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첩부대, 5·16 주체세력 내에 프락치 심어, 1961년 4월경 쿠데타 세력 조직도 등 파악
⊙ “한국 육군방첩대(CIC)가 쿠데타 음모 수사 중”(1961년 4월 25일자 미 CIA보고서)
⊙ 특무대, 1958년부터 박정희 예편 추진
⊙ 박정희 내사했던 방첩부대 부副부대장, 5·16 후 미군 도움받아 미국 망명
⊙ “한국 육군방첩대(CIC)가 쿠데타 음모 수사 중”(1961년 4월 25일자 미 CIA보고서)
⊙ 특무대, 1958년부터 박정희 예편 추진
⊙ 박정희 내사했던 방첩부대 부副부대장, 5·16 후 미군 도움받아 미국 망명

- 5·16 성공 후 서울시청 앞에 모습을 나타낸 박정희 소장. 왼쪽은 박종규 소령, 오른쪽은 차지철 대위.
1958년 1월 12일 경찰은 조봉암(曺奉岩) 등 진보당 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3000여 표를 득표했던 그는 1960년 대선에서 유력한 야권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진보당은 ‘평화통일’을 내세웠다. ‘북진통일’을 외치던 당시로서는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찰에 체포된 조봉암에 대한 수사가 지지부진하던 2월 20일 육군특무부대는 “수일 전 모처에서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씨와 접선한 거물급 대남괴뢰간첩 양명산(양이섭·김동조라는 이름도 사용)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조봉암, “내가 죽을 죄를 지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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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10월 서울고법 재판정에 출두한 조봉암 진보당 당수. 1심과는 달리 사형을 선고받았다. |
오늘날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1960년 대선에서 유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정적(政敵)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죽인 ‘조작극’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법원은 2011년 1월 20일 재심을 열어 조봉암의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조봉암을 수사했던 특무부대 수사관들은 그의 유죄를 아직도 확신하고 있다. 10여 년간 특무대 수사관들이 24시간 조봉암을 감시하면서 정보를 축적한 결과라는 것이다. 엄재림 수사관은 “통의동 본부 특무대 식당을 빙 둘러가며 조봉암의 간첩 행위를 입증하는 자료들을 게시해 놓았다. 수사관들에게 이끌려 와서 이걸 본 조봉암은 반쯤 돌아보다가 털썩 주저앉으면서 ‘내가 죽을 죄를 지었구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에서도 진보당 사건은 김일성의 지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북한 조국통일사에서 1982년 펴낸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은 “진보당의 당수인 조봉암은 당을 만들면서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충성의 편지를 올렸다”고 주장한다.
4·19 후 방첩대로 개칭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특무대는 육군 내 부정투표에 앞장섰다. 각급 부대에 나가 있는 일부 특무대장들은 지휘관들에게 부하 장병들에게 이승만·이기붕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독려하라고 강요했다. 그 결과 어떤 지휘관은 “120% 찬성투표를 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기무부대사》를 저술한 이대인씨는 “김창룡 부대장이 살아 있었다면 군 내에서 부정선거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특무대에 야당 국회의원 체포를 지시했을 때, “특무대는 군 내 공산주의자 색출에 전념하겠다”고 했던 김창룡이었다면 특무대를 부정선거에 동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다. 또 당시의 군인이나 정치인들 중에는 털끝만 한 반(反)이승만 모의도 놓치지 않았던 김창룡이 있었다면 4·19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대인씨는 “김창룡 부대장이 죽은 후 4년간 통치자가 상황을 장악하지 못했고 이를 틈타 야당이 정국 흐름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4·19 이후 특무대는 이승만 정권의 친위대로 지탄을 받았다. 김창룡의 특무대가 수사했던 대공(對共) 사건들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들이 나왔다. 김창룡 암살을 지시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이던 강문봉 중장은 4·19 후 석방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특무부대는 1960년 7월 20일 육군방첩부대로 개칭했다. 이후 부대장들도 자주 바뀌었다. 이소동(1960년 5~6월), 박창록(1960년 6월~1961년 4월), 이철희(1961년 4~6월) 장군 등이 방첩부대를 거쳐 갔다. 대개 정보와 무관한 야전군인이거나, 첩보부대(HID·지금의 국군정보사령부) 출신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방첩부대가 육군참모총장의 지휘를 받는 부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나중에 5·16혁명 과정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19 후 군 내 부패장성들을 몰아내자는 정군(整軍)운동이 벌어졌다. 김종필(金鍾泌) 등 육사 8기생들이 중심이 된 정군운동은 군내 기득권 세력의 벽에 부딪히자 쿠데타 모의로 발전했다.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이끄는 쿠데타가 발생, 장면 정권을 무너뜨렸다. 대전복(對顚覆) 업무, 즉 쿠데타 방지 업무가 제1의 목적인 방첩부대로서는 뼈아픈 실패를 한 셈이다. 당시 방첩부대는 박정희 장군과 그의 쿠데타 모의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5·16을 막지 못했다. 왜일까?
