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13〉

차 무역의 전통을 이은 광저우(廣州)의 ‘차술’, 중국의 하와이를 꿈꾸는 싼야(三亞)의 ‘야자술’

  • 글 : 모종혁 在 중국 경영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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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공명의 차술을 전수해 만든 샤오씨 차술
⊙ 사탕수수와 야자열매를 첨가한 과일주 야자술

牟鍾赫
⊙ 45세.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18세기 말 주장 변에 조성된 13행을 그린 기록화. 서구 여러 나라의 국기가 보인다.
매년 봄과 가을마다 중국 광둥(廣東)성의 성도 광저우(廣州)에는 전 세계에서 바이어들이 몰려든다.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무역박람회 ‘캔톤 페어(Canton Fair)’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캔톤 페어는 1957년 수출상품교역회로 처음 시작한 이래 지난해 가을까지 118회가 열렸다. 홍위병의 난동으로 대륙이 피폐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중단하지 않았다.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무역박람회답게 참여하는 기관과 기업 수가 엄청나다. 지난 118회에는 213개국에서 2만4700개의 기업이 참가했다. 성사된 거래액은 270억 달러에 달했다.
 
  광저우 정부는 매회 2주 정도 열리는 캔톤 페어를 위해 전문 전시장을 세웠다. 건축면적이 39만m2에 달하는 중국에서 가장 큰 광저우국제회의 전람센터가 그것이다. 한데 캔톤 페어는 이 전시장도 모자라서 회당 3기로 나누어 진행한다. 즉 1기는 국제관, 2기는 수출관, 3기는 종합관 식으로 운영한다. 그렇게 해서 회당 전시 규모는 117만m2에 이른다. 2007년부터 캔톤 페어는 명칭을 ‘중국수출입상품교역회’로 바꿨다. 수출입 쌍방박람회로 성격을 바꾸면서 독립된 전담부처가 참가 기관이나 기업의 유치, 심사, 등록 등을 철저히 관리한다.
 
  광저우는 3세기 때 이미 ‘넓은 고을’이란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중국 동남부에서 가장 큰 주장(珠江)과 베이장(北江), 둥장(東江)이 합류하는 삼각주에 위치한 ‘중국의 남대문(南大門)’이기 때문이다. 당대 말기에는 한 해 광저우에 입항하는 배가 4만여 척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다. 송대에 지금과 같은 도시 골격을 갖췄고, 명대 광저우 성곽의 길이는 10.5km였다. 청대에는 건륭제(乾隆帝)가 광저우를 ‘일구통상(一口通商)’의 항구로 지정하면서 국제적인 무역도시로 발돋움했다. 이는 오늘날 캔톤 페어의 시조격인 조치였다.
 
  실제 광저우의 경제력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광둥성은 중국 31개 성·시 중 GDP와 대외무역 규모가 1위를 차지한다. 2014년 광저우의 상주인구는 1308만명, 지역 내 총생산은 1조6706억 위안(약 300조7080억원), 대외무역액은 1306억 달러로 모두 중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이런 든든한 몸집을 내세워 광저우 주민들은 표준어인 푸퉁화(普通話)보다 광둥 사투리를 고집한다. 캔톤도 청대 광저우를 부른 광둥어의 영어 표기다. 당시 광저우의 ‘13행(十三行)’이란 상점이 중국의 모든 대외무역을 독차지했었다.
 
13행은 청대 유일하게 개방된 무역장터로 전 세계인이 몰려들었다.
  13행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명·청대의 대외무역정책을 살펴봐야 한다. 주원장은 세계제국 원(元)을 몽골초원으로 몰아낸 뒤, 1371년 해금(海禁·해안 봉쇄)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독자들은 명나라가 쇄국(鎖國)을 견지한 것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명은 결코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질 않았다. 주원장이 해금령을 내린 것은 해안가에 출몰해 노략질하던 왜구(倭寇)를 방비하기 위해서였다. 가마쿠라(鎌倉)막부 후기 상공업이 성장하면서 일본은 대외무역으로 눈을 돌렸다. 이에 중국에 무역 확대를 요구했지만, 명조는 조공(朝貢)무역만 허용했다.
 
