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방, 부모는 물론 본인의 본명도 불분명한 한미한 집안 출신
⊙ 명문 출신 항우, 우유부단과 교만으로 패망 자초
⊙ ‘후덕하다’는 평 듣던 유방, 천하통일 후 覇道로 群雄 제거
申東埈
⊙ 1956년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同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교수신문 편집국장 역임.
⊙ 저서: <개화파열전> <논어론> <순자론>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등 20여 권.
⊙ 명문 출신 항우, 우유부단과 교만으로 패망 자초
⊙ ‘후덕하다’는 평 듣던 유방, 천하통일 후 覇道로 群雄 제거
申東埈
⊙ 1956년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同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교수신문 편집국장 역임.
⊙ 저서: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등 20여 권.

- 한 고조(漢 高祖) 유방(劉邦).
진시황(秦始皇)이 급서(急逝)한 이듬해인 기원전 209년 7월, 양성(陽城: 하남성 등봉현) 땅의 진승(陳勝)은 부역에 징발된 900명의 농민을 이끌고 어양(漁陽: 북경시 부근)으로 출발했다. 음력 7월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대택향(大澤鄕: 안휘성 숙주시)에 이르렀을 때 큰 비가 내렸다. 진제국의 법에는 ‘실기개참(失期皆斬)’의 규정이 있었다. 기한을 어긴 자는 무조건 참형(斬刑)에 처한다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만 없어도 이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갔을 것이다. 진승이 친구인 오광(吳廣)과 함께 무리를 모아놓고 말했다.
“이래저래 되었으니 차라리 반기(叛旗)를 드느니만 못하다. 왕후장상(王侯將相·제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진승은 곧 ‘대초(大楚)’의 장군을 자처하며 농민반란군을 이끌었다. 사가(史家)들은 그의 거병을 ‘진승·오광의 난’이라고 부른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에서 이들의 거병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5년 동안 호령(號令)이 삼선(三·세 번 바뀜)했다. 생민(生民) 이래 일찍이 천명(天命)을 받는 것이 이처럼 빠른 적은 없었다.”
‘삼선’은 진승과 항우(項羽), 유방(劉邦)이 짧은 기간에 돌아가며 천하의 패권(覇權)을 장악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진승의 농민군은 초기만 해도 매우 볼 만했다. 위(魏) 땅의 명사 장이(張耳)와 진여(陳餘) 등이 자발적으로 합류한 게 그 실례다. 장이와 진여는 ‘문경지교(刎頸之交·목이 달아날지라도 변치 않을 만큼 가까운 친교)’ 고사의 주인공이다.
장이와 진여 등의 합세로 농민반란군의 위세가 높아지자 진승은 이내 진성(陳城·하남성 회양)을 점령한 후 보위(寶位)에 올라 국호(國號)를 ‘장초(張楚)’로 정했다.
李斯의 죽음
진승은 ‘장초’를 세운 지 얼마 안돼 함양 정벌에 나섰다. 당시 2세 황제 호해(胡亥)는 낭중령(郎中令·궁궐 보안 총책) 조고(趙高)의 말만 듣고 궁궐 깊숙이 처박혀 지냈다. 대신들을 만날 일이 없게 되자 모든 일이 조고에 의해 결정되었다. 좌승상(左丞相) 이사(李斯)가 이를 비판하자 조고가 그를 무함했다.
“좌승상은 존귀한 지위가 더 이상 올라가지 않자 장차 땅을 나눠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의 장남 이유(李由)는 삼천(三川)의 군수가 되었고, 초나라 땅의 도적 진승 등은 모두 그의 인근 마을 사람들입니다. 도적들이 공공연히 나다니며 삼천의 성을 지나가도 이유가 이들을 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진승과 이유 사이에 문서가 서로 오갔다고 합니다.”
이사가 이 소식을 듣고 상소를 올렸다.
“전국시대 초기에 제나라의 전상(田常)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군주의 위엄을 훔쳐 아래로 백성을 얻고, 위로 군신(群臣)을 얻어 끝내 제간공(齊簡公)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았습니다. 지금 조고도 사악한 뜻을 품고 그런 모반을 꾀하고 있습니다. 그의 집에 쌓아 놓은 재부(財富)는 마치 전상이 제나라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많고, 욕심 또한 많아 이익을 찾는 짓에 끝이 없습니다.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변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2세 황제가 이를 조고에게 보여주자 조고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죽게 되면 오히려 좌승상이야말로 전상이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할 것입니다.”
당시 우승상 풍거질(馮去疾)과 장군 풍겁(馮劫) 등도 거듭 간했으나 조고의 사주를 받은 2세 황제는 오히려 이들을 꾸짖었다.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는데도 그대들은 이를 금하지 못하면서 선제(先帝)가 한 일을 없애려고 하는가. 이는 위로 선제에게 보답지 못하고, 아래로 짐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들을 법리(法吏)에게 내려 보내 문책게 했다. 풍거질과 풍겁은 ‘장상(將相)은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며 자진했다. 그러나 이사는 감옥을 택했다. 2세 황제가 사안을 조고에게 넘기자 조고는 이사에게 1000여 차례나 무자비한 매질을 가했다. 이사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없는 죄를 자백하자 보고를 받은 2세 황제가 크게 기뻐했다.
