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창 번창할 땐 90가구에 200여 명의 주민이 살아… 주변 황금어장
⊙ 그 시절 흉흉했던 소문… 某 특수부대원 10여 명, 함박도에서 목이 잘려
⊙ 말도 소대장 때 만난 특수전 전문 공군 대위… 1960년대 말 《청맥》지 연루
⊙ 말도에 해병대 위문을 왔던 여대생들… ‘이화여대 서클 청맥회원’
⊙ “만약 吳 하사가 붙잡지 않았다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 그 시절 흉흉했던 소문… 某 특수부대원 10여 명, 함박도에서 목이 잘려
⊙ 말도 소대장 때 만난 특수전 전문 공군 대위… 1960년대 말 《청맥》지 연루
⊙ 말도에 해병대 위문을 왔던 여대생들… ‘이화여대 서클 청맥회원’
⊙ “만약 吳 하사가 붙잡지 않았다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 해병대 말도 소대장 시절의 김무일 중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땅’인 함박도(인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산97)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해병대 예비역 대위인 김무일(金武一·해병학교 35기)씨를 만났다. 그는 ‘야전형 CEO’로 알려진 인물이다.
해병대 말도 소대장과 파월(派越) 청룡부대 수색소대장으로 7년7개월간 복무한 뒤 예편해 현대정공 관리본부장, 기아차 부사장, 현대차 구매총괄 본부장(부사장), 현대제철 대표이사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대그룹에 유독 해병대 예비역 특채가 많은 것도 그가 이뤄낸 발자취 때문이라고 한다.
김 전 부회장은 늘 ‘해병대 정신’을 강조하며 조직에 ‘불가능은 없다’ ‘책임완수’ 등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시인의 감성으로 사람과 조직을 대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는 등단 시인이자 수필가다.
그는 지난 10월 21일과 22일 양일간 해병대 장교 가족들과 함께 ‘그리운’ 말도를 찾았다.
스무 살 난 ‘귀신 잡는’ 병사들과 만난 그는 52년 전, 그러니까 1967년 3월부터 6개월간 복무했던 말도 소대장 시절을 추억했다. 그리고 말도에서 8km 떨어진 ‘우리 땅’ 함박도와 조우했다. 하지만 함박도는 안타깝게도 ‘남의 땅’이 되어버렸다.
기자는 지난 11월 1일 서울 압구정동에서 그를 만나 말도 소대장 시절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절해고도 외딴섬 말도
“서해 강화도 끝점에 가물가물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섬, 말도가 있어요. 그 옛날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그 섬의 관청보고가 늘상 늦는 바람에 상급관서로부터 얼마나 꾸중을 들었던지, 한자의 끝말(末)에다 꾸짖을 질(叱)을 붙여 말도(唜島)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말도에 가려면 며칠이나 걸리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외딴섬이었죠. 생필품 등을 주문하면 ‘말도 마라. 아차(아차도)에서 주문하면 볼음도에서 보름은 족히 걸릴 것이여~’라는 자조 섞인 말을 들어야 했죠.”
김무일 전 부회장에 따르면 말도와 함박도 인근 수역은 질 좋은 참조기와 숭어, 농어, 병어의 황금어장이었다고 한다. 한창 번창할 땐 90가구에 200여 명의 주민이 말도에 살았다. 어민들은 황해도 연백군과 인천의 중간 지점인 이 섬에서 수산물을 중개했다. 그의 말이다.
“말도엔 인근 다른 섬(볼음도, 아차도, 주문도 등)에서 볼 수 없는 암석과 벼랑이 있었어요. 할매바위, 죽(竹)바위, 쌍바위, 그리고 갈래바위와 금강꼬치(바위) 등 기암절벽이 수려한 풍광을 자아내는 특이한 곳이었어요.”
말도의 면적은 1.449km2로 여의도의 약 6분의 1 크기다. 엔간한 지도에는 흔적조차 없는 외딴섬. 정기여객선은 없고 육지에 나가려면 쪽배나 다름없는 ‘뗏마선’을 타고 인접 볼음도에나 가야 여객선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인근 볼음도와 아차도의 주민들은 “아차도에서 ‘아침’ 먹고 볼음도에서 ‘보름’쯤 머물다가 이 세상 끝섬(말도)에 가면 인생의 ‘끝장’”이라고 말했다 한다.
말도, 인생의 끝장, 끝섬
― 군사적으로 말도와 함박도 주변은 어떤 곳인가요.
“전략적으로 말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한반도의 비극인 155마일 전선의 서쪽 끝이라는 점이죠. 당시만 해도 북한군의 경비정이 밤마다 선회하면서 선무공작을 폈고, 심지어 확성기에서 이런 소리를 늘어놓았죠. ‘유사시 말도에 상륙, 점령하는 날엔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부하들을 인솔해 대동 월북하는 소대장에게는 영웅 칭호를 주겠다’고요.”