이낙선, “개인보안심사위, 박정희 예편시키기로”
〈한국 육군방첩대(CIC)가 쿠데타 음모를 수사 중이다. 예상되었던 4월 26일 쿠데타가 거사되지 않으면 이들 집단은 보다 나은 호기를 기다릴 것이다. 4월 24일 현재 장면 정부는 쿠데타 음모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 CIA 한국지부가 1961년 4월 25일 본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그해 4월 21일 이후 CIA 보고 내용에 의하면, 미국은 거사의 주도자가 박정희 장군이라는 사실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방첩부대도 마찬가지였다.
남로당에 연루된 혐의로 여순반란 후 숙군(肅軍) 때 체포되어 유죄 선고를 받았던 박정희 장군은 이후에도 계속 특무부대의 감시대상이었다. 그가 미국 유학 대상자로 선발되었을 때는 특무부대가 신원조회 과정에서 브레이크를 걸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특무부대에서는 1958년부터 사상 성분에 문제가 있는 장교들에 대한 비밀취급 인가를 취소하고 전역시키자는 안(案)을 내놓았다. 여기에 해당하는 두 명의 육군 장성 가운데 한 명이 박정희 장군이었다.
1961년 1월 12일 육군본부에서는 개인보안심사위원회가 열렸다. 5·16 주체 중 한 명으로 혁명의 경과를 기록으로 남긴 이낙선(李洛善) 전 상공부 장관은 “이날 비밀회의에서 박정희 소장에 대해 좌익 전력자로서 비밀취급 인가를 받기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예편시키기로 결의했으며, 이 사실이 혁명주체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혁명 촉진의 자극제가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방첩부대원들이 군고구마 장수로 변장해 박정희 집 감시
1960년 12월 박정희 소장은 요직인 육군작전참모부장에서 제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됐다. 박창록 방첩부대장은 2군 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에게 “박정희를 엄중 감시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동태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육사 5기 출신인 이희영 대령은 육사 시절 박정희 중대장에게서 배웠다. 박정희가 2군단 포병단장을 할 때에는 군단 파견 특무대장이었다. 이희영은 박창록 부대장의 지시를 받고 ‘또 사상 문제구나’라고 생각했다.
방첩부대는 요원들을 군고구마 장수로 위장, 서울 신당동 박정희 장군 자택 부근에도 배치했다. 하지만 육영수 여사는 이들의 어설픈 행색을 보고, 남편을 감시하는 정보기관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육 여사는 이들의 사진을 찍어 편지와 함께 대구의 박정희 장군에게 보냈다.
박 장군은 이 사진을 이희영 대령에게 건네주면서 “나를 빨갱이라고 의심해 감시를 붙여놓고 있는 모양인데, 이 대령이 방첩대에 이야기를 해서 이런 일 안 하도록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이희영은 서울로 올라와서 박창록 방첩부대장에게 진언했다.
“정 위험한 인물로 보이거든 옷을 벗기시죠. 그러지 않고 장성을 대놓고 감시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박창록 부대장은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가.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지”라고 답했다. 박정희 장군은 4·19 후 부정선거에 책임이 있거나 부패한 장성들의 예편 문제를 거론하는 등 정군운동에 앞장을 서서, 군 상층부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1961년 1월 하순 육군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을 만나러 경북 영천으로 가면서 이희영 대령에게 동행하자고 했다. 정보학교장 한웅진(한충렬) 준장은 박정희 장군의 혁명동지였다. 한 장군은 특무부대장을 지낸 적도 있다. 때문에 박정희 장군은 한웅진 준장이나 육군작전참모부 교육처장 장경순 준장을 방첩부대장으로 보내는 공작을 추진하기도 했다.
영천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박정희 장군은 이희영 대령에게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대령이 “버마식 쿠데타가 뭐냐?”고 묻자 박 장군은 “버마식 쿠데타란 군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에 일정 기간 통치하다가 민간정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민간정부가 군의 의향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령은 그제야 ‘박정희가 정말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방첩대장인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면 장도영 2군 사령관하고도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이 대령은 ‘쿠데타에 대해 장도영 사령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장도영은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데에는 5·16 주체 중 한 명인 김재춘 대령(6관구 참모장) 등의 역할이 있었다. 그는 친분이 있는 오위영·박순천 등 민주당 요인들에게 장도영이 총장이 되도록 운동을 하고, 인사를 시켰다.