  대부분의 지방 호족과 상인이 조공무역의 혜택을 보지 못하자 일탈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밀무역에 종사했고 일부는 해적이 됐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도 가담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훗날 대만(臺灣)을 거점 삼아 복명(復明)투쟁을 벌인 정성공(鄭成功)이다. 해금정책은 오히려 밀무역을 성행시켰고 왜구 단속에는 실패했다. 1567년 명조는 해금령을 대폭 완화했다.
 
  영락제(永樂帝)는 적극적인 해상전략까지 펼쳤다. 선단을 조직해 원정(遠征)에 나서도록 한 것이다. 그 책임자가 정화(靖和)였다. 정화는 색목인(色目人)의 후예로 이슬람교도였다. 환관이었지만 키가 컸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영락제는 원정을 통해 명의 국력을 만방에 떨치고 진귀한 이국 문물을 가져오도록 했다. 원정은 1405년에 시작해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동남아시아에서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까지 명의 깃발을 내리꽂았다. 이는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지나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반세기 이전에 거둔 쾌거였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은 중국의 대외 진출을 촉진하진 못했다. 오직 영락제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데 그쳤다. 영락제가 죽고 정화마저 항해 중 사망하자, 선단은 다시 출항하지 못했다. 15세기 말부터 세계사는 거대한 변혁이 일어났다. 바다를 장악한 나라가 서구의 패권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 그 첫 나라가 포르투갈이었다. 물론 왕좌를 스페인에 곧바로 넘겨줬지만 말이다. 1557년 포르투갈은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중간지점에 물자를 보급받을 항구가 필요했다. 이에 명의 고관대작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마카오를 조차(租借)받았다.
 
차 무역의 전통을 이은 차술의 고향 광저우(廣州)와 중국의 하와이를 꿈꾸는 싼야(三亞).
 
  13개의 상점으로 시작한 중국의 대외무역
 
  해금정책을 완화한 뒤 명은 지정 항구를 통해 포르투갈, 스페인, 일본 등과 활발히 교역했다. 명은 당시 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도자기, 차(茶), 비단 등을 수출했고 대가로 멕시코산 은을 받았다. 1573년부터 멸망하는 1644년 72년간 명은 막대한 무역 흑자를 냈다. 이 덕분에 매년 현재 가치로 1억 위안(약 180억원) 이상의 은이 명으로 유입됐다. 너무 많은 은이 들어오자, 명은 화폐제도를 은본위제로 바꿨다. 그래도 남아돌자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축조하고 각 도시의 성곽을 중축했다. 지금 남아 있는 베이징의 만리장성도 이때 쌓은 것이다.
 
  명조는 개방된 항구의 공행(公行)에게만 무역을 허가했고 세금을 납입하게 했다. 이는 청조도 마찬가지였다. 청조는 해금정책의 기조 아래 개방항구의 양행(洋行)을 통해서만 교역을 허락했다. 초창기에는 광저우, 푸젠(福建)의 장저우(漳州), 저장(浙江)의 닝보(寧波) 등 4곳의 항구를 개방했다. 서양 상인들이 가장 북쪽에 있는 닝보에 몰려들자, 1757년 청조는 광저우를 제외한 3곳의 항구를 폐쇄했다. 양광(兩廣) 총독의 건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서양 상인과 선박을 엄격히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광저우는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명대의 최대 수출품은 도자기였다. 청화백자(靑華白磁)는 유럽 황실과 귀족이 가장 선호한 사치품이었다. 중국산 도자기에 빵을 놓고 수프를 부어서 식사하는 게 당시 유럽 부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중국 도자기로 집안을 꾸미느냐에 따라 가문의 부귀 순위가 결정됐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유럽도 청색의 코발트 물감으로 무늬를 넣어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1709년 독일 작센지방의 마이센(Meissen) 가마에서 중국산과 흡사한 도자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마이센의 기술은 곧 유럽 전역에 퍼졌다. 유럽인들은 더 이상 중국산 도자기가 필요 없게 됐다.
 