그는 함박도와 관련해 섬뜩한 이야기를 꺼냈다.
“말도의 촌로(村老)께서 당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해요. ‘어느 해인가 함박도에서 야간근무에 소홀하던 10여 명의 모 특수부대원이 북한군에 의해 목이 잘렸다’는 겁니다.”
자신의 경험담도 덧붙였다.
“40명의 대원을 이끌던 말도 소대장으로 함박도는 언제나 관측보고, 일일보고에 포함돼 있었어요. ‘전방 이상 없었음. (북한) 경비정이 멀리 지나갔음. 인근 함박도도 이상 없음’이라고 보고했어요.
함박도는 그때도, 지금도 우리 땅으로 알고 있어요. 당시의 저나 소대원, 어민들도 그렇고 당연히 우리 영토로 생각했죠.”
김 전 부회장이 해병대 말도 소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7년 봄이었다.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해병대 학사장교로 임관해 약 1년 동안 경기도 김포 하성면 시암리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그 무렵인 1965년 10월 29일 함박도 어민 100여 명이 북으로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엄청났던 피랍사건을 뒷수습하러 간 것이었다.
“이 절해고도에서 긴급상황이나 불의의 사고가 벌어지는 날엔 속수무책이죠. 그 사건으로 당시 (해병대 말도) 소대장이 파면을 당했어요. 후임 소대장은 군기를 잡는답시고 단체 기합을 통해 강경일변도로 통솔하다가 부하들에게 뭇매를 맞고 후송되고 말았죠.
당시 말도 소대원들은 거칠고 말썽을 많이 부렸어요. 소대원들에겐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지루할지 몰라도, 이 사고뭉치들을 품에 안아야 할 소대장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초조한 나날이었죠.
1967년 봄, 그러니까 제가 부임하던 날 (말도) 야산에 아카시아 내음이 진동했죠. 그 추억이 잊히질 않아요.”
― 군인인 줄 알았더니 추억 속 향기를 불러낼 줄 아는 시인이시군요.
“소대장과 소대원 나이 차이는 불과 서너 살에 불과했어요. 거친 대원들을 통솔하는 데 도움이 되라고 소위인데도 부대에서 중위 계급을 ‘마이가리’(미리 당겨서)로 달아줬죠. ‘기죽지 말라’는 배려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부임했으니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해병대 말도 소대와 공군첩보부대 말도 파견대
1965년 10월의 함박도 어민 납북사건 이후 말도에 파견됐던 공군첩보부대는 사실상 철수했다고 한다. 이 공군첩보부대가 바로 실미도 부대, 일명 ‘김일성 목 따는 부대’다. 그러나 북파공작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김무일 전 부회장의 말이다.
“이 섬에 상주하지 않았지만 공군 대위가 한 달에 몇 차례씩 왔어요. 몇몇 장정을 데려와 야간훈련을 시키곤 했는데 하나같이 험상궂은 표정이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해병대 상부의 지시는 신임 소대장을 의아스럽게 만들었다.
“공군첩보부대 대원들과 절대 접촉하지 말라는 겁니다. 또 신원이 누군지도 묻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말도 파견 이영윤(李永潤) 공군 대위를 알게 되었다.
“섬 생활에 외롭다 보니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랄까, 마음을 열어 특수전 전문의 이 대위를 알게 됐어요. 실제로 북파공작을 하면 우리 해병대와 협조를 해야 하기에 어차피 상부상조해야 하는 처지였어요.”
칠흑 같은 그믐밤을 택해, 은밀히 소형 고속정에 실어 북파대원들을 보내고, 그들이 북한 땅에 도착하는 예상시각까지 김무일 소대장과 이영윤 대위는 말도 관측소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평소에 간헐적으로 5명 미만의 (북파)대원들이 훈련을 하다가 되돌아가요. 그러다 어느 날에는 ‘오늘 밤, 들어간다’는 거예요. 해병대가 평소보다 경계를 더 강화했지요.
저 멀리 북한 땅인 황해도 연백 쪽에서 개가 짖고 조명탄이 터지던 그때의 광경이 떠오릅니다. 이어지는 따따따… 총소리…. 한번은 피투성이 대원이 귀환해 고속정을 타고 급히 말도를 떠난 적도 있었죠.”
이 대위와 여대생 위문단의 비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위험천만한 상황도 있었으나, 평소 해병대 말도 소대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섬마을과 섬 주변을 순찰하고 철책선 잠복근무의 지루한 반복이었다. 하루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질 때면 야간 경계근무가 시작됐다.
