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 의무가 없는 18세 미만이었는데도 자원 입대를 하거나 강제 징집당한 채 일반병들과 똑같이 계급과 군번을 부여받고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미성년자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初經(초경)조차 채 겪지 않은 10대 중반의 어린 소녀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 소년 소녀 병사들은 累卵(누란)의 위기에 놓인 내 조국 대한민국을 구하겠다며 펜을 집어던지고 총을 선택했던 겁니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들도 있는 거니까요.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정부가 우리의 절실한 목소리에 귀를 좀 기울여 줬으면 합니다.” (文仁順 씨)
“한국전쟁 당시 우리 소년 소녀 병사들은 累卵(누란)의 위기에 놓인 내 조국 대한민국을 구하겠다며 펜을 집어던지고 총을 선택했던 겁니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들도 있는 거니까요.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정부가 우리의 절실한 목소리에 귀를 좀 기울여 줬으면 합니다.” (文仁順 씨)

- 6·25전쟁 중 훈련소에서 사격훈련을 받고 있는 소녀병들.
그러나 이 기록은 수정되어야 한다. 국군의 역사에는 단 한 줄도 언급돼 있지 않지만 그들보다 일주일 먼저 군복을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 1950년 8월 30일, 해병 4기로 제주도에서 입영한 126명의 여성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熱血女兒(열혈여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피 끓는 청춘들이었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初經(초경)조차 겪지 않은 10대 중반의 어린 소녀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이들을 ‘少女兵(소녀병)’이라 부르자.
병역 의무가 없는 18세 미만이었는데도 자원 입대하거나 강제 징집당한 채 일반병들과 똑같이 계급과 군번을 부여받고 전쟁의 복판에 뛰어들었던 미성년자들을 ‘소년병(Child Soldiers)’이라고 부른다. ‘소녀병’은 거기에 성별로 대칭되는 개념이다.
6·25 전쟁 초기, 정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해 15~17세(주로 1933~ 1935년생)의 앳된 소년병들을 交戰(교전)이 치열하던 격전지로 보냈는데, 그 수가 무려 2만 400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이 펜 대신 총을 들고 젊음을 바쳐 지켜낸 조국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철저하게 이들을 외면했다.
참전의 후유증은 컸다. 10대 소년으로 입대해 20대 청년으로 군복을 벗은 이들은 공백기가 길어 대다수가 제때 복학을 못했고, 상급 학교 진학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직장을 갖는 데도 불리했고, 다른 국가 유공자들에 비해 별다른 혜택도 받지 못해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을 체험해야 했다.
이들은 初老(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어서야 뒤늦게나마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6년 창립한 ‘6·25 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이하 소년병 전우회·회장 朴泰承)가 그 구심점이다. 6·25에 참전했던 소년 소녀 병사들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추모 사업을 진행하고, 국가 유공자로서 정당한 예우를 받겠다는 것이 전우회 결성의 주목적이다.
소년병 전우회가 생긴 뒤로도 오랫동안 소녀병들의 존재는 묻혀 있었다. 심지어 朴泰承(박태승·76) 전우회장조차 6·25 당시 참전했던 소녀 병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고 한다.
대구시 동성로에 있는 소년병 전우회 사무실에서 만난 박 회장은 회원들의 병적 증명서를 모아 묶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 등재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되는 10여 명의 전우 회원들, 그녀들이 지금은 70대 할머니로 늙은 그 옛날의 10대 소녀병들이다.
<군번 91050, 이수행 할머니. 군번 91068, 이효각 할머니. 군번 91073, 문인순 할머니.>
이 기사는 1950년 8월 30일, 한날한시에 제주에서 해병 4기로 입대했던 이 세 할머니들의 이야기이다.
적의 심장에 총탄을 명중시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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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 4기 남자 동기와 함께. 맨 앞에 앉은 소녀가 이수행 씨다. |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남자도 아닌 가냘픈 여자아이가, 그것도 해병대에 입대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나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거지요. 아니, 지역도 잘못 타고난 건가? 하지만 전혀 억울하거나 후회스럽지는 않습니다. 아마 지금 다시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온다 해도 나는 서슴없이 총을 들었을 거예요.”
6·25 발발 당시 우리 해병대 병력은 고작 300여 명에 불과했다. 개전 초기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의 공세로 병력 증강이 다급해진 국군은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해병대를 모집했다. 그렇게 모인 해병 3·4기가 3000여 명, 해병 4기 가운데 126명이 여성이었다.
―아무리 절박한 전시 상황이라지만 병역법까지 어겨 가며 어린 소녀들을 입대시킬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글쎄요,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짐작이지만, 아마 위에서 몇 명을 모집하라는 지령이 내려왔겠죠. 하지만 인원이 안 차니까 징집 대상도 아닌 소년들까지 데려가고, 그래도 부족하니까 여성들, 소녀들까지 입영시키지 않았을까요?”
