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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모 교수가 해방 후 우리 고유어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는 통계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정확한 통계는 기억 안남) 한자를 수 천년 동안 주요 표기 수단으로 써 왔지만 이와 더불어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온 우리 고유 말이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어느 정도 영향은 있겠지만 한자를 쓰는 것이 우리 고유 말을 사라지게 하는 주범이 아니라는 것은 지난 수천년 동안 내려온 우리 고유 말이 최근 반세기 만에 다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잘 증명해 줍니다. 고유어만 사라질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한자를 쓰지 않으면서 선조들이 한자를 통해 보여주었던 수준 높은 조어력이나 풍부했던 한자로 된 고급 우리말 표현들도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요즘 건물 등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이름 짓기 능력이나 신조어 생산 수준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잠실에 경기장이 들어서면 잠실 운동장이 됩니다. 상암동에 축구장이 들어서면 상암동 축구장이됩니다. 한강에 다리가 생기면 제1 한강교가 되고, 다음에 또 다리가 생기면 제2한강교가 됩니다. 다리가 마포구에 걸쳐 있으면 마포대교, 반포 지역에 걸쳐 있으면 반포대교가 됩니다. 창덕궁의 작은 쪽문하나 전각하나에도 최고로 멋있는 이름을 붙였던 선조들의 작명 수준과 비교하면 뭐라 할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경복궁이 오늘날 지어 졌으면 종로궁이나 제1궁궐, 서울 본궁 등으로 불렸을 확률이 높다 하겠습니다. 한자를 배우면 자동적으로 우리 고유 말을 많이 알 수 있고 우리말(한자로 된 우리말 포함)을 사랑하게 됩니다.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건물 이름도 남겨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한자 공부하는 방식이 하늘 천, 따지 하는 식이기 때문에 漢字 한자에 반드시 우리 말로 된 뜻이 이 따라 들어 갑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것은 어휘를 확장하고 고유 우리말을 지켜 나가는 데도 무척 중요합니다. 한자는 우리와 궁합이 잘 맞아
한국 대통령은 전시에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도 없다? 盧武鉉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2월13일 한국노총을 방문해 노조 간부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막상 전쟁이 나면 한국 대통령은 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도 갖고 있지 않다』라는 말을 했다. 盧당선자가 얘기한 『작전지휘권도 없다』는 말은 「작전지휘권」과 「작전통제권」을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한미연합사 관계자에 따르면, 전시에도 우리 군에 대한 지휘권은 우리 대통령이 갖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 authority)은 軍 작전 뿐 아니라 軍 행정·군수·군기·내부편성 등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갖는 것으로, 이는 당연히 우리 대통령이 갖고 있다. 이에 반해 전시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 authority)은 군사작전에 국한된 것으로 평시엔 한국군이, 전시(데프콘2 이상)에는 韓美연합사령관(美軍 대장)이 갖는 것으로 돼 있다. 전시 작전통제권은 작전계획이나 작전명령상에 명시된 특정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위임된 권한일 뿐이며, 총괄적인 지휘권(command)은 우리 대통령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14일 李承晩 대통령이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했으며, 1978년 한미연합사로 작전통제권이 넘어왔다가, 1994년 12월 평시 작전통제권만 한국군에 되돌려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書信(훗날 대전협약으로 문서화)을 보면 전시작전통제권에 대한 개념이 분명해진다. 전쟁이 발발하면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연합사령관에게 넘어가지만 그 뒤에도 연합사령관 단독으로 주요작전 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 양국 대통령과 국방장관·합참의장 등으로 구성된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로부터 전략지시와 작전지침을 받는다. NCMA에는 양국 국방장관으로 구성된 [한미 안보협의회(SCM)], 양국 합참의장으로 구성된 [군사위원회(MC)] 등이 포함돼 있
판문점을 찾는 外信기자들의 불만 설연휴 직전인 1월29일, 외신기자들과 함께 판문점을 견학했습니다. 서울이 영하 14도였으니까 판문점은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훨씬 넘었습니다. 카메라를 잡은 손끝이 떨어져 나가는 통증이 느껴지더군요. 그날의 「견학」은 AP, AP TV, National Public Radio(NPR), AFP, LA TIMES, 시사주간 US News and World Report 등 세계 주요 통신사와 신문방송 기자들이 유엔사의 협조로 판문점을 둘러보는 일정이었습니다. 최근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면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자 외국 신문 방송이 일제히 북한군의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 판문점을 찾은 것이죠. 