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마가 넓고 입이 크며, 눈은 유성과 같고 목소리는 큰 종과 같았다”(제자 이시헌)
⊙ “지금은 기력이 점차 쇠하여 몇 달 사이에 이빨이 빠진 것이 셋이나 됩니다”(50세 때 다산의 편지)
⊙ “이제는 머리털이 전혀 없으니… 빗질하고 머리 감는 수고도 없고”(‘노인일쾌사’)
⊙ “두 잇몸 오래되자 이미 굳어서 / 부드런 살 자못 능히 끊을 수 있네”
정민
1961년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동 문학박사 /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문헌과해석사 사장 역임. 現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 / 저서 《다산선생지식경영법》 《한시미학산책》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다산 증언첩》 《파란: 정민의 다산독본》 《다산과 강진 용혈》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다산의 일기장》 등. 지훈국학상(2012년), 월봉학술상(2015년), 백남석학상(2020년), 한국가톨릭번역상(2021년), 롯데출판문화대상(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선정 ‘한국의 가장 지혜로운 책’ 대상(2025년)
⊙ “지금은 기력이 점차 쇠하여 몇 달 사이에 이빨이 빠진 것이 셋이나 됩니다”(50세 때 다산의 편지)
⊙ “이제는 머리털이 전혀 없으니… 빗질하고 머리 감는 수고도 없고”(‘노인일쾌사’)
⊙ “두 잇몸 오래되자 이미 굳어서 / 부드런 살 자못 능히 끊을 수 있네”
정민
1961년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동 문학박사 /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문헌과해석사 사장 역임. 現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 / 저서 《다산선생지식경영법》 《한시미학산책》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다산 증언첩》 《파란: 정민의 다산독본》 《다산과 강진 용혈》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다산의 일기장》 등. 지훈국학상(2012년), 월봉학술상(2015년), 백남석학상(2020년), 한국가톨릭번역상(2021년), 롯데출판문화대상(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선정 ‘한국의 가장 지혜로운 책’ 대상(2025년)

- 새 정약용 표준 영정. 남양주시의 의뢰로 2025년 권희연·한명욱 교수가 그렸다.
그간 다산의 초상화는 여러 차례 새로 그려졌다. 여러 해 전 김호석 화백이 그린 돋보기를 쓴 다산의 영정이 이목을 끌더니, 최근에는 남양주시에서 권희연·한명욱 교수의 그림으로 새로 제작한 다산의 표준 영정이 발표되었다. 옛 기록 속 다산의 실제 외모는 어땠을까?
지난 2018년 3월 23일, 강진 백운동에 갔다가 동주(洞主) 이승현 선생을 통해 《다옹서독(茶翁書牘)》이란 표제의 필사본 1책을 보았다.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편지 10통을 서체까지 그대로 본떠서 베껴 둔 책자였다. 이 중에는 원본이 남은 것 외에, 원본이 사라진 것도 세 통이나 들어 있었다.
“외모가 아름답고 기운이 호방”
2009년 김호석 화백이 그린 정약용 영정.첫 면에는 1847년 봄에 인당(堂)에서 쓴 서문격의 글이 실려 있다. 글은 다산초당의 막내 제자인 백운동의 이시헌(李時憲·1803~1860년)이 짓고 쓴 것이다. 글씨는 이시헌의 3남 이복흠(李復欽·1839~1908년)이 베껴 쓴 것으로 전한다.
