의 도보행진이 요구된다. 행진 중 명령을 잘 지킬 것을 바란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한다"라는 경고 성 연설을 하였다. 부상자는 출발 전에 석방시킨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북으로, 북으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꽁꽁 얼어붙어 반들거리는 산길을 따라 길 양편에 종대로 줄을 이어 걸었다. 선두에서 인솔하는 중공군의 걸음이 빨라 따라가기가 참 힘들었다. 길 복판을 걷는 중공군은 처지는 사람 때문에 행렬의 틈이 벌어지면 "콰이콰이대"(한국말로 "빨리 빨리")하며 서둘렀다. 보급품을 휘청거리는 나무 앞뒤에 달아 중간 부분을 어깨에 걸고 빠른 걸음으로 운반하는 중공군도 우리와 함께 행진했다. 포로 이동을 연합군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야간 도보행진이 이루어 진 것 같았다. 부상자 또는 열병환자들이 처지면 총대와 구둣발로 마구 차인다. 뒤에서 총성이 들리면 살려고 필사적으로 따라오다가 걷지 못하고 쓰러지는 동료들이 총살당하는 것이었다. 전우들에게 의지하여 걷는 자들이 늘어만 간다. 첫날밤 행진은 평북 영변을 거쳐 구장 북방의 어느 산골짜기에 산재한 화전민 부락에서 날이 밝아 끝났다. 약 일 백 리 길을 걸었던 것 같다. 나는 외양간에서 십 여명의 동료들과 웅크려 앉아 졸았다. 그날 밤에도, 장거리행진이 있으니 모두 낮잠을 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강추위 속에 외양간에서 꾸벅꾸벅 졸다보니, 틈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햇빛은 어느덧 저녁이 오는 것을 알리는 듯했다. 이윽고 삶은 옥수수가 돌려졌다. 식사 때마다 분배 량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 창피하게도 다툼이 일어났다. 분을 참지 못하여 몇 명이 일어서서 싸우는 자들에게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 때 놈 앞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위신을 잊었느냐? 상급자를 몰라보는 자들은 개만 못하다"며 꾸짖었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나는 정의파로 보이는 이기봉과 친해졌다. 이기봉은 통신병으로서 다부져 보였다. 그의 양 볼은 추위에 유난히 붉었고 통통했다.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하루 백 리 길을 강행군하던 중에 낙오하면 총살당하는 비참함을 목격하면서 평남 안동리를 떠나 평북 구장 북방에 위치한 신흥동, 청천강 서부지역의 태평동을 거쳐 온정리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만포진에서 새로 편성되어 왔다는 일개 대대의 북한 내무성 소속 경비대에게 인계되었다. 그들은 대열에 들어오자마자 순 평안도 말투로 "간나 새끼들 모조리 쏴버리지, 무얼 귀찮게 끌고 가는 거야"하면서 대열의 줄을 지키지 않는다고 마구 발길질을 했다. 동족이라 중공군보다는 좀 낫겠지 하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중공군한테는 우리말을 모르니 통역관을 피하여 욕설도 하면서 화를 풀었는데, 입마저 자갈로 물린 꼴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말 그대로 공포, 죽음의 행진이었다. 닷새 째 되던 날 자강도 관대리라는 곳에서 낮을 보내고 험준한 고령을 따라서 고장이라는 곳을 거쳐 마지막 엿새 째 자강도 초산 땅 화풍광산에 도착했다. 행진이 시작된 지 몇 일이 지나면서 나의 양발바닥에는 온통 고름이 잡혀 쓰리고 아파서 발바닥으로 걸을 수가 없었다. 발바닥을 옆으로 세우고, 나뭇가지 지팡이를 의지하여 힘을 다해 걸었다. 이기봉이 나를 부추겨 주면서 "낙오하면 죽어, 힘내라"하는 격려를 받으며, 이를 악물고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천만다행으로 행진 중 발바닥에서 짓물러 나온 고름이 말라붙고, 아픔이 곧 사라졌다. 행진 중 발진티푸스로 숨진 동료들의 시체를 거적에다 싣고 가서 산밑에 쌓인 눈 속에 파묻을 때는 피눈물이 흘렀다. 누울 수도 없는 험하고 좁은 장소에서 그냥 앉은 채로 숨을 거둔 동료들도 있었다. 식사 때 아무 인기척이 없어서 잠든 줄 알고 어깨를 툭 치면 그냥 쓰러지곤 했다.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뜬 채로 죽은 것이다. 