  하지만 차는 달랐다. 수백 년 동안 중국산 차를 유럽에서 이식해 재배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도자기가 유럽에서도 생산되면서 차 문화가 더욱 발전했다. 18세기 초 영국 부유층에서는 화려한 찻잔으로 차를 마시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이는 일반 대중에게도 차츰 번졌다. 도시 곳곳에서 차관이 문을 열었다. 마침 영국산 도자기가 싼값에 보급되면서 차는 곧 영국인의 국민 음료가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청대의 최대 수출품은 차였다. 인도에서도 차가 재배됐지만, 품질은 중국산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비단은 수천 년간 중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이었다.
  광저우에서 대외무역을 독점한 양행이 바로 13행이다. 13행은 1685년 광저우에 월해관(粵海關)이 설립된 이듬해 문을 열었다. 13행이란 명칭은 처음 들어선 상점이 13개라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가게가 많을 때는 26개, 적을 때는 4개에 불과할 적도 있어 13행이 꼭 상점 숫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1757년 광저우가 유일한 개방항구가 되면서, 13행은 대외무역을 농단(壟斷)하는 양행에서 외국 상인의 상관 소재지로 개념이 확대됐다. 19세기 초, 주장 변에는 포르투갈관, 스페인관, 네덜란드관, 영국관, 프랑스관, 미국관, 스웨덴관 등이 포진했다.
 
  그 북쪽 거리에는 외국과 거래하는 중국인 상점이 자리 잡았다. 가장 큰 거래품목인 차를 비롯해 도자기, 비단, 그림, 철제, 소금, 쌀, 설탕, 담배, 약재 등 다양한 상품을 다뤘다. 이는 유럽인들이 원하는 중국 물품을 사가는 데서 그친 게 아니라 동남아, 인도,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사고팔 상품까지 거래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당포까지 있어 상인들에게 필요한 사업자금을 빌려줬다. 물론 서양인이 가져온 자명종, 유리그릇 등 서양의 진귀한 물건을 사려는 상인들도 중국 각지에서 13행으로 몰려들었다. 13행이 세계적인 무역장터로 번성했던 것이다.
 
  13행 중국인 상점의 주인은 푸젠성 출신이 많았다. 푸젠인들이 상권을 장악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동향인끼리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했다. 그중 최고의 상인은 반진승(潘振承)과 오병감(伍秉鑒)이었다. 반진승은 1714년 푸젠성 취안저우(泉州)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광저우로 와서 무역선을 탔다. 푸젠 남부의 민난(閩南)에는 ‘배와 말을 타는 자는 명줄이 짧다(行船走馬三分命)’는 속담이 있다. 이는 무역과 장사하는 상인은 목숨을 내걸어야 하지만 그만큼 성공하기 쉽다는 뜻이다. 오늘날 ‘높은 위험, 높은 수익(High risk, high return)’과 같은 이치다.
 
  반진승도 고된 노력 끝에 한밑천을 움켜쥐었다. 또한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현지의 시장 상황을 수집했다. 외국 상인과 자유로이 소통할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도 배웠다. 이런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광저우로 돌아와서는 13행의 한 상점에서 사무를 전담했다. 상점 주인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1742년 사업권을 인계받아 동문행(同文行)을 열었다. 반진승은 주로 동인도회사와 거래했다. 한번은 동인도회사 측이 구입한 차에 클레임을 걸었는데, 군말 없이 모두 보상해 줬다. 영국과의 무역을 독점하면서 반진승과 그의 아들 반유도(潘有度)는 중국 최고의 부자가 됐다.
 
 
  현재 차술은 충칭의 톄관인과 윈난의 푸얼차로 제조
 
오늘날 광저우에는 중국 최대 차시장인 남방차엽교역시장이 있다.
  반세기 넘게 지속됐던 동문행 전성시대를 끝장낸 이가 오병감이었다. 오병감은 1769년 취안저우 출신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오국영(伍國瑩)은 13행에서 이화행(怡和行)을 열어 대외무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이화행이 13행의 태두로 발돋움한 것은 1801년 오병감이 상점 운영을 맡으면서부터다. 오병감은 상인이라기보다 투자자에 가깝다. 13행의 다른 경쟁자들이 성공하면 고향에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짓는 데 골몰하는 데 반해, 오병감은 차밭과 부동산을 사들였다. 이는 생산자와 유통자가 신사협정을 맺고 양립했던 전통을 깨부순 행위였다.
 
