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리더십 연구

새에덴교회 蘇康錫 목사

信徒 4명에서 3만5천명의 대형교회로 키운 비결

  •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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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화려한 스펙이 없습니다. 꿈을 꿀 수 없는 상황에서도 꿈을 꾸게 하는 스토리가 제게는 있었고 그 스토리가 화려한 스펙을 능가하는 힘이었습니다“

⊙ 1988년 가락동 지하 23평짜리 교회에서 신도 4명으로 시작
⊙ 학력, 신앙이력 등 외피는 모두 非主流였지만 마음속은 언제나 주류
⊙ “나 자신은 세금 내고 있지만 성직자 세금 징수 확정 전 제도적 보완 필요”
⊙ 내가 피와 땀을 흘려 만든 교회이기 때문에 자식에게 물려주는 교회세습은 반대

蘇康錫
⊙ 51세. 광신대·개혁신학연구원 대학원 졸업. 미국 닉스신학교 목회학 박사.
⊙ 한국문인협회 소속 시인, 칼빈대 석좌교수.
⊙ 저서: 《신정주의 교회를 회복하라》 《거룩한 전쟁》 《영혼의 글쓰기》 등 다수.
⊙ 상훈: 2007 한국기독교출판문화대상, 2007 마틴루터킹 국제평화상, 2011 국민훈장 동백장,
    2012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수상.
그는 말한다. 자신은 세상에 내세울 만한 화려한 스펙도 없고 작은 키에 내세울 만한 외모도 없는 결점투성이 비주류(非主流)형 인간이라고. 그랬다. 그는 별볼일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소위 말하는 ‘깡촌’에서 자랐다. 신학교는 지방에서 나왔다.
 
  1980년대 중반 생활터전으로서 처음 만난 서울은 그에게 아주 낯선 곳이었다. 생면부지라는 말이 딱 알맞은 곳이었다. 아내와 장모와 처남. 서울에서 생면부지를 면한 사람은 그렇게 뿐이었다. 그리고 더 있다면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만난 은사들과 동료들이 있지만 그들도 교회 개척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서울 가락동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던 해인 1988년에 그가 처해 있던 환경은 그랬다.
 
  개척교회를 열었을 때 첫 주일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교회가 세 들어 있는 건물의 주인과 교회 간판을 달았던 간판집 아저씨, 그리고 할머니 한 분. 그 할머니가 아기를 업고 왔기 때문에 첫 예배 참석자는 총 4명이었던 셈이다. 건물주와 간판집 사장 두 사람은 의례적인 인사차 참석이었고 할머니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당연히 할머니 등에 업혀온 아기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참석자였다. 실제 예배 참석자는 0명. 그 교회는 1800만원 보증금에 월세가 48만원인 23평짜리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게 교회를 시작했고 25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오래전에 지상(地上)으로 나온 그 교회는 대지 2000평에 지하 3층 지상 10층짜리 건물이 됐다. 연면적 1만평, 5000명 수용 규모의 예배실을 갖추고 교인 수 3만5000명을 자랑하는 초대형 교회가 됐다. 단순 수치상으로 3만5000배 성장한 셈이다.
 
  그 교회의 이름은 경기도 죽전에 있는 새에덴교회다. 자칭 ‘비주류형 인간’은 이 교회를 이끌어왔고, 지금도 이끌고 있는 소강석(蘇康錫) 담임목사다.
 
  소 목사는 1997년에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예수를 만나서 가락동과 분당에서 목회를 하며 새로운 개척교회 성공사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자전적 에세이 《맨발의 소명자》를 낸 일이 있다. 한 출판사가 성공적인 목회를 이끌고 있는 젊은 목회자들을 <젊은 개척자>라는 시리즈로 소개하는 단행본이었는데, 이 《맨발의 소명자》에 붙여진 부제(副題)는 <맨주먹 맨몸으로 몸부림친 무일푼 개척 보고서>다.
 