그럴 때면 동료들이 손으로 눈을 쓰다듬어 눈을 감기고 거적에다 싣고 가서 눈 속에 매장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4. 심사를 통한 생사의 가름 길 화풍광산은 아연 광산 이였는데 많은 얼음 동굴이 우리를 맞이했다. 포로들은 한 굴에 약 20 명 가량 수용되었다. 처음 들어서니 동굴 안은 냉골이었고 바닥은 군데군데 빙판 위에 옥수수 대가 깔려있었으며 천장은 굵고 기다란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도착즉시 이곳 소장으로 보이는 이민군 대좌가 광장에 모인 포로들에게 "국방 군 장교는 인민군 군관 대우를 할 터이니 모두 앞으로 나와라"고 여러 번 외쳐댔다. 여러 명이 앞으로 나갔더니 그들을 별도로 세웠다. 인민군 대좌는 "동무들은 동족으로서 포로가 아니라 이승만 역도와 미 제국주의 억압에서 중국의용군 동무들에 의하여 해방된 자들이다. 동무들에게 해방전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내려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에게 감사하며 앞으로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이 있었다. 나와 이기붕은 그자의 넋두리 같은 소리를 뒷전으로 하고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바램의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곳에는 약 천명으로 추산되는 미군과 터키 군 포로들이 우리와 같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의 부대표지와 명찰 그리고 계급장은 찧기고 때묻은 군복에 단정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뼈와 가죽만이 앙상하게 남은 허우대 큰 그들의 모습은 더욱 처참하게 보였다. 그들은 중공군이 관리했다. 시간이 흐르자 같은 방 동료들끼리도 서로 말조차 할 수 없는 공포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주 젊은 녀석이 불쑥 일어나서 "이젠 세상이 바뀌었으니 옛날 대위고, 대령이고 아무 소용없다"면서 흥분 조로 추태를 부렸다. 나는 그 순간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젊은 친구, 이곳에 어떤 분이 계신지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나"하자 주위가 웅성웅성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도 겁에 질린 듯 조용해졌다. 취침시간에 자주 출입하는 자들의 거동이 수상했다. 그들은 그 귀한 담배를 자주 피웠고 누룽지를 어디서 구했는지 자주 씹어 먹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인민군이 몇 명을 매수하여 주로 장교를 색출해내는 공작을 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새벽에 그 젊은 친구가 또 밖으로 나가기에 나는 바로 그 뒤를 따라 가, 동굴 입구에서 "이 개XX, 어데 가는 거야. 너 어제 어떤 뜻에서 그런 말했어"하고 따귀를 두서너 번 갈겼다. 그의 코피가 터졌다. 앞으로 조심하라고 하며 동굴에 들어오는 순간, 좀 떨어진 곳에서 인민군 소성 두 알의 중위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잠시 나를 째려본 후에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나는 동굴에 돌아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혹시 장교신분이 노출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불안해지면서 참을걸 하고 후회가 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국군포로에 대한 소위 심사사업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심사는 밤에만 하였다. 심사 받은 사람의 얘기로는 소속, 성명, 계급, 군번, 본적, 주소, 학력, 그리고 가정환경 등에 관한 것을 묻는다고 했다. 심사에 통과하지 못한 포로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고 통과되면 인민군 후방부대에 편입되거나 후방복구사업에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나는 심사에 대비해서 24시간 내내 계급, 군번, 학력에 대한 질문에 대비한 답을 생각해내는데 온 신경을 쏟았다. 