해병 4기 중에는 탤런트 고두심 씨의 오빠 고두성 씨도 끼어 있었다. 그러니까 고두성 씨는 이수행 씨와 진해에서 훈련을 같이 받은 해병대 전우, 동기인 셈이다.
“3년 전쯤 해병대 전우회가 주최한 어느 모임에 고두성 씨가 동생인 고두심 씨랑 함께 나와 의미 있는 물건을 보여 주었어요. 호랑이 그림에 刺繡(자수)로 ‘必勝(필승)’이란 단어를 새겨 넣은 타월 크기의 천이었는데, 한 땀 한 땀 무려 1000명을 헤아리는 동네 분들이 참여해 수를 놓아 주었대요. 반드시 싸워 이기고, 무사히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이 담긴 천이었죠. 고두성 전우는 군대 생활 내내 그 천을 부적처럼 허리에 감고 살았대요. 고두심 씨는 그날 50년 넘게 친정에서 보존해 왔던 태극기를 공개했는데, 거기에는 오빠인 고두성 전우가 입대하기 전에 쓴 ‘忠誠(충성)’이란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더군요.”
입대 무렵 이수행 씨는 제주 신성여중 3학년 진급을 앞둔 꿈 많은 소녀였다. 제주도엔 직접적인 피해가 미치지 않았지만, 귀동냥으로 듣는 뒤숭숭한 소문에 학생들은 공부에 집중을 못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런 어느 날 군복을 입은 남자가 학교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여학생들도 해병으로 입대해 적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몇몇 교사들도 떠밀다시피 학생들을 부추겼다. 하지만 모두들 주춤주춤 남의 눈치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학생이 없었다.
“그때 무슨 용기가 솟구쳤던지 내가 앞장서 군에 가겠다고 나섰어요. 철모르던 시절이라선지 그 순간 죽음 따위는 결코 두렵지 않았죠. 오직 적개심에 불타 내 나라, 우리 강산을 동족의 피로 물들인 빨갱이들의 심장에 총탄을 명중시키고야 말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뜻을 같이하겠다는 여학생이 열 명 남짓 나왔어요. 물론 겁에 질려 안 가겠다고 버티면서 우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았죠.”
그렇게 제주 일대에서 모인 여자 해병대원이 모두 126명이었다. 여교사도 몇 있었다. 17세 미만의 소녀들은 30~40명을 헤아렸던 걸로 이수행 씨는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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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자 교습을 마치고 전우들과.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수행 씨. |
왜 우리에게는 총을 주지 않는가
―그렇게 인민군들을 증오했나요? 혹시 가족 가운데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분이라도 계셨나요?
“친오빠가 4·3 사건의 희생자였어요.”
4·3 사건이란 광복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를 진압한 사건이다. 토벌대와 인민 유격대의 충돌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적지 않게 희생돼 최근 들어 정부에서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럼 오빠 분이 좌익 세력에 의해 돌아가신 건가요?
“아뇨, 토벌대에 의해서였죠. 순전히 모략과 오해로 인해서였어요. 우리 오빠는 그야말로 무고하고 억울한 희생자였어요.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런 경우 열 중 아홉은 가해자, 즉 토벌대나 우리 국군을 증오할 것 같은데, 왜 그 증오의 대상이 인민군이었나요?
“원망을 왜 안 했겠어요. 하지만 거슬러 생각하면 결국 그 모든 일들이 빨갱이들로 인해 일어난 비극 아닌가요.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는 빨갱이들이었잖아요. 결국은 그들이 우리 오빠를 죽인 가해자라고 믿었던 거죠.”
1950년 8월 3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입대식을 치른 126명의 여자 해병대원들은 해군수송선 LST를 타고 눈물로 배웅하는 부모 형제들을 뒤로한 채 제주항을 떠나 이튿날 진해에 입항했다.
그로부터 40일간의 신병 훈련이 시작되었다. 남자 대원들 못지않은 혹독한 훈련이었다. 사격과 총검술, 포복과 유격 훈련 등등. 땡볕 아래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호된 기합도 받았다. 이윽고 훈련소 생활이 모두 끝났을 때는 어느 정글이나 사막에 던져지더라도 싸워 이겨낼 것 같은 강인한 女戰士(여전사)의 모습으로 거듭나 있었다고 한다.