“소대원들은 새벽녘의 철책선 잠복근무가 끝날 무렵이면 당시 유행하던 노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나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을 고래고래 목청껏 부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죠. 개중에 재주꾼도 있어서 입대 전에 악극단을 쫓아다녔다는 ‘제주도 사나이’ 박오봉 일병의 구성진 노래가 지금도 귓가를 맴돌아요.
박 일병의 애창곡은 안다성의 ‘사랑이 메아리칠 때’였는데, 이 노래가 이 외딴섬의 새벽하늘에 울려 퍼질 때면, 소대원들의 표정이 숙연해지곤 했죠. 아마도 육지에 두고 온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실미도 책임자’인 이영윤 대위가 한 무리의 민간인 위문단을 인솔해 말도를 찾았다고 한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소대원 모두가 몰려나와 양팔을 흔들며 아우성을 쳤다. 몇 개월간 민간인이라곤 섬마을 어르신 몇 명이나 어쩌다 들른 행정지도선 선원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영윤 대위가 여대생으로 구성된 위문단을 이끌고 왔죠. 더군다나 싱싱한 과일과 과자, 심심풀이 잡지와 부식거리를 바리바리 싣고 왔어요. 마음을 써준 이 대위가 고마웠지만 찝찝해서 한마디 덧붙였죠. ‘아시다시피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외부인이 올 수 없다’고요. 이 대위는 ‘윗선에 다 보고를 했으니 걱정 마라. 오후 썰물에 맞춰 일몰 전에 철수하겠다’고 했죠.”
― 얼마나 자주 왔나요.
“처음에는 10명쯤? 한 달 뒤에는 열댓 명을 데리고 왔어요. 그렇게 제가 말도에 있던 6개월 동안 다섯 번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중에는 목사도 데리고 왔죠.”
― 소대원들의 반응은.
“철딱서니 없는 소대원들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죠. 이들이 떠나고 소대원들의 표정이 몰라보게 밝아졌어요. 틈틈이 위문편지와 잡지들을 번갈아 읽으며 정서적으로 안정이 됐다고 할까요?
스물을 갓 넘긴 혈기왕성한 이들이 마치 감옥 같은 절해고도에 갇혀 종일 수평선만 밤낮으로 바라보는 심정이 십분 이해는 갔어요. 소대장인 저는 일부러 무덤덤한 척했지만, 실제 속내는 소대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어요.”
다만, 소대장 입장에서 외부반입 먹거리는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모두 되돌려보내곤 했다.
“美帝 앞잡이 노릇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대위가 찾아왔다. 기자는 김무일 전 부회장의 전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대화체로 재구(再構)해보았다.
“김(무일) 중위!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소.”
“왜요?”
“전속을 가게 돼 작별인사도 할 겸 어렵사리 왔지요.”
“섭섭합니다. 임기 동안 열심히 복무하고 사회에서 다시 만나 대포나 한잔합시다.”
“마지막으로 이 보트(공군첩보부대 소형 쾌속정)를 타고 섬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인데 함께 기념사진이나 몇 장 찍읍시다.”
소형 쾌속정엔 권총을 찬 이 대위를 비롯해 두세 명의 무장(武裝) 운전병이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김무일 소대장이 보트에 타려는 순간, 해병대 오달수 하사가 김 중위를 막았다.
“소대장님! 안 됩니다.”
“오 하사! 왜 그래? 왜 끼어드는 거야.”
“끼어드는 게 아니고 제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인가받지 않은 선박을 타고 무장한 채로 비무장지대(公海)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이 대위와 김 중위, 오 하사 간 옥신각신 말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보트에 타지 못했다.
“그러고 배는 떠났어요. 한동안 이 대위에게 미안한 마음, 오 하사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었죠. 그러다 6개월 후, 섬 생활을 마감할 때가 되었어요. 육지로 귀대하라는 복귀 명령을 받았습니다.”
소대원들과 마지막 환송 저녁을 먹던 그날 저녁, 북한의 선무공작용 고성능 스피커에서 이런 방송이 들렸다고 한다.
“‘친애하는 소대장 동무! 그동안 미제(美帝) 앞잡이 노릇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수다. 편히 가시라요!’라는 말을 듣고, 저들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보듯 낱낱이 꿰뚫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뒷덜미에 소름이 치올랐어요. 접경지역 곳곳에 고정간첩들이 잠복해 우리의 행동을 호시탐탐 감시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죠.”
“서해 절해고도의 소대장급 장교를 포섭하라”
김무일 중위는 경기도 김포 군하리에 위치한 해병대 연대본부로 귀환한 뒤 파월 청룡부대 장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1년 365일에 딱 보름이 부족한 350일 동안 수색소대장으로 피비린내 나는 정글을 누볐다.