  이화행 상표가 붙은 차는 런던, 암스테르담, 뉴욕 등 서구 각국에서 팔렸다. 또한 오병감은 동인도회사의 지분을 매입했다. 미국의 횡단철도와 보험업에도 투자했다. 오늘날 글로벌 투자회사에 못지않은 스케일과 능력을 갖춘 상인이었던 셈이다. 이 덕분에 1834년 오병감의 재산은 2600만 위안에 달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50억 위안(약 90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명실공히 오병감은 19세기 전기 세계 최고의 부자였다. 2001년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50인 중 한 명으로 손꼽을 정도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오병감은 13행을 몰락시킨 주인공이었다. 동인도회사로부터 아편(阿片)을 밀수해 치부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막대한 무역 역조를 시정하고자 18세기부터 인도산 아편을 수출했다. 중국 내 아편 소비가 폭증하고 중독자가 넘쳐나자, 청조는 1829년부터 여러 차례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부패한 관료가 뇌물을 받아 밀수를 눈감아주면서 번번이 실패했다. 이 밀수과정에서 이화행이 관여했다. 아편 밀수는 오병감이 축재한 근원 중 하나였다. 1839년 도광제(道光帝)는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내려보내 광저우의 아편 밀수를 근절시키려 했다.
 
  임칙서는 군대를 동원해 13행을 포위했다. 영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몰수해 불태웠다. 이런 조치는 영국을 자극했다. 영국 정부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전(開戰)을 결정했다. 1840년 영국군은 광둥에 도착해서 청 함선을 포격해 침몰시켰다. 뒤이어 양쯔강(長江) 하구를 점령하고 톈진(天津)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듬해 병력을 증강해 닝보를 점령했고 난징(南京)까지 진격했다. 결국 종이 호랑이였던 청조는 무릎을 꿇었고, 1842년 난징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 홍콩의 할양 ▲ 5개 항구의 개항 ▲ 공행의 독점무역 폐지 등이었다.
 
  처음에 오병감은 임칙서를 뇌물로 구워삶으면 된다고 판단했다.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두려움에 떨어 많은 재산을 청조에 헌납했다. 난징조약에 따라 물어야 할 배상금 300만 위안 중 100만 위안도 혼자 떠맡았다. 그런 상황 아래 1843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난징조약 이후 무역 독점권을 잃은 13행은 급속히 몰락했다. 전쟁 와중에 대부분의 건물도 불타 사라졌다. 1856년 제2차 아편전쟁 후에는 무역 거래지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조계(租界)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그 덕분에 1930년대까지 옛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했지만,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됐다.
 
푸얼 찻잎을 따는 젊은 부부. 푸얼차는 차술의 주원료다.
  오늘날 13행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차 무역도 쇠락했지만, 무역장터인 캔톤 페어가, 중국 최대 차시장인 남방차엽(茶葉)교역시장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홍콩에 본사를 두고 광저우에 판매회사를 둔 찻잎으로 술을 양조하는 회사가 있다. 우리에겐 쇼브라더스 영화사로 유명한 샤오씨(邵氏)그룹 산하의 샤오씨차술공장(酒廠)이 그 주인공이다. 샤오씨그룹은 닝보 출신 상인 샤오위센(邵玉軒)의 진타이창(錦泰昌)을 기원으로 한다. 진타이창은 1901년 상하이에서 문을 연 염료 가게였다.
 
  샤오위센의 외가는 란시(蘭溪)에 있었다. 그곳에는 제갈량의 후예들이 사는 제갈팔괘촌(諸葛八卦村)이 있다. 제갈팔괘촌 주민들은 예부터 제갈량이 찻잎을 사용해 빚었다는 공명차술(孔明茶酒)을 대대로 전수해 마셨다. 샤오위센은 이 술을 즐겨 마셨고, 그의 아들 샤오런메이(邵仁枚)와 샤오이푸(邵逸夫)도 마찬가지였다. 샤오 형제는 1925년 상하이, 1930년 싱가포르, 1948년 홍콩 등지로 사업 무대를 확장하면서 공명차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 현재 샤오씨그룹은 1957년 문을 연 쇼브라더스 영화사뿐만 아니라 부동산·유통·호텔·엔터테인먼트 등을 경영하는 복합 사업체다.
 
