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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있으면 설날입니다. 설날 풍경이야 전국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설날은 무척 설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설날인가? 어른들에게 세배가 끝나고 나면 또래끼리 짝을 지어 동네 노인들에게 세배를 하러 다니곤 했습니다.어쩌다 백원짜리 하나 건네 주는 노인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탕이나 떡, 과일, 쌀과자 등을 줍니다. 어떤 노인분은 초등학생 꼬맹이들인 우리들에게 정종을 한잔 따라 주기도 합니다. 노인들 위주로 세배를 돌지만 친구 부모님에게는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제일먼저 세배를 하곤 했습니다. 동네 친구 아버지 중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 한분 계셨습니다. 저와 세배를 다닌 친구 일행은 그 친구 아버지 집에 도착해서 안방문을 휙 열고 『세배하러 왔습니다』하고는 방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친구 부모님을 모셔놓고 큰절을 한 것 까지는 좋았습니다. 우리는 뭔가 좀 허전한 것 같아 단체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고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따사롭던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습니다. 깐깐한 친구아버지는 우리가 일어 섰다 앉기도 전에 『어른한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이 아니야. 그러면 자네들 아버지가 욕먹어...』하며 혀를 찼습니다. TV에서 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기에 그 말이 입에 배어있던 차에 한명이 그 말을 하자 모두가 엉겹결에 따라 해버린 것입니다. 『어른들에게 세배할 때는 그냥 절만하는 것이 제일 좋고, 정 한마디 하려면 「건강하십시오」라고 하면 된다』 세배하러 왔다가 우리는 꿇어 앉은 채 친구 아버지의 예절 교육을 무릎이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안동식혜가 한 상 나왔지만 숟가락을 갖다 댈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 우리 할머니에게 세배 오는 사람들을 가만 살펴보니 모두들 그냥 절만 하고 가거나 간혹 『몸 편찮은데 없냐』고 한마디 물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그런 불경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큰 절할때는 무조건 입을 꼭 다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환씨가 이번에는 국정원 도청 의혹과 관련한 글을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는 도청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 대해 『(검찰이)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고 말했습니다. 현재로서 물증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나라당이 지난해 대선 직전 폭로한 도청 문건은 『국정원측이 메모보고서 양식으로 작성한 것을 외부에서 다시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인터넷에 올린 글 중 일부입니다. 김기환씨는 한나라당이 공개한 문건이 국정원에서 작성한 메모보고서와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영일 사무총장이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이 폭로한 문건은 국정원 내부 문건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동일해 보입니다. 그는 『국정원이 도감청한 내용을 인쇄할 수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그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검찰 수사에 대해 『국정원측이 증거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도감청을 했다는 물증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관련 부서를 없앴을 뿐만 아니라 관련 직원들도 여러 부서로 내보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기환씨는 또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과 신건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도감청 문제에 대해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정원의 도감청 행위에 대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 『오히려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도감청과 관련해 국정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불법적인 도감청은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도청관련 시설도 없다는 것입니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의 말입니다. 『얼마 전 검찰이 불시에 국정원의 감청시설에 대해 현장조사를 벌였습니다. 국정원 입장으로서는 대단히 당황해 할만한 일이었지만 국정원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조사를 받아들였습니다. 현재로서는 불법적인 도청은 없습니다』 감청은 통신비밀보호법 7조에 의해 고등법원 수석 부장판사의 허가나 대통령의 승인 하에 이루어지는
안동식혜는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이 음식은 안동 문화권인 경북 북부 지방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입니다. 같은 문화권인 의성이나 예천 서부지방 등지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안동식혜」라고 이름 붙여도 그다지 큰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안동에서는 흔히 「식혜」라고 하면 이 안동식혜를 칭하는 것입니다. 타 지방에서 식혜라고 부르는 것을 안동에서는 「감주(甘酒)」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해서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따라서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를 안동식혜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식혜라고 합니다. 안동식혜는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속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그 맛이 워낙 독특해서 처음 먹는 사람은 이게 무슨 맛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겨울철에 만들어 먹는다는 것과, 무우채, 생강, 고춧가루가 기본으로 들어가고 그 외에 당근, 땅콩, 잣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발효를 시켜서 만드는데 이 때문에 독특하게 삭인 맛이 나고 많이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안동 지방에서는 설날 식혜를 만들지 않는 집이 없으며, 찾아 오는 손님에게는 꼭 식혜를 대접합니다. 