나는 부하가 없는 연락 장교였으므로, 장교신분은 끝까지 감추고, 학력은 소학교 졸업으로 정하였고, 군번은 사병이 당시 0 1로 시작하여 일곱자리라는 것을 동료들한테 확인하고 외우기 쉬운 숫자를 선정하여 0125987정하였다. 그리고 글씨는 왼손글씨로 위장했다. 우리 동굴 사람들의 심사가 거의 끝날 무렵의 어느 날, 한밤중에 자고 있는 나를 무장 경비병이 깨우면서 "동무, 동무, 날래 따라 오라"하면서 어느 언덕 위의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안에 들어서니 낮은 책상 위에 촛불이 켜져 있었고 인민군 중위가 권총을 허리에 찬 채로 앉아 있었다. 무엇보다 방이 따뜻해서 오래간만에 온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 따뜻함은 잊을 수가 없다. 심사관은 나한테 앉으라고 했다. 긴장해서 침이 마르고 입이 바싹바싹 탔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새벽 1시경이었던 것 같다. 낮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나는 그와 마주 앉았다. 심사관은 낯익은 얼굴인 듯했다. 몇 일전 젊은 친구의 따귀를 칠 때 그 광경을 보고간 군관임이 생각났다. "동무 거짓말하면 해방전사의 자격이 없으니 사실대로 말하라"면서 심사를 시작했다. "성명은?" "유 창상입니다." "나이는?" "18세입니다." "학력은?" "소학교 졸업입니다." "소속은?" "7사단입니다." "계급은?" "이등병입니다." 이때 그는 불만스럽게 연필을 종이 위에 놓으면서 "동무, 아직도 속이고 있어"하며 큰소리를 쳤다. 앞으로 24시간의 반성할 기회를 줄 터이니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와서 사실대로 말하라는 것이다. 경비병은 완전히 외진 작은 굴 안에 나를 집어넣고 입구에서 보초병이 감시를 했다. 혼자서 꼼짝달싹도 못할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다음날에 어떻게 대답할까하는 걱정으로 추위도, 배고픔도 다 잊었다. 다음날 경비원의 안내로 거의 같은 시간에 심사관과 다시 마주 앉았다. "동무, 반성했소?"하면서 전날과 같은 순서로 심사를 했는데 또 계급에서 이등병이라고 하자, 이번에는 벌떡 일어나서 권총을 거대며 쏠 것같이 위협하고 쌍소리로 욕을 하면서 앉아있는 나의 무릎을 발로 짓밟고 따귀를 몇 차례 갈겼다. 마지막으로 한번의 기회를 더 줄 터이니 이번에 거짓말하면 끝장이라는 것이다. 또 작은 동굴에 갇혀 체념 끝에 "남자답게 계급을 밝히고 끝장을 낼 까"하다가도, "아니,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엇갈렸다. 문득 일등병인데 이등병으로 속였다고 사과하면 좌우간 심사의 결론이 날 것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날 역시 같은 순서대로 심사를 하는데 "계급은?" 하는 질문에, "군관동무, 사실은 일등병인데 이등병으로 속였습니다"하니 "동무, 그렇고말고 잘했소"하면서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이제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심사는 일사천리로 끝나고 삼일만에 동료들이 있는 동굴로 돌아오니 이 기봉등 동료들이 잘못된 줄 알았다면서 나를 기쁘게 맞이했다. 심사가 끝난 뒤, 그는 "동무, 몇 일전에 다른 동무를 구타한 일이 있지? 왜 때렸어?"하고 나에게 물었다. "네, 그는 우리 단체 생활에서 다른 동무들에게 자주 시끄럽게 소란을 떨어서 내가 한방 쳤습니다."하고 어린애같이 말했더니, "제국주의 군대장교는 부하를 구타하지만 우리 인민의 군대는 그런 일이 절대 없다"며 "앞으로는 다른 동무를 때려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면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심사가 끝나고 나니 '곧 무슨 소식이 있겠지' 하는 기대감이 생겨 초조했던 심사 전 보다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동굴 안에는 때아닌 발진티푸스 열병이 엄습해 왔다. 각 동굴에서는 많은 환자들이 고열로 의식을 잃고 코피를 쏟으며 죽어갔다. 