  충칭에 문을 연 샤오씨차술공장은 2007년 차술의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과거에는 푸젠성 안시(安溪)에서 생산된 톄관인(鐵觀音)으로 술을 빚었다. 지금은 충칭의 톄관인과 윈난(雲南)성의 푸얼차(普洱茶)로 제조하고 있다. 차술은 은은한 차향에 맛이 깨끗하고 부드러워 우리 입맛에 알맞다. 그 제조기술이 궁금해 샤오씨차술공장의 문을 수차례 두드렸지만, 아쉽게도 취재를 받아들이질 않았다. 샤오씨 차술은 엄밀히 따지면 홍콩의 술이다. 하지만 충칭에서 제조되어 광저우를 통해 홍콩과 중국 전역에 팔려나가기에, 13행의 전통을 잘 이은 술이라 할 수 있다.
 
 
  하이난다오와 소동파
 
해변가 야자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국과 외국 관광객들.
  광둥성 아래에는 중국에서 가장 큰 섬 하이난다오(海南島)가 있다. 하이난다오의 육지 면적은 3만5400km2다. 중국 31개 성·시 중 28번째지만, 최근 중국 영토의 개념이 바뀌면서 면적이 200km2로 늘어났다. 2012년 7월 중국 정부가 시사군도(西沙群島·파라셀제도)의 융싱다오(永興島)에 시정부를 둔 싼사(三沙)시를 출범시켰기 때문이다. 시사군도는 하이난다오 남단에서 336km 떨어진 남중국해 북쪽에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은 이 군도를 두고 베트남과 영유권 다툼을 벌였다. 1974년 당시 남베트남 해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뒤 전체 군도를 지배하고 있다.
 
  중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하이난다오에서 동남쪽으로 560km 떨어진 중사군도(中沙群島)의 실질적인 영유권도 행사하고 있다. 중사군도는 시사군도와 달리 황옌다오(黃巖島)를 제외한 나머지는 해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환초(環礁)다. 그 때문에 영어 명칭이 대륙붕에서 언덕처럼 높게 솟아오른 부분을 가리키는 ‘메이클즈필드 뱅크’다. 또한 필리핀 본토와의 거리가 하이난다오보다 훨씬 가깝다. 하지만 중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앞세워 필리핀 함정이 중사군도 근처에 발도 못 붙이게 하고 있다.
 
  두 군도와 달리 난사군도(南沙群島·스프래틀리제도)는 여러 나라가 얽혀 국제적 분쟁을 벌이고 있다. 난사군도의 면적은 약 80만km2로, 남중국해(230만km2)에서 가장 넓다. 100여 개의 무인도와 환초, 모래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섬의 면적은 2.1km2에 불과하지만 베트남(29개), 중국(9개), 필리핀(9개), 말레이시아(5개) 등 6개국이 분할 점거하고 있다. 난사군도는 하이난다오에서 1000km나 떨어져 있다. 해저에 석유, 천연가스 등 부존자원이 풍부하고, 또한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중요 전략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중국의 관심이 지대하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은 대륙국가로 군림했기에 과거에는 남중국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편전쟁 전까지는 해금령에 따라 연안 방어에 힘썼다. 1909년 광둥 수사였던 이준(李准) 제독이 시사 및 난사군도를 순찰해 국기를 꽂았지만, 군사적 이벤트였을 뿐이다. 1949년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도 헌법에 ‘남중국해 군도는 중국 영토’라 규정했으나 주권적 선언에 불과했다. 하지만 1968년 유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가 남중국해의 자원 탐사를 실시해 석유와 천연가스의 부존 가능성을 보고하면서, 주변국들과 영유권 분쟁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국인들은 여전히 싼사보다 싼야(三亞)를 땅끝 도시로 떠올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싼야는 중국 최남단으로 각인됐었다. 이미 6세기 때부터 ‘애주(崖州)’라 불렸다. 애주는 땅끝 낭떠러지라는 뜻이다. 과거 관리들은 싼야의 지방관으로 임명되면 사색이 됐다. “천애해각(天涯海角)의 땅으로 좌천되니 앞으로 승진 길은 꽉 막혔구나”고 여겼기 때문이다. 천애해각은 하늘의 끝자락이자 바다의 귀퉁이란 의미다. 당대 재상으로 개혁정치를 펼쳤던 양염(楊炎)이 그런 처지였다.
 