유엔사 관계자는 『보름전 NPT 탈퇴 직후에는 CNN, 워싱턴포스트, NYT 등 미국의 주요 신문방송들이 한차례씩 다녀갔고, 오늘은 주요 통신사를 비롯해 US News and World Report誌 편집장까지 온 것』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영화 「JSA(공동경비구역)」으로도 유명한 유엔사 경비대대인 캠프 보니파스에서 대대장 매튜 마고타 중령으로부터 부대현황과 임무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습니다. 캠프 보니파스는 美 8군 예속부대로서 UN司 작전통제를 받고 있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과 캠프 보니파스 경비, OP(관측소) 관리와 非무장지대(DMZ) 정찰 등이 주임무입니다. 대대장은 『남·북한 경비병이 무장 상태로 경계근무를 하는 JSA는 24시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이라면서 『KPA(북한군)들이 지난번 비무장지대 내에 기관총을 들고 들어온 것은 중대한 정전협정 위반이었다』라며 최근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기자들은 마고타 중령에게 최근 북한군 병력 동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했고, 마고타 중령은 『특이사항은 없다』고 하더군요. 외신기자들은 「뉴스」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하더군요. AP 사진기자가 제게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본국의 데스크들이 당장에 한반도에서 전
(注-이 글은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필자 개인의 주장이 대부분이므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음.) 「아지」란 말의 흔적은 의외로 많은 곳에 숨어 있습니다. 「나뭇가지」의 「가지」도 「아지」란 말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나무의 옛말은 「나모」, 혹은 「남(ㄱ)」입니다. 용비어천가에 「뿌리 깊은 남근 바람에 아니 뮐쎄(흔들린다)」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따라서 15세기 당시에는 「나무를 하러 가다」는 「남글 하러 가다」라고 했음이 분명합니다. 나뭇가지란 말은 처음에는 「남(ㄱ)+아지」나 「나모+아지」라는 형태에서 시작됐을 것입니다. 「남글」하러 가다처럼 나무란 단어에는 「ㄱ」 발음이 강하게 살아 남습니다. 따라서 뒷따라오는「아지」란 말이 자연스럽게 「가지」로 발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용비어천가를 보면 나뭇가지의 「가지」만 발음할 때는 「갖」이라는 발음이 살아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발음을 근거로 「아지」란 말의 더 오래된 발음을 추정해 보면 「앚(혹은 앗)」이라고 발음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注-남(ㄱ)+앚(이)->남갓지(아지)->남가지) 이때 「앚(앗)」은 「작다」란 뜻으로 옛날에는 「아사 아들(작은 아들)」, 「아사 누이(누이 동생)」 등이란 말로 쓰였습니다.(注-여기서「아사」라고 표기한 것은 옛날 발음을 그대로 살린 것이 아님.) 이처럼 「앚(앗)」이란 발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다른 단어와 활용하여 쓰인 예가 있는데도 굳이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갖(=가지)」이란 단어에서 「앚(아)」이란 발음을 꺼내 온 것은 「갖」이란 단어에 「아지」와 「앚(앗)」의 형태가 동시에 녹아 있어 두 단어가 한 뿌리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첩」을 「시앗」이라고 합니다. 이때 「앗」은 「작다」란 뜻일 수도 있지만 「뭔가 생산한다」는 뜻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아지」 혹은 「앚(앗)」은 「작다」란 뜻 외에도 「뭔가
오늘 남아공에 사시는 분이 저와 동향출신이라며 본 게시판에 제가 쓴 글 「부모님 세대와 함께 사라질 말」을 읽고 아래와 같은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아래------- 『저도 어렸을 때부터 왜 오이를 「무리(물이)」라고 하는지 궁금해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혼자 내린 결론은 「물외」의 방언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외」는 「외」인데 「물이 많고」 또는 맛이 「물처럼 심심해서」 「물외」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분의 이메일을 받고 순간적으로 무릎을 쳤습니다. 경북 북부 지방에서 오이를 왜 「무리」라고 했는지 이유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향 시골 노인들은 참외를 「위」혹은 「이」에 가깝게 발음합니다. 따라서 오이를 「물외」라고 한 동향분의 추론은 거의 정확해 보입니다. 「물외」-> 「물위」-> 「무리」가 된 것입니다. 제가 이날동안 「무리」라는 단어의 어원을 몰라 고민했던 것을 한 순간에 풀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 경상북도 북부 지방이라 그 쪽 지방에서 동물(가축)을 부르는 소리 몇 가지 소개 합니다. 동물 부르는 소리를 각 지방별로 비교하면 재미있을 것이나, 불행히 저는 다른 지방에서 어떻게 동물을 부르는지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어미 개를 부를 때 : 워리 워리...(「메리메리」, 「도꾸 도꾸」도 흔히 쓰이나 이 말은 해방 후 들어 온 것이라 짐작됨.) 어미 개를 쫓을 때 : 요, 개! 강아지를 부를 때 : 오요오요오요…(이때 혀를 아랫입술 사이에 접촉하면서 ‘쪽쪽쪽’ 소리를 섞어서 낸다.) 강아지를 쫓을 때 : 요, 가지! (개아지) 돼지 부를 때 : 똘똘똘똘... 돼지를 쫓을 때 : 돼지는 두들겨 패서 쫓아도 안 된다. 따라서 쫓는 말이 따로 발달하지 않았다. 닭을 부를 때 : 구구~~구구~~ 닭을 쫓을 때 : 쉬이, 훠이. 고양이 부를 때 : 에누 에누... 고양이를 쫓을 때 : 요, 괴지!(괴는 고양이의 옛말, 괴지는 괴+아지의 준말) 송아지 부를 때 : 너미 너미 너미... 어미 소를 부를 때 : 묶여 있어서 부를 일이 잘 없다. 어미 소를 쫓을 때 : 어데! 일소를 부릴 때 : -이러(출발), -이러러러러러(제촉할 때), -워워(움직이지 마라, 멈춰라), -어데어데데어데(혹은 어데데데데 : 방향을 틀거나 제촉할 때), -어데(소를 쫓거나 호통칠 때) 참고 : 아기가 칼 같은 위험한 물건을 들고 놀면 「이비 이비」소리치며 말린다.