“만일 조고가 없었다면 나는 승상에게 거의 속아 넘어갈 뻔했다.”
이사의 아들 이유는 이미 초나라 군사에게 죽임을 당한 뒤였다. 조고는 이사가 처형되자 곧바로 승상이 되어 모든 권력을 한손에 틀어쥐었다.
항우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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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우(項羽). |
항우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11년 전인 기원전 232년에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수를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적(籍)이고, 우(羽)는 그의 자(字)이다. ‘항씨’는 항(項·하남성 침구현)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은 데서 나온 것이다.
항우는 자라면서 키가 약 8척에 달해 무쇠 솥을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좋았다. 어렸을 때 진시황이 천하순행 도중 회계산(會稽山) 일대에 행차하는 것을 보고 이같이 다짐한 바 있다.
“내가 저자를 대신해 줄 것이다.”
그 시간은 일찍 찾아왔다. 진승이 반기를 들자 항우는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회계군수(會稽郡守) 은통(殷通)을 격살하고 회계를 장악한 뒤 진승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기원전 207년 봄 광릉(廣陵·강소성 양주시 서북쪽)을 공략하던 진승의 휘하장수 소평(召平)이 진승의 패사(敗死) 소식을 듣고 딴마음을 품었다. 그는 장강을 건넌 뒤 진승의 명을 멋대로 고쳐 항량을 상주국(上柱國·정승)으로 임명한 뒤 함양 공격을 명했다. 도중에 소규모 반란군을 이끌던 영포(英布)가 합류하면서 군사 숫자가 6만~7만명으로 불어났다.
항량의 군사는 서둘러 진격하다가 진제국의 군사에게 패했다. 그러자 진승의 휘하장수 진가(秦嘉)는 초나라 왕족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삼고는, 항량에게 자신의 휘하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크게 노한 항량이 무리에게 선언했다.
“지금 진승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진가가 경구를 초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짓이다.”
결국 진가는 항량에게 패해 동쪽으로 도주하다가 죽었다. 항량은 출발 때부터 정예주의(精銳主義)를 고수했다. 항량의 뒤를 이은 항우도 마찬가지였다. 초나라 명문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이를 부추겼을 공산이 크다.
유방, 본명조차 불분명한 한미한 집안 출신
유방은 이와 정반대였다. 그의 휘하에 모인 자들은 시정잡배나 다름없었다. 번쾌(樊?)는 개백정, 관영(灌?)은 비단장수, 주발(周勃)은 장례식 악사, 하후영(夏侯?)은 마부 출신이었다. 한(韓)나라 귀족 출신인 장량(張良)을 제외할 경우 가장 학식이 높다는 소하(蕭何)와 조참(曹參)도 시골 아전에 불과했다. 유방도 건달에 지나지 않았다.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의 다음 대목이 그 증거이다.
“유방은 주색을 좋아해 늘 주점으로 가 외상으로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하면 그곳에 드러눕곤 했다.”
원래 유방은 태생적으로 ‘정예주의’와 대비되는 ‘잡색주의(雜色主義)’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사기>와 <한서>(漢書)가 그의 부모를 태공(太公)과 유오(劉)로 기록해 놓았다. 당시 ‘태공’과 ‘오(·속음은 온)’는 노인에 대한 존칭이었다. ‘유오’는 ‘유씨 집 할미’를 뜻한다.
유방의 이름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기>는 그의 본명이 ‘계(季)’였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계’는 백(伯)·중(仲)·숙(叔)·계(季)로 이뤄진 형제들의 항렬을 지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4형제의 막내였다. 그는 항우의 ‘우’와 같은 ‘자(字)’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방의 ‘방(邦)’이 ‘자’인 것도 아니다. 이는 황제 즉위 후 개명(改名)한 것이다. 이는 그가 제대로 된 본명조차 없는 한미한 집안 출신임을 시사한다.
유방은 30세에 정장(亭長)이 됐다. 정장은 관리들의 숙박시설인 ‘정’을 책임지고 경비업무도 맡아보는 말직(末職)이었다. 지금의 출장소 주임에 해당하나 사실 시중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훗날 명문 출신인 항우와 천하를 놓고 다투는 배경이 되었다.
선보(單父·산동성 선현) 출신 여공(呂公)은 원수진 사람을 피해 유방의 고향인 패현(沛縣)으로 들어와 현령(縣令)의 식객(食客)이 됐다. 향리(鄕吏)들이 현령에게 귀빈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찾아와 인사했다. 이때 아전의 우두머리로 있던 소하가 진상하는 예물을 주관하며 빈객들을 향해 말했다.
“예물이 1000전(錢)에 이르지 않는 자는 당하(堂下)에 앉으시오.”
유방은 가짜 명함을 제시하며 ‘하전만(賀錢萬·하례금 1만 전)’이라고 써 넣었다. 그러나 그는 1전도 지참하지 않았다. 명함이 들어가자 여공이 크게 놀라 문 앞까지 나와 그를 맞이했다. 소하가 말했다.