또 의장대장으로 6개월을 보낸 뒤 1969년 1월 경남 진해에 위치한 교육기지사령부 의장대장으로 복귀 명령을 받았다.
“귀국해 어느 날 TV 앞에 앉았는데 당시 인기 있었던 〈목격자〉라는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어요.”
〈목격자〉는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던 사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엮은 논픽션 프로그램이었다.
“인기 탤런트인 오지명씨가 나와 내레이션을 맡았는데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 사건’을 다루고 있더군요. 이 사건에 연루된 육군 장교인 신영복을 비롯해 공군 장교들이 포함돼 물의를 일으킨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직감적으로 온 신경이 화면에 쏠렸죠. 때마침 《청맥》지 발행인 김질락의 죄목이 흘러나왔고 검찰 측 논고를 오지명씨가 대독했는데, 당시 기억을 더듬어 요약하면 이랬어요.
〈간첩단 수뇌부가 다음과 같이 북한노동당의 지령을 받았다.
‘서해에 북조선 땅과 가장 지근거리에 대치 중인 절해고도의 소대장급 장교를 포섭하라. 그리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납치하여 대동 월북시켜라. 적절한 대상자를 물색한 후에 의심을 사지 않게끔, 협력자 중에 현역 장교들을 활용해 치밀하게 접근하라.’
접근방법은 위문단과 위문품 등을 앞세워 많은 공(功)을 들여 납치대상자 회유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납북을 시도하려는 마지막 순간에 당사자의 완강한 거부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 방송을 보고 머릿속이 하얘졌죠. 《청맥》지 사건으로 이 대위가 구속이 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드러난 이영윤의 행적
1964년 창간한 《청맥》은 1967년 6월호를 끝으로 폐간되기까지 총 27권을 발행했다. 비슷한 시기 발행된 《사상계》 《창작과비평》 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짧게 존재했던 잡지다. 그러나 기성의 관점보다는 젊고 비판적인 조동일, 백낙청, 김우창, 구중서 등 젊은 비평가들에게 지면을 대폭 할애했다.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 자본가 등 지배계층의 보수주의가 형성된 과정을 분석하면서 그 기본 성격이 외세(外勢)에 기대어 형성되었다는 비판적인 글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고 한다.
기자는 《경향신문》 1969년 1월8일자 기사를 찾아보았다.
〈… 통혁당 사건에 관련된 현역군인 4명에 대한 육본 보통군법회의(재판장 윤의준 대령, 법무사 김영균 중령) 2회 공판이 8일 상오 10시 육본 보통군법회의 2호 법정에서 열려 공군 중위 이영윤(27) 피고에 대한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이날 이 피고인은 “구속 중인 신영복으로부터 《청춘의 노래》라는 북한의 불온서적을 받아 읽은 적은 있으나 겉장이 전부 떨어져 제목조차 몰랐었다”고 진술하고 “서해 말도에 이대생들과 위문 간 사실은 있으나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한 일은 없다”고 진술했다.
이에 앞서 7일 하오 첫 공판에서 피고인 신영복은 “구속 중인 김질락(전 《청맥》지 주간)으로부터 돈 10만원을 받았고 불온서적들을 받아 친구들에게 읽힌 일이 있다”고 공소사실을 시인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이영윤의 혐의는 이랬다.
〈… ▲李永潤(이영윤·28)
京畿高卒(경기고졸)·서울師大卒(사대졸)·空軍政訓將校(공군정훈장교) ①申榮福(신영복)에게 包攝(포섭) ②梨大(이대) 서클 靑麥會員(청맥회원) 8名을 서해 말도에 인솔 사회주의 교양 교실 ③주한일본대사관 폭파음모 ④게릴라 전술연구(북괴 대남공작 당소조책)…〉
만약 오 하사가 붙잡지 않았다면
― 《청맥》지 사건 이후 이영윤을 직접 만난 적이 있나요.
“그러곤 못 만났지요. 나중에 경찰을 통해 알아보니 구속수감 후 전향을 했으며 작년 미국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때 위문을 하러 왔던 여대생들이 이화여대 서클 ‘청맥회원’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어요.
오 하사가 아니었다면 저는 어쩌면 납치됐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겠지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제가 북으로 잡혀갈 뻔했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말해도 거짓말로 알 거예요.”
― 오 하사가 아니었다면….
“1980년대 중반에 오 하사를 수소문해서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그의 고향인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 갔는데 안타깝게도 2년 전에 사망했다는 겁니다. 당시 40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 오 하사는 왜 그런 판단을 내렸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저도 궁금해요. 짐작건대 오 하사가 이 대위의 소지품 중에서 불온서적을 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여 (제게) 친절을 베푸는 그를 경계심으로 바라봤을 것으로 생각해요. 오 하사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도 이 대위의 보트를 탔을 겁니다.”