“도중하차한 낙오병들도 있었어요. 50명의 여자 대원들이 집에 보내 달라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나 결국 엉덩이에서 불이 나도록 ‘빳따’를 맞고 귀가 조치가 내려진 거죠. 물론 나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머지 76명의 여자 해병대원들은 이제나저제나 출전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군들은 모두 후방에 남고 3·4기생 남자 대원들만 일선으로 나가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물론 戰死(전사)할 확률이 줄어들었다며 반기는 전우들도 없지 않았지만 이수행 씨는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정말 아쉬웠어요. 내 손으로 꼭 적의 심장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는데…. 그 뒤로도 늘 목마르게 전투 기회가 주어지길 바랐지만 끝내 그런 기회는 오질 않았죠. 나뿐만 아니라 우리 여군들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벚꽃 피고 질 무렵에 늘 눈물 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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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복에 해군 모자를 쓰고. 맨 오른쪽이 이수행 씨. 한복 차림 여자는 함께 입대했던 교사 출신 동기생. |
1951년 5월 10일, 이수행 상병은 제대 명령을 받았다. 내심 복무 기간을 연장하거나 직업 군인으로 말뚝을 박고 싶었지만, 군대에서, 그것도 戰時(전시) 상황에서 개인의 의사에 무슨 배려가 따르겠는가. 8개월 10일 동안의 군 생활을 마치고 그녀는 몇몇 동기들과 함께 제주로 가는 함정에 올랐다. 그때쯤엔 전쟁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歸路(귀로)에 올랐다.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출처는 吳子兵法(오자병법)인데 <亂中日記>(난중일기)에 보면 李舜臣(이순신) 장군께서 즐겨 쓰신 말씀이죠. 나도 정말 그랬습니다. 목숨을 국가에 내맡겼다는 각오로 군 생활을 해서인지 아무 탈 없이 제대할 수 있었죠.”
―전역 이후로는 군대와 무관한 생활을 하셨나요?
“휴전 이후 스물두 살 때 시험을 쳐 해군본부 군무원으로 들어갔어요. 다시 진해에서 4년 남짓 근무했죠. 소속 부서는 교재창이었는데, 전술이며 통신 기술 등 해군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 지식을 담은 책자들을 분류해 함대로 보내는 일이 주 업무였습니다. 거기서 만난 해군 장교와 결혼했고,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뜬 뒤에는 대구의 미군부대에서 14년 동안 일했으니 이만 하면 나도 군대 체질 아니겠어요? 우리 아들이 가톨릭 사제인데 군종 신부로 10년간 복무했으니 남편까지 포함해 ‘군인 가족’이라 해도 그리 어색하진 않겠군요.”
―군 복무를 하던 소녀 시절, 군무원으로 일하던 처녀 시절에도 봄이면 진해에는 벚꽃이 만발했었나요?
“그럼요, 지금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질 때면 그 시절이 그리워 눈물이 난답니다. 벚꽃 필 무렵에는 손잡고 가로수 길을 산책하던 첫사랑이 그립고, 바람에 날려 지는 벚꽃을 보면 그 옛날 전선으로 나갔다가 사망 통지서로 돌아왔던 소년병들의 목숨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것만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합니다. 내 첫사랑요? 교재창에서 일할 때 남편 이전에 플라토닉 러브를 나눈 남자가 있었어요. 이름은 쓰지 마세요. 별 넷으로 예편했죠. 해군 참모총장까지 지내셨고….”
그렇게 말끝을 흐릴 때 이 곱게 늙은 할머니는 어느새 세월을 훌쩍 가로질러 10대, 20대 시절로 되돌아가 있는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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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 4기 동기생들끼리 찰칵. 저 소녀가 그 소녀 같고, 그 소녀가 이 소녀 같아 누가 누구인지 헷갈려 동기들끼리도 이견이 있는 단체 사진. |
한번 전우는 영원한 전우
주민번호 330214-284××××, 李孝珏(이효각·75) 씨. 그녀는 병적 증명서에 제대 날짜가 1951년 7월 12일로 기록되어 있다. 입대 날짜가 같은 동기생 이수행 씨보다 두 달 정도 길게 현역병으로 군 복무를 한 셈이다.
―전역 일자가 동기생들보다 두 달이나 늦은 이유가 뭔가요?
“글쎄요, 영문도 모르는 채 입대했던 것처럼 그 전후 사정은 나도 모릅니다. 누가 설명해 준 일도 없고요. 나는 해군본부 정훈감실에 근무했는데, 그쪽 사정이 내가 그때까지는 필요했었나 보죠. 아무튼 그 점에 대해서 불만은 없습니다.”
15세기 초 영국과의 백년전쟁으로 프랑스가 위기에 빠졌을 때 “조국을 구하라”는 神(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전쟁터로 달려간 오를레앙의 소녀 잔 다르크. 입대 무렵 이효각 씨 역시 聖女(성녀) 잔 다르크와 비슷한 나이였으나 잔 다르크처럼 신의 계시를 받고 무기를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해병대 4기 여자 대원들 가운데서 조금은 남다른 입영 배경을 갖고 있었다.
