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권의 책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김유나 지음 | 창비 펴냄)

출근길 환승역 계단을 내려가는 평범한 정수리들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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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우리를 속인다. 우리도 인생을 속인다. 그사이 어딘가에서 하루하루를 버텨 내는 우리들 이야기가 김유나의 첫 소설집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이다.
 
  ‘랫풀다운’에서, 배신당한 석용이 제주도 본가까지 추적해 갔더니 그를 속인 악당의 허름한 노모가 기다린다. 그녀의 키보다 위에 걸린 빨랫줄을 키에 맞게 내려 주고 돌아 나오고 만다. 화를 낼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그냥 웃음이 새어나오는 그 순간, 독자는 이미 김유나의 손안에 들어와 있다. 표제작 ‘내가 그 밤에 대해 말하자면’의 문장 한 줄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에 집중한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그들이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이 나온다.”
 
  열 살 아이가 내뱉은 이 문장이 섬뜩하게 정확한 이유는, 우리도 매일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진실은 너무 위험하고, 완전한 거짓은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을 만큼만’ 진실을 꺼낸다.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이름 없는 마음’은 약시에 틱 장애까지 있는 남동생을 평생 떠맡아 온 누나의 이야기. 남매 사이 감정에는 이름이 없다. 사랑도 아니고 원망도 아니고, 미안함과 지겨움 사이 어딘가. 독자가 이름을 붙여 보려는 순간 소설은 이미 끝나 있다. 화해도 없고 재회도 없다. 그냥 ‘알 수 없는 마음’만 남는다. 그런데 그게 가족이 맞다.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은 도망치거나, 속이거나, 침묵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영웅은 없다. 각성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들이 밉지가 않다. 심지어 웃음이 터지려는 순간 분노로 꺾고, 분노가 차오르려는 순간 슬픔으로 비튼다. 작가는 고백한다. “출근길 2호선 환승역 계단에서 정수리들을 내려다보며 소설 속 인물을 그렸다”고. 들키고 싶지 않은 주말의 진실 하나를 품고도 월요일 계단을 내려가야만 하는 사람이 나고, 당신이고,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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