기자는 김 전 부회장의 이야기를 곰곰이 새겨보았다. 이영윤 대위는 정말 김무일 소대장을 납치하려 했을까. 만약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이중간첩이었음이 틀림없다. 북파공작 관련 특수전 책임자인 그가 북파공작원의 행적을 고스란히 북한 측에 알렸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끝으로 김 전 부회장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절해고도 말도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 중생들의 주어진 운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끝 간 데 없이 광활한 우주 속에 보이지도 않는 한 티끌만도 못한 존재임을 실감해요. 제각기 다른 운명이 어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의해 정해진 길을 묵묵히 따라갈 뿐이고…. 삶과 죽음도, 부귀와 영화도, 그리고 만남과 헤어짐도 모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잠시도 그침 없이 주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요?”⊙
해병대 말도 소대장과 파월(派越) 청룡부대 수색소대장으로 7년7개월간 복무한 뒤 예편해 현대정공 관리본부장, 기아차 부사장, 현대차 구매총괄 본부장(부사장), 현대제철 대표이사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대그룹에 유독 해병대 예비역 특채가 많은 것도 그가 이뤄낸 발자취 때문이라고 한다.
김 전 부회장은 늘 ‘해병대 정신’을 강조하며 조직에 ‘불가능은 없다’ ‘책임완수’ 등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시인의 감성으로 사람과 조직을 대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는 등단 시인이자 수필가다.
그는 지난 10월 21일과 22일 양일간 해병대 장교 가족들과 함께 ‘그리운’ 말도를 찾았다.
스무 살 난 ‘귀신 잡는’ 병사들과 만난 그는 52년 전, 그러니까 1967년 3월부터 6개월간 복무했던 말도 소대장 시절을 추억했다. 그리고 말도에서 8km 떨어진 ‘우리 땅’ 함박도와 조우했다. 하지만 함박도는 안타깝게도 ‘남의 땅’이 되어버렸다.
기자는 지난 11월 1일 서울 압구정동에서 그를 만나 말도 소대장 시절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절해고도 외딴섬 말도
“서해 강화도 끝점에 가물가물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섬, 말도가 있어요. 그 옛날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그 섬의 관청보고가 늘상 늦는 바람에 상급관서로부터 얼마나 꾸중을 들었던지, 한자의 끝말(末)에다 꾸짖을 질(叱)을 붙여 말도(唜島)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말도에 가려면 며칠이나 걸리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외딴섬이었죠. 생필품 등을 주문하면 ‘말도 마라. 아차(아차도)에서 주문하면 볼음도에서 보름은 족히 걸릴 것이여~’라는 자조 섞인 말을 들어야 했죠.”
김무일 전 부회장에 따르면 말도와 함박도 인근 수역은 질 좋은 참조기와 숭어, 농어, 병어의 황금어장이었다고 한다. 한창 번창할 땐 90가구에 200여 명의 주민이 말도에 살았다. 어민들은 황해도 연백군과 인천의 중간 지점인 이 섬에서 수산물을 중개했다. 그의 말이다.
“말도엔 인근 다른 섬(볼음도, 아차도, 주문도 등)에서 볼 수 없는 암석과 벼랑이 있었어요. 할매바위, 죽(竹)바위, 쌍바위, 그리고 갈래바위와 금강꼬치(바위) 등 기암절벽이 수려한 풍광을 자아내는 특이한 곳이었어요.”
말도의 면적은 1.449km2로 여의도의 약 6분의 1 크기다. 엔간한 지도에는 흔적조차 없는 외딴섬. 정기여객선은 없고 육지에 나가려면 쪽배나 다름없는 ‘뗏마선’을 타고 인접 볼음도에나 가야 여객선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인근 볼음도와 아차도의 주민들은 “아차도에서 ‘아침’ 먹고 볼음도에서 ‘보름’쯤 머물다가 이 세상 끝섬(말도)에 가면 인생의 ‘끝장’”이라고 말했다 한다.
말도, 인생의 끝장, 끝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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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일 前 현대제철 대표이사 부회장. |
“전략적으로 말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한반도의 비극인 155마일 전선의 서쪽 끝이라는 점이죠. 당시만 해도 북한군의 경비정이 밤마다 선회하면서 선무공작을 폈고, 심지어 확성기에서 이런 소리를 늘어놓았죠. ‘유사시 말도에 상륙, 점령하는 날엔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부하들을 인솔해 대동 월북하는 소대장에게는 영웅 칭호를 주겠다’고요.”