쿠데타 세력의 역정보
이희영도 얼마 후에 서울지구방첩대(506방첩대) 대장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는 이미 ‘박정희 쿠데타설’은 군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시 군부 내에서는 박정희 쿠데타설 말고도, 족청계(族靑系) 쿠데타설도 돌고 있었다.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만든 조선민족청년단 계열의 장성들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족청계 쿠데타설에서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은 박병권 중장(국방부 장관 역임)이었다. 족청계 쿠데타설은 박정희 측에서 흘린 역정보(逆情報)였다. 하지만 정보기관으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4월 21일자 미 CIA 정보 보고에서도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은 현 시점에서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두 건의 쿠데타 중 하나의 주동자이며, 다른 하나는 이범석이 주도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희영 대령도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박정희 장군과 박병권 장군이 비밀리에 만났다는 정보를 듣고 이를 확인하느라 한동안 바쁘게 보냈다.
이희영 대령은 쿠데타 세력 내에 프락치를 침투시켰다. 그는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이 서울 무교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제보했다. 방첩부대는 그 방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이 대령이 직접 리시버를 끼고 내용을 청취했다. 그 결과 박정희 장군이 1961년 4월 19일 거사를 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정희 장군은 4·19 1주년을 맞아 대학생들이 시위를 크게 벌여 사회가 혼란해지면 장면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리 포섭해 둔 수도권 육군 부대들을 계엄군으로 출동시켜 정권을 접수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를 위해 유원식 대령, 박종규 소령 등으로 하여금 대학생 데모를 선동하는 공작까지 추진했다.
장도영, “박정희 쿠데타설은 5·16 열흘 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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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당시 방첩부대장이었던 이철희. |
장면 국무총리의 귀에도 쿠데타설이 들어갔다. 한창우 《경향신문》 사장, 선우종원(국회사무총장 역임) 조폐공사 사장 등 정보에 밝은 장 총리의 측근들이 그런 정보를 입수해 전해준 것이다. 선우종원 사장은 1961년 4월 초 장도영·박정희 장군과 육사 8기생들이 포함된 쿠데타 모의자 명단을 입수하여 장면 총리에게 제출했다.
장면 총리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불러들였다. 5·16 일주일 전이었다. 장 총리는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다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물었다. 하지만 장도영 총장은 “염려 말고 안심하십시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건 장면 총리가 《정계비사/사실의 전부를 말한다》(1966년)에서 밝힌 내용이다. 장도영 총장은 선우종원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군 관계 정보가 있으면 나에게 얘기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했다.
훗날 장도영 총장은 장면 총리에게 불려가 쿠데타 음모설에 대해 추궁을 당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장 총리가 하문한 것은 박정희 쿠데타설이 아니라 족청계 쿠데타설이었다고 주장했다. 15년 전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도 그는 “내가 장면 총리로부터 들은 얘기는 족청계 쿠데타설뿐”이라면서 “선우종원씨는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엔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박정희 장군 쿠데타설’을 처음 들은 것은 5·16 10여 일 전쯤 방첩부대 부(副)부대장 백운상 대령으로부터 들은 것이 처음이었으며, 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도중에 5·16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백운상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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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음모를 제보한 선우종원 당시 조폐공사 사장. |
장도영 총장은 백운상 대령에게 대구로 직접 내려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장도영의 회고에 의하면, 백 대령은 4~5일 후 올라와서 “박정희 소장의 지휘하에 쿠데타를 하려 하는 것은 확실한데, 그 세부 방법과 조직은 알 수 없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그는 “장성을 체포하려면 증거가 필요하니, 다시 대구에 내려가서 무엇이든 증거가 될 만한 것을 하나만이라도 잡아오라”고 했다.
대구로 내려간 백운상 대령은 2군 사령부에 근무하고 있던 전재구(유정회 국회의원 역임) 중령을 불러내 “박정희 장군이 요즘 이상하지 않으냐”고 캐물었다. 육사 8기생인 그는 동기들의 동정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도 방첩대 출신이라 좀 아는데, 여기는 아무 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
백운상 대령은 서울의 미 CIA와도 긴밀한 관계였다. 5·16 전 미 CIA가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당시 방첩부대는 육군참모총장 휘하 부대였다. 장도영 총장이 이런 태도를 취하니, 이철희 부대장이나 이희영 서울지구방첩대장 등 부대 간부들은 은연중 ‘장도영 총장이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 모의를 비호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처럼 사실상 대통령 직할부대이거나, 지금처럼 국방부 장관 직할이었다면,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첩대 간부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도, 자신들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 있는 육군참모총장의 뜻을 거슬러가면서 과감하게 행동하기는 어려웠다.
이종태 대령 사건
군 내에 팽배한 불온한 기운에 힘입어서일까? 쿠데타 가담자 중 한 명인 이종태 대령이라는 사람이 통근버스 안에서 동료 장세현 중령에게 장면 정부를 과격하게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단순히 장면 정권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수준이 아니라고 느낀 장 중령은 이희영 서울지구방첩대장에게 이 사실을 제보했다.