지난번에 「아지」란 단어를 이야기 하면서 고양이를 경상도 일부 시골에서는 「괴지」라는 옛말로 부르고 있다는 예를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무엇보다 이런 15세기 古語가 현대에서도 일상 용어로 그대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 매우 경이롭게 보입니다. 저의 고향은 경북 예천입니다. 마을 가까운 곳에 안동 하회마을이 있습니다. 경북 내륙 지역에 속하는 이 지역은 전쟁 등으로 인한 대규모 인구 이동이 他 지역보다 비교적 적었던 곳입니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이 지역에는 옛 우리말이 비교적 많이 살아 있습니다. 심지어 국어사전에 死語, 즉 「죽어서 쓰이지 않는 말」이라고 올라 있는 단어도 일상에 버젓이 쓰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수천년 내려온 이 모든 말이 우리의 부모님 세대가 돌아가시는 순간 모두 사라 질지도 모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황(성냥), 정낭(화장실), 북선(이북), 강림도령(저승사자), 부루(상추), 무리(오이), 외(현재의 참외), 정지(부엌), 갈개(논의 경계), 아래(그저께), 낭끝(절벽), 아적(아침), 하마(벌써), 상기(아직), 삽작거리(대문밖), 횃소리꾼(상여소리꾼), 갗풀(플라스틱) 등등 수천 단어가 넘을 것입니다. 이런 일상용어 외에도 많은 농경언어가 우리의 부모님 세대와 함께 영영 사라 질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젊은 분들은 위에 나열한 단어 대부분이 매우 생소할 것입니다. 특정 지역, 그것도 일부 노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일부러 모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위에 나열된 이 단어들이 『특정지역에서만 사용하는 「사투리」이기 때문에 생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열된 단어 중에는 어느 지역만의 특정한 사투리도 있겠지만 (약간의 변형은 있을 지 몰라도)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쓰였던 말이 상당수 있습니다. 「상기」란 말이 전국적으로 쓰였던 대표적인 옛말이 될 것입니다. 상기의 옛 형태는 「상긔」가 됩니다. 현재 이 말을 쓰는 시골 노인들은 「상구」, 「상기」
제가 초등학교 다닐때는 동네 형들이고 누나들이고 간에 존대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제가 중학교 들어가서 가장 어색했던 것이 다른 동네 학교 선배들에게 존대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선배들에게 6년 동안 계속 말을 놓고 지내다가 갑자기 존대말을 하자니 영 어색했던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어쨌든 동네에서 만나는 형들은 전부 친구가 됩니다. 나이차가 다섯 살 내외의 동네 형에게 얼떨결에 존대말을 붙였다가 아버지에게 들켜서 혼이 난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동네 형들에게 이름을 부르고 지냈던 것은 「五年以長則肩隨之 十年以長則兄事之(오년이장즉견수지 십년이장즉형사지)」 즉 「다섯 살 나이가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십년 나이가 많으면 형으로 대한다」라는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것이 예의라는 우리의 전통 때문입니다. 경북 북부 지방의 경어법을 보면 높임말을 「하소」 혹은 「예대」라고 합니다. 「하소」의 반대말은 「한가(=하게체)」이고 더 낮추는 말은 「해라(=아주 낮춤말)」가 됩니다. 또한「예대」의 반대말은 「하대(반말)」입니다. 이에 따라 상대에게 말을 낮추는 것을 「한가 한다」혹은 「하대 한다」라고 표현하고, 말을 높이는 것을 「하소 한다」혹은 「예대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를 국어 시간에 배운데로 굳이 표현 하자면 「해라체」, 「하게체」라고 구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경어법은 여자와 남자가 약간 다릅니다. 여자 어른들은 동네 아이가 성인이 되면 「하소」를 씁니다. 여자라도 나이가 많은 할머니라면 동네 아이가 성인이 되어도 「한가」로 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혼한 남자에게는 예외 없이 「하소」를 합니다. 결혼한 남자가 아이 아버지가 되면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누구누구 아버지」란 표현을 씁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는 반드시 서로 「하소」를 합니다. 남자 어른들은 동네 아이가 성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면 「한가」 와 「해라」를 섞어 쓰곤 합니다. 친구
이번 설에 시골에 내려 갔다 왔습니다. 설날 아침이 밝았건만 동네는 적막하기만 했습니다. 폭격 맞은 동네도 이보다는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농사짓는 친구와 동네 세배를 돌았습니다. 여덟 집을 다니니 더 이상 다닐 집이 없었습니다. 세 집의 노인들은 서울로 설을 쇠러 갔고, 세 집은 잠시 집을 비웠는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한때 50~60가구가 북적대던 동네가 우리 집까지 합해서 열 다섯 집이 남았습니다. 최근 10여년 사이에 이사를 간 집은 없었지만 노인들이 돌아가시다 보니 남은 가구 수도 줄어 들고 있습니다. 설날 저녁, 적막감이 감도는 동네를 걷고 있자니 방방마다 또래들끼리 모여 웃음꽃 피우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동네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어느 설날 한번은 동네 누나들이 모여있는 방을 찾아 다니며 신발을 감추다가 급한 김에 불이 덜꺼진 아궁이에 모두 집어 넣었습니다. 신발이 순식간에 홀라당 다 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고는 내뺐습니다. 신발 숨기기 놀이가 따분해지면 이어서 저마다 헌 우산대로 총신을 만든 나무 화약총을 하나씩 둘러매고 동네 한 가운데 모여서 콩볶듯이 쏘아 댑니다. 