그 맛이 집집마다 천차 만별이라 돌아다니며 맛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안동식혜가 발효식품이라는 점에서 젓갈의 한 종류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경북 북부 내륙지방에서는 생선이나, 새우 등의 젓갈 종류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무 등 야채를 이용해서 젓갈을 담았다는 것입니다. 바다 음식이 얼마나 귀했냐고요? 이쪽 지방 옛날 노인들은 평생 소원이 새우젓하고 밥한번 먹어 봤으면 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구한말 혹은 일제시대 중국 연변 지방으로 옮겨간 안동출신 후손들이 이 식혜를 만드는 것을 보면 매우 걸죽하게 만들어 마치 죽처럼 보입니다. 현재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를 이처럼 심할 정도로 걸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타지에서 온 분들은 안동댐 올라가는 민속촌에 가면 평소에도 안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였습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데 동네 입구에 있던 행상집(상여집)의 문이 열려 있고 안에 있던 행상(상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른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동네 행상을 새로 장만해서 옛날 행상을 오늘 불태웠다』하는 것입니다. 『아뿔사, 하느님 부처님 맙소사...그걸 누가 태웠어요?』 아무리 후회해 봐야 행상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동네의 노인이 귀신 붙어 있는 옛날 행상을 태워버려야 마을이 평안하다며 태우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노인의 말이 곧 법인지라 아무도 대꾸를 못하고 행상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새로 장만한 행상은 알루미늄으로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었습니다. 불타버린 행상은 많은 사연을 간직한 행상이었습니다. 일제시대 말기, 동네에 행상이 없어서 마을 사람들은 초상이 나면 이만 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행상을 멀리 떨어진 이웃 마을에서 빌려와서 사용했는데, 사용하고 나면 사용료를 그 동네에 주어야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 했습니다. 그래서 행상을 하나 마련하기로 결론을 냈지만 문제는 행상을 마련할 만한 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북과 장구, 징, 꽹과리를 메고 임시 광대패를 만들어 예천, 안동 일대 마을을 돌아 다니며 일종의 구걸 공연을 나섰습니다. 이렇게 여름 한철 내내 구걸 공연을 나선 끝에 겨우 행상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안동 풍산 어느 곳에 아주 기술 좋은 목수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노인에게 땅을 얼마간 사주고 행상 제작을 의뢰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미 그 노인을 제외하고는 행상 제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귀했다고 합니다. 노인 혼자 여러 달 동안 매달려 행상을 제작했습니다. 행상을 가져 오는 날 동네에는 성대한 맞이 굿이 펼쳐 졌습니다. 행상의 위 부분은 각종 귀신과 호랑이를 탄 저승사자 등이 死者를 호위하고, 행
대구에 있을 때 어느 해입니다. 그 해 비가 많이 내렸고 일부지역에는 물난리가 났습니다. 그 폭우로 대구 인근 산간에 있던 많은 무덤이 무너지거나 훼손되었습니다. 산사태를 만나서 무덤이 쓸려 갔다면 모를까, 산 기슭에 멀쩡하게 있던 무덤이 비가 온다고 힘없이 무너지지다니... 저는 처음에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의 장례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어서 무덤 만드는 과정을 보고 무덤이 왜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 시골에는 사람이 없어서 동네에 누가 죽으면 이웃 동네에서 인부들을 사와야 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반대로 급격하게 도시화가 된 지역에서는 사람은 많을지라도 이웃끼리 서로 무관심하다 보니 인력시장에서 인부를 사와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일당 받고 급하게 조직된 인부들이라 상여소리를 비롯 뭘 하나 제대로 할 리가 없습니다. 그나마 장지부근까지는 영구차로 운반한 고인을 다시 상여에 옮겨 산소까지 이동하는 것을 보니 비록 도시에서 치르는 장례식이지만 가족들이 고인에 대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짧은 거리였지만 상여 없이 시신이 든 관을 메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지에 가니 미리 포크레인이 와서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관을 땅에 묻자 포크레인이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뚝딱 뚝딱 두 번만 흙을 쌓으니 봉분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봉분 위에 올라가 형식적으로 몇 번 다지고 내려오자 포크레인이 봉분을 꾹꾹 눌러 다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봉분에 떼를 입히자 무덤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무덤이라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제대로 다져지지 않아서 비만오면 쉽게 무너졌던 것입니다. 옛날의 무덤 만드는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하관을 하고 나면 「덜구지」가 이어 집니다. 덜구지란 무덤을 다지는 작업을 말합니다. 덜구지는 처음 관을 무덤에 넣고(혹은 관은 불태우고 시신만
어느 날 식당에서 삼겹살을 먹다가 건네 편에 앉은 사람보고『거기, 나물좀 건네 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여자 분은 제가 좀 건네 달라는 나물 바구니는 주지 않고 식탁 위에서 무엇인가 열심이 찾았습니다. 저는 또 다시 『나물 바구니 거기 옆에 있잖아요』했습니다. 그러자 여자 분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하는 말이 『호호호, 이게 나물이에요?. 야채지... 나물과 야채도 몰라서 어떻게 기자하겠어요』하는 것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여자 분들도 『시골서 자랐다면서 나물이 뭔지도 몰라요』하며 덩달아 구박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말을 배우면서부터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물에 대한 개념이 서울에 오니 바뀌었나하며 갑자기 어리둥절 해 졌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고향이 같은 경상도 분이 많아서 『이 바구니에 담긴 것이 나물 아니에요?』하고 응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전부다 하는 말이 『그건 야채죠』하며 제 편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바구니에는 상추가 가장 많았고 그 외 깻잎 등 삽겹살 쌈을 싸 먹는 각종 채소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씩 나물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대부분은 상추와 배추는 야채에 포함되지 나물에 포함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양념으로 무친 것만 나물이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취나물 등 산나물 등이 자기가 아는 나물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럼 『무우청, 시래기 등은 나물이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무엇이 나물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먼저 국어사전에 나온 정의를 보겠습니다. --인터넷 검색 국어사전-- 나물[명사] 1.식용할 수 있는 나뭇잎이나 풀을 통틀어 이르는 말, 또는 그것을 무친 반찬. 2.채소를 여러 가지 양념으로 무친 반찬. 채(菜). 나물은 몇몇의 특정 채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들에서 나는 먹는 풀은 전부 나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상추, 배추, 무청, 취