  양염은 환관이 관리해서 부패가 심했던 조용조(租庸調)제도를 개혁했다. 양세법(兩稅法)을 실시해 국가재정을 정상화했지만, 환관과 번진(藩鎭)세력의 반발을 사고 말았다. 덕종(德宗)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양염을 장안(長安)에서 쫓아냈다. 양염은 싼야로 가던 중 ‘유애주지귀문관작(流崖州至鬼門關作)’을 지어 쓰라린 심정을 절절히 표현했다.
 
  한번 가면 만리 길이요(一去一萬里) / 천년이 지나도 돌아올 수 없다네.(千之千不還) / 묻노니 애주는 어디에 있는고?(崖州在何處) / 살아서 지나는 귀신의 관문일세.(生度鬼門關)
 
  역대 왕조는 우리의 제주도처럼 하이난다오를 유배지로도 활용했다. 하이난다오에서 귀양살이했던 관료 중에는 소동파(蘇東坡)도 있다. 소동파는 북송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왕안석의 독선과 그를 둘러싼 관리들의 위선에 못 견뎠다. 이에 구법당에 속해서 신법을 반대했다. 이로 인해 정쟁에 휘말려 여러 차례 유배에 처해졌다. 1097년에는 신법당의 모함으로 하이난다오에 안치됐다. 다행히 철종(哲宗)이 승하하고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1101년 복권됐다. 하나 상경하는 도중 쇠약해진 몸을 가두질 못하고 이질에 걸려, 향년 6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소동파는 하이난다오에서 적지 않은 시를 남겼다. 그중 한 수가 지금도 중국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징매역통조각(澄邁驛通潮閣)’이다. 이 시는 바다 건너 땅끝에 버려진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잘 묘사한 절창이다.
 
  남은 생을 하이난다오 마을에서 마치려 했더니(餘生欲老海南村) / 황제께서 (무당인) 무양을 보내 내 혼을 부르시네.(帝遣巫陽招我魂) / 저 멀리 하늘이 낮게 드리워 송골매가 사라진 곳(杳杳天低鶻沒處) / 한 올 머리칼처럼 푸른 산이 바로 중원이라네.(靑山一髮是中原)
 
 
  하이난다오에 들어선 위린 해군기지
 
중국 해군의 위린기지 정문. 최근 전략적 위상이 커지고 있다.
  애주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다. 신해혁명 후 애현(崖縣)이라 불렸고, 1961년 싼야로 바뀌었다. 1987년 시로 승격될 때만 해도 싼야는 낙후된 어촌도시였다. 당시 포장된 도로는 95km, 등록된 차량은 2298대에 불과했다. 싼야가 성장의 날개를 난 것은 1988년 중국 정부가 하이난다오를 경제특구로 지정하면서부터다. 덩샤오핑(鄧小平)은 2000년 넘게 광둥성에 속해 있었던 하이난다오를 독립된 성으로 분리해 중국에서 가장 큰 경제특구로 만들었다. 이 덕분에 싼야는 ‘중국의 하와이’로 탈바꿈했다.
 
  본래 싼야는 천혜의 아름다운 해안가와 울창한 산림을 간직했다. 열대 해양성 기후대에 속해 연평균 기온이 25.7℃에 달한다. 여름철은 후덥지근하지만, 평균기온은 28.7℃를 유지하며 35℃ 이상 넘는 날은 많지 않다. 해 뜨는 날이 많아 한 해 일조시간이 무려 2534시간이나 된다. 이 때문에 중국에선 싼야를 ‘천연 온실’이라 부른다. 경제특구가 되면서 외국인 투자가 싼야에 쏟아져, 관광산업을 위주로 한 개발이 급물살을 탔다. 겨울철에도 해수욕을 즐길 수 있어 5성급 호텔과 리조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1987년 싼야에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은 5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5성급 호텔 40여 개와 리조트 30여 개가 있다. 같은 해 싼야를 찾은 관광객은 12만9000명, 관광수입은 997만 위안(약 179억원)에 그쳤다. 하지만 2014년에는 1352만7000명이 싼야를 방문했고, 269억7000만 위안(약 4조8546억원)을 썼다. 외국인 관광객만 38만8000명에 달할 정도로 싼야는 상전벽해를 이뤘다. 여기에는 싼야의 뛰어난 지리적 위치가 한몫했다. 남중국해에 자리 잡아 여객기로 2시간이면 홍콩과 대만을 위시해 모든 동남아국가를 커버한다.
 