“126명의 대원들 중엔 육지 사람이 여섯 명 섞여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물론 모두 제주 여자들이었죠. 공교롭게도 그 여섯 명 모두가 평안도 출신이었어요. 이북 공산 치하에서 살다가 목숨 걸고 월남했던 사람들이죠. 우리 집은 평안북도 영변이었는데 식구들이 시차를 두고 차례로 38선을 넘어와 뿔뿔이 흩어져 지내다가 한곳에 모여 살았습니다. 오빠는 직업 군인으로, 당시 인천 기지사령부에서 복무하고 있었고요. 우리 가족은 전쟁이 나자 인천 송도에서 군인 가족들을 태운 LST에 승선해 부산과 진해를 거쳐 제주 어느 여관에 묵게 됐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거기서 소집영장 비슷한 것을 받았어요. 졸지에 영문도 모르고 군에 가게 된 거죠.”
이효각 씨 가족은 분단국가의 실향민이 아니라면 겪을 수 없는 드라마틱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국군이 되어 이북까지 밀고 올라가고, 미처 월남하지 못해 이북에 남았던 그녀의 시동생은 인민군으로 남하했다가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던 중 석방돼 형제가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된 것. 전쟁은 때로 그렇게 한 가족의 삶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년병과 소녀병에 대한 예우 문제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소녀 병사 출신으로서 그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듯, 한번 전우는 영원한 전웁니다.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쳤는데도 그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렵게 살아가는 옛 전우들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미어져요. 국방부는 미성년자 징집 자체가 사실상 불법 행위였음을 시인하면서도 현행 법체계로는 국가 유공자로 우대할 길이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죠. 인권의 사각지대인 북한에서조차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총부리를 마주하고 싸운 인민군 소년병들을 혁명 유공자로 격상시켜 예우해 주고 있는데 말입니다. 현행법상 곤란하다면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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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행 씨와 이효각 씨의 병적 증명서. |
나를 키운 건 8할이 해병대 정신
주민번호 330113-293××××, 文仁順(문인순·74) 씨. 그녀는 제주여중 2학년에 다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병대 군복을 입게 되었다.
“이북 출신 체육 선생님이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예외 없이 군에 가야 한다면서 거의 강권하다시피 등을 떠밀었어요. 그즈음 끔찍했던 4·3 사건을 겪으면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生死(생사)가 뒤바뀔 수 있다는 걸 아이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싫어도 감히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였죠. 나를 포함한 우리 학교 간부 학생들은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부모 형제와 헤어져 진해로 가게 됐습니다. 막내딸을 전쟁터로 보낸 우리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어요.”
총을 들고 적과 싸울 각오를 다지며 가게 된 군대였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펜을 잡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군본부 인사처에서 병사들의 복무기록 카드를 정리하는 일을 맡게 된 것.
“이왕 군에 왔으니 적과 싸우고 싶어 묵호(현재의 동해시) 경비사령부로라도 보내 달라고 떼를 써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병영 생활은 그 뒤로 삶의 고비 고비마다 나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 역할을 해 주었죠. 나를 키운 건 8할이 해병대 정신, 나머지 2할은 내 고향 제주도의 바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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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 4기 출신 할머니들이 까마득한 후배들의 초청으로 해병부대 연병장을 찾았다. 맨 앞에 선 이가 이수행 씨. |
“나 역시 그 점이 안타깝습니다. 해병대 여자 동기들을 만나 그 문제를 화제에 올려 본 적이 있는데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어요. 거의 대다수 동기들이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았더군요. 하긴 나도 시집갈 때 부끄러워서 차마 그 얘기를 꺼내지 못했었죠. 부끄럽기보다는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세상에 내세울 만한 일인데 말입니다.”
교육자 남편을 만나 아들 하나, 딸 여섯을 낳아 기르면서 해병대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아온 문인순 씨. 그녀는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군복을 입고 난감해했던 군대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지난 7년 동안 해병대 장병들의 피복을 무료로 수선해 주는 봉사 활동을 해 왔다. 자기 돈을 써 가면서 말이다. 2001년부터는 제주에서 맨 처음으로 ‘독도 수호대’에 가입해 독도 지킴이 역할도 하고 있다. 4년 전에는 문학소녀 시절부터 써 모은 詩(시)들을 추리고 솎아 <짧고도 긴 세월>이란 제목의 시집으로 묶어냈다.
“우리는 불행하고 불운한 세대였어요. 나라에 충성하려면 부모 가슴에 못 박으며 총을 들 수밖에 없었고, 부모에게 효도하려면 나라를 저버리고 병역을 기피해 도망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니까요. 그런데도 저 쓰라린 한국전쟁 당시 우리 소년 소녀 병사들은 累卵(누란)의 위기에 놓인 내 조국 대한민국을 구하겠다며 펜을 집어던지고 총을 선택했던 겁니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들도 있는 거니까요.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정부가 우리의 절실한 목소리에 귀를 좀 기울여 줬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