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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 글·사진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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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중심가를 살짝 벗어난 루키야니우스카(Lukyanivska) 지하철역 맞은편에는 2022년과 2023년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크게 파손된 주거용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키이우 내 전쟁의 흔적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소다. 폐허가 된 건물 앞을 청소년들이 큰소리로 수다를 떨며 지나고 있다.
공습경보가 울려도 아무도 대피하지 않는다. 묵묵히 하던 일을 할 뿐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먹고, 마시고, 즐긴다. 어쩜 그리 태평하냐고 물으니 “매 시간 슬퍼하며 살 수 있냐”고 되묻는다. 2022년 전쟁 발발 후 햇수로 5년째. 이들은 상처를 안고 사는 법을 안다.
 

  사실 한두 해 일이 아니다. 수백 년간 단련한 결과다. 우크라이나인들은 13세기부터 몽골 침략, 오스만 제국의 압박,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를 견뎌 왔다. 그 와중에도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 냈다. 그 뿌리 깊은 생존 본능이 도시 곳곳에 스며 있다.
 
녹슨 철갑 위로 핀 승리의 의지. 성 미하일 황금돔 수도원과 외교부 건물 앞에 녹슬고 부서진 러시아 전차들이 전시돼 있다. 침략의 증거인 쇳덩이들은 시민들의 구경거리가 됐다.

 
성 미하일 황금돔 수도원의 담벼락을 따라 길게 이어진 추모의 벽. 2014년 돈바스 전쟁부터 현재까지 전선에서 스러져 간 수천 명의 전사자 사진과 이름, 생몰 연도가 빼곡히 붙어 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 우크라이나 독립의 상징인 마이단 광장은 이제 전사자들을 기리는 거대한 제단이 됐다.

  자포리자에 가족을 두고 홀로 키이우에서 일하는 한 여성은 “정기적으로 고향집 유리창 수리비를 보낸다”고 했다. 덤덤한 어투였다. 가족들은 왜 이사하지 않고 접경지에 계속 사냐고 했더니 “그곳이 그들의 집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바트킵시치나(Батькiвщина·조국)’를 직역하면 ‘아버지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들에게 땅을 향한 애착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삶의 근거이자 정체성이다. 전쟁으로 약 600만 명이 해외로 떠났지만, 끝내 고향을 지키겠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특히 좋아한다. 거리 곳곳에서 K-팝에 빠진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전쟁 전부터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에서 한류 열풍이 가장 뜨거운 나라 중 하나였다. 현지인이 운영하는 한식당도 여럿이다. 손님 대부분도 우크라이나인이다. 한국인이라고 하자 한 종업원이 “굿 코리안이냐 그 반대냐”고 물었다. 분단된 한반도와 러시아 포격 속의 우크라이나는 아픔의 문법이 비슷하다.
 
키이우 ‘인민자유 아치’ 인근 스카이파크에 전시된 러시아군 장갑차 잔해와 탄띠. 전쟁은 먼 과거인 듯 청소년들이 이를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구경 중이다.

 
우크라이나인은 한국에 관심이 많다. 우크라이나 국립식물원 내 ‘한국 전통 정원’ 공간. 한국-우크라이나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2012년 조성됐다. 한국정을 둘러보던 관람객들이 대화를 나누다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거리에는 여성들이 넘쳐난다. 많은 남성들이 전선에서 스러져 갔고 지금도 사투를 벌이고 있어서다.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전쟁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스스로를 한껏 단장한 모습이다. 잘 정돈된 금발 머리와 또렷한 화장, 하이힐 차림으로 활보한다. 미사일이 날아와도 성형외과 대기 줄이 끊이지 않는다는 현지 언론 기사 제목이 눈에 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옆을 지나는 화려한 옷차림의 시민들. 비극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일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투쟁이다.⊙
 
우크라이나 최고 명문 대학인 타라스 솁첸코 국립대학교(Taras Shevchenko National University of Kyiv) 산하 ‘포민 식물원(A. V. Fomin Botanical Garden)’에는 김소월 흉상이 있다. 한국 문학인의 기념비가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건 이게 처음이다. 한 우크라이나 부부가 동상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전쟁 중에도 단장을 멈추지 않는다. 키이우 소재 우크라이나 국립식물원 내 라일락 나무에서 마치 마네킹과 같은 여성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드니프로강이 내려다보이는 다리 위, 다섯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아이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이 어린아이에게도 공습경보는 일상이 됐다. 아이는 바이올린 소리로 경보음을 덮었다.

 
키이우로 향하는 기차에서 마주한 광활한 유채꽃밭. 5월, 폴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국경 지대로 달리다 보면 유채꽃이 끝없이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새파란 하늘과 노란 유채꽃이 마치 거대한 우크라이나 국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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