  이 책은 2010년 12월 31일에 개정증보판으로 21쇄를 발간하는 등 현재까지 끊임없이 개정증보판을 내는 이른바 ‘스테디셀러’다. 소 목사의 성공적 목회기를 찾는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마 정체 내지는 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개신교계에 ‘성공적 복음’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라고 봐도 무방할 성싶다. 소 목사의 목회로부터 한국교회가 더 이상의 정체에서 벗어나 또 한 번 ‘부흥의 꿈’을 얻고자 하는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狂人 목회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찾은 필리핀 6·25 참전용사들. 새에덴교회는 2007년부터 미국, 호주, 필리핀 등의 6·25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소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 《맨발의 소명자》와 그 책에 붙은 부제를 보면 세 개의 단어가 눈에 띈다. 맨발, 맨주먹, 맨몸. 첫 예배 참석 교인 수 ‘0’이 상징하듯 그의 목회는 맨발, 맨주먹, 맨몸으로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맨발, 맨주먹, 맨몸이라는 말이 ‘아무것도 없음’이 주는 절망이 아니라 그 맨발, 맨주먹, 맨몸이라는 절망의 언어 위에 꿈과 희망을 얹어놓고, 그 꿈과 희망을 이루는 실천방법으로 열정을 택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3M 목회’라고 불렀다.
 
  ‘3M 목회’를 통해 숫자 0을 3만5000이라는 숫자로 바꾸기까지에는 당연히 지난한 여정이 뒤따랐을 터이다. 그 지난함이 주는 피로 때문에 한번쯤은 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만 그는 오늘도 기도하고 외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그렇게 예수를 대신하여 광야에서 외친다. 그에게는 마천루 같은 빌딩들이 솟아 있는 도시일지라도 세상은 광야일 뿐이다. 길 잃은 양들이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광야다. 그런 그이기에 그는 멈추지 않는다. 3만5000이 10만이 되고 100만이 되어도 그의 외침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언제나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광야를 헤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무조건 강대상 앞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만은 아니다. 그가 행한 초기의 목회가 열정적 목회라면 그 이후에는 전략적 목회로 그리고 지금은 스토리 목회로 시대나 환경적 상황에 맞게 목회 방법을 달리해 왔다. 개척교회 시절 광인(狂人)에 가까운 열정적 목회를 했다면 그 이후 성장기에는 교회가 처해 있는 지역이나 시대 환경에 걸맞은 전략을 구사하는 전략적 목회를, 안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비약을 꿈꾸는 지금은 눈물과 감동의 스토리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스토리 목회를 추구하고 있다.
 
  작은 키와 키에 비해 좀 무거워 보이는 몸집 때문이었을까. 경기도 용인시 죽전에 있는 새에덴교회에서 만난 소 목사의 첫인상은 신도 3만5000명을 이끄는 대형교회 담임목사라면 갖고 있을 법한 카리스마를 찾아볼 수 없는 순박함 그 자체였다. 그날은 천둥, 번개가 치고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씨 때문에 서울 광화문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새에덴교회를 찾아갔던 기자 일행은 약속시각보다 30분이나 늦은 상황이었다. 분 단위로 짜여 있다는 그의 일정을 사전에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인터뷰를 시작하려 했지만 소 목사는 차부터 권했다.
 
 
  나무를 교인이라 생각하며 설교 연습
 
  그는 다른 일정을 뺄 수는 없어서 오랜만에 귀국해서 그날 만나기로 했던 친척과의 약속을 뒤로 미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자가 가져간 질문지를 달라고 하더니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내가 질문지를 보면서 순서대로 답해도 될까요”하며 껄껄 웃었다. 그와 차를 마시고 웃음을 나누는 동안 그가 가진 장점을 볼 수 있었다. 편안함이었다.
 
  —개척교회에서 시작해 교인 수 3만5000명이 넘는 대형교회를 만들었는데 CEO로서의 자질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 아닌가요.
 
  “제가 지금의 새에덴교회를 만드는 데는 신앙의 힘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긍정적인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일 듯 타오르는 꿈이 있어야겠죠. 그런 걸 제게 준 게 신앙입니다. 신앙이 꿈을 만들고 그 꿈은 목표의식을 갖게 하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까 거기에 필요한 CEO의 자질도 연마가 된 것 같아요. 목회자든 CEO든 누구에게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장애물은 있는 겁니다. 겪어야 할 난관,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게 긍정적인 마음이고 그 마음은 신앙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비주류를 자처하는데요.
 