군 의무 부대에서는 소독약조차 없어 이를 잡으라는 소위 이 소탕명령까지 내리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 동안 뜻이 맞는 동료들을 몇 명 더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미군부대에서 문관으로 일했다는 정 광남, 중사라고 알려진 과감한 성격의 김 학수, 그리고 과묵한 석 진수 소위였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연합군의 새로운 북진 소식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5 포로의 강제노동 1951년 2월 중순경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포로들이 광장에 집합한 지 얼마 후에 처음 보는 인민군 내무성 소속의 책임자로 보이는 대좌의 지휘아래 인계인수가 시작되었다. 수명의 인민군 군관과 50여명 정도의 그들 병사가 수용소 측으로부터 우리를 인수하여 한사람 한사람씩 환자가 아닌지 점검했다. 인원 점검이 끝난 후 우리는 새로운 주인에게 끌리어 행선지를 알 수 없는 행진을 시작했다. 남으로 행진 끝에 고장이라는 곳 근처의 화전민 부락에 자리를 잡고 쉬었다. 이곳에서 복구부대가 편성되었다. 약 수백명 정도로 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전체 몇 개 부대가 되는 지는 모른다. 소대장 급 이상은 인민군 군관이 맡았고, 그 이하 직급은 그들의 하사관이 임명되었다. 나는 다행히 이 기봉, 김 학수, 석 진수, 정 광남과 같은 중대에 배치되었다. 우리는 계속 남진하여 사흘 밤 행진 끝에 우리 복구부대는 평북 희천 북방에 도착하여 여러 산간 마을에 소대와 중대 단위별로 자리를 잡아 분대 단위로 각 민가에 분산 수용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군대교육인 정치상학, 제식훈련, 군가 등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이곳에서 약 2주간의 교육이 있은 다음 계속 남진하여 몇 일 만에 평남 순천 가까운 촌락마을에 이르러 교육훈련이 다시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탈주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캄캄한 추운 밤중에 전원이 마을 앞 논바닥에 비상 소집되어 인원점검을 받았다. 소대장과 중대장은 독기 찬 욕설과 공갈 협박을 퍼부었다. 분위기가 험악해 지더니, 갑자기 출발명령이 떨어졌다. 하루종일 주간 행진 끝에 도착한 곳이 평남 순안의 옥정리라는 마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느닷없이 삽과 괭이 그리고 질 통이 주어져 바로 비행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천 여명의 국군과 미군포로들이 혹사당하고 있었다. 유엔 공군기는 간단없이 내습해왔다. 시설위주의 폭격이고 군사시설 공사저지의 폭격이었지만 이로 인한 포로들의 애꿎은 희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공사장 주위의 인민군 대공포화도 만만치 않아 밤하늘에 비행기의 불빛과 대공포화의 불빛이 서로 교차되며 그 속도가 선명하게 비교되는 장면을 폭음과 함께 늘 보아야 했다. 매일 새벽에 먼동이 트면 고달픈 새우잠에서 깨야만 했다. 세수할 사이도 없이 옥수수 조밥을 씹고 나면 바로 일터로 끌려간다. 하늘의 별을 보면서 작업장에 도착하면 그날의 작업량이 소대, 분대 순서로 각 개인에게 할당되었다. 그리고 책임량을 초과달성하기 위하여 실적대비 그래프를 작성하고 개인마다 달성 율 성적을 매겼다. 공습 때문에 책임량을 달성하지 못할 때에는 밤을 지새워서라도 책임량을 완수해야했다. 매주 2회에 걸쳐 새벽 2시까지 정기적으로 야간작업이 있었다. 작업이 끝나면 이틀 날 새벽까지라도 중대별로 집합하며 지칠 대로 지친 몸을 간신히 가누고 이른바 작업총화에 참여해야 했다. 거기서 책임을 완수 못한 사람은 자아비판을 해야했다. 여기서 책임 기준은 그날 어느 사람의 최고기록을 기준으로 삼았다. 자아비판은 자기의 정신력부족, 게으름 및 나태함 등을 시인하면서 앞으로는 책임량을 완수하겠다는 약속을 전원 앞에서 다짐하는 것으로서 참 부담스럽고 귀찮은 모임이었다. 계속 실적이 부진하면 사상까지 의심받게 되었다. 우리는 노예와 같이 이런 강제노동을 매일 매일 해야만 했다. 탈주사건 후, 긴장이 좀 풀린 1951년 3월말 경쯤 이 기봉은 나와 함께 탈주할 것을 날짜까지 정하면서 제의해 왔다. 나도 동의했었다. 그런데 나에겐 이 기봉을 위해서도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될 사건이 발생했다. 