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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15〉

상앙과 애덤 스미스 2

상앙, 통일제국 秦의 아버지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조선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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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원과 인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盡’ 강조
⊙ ‘壹’을 통해 하나의 목표를 제시하고, 국민들을 동일하게 대우
⊙ 상앙의 富國强兵 과정은 총력전 체제 속에서 근대화 일군 朴正熙와 흡사
⊙ 減稅, 작은 정부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와 통해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조선일보》 ‘밀레니얼 톡’ 칼럼니스트 / 저서 《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해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등
  한비자(韓非子)와 더불어 법가(法家)사상가를 대표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상앙(商鞅)이다. 단순히 사상가인 정도가 아니라 국정에 참여해 재상(宰相)으로 나라를 이끌면서 대단한 성과를 낸 사람이다. 상앙이 있었기에 진(秦)이 있었고, 진의 천하통일이 가능했다. 자신을 신임하던 효공(孝公)의 죽음 이후 실각(失脚), 거열형(車裂刑)에 처하는 최후를 맞이했지만, 상앙은 누가 뭐래도 통일제국 진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만들어낸 진의 시스템은 진의 천하통일 이후 전(全) 중국에 뿌리내렸고, 진이 무너진 이후에도 한(漢)나라에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이후 계속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의 기본적인 틀이 되었는데, 그 기본적 틀은 신해혁명(辛亥革命)과 을사늑약(乙巳勒約) 때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업적을 세운 인물이 바로 상앙이다. 그가 만들어낸 진나라를 인류 최초의 근대국가(近代國家)로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商君書》
 
《상군서》 신동준 譯.
  상앙은 본래 진나라 사람이 아니다. 동방의 소국(小國) 위(衛)나라 태생이다. 야심가인 상앙에게 위나라는 너무 작았던 것일까. 그는 고국을 떠나 북방의 강국 위(魏)나라에 가서 공숙좌(公叔座)라는 대신을 섬겼다. 공숙좌가 죽자 위(魏)나라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 출사(出仕)하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의 군주 효공은 나라 안팎으로 영(令)을 내렸다. “천하의 현자(賢者)들을 구해 선조(先祖) 목공(穆公)의 패업(霸業)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동쪽의 땅을 되찾겠다”는 효공의 말을 상앙이 들은 것이다. 결국 상앙은 진에 등용되어 나라를 이끌게 되었는데, 그는 진나라 효공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지를 받았다. 그는 효공의 지원 아래 1, 2차 변법(變法)을 강행했다. 이후 진의 국력은 막강해져 천하를 도모할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비록 상앙은 그를 신임하던 효공이 죽고 나서 몰락했지만, 그의 정책 기조는 진에서 계승되었고, 결국 진은 천하를 통일했다. 상앙이 거둔 부국강병의 성과는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상앙이 진나라를 다스리자 법령이 크게 행해지고 공평무사하였으며, 벌(罰)은 강대한 자라 하여 피하지 않았고, 상(賞)은 친근하다고 하여 사사로이 하는 경우가 없었다. 법이 태자(太子)에게 미치자 사부(師傅)를 경형(黥刑)과 의형(劓刑)에 처하였다. 1년 후에는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는 백성들이 없어졌으며 군사력이 강해져 제후들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였다.〉
 
  상앙의 사상과 생각은 그의 저서 《상군서(商君書)》에 잘 나와 있다. 비록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닌 추종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대부분이며, 추종자와 후대 진의 지식인들의 생각까지 가필(加筆)되어 있지만 《상군서》에는 상앙의 생각과 지향점,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법가의 성전(聖典)이라고 할 수 있다.
 
  《상군서》에서 상앙은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 챙겨야 할 사항들을 이야기한다. 국정의 여러 분야에 대해 정책들을 늘어놓는다. 토지 개간에 대해 말하는 간령(墾令), 토지의 계산과 활용에 대해 말하는 산지(算地), 백성들의 성향과 인정(人情)에 대해 논하는 설민(說民), 전투에 대해 논하는 전법(戰法), 인구의 유치(誘致)에 대해 논하는 내민(來民), 호구(戶口)의 등기(登記)와 군공(軍功)의 평가와 포상에 대해 논하는 경내(境內) 등이 그것이다. 그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치국(治國)의 도(道)가 아니라 늘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를 말했다. 《상군서》를 보면 군주를 앞에 두고 바로 당장 실행해야 할 것들을 역설하고 있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보고 있노라면 국무회의 장면 아니면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단순히 상앙의 사상과 생각만이 아니라 진이 어떻게 발전·변화해나갔는지에 대해서도 생생히 보고 느낄 수 있는 게 바로 《상군서》라는 텍스트이다.
 
