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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첩보대 비화

유일한 女 북파 공작원을 만나다!

“밤 11시 공동묘지 데려가 담력 훈련시켜”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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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고 정의는 승리합니다”(어느 90대 공작원의 고백)
⊙ “첩보 공작원을 낙하산으로 침투. 인민군 집결지와 보급 수송 방법 확인”
⊙ “첩보대 평양파견대와 도널드 니콜스 美 6006부대 고문단장… 김일성宮 접수”
⊙ “휴전협정 직전 美 헬기를 탔던 북파 공작원 수백명… 대다수 못 돌아와”
어느 90대 북파 공작원의 책상에 놓인 자필 문구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이라고 믿고 있었다.
  공군 특무부대(훗날 공군 첩보부대) 출신 노병(老兵)들을 만났다. 이름하여 ‘북파 공작원들’이다. 대개 민간인 신분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해 만들었다는 ‘실미도 부대’가 바로 그들이다. 남북대치라는 극한 상황이 만든 비극적 희생양들이었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베일에 가려졌으나 서해 함박도 논란이 일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이 그들의 주 무대였기 때문이다.(《월간조선》 2019년 10월호 ‘충격증언 함박도 공군 첩보대원들’ 참조) 앞서 2003년 12월 24일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면서 실미도 부대의 존재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서울 구로구에서 90대 북파대원을 만났다. 자식들은 모두 출가하고 아내는 사별해 혼자 살고 있었다. 그의 책상 한 귀퉁이에 적힌 자필 문구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진실을 외면하면 그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고 정의는 승리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보이려 쓴 글이 아니었다. 신(神)에 대한 겸손한 기도였다.
 

  공군 특무대는 6·25전쟁 당시 서해 NLL상의 여러 섬을 기지로 대북공작을 펼쳤다. 또 이 섬에서 파견부대를 운영했는데, 파견부대가 있던 섬으로 강화도, 백령도, 연평도, 납섬(평안북도), 교동도, 주문도, 말도, 어화도 등이 있다.
 
  북파 요원들은 공작원, 통신원, 호송원, 선원 등으로 구성되며 대개 민간인 신분이었다. 다만 대원들을 관리하는 파견대장은 장교와 문관, 상사 계급이었다. 이들은 미 극동공군 6006부대와 정보를 교환하며 북파공작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일부는 한국군이 아닌 미 6006부대 소속 첩보요원들이었다.
 
 
  공군 첩보대의 대북 첩보활동 비화
 
  공군 북파 첩보대원 수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공군 정보전우회를 통해 확인한 자료를 대략 종합하면 약 400명 안팎이다. 이들 중 100여명 정도는 북파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공군 정보전우회 관계자의 말이다.
 
  “2004년 10월 집권당인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에 근거해 3년에서 5년에 걸쳐 최소 9500만원에서 최대 2억8000만원에 이르는 보상금을 북파 공작원에게 지급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작전 수행을 객관적으로 증명 못 한 이들은 아직 보상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생존자는 10여명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과 고령에다 정신착란에 시달리며 비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건강이 점점 나빠져 하루하루가 고비다.
 
  기자는 이들의 활동상을 정리한 ‘자필 문서’를 공군 정보전우회 관계자로부터 건네받았다. 이 문서는 공군 특무대를 이끌던 윤일균 장군(尹鎰均·1926~2017)이 생전에 남긴 일지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문서 제목은 ‘6·25전쟁 발발 후 공군 첩보대의 대북 첩보활동 비화’다.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보았다. 일부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이름을 일부 가렸고 오탈자를 고치고 비문을 바로잡았다. 독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긴 문장은 임의로 나누었다.
 
  현재 국방부는 이들의 활동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혹은 이들의 당시 신분이 미 공군 소속 6006부대와 관련 있다는 이유로 공적(功績)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6·25전쟁 발발 후 공군 첩보대의 대북 첩보활동 비화
 
  미 6006부대 고문단과 韓美 합동 첩보작전으로…
 
6·25전쟁 당시 B-26폭격기들이 북한 군사기지와 보급시설 등에 네이팜을 퍼붓고 있다. 공군 폭격은 당시 공군 첩보대 북파 공작원의 정보 제공이 큰 역할을 했다.
  [1] 6·25전쟁 발발 후 공군 정보 종사자들은 김포비행장과 여의도비행장에서 각기 철수하여 수원에 집결하였다. 윤일균 대위 지휘하에 집결 인원을 점검하고 7월 4일 주명○ 소위와 이경○ 중사, 김복○ 하사를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침투시켜 남하 진격 상황을 파악하고 귀대하였다.
 