  “학벌이나 집안이나 제 외모를 놓고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제 마음속에서 저는 언제나 주류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마이너리그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봐야죠. 마이너고 아웃사이더였죠. 출신 성분이 귀족의 아들도 아니고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좋은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유학파도 아니고 영락교회나 명성교회, 사랑의교회 같은 유명한 교회에서 부목사 등을 하며 목회 수련을 받은 사람도 아닌 비주류였습니다. 지금도 근교 목사님들끼리 만나면, 그분들은 유학파에 명문대 나오신 분들이 많죠. 골프도 잘 치시죠. 저는 아직 골프를 못 치니까 그런 데도 못 껴요. 그러나 저는 항상 현실은 비주류였지만 제 마음의 의식은 항상 주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인(詩人)이기도 한 소강석 목사는 틈나는 대로 시와 에세이를 쓴다. 2011년에는 《꽃을 피우는 건 꿈꾸는 나비》라는 에세이집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꿈은 혹독한 땀과 눈물과 피가 얼룩진 반복된 연습의 결정체”라고 말한다. 꿈을 꾸는 데 땀과 눈물과 게다가 피까지 흘려야 한다니? 참으로 의아한 주장이다. 그가 꾸는 꿈은 몽상가적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해 내야 할 실체, 즉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목회자로서 품었던 꿈에 대해 물었다.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원래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대형교회를 꿈꾸었습니까.
 
  “저는 광주신학교(현 광신대)를 다닐 때 단 하루도 꿈 없이 잠들거나 꿈 없이 깨어난 적이 없습니다. 저녁이 되면 남들이 오징어나 쥐포를 뜯고 있을 때 빈 예배실에서 고장 난 마이크를 들고 설교와 찬양 연습을 했죠. 주말에는 예배실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무등산 기도원에 가서 나무들을 수많은 교인이라고 생각하고 막대기를 마이크 삼아 설교하고 찬양했습니다. 찬양을 하면서 ‘내가 수만 명 수십만 명 앞에서 설교할 때가 온다. 그럴 때가 반드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 꿈의 실현을 위해서 남들이 쉴 때 쉬지 않고 연습을 했던 것이고 지금 수만 명의 성도 앞에서 설교하고 있는 겁니다. 그때 준비하지 않았다면 지금이 있을 수 있을까요?”
 
 
  거룩한 불만족
 
  소 목사는 혼자서만 꿈꾸지 않았다. 신도들도 함께 꿈을 꾸게 했다. 그는 가락동 개척교회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 힐링이 유행하는데 개척교회에 오는 신도들은 대부분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우리 교회를 찾는 분들은 지방에서 망해 노점상을 하거나 대형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처럼 무조건 사랑했습니다. 다툼이 있으면 화해의 중재자가 됐고요. 그리고 그들에게 꿈을 주었습니다.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 3명이 뜻을 함께하고 함께 꿈을 꾸게 되면서 나라까지 만드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 지금 가난하지만 우리는 부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아웃사이더이고 변방에 있지만 앞으로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다. 나는 사람이 없을 때 이렇게 빈 의자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한다. 주일 전날 빈 의자마다 손을 얹고 이 자리에 성도들을 앉혀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로 여러분이 왔다. 앞으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봐라. 우리의 시대가 온다, 여러분의 시대가 온다’고 말해 주었죠.”
 
  —개척교회 때 출석했던 교인들이 지금도 나오나요?
 
  “그럼요. 그때 함께 교회를 일구었던 개척 멤버들이 지금 우리 교회의 대부분 중직자가 됐고 우리 교회의 메이저리거가 되어 제 주변에 있습니다. 물론 꿈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죠. 거기에 올인해야 합니다. 미쳐야 된다는 거죠. 마니아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저는 ‘예수 마니아’, ‘교회 마니아’입니다. 미치니까 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것을 ‘거룩한 광인이 된다’고 표현하죠. 한마디로 말해서 미치게 되면 열정이 나와요. 그 꿈이 열정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항상 무슨 일을 하든지 열정의 사람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보통 교인 200명 정도만 되면 교회를 운영해 나갈 만하다고 하던데.
 