“유계는 실로 큰소리만 많고, 실행은 적은 자입니다.”
流賊 이끌고 항량 휘하로 들어가
주연(酒宴) 도중 여공이 눈짓으로 유방을 붙잡아 놓았다. 마침내 유방만 남게 되자 여공이 말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의 상을 보았으나 그대와 같은 상은 본 적이 없소. 저에게 딸이 있으니 받아 주기 바라오.”
소식을 들은 부인이 화를 냈다.
“현령이 당신과 친분이 있어 딸을 달라고 했는데도 주지 않더니 이제 와서 어찌하여 그런 자에게 허락한 것이오.”
여공이 웃으며 말했다.
“이는 아녀자가 알 수 있는 게 아니오.”
여공의 딸이 바로 훗날 혜제(惠帝)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은 여후(呂后)이다. 미관말직인 ‘정장’ 자리가 이런 인연을 만든 것이다.
유방은 40세 때인 기원전 209년 ‘정장’의 자격으로 일단의 죄수들을 이끌고 여산으로 향했다. 진시황 능묘 조성을 위해 죄수들을 호송한 것이다. 그러나 죄수들의 도주가 심했다. 처음 출발할 때 500명이었으나 나흘 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처벌을 면키 어려웠다.
유방은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따르는 자 1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향 일대의 늪지대에 숨어들었다. 진승은 생사를 가르는 상황에서 반기(反旗)를 든 데 반해 그는 유적(流賊)의 길을 택한 셈이다.
유방의 고향 패현 풍읍은 현재의 안후이성(安徽省) 및 산둥성(山東省) 경계와 맞닿아 있는 장쑤성(江蘇省) 서북지역이다. 춘추(春秋)시대부터 국경도시로 존재한 까닭에 천하대세의 흐름에 민감했다.
유적으로 있던 유방은 진승의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소하 및 조참 등과 내통해 현령을 죽이고 패현의 자제 2000여 명을 이끄는 소규모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됐다. 소하 등은 그를 ‘패공(沛公)’으로 높여 불렀다. ‘공’은 수령(首領)을 뜻하는 초나라 말이다. ‘패공’ 유방은 무리를 이끌고 진가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진가가 항량에게 패사하면서 이내 항량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천하의 지낭(智囊) 장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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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의 책사 장량(張良). |
하지만 장량이 장성했을 때는 진나라에 의해 나라가 망한 까닭에 그는 일개 평민 신분으로 전락해 있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그는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장례도 치르지 않은 채 오로지 진시황 척살에 매달렸다. 그는 창해군(倉海郡) 출신 역사(力士)와 함께 기원전 218년 천하순행에 나선 진시황을 양무(陽武·하남성 양무현)의 동남쪽 박랑사(博浪沙)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 일로 수배령이 떨어지자 장량은 이름을 바꿔 하비(下?·강소성 수녕현)에 은거했다. 그는 호협(豪俠)과 교유하면서 병서(兵書)를 읽었다. 천하가 소란해지자 장량은 무리 100여 명을 이끌고 진가를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이때 유방 역시 무리를 이끌고 진가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두 사람은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유방 무리에 합류한 그는 유방의 두터운 신임을 토대로 시종 군사(軍師)로 활약하게 되었다.
유방은 항량의 휘하로 들어간 직후 100여 기(騎)를 이끌고 항량을 만나러 갔다. 장량의 계책을 좇아 풍읍을 탈환코자 한 것이다. 항량이 흔쾌히 군사 5000명을 내주었다. 당시 반란군의 총수는 여전히 ‘장초’의 왕인 진승이었다. 얼마 뒤 진승이 진나라 수장(首將) 장함(章邯)에게 패해 시골로 은신했다가 마부로 있던 장가(莊賈)의 손에 비명횡사한 사실이 밝혀졌다.
항량은 곧 장수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풍읍을 손에 넣은 유방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참석자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범증(范增)이었다. 그는 당시 70세에 달해 있었다. 범증이 항량에게 건의했다.
“전국시대 말기에 초회왕(楚懷王·웅괴)이 진나라로 들어갔다가 이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자 초나라 사람들이 이를 애통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추모 열기는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진승은 초나라 후예를 세우지 않고 자립한 까닭에 그 세력이 오래가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초나라의 호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대에게 다투어 귀부(歸附)하는 것은 그대가 장차 초왕의 후예를 찾아내 다시 옹립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방은 후덕한 사람”
항량이 곧 백성들 틈에 끼여 양치기 노릇을 하고 있는 초회왕의 손자 미심을 찾아내 옹립했다. 항량이 ‘초회왕’의 시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초나라 백성들을 격동키 위한 것이었다. 당시 초나라 유민만큼 진제국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진승과 항우, 유방 등이 모두 초나라 출신이었다.