  그해 8월 1일 처음으로 미 6006부대 고문단과 한미 합동 첩보작전으로 적지인 인천지구와 전남 지역에 첩자 공작원을 낙하산으로 투하해 침투시켰다. 이들을 통해 인민군 집결지와 보급 수송 방법에 대해 파악하고 소련제 T-34 탱크의 야간 이동과 위장 상태를 확인한 뒤 무사 귀환하였다.
 
 
  [2] 1950년 8월 5일 아군의 대전차포와 박격포에도 끄떡하지 않는 소련제 T-34 탱크 한 대가 평택시 교외 노변에 정차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일균 대위가 김원○ 하사와 이기○ 상병을 적진에 침투시켜 포복으로 탱크에 접근했다.
 
  이들은 탱크 안으로 침입하여 조사한 결과, 탱크 안에 방화에 대한 방어 장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귀대하여 이 정보를 미 5공군사령부 상황실에 통보했다. 이후 T-35 탱크 공격을 항공기에 의한 *네이팜(Napalm)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그 후 각 전선에서 까맣게 탄 T-34 탱크를 다수 목견(目見)할 수 있었으며, 낙동강 전선에서 T-34 탱크의 출현을 한 대도 목견할 수 없었다.
 
  (*네이팜: 알루미늄 비누와 휘발유를 혼합하여 만든 고농도 연료다. 화염 방사기에 사용하며 이 연료를 충전한 폭탄이 네이팜탄이다. 네이팜탄은 3000℃의 열이 발생하여 목표물을 태워버린다.)
 
 
  [3] 1950년 9월 7일, 1차로 정보요원 58명을 모집, 일본의 미군기지에 급파하여 단기 첩보교육을 실시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9월 18일 2차로 경찰 통신사 25명과 정보요원 15명 등 40명을 모집해 일본 미군기지에서 첩보 수집 방법을 교육받고 귀국했다.
 
  이후 미 6006부대 고문단과 한미 합동 첩보작전으로 격전지인 낙동강 전선 후방과 경인지구에 C-49 수송기에 (북파 공작원을) 실어 낙하산으로 침투시켰다. 해상으로는 인천 지역에 경찰 통신사가 통신장비를 휴대하고 침투하여 인민군 집결지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교신으로 통보하였다. 이후 군사 목표물을 맹폭격하여 유엔군과 국군의 전선 전투 지역에서 승리하는 전과가 여러 차례 있었다.
 
 
  민간인 反共동지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2020년 9월 24일 오후 서해 대연평도에서 군인들이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서해상은 한국전쟁 당시 공군 첩보대의 주 무대였다.
  [4]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될 때 양동작전으로 공군 첩보대는 미 6006부대 고문단과 합동으로 미 고속정을 타고 함경남도 연포비행장에 침투 주둔하였다. 정봉○ 상사를 파견대장으로 임명하고 그 휘하 정보 하사관 5명과 공군 헌병 20명을 중무장시켜 비행장 주변의 해안과 인민군 동향을 감시하다가 2개월 후 전격 철수하였다.
 
 
  [5] 유엔군과 국군이 1950년 10월 15일 평양에 입성할 때 이건○ 중위를 평양 파견대장으로 임명했다. 이 중위와 14명의 정보 하사관, 그리고 미 6006부대 도널드 니콜스 고문단장과 미군 4명이 김일성궁(宮)을 접수, 주둔하면서 김일성이 사용하던 고급 승용차와 통신 장비, 가재 도구, 서적 등을 소련제 지프로 운반해 서울로 후송하였다. 또 각종 군사 정보를 수집한 후 철수하였다.
 