대대소속 중위계급의 보위군관이 가끔 나에게 애로사항을 물으면서 나의 동향을 살피곤 했는데 이 기봉과 비밀접촉을 한 바로 다음날도 아주 능글맞게 생긴 함경도 말투의 보위군관이 또 접근해 왔었다. 화풍 광업소에서 조사 받은 나의 심사 서류가 그에게 이첩되었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그 치가 왔다 가면 기분이 늘 좋지 않았고, 나는 탈주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봉은 정한 날짜에 뛰어 도망쳤다. 이 기봉이 떠난 다음 날부터 중대장은 연 사흘간 밤중에 전원을 광장에 비상 집합시켜 인원점검 및 탈주자를 공개총살 시킨다는 발악적인 경고를 하였고 작업강도도 심해 졌다. 이 기봉이 체포되어 압송중인데 도착 즉시 공개 처단하겠다는 협박도 하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다시 이동명령이 내려져 황해도 황지 비행장에서 노동을 했다. 그후 평양시 미림, 평남 안주, 그리고 평북 의주비행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이동은 언제나 야간 도보행진으로 이루어 졌다. 나는 1951년도에 발생한 야맹증으로 야간 이동할 때는 막대기를 잡고 동료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참 힘들었다. 각 비행장에서의 강제 노동의 강도는 순안에서의 것과 거의 같았다.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서 환경의 차이는 있었다. 황주에서는 전방과 인접한 관계로 작업시간 외에는 방공호 안에서 있었고, 초소경비가 강화되어 도주의 꿈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미림에서도 방공호 안에서 생활을 했으며, 역시 초소경비가 심했다. 유엔 항공기의 폭격이 24시간 쉴 사이 없이 계속되었으며 포로들로 하여금 특공대를 만들어 시한폭탄 철거작업을 감행시켰다. 많은 포로들이 이 작업 중에 희생되었다. 의주, 안주는 아주 후방이라 민박이 허용되었다. 지역주민들이 친절하였고, 귀한 음식과 겨울철에 장갑, 양말 등도 받았다. 특히 안주군 연호면 동사리에 민박하고 있을 때는 인민군 입대를 기피하여 숨어있었던 그 집 아들이 한밤중에 우리 방에 들어와 조심스럽게 첫 접촉을 한 뒤에 정기적으로 여러 번 만나서 우리에게 여러 정보를 제공해 준 일도 있었다. 주민 대부분이 남쪽을 그리워하는 면을 우리에게 솔직하게 보여 주었다. 6 복구부대에서 포로수용소로 이송 1952년 초에 평남 안주에서 이동한 곳이 평남 재동 탄광이었다. 거기에는 일자형 광부 주거용의 텅 빈 막사가 많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많은 포로들이 도착하여 대대적인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그간 내통했던 정 광남, 김 학수 등과는 헤어지고, 새로 윤 경문, 최 근명, 백 시경, 양 광일, 전 응근 등 참 좋은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학습위주의 수용소 생활을 했고, 포로 고유 번호를 받았다. 이 번호가 포로명단에 등록되어 포로 교환 시 등록된 포로들로서 송환됐을 것으로 판단이 간다. 등록된 포로 1명이라도 죽으면 동료포로 10 명 정도로부터 사망확인 손도장을 받아갔는데 이것은 등록된 포로 숫자와 실제 머리 수를 맞추기 위한 증빙서류 같기도 했다. 작업부대에서는 죽은 포로들에 대한 그런 확인이 없었다. 1952년 여름철에 재동 수용소에서 평양 강동 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도 학습위주의 수용생활이었고 이미 많은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재동에서 온 우리 일행은 다행히 재편성 없이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곳에서 중학교 동기이고 연락장교 5기 동기인 김 대소 중위를 충격적으로 만났다. 야외 공동화장실에서 앞뒤에 앉아 용변을 보는 체하면서 다른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급하게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장교신분을 속였다는 것과 포로 된 장소를 확인하였다. 그는 강원도 횡성에서 1951년 초에 체포되었고 이름은 가명으로 이 한복이라고 했다. 