동네 개는 정신없이 짖습니다. 노인들은 시끄럽다고 소리를 질러 댑니다. 우리는 이리 저리 몰려 다니면 총을 더 요란하게 쏘았습니다. 설이 가까워 오면 장에가서 화약과 폭약을 잔득 사 두었다가 이날 써먹곤 했습니다. 개 짖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적막강산 같은 동네를 걸으면서 10년뒤에는 몇집이나 남아 있을 지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注-이 글의 내용은 학문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은 필자 개인의 주장이 대부분이므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해마다 설날이 되면 이 노래가 들립니다. 여기서 「까치」란 하늘을 나는 그 까치가 아닙니다. 이때의 「까치」는 「아지」라는 말이 변형된 것입니다. 「아지」는 「작은 것」을 뜻하는 우리 옛말입니다. 그러니까 「까치 설날」은 「작은 설날」이란 말로 설 바로 전날이 됩니다. 지금 「아지」란 말은 송아지, 강아지, 망아지란 말 등에 옛 뜻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현대 우리말에서 「아지」란 말의 흔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것이 가족의 호칭입니다. 경상도 등지에서는 삼촌 혹은 삼촌 뻘 되는 사람을 「아재」라고 부릅니다. 아재는 요즘의 「아저씨」란 말과 같습니다. 「아재」는 또 다른 말로 「아재비(아자비)」라고도 합니다. 옛날 옥편에서 삼촌을 뜻하는 叔(숙)자를 찾아보면 「아재비 숙」이라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아재비(아자비)는 글자 그대로 「아지+아비(아버지)」가 되어 「작은 아버지」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아재」, 「아재비」, 「아저씨」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형제를 일컫는 말이었다가 그 호칭 범위가 점점 확장되었다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아재」, 「아저씨」란 말은 아버지 친형제에게는 잘 쓰지 않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아저씨」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면 「아버지 친형제를 제외한 아버지 항렬의 남자를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해 놓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아재」말을 아버지의 친형제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모든 형제들을 「아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주로 아주 나이 어린 막내 삼촌에게 「아재」라고 합니다.(물론 대부분의 경우 삼촌이라고 부른다.) 비록 일부 지역에서 그것도 아주 제한적이긴 하지만 「아재」가 아버지의 친형제를 칭하는 말로 실제로 쓰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에는 「아지」라는 말이 들어 갑니다. 심지어 돼지도 「도(돋)+아지」-> 「도야지」 -> 돼지란 말이 되어 「아지」란 말이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고양이」 새끼에게는 왜 「아지」란 말을 없을까요. 「공아지」 라고 불러도 나름대로 귀여운데 말입니다. 저는 한때 고양이가 중요한 가축이 아닌 관계로 조상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해답은 역시 시골 말에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시골 노인들이 고양이를 쫓으면서 「요, 괴지」하면서 크게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고양이의 옛말이 「괴(猫:묘)」라고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고양이도 「괴+아지」가 되어 「괴아지」-> 「괴지」로 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고양이 새끼에도 「아지」란 말을 붙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아마 어느 시점에선가 「고양이」란 말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고양이를 「괴지」라고 부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고로 고양이란 말은 괴-> 괴이->굉이(괴이)->괭이->고넁이(고양이) 등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고, 삵괭이도 결국 같은 부류인데 「살고양이」란 말까지 오기 전에 형태가 굳은 단어가 되었습니다. 다음 번에 아지를 한번 더 살펴 보겠습니다.
강화도 석모도 낙가산 서해의 지는 해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정상의 너럭바위. 뒤에 보이는 섬은 어류정도. 육지와 연결된 염전과 낚사터가 있다.) 섬산들은 200-300m만 되도 높아 보이고 실제로 올라보면 여간 힘들지 않다. 해수면부터 시작하니 육지의 500-600m 되는 산을 오르는 것만큼 힘들다. 또한 물이 귀하게 여기는 섬사람들은 육지 사람들 보다 산림보호 정신이 투철하다. 그래서 산에는 수목이 울창해 밀림을 뚫고 지나야 하는 구간도 종종 나타나 걷기가 힘들다. 게다가 섬산에는 등산로 표시나 이정표가 없는 곳이 많다. 교통이 불편해서 섬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산이 깨끗하고 호젓해서 좋기는 하지만, 독도(讀圖)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작은 산속에서 갈을 잃고 헤매기 쉽다. 이처럼 섬산들을 오를 때 높지 않다고 얕잡아 봤다가는 큰 코를 다친다. (강화팔경의 하나인 석모도 서해 낙조. 낙가산 정상에서 보는 낙조를 제일로 꼽는다.) 누에고치처럼 생긴 강화도 삼산면 석모도에는 300m 되는 산들이 길게 남북으로 누워있다. 산세는 서쪽으로 가파르고 동쪽으로 밋밋한 구릉형이다. 석모도를 가려면 강화도 외포리에서 페리호를 타야한다. 외포리에서 보는 석모도의 산세는 별것 아니게 보인다. 그러나 석모도에는 기암과 반석, 밀림으로 꽉들어찬 해명산(327m), 낙가산(245m), 상봉산(316m), 상주산(264m)이 섬의 뼈대가 되어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다. 능선을 따라가면서 굽어 보는 황해바다 풍경이 석모도 산행을 더욱 즐겁게 한다. 한라산 영실에서 내려다 보는 모슬포 해안이나, 울릉도 성인봉을 오르면서 멀리 내려다 보는 도동항과 독도처럼, 섬산에 올라 굽어보는 바다는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린다. 낙가산(洛迦山)에는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의 하나인 보문사(普門寺)가 있다. 낙가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보문사를 꼭 들른다. 보문사 뒷산이기도 한