얼마 후 무신군(武信君)을 자칭하며 승승장구하던 항량은 정도(定陶·산동성 정도현)에서 장함이 이끄는 진나라 대군과 싸우다가 패사(敗死)했다. 당시 진류(陳留·하남성 진류현)에서 접전 중이던 항우와 유방은 이 소식을 접하고는 황급히 장군 여신(呂臣)과 함께 동진(東進)하여 초회왕을 팽성(彭城·강소성 서주시)으로 옮긴 뒤 이곳을 새 도읍으로 정했다. 여신은 팽성의 동쪽, 항우는 팽성의 서쪽, 유방은 탕산(?山·강소성 탕산현)을 수비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아무리 무능한 자일지라도 일단 보위에 오르면 친위(親衛)세력 구축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초회왕 미심도 항량이 전사하자마자 곧 여신과 항우의 군사를 통합한 뒤 이를 자신이 직접 거느렸다.
유방도 그의 포섭대상이었다. 미심은 유방을 탕군(?郡)의 군장(郡長)으로 삼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하면서 탕군의 군사지휘권을 부여했다. 항우는 장안후(長安侯)에 봉해져 ‘노공(魯公)’으로 불렸으나, 신분만 높을 뿐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당시 장함은 항량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조나라 수도 한단을 압박하고 있었다. 조왕 조헐(趙歇)과 재상 장이가 거록성(鉅鹿城) 안으로 들어가자 진나라 부장(副將) 왕리(王離)가 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조헐과 장이는 여러 차례 초나라에 사람을 보내 속히 구원해 줄 것을 청했다.
미심은 장수 송의(宋義)를 상장군(上將軍), 항우를 차장(次將), 범증을 말장(末將)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미심’이 출정에 앞서 제장들을 불러놓고 이같이 약속했다.
“먼저 입관(入關·관중으로 진공함)한 자를 관중(關中)의 왕으로 삼을 것이다.”
이는 사실 항우를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노장(老將)들은 미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항우는 위인이 성급하고 포학합니다. 진승과 항량 등이 패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일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니 덕이 있는 자를 보내 진나라 부형들을 설득하느니만 못합니다. 유방은 후덕한 사람이니 가히 보낼 만합니다.”
‘미심’이 이를 좇아 유방에게 진승과 항량 휘하에 있던 병졸들을 모두 수습해 속히 ‘입관’할 것을 주문했다. 편파적인 조치를 한 셈이다.
항우와 유방의 入關 경쟁
기원전 207년 겨울 10월, 송의가 안양(安陽·산동성 조현)에 이른 뒤 46일 동안 머물며 전혀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심’과 밀약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초조해진 항우가 건의했다.
“조나라가 위급한 상황이니 속히 황하를 건너야 합니다. 초나라가 그 외곽을 치고 조나라가 안에서 응하면 능히 진나라 군사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송의가 핀잔을 주었다.
“무릇 소의 몸에 앉아 피를 빨아먹는 등에를 잡을 때는 이와 서캐를 때려잡는 수법이 통할 수 없소. 저들이 피폐해진 틈을 타느니만 못하오. 전투는 내가 그대만 못하나 전략을 짜는 것은 그대가 나만 못하오.”
그러고는 이런 명을 내렸다.
“호랑이처럼 흉포하고 이리처럼 욕심이 많으면 성질이 모질어 부릴 수 없게 된다. 이런 자는 모두 참할 것이다.”
항우보고 들으라고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 송양이 제(齊)나라의 재상에 발탁되자 곧 무염(無鹽·산동성 동평현)까지 전송을 나가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날씨가 찬 데다 큰비까지 내려 병사들이 추위에 떨며 크게 굶주렸다. 항우가 분통을 터뜨렸다.
“금년은 흉년이어서 병사는 물론 백성들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식을 위해 성대한 연회만 베풀고 기껏 말하기를, ‘피폐해진 틈을 타야 한다’고 한다. 조나라가 망하면 진나라가 더욱 강해지는데 무슨 피폐한 틈을 타겠다는 것인가. 지금 초나라는 병사들을 청소하다시피 그러모아 그에게 맡겨 놓은 상황이다.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는데도 그는 부자간의 사사로운 인정만 좇고 있다.”
항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문안 인사차 장막 안으로 들어가 송의의 머리를 베어 버린 뒤 군사들 앞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송의가 제나라와 모의해 초나라를 배반했다. 초왕이 나에게 밀명을 내려 그를 주살케 했다.”
제장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입을 모았다.
“초나라를 먼저 세운 자는 장군의 집안입니다. 지금 장군은 반기를 든 자를 죽인 것입니다.”
초회왕 ‘미심’은 이를 추인할 수밖에 없었다. 항우는 휘하장수에게 명해 먼저 병사 2만명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게 했다. 이들이 도강한 후 양도(糧道·군량 운송로)를 끊자 왕리가 이끄는 진나라 군사가 양식을 거르게 되었다. 항우가 곧 전군을 이끌고 도강한 뒤 배를 침몰시키고 솥과 시루 등을 모두 깨뜨려 버렸다. 소위 ‘침주파부(沈舟破釜)’를 행한 것이다.