 
  [6] 1950년 10월 18일 윤일균 대위는 별도로 현역 정보 하사관 7명을 대동하고 평양 변두리와 함경남도 지역을 둘러보았다. 이들은 현지 민간인 반공(反共) 동지를 통하여 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인민군의 후퇴 경로 및 무장 상태를 파악하고 철수하였다.
 
 
2019년 9월 국방부 웹사이트에는 함박도를 서해 NLL 이남으로 표시했었다.
  [7] 1951년 1·4후퇴 후 공군 첩보대는 평안북도 선천 앞바다에 있는 신미도와 납섬을 장악하고 파견대를 주둔시켰다. 또 철산리, 애도, 운문도, 백령도, 연평도, 대수압도, 강화도, 숙도, 교동도, 말도, 주문도, 어화도에도 파견대를 설치하는 등 서해 지역 20여 곳에 파견대를 장악,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인민군 미그-15 전투기와의 공중전이 잦았는데, 미 공군 조종사들에게 “북한 지역 목표물을 폭격하다가 피격당했을 때 서해지구 도서 해상에 불시착하라”고 알렸다. 이후 서해지구 파견대 요원들이 추락한 여러 명의 미 조종사들을 구출하여 귀환한 사실이 있었다.
 
 
 
추락한 여러 명의 미 공군 조종사들 구출

 
미 극동공군 6006부대 창설자 도널드 니콜스는 6·25전쟁 당시 美 중앙정보국(CIA)의 첩보대장이었다.
  [8] 1951년 4월 10일 만주 접경 상공에서 미 F-86 전투기(일명 F-86세이버 전투기로 ‘쌕쌕이’로 불렸다)와 공중전에서 추락한 미그-15 전투기의 잔해를 특수 공작원 김중○ 외 18명이 평북 신미도에 낙하산으로 침투하여 미그기 중요 부품을 회수하고 전원 무사히 귀환한 사실이 있었다.
 
 
  [9] 1951년 4월 17일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 모래사장에 불시착한 미그-15 전투기 부품 탈취 작전에 미 6006 고문단장 니콜스와 윤일균 대위, 이봉○ 소위 외 9명의 하사관이 C-119 수송기를 타고 낙하산으로 침투했다.
 
  미그-15 주요 부품을 분쇄 탈취하여 H-19형 헬리콥터로 수송해 귀환하였다. 그 결과, 미그-15기의 제원(諸元)을 파악하여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작전 가담자 전원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10] 1952년 6월 13일부터 10월 30일 사이 납섬에 맥아더 장군의 ‘만주(滿洲) 폭격작전’ 구상에 따른 각종 정보수집을 위해 김기○ 파견대장과 공작원 김진○ 외 29명, 공군 현역 통신사 1명, 공작선 선원 3명이 주둔했다.
 
  이들은 중국 어선 3척과 중국 선원 14명을 생포하여 서울 공군 첩보부대 본부로 후송하였고 신의주, 선천, 곽산, 압록강을 거점으로 막강한 적의 대공 포진지 배치와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 후 진입에 대한 현황 정보를 수집하였다.
 
  또 미 F-86 전투기와 적(敵) 미그-15 전투기 간 공중전에서 추락한 미군 조종사 구출 작전을 여러 번 성공리에 완수하고 전원 철수하였다.
 
  같은 시기에 납섬 부근의 애도 파견부대에 15명의 공작원이 주둔하면서 각종 군사 정보 수집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중공군의 보복 기습 공격으로 2명만 생존하고 전원이 전사했다.
 
 
  [11] 평북 철산리 파견대장 유명○(93) 준위는 중공군 개입으로 수도 서울이 재차 공산 치하에 들어갔을 때 최북방 파견대장으로 임명받았다. 그는 김종○ 중사와 함께 평북 고향에서 피란 나온 임두○·이명○·이기○ 등을 포섭하여 첩보 수집 방법을 교육시켰다.
 
  이들은 고향 친척과 연고자를 점조직으로 활용하면서 중공군과 인민군의 남하 이동 상황과 보급물자 수송에 대해 위치 정보를 공군에 제공했다.
 