  그러나 경제 성장은 집값 폭등과 난개발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현재 싼야는 선전(深圳), 상하이, 베이징, 샤먼(廈門) 다음으로 집값이 높다. 평균 부동산 가격이 1m2당 2만2000위안(약 396만원)을 넘어섰다. 해안가의 별장이나 고급 맨션은 1m2당 3만~4만 위안을 호가한다. 이런 높은 집값 때문에 현지 주민들은 극심한 물가고와 더불어 고통받고 있다. 호텔도 너무 많이 지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비성수기에는 객실 점유율이 20~30%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말 필자가 해수욕장 바로 앞 4성급 호텔에서 묵었는데, 하루 숙박료가 우리 돈 7만원에 불과했다.
 
  중국 최고의 휴양지답게 싼야에는 외지인들이 많다. 2014년 말 호적인구는 58만5000명이지만, 상주인구는 74만1000명으로 훨씬 많다. 그중에는 인민해방군 군인들이 적지 않다. 싼야를 대표하는 다둥하이(大東海)해수욕장 바로 옆에 위린(楡林)해군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해군은 3대 함대를 보유하고 있다.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에 사령부를 두고 서해를 관할하는 북해함대, 저장성 닝보에 사령부를 두고 동중국해를 관장하는 동해함대, 광둥성 잔장(湛江)에 사령부가 있는 남해함대가 그것이다. 위린기지는 이 중 남해함대의 전략기지다.
 
  과거 남해함대는 3대 함대 중 최약체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다툼을 벌이면서 위린기지의 위상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실제 위린기지는 남해함대의 모항인 잔장이나 광저우 기지보다 시사·난사군도에 훨씬 가깝다. 또한 천혜의 양항(良港)으로 손꼽힌다. 항만 양쪽에 돌산이 있어 파도와 바람을 막아준다. 수심은 최대 22m에 달할 정도로 깊다. 이 때문에 1939년 하이난다오를 점령한 일본은 이 항구를 인도차이나반도 침략의 전진기지로 사용했다. 일본 해군은 위린항에 연합함대 및 해병대 기지를 건설했다.
 
  오늘날 위린기지의 화력은 과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하다. 먼저 최신형 052D형 이지스 구축함을 보유했다. 052D형 구축함은 중국의 첫 이지스함인 052C형과 비교해 더욱 개량된 무기와 레이더 시스템을 장착하고 있다. 64발의 대함·대공·대잠수함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다. 위상배열 레이더는 미국의 알레이 버크-Ⅲ급 이지스함에 탑재된 레이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중국군은 공식 취역한 쿤밍(昆明)함, 창사(長沙)함, 허페이(合肥)함 등 3척을 모두 위린기지에 배치했다. 현재 6척의 052D형 구축함이 취역했거나 건조 중이어서 그 수는 더욱 늘어날 예정이다.
 
  잠수함 부두는 위린기지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돌산을 뚫어 터널 속에 구축했다. 이런 것이 10여 개나 된다. 가장 큰 곳은 입구 높이가 20m에 달한다. 터널은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있어 미국의 정찰위성이 잠수함의 출항 여부를 확인하기가 힘들다. 또한 기지 부근의 바다 수심이 곧바로 1000m에 가까워 잠수함이 활동하기 적합하다. 최근 중국 해군은 야룽완(亞龍灣)에 세계 최대의 핵잠수함 기지를 건설 중이다. 이 기지가 완공되면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미국에 못지않은 해상 전력을 확보하게 된다.
 
 
  값싸고 달착지근한 야자술
 
남중국해를 배경으로 웨딩사진을 찍는 젊은 연인들. 싼야는 중국 최고의 웨딩사진 명소다.
  2012년 3월 필자는 위린기지의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싼야를 찾았다. 특히 전년도부터 건설되는 항공모함 부두를 확인하려 했다. 큰 부담을 안고 현지에 도착했지만, 의외로 현장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택시 기사들이 부두 공사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어촌 주민들의 보상과 이주가 아직 이뤄지질 않아 공사장에 들어가기도 쉬웠다. 부두는 길이 800m, 폭 120m, 수심 30~40m에 달해 한눈에 항공모함이 정박할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중국 해군은 그 부두를 칭다오와 함께 항모 전용기지로 운용하고 있다.
 
