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독일 천재 시인 실러, ‘방랑의 길… 나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김중식)
⊙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김중식)

- 독일의 천재 시인 실러(Friedrich von Schiller·1759~1805).
실러
인생의 봄에 벌써
나는 방랑의 길에 올랐다.
청춘의 아름다운 춤들일랑
아버지의 집에 남겨둔 채로
나의 유산과 소유의 모든 것들은
즐겁게 믿으며 버려버리고
가벼운 순례자의 지팡이를 들고
어린아이의 생각으로 길을 떠났다.
“나아가라.
뜨는 태양으로 인도해줄 길이
네 앞에 열려있다”는
강한 희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황금의 문에 이르거든
그 안으로 들어가라
그곳에서는 세속적인 것이
오히려 숭고하고, 영원해지리라”라는
어두운 믿음을 뒤로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와도,
나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찾던 곳, 또 원하던 곳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산들이 앞을 가로막고
강들이 발걸음을 얽매일 때에도,
심연 위에 길을 내고
급류 위에 다리를 만들며
그렇게 나는 나아갔다.
마침내
해 뜨는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기슭에 이르러
강이 나를 인도하리라 믿으며
강물에 내 몸을 맡겼다.
유희하던 강물은
그 위에 뜬 나를 대양으로 이끌어갔다.
하지만 내 앞에는 커다란 허공만 있을 뿐
바랐던 곳에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어떤 길도 그곳으론 가지를 않고
나의 머리 위의 저 하늘도
땅과는 한 번도 닿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은 결코 이곳일 수 없다.
Der Pilgrim
Friedrich von Schiller
Noch in meines Lebens Lenze
War ich, und ich wandert’ aus,
Und der Jugend frohe Ta . .nze
Liess ich in des Vaters Haus.
All mein Erbteil, meine Habe,
Warf ich fro . .hlich glauben hin,
Und am leichten Pilgerstabe
Zog ich fort mit Kindersinn.
Denn mich trieb ein ma . .chtig Hoffen
Und ein dunkles Glaubenswort,
“Wandle,” rief’s, “der Weg ist offen,
Immer nach dem Aufgang fort”.
“Bis zu einer goldnen Pforten
Du gelangst, da gehst du ein,
Denn das Irdische wird dorten
Himmlisch, unverga . .nglich sein.”
Abend ward’s und wurde Morgen,
Nimmer, nimmer stand ich still,
Aber immer blieb’s verborgen,
Was ich suche, was ich will.
Berge lagen mir im Wege,
Stro . .me hemmten meinen Fuss,
U . . ber Schlu . . nde baut ich Stege,
Bru . . cken durch den wilden Fluss.
Und zu eines Stroms Gestaden
Kam ich, der nach Morgen floss;
Froh vertrauend seinem Faden,
Warf ich mich in seinen Schoss.
Hin zu einem grossen Meere
Trieb mich seiner Wellen Spiel;
Vor mir liegt’s in weiter Leere,
Na . .her bin ich nicht dem Ziel.
Ach, kein Weg will dahin fu . . hren,
Ach, der Himmel u . . ber mir
Will die Erde nicht beru . . hen,
Und das Dort ist niemals h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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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길. 인생은 순례의 연속이다. 존재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전진하는 것이 순례다. |
존재(혹은 내면)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전진하는 것, 부재를 잊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운 고통이며 심한 타락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순례한다는 것, 벽의 모서리나 돌쩌귀에 살갗이 긁히는 세상과의 맞섬이다.
18세기 독일의 천재 시인이자 괴테와 더불어 독일문학을 대변하는 실러(1759~1805)에게 순례는 ‘저녁이 되고 또 아침이 와도, 한 번도 멈춘 일이 없는’ 삶이다. 멈추는 일이 없지만 ‘산들이 앞을 가로막고 강들이 발걸음을 얽매이게’ 한다. 그러나 쉼 없이 걸어가는 것, ‘강의 품속에 몸을 맡기는’ 것처럼 자신을 길 위에 묵묵히 맡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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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국내 개봉된 영화 〈연인들〉 포스터. 실러의 러브 스토리를 담았다. |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이별을 눈물로 대신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곁에 있던 사람이
먼 길 떠나는 순간,
사랑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져 간다 할지라도
그대 가슴속에 남겨진
그 사랑을 간직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실러 ‘진정으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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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드리히 실러가 쓴 시 ‘환희의 송가’. 베토벤이 훗날 이 시에 곡을 붙여 9번 교향곡 ‘합창’을 만들었다. |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처녀들이여,
우리 모두 감동에 취하고 빛이 가득한 신전으로 들어가자.