  이후 항공기에 의한 폭격 전과(戰果)가 많았다. 이로 인해 중공군과 인민군 사기가 현저히 저하되었음을 인민군 포로의 진술을 통해 알게 되었다.
 
  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강화도 파견대장이던 유 준위는 강화도에 피란 온 이들 중에 반공사상이 투철한 이들을 선발해 군사 첩보 수집 방법을 교육시키고 각자 고향 연고지로 야반 침투시켰다. 이들은 옹진반도와 개성지구 전방의 인민군 군사 정보를 수집해 귀환했다.
 
  이들의 첩보는 미 5공군사령부 상황실과 강릉 공군비행장 작전 상황실로 전달돼 폭격 전과가 다대(多大)하여 윤일균 첩보대장에게 노고를 칭찬받았다.
 
  그는 3년 전부터 치매 증세가 심하여 집에서 요양 중이다.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신청을 모두 3차례에 걸쳐 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증거 불충분이 이유였다. 그러나 불복해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2]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후 한상○(90)씨는 서해 NLL 최전방인 용매도 공군 첩보대 파견대장이었다.
 
  당시 파견대 공작원 김승○, 강명○, 조광○, 장재○, 김의○, 이봉○, 박남○ 등이 자기 고향 연고지에 나룻배를 타고 10회 이상 야반에 침투해 점조직을 구축하고 정보를 수집해 한상○ 파견대장에게 제공했다. 이 정보는 아군에 직보되어 신속한 폭격이 이뤄져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또 육군HID 인천 첩보대장이 직접 용매도 공군 파견대를 찾아온 일도 있었다. 그는 최전방 폭격물 위치, 김일성 고지, 백마고지에 대한 항공기 지원 사격을 요청해 육군 지상군과 합동작전을 수행했다. 그 결과, 강릉 공군비행장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일명 호주기)가 100~200회 이상 출격하여 맹폭격, 중공군과 인민군의 사기가 저하되어 전의(戰意)를 상실하였다.
 
  용매도 파견대는 DMZ, 서해 NLL에 가장 가까운 위치여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에도 북한의 군사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자주 공작원들을 침투시켰다.
 
  공작원을 호송할 선원이 부족해 한상○ 파견대장이 직접 참여해 (용매도) 전방 개성 지역의 군사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특수임무수행자’ 신청을 하였으나 자료 부족과 인우 보증인의 사망으로 지금껏 보상을 받지 못한 상태다.
 
 
  첩보대의 유일한 女공작원
 
공군첩보대에서 활약한 박순희씨. 사진 오른쪽은 첩보원 시절의 모습이다.
  [13] 박순희(朴順姬·86)씨는 공군 첩보대의 유일한 여성 공작원이었다. 다른 여성도 첩보대에 있었으나 모두 중도에 포기했다고 한다.
 
  고향은 평양으로 1950년 10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이 평양에 입성할 때 가장 앞장서서 반겼다고 한다. 당시 박씨는 인민군이 후퇴할 때 미처 운반하지 못한 보급 물자창고와 인민군 주둔지를 국군에게 제보한 일도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자 그녀는 도보로 혼자 월남해 황해도 사리원을 거쳐 개성, 해주 등지에 머물다가 인천 교동도로 피란해 정착했다.
 
  기자는 지난 3월 10일 인천 부평에서 박순희씨를 만났다.
 
  “공군 특무대(당시 첩보대)가 무얼 하는 곳인지 모르고 가담했어요. 교동(도)파견대에서 자고 있는데 밤 11시경 군인들이 저를 깨워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 담력 훈련을 시키더군요. 무서워 덜덜덜 떨며 이틀간 교육을 받았죠.”
 
  그때가 1952년 9월 중순 무렵으로 기억한다. 박씨는 “훈련은 받았어도 북한에 정말 갈지는 몰랐다”고 했다. 박씨는 1954년 8월 21일까지 공군 제90특무대, 공군 제20특무전대 5392부대 등지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군인들이 뗏마(작은 배)에 태워 동료 공작원 김○○씨와 함께 북에 침투시켰어요. 김씨의 고향(황해도 연백군 금산면)에 머무르며 정보를 수집했죠. 제가 활동할 당시 휴전을 위한 남북회담이 진행 중이었는데도 서부 전선의 중공군과 인민군의 병력이 계속 증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또 병력 이동과 보급차량 이동 상황, 개성 송악산과 해주시 야산 계곡에 야전포와 중화기를 설치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며칠 후 마중 나온 뗏마를 타고 교동파견대로 돌아왔어요.”
 