자치기는 겨울철에 즐겨 하는 놀이입니다. 한번 시작하면 해가 져야 끝을 보는 놀이기도 했고요. 지방마다 노는 법이 조금씩 다르고, 여러 단계로 나누어 놓은 지역도 많습니다. 워낙 전국적으로 놀았던 놀이라서 규칙이 많을 수 밖에 없으니 『이것이 정답이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래 소개 한 자치기는 제가 어렸을 때 놀았던 방법입니다. 이 글을 다 쓰고 어릴 때 자치기를 하면서 놀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여 자치기의 세부적인 규칙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인했으나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이 없더군요. 결국 아래 쓰인 모든 것은 저의 기억에 의존해 썼습니다. -----------아래----------------- 자치기의 놀이 기구는 「큰자」와 「작은자(자치기 부랄:지방마다 이름이 다름)」밖에 없습니다. 큰자의 길이는 대체로 손끝에서 팔꿈치 부근까지 오면 됩니다. 부랄자는 손바닥 길이 만합니다. 부랄자는 평평한 바닥에 놓고 큰자로 한쪽 끝을 내려 쳤을 때 공중으로 튀어 오를 수 있게 양쪽 끝을 어긋나게 깎습니다. (부랄자 양끝의 깎인 모양은 주전자 꼭지를 생각하면 쉽다) 자의 재료가 되는 나무는 아무 나무나 써도 좋지만 어미자로 내려칠 때 부랄자가 자주 갈라지기 때문에 재질이 약한 아카시아 나무는 좋지 않습니다. 부랄자는 갈라지거나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여분으로 두 서너 개 더 준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편을 가릅니다. 놀이 시작 전에 바닥에 부랄자 길이 보다 조금 크게 세로(「ㅣ」) 형태로 땅을 팝니다. 판 홈 주위에 직사각형으로 금을 칩니다. 한번 공격은 야구처럼 세 명까지 할 수 있습니다. 공격수는 먼저 바닥에 난 홈에 가로로 부랄자를 걸쳐 놓고 어미자로 수비가 있는 전방을 향해 힘껏 떠서(튕겨겨) 날려 보냅니다. 날아 오는 부랄자를 땅에 떨어지기 전에 수비수가 손으로 받으면 부랄자를 날린 사람은 죽습니다. 부랄자를 날리는 사람은 어미자로 최소 다섯자 이상을 날리지 못해도 자동으로 죽습니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복장을 한 여러 명의 어른들이 장화를 신고 우리집 안방으로 쳐 들어 왔습니다. 이들은 천정에 못을 박고 벽을 뚫고 하더니 무엇인가 설치를 하고는 사라 졌습니다. 그 날 이후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광창에 호롱불을 얹어 놓고 밤을 밝혔던 산골마을에 전기가 들어 온 것입니다. 지금이야 초를 아주 우습게 알아 하룻밤 촛불시위에 수만 개를 날려 버릴 정도가 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초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고는 매일 밤 촛불을 켠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촛불은 호롱불에 비해 몇 배나 밝습니다. 이렇게 초도 귀하던 시절 갑자기 전깃불이 들어왔으니 동네 노인들의 눈이 휘둥그레 질 만했을 겁니다. 전기가 들어온 후 동네 부잣집에서 TV를 들여 놓았는데, 밤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몰려들어 마당에 멍석을 깔고 TV를 봤습니다. 당시에는 밖에 바람이 불고 이슬비만 내려도 정전이 되었습니다. 1980년 중반에 와서야 기술이 좋아 졌는지 왠만한 태풍이 와도 전기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또 5촉짜리나 30촉 전구를 쓰는 집이 많았는데, 이 싸구려 전구가 툭하면 나가서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의 초가집도 걷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묵은 초가집을 걷어내면 지붕에서 뱀도 나오고 특히 굼벵이가 많이 나옵니다. 마당에 떨어진 굼벵이를 닭이 달려들어 신나게 쪼아 먹습니다. 어느 공무원의 아이디어인지 부근에 있는 하회마을은 초가집을 걷어 내지 않고 그냥 남겨 놓아, 오늘날 훌륭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동네에 대형 마이크가 들어오더니 매일 아침마다 새마을 노래를 틀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밤낮없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길을 넓히고 수로를 만들고 상수도를 놓았습니다. 이렇게 단체 노동을 하는 것을 「부역」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점심도 지급되지 않는 완전한 무보수 강제 노역의 일종입니다. 부
저의 고향에는 아직도 머슴살이를 하는 노인이 있습니다. 지난 설 때 시골에 내려가서 이 노인이 길을 걸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까지 저 노인이 살아 있다니...』 기억 속에 까맣게 잊고 있던 노인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그 노인이 처음 우리동네로 들어왔던 날을 생각했습니다. 제 기억에 이 노인은 제가 초등학교 4, 5학년일 때 우리 동네로 들어 왔습니다. 그때도 지금 살고 있는 주인 집의 머슴으로 왔습니다. 당시 노인의 나이가 50대 초반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백발에 허리가 구부정한 것이 칠십대는 되어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노인이 된 이 사람을 「00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장가를 간 젊은 청년들은 이 머슴 노인에게 높임말을 쓰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머슴살이를 「남의 집 살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에 공장이 적었기 때문에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특별히 할 일이 없는 한 동네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땅은 제한되어 있고 사람은 많으니 항상 가난한 삶이 이어졌습니다. 부모에게 물려 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천하 장정인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품을 팔러 다니거나 남의 집 살이를 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신혼 살림에 젖먹이 마누라에게 맡기고 1년 혹은 3년, 심지어 10년 동안 남의 집 살이를 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머슴이란 비록 계약에 의해 주인집의 농사를 지어주는 신분이지만, 머슴살이는 사실상 종 살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머슴들은 아무리 날이 추워도 수 십리 산 길을 헤매며 나무를 한 짐씩 해와야 했고(1970년초반까지만해도 땔감을 한 지게 얻기 위해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야 했다), 꼭두새벽에 마당을 쓸어야 했으며, 저녁에는 새끼를 꼬아야 했습니다. 남편이 머슴살이를 하면 부인은 아이를 혼자 키우며 온갖 험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일년 열 두 달 쉬지 않고 일을 하고 나면 품값으로 쌀을 몇 가마니를 받았다고 합니다.