 
  상앙 이전의 秦나라
 
  사실 진은 효공과 상앙이 만나기 전에는 국세(國勢)가 강하던 나라가 아니었다. 건국 초기 때부터 잠재력(潛在力)을 인정받고 목공 시절 힘을 떨치기는 했지만, 무시를 당하던 국가였다. 문화가 심히 낙후된 서쪽 변방의 나라로 중원(中原)의 열국(列國)이 보기엔 사실상 서융(西戎), 서쪽 오랑캐였다. 늘 중원 열국과 제후(諸侯)들의 무시를 받았고, 중원 패자(覇者)들의 회맹(會盟)에 초대받지도 못했다. 북방의 강국 진(晉)의 위세에 짓눌렸다. 진이 삼분된 후에는 삼진(三晉) 중의 하나인 위(魏)나라가 건국 초기 국세를 떨칠 때 크게 압박을 받기도 했다. 위나라의 장수 오기(吳起)는 진의 동쪽을 유린하다시피 했다. 위의 공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진(秦)은 왕실의 내분이 심했다. 여러 왕이 즉위 후 얼마 안 가 나가떨어졌다. 동쪽 땅을 옆에 있는 위나라에 계속해서 빼앗기고 있었다. 척박한 토지 생산력에 낙후된 문화 환경, 이민족(異民族)의 때가 남은 풍습 등 아무리 백성들의 강인함과 호전성(好戰性), 투지가 좋다고 해도 여러 가지로 문제투성이인 나라였다. 선대(先代)인 목공 시절에 제 환공(齊 桓公)에 이어 2대 패자로 등극한 진 문공(晉 文公)과 대등한 국세를 보여주기도 하고, 서쪽 변방의 이민족들을 제압해 ‘서융의 패자’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지나간 영화(榮華)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나긴 왕실의 분열과 외침(外侵)은 각성(覺醒)을 낳았다. 분열을 수습하고 국력을 밑바닥에서부터 다지려고 애쓴 임금들이 출현한 것이다. 헌공(獻公)이 나왔고, 효공이 뒤를 이었다. 헌공이 왕실의 내분을 수습하고 안에서 정리를 해냈다면 효공은 국가 안에 체계를 세우고 힘을 외부로 떨치고자 했다.
 
  효공은 야심 있는 군주였다. 나라를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목공 때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고, 더 나아가 진의 힘을 동쪽으로 펼쳐 중원 열국에도 떨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재위 초기에 그의 생각을 현실화해줄 국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국력을 만들어낼 인재들이 없었다. 서쪽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상앙의 네이션 빌딩
 
  효공은 국가의 문호(門戶)를 널리 개방해 천하의 인재를 모으겠다고 공언했다. 국세가 쪼그라든 나라, 유구한 역사와 전래(傳來)의 문화가 없는 나라라는 점이 외부 인재를 수혈(輸血)해서 활용하는 데에는 역설적으로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없다는 것은 토착 귀족과 세신(世臣)들의 힘이 강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덕분에 외부의 인사가 들어와 운신(運身)할 수 있는 폭이 컸다. 중원의 열국, 산동(山東)의 나라들은 신분과 혈통, 출신을 따지면서 외부 인사를 꺼렸지만 진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외부 인사를 견제할 내부세력의 힘이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진은 능력을 가졌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와서 꿈을 펼쳐보고 인생을 건 도박을 해볼 만한 나라였다. 자신의 고국에서는 배제당하고 중용되지 못했지만 능력 하나는 자신 있는 야심가들이 놀아볼 만한 땅이었다. 연횡책(連橫策)을 만든 장의(張儀), 원교근공(遠交近攻)의 대전략을 만들어낸 범수(范睢), 그리고 채택(蔡澤)과 이사(李斯)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외국 출신들이다.
 
  상앙은 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한 외부 출신 재상인데, 상앙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게 있다. 다른 사람들은 진이 강성해진 이후에 들어와 활약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상앙은 진이 약하고 내부적으로 아무런 체계가 없고 낙후되어 있을 때 입성(入城)한 사람이다. 하나하나 자신의 힘과 손으로 국가를 만들어갔다. 피땀 흘려가며 국가 건설(nation building)을 했다고 해야 할까?
 