  지난해 다시 찾은 싼야는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위린기지의 규모는 더 커져 군사보호구역이 확대됐다. 이 때문에 다둥하이 해변가의 절반은 더 이상 일반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 리조트와 골프장이 밀집된 야룽완도 마찬가지다. 잠수함 기지를 건설하면서 해변의 1/3이 민간인 금지구역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에 웨딩화보 업체 종사자들은 울상 짓고 있었다. 다둥하이의 절경에서 더 이상 결혼사진을 못 찍게 됐기 때문이다. 과거 다둥하이 서쪽은 웨딩화보의 천국이었다. 하루만 해도 수십 쌍의 연인이 그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웨딩사진을 찍었다.
 
  쫓겨난 이들은 또 있다. 무한 자유를 만끽했던 누드족들이다. 다둥하이와 야룽완 해수욕장의 한구석은 중국에서 유일한 누드 해변이었다. 4년 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드족들이 모래사장 위에 편하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광경은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 중 9할은 남자였지만 1할은 여자였다. 일광욕을 즐기다가 바다에 들어가 해수욕을 즐기던 누드족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아 있다. 특히 바로 뒤편으로 있는 위린기지 담장의 붉은 별과 더불어 아주 묘한 풍경을 연출했다. 하지만 해군기지의 확장은 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이처럼 남국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다행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한 특산물이 있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야자를 이용해 만든 야자술(椰子酒)이 그 주인공이다. 세계 각지의 술에 일가견이 있는 독자라면 페르노리카의 말리부 럼(Malibu Rum)을 떠올릴 것이다. 말리부 럼은 알코올 21도의 과일 증류주다. 사탕수수와 야자즙이 첨가되어 술맛이 달착지근하다. 이 때문에 주스를 섞어 칵테일로 만들면 제격이다. 필자도 싼야를 처음 갔을 때 서양인들이 많이 몰리는 바에서 말리부 럼으로 카리부 루(Caribou Lou)를 제조해 마셨다.
 
야룽완의 한 리조트 앞을 수놓은 야자수.
  한데 싼야를 떠나기 하루 전 중국인 친구의 소개로 현지산 야자술을 접했다. 술맛이 말리부 럼에 비할 바 못 됐지만, 나름 독특한 맛과 향을 지녀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이난다오에서 야자술을 빚어 마시기 시작한 것은 당대 말기부터다. 소동파는 귀양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야자술을 접했다. 술을 마신 느낌을 야자수를 이용해 만든 물건을 노래한 ‘야자관(椰子冠)’ 도입부에 묘사했다.
 
  하늘이 원앙(한대의 대신)을 살리려 날마다 술을 마시게 하니(天敎日飮欲全絲) / 좋은 술이 숲에서 생겨나니 의적(전설 속 술의 신)을 기다릴 필요 없네.(美酒生林不待儀)
 
  과거 야자술은 즙을 빼낸 야자에 원주(原酒)을 주입해 숙성시켰다. 그렇게 제조된 술은 맛있으나 생산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야자술은 대량 생산을 위해 큰 항아리에 원주를 붓고, 야자 속껍질과 사탕수수를 넣어 숙성시킨다. 따라서 술맛은 야자즙과 포도당 성분을 흡수해 감칠맛 난다. 2012년만 해도 숙성기술이 덜 개발된 탓인지 저도주(低度酒)만 판매했었다. 한데 이번에 보니 도수를 50도까지 올렸다. 숙취를 일으키는 아세트알데히드를 제거한 고도주를 생산하기 위해, 배합과 숙성 기술을 대폭 개선시킨 것이다. 무엇보다 병 용량이 150~200㎖에다 가격이 15~20위안(약 2700~3600원)에 불과했다. 이로써 지난 3~4년 전부터 젊은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출시되는 시장트렌드에 부합하면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
 
  현재 아시아에서 야자술은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도 생산된다. 중국은 이들 나라보다 양조기술이 훨씬 앞서 있다. 알코올 도수를 높였으면서 달착지근한 싼야의 야자술. 싼야가 ‘남중국해를 겨눈 칼’이 아닌 중국의 하와이로서 명성을 유지한다면, 앞으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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