항우는 막사를 모두 태워 버린 뒤 병사들로 하여금 각자 3일치의 식량만 지니게 했다. 일종의 배수진을 친 것이다. 항우의 군사는 거록성에 도착하자마자 왕리의 군사와 접전해 9전9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왕리는 포로가 되었고 진나라 장수 섭한(涉閒)은 항복하는 대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당시 거록성 주변에는 조나라를 구하러 온 제후들의 군사가 매우 많았다. 이들은 영루(營壘·방어용 구축물)만 세운 채 진나라 군사가 무서워 감히 출전하지 못했다. 항우의 군사가 분투하는 동안에도 영루 위에서 구경만 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같이 묘사해 놓았다.
“항우가 승리 후 열국(列國)의 장수들을 부르자 이들은 원문(轅門·수레의 끌채를 마주보게 해 임시로 만든 문)으로 들어오면서 무릎으로 기어가며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얼마 후 장함이 투항하자 항우는 그를 옹왕(雍王)으로 삼은 뒤 선봉에 서게 했다. 진나라는 장함의 투항으로 사실상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원전 208년 9월 유방은 ‘입관’의 전단계로 완성(宛城·하남성 남양현)에 맹공을 퍼부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유방이 완성을 우회코자 했다. 장량이 만류했다.
“지금 함락시키지 않으면 완성의 군사가 우리의 뒤를 치고 함양의 군사는 우리의 앞을 막게 됩니다. 이는 극히 위험한 방도입니다.”
말머리를 돌린 유방은 우여곡절 끝에 완성을 손에 넣었다. 뒷걱정을 없앤 그는 파죽지세로 무관(武關·섬서성 상현 경계)을 함락시킨 뒤 곧바로 요관(橈關·섬서성 상현 서북쪽)을 향해 진격했다. 요관은 관중의 동쪽 대문으로 지형이 험준했다. 유방이 정면 돌파를 시도하려고 하자 장량이 반대했다.
“진나라 병사가 많으니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먼저 5만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다고 소문을 내고 산 위에 깃발을 세워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보이십시오. 연후에 사람을 시켜 황금을 갖고 가 성을 지키는 장수에게 항복을 권하면 일이 쉽게 풀릴 것입니다.”
진나라의 멸망
유방이 이를 좇자 과연 요관의 문이 열렸다. 유방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함양 주변의 패상(覇上·섬서성 남전현 북쪽)으로 진군했다. 당시 조고는 장함의 투항을 문책하려는 2세 황제를 제거한 뒤 진시황의 장자인 부소의 아들 자영(子?)을 옹립했지만, 자영에게 척살당했다. 자영은 곧 문무백관(文武百官)을 이끌고 궁 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기원전 206년이었다.
유방의 휘하장수들이 입성하자마자 부고(府庫)로 다투어 달려가 보물을 나눠 가졌다. 유방도 함양의 화려한 궁전과 여인에게 넋을 빼앗겼다. 번쾌가 나서 간언(諫言)했으나 듣지 않았다. 장량이 간곡히 간한 뒤에야 비로소 군사를 이끌고 패상으로 향했다. 이때 유방은 부로(父老)들을 모두 불러 놓고 ‘법3장(法三章)’을 선언했다.
“이후에는 ‘법3장’만 있을 뿐이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한 자와 절도한 자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할 것이오. 내가 패상으로 철군하는 것은 다른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려 먼저 ‘입관’한 자를 관중의 왕에 임명한다는 기왕의 약속을 확정지으려는 것일 뿐이오.”
이는 진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사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당초 항우는 장함의 투항에 고무돼 하북(河北)을 완전히 평정한 뒤 개선장군처럼 입관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후들의 군사는 투항한 진나라 이졸(吏卒)들을 마치 노비처럼 부리는 등 크게 업신여겼다. 투항한 진나라 이졸들이 크게 원망했다.
“장함 장군 등이 우리를 속이고 항복했다. 저들이 입관하지 못하면 이내 우리를 포로로 잡아 동쪽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를 엿들은 사람들이 항우에게 고하자 항우는 곧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저들이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도 말을 듣지 않으면 위험해집니다. 저들을 모두 죽인 뒤 투항한 장수만 데리고 입관하느니만 못합니다.”
한밤중에 진나라 군사 20만명을 ‘갱살(坑殺·파묻어 죽임)’한 뒤 서둘러 함곡관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관문이 굳게 잠긴 것을 보고 범증이 간했다.
“유방은 입관 후 재물도 취하지 않고 부녀도 총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뜻이 결코 작은 데 있는 게 아님을 뜻합니다. 급히 쳐야만 합니다.”
鴻門之會
항우는 함양에서 가까운 홍문(鴻門·섬서성 임동현 동북쪽)에 영채를 차린 뒤 40만의 군사를 100만 대군이라고 떠벌렸다. 유방도 10만을 20만으로 부풀리며 패상에 주둔했으나 양쪽이 싸울 경우 패배를 면키 어려웠다. 이를 우려한 장량의 친구 항백이 급히 유방의 진영으로 달려갔다. 그가 장량의 안내로 군막 안으로 들어가자 유방은 양가 자제의 혼사를 약속하며, 항우에게 잘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항백은 유방에게 항우를 직접 찾아와 해명하라고 말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범증이 항우에게 유방 척살 계책을 제시했다. 항우는 범증이 옥결(玉?·반원형 옥팔찌)을 들어 세 번 보여주면 즉시 행동에 옮길 것을 약속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유방이 100여 기(騎)를 이끌고 홍문으로 와 사죄했다.