호젓한 임도 따라 걷는 가벼운 산행 부목재-대학산-진지리고개-임도 답사 가는 겨울이 아쉬워 배웅을 가기로 했다. 유난히도 춥고 눈도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산골짜기마다 겨울에 내린 눈이 상당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곧 녹아 버릴 잔설을 밟으러 조금 깊은 산을 찾아갔다. 깊기는 해도 쉽게 지난 겨울을 돌이켜 보면서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산을 찾아 나섰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과 화촌면, 횡성군 갑천면을 잇는 길고 꼬불 꼬불한 임도가 나있다. 산악 자전거꾼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산길이다. 산중턱으로 난 임도를 따라 3,4시간 봄속의 겨울을 찾아 나섰다. 나이가 들면 다리부터 늙는다고 하는데 겨우내 움츠렸던 기지개도 펴고 무담없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산행이다. 홍천군 동면 노천리 부목재 마루턱에는 양쪽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대학산(大學山, 876.4m)이고 왼쪽에 솟아 있는 산이 응봉산(鷹峰山, 868m)이다. 그런데 두산은 부목재를 사이에 두고 임도로 이어져 있다. 대학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444번 지방도와 물골 일대. 예방 조치로 산 7,8부 능선을 따라 뚫은 임도는 평소에는 차가 다닐 수 없게 차단기로 가로 막아 놓았다. 2년전에 작고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님은 흥겨운 자리게 가면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라고 자랑을 한단다. 언제 어떻게 영국의 명문인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느냐고 되물으면 학교 구경을 하느라고 뒷문으로 들어 갔다가 앞문으로 나왔으니 옥스퍼드를 졸업한 것이 아니냐고 매 주위 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정회장님의 농담처럼 홍천군내 임도를 따라 대학산에 오르다보면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대학을 나오게 된다. 응봉산과 대학산 줄기를 잇는 부목재에서 응봉산 산행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 대학산 기슭의 임도를 따라 나섰다. 부목재에서 임도를 따라 들어선 대학산 가는 길. 큰골 고갯길로 접어들어 능선을 따라 정상을 오르는 것이 수월하다
누에는 봄가을 두 번 칠 수가 있습니다. 누에치기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반해 큰 돈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봄가을 돈 가뭄이 심할 때 약간의 목돈을 만질 수 있고, 이 돈으로 공납금 등을 내곤 합니다. 누에치기는 한 달이 조금 더 걸립니다. 누에치는 시기가 봄가을 농사철과 겹치기 때문에 누에를 치 치는 집은 이 한 달 동안 그야말로 밤낮없이 일을 해야 합니다. 낮에는 들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 별빛을 보며 뽕을 따 놓아야 다음날 누에 밥을 줄 수 있습니다. 학교 다니는 자녀가 있는 집은 누에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부모들이 들 일을 하는 동안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들이 뽕을 따는 것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에를 치다가 뽕이 모자라면 다른 동네까지 가서 뽕잎을 따오기도 합니다. 봄 누에는 주로 뽕나무 밑동 채 베어서 누에 밥을 주고 가을 누에는 잎을 따서 줍니다. 봄에 베어도 금새 가지가 자라기 때문에 가을에도 뽕을 딸 수 가 있습니다. 젖은 뽕잎을 주면 누에가 병이 나기 때문에 비오는 날 뽕을 따면 방에 흩어서 뽕잎을 말려야 합니다. 봄에 뽕나무에는 「오디」라는 열매가 달립니다. 그렇다고 모든 뽕나무에서 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산딸기도 같이 열리기 때문에 빈 도시락 통을 들고 오디나 산딸기를 따러 다니곤 했습니다. 오디는 익기 시작하면 하루 이틀 만에 땅에 떨어지기 때문에 빨리 따먹어야 합니다. 오디를 많이 따 먹으면 손과 입술 주변이 온통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몇일 동안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보통 친구들과 같이 가면 서로 많이 먹으려고 입에 허겁지겁 집어 넣기 때문에 입 주위에 오디 물이 잔뜩 뭍게 됩니다. 오디에는 각종 곤충이 많이 붙어 있는데 급하게 먹다가 벌레를 같이 씹는 경우도 흔합니다. 뽕나무에는 야생 누에도 삽니다. 이 야생 누에를 「새누에」라고 하는데 털도 없는 누에가 가을에 싸늘한 찬 바람을 맞고 어떻게 살아가는 지 신기할 뿐입니다. 이 야생 누에는 고치를 지을 때까지 뽕잎
요즘 전철을 타면 젊은이들에게 고함을 쳐서 자리를 빼앗는 노인들을 많이 봅니다. 한번은 노인과 20대 젊은이가 서로 쌍말을 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젊은이가 경로석에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노인은 젊은이가 일부러 졸고 있으면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노인의 호통에 놀란 그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했는데도 그 노인은 계속해서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며 나무라는 것입니다. 옆에 서 있던 이 젊은이도 노인의 계속되는 잔소리에 말대꾸를 시작했고 급기야 쌍말이 서로 오갔습니다. 참으로 눈뜨고 못 볼 장면이었습니다. 노인과 싸운 젊은이도 잘못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노인의 잘못이 더 컸습니다. 다행이 우리나라가 경로사상이 발달하여 자리양보가 외국인이 부러워 하는 아름다운 풍속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것이 노인들에게 대중교통의 남의 좌석을 뺏을 권리를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안동의 시내 버스를 주로 이용했습니다. 