이종태 대령을 방첩대로 소환한 이희영 대령은 “쿠데타는 장도영 총장과 박정희 소장이 손잡고 준비하는 것임을 다 알고 있으니 안심하고 털어놔 봐요”라며 구슬렸다. 이종태 대령은 술술 털어놓았다. 이희영 대령은 이를 바탕으로 쿠데타 세력의 조직도를 그려냈다. 장도영 총장은 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알고 있으니 설명할 것 없다”면서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검찰과 경찰도 쿠데타 관련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5월 12일 검찰은 쿠데타 자금을 모금하고 다니던 김덕승이라는 민간인을 체포했다. 군 통신을 감청하고 있던 경찰은 군부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 검찰에 보고했다. 이태희 검찰총장은 장면 총리에게 이 사실을 급히 알렸다. 장면 총리는 다시 장도영 총장을 불러들였지만 장 총장은 여전히 “내가 알아보았는데, 군에는 별일 없다”라고만 했다.
그날 저녁 서울지구방첩대장실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철희 부대장, 이희영 대령, 이태희 검찰총장 등이 참석했다. 이태희 검찰총장은 박정희를 빨리 체포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이희영 서울지구방첩대장은 “장성 체포는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의 내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철희 부대장은 참모총장 공관으로 찾아가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이태희 검찰총장의 박정희 체포 요구를 전했다. 하지만 장도영 참모총장은 “좀 더 두고 보자”는 소리만 했다.
5·16 새벽에도 박정희 미행
박정희 소장은 5월 12일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방첩대에서는 4인 1조로 된 미행팀을 박정희 소장에게 붙여 24시간 감시를 했다. 당초 거사일이 이날이었지만, 5월 15일이나 16일로 연기된 것도 알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프락치 덕분이었다.
5월 14일 박정희 소장은 이희영 서울지구방첩대장과 육군본부 직할인 제15범죄수사대(CID)장 방자명 중령을 신당동 집으로 불렀다.
방 중령도 2군 범죄수사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이 두 사람에게 네윈식 쿠데타 얘기를 했다. 두 사람은 거사가 임박했으며, 장도영 육군참모총장도 간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박정희 소장이 무슨 생각으로 자기들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5월 15일 오후, 쿠데타군으로 출동할 예정이던 육군 제30사단에서 배신자가 생겼다. 참모장 이갑영 대령, 참모장 박상훈 대령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포섭한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이 거사가 임박한 시점까지도 박정희 소장 등 혁명 핵심세력과 만날 기회를 주지 않더니, 막판에 일방적으로 출동 일시를 통보하자 빈정이 상했다. 이들은 이상국 사단장에게 부대가 사단장 몰래 쿠데타군으로 출동하게 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사단장 이상국 준장은 이 사실을 즉시 이철희 방첩부대장에게 알렸다. 이상국·이철희 준장 모두 박정희 소장과 같은 육사 2기 동기생이었다. 서울지구방첩대에서 이상국 준장과 만난 이희영 대령은 그에게 쿠데타군의 조직도를 보여주었다. 그 도표에 30사단도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이상국 준장은 아연실색했다.
쿠데타 발생 보고는 서울지구방첩대 인근 음식점 은성에서 식사 중이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도 들어갔다. 장 총장은 서울지구방첩대로 달려왔다. 이희영 대령은 장 총장의 명령으로 박정희 장군에게 미행을 붙였다. 김응서 대위 등 7명의 수사관이 신당동으로 급파되었다. 이들이 신당동에 도착했을 때, 박정희 소장은 동지인 한웅진 준장, 장경순 준장 등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만일 김응서 대위 등에게 박정희 장군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면, 쿠데타는 진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소장 일행이 신당동 집을 나서 지프에 오르자 방첩대 차량이 이들을 미행했다. 박정희 소장 일행이 청진동과 삼각지를 거쳐 한강교를 건널 때까지 미행은 이어졌다. 하지만 체포명령은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5시, 쿠데타군은 서울을 접수했다.
경쟁자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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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후 방첩부대장으로 취임한 김재춘. |
6월 10일, 6관구 참모장으로 5·16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재춘 대령이 합동수사본부장 겸 방첩부대장으로 왔다. 김 대령이 방첩부대장으로 부임하고서 보니, 부부대장 백운상 대령이 보이지 않았다. 미8군이 자신들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백 대령을 오키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빼돌린 것이다.
5·16이 발생한 나흘 후인 1961년 5월 20일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다. 초대 부장은 혁명의 핵심 중의 핵심인 김종필 중령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육군 첩보부대·방첩부대 등에서 기간요원을 차출했다. 방첩부대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1급 요원들은 방첩부대에 남는 길을 택했다. 중앙정보부의 창설은 특무부대에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