〈탁옹(籜翁·다산의 별호)은 일찍부터 문장으로 명망이 높아 예원에서 환히 빛났다. 중도에 나쁜 운수를 만나 강담(江潭)에서 초췌하게 지내더니, 안개구름과 모래사장 새들의 사이에서 문장이 더욱 이루어지고 기리는 명망이 더욱 높아졌다. 공은 이마가 넓고 입이 크며, 눈은 유성과 같고 목소리는 큰 종과 같았다. 외모가 아름답고 기운이 호방하며, 언론이 시원스럽고 풍신이 해맑아서, 붓을 잡아 먹물에 적시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무릇 입으로 드러나고 눈썹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이 시나 문장이 아님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만 해도 붓을 휘두르면 나는 것 같았고, 비록 짧은 척독이라도 해타(咳唾)가 옥처럼 흩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필법 또한 다시금 살아 움직여 아름다우면서도 윤기가 흐르니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아낄 만하게끔 하였다. 끝에 자이당필법(自怡堂筆法)을 첨부하여 사모하는 뜻을 부친다. 정미년(1847) 2월 인당(堂)에서 쓰고 짓다. [원주후인 인장]
籜翁早以文章宿望, 燀爀藝苑. 中遘否運, 悴於江潭. 煙雲沙鳥之間, 文章益成, 譽望益尊. 公廣顙哆口, 眼如流星, 聲若洪鐘, 貌偉而氣豪, 言論磊落, 風神蕭朗, 不待操毫吮墨, 凡形於口, 動於眉睫者, 無非詩也文也. 至若酬人寒暄, 揮翰如飛, 雖片言尺牘, 無非咳唾散玉, 筆法亦復流動媚潤, 令人可敬可愛. 尾附自怡堂筆法, 以寓羹墻. 丁未殷春, 書撰于堂. [原州后人]〉
글 속 다산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특별히 상세하다. 이마가 넓고 입이 컸다.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목소리는 우렁찼다. 외모가 아름다우며 기상이 호방하였다. 말이 시원스럽고 풍신(風神)이 해맑았다.
이시헌과 다산
이 글을 지은 이시헌은 11세 나던 1813년에 처음 동암으로 다산을 찾아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당시에 직접 보았던 다산의 외모를 기억해서 이렇게 묘사해 둔 것이다. 특별히 이마가 넓고 입이 크며 눈이 부리부리하고 목소리가 종소리 같았단 말이 눈길을 끈다.
《다옹서독》의 서문격으로 쓴 이 글은 역시 백운동 문중에 전해진 《신첩(神帖)》이란 필사본 적바림 속에 한 번 더 등장한다. 그런데 《신첩》 속에 실린 글은 위 글보다 내용이 한층 더 자세하다. 이 글 속에는 “내가 어려서 책상자를 지고 다산의 동암에서 공께 절을 올리고 강학의 말석에 참여한 것이 여러 해였다(余以童年負笈, 拜公于茶山之東菴, 周旋杖屨之末有年)”는 내용과, “예전 내 돌아가신 아버님과 정의가 도타워 10년간 주고받은 편지가 몇 통 정도가 아니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없어지고 흩어져서 남은 것이 몇 안 된다. 오래될수록 더 없어질까 염려되어 합하여 한 권으로 만들었다. 을유년(1825) 이후의 편지는 모두 내게 답장하신 것이다(昔我先君情好篤厚, 十載往復, 不啻累牘, 而歲久遺散, 見存無幾. 恐愈久愈失, 合成一. 乙酉以後書, 皆辱答不佞者也)”와 같은 내용들이 중간중간 추가되어 있다. 그러니까 《다옹서독》의 서문은 이복흠이 《신첩》에 실린 부친 이시헌의 글을 간추린 것이다.
실제로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친필 편지는 여러 통이 실물로 전한다. 남아 있는 실물 편지는 필자가 《강진의 백운동 별서정원》(글항아리, 2015년)에서 모두 소개한 바 있다.
10. 50대 중반에 대머리 합죽이가 된 사연
2022년 12월 7일,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의 콜로키움에 초청을 받아 내 책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김영사, 2022년)로 발표할 기회를 가졌다. 조금 일찍 도착해 시간 여유가 있길래 기독교박물관에 들러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서양 선교사 테렌스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소개한 설명 사진 아래 한눈에 알아볼 다산의 친필 시고(詩稿)가 맥락 없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겹쳐진 《기기도설》 사진 때문에 원고의 뒷부분이 가려져 전체 글은 볼 수가 없었다. 아주 잘 쓴 다산의 친필이었는데 처음 보는 자료였다.