  상앙의 《상군서》를 보면 그래서 단순한 사상서·철학서를 보는 게 아니라 영상을 보거나 영화를 보는 듯하다. 국가 건설의 과정을 현장에서 보는 듯한 생생함이 있다. 다른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와 달리 그런 역동적인 면과 생생함이 독서의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상군서》에 드러난 상앙의 국가 만들기를 보면 단순히 나라를 만들고 건설한다는 느낌보다는 ‘근대국가 만들기’의 느낌이 난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의 냄새가 난다. 15~18세기 유럽은 열국이 아주 치열하게 경쟁했다. 치열하게 경쟁하다 못해 총력전(總力戰) 체제로 시나브로 들어가고 그러면서 군사혁명(軍事革命·군사 기술 및 전법에서의 혁신)이 일어났다. 국가의 힘과 잠재력을 키우고 끌어모으기 위해 몰두하던 시기였다. 《상군서》를 보노라면 그때 유럽의 역사를 보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을 준다. 자, 《상군서》의 말을 한번 보면서 직접 체험해보자.
 
 
 
務盡地力

 
  “고생을 쉽게 여기면 토지의 힘을 다 얻을 수 있으며 쓰임을 즐겁게 여기게 되면 병력의 힘을 다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군서》 ‘산지(算地)’편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능히 토지의 힘을 다 발휘시키고 백성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게 할 수 있으면 명예와 이득이 함께 이르게 될 것이다.” 《상군서》 ‘산지’편
 
  토지의 힘을 다 발휘시킨다, 백성의 힘을 다 발휘시킨다, 병력의 힘을 다 발휘시킨다. 《상군서》에는 ‘진(盡)’이라는 글자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 ‘진(盡)’이란 글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다할 진’이라고 나온다. 쉽게 말해 ‘모두 끌어낸다’는 뜻이다. 뽑아내자는 것이다. 땅의 힘, 사람의 힘, 땅과 사람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모든 생산요소의 힘을 모조리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국가는 강해지고 경쟁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진(盡)’이라는 글자로 대변되는 국가 노선은 사실 상앙이 먼저 주장한 것이 아니다. 《사기열전》에 등장하는 이극(李克)이라는 정치가이자 법가사상의 비조(鼻祖)가 가장 앞서 주장한 것이다. 이극은 위(魏)에서 활약했던 사람으로 오기와 동(同)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위(魏)의 법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상앙은 위(魏)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이극과 동시대인은 아니지만 적지 않게 이극의 영향을 받았다. 이극의 법전을 읽고 배우고, 진에서 법을 만들 때 이극의 법전을 참고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이극이 정치에서 일구고 행한 바를 ‘무진지력(務盡地力)’이라고 말했다. ‘토지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이극은 토지의 생산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국가의 모든 힘을 기울이게 했다. 덕분에 전국(戰國)시대 초기, 위나라는 가장 먼저 치고 나갈 수 있었다. ‘무진지력’을 국가의 목표로 설정한 그들은 정말이지 제대로 진(盡)했기에 생산력을 끌어올려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盡’으로 富國强兵을 꾀하다
 
  법가사상의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이극은 이렇게 ‘진(盡)’을 내세웠는데, 본래 법가는 이 ‘진’을 좋아한다. 땅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고 땅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힘도 모조리 끌어내고자 한다. 나라 안에 노는 땅과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산림수택(山林水澤)으로 대변되는 지하 광물, 임업자원 역시 모두 끌어내려고 한다. 소인(小人)과 야인(野人) 계급 등 하층민에게도 기회를 주어서 사회의 잠재력을 최대한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이 말하는 법과 정책, 제도는 모두 국민과 자원, 생산의 요소들이 가진 힘을 최대한 남김없이 뽑아내기 위한 것들이다. 법가들은 그래야만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상군서》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익이 땅에서 나오면 백성들은 힘을 다해 농사를 지을 것이요, 명예가 전투에서 나온다면 백성들은 죽음을 바칠 것이다. 안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힘을 다하도록 한다면 황무지가 그대로 묵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상군서》 ‘산지’편
 
  “전쟁을 벌이면 인재들이 저절로 숙련된다는 것은 전쟁은 공로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니 공로가 분명하면 백성들이 힘을 다하게 될 것이요, 백성들이 힘을 다하면 재능을 가진 자들이 저절로 단련하게 되는 것이다.” 《상군서》 ‘조법(錯法)’편
 
  자, 진(盡)해야 한다. 최대한 뽑아내고, 남김없이 끌어내야 한다. ‘진’을 말하는 상앙은 《상군서》에서 계속 왜 뽑아내야 하고 어떻게 끌어낼지, 특히 어떻게 끌어내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떤 인센티브로, 어떤 유인체계(誘引體系)와 상과 벌로 끌어내고 뽑아낼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겹도록 ‘진’이라는 글자가 《상군서》에서 나온다.
 