버스 노선은 안동 각 지역의 시골로 이어집니다. 승객은 주로 「학생」아니면 「노인」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학생들의 하교시간과 뒤섞여 복잡한 시내버스를 수백 번도 더 타 보았지만 학생들의 자리를 호통쳐서 빼앗는 노인들은 한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시골버스를 타면서 노인들에게 수도 없이 자리를 양보 해 보았습니다. 자리를 양보 받은 노인들은 대게 몇 번이고 괜찮다고 하다가 자리에 앉습니다. 그래도 미안했던지 제가 든 책가방이라도 건네 달라는 노인들이 많았습니다. 자리를 양보 받은 노인 중에는 헛기침 한번 하면서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고는 마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노인들이 젊은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가 쑥스러워 그냥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 보는 것으로 고맙다는 것을 대신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또 1990년부터 대구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대구에 있을 때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자리에 앉은 사람들
한나라당 元喜龍(원희룡) 의원은 지난 2월 대통령의 자의적인 特別赦免을 제한하기 위해 赦免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습니다. 元의원은 17일 盧武鉉 대통령의 한총련 관련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는 『盧武鉉 대통령의 한총련 이적성 재검토 발언은 입법, 사법, 행정의 분리를 통해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유지하는 3권 분립의 기본 근간을 무너뜨리는 유감스러운 발언』이라고 말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한총련에 대해 이적성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은 변호사 출신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의 말꼬리를 잡고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한총련과 관련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거나 현재 수배중인 자들에 대해 「특사」, 「수배해제」를 검토하는 것은 자칫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의 존립 가치를 없애는 상당히 권위주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통령의 말씀은 시대 변화에 따라 대학생 조직인 한총령의 이적성을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는 善意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 봅니다. 본래 特赦(특사)란 법원으로부터 형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해 형의 집행을 면제해주거나 유죄선고의 효력을 상실시키는 조치를 말합니다. 따라서 수배자를 特赦(특사)한다는 것은 법률적으로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아마도 「한총련 수배자 등에 대해 特赦하겠다」는 것은 정치적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수배자에 대해 수배해제를 검토하거나 수사 중단 또는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盧武鉉 대통령과 청와대측의 (한총련 이적성 재검토) 생각은 문제가 있는 대목입니다. 한총련은 이미 사법부의 판단을 받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재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총련의 이적성 문제는 재판을 통해 사법부의 재평가를 받거나, 국가보안법 개정 등 입법부를 통한 개정절차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은 좋
전남 나주시에서 함평으로 가는 23번 국도변에 있는 LG정유 오량동 농민주유소에는 '살인 만행 무죄판결, 미국인에 일체의 서비스를 거부'와 'NO AMERICANS'라고 쓴 대형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옹졸한 생각인지 몰라도 , 여중생 사망 사고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그렇게 속을 뒤틀리게 했다면 미국 칼텍스(Caltex)사와 합작회사인 LG정유의 기름을 팔지 않겠다며 주유소 문을 닫았어야 옳았을 것이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게 된 데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0% 이상(2002년 327억 8000만 달러)을 차지하는 최대 수출 시장인 미국과의 경제 교류가 큰 몫을 차지한다. 또한 두 나라가 손을 잡고 안팎으로 자유민주 체제를 굳건히 다져 가며 오늘날까지 우리 국토를 지켜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판국에 '미군 철수'를 외치는 것은 우리 눈앞에 닥친 국제 정세로 보아 국익에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우리는 아직 국민 소득 1만 달러가 못되는 나라,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나라다. 무엇이 그리 자신 만만해서 연일 반미를 부르짖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난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벌어진 한 퍼포먼스는 이들의 판단이 얼마나 어설픈지를 잘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가 일류 국가가 되기는 커녕 이런 젊은이들에게 휘들리고 있다가는 언젠가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줄 모르는 이런 젊은이들을 길러내고 있는 우리의 교육이 문제다.