박물관의 한명근 선생께 바로 전화를 해서 해당 사진을 보인 뒤, 원본이 있는 곳을 물었다. 그이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가려지지 않은 온전한 사진을 보내 줄 수 있느냐고 묻자,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찾아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주일 뒤인 12월 13일, 한 선생이 사진을 찾았다며 온전한 상태의 것을 내게 보내 주었다. 나는 환호작약했다. 원본의 소장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전국 박물관 소장품 검색 사이트인 ‘e뮤지엄’을 검색하다가 원본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은 것 단지 아홉뿐’
다산의 ‘낙치시’.시는 제목이 ‘차운(次韻)하여 한퇴지의 낙치(落齒) 시에 화답하다(次韻和韓退之落齒)’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낙치’ 시를 차운하여 이가 몇 개 남지 않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내용이었다. 전문을 번역하여 소개하면 이렇다.
〈이 빠진 것 어느새 셀 수도 없어
내 차라리 남은 이를 헤아리겠네.
남은 것 단지 아홉뿐이다 보니
바야흐로 흔들림이 그치질 않네.
괵(虢)나라가 망하면 우(虞)가 그다음
거(莒) 멸하면 연(燕)나라도 그치잖으리.
말하려니 목구멍이 이미 겁먹고
웃으려다 입술이 먼저 부끄러.
이빨이란 음식 먹는 도구다 보니
못 먹으면 어이해 죽지 않겠나?
나처럼 이빨 빠진 사람 만나면
마치 지기 같아서 마음 논하네.
독화살 맞은 듯이 이가 시리고
급한 침에 찬물을 마심과 같네.
감히 홀로 우뚝 섬은 바라지 못해
나란하던 예전 생각 혼자 해 본다.
소 되새김질 부러워도 같기 어렵고
황새 꿀꺽 삼킴 같음 부끄러워라.
어근버근 아래 위가 맞지 않아서
남은 것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흙 무너지듯 하는 기세 막지 못하니
어지러워 기강조차 아예 없구나.
흘린 밥알 소반 위에 떨어져 있고
숨은 살점 손가락으로 발라낸다네.
여러 물건 뒤섞어 쓰다가 보니
오직 다만 위장만을 믿을 수밖에.
들 늙은이 치아 대개 온전하거니
부여함이 어찌 저만 저리 두텁나.
맵고 비린 음식 절로 빌미 됐으니
하늘이야 진실로 공평하다네.
아아! 이 일을 어찌 하리오
흰 머리는 예로부터 기뻐한 바라.
갑작스레 눈먼 것은 주희(朱熹)가 있고
두보(杜甫)는 일찍이 귀가 먹었지.
이미 그른 이빨이야 어이 논하랴
두 아들이 그리 될까 걱정한다네.
다수(茶叟)
齒落旣無數, 吾寧計存齒.
存者只九箇, 動搖方未已.
虢亡虞卽次, 莒殘燕不止.
欲語喉已怯, 將笑脣先恥.
齒者食之具, 去食寧不死.
每遇同落人, 論心若知己.
毒箭是酸風, 急砭乃凉水.
未敢冀砥屹, 空自憶櫛比.
牛齝羨難同, 鸛呑愧恰似.
齟齬不相値, 存者無用矣.
土崩勢莫遏, 旣亂蔑綱紀.
漏粒落滿盤, 隱肉剔須指.
凡物用混沌, 胃釜渠唯恃.
野老齒盖完, 賦予奚厚爾.
葷腥自作孼, 皇天固一視.
吁嗟奈之何, 白髮古所喜.
偏盲有元晦, 早聾者子美.
已誤齒奚論. 所懼在二子.