유방의 공손한 태도에 화가 풀린 항우가 곧 주연을 베풀었다. 범증이 수차례 항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옥결을 보여주었으나 항우는 모른 척했다. 다급해진 범증이 밖으로 나가 항우의 일족인 항장(項莊)에게 당부했다.
“안으로 들어가 축수(祝壽·술을 올리며 장수를 빎)를 핑계로 검무(劍舞)를 추겠다고 청한 후 검무 도중 기회를 보아 유방을 찌르도록 하시오. 그러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장차 그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오.”
항장이 검무를 추자 항백도 검을 뽑아 들고 춤판에 끼어들었다. 뒤늦게 온 번쾌가 항우의 군사를 물리치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항우 옆에 섰다. 섬뜩해진 항우가 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대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장량이 대신 대답했다.
“패공을 경호하는 번쾌입니다.”
“장사로다. 그에게 술을 한 말 가득 채워 내리도록 하라.”
얼마 후 유방이 몸을 일으켜 측간을 간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간 뒤 황급히 달아났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범증은 칼을 뽑아 내리치면서 한탄했다.
“아, 수자(?子·어린아이)와는 더불어 앞날을 꾀할 수가 없구나. 항우의 천하를 빼앗는 자는 반드시 유방일 것이다. 우리는 이후 그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이를 두고 사가들은 ‘홍문지회’ 또는 ‘홍문지연(鴻門之宴)’이라고 한다.
유방의 반격
당시 항우는 ‘홍문지회’에서 유방을 살려준 것을 두고 은혜를 베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천하를 거머쥘 생각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유방의 목을 베는 게 옳았다. 항우는 ‘우유부단’했다. 범증이 분통을 터뜨린 이유이다. 난세에 ‘우유부단’은 치명적이다.
항우는 ‘홍문지회’ 직후 함양을 불태운 뒤 보물과 여인들을 이끌고 팽성으로 돌아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했다. 유방은 관중 대신 한중(漢中·섬서성 남부와 사천성 북부)의 왕에 봉해졌다. 항우는 유방이 한중 밖으로 나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관중을 셋으로 나눈 뒤 장함 등 투항한 진나라의 장수를 왕에 봉했다.
항우는 초회왕을 의제(義帝)라고 높이고, 스스로는 패왕(覇王)이라고 칭했다. 의제는 기원전 205년 10월 항우의 명을 받은 영포 등에 의해 장강(長江)의 강중(江中)에서 살해됐다.
한편 한중으로 쫓겨간 유방은 그곳에서 실력을 기르면서 중원(中原)으로 진출할 기회만을 노렸다. 명장 한신(韓信)을 얻은 유방은 기원전 206년 8월, 장함 등 항우가 봉한 세 명의 관중 왕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중원진출에 나섰다. 초한(楚漢)전쟁의 시작이었다.
이후 유방과 항우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좌고우면하던 군웅(群雄)들은 점차 오만하고 독선적인 항우의 편을 떠나 유방의 편에 서게 됐다.
항우는 유방의 책사 진평(陳平)의 반간계에 넘어가 범증을 내친 뒤 쇠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범증은 울분을 참지 못해 귀향하던 중 등창이 나 객사하고 말았다.
소심해진 항우는 천하를 반만 나눠 가질 생각으로 기원전 203년 8월 유방과 홍구(鴻溝·회하 상류에서 황하로 연결된 운하)의 맹약을 맺었다. 홍구의 서쪽은 한나라, 동쪽은 초나라가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강화가 성립되자 항우는 억류하고 있던 태공과 여후를 돌려보낸 후 동쪽 팽성으로 철군하기 시작했다. 유방도 이내 서쪽 관중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장량과 진평이 만류했다.
“한나라가 천하의 반을 차지하자 제후들이 모두 귀부했습니다. 지금 저들을 풀어준 채 공격하지 않으면 이는 호랑이를 길러 근심거리를 남기는 것입니다.”
사면초가
유방이 이를 좇아 휘하 장수였다가 자립한 제나라 왕 한신(韓信)과 위(魏)나라 상국 팽월(彭越)에게 사자를 보내 초나라를 함께 칠 것을 약속했다. 이해 10월 한신과 팽월의 군사가 오기 전에 유방의 군사가 홀로 항우의 군사를 공격했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낙담한 유방이 장량에게 한신과 팽월이 명을 따르지 않는 이유를 묻자 장량이 이같이 대답했다.