  “좀 전에 열정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열정이 있으니까 남에게 배우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어지더군요. ‘성공하는 교회는 왜 성공하는가, 왜 부흥하지 않는가’ 그런 걸 다 다니면서 제가 분석하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전도를 하기 위해서 보험회사 다니는 사람들, 자동차 판매하는 사람들, 경찰 가운데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까지도 만나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게 하고 어떻게 설득하고 포섭하는가를 1대 1로 만나서 배우기도 했어요. 그렇게 1년 하니까 교인이 100명 모이고 2년, 3년 되니까 200명, 300명 이런 식으로 빠른 성장은 아니지만 성공을 하게 된 거죠.”
 
  대부분의 목회자는 그 정도 규모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지만 소 목사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룩한 광인’에 이어 ‘거룩한 불만족’이라는 표현을 썼다.
 
  “기업인이 됐건 목회자가 됐건 간에 ‘거룩한 불만족’이 있어야 해요. 저는 지금도 ‘거룩한 불만족’을 품고 살아갑니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일이라면 그 욕심은 무한정 부려도 됩니다. 그래서 제가 ‘거룩한 불만족’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배당을 지으려고 땅을 찾았지만 그 근방에는 없는 거예요. 장지동, 문정동… 더 많은 성도가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어요. 그렇게 교회를 이전한 곳이 분당입니다. 제2의 목회가 시작된 것이죠. 가락동에서는 목회에 미쳐서 완전히 광인목회를 했다고 하면 분당에 와서는 전략목회를 했다고 할 수 있죠. 가락동에서의 목회 마인드를 가지고 처음에 할 때는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다시 신도시를 연구하고 문화를 연구했죠.”
 
  —설교 방식도 바뀌었겠네요.
 
  소 목사는 분당에서 2005년 현재의 죽전으로 옮긴 이후까지를 포함해서 자신의 설교 방식 변화에 대해 설명했다.
 
  “저는 어디서나 열정적 설교를 합니다. 가락동이나 분당에서는 폭격기가 그냥 포탄을 쏘는 것처럼 설교를 했는데 열정도 좋지만 ‘설교가 시끄럽다, 난폭하고 거칠다’ 이런 이야기도 사실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가슴은 뜨겁지만 외면적으로는 폭격기 같은 설교를 안 하는 게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고안해 낸 게 스토리텔링의 설교입니다. 현대인은 스토리를 원하고, 스펙보다 스토리에 감동을 받는 시대 아닙니까. 할 수 있으면 성경을 스토리화하려고 합니다.”
 
  —비신자인 저로서는 스토리 설교라는 말이 생소합니다.
 
  “글자 그대로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설교입니다.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나누고 감동을 주고받는 겁니다. 스토리는 작위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삶을 통해서 겪는 역동적 체험, 즉 고난과 역정으로 점철된 굴곡 많은 인생의 여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비천한 노예와 강간 미수범이라는 최악의 스펙을 가진 요셉이 끝까지 붙잡았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꿈, 사명, 사랑과 용서 그것이 스토리입니다. 간난신고를 이겨낸 제 개인적 체험 역시 스토리 설교의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7월 미국·호주 등의 6·25 참전용사와 가족 200명 초청
 
미국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헌화한 뒤 묵념을 하고 있다.
  ‘지역과 함께하는 교회, 영향력에 걸맞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 소강석 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다.
 
  “교회의 본분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교회가 성장에만 급급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이나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실천하는 것도 교회의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요. 남에게 행복주고, 감동을 주는 일은 기쁜 일이잖아요?”
 