  박씨는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한 정보로 많은 전공(戰功)을 올렸다. 한미(韓美) 전투폭격 비행단이 주요 목표물을 정밀 타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휴전협정 이후 교동파견대에 함께 있던 공작원 이응용씨와 결혼해 슬하에 2남 2녀를 낳았다. 남편 이씨는 1992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 열 번도 넘게 ‘특수임무수행자’ 신청을 했으나 그때마다 기각됐어요. 근거 자료 부족에다 미 6006부대 소속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글쎄… 당시 미군 병사들의 얼굴을 본 적조차 없는데 미군 소속이라니…. 먼저 떠난 남편도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한 가닥 희망을 붙들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그날이 올까요?”
 
  박씨가 기자에게 건네준 문서에는 정부의 보상기각 결정 사유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상자 박순희님의 특수임무수행 관련 대내 자료 확인 및 참고인 등 대외 조사 결과, 첩보부대에서 근무한 사실이 없는 자로 확인됨에 따라 법률 제2조 제1항 2호 및 시행령 제4조 제1항에 의거 비대상자로 판단되어 본 건 신청을 기각합니다.〉
 
  박씨는 이렇게 말한다.
 
  “6·25전쟁 때 사선을 넘던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함박도 어민 납치사건을 목격하다!

 
공군 장교에서 예편한 뒤 북파 공작에 참여한 정영훈씨.
  [14] 기자는 2019년 9월 공군 예비역 대위 출신 정영훈(鄭英壎·91)씨를 만나 1965년 10월 29일 서해 함박도(말도 부근)에서 일어났던 어민 피랍사건을 《월간조선》을 통해 보도한 적이 있다.
 
  그는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군에서 예편(그해 8월 31일)한 상태였고, 공작자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비로 배 두 척과 공작대원 5명을 모았다.
 
  “그 무렵, 황해도 해주의 사리원비행장에서 북괴 무장 인민군 300여명이 AN-2기에 나눠 타고 서울 여의도와 마포나루터로 기습한다는 첩보를, 당시 위장 귀순한 간첩 한정서와 이월규의 신문(訊問) 과정에서 확인했어요. 우리 국군의 월남파병과 한일 국교정상화를 막으려 한다는 것이었죠.”
 
  정영훈과 북파 공작원들은 1965년 9월 30일 무렵 말도에서 배를 타고 2시간30분가량 올라가 황해도 해주 인근 앞바다의 ‘돌산도’에 잠복했다. 그곳에서 10월 4일까지 사리원비행장의 동향을 정탐한 결과, 첩보가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임무를 마친 뒤 그들은 어민 244명과 배 5척에 나눠 타고 10월 29일 함박도에 조개잡이를 나갔다.
 
  “중무장한 인민군 20명이 기다렸다는 듯 따발총과 수류탄으로 포위하는 바람에 어민 135명은 구출했지만 109명은 결국 납치되고 말았어요.”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남녀 어민 각각 53명과 51명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지만 침몰한 배의 선장과 기관장, 잡혀간 어민 3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또 어민통제 요원으로 공작에 참가한 정씨의 동생 영국씨는 어민 구출 과정에서 바닷물을 너무 많이 먹어 3년 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저는 당시 어민 104명이 송환된 후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었지요. 그러나 자비로 썼던 공작자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어요.”
 
  그는 또 자신의 ‘특수임무수행’과 관련한 보상금 신청이 수차례 좌절됐다. 동료 대원들의 인우 보증을 받아 관련 서류를 제출했지만 근거가 부족하다는 통지만 받았다.
 
  “1972년 6월 실미도 폭동사건 이후 자기네들이 불리한 대북 첩보 공작 관계 서류와 전사(戰史) 자료를 모두 소각 인멸해버리고 말았어요.”
 