“한신이 제나라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결코 대왕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팽월 또한 위나라 땅을 평정한 공으로 상국이 되었으나 위왕이 죽고 없는 마당에 아직까지 위왕이 되지 못했으니 그가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합니다. 속히 땅을 떼어주어 이들을 다독이십시오. 이리한 후 두 사람에게 초나라와 싸우게 하면 초나라는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유방이 장량의 계책을 좇았다. 이해 12월 항우는 한나라 연합군에게 대패해 해하(垓下·안휘성 영벽현 동남쪽의 12미터 절벽 아래쪽)에 이르게 되었다. 항우는 군사도 적고 식량도 다한 까닭에 이내 영루 안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제후들의 군사가 속속 도착해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하루는 밤중에 문득 사면(四面)에서 초가(楚歌·초나라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항우본기>는 당시 항우가 ‘사면초가’를 듣고는 크게 상심해 이같이 탄식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한나라 군사가 초나라 땅을 이미 모두 점거했단 말인가. 어찌해서 한나라 군사 속에 초나라 지역 사람들이 저토록 많단 말인가.”
대다수 사람들은 한나라 군사가 항우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초가를 부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그보다는 한나라 군사가 고향을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불렀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한나라 군사 역시 초나라 군사와 마찬가지로 관동(關東)의 초나라 출신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항우본기>는 항우의 부인 우(虞)미인을 끌어들여 당시의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 놓았다. 이에 따르면 ‘사면초가’에 잠이 깬 항우는 울적한 마음에 장막 안에서 술을 마시며 슬프게 읊조렸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하나(力拔山兮氣蓋世)
시운이 불리해 추(?) 또한 나아가지 않네(時不利兮?不逝)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不逝兮可柰何)
우(虞)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虞兮虞兮柰若何)
바로 후대에 널리 애송된 ‘해하가(垓下歌)’이다. <항우본기>는 항우가 비통함을 참지 못해 이내 우미인의 목을 친 뒤 애마에 올라타 휘하 기병 800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내달렸다고 썼다.
당(唐)나라 장수절(張守節)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그는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초한춘추>(楚漢春秋)를 인용해 우미인이 죽기 직전 화답했다는 ‘화해하가(和垓下歌)’를 실어 놓았다.
한나라 군사가 이미 초나라 땅을 차지하니(漢兵已略地)
사방이 항복한 초나라 병사의 노래뿐이네(四方楚歌聲)
초패왕의 뜻과 기개가 이미 소진되었으니(大王意氣盡)
소첩이 장차 어찌 홀로 살아갈 수 있으리(賤妾何聊生)
<초한춘추>는 유방의 책사인 육가(陸賈)가 지은 사서로 유방을 미화해 놓은 게 특징이다. 이는 현존하지 않는다. ‘화해하가’는 말할 것도 없고 ‘해하가’도 후세의 위작일 공산이 크다. <자치통감>이 ‘해하가’와 관련한 일화를 모두 빼버린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항우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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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우의 애첩 우희(虞姬). |
“왼쪽이오.”
이들은 이내 큰 늪 지역에 빠지고 말았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농부는 싸움이 속히 결판나기를 고대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추격거리가 좁혀지자 항우는 오강(烏江·안휘성 화현 동북쪽 오강포) 쪽으로 달려갔다. 오강의 정장(亭長)이 말했다.
“강동은 비록 작으나 땅이 사방으로 천리나 되고 수십만 명의 무리가 있으니 족히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은 속히 강을 건너십시오. 지금은 신(臣)만이 배를 갖고 있어 한나라 군사들이 이를지라도 결코 건널 수 없습니다.”
항우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는데 내가 강을 건너 무엇을 하겠는가. 게다가 나는 강동의 자제 8000명과 함께 도강해 서쪽으로 진격했다가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설령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왕으로 맞아준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설령 그들이 말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어찌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항우는 타고 있던 애마 ‘추’를 정장에게 내준 뒤 추격해 온 한나라 기병들과 싸웠다. 이때 한나라의 기병사마(騎兵司馬) 여마동(呂馬童)이 눈에 띄자 항우가 말했다.
“그대는 나의 옛 친구가 아닌가.”
여마동이 손가락으로 항우를 가리키며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이 사람이 항우이다.”
항우가 큰소리로 말했다.
“듣건대 나의 수급(首級)을 1000금(金)과 성읍 1만 호에 산다고 하니 내가 너를 위해 덕을 베풀겠다.”
그러고는 스스로 들고 있던 칼로 목을 찔렀다. 한나라 기병들이 그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항우본기>는 여마동 등 5명이 그의 시신을 나눠 가진 덕분에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항우의 식읍을 5개로 나눠 가졌다고 기록해 놓았다.
토사구팽
기원전 201년 겨울 10월,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제왕(齊王)에서 초왕(楚王)으로 자리를 옮긴 한신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상서를 올렸다. 유방이 진평을 불러 대책을 묻자 진평이 계책을 냈다.
“옛날에 천자는 순수(巡狩)를 하면서 제후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폐하는 거짓으로 노닐면서 제후들을 초나라의 서쪽 경계에 있는 진현(陳縣)으로 불러 모으십시오. 한신은 별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마중을 나올 것입니다. 이때 그를 잡으십시오.”
한신이 마중을 나오자 유방이 무사에게 명해 그를 포박해 후거(後車·군왕의 뒤를 따르는 예비용 수레)에 싣게 했다. 한신이 탄식했다.