주한 미군 팩트북 2003 -주한미군의 전력 현재의 주한미군 병력을 살펴보면, 3만6000명의 미군과 3500여명의 미군 군속, 그리고 1만3,000여명의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4,500여명의 카투사와 1만5,000여명의 한국인 직원들 주한미군에서 복무하거나 근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한미군의 구성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육군이 2만7,000명(장교 3400명), 공군이 8500명(장교930명), 해군, 해병대 500여명(100여명)기타 100여명이 됩니다. 육군병력은 미8군 예하의 1개 전투 보병사단 (미2사단), 1개의 항공여단(17항공여단), 1기의 기갑여단(6기갑여단) 그리고 기타지원 부대들 (19전구 지원사령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2사단의 전투력을 살펴보면 현재 전시 수준의 병력인 1만4000명을 유지하면서 2개 보병여단, 1개 포병여단, 1개 공병여단, 1개의 항공여단, 1개의 전투 공병여단 그리고 전투지원여단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미2사단은 1917년 창설된 일명 인디안헤드 사단으로 불리우며 1차세계대전과 한국전에서 참전한 부대입니다. (부대마크도 별문양 안에 인디언 머리가 새겨져있습니다) 미2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들은 에이브라함 전차, MLRS다연장포, 155m 곡사포인 Paladin, 아파치헬기 등의 최정예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17항공 여단은 주로 UH-60블랙호크헬기와 C-12수송기, CH-4누크 헬기가 주종을 이루어 주로 지원 임무를 맡고 있으며 6기갑여단은 아파치 헬기 2개 대대와 패트리어트(Patriot) 미사일 1개 대대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외에 전투지원업무를 맡고 있는 19전구 지원 사령부는 대구, 부산, 평택에 위치하여 주로 군수지원을 맡고 있습니다. 한편 공군은 오산에 美7공군 사령부가 있으며 오산 (51전투 비행단)과 군산 (8 전투비행단)에 각각 1개 비행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투기 기종으로는 F-16과 A-10기를 보유하고
李會昌 前 한나라당 총재가 이번 주말쯤 미국으로 다시 떠난답니다. 李 전 총재는 미국 비자 연장을 이유로 내세우며 지난 주 일시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한나라당 차기 대표선출 등 전당대회와 맞물려 있으면서 온갖 억측을 낳고 있습니다. 『누가 옥인동(李 전 총재 자택)에 찾아갔다더라, 「사인」을 받았다더라』 등이 그런 예에 속합니다. 물론 근거 없는 루머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여러 「소문」들 중에서 핵심은 바로 「이회창 복귀說」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선에서 두 번 연패하고 정계를 은퇴한 李會昌씨가 정말 정계에 복귀할 것인가라는 것이 최대 관심사입니다. 물론 李 전 총재측도 한나라당 관계자들도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복귀 즉시 한나라당 사람들은 다 죽는다』라는 것이 당의 현재 분위기입니다. 李 전 총재를 모셔왔던 유승민(劉承旼) 전(前)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도 『총재는 이제 정치에 관심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이회창 복귀설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 李 총재께서는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 주말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복귀설과 맞물려 李會昌 측근이었던 유 소장도 4ㆍ24 보궐선거 출마설이 나돌고 있습니다. 유 소장은 『이 총재를 만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당에 공천신청을 했다는 보도는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출마에 뜻이 있으면 공식적으로 신청을 하면 되지 왜 비공식적으로 합니까? 저는 요즘 춘천에 있는 한 지방대학에 강의 나가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삼일 정도 됩니다. 이렇게 바쁜데 무슨 정치를 할 수 있겠어요』라며 출마설을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 內 일각에서는 이회창 복귀를 추진하는 세력이 있다고 합니다. 李會昌 측근들이 만들었다는 「三起會(세 번 일으키는 모임)」가 그렇답니다. 아무튼 현재의 상황으로는 「아니다」가 정답입니다.