  그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제가 국가를 위해 한 일은 분명한 사실이고, 아직 살아 있으니 반드시 밝혀지리라 확신합니다. 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휴전 후 북파 공작원들의 안타까운 죽음
 
  “‘잉여인간들’을 북파에 투입시켰다. 생사는 모른다”(도널드 니콜스)
 
언론인 출신 최금산씨가 쓴 소설 《첩보왕 도널드 니콜스》.
  언론인 출신의 소설가 최금산씨가 2016년 《한미 연합 첩보전 6006, 첩보왕 도널드 니콜스》(경지출판사)라는 소설을 펴냈다. 픽션이지만, 6·25 당시 미 첩보대장 도널드 니콜스의 회고록과 첩보요원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였다. 최씨는 “스토리 텔링이 조금 필요했지만 관련 사실은 전부 팩트”라고 귀띔했다.
 
  이 책의 ‘서해 말도 반란’장(章)에 북파 첩보원 이야기가 나온다. 때는 휴전협정으로 38선이 생긴 직후다. 북파 공작원의 처리 문제가 불거졌다. “북파돼 귀환하면 평생 편안히 먹고살게 해주겠다”며 전국을 물색하여 끌어들인 첩보원들이 애물단지가 된 것이었다.
 
  일부 북파 요원들은 군번과 활동기간에 따른 보상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미 당국은 비밀 첩보부대를 운영, 공작원을 북한에 보냈다는 것을 시인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널드 니콜스는 미 극동사령부에다 북파 공작원들의 신원 문제를 질의하였으나 답이 없자 이들을 재(再)북파시켜버렸다.
 
  〈… 나는 극동사령부의 답을 기다리다 지쳐서 첩보요원들을 개성 지역으로 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황해도 해주 상공 800m 지점, 서해 주문도에서 직선거리로 76km. 미군 헬리콥터로 첩보요원들을 하나씩 뱉어내기 시작하였다.…〉(286쪽)
 
  미군 헬기를 탔던 북파 공작원 수가 수백명에 달했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니콜스는 북한 구월산에서 서해 말도로 철수하는 특수부대 군인 400여명을 첩보요원들을 통해 수장시킨 일도 있었다.
 
  〈… 휴전협정 5개월 전에 나는 끔찍한 비밀공작을 펼쳤다. 한명이라도 부담을 덜어보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구월산에서 말도로 철수하는 특수부대 군인 400여명을 수장시켰다. 이들이 탄 배를 첩보요원들에게 북한의 배로 오인하게 하여 침몰시킨 것이다.…〉(291쪽)
 
  우군이 우군을 물귀신으로 만들었다. 말도에 귀환하면 예우를 요구할 것 같아 니콜스는 ‘적군의 공격으로 위장하여 400여명을 고기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설은 니콜라스의 음성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 그 후에도 나는 여러 차례 이들 잉여인간들을 북파 활동이라는 명분을 달아서 북한으로 투입시켰다. 그 후 그들의 생사 여부는 하나도 확인이 안 되었다.…〉
 
  여기서 ‘잉여인간들’이란 바로 북파 공작원을 말한다. 소설을 쓴 최금산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증언과 자료로 쓰인 진실에 가깝습니다. 도널드 니콜스는 1992년 10월 18일 66세 나이로 플로리다 양로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한국전쟁 당시에 모았던 골동품과 달러와 금을 미국 어디론가 수송기를 이용해 10여 차례나 실어 갔다고 합니다.
 
  그가 수집한 골동품 가운데는 국보급도 상당수 있었고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서 갖고 온 사료도 있었다고 해요. 그러나 그의 사후 니콜스의 유품과 일지, 그리고 비밀장부가 남김없이 사라졌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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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옥    (2021-04-04) 찬성 : 3   반대 : 0
구월산의유격대 를 아시나요 어린청소년들의 17.18.19세 피흘리면 괴로도당과 맞서 싸워
나는 그분 의 님들의 향한여 머리숙여 묵염을 드림니다. 서해 영국함대 사령관님의 초청으로
유격대 대장님과 상담내용이 어느 tv 방송국에 있읍니다.자료를 찾아 유튜브에 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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