그는 함박도와 관련해 섬뜩한 이야기를 꺼냈다.
“말도의 촌로(村老)께서 당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해요. ‘어느 해인가 함박도에서 야간근무에 소홀하던 10여 명의 모 특수부대원이 북한군에 의해 목이 잘렸다’는 겁니다.”
자신의 경험담도 덧붙였다.
“40명의 대원을 이끌던 말도 소대장으로 함박도는 언제나 관측보고, 일일보고에 포함돼 있었어요. ‘전방 이상 없었음. (북한) 경비정이 멀리 지나갔음. 인근 함박도도 이상 없음’이라고 보고했어요.
함박도는 그때도, 지금도 우리 땅으로 알고 있어요. 당시의 저나 소대원, 어민들도 그렇고 당연히 우리 영토로 생각했죠.”
김 전 부회장이 해병대 말도 소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7년 봄이었다.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해병대 학사장교로 임관해 약 1년 동안 경기도 김포 하성면 시암리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그 무렵인 1965년 10월 29일 함박도 어민 100여 명이 북으로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엄청났던 피랍사건을 뒷수습하러 간 것이었다.
“이 절해고도에서 긴급상황이나 불의의 사고가 벌어지는 날엔 속수무책이죠. 그 사건으로 당시 (해병대 말도) 소대장이 파면을 당했어요. 후임 소대장은 군기를 잡는답시고 단체 기합을 통해 강경일변도로 통솔하다가 부하들에게 뭇매를 맞고 후송되고 말았죠.
당시 말도 소대원들은 거칠고 말썽을 많이 부렸어요. 소대원들에겐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지루할지 몰라도, 이 사고뭉치들을 품에 안아야 할 소대장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초조한 나날이었죠.
1967년 봄, 그러니까 제가 부임하던 날 (말도) 야산에 아카시아 내음이 진동했죠. 그 추억이 잊히질 않아요.”
― 군인인 줄 알았더니 추억 속 향기를 불러낼 줄 아는 시인이시군요.
“소대장과 소대원 나이 차이는 불과 서너 살에 불과했어요. 거친 대원들을 통솔하는 데 도움이 되라고 소위인데도 부대에서 중위 계급을 ‘마이가리’(미리 당겨서)로 달아줬죠. ‘기죽지 말라’는 배려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부임했으니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해병대 말도 소대와 공군첩보부대 말도 파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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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絶海孤島 말도에서 바라본 함박도. 지난 10월 22일 김무일 전 부회장이 찍었다. |
“이 섬에 상주하지 않았지만 공군 대위가 한 달에 몇 차례씩 왔어요. 몇몇 장정을 데려와 야간훈련을 시키곤 했는데 하나같이 험상궂은 표정이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해병대 상부의 지시는 신임 소대장을 의아스럽게 만들었다.
“공군첩보부대 대원들과 절대 접촉하지 말라는 겁니다. 또 신원이 누군지도 묻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말도 파견 이영윤(李永潤) 공군 대위를 알게 되었다.
“섬 생활에 외롭다 보니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랄까, 마음을 열어 특수전 전문의 이 대위를 알게 됐어요. 실제로 북파공작을 하면 우리 해병대와 협조를 해야 하기에 어차피 상부상조해야 하는 처지였어요.”
칠흑 같은 그믐밤을 택해, 은밀히 소형 고속정에 실어 북파대원들을 보내고, 그들이 북한 땅에 도착하는 예상시각까지 김무일 소대장과 이영윤 대위는 말도 관측소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평소에 간헐적으로 5명 미만의 (북파)대원들이 훈련을 하다가 되돌아가요. 그러다 어느 날에는 ‘오늘 밤, 들어간다’는 거예요. 해병대가 평소보다 경계를 더 강화했지요.
저 멀리 북한 땅인 황해도 연백 쪽에서 개가 짖고 조명탄이 터지던 그때의 광경이 떠오릅니다. 이어지는 따따따… 총소리…. 한번은 피투성이 대원이 귀환해 고속정을 타고 급히 말도를 떠난 적도 있었죠.”
가슴을 쓸어내리는 위험천만한 상황도 있었으나, 평소 해병대 말도 소대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섬마을과 섬 주변을 순찰하고 철책선 잠복근무의 지루한 반복이었다. 하루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질 때면 야간 경계근무가 시작됐다.
“소대원들은 새벽녘의 철책선 잠복근무가 끝날 무렵이면 당시 유행하던 노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나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을 고래고래 목청껏 부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죠. 개중에 재주꾼도 있어서 입대 전에 악극단을 쫓아다녔다는 ‘제주도 사나이’ 박오봉 일병의 구성진 노래가 지금도 귓가를 맴돌아요.