삼림욕장까지 갖춘 수도권의 삼림욕장 (패러그래이딩 이륙장면으로도 이용되는 295m봉에서 본 분수리와 용미리 일대) 폭설이 내린지 1주일이 지났건만 아직도 눈길에 발목이 빠질 정도이고 보면 15cm가 내렸다는 서울보다 훨씬 눈이 많이 내린 것 같다. 어떻든 표고 400m도 안되는 산에서 눈을 헤치고 걷는 맛은 한겨울 한라산에 온 듯한 느낌이다. "겨울이 다 지날 때까지 이 눈이 녹지 않았으면-." 일행중 누군가 곧 녹아 버릴 눈을 아쉬워했다. 작은 산에서 심설산행을 맘껏 즐겼다.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산이라고 부르게 됐으나 이웃 다른 마을에서 이 산에 독수리가 많았다고 해서 수리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박달산은 군부대 훈련장이기도 하다. 삼림욕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군민이 함께하는 체력단련장이 됐다. 능선 곳곳에 추위에도 아량곳하지 않고 훈련을 했을 군 훈련장을 지난다. 박달산은 파주시에서 시민을 위한 삼림욕장으로 개발할 때 훈련장을 지나도 좋다는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놓아서 산행을 할 때 시설을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된다. 갈라지는 고갯길에는 작은 표지판이 서 있어 길을 잘 안내한다. (갈림길마다 파주시에서 세운 표지판이 길을 잘 안내한다) 박달산은 그리 높지를 않아서 정상만 올라갔다 곧바로 내려오기에는 조금 싱겁다. 동서로 뻗은 12.1km의 산줄기를 타고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2-3시간, 능선을 타고 파주 일대를 내려다 보면서 걷는 종주산행 코스로 그만이다. 광탄면사무소 뒤 야트막한 능선의 277m봉과 정상을 오르기가 힘들지 그 밖에 힘든 구간이 없다. 갈림길에는 다음 목표지점과 거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살림욕장이 있어서 등산로 곳곳에 쉼터도 잘 만들어 놓았다. 277m봉을 올라서고 나면 높낮이가 심하지 않은 능선 길을 따라간다.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 자락에 있는 석불입상) 박달산 정상 못미처에 분수리에서 마장리 신호약수터로 내려가는 큰 고갯길이 있다. 이곳에서 박달산 정
병자호란의 굴욕을 되새기는 시간 -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하는 문화유적답사 마음속으로 봄을 그렸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만산이 진달래꽃으로 뒤덮이는 봄날 나는 초로에 접어든 집사람의 손을 잡고 다시 찾아오리라고 마음먹었던 코스였다. 남한산성을 몇 번 와 봤지만 이 길은 처음이었다. 봄기운이 완연했건만 아직까지 이렇게 눈이 많은 걸 보면 겨울이 그리 빨리 물러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봄은 틀림없이 올 것이다. (한봉 능선위로 뻗은 성벽길을 지나 벌봉 봉암성을 오르는 등산인들) 집에서 나와 전철을 타고 강변역에 내려서 광주행 시내버스를 타고 온고개에서 내렸다. "실버 산행 코스로 서울 근교에서 이만한 곳이 어디있겠느냐" 추천을 거듭했던 서립규씨(63,우림콘크리트 사장)가 앞장섰다. 핸드볼협회 회장과 한국산악회 부회장을 역임한 서 사장은 고등학교 때부터 핸드볼 선수생활과 등산을 해서인지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인다. 남들이 다하는 골프도 치치 않고 오직 등산만을 고집해온 그는 시간만 나면 혼자서 아차산을 오르거나 이곳 엄미리~봉암성~남한산성 코스를 오르내린다고 한다. 우선 등산인들 발길이 뜸해서 조용하고 한적할 뿐만 아니라 힘들지 않고 편히 오를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산성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다. 고등학교, 대학교 대선배이자 역사학자이신 김성호(63, 전 용산공고 교사)선생님이신데, 이분도 함께 나섰다. 정년 퇴직을 하시고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전국의 산성을 조사하고 계신 분이다. 또 한 분은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나 취재 산행에 따라나서겠다는 산악인 강영환씨(40,웅비상사 사장, 경기 산우회 등반대장). 봄의 문턱에 어이없게 내린 폭설을 헤쳐 나아가느라 연신 숨을 몰아 쉰다. 백제 축성설이 유력 (북문 못미쳐 동장대 터의 암문) 남한산성은 경기도 하남시와 성남시, 그리고 광주군이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다. 사시사철 수도권 시민들이 산책과 하루산행지