 
 
상앙의 ‘壹’

 
상앙의 ‘壹’사상에 영향을 준 묵자.
  《상군서》에는 진(盡)이라는 글자만 자주 나오는 게 아니라 ‘일(壹)’이라는 글자도 자주 등장한다. ‘일’은 무엇일까? 왜 상앙이 ‘일’을 중시했을까? ‘일’이라는 것은 바로 ‘일(一)’이다. ‘하나, 하나같이, 똑같이, 일률적’으로라는 뜻이다. 이는 묵자(墨子)의 동(同)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많은 것을 일원화(一元化)·획일화하고 하나로 규격화·표준화하는 것이 바로 ‘일’이다. 상앙은 국가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위정자(爲政者)가 ‘일’을 절대명제로 생각한 채 정책과 제도, 법안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음악과 복장이 모든 고을에 유행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그러한 복장을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며 쉴 때에도 그러한 음악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집에서 쉴 때 그러한 음악을 듣지 않게 되면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요, 밖에서 일을 할 때 그러한 복장을 돌아보지 않으면 뜻이 틀림없이 전일하게 될 것이다. 마음이 하나로 모이고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황무지는 틀림없이 개간될 것이다.” 《상군서》 ‘간령(墾令)’편
 
  “성인(聖人)은 한결같이 백성들이 하나에 전념하게 일에 애썼다. 나라가 1년을 농사와 전쟁 단 하나에 힘쓰면 10년은 강해질 것이요, 10년을 농전(農戰) 단 하나에 힘쓰면 100년은 강해질 것이며, 100년을 농전 단 하나에 힘쓰면 1000년은 강해질 것이다. 1000년이 강하게 되면 천하에 왕 노릇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주는 상벌을 제정하여 한 가지 일에 전념하게 하는 교화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상군서》 ‘농전(農戰)’편
 
  《상군서》에서 진(盡) 다음으로 중시되는 것이 일(壹)이다. 《상군서》를 읽을 때 ‘진’과 ‘일’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상앙의 생각에 위정자는 ‘일’을 깨달아야 하고 ‘일’을 국정 운영의 대원칙으로 머리에 아로새겨야 한다. 왕은 백성들이 ‘일’하게 해야 하고, 그들을 ‘일’로써 다루고 대우해야 하며, ‘하나’의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관료와 국가 구성원들이 달려가게 독려하고, 상과 벌을 ‘하나로’ 통일하고, 모두를 ‘똑같이’ 법 앞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세우고, 세금제도를 ‘통일’한다. 이게 바로 상앙이 생각하는 ‘일’이라는 정치노선이다.
 
  일(壹)해야 진(盡)이 가능하다는 게 상앙의 생각이다. ‘일’은 ‘진’을 위한 수단이다. 즉 ‘진’이라는 국가의 목표를 위한 방법과 수단이 바로 ‘일’이라는 것이다. 통일하고, 같게 하고, 동등하게 하고, 하나의 목표를 가지게 해야 한다. 규격과 도량형을 통일하고 행정의 양식을 최대한 표준화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국가 내의 모든 물적 자원과 자본의 힘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진’과 ‘일’은 상앙이 생각하기에 정치와 행정의 지상명제이다.
 
 
  뭉쳐라, 집중시켜라
 
  《상군서》에는 단(摶)이라는 글자도 중요한 비중으로 나온다. ‘단’은 ‘뭉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다. 도대체 이 글자는 어떤 이유와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일까?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이 흩어져서 다시는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성인은 늘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일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상군서》 ‘농전’편
 
  “사사롭게 상을 주는 일을 아랫사람들이 하지 못하게 금지하면 백성의 힘은 적을 상대하여 뭉쳐질 것이며 적을 상대하여 뭉쳐진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상군서》 ‘산지’편
 
  힘을 뽑아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뭉쳐야 한다. 집중시켜야 한다. 단순히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잠재력을 끌어내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 왜 그럴까?
 