강동 수용소에서 전 포로들은 놈들이 등록된 포로들을 가혹하게 처형 또는 처벌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휴전협정이 곧 조인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이 때문에 수용소 질서는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식생활 개선, 의약품공급, 정치학습 중지 및 자유시간 등을 외치는 단체시위가 연일 일어났다. 경비병들은 수용소 내에서의 이런 시위를 제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1952년 겨울에 야간 화차에 실려 만포진에 인접한 시중이라는 곳 모처에 위치한 학교 건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는 중립국 대표들이 이 학교를 방문하여 국제적십자에서 보내는 선물을 포로들에게 전달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나는 겁 없이 그들을 맞이하는 영문 환영사를 쓴 종이를 거적 잠자리 밑에 숨겼던 기억이 난다. 중립국 대표를 만난다는 희망찬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나를 포함한 30명 정도의 포로들을 불러내어 학교에서 좀 떨어진 목장으로 보이는 산꼭대기의 2층 목조 건물에 격리 수용하였다. 목장에는 검고 흰 무늬의 식용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만약 휴전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는가?"하는 내용의 심사만을 무서운 공포분위기 속에서 연일 계속하였다. 포로 자유송환에 대한 저들의 대비술책으로 생각하고, "가겠다"라는 답을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심사에 응했다. 나는 연 삼일 같은 질문에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답만을 초지일관했다. 그 답을 하면서도 '혹시 신상에 해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나 반드시 휴전이 되어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포로 고참이고 의심받을 만한 입장 이였기에 조심도 되었다. 7 포로교환으로 귀환하던 날 마지막 비상소집으로 우리 모두가 만포진에서 야간열차에 실려, 내 기억으로는 1953년 8월 중순경 평양시에 도착했다. 어느 큰 건물 캄캄한 방안에 몇 사람씩 갇혀 아무 일도 없이 먹고 자기만 하면서 칠 팔 일이 지났다. 하루는 인민군 중좌가 와서 남반부에서는 이승만 역도들이 중국 인민해방군 및 인민군 포로들을 마구 석방했다는 욕설로 우리를 긴장시켰다. 참 무섭고 떨렸다. 이때부터 초조해지면서 하루가 천년같이 길게 느껴졌다. 아마 1953년 8월 23일 새벽이었을 것이다. 기상과 함께 인민군 안내를 받아 간 곳은 같은 건물 내에 있는 욕실이었다. 욕탕에 들어가기 전에 옷을 벗고 알몸으로 심사관 앞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나의 왼팔 팔뚝에 영문으로 새긴 대한민국 국군, 중위 등의 문신을 보고 나를 째려보면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에 새긴 나의 소속 축구팀의 이름이라고 했더니 그는 손짓으로 탕에 들어가라고 했다. 몸을 씻고 나오니 중국산 작업복 내의, 운동화, 모자, 담배, 그리고 국제적십자사가 보낸 선물보따리를 주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선물을 들고 식당에 들어가 잘 차린 마지막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 후 어느 광장에 도착하니 우리와 같은 복장을 하고 선물 보따리를 든 많은 동료들이 호명하는 대로 한사람씩 수송차에 올랐다. 드디어 내 이름과 번호를 불렀다. 그 순간 살아 돌아간다는 표현 못할 감동에 사로 잡혔다. 한 차에 20명 정도 승차했고 내무성 소속의 정치선전원이 한사람 동승했다. 남쪽으로 향하는 포로 수송차는 줄을 지어 달렸다. 정치선전원은 마지막 순간까지 "동무들! 이제 그리운 고향으로 갑니다. 이런 길을 열어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에게 감사하며 충성합시다"라는 판에 박은 선전만 되풀이했다. 어느덧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측에서 미소를 짓고 교통안내를 하는 키가 후리후리한 미군 헌병이 보였다. 