잔악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그대의 다정한 날개가 깃든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그렇다. 비록 한 사람의 벗이라도
땅 위에 그를 가진 사람은 모두.
그러나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자는
눈물 흘리며 발소리 죽여 떠나가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연의 가슴에서 환희를 마시고
모든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환희의 장미 핀 오솔길을 간다.
환희는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주,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벌레조차도 쾌락은 있어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선다.
-실러 ‘환희의 송가’ 중 일부
巡禮와 이탈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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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의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2007). |
이른 아침 교복을 입은 남자 아이가 뛴다 바로 뒤에 엄마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뛴다 텅 빈 동쪽에서 붉은색 버스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다 아직도 양수 안에 담겨 있는지 아이는 몸이 출렁거린다 십수 년째 커지는 아이를 아직도 자궁 밖으로 밀어내지 못했는지 여자의 그림자가 계속 터질 듯하다 그러나 때로 어두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니 때로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것이다 그림자는 몸을 밀며 계속 어둡다 깊다 무슨 상징처럼 부풀어 오른 검은 비닐봉지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림자와 함께 간다
-이원 ‘사막에서는 그림자도 장엄하다’ 전문
순례에는 목표가 없다. 목적이 내면적이라 해도 꼭 정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로 갔다가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 뱅글뱅글 돌 뿐이다. 삶의 긴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나보다, 너보다, 우리보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도 이 태양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나 단 한 번 이탈을 꿈꾼다. 별똥별이 되어 획을 긋고 싶다.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더라도. 김중식 시인의 첫 시집 《황금빛 모서리》(1993)에 나오는 서시(序詩)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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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식의 시집 《황금빛 모서리》(1993). |
난 원래 그런 놈이다 저 날뛰는 세월에 대책 없이 꽃피우다 들켜버린 놈이고 대놓고 물건 흔드는 정신의 나체주의자이다 오오 좆같은 새끼들 앞에서 이 좆새끼는 얼마나 당당하냐 한 시대가 무너져도 끝끝내 살아 남는 놈들 앞에서 내 가시로 내 대가리 찍어서 반쯤 죽을 만큼만 얼굴 붉히는 이 짓은 또한 얼마나 당당하며 변절의 첩첩 山城 속에서 나의 노출증은 얼마나 순결한 할례냐 정당방위냐 우우 좆같은 새끼들 아 면죄를 구걸하는 告白도 못 하는 씨발놈들아
-김중식의 ‘호라지좆’ 전문
南十字星,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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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민복의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6). |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 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함민복 ‘서울역 그 식당’ 전문
신현림 시인의 ‘나의 싸움’은 순례의 길에서 만나는 투쟁의 이야기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상의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고독에 지쳐 쓸쓸함이 되는 절망, 마음을 폐가(廢家)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이 싸움은 휴전이 없다. 타협은 사망선고, 가슴을 까맣게 태우더라도 싸워야 한다. 시집 《세기말 블루스》(1996)에 실렸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신현림 ‘나의 싸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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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경의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2005). |
그런데 지고 가는 물동이에 빛이 있다. 물이 우려내는 빛이다. 햇빛이 내려와 물에 찰랑인다. 별빛이 내려와 물에 반짝인다. 그 빛을 마신 남자의 아이들은 물이 된다. 빛이 물이 되고 그 물이 다시 빛이 된다. 순례의 길은 끝이 없다.
물지게를 지고 지나가는 남자, 남방초길 십자성길 지나는 시간 없는 시간 속의 남자 지고 가는 물동이에 빛 있다 물이 우려내는 빛, 섬세한 빛 근육, 야자잎 드문드문 빛의 존재를 지우는데도 빛은 있다. 저 빛을 마신 남자의 아이들은 물이 되리라
-허수경 ‘물지게’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