  상앙이 활약하던 시기를 생각해보자. 전국시대(戰國時代)다. 그리고 전국시대와 비슷한 유럽의 근대가 만들어진 시기를 생각해보자. 열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절이다.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단순히 힘과 체급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투사(投射)와 분출, 팽창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상앙은 단(摶), 단력(摶力)을 말했던 것이다.
 
  “무릇 나라가 위태롭고 군주가 근심하게 되는 이유는 강한 적과 큰 나라 때문이다. 임금이 이러한 강한 적을 굴복시키고 큰 나라를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면 수비를 잘 갖추고 지형에 익숙하도록 하고 백성을 함께 뭉치고 다른 제후국의 일을 기다린 뒤에 그 근심을 제거하여야 왕도를 가히 이룰 수 있다.” 《상군서》 ‘농전’편
 
 
  近代는 總力戰 체제와 함께 온다
 
  백성의 힘을 뭉쳐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침입할 경우 막아야 하고, 때로는 원정을 가서 적의 땅을 취해야 한다. 그렇기에 ‘일(壹)’을 통해 ‘진(盡)’을 했다면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단(摶)까지 나아가야 한다.
 
  “나라의 업무가 한 가지에 집중되면 백성이 응하여 쓸 수 있고 일의 근본에 집중하면 백성들은 농사짓기를 즐거워하고 전쟁에도 기꺼이 나서게 될 것이다.” 《상군서》 ‘일언(壹言)’편
 
  “무릇 성인의 나라 다스림에는 능히 백성들의 힘을 뭉칠 수도 있고 백성들의 힘을 상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제도가 잘 살펴지면 백성들의 힘이 뭉쳐지지만 힘이 뭉쳐졌는데도 그 힘을 농전에 소모시키지 않으면 실행이 되지 않는 것이요, 실행이 됨에도 부유하게 해주지 않으면 혼란이 일어나고 만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뭉쳐 부국강병을 이루며 그 힘을 덜어 적을 죽이도록 백성을 권면해야 하는 것이다.” 《상군서》 ‘일언’편
 
  《상군서》의 이런 말들이 무서운 말 같은가? 어쩔 수 없다. 전쟁이 일상화된 시기와 세상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급격히 국력을 키우고 국가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진(秦)은 낙후된 서쪽 변방의 국가로서 무시받던 후발(後發)주자였기에 더욱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자, 상앙의 말대로 힘을 만들어냈으면 집중시켜서 외부로 투사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될 때가 있다. 단순히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팽창을 준비할 수도 있어야 하는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시기가 유럽의 근대를 만들었고, 여러 가지 혁신을 불러왔으며, 과학과 기술을 꽃피우게 했다. 우리의 근대와 번영도 전쟁을 준비하던 국가 총력전 체제에서 탄생하고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진은 사실상 인류 역사에서 첫 번째로 총력전 체제, 국민 총동원 체제를 만들어내고, 그에 기반해서 천하를 통일했다. 그 중심에 바로 ‘일’ ‘진’ ‘단’을 말한 상앙이 있었던 것이다. 근대는 본래 총력전 체제, 총동원 체제와 함께 오는 것이라는 것을 《상군서》는 잘 보여준다.
 
 
  근대화는 순한 얼굴로 다가오지 않는다
 
한국의 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
  그런데 진나라만이 진(盡), 일(壹), 단(摶)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를 세우는 초기, 특히 근대국가를 만들고 산업화를 시작하는 국가는 모두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것은 유럽의 근대사가 증명한다.
 
  우리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 현대사가 가장 좋은 증명의 사례일지도 모른다. 박정희(朴正熙)로 대변되는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 시절 우리도 사회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애썼고, 모두가 고생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것을 하나로 통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억압적인 면도 있기는 했지만, 어느 나라든 근대화와 산업화는 절대로 순하거나 선한 얼굴로 다가오지 않는다. 특히 후발주자들의 근대화와 산업화에는 억압적인 면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때의 그림자와 부작용을 말할 때 근대화를 이끈 위정자의 과(過)로만 치부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문제는 ‘진(盡), 일(壹), 단(摶)을 통해 얼마나 부국강병을 일구어냈느냐, 그리고 그 결과를 국민들에게 얼마나 돌려주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진은 그것을 돌려주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에 통일 이후 단명(短命)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 과업에 있어 상당히 성공했다고 보는데,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분명히 위대한 승리의 과정이 아닐까?
 