  새에덴교회는 지역주민들을 위해 헬스장, 재즈댄스 연습장 등의 체육시설을 개방하고 20여 개의 문화교실을 운용하고 있다. 교회 건물 가운데 1개 층은 지역주민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역주민들은 새에덴교회를 약속장소나 휴식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점프> 등 연극공연, 김동규씨 등 유명 성악가들과 오케스트라의 협연 등 각종 문화공연을 무료로 열어주기도 한다.
 
  새에덴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주안점을 두고 있는 행사 중 하나가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다. 소 목사는 2007년 6월에 참전용사 30명을 초청한 데 이어 2008년 100명, 2010년 89명을 초청해 기념행사를 열고 전적지를 돌아봤다. 올해도 지난 7월 25일부터 30일까지 미국, 호주 등지에 있는 참전용사와 그 가족 200여 명을 초청해 행사를 가졌다. 2009년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미국 국방부 관계자를 비롯해 1000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열기도 했다. 비행기표부터 체류비까지 그 비용의 대부분을 새에덴교회가 책임지고 있다.
 
  소 목사의 홈페이지에는 그가 직접 쓰는 ‘목양칼럼’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이 코너에는 8월 8일 현재 250개의 칼럼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검색어로 ‘대한민국’을 치면 20개의 칼럼이 뜬다. 그만큼 그는 대한민국 또는 애국심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목회자다. 그가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 등 민간외교에 앞장서는 이유는 이런 ‘애국심’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6·25 참전용사 초청, 한미(韓美)우호 증진 예배 등 그동안 지속적으로 민간외교 활동을 펼친 결과를 인정받아 마틴루터킹 국제평화상 수상, LA 오렌지 카운티 의회 특별공로상 수상, 민간인 최초 맥아더 장군 기념행사 오프닝 세리머니에서의 기조연설, 미국 해외참전용사협회 금훈장 등을 수상했다.
 
  “대형교회로서의 역사적 사회적 책무를 다하다 보니까 국격도 높아지고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거죠. 민간외교도 되는 것이고요. 이런 일은 작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큰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냥 우리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는 앞으로 목회적 대형교회만이 살아남는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커지다 보면 기업적 구조를 안 가질 수가 없거든요. 담임목사는 CEO가 될 수밖에 없어요. 언제나 목회 본질을 추구하고 그 본질 위에서 교회가 부흥을 해야 합니다. 성경적 본질과 가치를 가지고 일을 해나가는 그런 교회가 목회적 대형교회입니다. 우리도 목회적 대형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죠.”
 
  —목사님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입니까.
 
  “대한민국이 없었다면 소강석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애국가나 국기를 짓밟으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살 자격이 없죠.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국가를 사랑해야죠. 제게 대한민국은 교회를 품어주고 안아주는 어머니 품과 같고 또 젖줄과 같은 것이죠.”
 
 
  “애국가 짓밟으려는 사람은 대한민국서 살 자격 없어”
 
부시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소강석 목사. 소 목사는 한미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마틴루터킹 국제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상충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국민으로서 당연히 법을 지켜야 하지만 신앙인으로서는 신앙 양심으로 신앙의 법을 지켜야 하겠죠.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게 신앙의 법과 상충이 될 이유가 없어요. 다만 국가도 간섭하지 말아야 할 신앙의 경계가 있어요. 그럴 때는 국가를 깨우쳐야죠.”
 
  —세금을 내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성직자에 대한 세금 부과에 대해 찬성한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고요. 대한민국의 70~80%는 미자립교회입니다. 목회자에게 세금을 거두는 것은 결국 국민의 다양한 복지를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까.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에게 생계를 보장해 주는 정책을 입안한 이후에 자립한 목사들에게 세금을 일괄적으로 거둬야 된다고 봅니다. 저는 세금을 찬성하기 위해서 세금을 내는 게 아니고요. 대형교회 목사로서 세금을 안 내면 사회적 비난과 조소를 당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세금을 낼 근거는 없지만 원천징수를 만들어가지고 자진해서 내고 있습니다.”
 
  소 목사는 1남1녀를 두고 있다.
 