盧武鉉 정권의 對美정책과 국내 反美감정으로 고통 받는 在美 韓人교포들 盧武鉉 정권의 외교정책이 다소 불안해 보입니다. 출범 초기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 「뭔가 준비가 덜 됐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특히 對美관계에 있어 그렇습니다. 盧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때 韓美관계에 대해 『상호평등의 대등한 관계를 정립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羅鍾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 2월 중국에서 북한 고위관계자와 비밀접촉을 가진 바 있습니다. 對北정책에 있어 투명성을 강조해왔던 盧武鉉 대통령측은 비밀접촉 사실이 드러나자 『북한과의 대화채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서는 盧武鉉 정권이 북한核문제 해결을 위한 사전 접촉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북한과 사전접촉을 시도한 이유는 盧武鉉 정권이 미국과 협상하기 전에 「한국정부에 의한 북한핵문제 해결」이라는 유리한 카드를 손에 쥐고 미국측에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盧武鉉 정권의 對美, 對北정책에 의심을 가질 만 합니다. 기자는 최근 미국에 거주하는 한 在美교포와 전화통화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全美 한인연합회 회장단에 소속된 고위인사로 미국 정계인사들과 친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盧武鉉 대통령 취임식 때도 초청된 인사입니다. 그 분은 북한核문제와 한국 내에 反美감정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그는 『盧武鉉 대통령의 새로운 對美관계로 인해 미국 내 200만 在美교포들이 향후 5년간 적지 않은 차별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벌써부터 그런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그 분의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200만 재미교포를 대표해서 몇 가지 얘기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과 상호 대등한 관계를 만들겠다는 의도는 좋다. 그러나 반미감정은 절대 안된다. 이를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하려 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솔직히 말해 미국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별 것
민주당 李相洙(이상수) 사무총장의 대선자금 발언으로 한나라당이 내심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李相洙 총장은 지난 2월7일 기자들과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대선 때 100대 기업을 다 돌았고 당 후원금 120억원을 모았다. 당시 鄭大哲(정대철) 선대위원장과 金元基(김원기) 후보 정치고문이 후원금 모금에 모두 나서지 않아 내가 해보겠다고 했다. 그 동안 총무나 정책위의장은 할 수 있어도 돈을 모아야하는 대표감으로는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그런 우려를 불식시켰다는 점에서 나로서는 도움이 됐다』고 털어놨다. 李총장의 이 같은 발언은 대선 당시 노사모와 민주당 대선조직이었던 「국민참여운동본부」가 주도했던 돼지저금통(국민성금)과 국고보조금 위주로 선거를 치렀다는 민주당측의 당초 설명과는 다른 내용이다. 한나라당은 李총장의 발언에 대해 논평을 내고 『민주당과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어떤 기업에서, 얼마의 후원금을 받아 무슨 용도로 사용했는지 낱낱이 공개해야 할 것』고 선관위의 조사를 촉구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선자금문제가 오히려 한나라당의 목을 죌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선거 전까지 이회창대세론이 우세였기 때문에 기업들은 한나라당에 더 많은 돈을 대줬을 것』이라며 『법적문제를 떠나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질 경우 한나라당의 입지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에 들어간 후원금의 구체적인 액수까지 나오고 있으며 한 중진의원이 대표 출마를 고려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쓰다 남은 대선자금 때문이라는 얘기도 없지 않다. 한나라당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부국팀(李會昌후원회)쪽에서 쓰다 남은 돈이 있는데 이를 당에 돌려주지 않아 일부 인사들이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칼라슈니코프는 러시아의 英雄으로, 유진 스토너는 미국의 大富豪로 성장 AK소총을 만든 러시아의 미하일 칼라슈니코프(Mikhail Kalashnikovㆍ83)는 1919년 남부 시베리아 알타이공화국에서 17형제중 16번째로 태어났다. 2차대전 당시인 1941년, 그는 탱크 정비공으로 軍에 입대해 브리안스크 戰線에서 독일군과 싸우게 된다. 이때만 해도 그는 기계에 관심이 많은 전차부대 하사관일 뿐 총 설계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T-34 전차는 독일군의 포탄에 맞아 파괴되고, 부상을 입은 그는 독일군의 눈을 피해 며칠을 걸어 아군에게 기적적으로 구출됐다. 그는 오랜 기간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고, 퇴원 후에도 후방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해야 했다. 이 부상은 그의 장래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는 전투중 『독일군의 무기는 우리것보다 왜 더 좋은가』라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병사들을 위해 우수한 총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軍에서 쌓은 銃器(총기) 지식을 총동원해 새로운 총을 설계했다. 그의 설계를 본 당시의 소련 기술자들은 그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곧바로 「툴라」에 있던 총기연구소로 그를 스카웃한다. 엉겹결에 총기 연구원이 된 그는 1947년 독일과 미국, 그리고 소련의 여러 총기들의 장점을 뛰어난 센스로 조합한 차세대 돌격소총을 개발해 냈다. 성능이 우수하고 분해조립이 간단하고 값이 싼 그의 소총은 모든 테스트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그가 개발한 총은 1949년 소련군의 制式(제식) 소총으로 채택됐으며, 지금까지 약 1억만정이 생산되는 등 총의 대명사로 군림해 왔다. AK-47이 냉전시대에 공산권을 대표하는 개인화기였다면,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총은 M-16이었다. M-16을 설계한 유진 스토너(Eugene M. Stonerㆍ1997년 사망)는 1922년 11월 인디아나州에서 가난한 집안의 獨子(독자)로 출생했다. 1939년, 때마침 찾아온 불경기를 맞아 기술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록히드항공사의 자회사에 취업하게 된