인터뷰-鄭壽星 국방부 許일병 사망사건 특별진상조사단장 『軍의 명예회복보다는 眞實만을 캤다』 「콜롬보 수첩」 『許일병 사건이 의문사委에 의해 조작·날조됐다는 수사관들의 보고를 받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특별진상조사단(이하 「특조단」) 단장으로 저의 36년 軍 생활이 끝나도 좋다는 所信(소신)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국방부 특조단 鄭壽星(정수성·58·육군중장) 단장은 許元根(허원근) 일병 수사를 마친 소감을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 나온 것 같다』고 말하며 홀가분해 했다. 특조단은 2002년 11월28일, 1984년 軍 복무 중 발생한 許일병 사망사건과 관련해 『許일병은 자살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2002년 9월10일 『許일병은 타살됐다』는 의문사委의 발표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었다. 鄭단장은 『인권을 중시해야 할 의문사委가 자살을 타살로 날조·조작해 許일병 동료 부대원들의 인권을 말살했다』며 조목조목 의문사委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국방부 특조단이 許일병 사건 조사에 착수한 것은 2002년 8월27일. 국방부는 조사의 객관성 및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의학 등 관련 분야 전문가 7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는 한편, 24명의 전문수사관으로 하여금 국민의 의혹을 해소하고 軍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휴일도 반납하고 再수사에 들어갔었다. 이번 특조단 조사에 임하면서 鄭단장은 구타 등 가혹행위로 인한 타살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수사하도록 지시했다. 鄭단장은 특조단이 출범하자마자 24명의 수사관들에게 매일 「숙제」를 내주는 방법으로 조사를 진행시켰다. 그는 출근하면 밤새 메모한 「콜롬보 수첩」을 꺼내 수사관들에게 과제를 냈고, 이것은 그날의 「체크 리스트」가 됐다. 수사관들은 이 爭點(쟁점)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였고, 그 결론에 따라 수사의 가닥이 잡혀 나가기 시작했다. 27사단 77연대 수색중대 소대장과 21사단 수색대대장까지 지낸 鄭단장의 야전 경험은 전방 근무 경험이 없는 일부 수사관들에게 「
독점 중계-의문사委·全상병에 의해 살인자로 누명 썼던 盧讓植씨(당시 중사)의 격정 토로 2시간 『옛 부하들이 生業 제쳐두고 나의 명예회복 돕고 있다』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잃어버린 父權을 되찾고 싶다』 1984년 발생한 許元根(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 당시 7사단 3연대 3중대 19소초장이었던 盧讓植(노양식·55)씨는 진통제를 한 줌씩 먹고 있었다. 그는 2002년 7월15일 교통사고를 당해 경추 요추 분리증 및 추간판 탈출증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최근에는 베트남戰의 후유증인 목 디스크까지 악화됐고, 지방간으로 인해 침샘이 말라 3~4분만 말하면 혀가 꼬이고 목이 타들어 가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5개월째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盧씨는 거동이 어려워 최근 국방부 특조단의 현장검증과 재판 준비를 위해 목 보호대와 허리 보호대를 착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국방부 특조단의 「의문사委의 조사결과는 날조·조작됐다」는 내용의 조사결과는 盧씨에게 잃었던 미소를 되찾아 주고 있다. 그는 2002년 11월 의문사委 韓相範(한상범) 위원장 등 다섯 명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소송을 낸 목적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父權(부권)」을 되찾고 싶다는 것이다. 『서른 살인 큰아들이 최근 언론의 보도를 보고 곤혹스러웠던지 나를 피합디다. 2001년에 7사단 부사관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때 어색했던 분위기는 말로 할 수 없었어요. 法에 호소해서라도 저에 대한 의혹을 씻는 것이 자식(2남1녀)과 32년 軍 생활의 명예를 되찾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盧씨는 1970년 軍에 입대한 후 32년간 軍생활을 마치고 1998년 1월 원사로 전역했다. 그는 1970년 5월6일, 백마부대 28연대 박격포 반장(하사)으로 베트남戰에 참전했다. 그는 이듬해인 1971년 1월23일 귀국할 때까지 駐越 한국군사령부 작전, 백마 작전, 도깨비 작전, 홍두깨비 작전 등 크고 작은 27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인헌무공훈장을 두 번
許元根 일병 사망 사건 분노에 찬 국방부 조사 발표문의 내막 추적 「許일병 자살을 타살이라고 날조ㆍ조작한 것은 의문사委와 全상병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린 국방부는 왜 흥분했는가. 기자는 許일병의 옛 중대원들과 함께 全상병을 찾아갔다. 의문사委 핵심진술자 全ㅇㅇ상병: 『보상금 받고 양심을 판 사람으로 몰려 괴로웠다』 全상병에 의해 「살인자」로 지목된 盧讓植 중사: 『이제라도 진실 밝히면 용서하겠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七友會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委)와 국방부가 번갈아 「타살됐다」, 「자살했다」고 반대 결과를 발표한 許元根(허원근ㆍ당시 22세) 일병 사망사건. 그 진상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당시 중대원들일 것이다. 許元根 일병이 근무했던 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 본부 중대 출신 예비역들은 최근 「七友會(칠우회)」란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1984년 4월2일 일어난 許일병 사망사건 당시, 중대본부 현장에 있던 일곱 사람으로, 許일병이 자살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七友會는 李眞榮(이진영ㆍ41, 보급계)씨를 총무로, 盧讓植(노양식) 중사, 오용근, 손명조, 신재영, 권오진, 안병덕씨 등으로 조직돼 의문사委 발표를 반박하는 노력을 펼쳐 왔다. 이 七友會가 최근에는 이○○ 하사까지 합세해 八友會가 됐다고 한다. 팔우회의 목표는 九友會(구우회)가 되는 것이다. 이는 중대본부 요원 중 유일하게 의문사委 편에서 진술하고 있는 全상병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동료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회원들은 全○○ 상병이 최초 진술과는 달리 의문사委에서 『盧讓植 중사가 許일병을 쏘았다』고 진술함에 따라, 국방부 특조단에 全○○ 상병과의 대질심문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국방부 조사에서 보았듯 全상병은 대질심문은 고사하고, 국방부 조사 자체도 피했고 그런 가운데 조사가 마무리됐다. 2002년 12월6일 손명조, 이진영 상병 두 사람은 전북 전주市로 향했다. 기자도 동행했다