“옛날 범려(范)가 월왕 구천(句踐) 곁을 떠나면서 ‘교활한 토끼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고, 높이 나는 새의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을 창고에 집어넣고, 적국을 격파하면 모신(謀臣)을 죽인다’고 말한 게 사실이구나. 천하가 평정되자 나 또한 팽(烹)을 당하는구나.”
유방은 천하에 대사령을 내린 뒤 그간 한신이 세운 공을 감안해 그를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한신은 회음후로 강등된 후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한번은 유방이 장수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유방이 한신에게 물었다.
“나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 수 있겠소.”
“10만명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어떠하오.”
“신은 ‘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
“그대는 ‘다다익선’이라고 하면서 어찌해 나에게 붙잡히게 되었소.”
뼈아픈 지적이다. 한신이 황급히 말을 바꿨다.
“폐하는 병사를 거느리는 데는 능하지 못해도 장수를 거느리는 데 능합니다. 이것이 제가 붙잡힌 이유입니다. 대왕은 하늘이 내려준 인물로 결코 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유방은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大風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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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韓信). |
유방은 한신을 ‘토사구팽’한 후 소하를 승상에서 상국(相國)으로 높이고 5000호를 더해 주었다. 문무관원이 찾아와 축하하자 식객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승상은 큰 재앙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친정에 나선 황상은 비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상은 조정에서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승상을 상국으로 높이고 식읍도 늘려주었으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오.”
“회음후가 모반을 꾀했기에 승상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것입니다. 속히 가산을 헐어 군비로 충당하십시오. 그래야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방은 소하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팽월과 영포 등을 차례로 ‘토사구팽’했다.
기원전 195년 10월 유방은 영포를 제압하고 귀경하던 중 고향인 풍읍에 들러 옛 친구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였다. <고조본기>는 그가 직접 축(筑·거문고와 유사한 13현 악기)을 타고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췄다고 기록해 놓았다.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도 올라가네 (大風起兮雲飛揚)
위세를 해내에 떨치고 귀향했다네(威加海內兮歸故鄕)
어디서 용사를 구해 사방을 지킬까(安得猛士兮守四方)
혜제와 여후
소위 ‘대풍가(大風歌)’이다. 여러 해석이 있으나 ‘대풍’은 유방 자신, ‘구름’은 항우를 비롯한 여타 군웅으로 해석하는 게 가장 그럴듯하다. 마지막 구절은 천하란 홀로 다스릴 수 없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항우의 ‘해하가’와 대비되는 구절이다. 유방은 ‘대풍가’를 부른 지 7개월 뒤인 이듬해 5월에 죽었다.
유방 사후 유방의 총애를 받았던 척부인(戚夫人)은 팔다리가 잘려나간 뒤 변소에 버려지는 소위 ‘인체(人?·사람돼지)’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소생을 태자의 자리에 올리려다가 실패한 후과이다. 모친 여후의 잔인한 처사에 충격을 받은 혜제(惠帝)는 주색에 빠져 지내다가 기원전 188년 2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혜제의 재위 8년 동안 여후는 사실상의 여황(女皇)으로 군림했다. 당제국의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비견할 만하다. 여씨 일족이 요직을 독차지하는 등 발호하기는 했으나, 그녀는 건국 초기였던 한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마천은 <여후본기>에서 그녀를 이렇게 칭송했다.
“여주인으로서 문밖을 나가지 않고 다스렸음에도 천하가 평안했다. 형벌을 드물게 쓰니 죄인 또한 드물었고, 농사에 힘쓰니 의식(衣食)은 더욱 불어났다.”
기원전 180년에 여후가 죽자 태위(太尉)로 있던 주발(周勃)은 즉각 여씨 일족 토벌에 나섰다. 유방의 부하 가운데 소하와 조참, 장량, 번쾌 등은 이미 혜제의 재위 중 세상을 떠난 까닭에 인물이라고는 오직 진평과 주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진평은 여후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짐짓 술만 마시는 등 도회술(韜晦術)을 구사하다가 여후가 죽자마자 주발과 결탁해 일거에 여씨 일족을 소탕했다.
정예주의를 이긴 잡색주의
중국의 역대 인물 중 항우만큼 극적인 삶을 산 인물도 그리 많지 않다. 약관 24세 때 거병한 그는 불과 3년 만에 천하를 호령하는 ‘패왕(覇王)’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골의 건달 출신 유방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2가지이다.
첫째, 귀족출신인 항우가 ‘정예주의’를 견지한 데 반해 서민출신 유방은 ‘잡색주의’를 취했다. 난세에는 귀족의 풍모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가 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둘째, 당시 제후들은 유방보다 항우를 더 위험시했다. 이들은 유방이 천하를 거머쥔 뒤 오히려 ‘토사구팽’에 앞장서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한신과 팽월, 영포 등이 머뭇거리다가 차례로 각개격파당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점은 당시 항우가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저항을 포기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점이다. 그가 강동으로 돌아가 다시 힘을 기른 뒤 재차 승부를 겨뤘다면 천하의 향배가 어찌될지 예단키가 어려웠다. 오왕 부차에게 패한 월왕 구천은 이보다 더 비참한 상황을 견뎌냄으로써 패권을 차지한 바 있다. 항우는 구천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포기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