茶叟〉
50대 중반에 영구치 3분의 2가 빠져
일반적으로 성인의 영구치가 총 28개이고, 사랑니를 포함하면 32개이다. 다산은 이 시를 쓸 당시 28개의 영구치 중 3분의 2가 빠지고 남은 것이 달랑 9개뿐이었다. 쓴 시점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필체나 정황상 52~55세 때인 1814~17년 사이에 쓴 시이다. 앞서 제자 이시헌의 다산의 잘생긴 외모에 대한 묘사가 일순 무색해진다. 다산은 이때 이미 아홉 개 남은 이빨로 입 벌리기가 부끄러운 합죽이 노인이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묘사가 재미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저도 몰래 움찔하게 되고 입술을 먼저 오므리게 된다고 썼다. 말이 헛나오기 때문이다. 남은 이가 몇 개 안 되다 보니 찬물이라도 마시면 독화살에 쏘인 듯 이가 시리다. 소처럼 우물거려도 되새김질할 도리가 없어 황새처럼 고개를 들고 꿀꺽 삼킬 뿐이다. 그나마 남은 9개도 아래위가 맞지 않아 씹는 데 아무 도움이 못 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만 된다. 밥 먹을 때마다 밥상에는 흘린 밥알이 낭자하고, 뼈 사이의 고기조차 손가락으로 발라내어 먹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낙치로 인해 일상이 온통 무너진 사정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이빨 빠진 이를 만나기라도 하면 마치 지기를 만난 듯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체험을 나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40세에 강진에 유배 와서 이미 17년이 되던 시점이었다. 부실한 섭생(攝生)에 간단없이 지속된 학문적 강행군으로 이뿌리가 흔들려 치아 건강에 심각한 경고등이 켜졌던 것이다.
11. ‘두동치활(頭童齒豁)’이란 표현이 나오는 편지들
다산이 신영제에게 써 준 ‘증신영로’.다산이 초당을 찾아왔던 영남 선비 신영제(申永躋·1781~1837년)에게 써 준 ‘증신영로(贈申永老)’란 편지가 있다. 문집에 누락되고 없는 이 편지는 현재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글씨는 다산의 친필이 아니고 당시에 베껴 써 둔 것이다. 편지 내용이 워낙 길어 관련 부분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전문과 번역은 필자의 《다산증언첩》(휴머니스트, 2017년) 620면에 모두 실려 있다.
〈몇 해 뒤 내가 다산에 초당을 얽어, 이제 또 10여 년이 되었다. 머리는 벗겨지고 이는 빠져서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後數年, 余結廬于茶山, 今又十有餘年. 頭童齒豁, 生意索然.〉
원문이 ‘두동치활(頭童齒豁)’인데, 머리는 민둥산이 되고 이빨은 여기저기 빠져서 몇 개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편지는 1817년 4월 27일에 다산초당에서 쓴 것이다. 이때 다산은 합죽이 노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머리까지 벗어진 대머리 상태였다.
기실 다산의 낙치는 50세 때인 1812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1812년 연말에 흑산도의 중형(仲兄) 정약전(丁若銓)에게 보낸 편지 ‘답중씨(答仲氏)’에서, “지금은 기력이 점차 쇠하여 몇 달 사이에 이빨이 빠진 것이 셋이나 됩니다. 결심하여 문묵(文墨)을 사절하고 즐겁게 노닐며 날을 보내려고는 하지만, 매번 고개를 돌려 보면 이 때문에 서글퍼지곤 합니다(顧今氣力漸衰, 數月之間, 齒落者三. 決意謝絶文墨, 優游度日, 每回頭爲之悵然耳)”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백운동의 《다옹서독》 속에 전사(轉寫)된 편지 중에도 “저는 머리가 벗어지고 이빨이 빠져, 노쇠함이 다시 여지가 없습니다(戚末頭童齒豁, 衰朽無復餘地)”라 한 용례도 보인다.