박 일병의 애창곡은 안다성의 ‘사랑이 메아리칠 때’였는데, 이 노래가 이 외딴섬의 새벽하늘에 울려 퍼질 때면, 소대원들의 표정이 숙연해지곤 했죠. 아마도 육지에 두고 온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실미도 책임자’인 이영윤 대위가 한 무리의 민간인 위문단을 인솔해 말도를 찾았다고 한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소대원 모두가 몰려나와 양팔을 흔들며 아우성을 쳤다. 몇 개월간 민간인이라곤 섬마을 어르신 몇 명이나 어쩌다 들른 행정지도선 선원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영윤 대위가 여대생으로 구성된 위문단을 이끌고 왔죠. 더군다나 싱싱한 과일과 과자, 심심풀이 잡지와 부식거리를 바리바리 싣고 왔어요. 마음을 써준 이 대위가 고마웠지만 찝찝해서 한마디 덧붙였죠. ‘아시다시피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외부인이 올 수 없다’고요. 이 대위는 ‘윗선에 다 보고를 했으니 걱정 마라. 오후 썰물에 맞춰 일몰 전에 철수하겠다’고 했죠.”
― 얼마나 자주 왔나요.
“처음에는 10명쯤? 한 달 뒤에는 열댓 명을 데리고 왔어요. 그렇게 제가 말도에 있던 6개월 동안 다섯 번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중에는 목사도 데리고 왔죠.”
― 소대원들의 반응은.
“철딱서니 없는 소대원들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죠. 이들이 떠나고 소대원들의 표정이 몰라보게 밝아졌어요. 틈틈이 위문편지와 잡지들을 번갈아 읽으며 정서적으로 안정이 됐다고 할까요?
스물을 갓 넘긴 혈기왕성한 이들이 마치 감옥 같은 절해고도에 갇혀 종일 수평선만 밤낮으로 바라보는 심정이 십분 이해는 갔어요. 소대장인 저는 일부러 무덤덤한 척했지만, 실제 속내는 소대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어요.”
다만, 소대장 입장에서 외부반입 먹거리는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모두 되돌려보내곤 했다.
“美帝 앞잡이 노릇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대위가 찾아왔다. 기자는 김무일 전 부회장의 전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대화체로 재구(再構)해보았다.
“김(무일) 중위!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소.”
“왜요?”
“전속을 가게 돼 작별인사도 할 겸 어렵사리 왔지요.”
“섭섭합니다. 임기 동안 열심히 복무하고 사회에서 다시 만나 대포나 한잔합시다.”
“마지막으로 이 보트(공군첩보부대 소형 쾌속정)를 타고 섬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인데 함께 기념사진이나 몇 장 찍읍시다.”
소형 쾌속정엔 권총을 찬 이 대위를 비롯해 두세 명의 무장(武裝) 운전병이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김무일 소대장이 보트에 타려는 순간, 해병대 오달수 하사가 김 중위를 막았다.
“소대장님! 안 됩니다.”
“오 하사! 왜 그래? 왜 끼어드는 거야.”
“끼어드는 게 아니고 제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인가받지 않은 선박을 타고 무장한 채로 비무장지대(公海)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이 대위와 김 중위, 오 하사 간 옥신각신 말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보트에 타지 못했다.
“그러고 배는 떠났어요. 한동안 이 대위에게 미안한 마음, 오 하사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었죠. 그러다 6개월 후, 섬 생활을 마감할 때가 되었어요. 육지로 귀대하라는 복귀 명령을 받았습니다.”
소대원들과 마지막 환송 저녁을 먹던 그날 저녁, 북한의 선무공작용 고성능 스피커에서 이런 방송이 들렸다고 한다.
“‘친애하는 소대장 동무! 그동안 미제(美帝) 앞잡이 노릇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수다. 편히 가시라요!’라는 말을 듣고, 저들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보듯 낱낱이 꿰뚫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뒷덜미에 소름이 치올랐어요. 접경지역 곳곳에 고정간첩들이 잠복해 우리의 행동을 호시탐탐 감시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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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일 전 부회장은 월남전에 참전했다. 전투소대장 시절 모습이다. |
또 의장대장으로 6개월을 보낸 뒤 1969년 1월 경남 진해에 위치한 교육기지사령부 의장대장으로 복귀 명령을 받았다.
“귀국해 어느 날 TV 앞에 앉았는데 당시 인기 있었던 〈목격자〉라는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어요.”
〈목격자〉는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던 사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엮은 논픽션 프로그램이었다.