  —자제분 중에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쯤은 목사를 만들고 싶은데 아버지인 제가 이렇게 ‘목회 광인’으로 사는 데 질려서 절대로 목회자의 길을 가지는 않겠다고 하고 있어요.”
 
  —일부 대형교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 세습 문제는 자연 해결됐네요.
 
  “(웃음)현재로서는 세습 문제에서 자유로울 것 같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까.
 
  “무엇이 절대적인 정의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다만 세습을 찬성하는 어떤 분들은 ‘구약에 보면 제사장들이 세습을 했으니까 성경에도 세습이 있다’고 하지만 그걸 핑계로 세습을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구약 시대와 지금은 다르기 때문이에요. ‘내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고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부와 영광을 상징하는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자리를 절대 남에게 줄 수는 없다’고 하는 세습은 저는 절대 반대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비방거리, 조소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세습은 교회를 망칩니다. 대형교회가 됐건 작은 교회가 됐건 간에 그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당회에서 정말 자발적으로 온 교인들이 피켓을 들 정도로 우리는 목사님의 아들을 원한다고 하고 그래서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게 결정되면 세습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죠.”
 
  —한국교회가 신도 수 증가에 있어서 정체 내지 퇴보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교회 이미지 때문이에요. 요즘 이미지는 제3의 재산 아닙니까. 제1의 재산이 토지요, 자본이라면 제2의 재산은 지식과 정보였습니다. 요즘 기업도 이미지 광고하지 않습니까. 우리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이미지 메이킹에 실패한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 내분이 언론에 비치게 되고 사회법정에도 가고 하는 것이 일반 국민에게 교회가 거룩한 줄 알았는데 세속적으로 비치게 된 거죠. 거기에 반사이익을 본 것이 가톨릭이죠. 그러나 그래도 실제로 보면 다른 종교는 등록만 해놓고 가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매주 출석하는 신도는 아직도 우리 개신교 신도가 가장 많아요. 그리고 정치적으로 예술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가톨릭의 사회적 이미지가 좋은 것은 개신교의 내부분열 때문에 얻은 반사이익이라는 겁니까.
 
  “반사이익도 있지만 그네들은 사실 언론 관리를 잘 하고 이미지메이킹을 잘 했죠. 김수환 추기경이 계실 때 언론 소통을 잘 한 거죠.”
 
 
  빵점 家長
 
새에덴교회는 지역주민들을 위해 교회 건물 가운데 1개 층을 헬스장, 문화교실 등으로 개방하고 있다.
  종교에서 명쾌한 답을 구하기 어려운 것이 구원의 문제다. 그 구원의 방법에 대한 해석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이단 시비가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중동에서 태어났거나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태어난 사람들, 즉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환경에서 태어난 분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계시에 의존해 볼 때 복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해야죠. 그런 말을 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독선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제가 너그럽게 얘기를 해야겠죠.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항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겠죠.”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 볼 때 예수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매정하게 아까 말한 그분들을 지옥에 갔다고 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제 마음은 그분들도 하나님 나라에 가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하기를 원하는 거죠.”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습니까.
 
  “0.0001%도 없죠. 당연하죠. 확신 없이 어떻게 미친 사람처럼 목회를 합니까.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려고 밤낮없이 뛰는 건데.”
 
  —성공한 목회자이신데 성공한 가장이기도 합니까.
 
  구원을 얘기하던 진지한 얼굴을 풀고 소 목사가 웃으며 말했다.
 
  “남편으로서는 빵점입니다.”
 
  —집에서 요리는 해봤습니까.
 
  “요리를 해본 적도 없고 이사 갈 때 못 한 번 박아본 적도 없습니다.”
 
  —정말 빵점이네요.
 
  “빵점이죠. 빵점이죠. 가장으로서는 빵점이죠. 옛날에는 집사람이 이해를 못 했죠. 집에도 안 들어오고 교회에서 자고, 만날 책 쓴다고 교회에 있고, 그 대신 해외 선교여행 갈 때는 꼭 동반해서 갑니다.”
 
  속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절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목회자로서 숙명처럼 짊어지고 가야 할 그의 십자가 역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던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처럼 무거울 것이 뻔해 보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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