3월1일 정오 서울 시청앞 광장에는 모인 10만여명의 3.1절 국민대회 참가자들. 행동하는 다수가 됐다. 3.1절 서울 시청앞 대규모 反核대회 - '침묵하던 다수'가 입을 열었다. 3.1운동 84돌인 1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反核 反金(정일)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가 열렸다. 한국자유총연맹, 한미우호협회, 자유지성300인회, 납북자가족협의회, 대한민국건국회, 재향군인회, 전물군경미망인회, 베트남참전전우회, 성우회, 자유시민연대, 천주교경제인회,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한국기독교신도연맹,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금란교회, 광림교회 등 110여 시민,사회단체와 일반시민등 10만여명(경찰 추산, 주최측 주장 30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국민대회에서 참석자들은 '북한의 핵개발로 7000만명의 한민족이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다.'며 김정일정권은 우리 민족이 통일로 가는 데 있어 마지막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1일 낮 12시 서울 시청앞에서 열린 대회에는 평소 침묵을 지켜왔던 각계 각층의 시민들과 종교, 사회단체가 대거 참여했다. 참석자들은 '최근 反美운동이 마치 우리사회의 대다수 의견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면서 다수인 우리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였다고 밝혔다. 행사는 국민대회 불교계의 대표인 초우(草宇, 통도사 주지) 공동대표장의 개회선언과 함께 평화를 상징하는 파란색 풍선 수만개를 하늘에 날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상훈(李相薰) 재향군인회 회장은 대회사에서 '북한의 핵무장 시도와 일부 젊은이들의 미군철수 주장으로 이나라 안보가 중대한 전환점에 서있다'면서 '침묵하던 우리가 이제 행동하는 다수로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근 탈북, 귀환한 납북어부의 김정일을 고발하는 구호제창과 '한미동맹 강화하여 세계평화를 지키자'는 정원식 전 총리의 대회사도 있었다. 박홍(朴弘) 전 서강대 총장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호소한다는 연설문'에서 '노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북한은 핵 개발 계획을 포기해야
게시판 운영방법을 변경합니다. 여러분들의 좋은 글을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광고성' 글만 계속 올라오네요. 아무튼 제 글만 올릴 수 있게 됐습니다.
국민통합21 鄭夢準 의원에 대해 얘기 좀 해볼까 합니다. 요즘 鄭의원 심경이 어떨까요? 며칠 전 국민통합21측에 鄭의원 인터뷰를 정식으로 요청한 바 있습니다. 물론 답변은 『노(NO)』였습니다. 한 관계자는 『시점이 적절치 않다. 그냥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짧은 대답만 전했습니다. 鄭의원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대선공조파기로 인해 그는 정치인으로서 시련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鄭의원은 현재 법적으로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는 이익치씨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또한 현대전자 주가조작 공범 혐의에 대해 검찰로부터 추가 조사도 받을 거라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홍보물 제작 업체로부터 비용지불과 관련해 訟事(송사)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기자는 국민통합21의 한 고위관계자에게 이와 관련해 여쭤봤습니다. 『그쪽에서 訴(소)를 다 취하했습니다. CF제작비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다 해결했죠. 이제 한 5억 정도만 갚으면 됩니다』 鄭의원은 지난 대선 때 후원회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당시 국민통합21측은 『후원금이 무려 50억원이나 들어왔다』고 밝혔습니다. 선거비용, 사무실 운영비, 인건비 등을 감안한다면 현재 당에서 보유하고 있는 액수는 이보다 훨씬 적을 것으로 보입니다. 鄭의원측은 대선 때 실시한 여론조사 비용도 아직 지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달 말이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게 당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돈을 떼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선거가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고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이 달 말까지 지불하기로 합의했습니다』 『鄭의원이 정치적으로 어렵다보니 (주위에서)도와주기는커녕 더 힘들게 한다』는 게 이 관계자의 요지입니다. 힘들게 한다? 왜 그럴까요?
오늘(15일) 대충 마감을 끝냈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은 아직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마감 다가오면 記事말고는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네요.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달에 무슨 기사 썼냐구요? 고민 참 많이 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할까』 『國家利益과 대통령 個人의 이익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과연 대통령 개인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저는 그 일부분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記事化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國益이라고 보고 잠시 덮어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記事는 조금 밋밋하게 나갔습니다. 기사는 月刊朝鮮 3월호를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백승구 기자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요즘 손주라는 단어를 손자ㆍ손녀를 통칭하는 단어로 사용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손주라는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손자ㆍ손녀란 말이 될 수 없습니다. TV등에서 야금 야금 쓰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표준말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방송 등에서 친근감을 주기 위해 사용한 말이었는데 요즘엔 신문 등에서도 그대로 이 말을 받아 쓰고 있습니다. 한번은 모 방송의 어느 리포터가 『할아버지, 손주들이 참 많으시네요. 손주들 중에 손자와 손녀는 몇 명이나 되세요?』하고 질문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손주라는 말은 「손자」를 칭하는 경기지방 사투리입니다. 경기도라는 특정 지역의 사투리를 방송 등에서 비판 없이 쓰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 말의 뜻이 완전히 왜곡 되어 쓰인다는 것입니다. 일반 TV 출연자들이 「손자」를 「손주」라고 발음하는 것이야 당사자의 출신 지역과, 우리의 표준말이 서울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것 등을 감안할 때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방송 등에서 이 말을 전혀 엉뚱한 뜻으로 쓰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문제 입니다. 이를 그냥 두면 「삼촌」이란 표준말은 얼마 가지 않아 「삼춘」이란 말로, 「했고요」는 「했구요」로, 「~하고」는 「~하구」등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울러 그 뜻도 엉뚱하게 바뀔 지 모릅니다.
'지방선거 구인난' 국민의힘, 추미애에 맞설 경기도지사 후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