ROTC 최초의 4星 장군... 兵風ㆍ서해교전 대응 등 한나라당의 국방책임자 한나라당 朴世煥(박세환ㆍ63) 의원은 180cm의 武骨형의 헌칠한 키, 부드러운 말씨의 소탈, 겸손한 성품이 무기다. 덩치에 비해 세심하고 부하를 무척이나 아끼는 德將(덕장)인 것으로 주변에 알려져 있다. 朴의원은 경북 영주 출생으로 안동고(8회)를 졸업했다. 1963년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ROTC 1기로 임관했으며, 1967년 5월에는 베트남전에 주월 한국군 대사관 경호소대장으로 참전해 을지무공훈장까지 받았다. 15사단 연대장을 거쳐 1984년 장군 진급했고, 5공화국 시절 청와대 국방담당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대통령의 국방분야 자문역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ROTC출신으로 처음으로 사단장 군단장이 되는 등 끊임없는 신기록 행진을 이어왔었다. 1993년 5월에는 ROTC 최초로 육군 대장에 진급했으며, 제2군사령관을 끝으로 1995년 3월 전역했다. 李會昌 후보와의 인연은 1996년 5월, 15代 총선에서 함께 전국구로 선거유세단 지원을 하면서 「昌의 사람」으로 알려졌다. 1997년 11월 당시 신한국당 대구 수성乙 지구당을 처음으로 받아 지역구 의원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이후 兵風이 발생했을 때, 신한국당 국방위 간사로 兵風 차단의 선봉에 섰다. 1997년 大選에서는 당시 李會昌 후보의 국방안보 특보로 일했다. 金泳三 정권때는 국방부 장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朴의원은 현재 한나라당 국방위 간사로 15代 국회 때부터 국방委 한우물을 팠다. 그에 대한 李會昌 후보의 신망도는 두텁다. 2000년 2월 16代 총선 직전, 그는 한나라당 내 소위 「공천파동」으로 지역구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전국구 8번으로 轉禍爲福(전화위복)되면서 李총재의 신임을 再확인했다. 朴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나라당 내 「국방 책임자」이다. 실제로 李후보는 국방 현안이 생기 맨 먼저 그를 찾는다고 한다.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 사건, 2002년 6월29일 서해교
52개 주요보직 중 55.8%(29명)이 호남 인사 한나라당은 『金大中 정부 들어서 검찰, 경찰, 국세청 등 司正 기관들의 호남편중 인사가 두드러졌다』면서 『국토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軍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중앙선대委 趙允旋(조윤선) 대변인은 2002년 12월11일 논평을 통해 『軍의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는 국방부내 52개 주요보직도 55.8%(29)명이 호남 인사』라면서 『올 군단장급 승진인사에서는 해당 기수 육사 27기중 선발된 9명중 5명이 호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軍 사정기관인 기무사의 경우, 현재 장군 8명 중 투톱인 사령관과 참모장을 포함해 다섯명이 호남이었다』고 밝혔다. 다음은 한나라당 중앙선대委 대변인실에서 밝힌 「국방부 52개 주요보직 호남편중 실태」이다. 국방부 52개 주요 보직 호남편중 실태 = = = = = = = = = = = = = = = = = 1. 기획관리실장; 서울 2. 법무관리관; 경남 3. 감사관; 전남 4. 기획조정관; 충남 5. 기획예산관; 광주 6. 정책실장; 전남 7. 정책기획국장; 전남 8. 정책기획차장; 전남 9. 군비통제관; 전남 10. 군비통제차장; 경남 11. 군비검증단장; 경기 12. 정훈공보실장; 전남 13. 차관보; 전남 14. 인사복지국장; 경북 15. 인사복지차장; 전북 16. 동원국장; 경북 17. 획득실장; 경북 18. 획득정책관; 전남 19. 획득정책차장; 전남 20. 분석평가관; 전남 21. 군수국장; 전남 22. 시설국장; 경남 23. 사업관리관; 충남 24. 정보화기획실장; 전남 25. 정보화기획정책관; 경남 26. 합동조사단장; 전남 27. 근무지원단장; 경기 28. 국방CALS사업단장; 전남 29. 시설개선사업단장; 전남 30. 6.25사업단장; 경기 31. 총무과장; 전남 32. 국방개혁위원장; 경남 33. 조달본부장; 경남 34. 조달본부차
별이 되면 뭐가 달라지나? 『원스타 다는 게 大將 진급보다 더 흥분』 올해 76명이 '별 맛' 지난 10월17일 정부는 육군 군단장(중장) 3명, 사단장(소장) 10명 등 육·해·공군 준장~중장급 장성 105명에 대한 진급 및 보직 정기인사를 단행했다. 이번 인사에서 김광현(金光鉉·육사32기) 국방부 공보기획과장 등 육군 48명, 함원용(咸元龍·해사31기) 국방부 의전실장 등 해군 15명, 황원동(黃源東·공사24기) 합참 공중작전과장 등 공군 13명 등 총 76명의 육해공군 및 해병대 대령이 준장 진급 예정자로 결정됐다. 이날 오후, 국방부 공보기획과에서는 김광현 대령의 장군 진급 결정과 함께 공보기획과 장교들의 환호성 소리, 장군 진급 축하를 알리는 전화벨 소리로 사무실이 떠나가는 듯했다. 한 장교는 「★ 경축 김광현 대령 장군 진급」이라는 문구를 쳐서 급히 출입문 입구에 붙였다. 이어 부하 장교들이 국방부 브리핑룸에 간단한 다과와 샴페인을 준비했고, 黃義敦(황의돈) 당시 국방부 대변인 등 선후배 장교들이 삼삼오오 모여 『원스타를 다는 것이 대장 진급보다 기분이 끝내주는 것』이라면서 진급을 축하했다. 장군 진급의 현장은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어 훨씬 더 들뜨고 가슴벅찬 흥분이었다. 장교들에게 진급은 「인생의 全部」라고 할 정도로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평소에도 표창을 받을 기회가 있으면 열심히 챙기고, 진급을 위해 거쳐야 하는 보직 진출을 위해 노력하며, 근무평정에 영향을 주는 각종 교육 과정에서도 좋은 점수를 얻으려고 애쓴다. 善行 기록도 진급에 유리하기 때문에 남을 돕는 데도 적극적이다. 남편이 장성이면 자신도 덩달아 장성 부인이 되기 때문에, 장교 부인들도 승진 시즌이 되면 남편 못지 않게 몸이 달게 된다. 그래서 종종 남편 몰래 인사권을 쥔 상급자 부인을 상대로 인사 청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허물없는 고급 장성이 되려면 부인 단속부터 잘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육사출신 한