 
  자유주의자 상앙
 
  뽑아내고, 집중시키고, 그래서 밖으로 분출하고, 어떻게 뽑아낼 것인지, 어떻게 밖으로 투사할 것인지를 논하며 구체적 정책과 국정 운영의 세부목표를 던지는 상앙. 그는 철저한 국가주의자이고 신념으로 가득 찬 부국강병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앙은 단순히 부국강병을 위해 백성들을 갈아 넣자고 했을까? 국가의 부강함을 위해 백성들을 수단화하고 동원을 해서 착취하자고 했을까? 법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얼핏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법가의 이미지가 실제 그러하고. 무시무시해 보이고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자는 주장 같아 보인다.
 
  그런데 법가 텍스트를 하나하나 읽어보고 깊이 음미해보면 그렇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상군서》라는 상앙의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사유재산(私有財産)의 보호를 말한다. 상앙은 실제로 정치에서 사유재산의 보호를 강력하게 관철시켰다. 《상군서》에서는 합리적이고 일원적인 조세 행정을 말한다. 감세(減稅)를 주장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상앙은 사람들 하나하나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했으며, 법적 판단의 주체로서 개인을 말했다. ‘큰 정부’가 아니라 ‘작은 정부’를 주장했다. 적지 않게 정부 일들을 민간에 넘기자고 했다. ‘진’ ‘일’ ‘단’을 말했기에, 총동원 체제의 냄새가 나기에, 그리고 강력한 법들을 말하기에 자유와는 상극(相剋)일 것 같지만, 실제 법가의 텍스트들을 읽어보면 자유주의적 요소가 상당하고 개인주의적·계약주의적 사고의 편린(片鱗)이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다음에는 상앙이 말하는 ‘자치(自治)’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자유주의자 상앙의 면모와 자유주의자 상앙이 생각하는 궁극적인 국가 이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미리 이야기를 좀 하자면 필자는 국가주의자, 부국강병주의자, 근대지상주의자와 자유라는 가치가 꼭 상치(相馳)되거나 모순(矛盾)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보와 국력 없이, 생산성(生産性)의 신장 없이 인간의 자유가 있을 수 있을까? 삶의 터전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서, 겨울마다 꽁꽁 언 냇물을 깨서 빨래를 하는 나라의 인간에게 자유란 게 있을 수 있을까? 국가에 체계가 서고, 국력이 강해지고, 열악한 생산성에서 인간이 해방되어야만 자유라는 것이 생길 여지가 있는 것이다. 강한 국가의 힘, 강한 생산성은 자유의 전제일 것이다.
 
 
  국력의 극대화와 자유
 
  국력의 극대화와 자유는 어떤 단계와 순서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를 본궤도에 진입시키려 할 때, 특히 후발주자로서 시작해 국가를 만들어야 할 때는 다소 혹독하게 짜내야 하고 다그쳐야 하지만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그때는 달라진다. 동원과 통제만으로 국력을 키울 수 없게 된다. 외려 동원과 통제, 간섭과 규제는 국력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고 나서는 국력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 그 시기가 되면 민간에 넘길 것은 넘기고 이양(移讓)할 것은 이양하고 자유를 더욱 확대시켜야 지속적인 힘의 팽창과 국력의 신장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압축성장 시기, 기적적인 경제발전의 과정을 보면 이 점이 분명히 확인된다. 박정희의 국가주도 경제발전이 급격한 성장을 일구었지만, 말년에 들어서 한계에 부딪혔다. 그가 적절한 시점에 퇴장(退場)했고, 그 후에 경제적 자유주의자 김재익(金在益)이 경제를 담당하고 나서 많은 부분을 민간에 넘겼기에 우리가 더욱 도약하지 않았을까? 대한민국 경제사(經濟史)를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침 상앙이 ‘자치’를 말한 부분이 그의 텍스트 맨 마지막에 있다. 상앙도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많은 부분을 민간에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가 만든 진나라는 통일 이후에도 동원체제로서의 억압성을 버리지 못했다. 거기서 큰 문제가 생겼고, 결국 진은 멸망했다. 그 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등장한 한(漢)은 그 문제에 대한 반성을 했다. 건국 이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세금을 감해주고, 백성의 삶에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휴식과 여유를 주었다. 한(漢)이 괜히 오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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