“인기 탤런트인 오지명씨가 나와 내레이션을 맡았는데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 사건’을 다루고 있더군요. 이 사건에 연루된 육군 장교인 신영복을 비롯해 공군 장교들이 포함돼 물의를 일으킨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직감적으로 온 신경이 화면에 쏠렸죠. 때마침 《청맥》지 발행인 김질락의 죄목이 흘러나왔고 검찰 측 논고를 오지명씨가 대독했는데, 당시 기억을 더듬어 요약하면 이랬어요.
〈간첩단 수뇌부가 다음과 같이 북한노동당의 지령을 받았다.
‘서해에 북조선 땅과 가장 지근거리에 대치 중인 절해고도의 소대장급 장교를 포섭하라. 그리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납치하여 대동 월북시켜라. 적절한 대상자를 물색한 후에 의심을 사지 않게끔, 협력자 중에 현역 장교들을 활용해 치밀하게 접근하라.’
접근방법은 위문단과 위문품 등을 앞세워 많은 공(功)을 들여 납치대상자 회유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납북을 시도하려는 마지막 순간에 당사자의 완강한 거부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 방송을 보고 머릿속이 하얘졌죠. 《청맥》지 사건으로 이 대위가 구속이 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드러난 이영윤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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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1월 16일 열린 통혁당 사건에 연루된 軍 관련 피고인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영윤, 왼쪽 끝이 신영복이다. |
기자는 《경향신문》 1969년 1월8일자 기사를 찾아보았다.
〈… 통혁당 사건에 관련된 현역군인 4명에 대한 육본 보통군법회의(재판장 윤의준 대령, 법무사 김영균 중령) 2회 공판이 8일 상오 10시 육본 보통군법회의 2호 법정에서 열려 공군 중위 이영윤(27) 피고에 대한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이날 이 피고인은 “구속 중인 신영복으로부터 《청춘의 노래》라는 북한의 불온서적을 받아 읽은 적은 있으나 겉장이 전부 떨어져 제목조차 몰랐었다”고 진술하고 “서해 말도에 이대생들과 위문 간 사실은 있으나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한 일은 없다”고 진술했다.
이에 앞서 7일 하오 첫 공판에서 피고인 신영복은 “구속 중인 김질락(전 《청맥》지 주간)으로부터 돈 10만원을 받았고 불온서적들을 받아 친구들에게 읽힌 일이 있다”고 공소사실을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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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8년 8월24일자 1면에 실린 이영윤의 사진과 통혁당 사건 피의 내용이다. |
〈… ▲李永潤(이영윤·28)
京畿高卒(경기고졸)·서울師大卒(사대졸)·空軍政訓將校(공군정훈장교) ①申榮福(신영복)에게 包攝(포섭) ②梨大(이대) 서클 靑麥會員(청맥회원) 8名을 서해 말도에 인솔 사회주의 교양 교실 ③주한일본대사관 폭파음모 ④게릴라 전술연구(북괴 대남공작 당소조책)…〉
만약 오 하사가 붙잡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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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일 전 부회장이 지난 10월 21일과 22일 양일간 젊은 시절 소대장으로 복무한 절해고도 ‘말도’를 해병대 예비역 장교 가족들과 다녀왔다. |
“그러곤 못 만났지요. 나중에 경찰을 통해 알아보니 구속수감 후 전향을 했으며 작년 미국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때 위문을 하러 왔던 여대생들이 이화여대 서클 ‘청맥회원’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어요.
오 하사가 아니었다면 저는 어쩌면 납치됐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겠지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제가 북으로 잡혀갈 뻔했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말해도 거짓말로 알 거예요.”
― 오 하사가 아니었다면….
“1980년대 중반에 오 하사를 수소문해서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그의 고향인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 갔는데 안타깝게도 2년 전에 사망했다는 겁니다. 당시 40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 오 하사는 왜 그런 판단을 내렸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저도 궁금해요. 짐작건대 오 하사가 이 대위의 소지품 중에서 불온서적을 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여 (제게) 친절을 베푸는 그를 경계심으로 바라봤을 것으로 생각해요. 오 하사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도 이 대위의 보트를 탔을 겁니다.”
기자는 김 전 부회장의 이야기를 곰곰이 새겨보았다. 이영윤 대위는 정말 김무일 소대장을 납치하려 했을까. 만약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이중간첩이었음이 틀림없다. 북파공작 관련 특수전 책임자인 그가 북파공작원의 행적을 고스란히 북한 측에 알렸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끝으로 김 전 부회장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절해고도 말도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 중생들의 주어진 운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끝 간 데 없이 광활한 우주 속에 보이지도 않는 한 티끌만도 못한 존재임을 실감해요. 제각기 다른 운명이 어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의해 정해진 길을 묵묵히 따라갈 뿐이고…. 삶과 죽음도, 부귀와 영화도, 그리고 만남과 헤어짐도 모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잠시도 그침 없이 주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