그 순간 차안에서 "와~"하는 함성과 함께 그 정치선전원을 구타하고 발길로 막 차는 사건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또 그 동안 노예와 같이 우리를 억압했던 저들의 어떤 것도 받을 수 없다는 복수심에서 입고 있던 옷, 운동화, 모자 등을 차 밖으로 던져버리고 알몸으로 소리높이 울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힘껏 외쳤다. 문산에 도착하자 인수 차 우리에게 도착한 헌병들이 알몸으로 흥분된 우리들을 진정시키면서 우리에게 작업복, 내의, 군화 등을 공급했다. 다시 우리는 앰뷸런스에 갈아타고 문산역 근방에서 의료진의 진료를 받았다. 또한 인수장교가 한사람씩 명단과 대조확인을 했다. 이때에 나의 계급도 일등병에서 중위로 바로 잡았다. 열차 편으로 문산을 출발하여 인천에 도착, 일박 후 미군 선박 편으로 거제도 서편에 가깝게 위치한 용초도에 도착했다. 다음날 귀환장병 환영식이 있었다. 사선을 넘던 생환의 기쁨과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7천 여명의 귀환장병들이 그 동안 억압과 굶주림 속에서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모였다. 그 중에는 미국으로 이민간 김대소, 태백시에 살고있는 백시경, 강원도의 윤경문, 안산시의 전응근, 지금은 소식이 끊긴 양광일등 노예와 같은 포로생활에서 피로 맺은 전우들이 많이 있었다. 육군본부에서 온 준장급 장성의 "살아서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 온 것을 환영한다. 제네바협정에 의하여 여러분은 전역과 동시에 각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일정기간의 이곳 생활을 통해서 특히 건강을 회복하여 부모형제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요지의 환영사가 있었다. 환영식이 끝나자 귀환장병들은 일제히 상부의 전역 방침에 반대하여 혈서 단식을 통하여 전역방침을 철회하고 원대 복귀하여 재복무할 것을 요구하였다. 혈서내용은 "우리는 재복무를 원한다.", "침략자를 물리치자."등으로, 이는 마음속에 깊이 사무쳤던 적개심이 폭발하여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애국심이었다. 다음날 국방부에서 소장급 장성이 헬리콥터 편으로 급거 용초도에 도착하여 모인 전 귀환장병에 대하여 대형 확성기를 통해 간단한 환영사를 시작으로 "귀환장병 일동의 충성 어린 애국심을 받아들여 전 장병들은 재복무하게되었다."는 요지의 훈시가 끝나는 순간 대한민국 만세소리가 용초도를 진동했다. 귀환장병들은 이곳에서 신체검사, 군 정보 부대 및 첩보부대의 조사를 받은 후 정훈 교육을 통한 국내외 최근정세, 귀가 및 원대복귀에 관한 교육을 받으면서 약 1개월간 머물었다. 2주간의 휴가를 받아 만 삼 년만에 집을 찾으니 모든 것이 궁금했고 마음은 급했다. 저녁 가까이 마을에 도착하여 집 뒤편 밭에서 일하시는 아버님을 뵙고 인사를 여쭈었더니 한 살 아래 동생으로 착각하셨다가 곧 나를 알아보시고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바라만 보셨다. 실종사실을 이미 확인했던 부친께서는 내가 죽었을 것으로 아셨다. 귀환한 나의 건강은 아주 좋지 않았다. 야맹증이 심했고 걸으면 땅이 움직이듯 마치 파도 위를 걷는 불안한 상태로 아주 어지러웠었다. 정신력과 한편으로는 몸조리를 하면서 일가 친척 찬구들을 만나고 각 기관에서 마련한 군중집회에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데 시간을 보내다보니 원대 복귀할 날이 급히 다가왔다. 3년만에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7사단에 원대 복귀하여 1955년에 학창복귀로 제대하였다. 8 결론 나는 평남 덕천에서 1950년 11월 28일경 중공군에게 포로 되어 1951년 초 초산 화풍광산에서 특별심사를 거쳐 장교의 신분을 속이고 살아 남았다. 그 광산에서 나와 복구부대에 편입되어 평남 순안, 황해도 황주, 평양시 미림, 평남 안주, 그리고 평북 의주 비행장에서 지옥 같은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었던 1952년에 평남 제동포로수용소와 평양 강동 수용소에 이송되어 학습위주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휴전협정 조인 이후 포로송환으로 1953년 8월 23일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했다. 