『6월27일자 SI를 뺀 사람은 반역행위로 조사받아야』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다윗」 전 5679부대장인 韓哲鏞(한철용ㆍ56) 장군에게 지난 10월 한 달은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을 겁니다. 지난 10월4일 한 장군이 국회 국방委 국정감사장에서 「블랙 북」(주요 부대에 배포되는 북한첩보 관련 1일 보고서)을 들어보이며 군 수뇌부의 적 도발 가능성 묵살 의혹을 「폭로」하자 신문과 방송이 연일 대서특필했고, 이어 국방부의 진상조사가 숨가쁘게 진행됐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한 장군을 네차례 만났습니다. 성남시 분당의 요셉성당과 서울 잠실의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을 때, 그는 허름한 점퍼 차림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습니다. 국감장에서 지휘관 녹색견장에 찬란히 빛나는 별 두개를 붙인 모습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죠. 이때 받은 느낌은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다윗」과 같았습니다. 지난 11월3일 일요일 저녁, 한 장군을 만났을 때 그는 36년 동안 입은 정복 대신 감색 니트 조끼에 밤색 콤비 정장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역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10월31일자로 강제 전역을 당했기 때문이죠. 그는 기자에게 『요즘 운동을 안 하니 몸무게가 늘었다』며 『36년 만에 맞는 모처럼 편안한 주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보장교로 죽 근무했지만 1994년 보병 8사단장 시절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修道(수도) 생활」하듯 營內(영내)에 주로 머물면서 병사들과 축구도 하고, 천막속에서 宿食(숙식)을 함께하면서 철조망 보수공사를 하는 등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하더군요. 1개월 정직의 중징계 처분 지난 10월23일, 국방부 중앙징계위원회는 北 도발징후 묵살의혹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던 한 장군에게 정직 1개월의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보통 공무원의 징계는 경고=>근신=>견책=>감봉=>감급=>강등=>정직=>파면 등으로 나뉘는데, 한 장군은 罷免(파면) 직전의 停職(정직)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1950년 여름 多富洞 전투]란 제목으로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에 실린 글 全文을 소개합니다. 서른살의 젊은 사단장이 세배가 넘은 인민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백 장군이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한미연합작전을 원활히 수행한 것도 빠질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백 장군의 군 후배들을 만나 취재를 하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봉천군관학교(만주군관학교의 전신)를 나온 군인이라기보다는 평양사범을 졸업한 교사였습니다. 백 장군은 부하들을 '지휘'하지 않고 '교육'했습니다. 백 장군은 기자에게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게"라는 생활신조를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장 차이로 갈리는 전장에서 '부하들의 뺨 한대 때린 적이 없는' 이 전쟁 영웅은 '진정한 리더십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을 우리에게 無言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편집자 注]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白善燁 사단장)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gomsi@chosun.com) 『기리니끼니 팀워크가 중요해요』 한국 축구 대표팀이 폴란드를 상대로 얻은 월드컵 첫승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6월8일 오전 7시, 白善燁(백선엽ㆍ83) 장군과 기자는 대구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多富洞(다부동)이라 불리는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6·25 당시 30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국군 제1사단을 지휘했던 白장군은 이제 팔순 노인이 됐다. 機內(기내)에서 白장군은 6월 초 일본에서 출판된 「指揮官(지휘관)의 조건」(草思社 刊)이라는 한국전 당시 지휘관의 경험을 요약한 책을 보여줬다. 『축구에서는 개인기 못지않게 팀워크가 중요하잖아요. 전쟁에서도 기습은 두세 번 이상 써먹을 수가 없거든. 기리니끼니 팀워크가 중요해요』 평안남도 江西 출신의 그가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로 말을 이어갔다. 『戰場(전장)에서 학벌은 필요 없습니다. 전장
지면에 옮기지 못한 따끈따끈한 취재 뒷얘기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오동룡 올림.
'지방선거 구인난' 국민의힘, 추미애에 맞설 경기도지사 후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