같은 표현이 두 해 뒤인 1814년 1월 5일에 대둔사 승려 향암 제성(香庵 濟醒·1762~1830년 이후?)에게 보낸 편지에 다시 보인다. 다산의 서간문 6통과 증언(贈言) 한 통이 묶인 《다산기제성유나간독첩(茶山寄濟醒維那簡牘帖)》에 실려 있다. 이 간독첩에 대해서는 필자가 〈새발굴 《다산기제성유나간독첩》의 자료 가치〉(《문헌과해석》 99호, 2025년 봄, 345~360면)에 전문을 소개하였다. 현재 소장자를 알 수 없고, 문우서림의 김영복 선생이 예전 복사해 둔 것을 필자에게 제공해 주었다. 감사드린다.
“53세는 적은 나이가 아니다 보니…”
《다산기제성유나간독첩》 중 세 번째 편지.간독첩에 실린 6통 중 세 번째 편지는 이러하다.
〈제성 유나에게 답함
편지가 와서 새해에 평안하심을 알아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53세는 적은 나이가 아니다 보니, 나는 이제 머리가 더욱 벗어지고 이는 더 많이 빠졌습니다. 동갑인 그대도 또한 마땅히 그러하겠지요. 새해라 그리움이 배나 더 깊습니다. 공사(工事) 일은 마쳤다는 소식이 없으니, 깊이 근심하고 염려합니다. 갖추지 않습니다. 갑술년(1814) 1월 5일, 다산에서 알립니다.
사중(寺中)과 철우(鐵牛)가 보내온 산다유(山茶油)는 모두 숫자대로 받았습니다. 수룡(袖龍)이 보낸 백지(白紙)와 그 밖에 다른 사람의 보낸 것도 하나하나 그대로 도착했습니다. 정월 그믐날.
答醒維那
書來知新年平安爲慰. 然五十三非少算, 吾今頭益童齒益豁. 凡同甲者, 亦宜然. 新年思憶倍深. 役事告竣無云, 深所憂念. 不具. 甲戌元月五日, 茶山報.
寺中及鐵牛所送山茶油, 並依數耳. 袖龍白紙, 其他各人所送, 一一依到耳. 正月晦日.〉
1814년 1월 5일에 썼다. 하지만 인편이 마땅치 않았던지 바로 발송하지 못하고 있다가 정월 그믐날 다시 한 줄을 추기해서 보냈다. 다산과 제성 두 사람은 동갑으로 당시 53세였다. 이때 다산은 “머리는 더욱 벗어지고 이는 더욱 성글어졌다(頭益童齒益豁)”고 하여 탈모와 낙치가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더 진행된 사정을 적었다. 50세 때부터 빠지기 시작한 치아가 55세 즈음에는 고작 9개가 남아 있었다.
12. 1832년 작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6수에 보이는 다산의 사정
한편 다산이 70세 때인 1832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6수, 즉 노인이 되어 통쾌한 여섯 가지에 대해 읊은 시가 있다. 《다산시문집》 권6에 수록되었다. 이 가운데 제 1수가 대머리에 관한 내용, 제2수는 모두 빠지고 없는 치아에 관한 내용이다. 원 제목은 ‘노인의 한 가지 통쾌한 일 여섯 수. 향산[백거이]의 시체를 본받아(老人一快事六首. 效香山體)’이다. 시가 길어서 제 1수 중 뒷부분만 추려 읽는다.
〈이제는 머리털이 전혀 없으니
여러 가지 불편함 기댈 데 없네.
빗질하고 머리 감는 수고도 없고
백발의 부끄러움 또한 면했지.
빛나는 머리통이 박처럼 희니
둥근 머리 모난 발과 어울린다네.
북창 아래 시원스레 누워 있으면
솔바람 골수까지 시원하구나.
때에 전 말총으로 만든 두건은
포개 접어 상자 속에 넣어 둔다네.
평생토록 세속에 얽매이다가
이제야 쾌활한 선비 되었네.
今髮旣全無, 衆瘼將焉倚.
旣無櫛沐勞, 亦免衰白恥.
光顱皓如瓠, 員蓋應方趾.
浩蕩北窓穴, 松風洒腦髓.
塵垢馬尾巾, 摺疊委箱裏.