나는 3년간의 실제 포로 생활을 통해서 아직도 수천 명 정도로 추산되는 돌아오지 못한 포로들이 어떻게 잔류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가상되는 몇 가지 답을 다음과 같이 해 본다. 그리고, 70세 이상의 고령인 그들이 생전에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당국이 정책을 마련하고 강력히 시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첫째, 포로 된 자는 모두다 내가 화풍광산에서 심사를 받은 것처럼 심사를 받았을 것이다. 적발된 장교, 고급하사관, 그 당시 환자 및 이북출신 등의 소위 성분 불량자들은 작업부대에도 배치 받지 못하고, 아오지 특별수용소 같은 곳에서 포로가 아닌 가혹한 죄수생활로 이미 죽었거나 앞으로 죽음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숫자가 과연 얼마니 될 것인가? 둘째, 복구부대에 배치된 포로들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대대, 중대, 소대 중에서 또는 다른 대대로 재편성, 재배치되었다. 그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서로 서먹서먹하다가 친해질 만 하면 또 재편성이 이루어져 다시 헤어지게 됐다. 3년간 이렇게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그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할 수 없어도 그 숫자는 엄청나게 많다. 휴전 후 귀환한 장병들은 용초도에서 약 1개월간 머물면서 제반조사 교육을 받았다. 나는 대대장 직책으로 귀환 장병 1개 대대의 병력을 상부지시에 의하여 지휘했다. 그런데 거기서 포로작업부대 또는 수용소에 낯익었던 많은 동료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셋째, 포로들 중 일부는 재동 포로수용소 및 강동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고유번호를 받았다. 그 번호로 포로교환명단에 정식으로 등록된 것이다. 복구부대에 잔류한 그 많은 포로들은 포로 송환 시 등록되지 않아 제외되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포로고유번호를 받았지만 저들이 어떤 기준으로 분류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넷째, 1952년 겨울에 강동 수용소에서 나를 포함한 300명 정도가 만포진에 인접한 시중이라는 곳의 모처에 위치한 학교 건물로 야간 화물차에 실려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만약 휴전이 되면 고향에 돌아갈 것인가?"라는 특별심사가 아주 공포 분위기 속에서 있었다. 등록된 포로일지라도 혹시나 신상에 해가 될까 두려워서 본의 아니게 안가겠다고 답을 한 포로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다섯째, 6.25당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회고록, 국방부 전사 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전쟁 요약등 자료와 1950년에 포로가 되어 44년만에 탈출한 조창호씨와 얼마전 작고한 북한문제 전문가로 알려진 고 이기봉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휴전후 5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포로가 돌아오지 못했고 그간 사망자 숫자를 감안 하드라도 수천 명 정도는 함경북도 아오지의 특별수용소 기타 여러 곳의 교화소 탄광 등에 수감되어 있거나 억류되어 있으리라 보고 있다. 휴전 후 포로교환으로 귀환한 장병들은 7천1백42명이다. 이 자리를 빌려서 평생을 정의롭게 조국을 위해 싸우고 많은 교훈을 남기신 고 이기봉 선생 영전에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 선생의 저서로는 1951년 포로 생활중 복구부대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후 돌아와서 쓴 "第 5 戰 線 ( 長 白 山에서 臨 津 江 )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柳 昌 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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