平生拘曲人, 乃今爲快士.〉
70세 때 다산은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가 되었다. 이제는 머리를 빗거나 감을 필요가 아예 없어졌다. 여름날 박처럼 흰 맨머리로 바람 드는 창 아래 누웠으면 골수까지 시원하고, 두건을 쓸 일도 없어 자재롭게 지낸다. 이것을 노인이 되면서 가장 통쾌한 일의 첫손으로 꼽았다.
“다 빠져야 그제야 득의롭다네”
두 번째는 다시 치아이다. 이것은 전문이다.
〈노인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이가 모두 빠진 것이 그다음일세.
반 빠지면 진실로 고통스럽고
다 빠져야 그제야 득의롭다네.
바야흐로 이빨이 흔들릴 때는
시린 통증 가시로 찌르는 듯해,
침 놓고 뜸을 떠도 시원치 않고
아파서 쑤실 때는 눈물이 났지.
지금은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밤새도록 편안하게 잠을 잔다네.
가시와 뼈만 모두 제거한다면
어육도 꺼릴 것 없이 먹는다.
잘게 썬 것 삼킬 수 있을뿐더러
큰 고깃점 능숙하게 먹을 수 있네.
두 잇몸 오래되자 이미 굳어서
부드런 살 자못 능히 끊을 수 있네.
이빨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즐기던 것 씁쓸히 못 먹지 않네.
소리 내어 두 잇몸 움직여 가며
호물호물 씹는 모습 부끄러울 뿐.
지금부턴 사람의 모든 질병이
사백네 가지를 못 채우겠네.
통쾌해라 의학 서적 가운데에서
치통이란 글자를 빼게 됐으니.
老人一快事, 齒豁抑其次.
半落誠可苦, 全空乃得意.
方其動搖時, 酸痛劇芒刺.
鍼灸意無靈, 鑽鑿時出淚.
如今百不憂, 穩帖終宵睡.
但去鯁與骨, 魚肉無攸忌.
不唯呑細聶, 兼能吸大胾.
兩齶久已堅, 頗能截柔膩.
不以無齒故, 悄然絶所嗜.
山雷乃兩動, 嗑嗑差可愧.
自今人病名, 不滿四百四.
快哉醫書中, 句去齒痛字.〉
과거 치통으로 고생하던 때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이빨이 하나도 없으니 통증도 사라지고, 잇몸이 딱딱해져서 부드러운 고기는 씹을 수도 있다고 자랑했다. 다만 이빨이 없어 씹을 때 잇몸이 과도하게 움직여 소리를 내며 호물호물 먹는 모습이 남 보기에 조금 민망하지만, 치통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만큼은 통쾌하기 그지없다고 썼다.
앞서 ‘낙치’ 시에서 다산은 두 아들이 걱정이라고 썼는데, 실제로 큰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년)의 《유산시집(酉山詩集)》(필사본 1책, 남양주시립박물관 소장)에 ‘낙치’ 시 연작 10수가 실려 있어 그 또한 낙치의 고통을 비껴가지 못했음이 확인된다. 53세 때 지은 시이다. 그도 아버지 다산과 같은 시기에 이가 많이 빠졌던 듯하다. 제8수에서 몇 개 안 남은 이를 “흡사 황량한 성에 성첩(城堞) 몇 개 남은 듯(恰似荒城數堞餘)”하다고 쓴 구절이 인상적이다. 다산의 제자 황상(黃裳·1788~1870년)도 《치원유고(巵園遺稿)》에 ‘낙치’ 시를 남겼다.
우연히 찾은 다산 친필의 ‘낙치’ 시 한 수가 여러 편지 속의 ‘두동치활’과 만나 한 편의 긴 글을 이루었다. 50대 중반에 완전한 대머리에 호물호물 잇몸으로 음식을 먹는 다산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제자 이시헌의 묘사나 여러 초상화 속에 남은 번듯한 다산의 외모와 자꾸 겹쳐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