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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6·25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경찰·공무원 가족

軍警에 죽으면 배상, 인민군·좌익에 죽으면 보상 없어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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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경에 의해 사망한 경우 1억5000만원 전후 보상… 총 8000억원 지급
⊙ 적대 세력에 의해 일가족 35명 한꺼번에 바다에 수장
⊙ 아이들 가마니에 넣어가자 장난인 줄 알고 웃어
⊙ 무고한 민간인 바다에 수장시키고 헤엄쳐 나오자 총으로 쏴 죽여
⊙ 경찰·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
6·25전쟁 당시 기독교인들이 북한 공산군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사진=전남 염산교회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는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사무실 앞에서 우리는 마르지 않은 눈물, 아우성을 만날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6·25 당시 가족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지금도 ‘제대로 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바로 김광동 상임위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김 상임위원 탓에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거부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왜 김 위원의 사퇴를 요구하는 것일까. 기자는 직접 이들의 주장과 김 위원의 입장을 들어보았다.
 
  김광동 위원은 “최근 들어 유가족들이 ‘진실화해위’ 건물 앞에서 나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곤 한다”면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적대 세력인 인민군과 좌익에 동조해 싸운 이들에게 보상을 해주면 이게 무슨 나라냐”고 말했다.
 
  김 상임위원 사퇴를 요구하는 유족 대부분이 6·25 당시 자의든 타의든 인민군과 좌익 세력 편에 서서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을 상태로 전투를 벌이다 희생된 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복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장은 “인민군이나 군경 어느쪽에 의해 돌아가셨든 보상을 해주는 것이 맞지 않으냐”면서 “이제 유족들이 대부분 90세가 넘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국가가 결론을 내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아버지는 6·25 당시 보도연맹에서 활동하다 군경에게 죽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일부 유족의 사퇴 시위에 대해 “그분(김광동)이 진상조사를 꼼꼼히 하다 보니 갈등이 빚어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적대 세력 동조해도 보상받는 대한민국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 회원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6·25 당시 북한 인민군과 빨치산 등 좌익 세력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에 대한 국가 보상은 지난 70여 년간 한 건도 없었다.
 
  반면 인민군이나 빨치산 등에 동조·가담한 민간인들이 ‘국군·경찰에 희생됐다’며 국가 배상금을 신청한 사례는 1년 8개월동안 3700건에 달한다.
 
  현행법상 ‘진실규명’ 결정을 받더라도 자동적으로 배상 혹은 보상을 받을 수는 없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진실규명’ 결정을 받고도 소멸시효가 지나 피해 구제를 받지 못했거나 국가가 배·보상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사례가 전체 희생자의 72% 정도로 추정된다. 직접 소송을 제기해야 배·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김광동 상임위원은 “개별 사건마다 배·보상의 불균형이 매우 심해 국민 통합에 저해되고, 화해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며 “과거사 사건 전반에 대해 배·보상 문제를 심의하는 법이나 기구가 만들어져서 일관되고 형평에 맞는 배·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1기 진실화해위(2005~2010년)도 활동 종료 후 정부에 6·25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에 대한 배·보상 특별법 제정을 권고한 바 있다. 이에 따라 20대 국회와 21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배·보상은 국가를 상대로 한 개개인의 소송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국민의힘 김용판 의원이 지난 1월, 6·25 당시 북한 인민군 등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민간인 유족에 대해 배상과 보상이 이뤄지도록 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존 법안의 경우 인민군과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유족은 가해 주체가 북한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배상을 받지 못했다. 가해자가 북한이기 때문에 북한에다 보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김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북한 인민군, 적대 세력과 그의 동조자 등에 의해 희생된 대한민국 국민을 ‘전쟁 희생자’라는 개념으로 정의·명시하고 이들에 대한 배·보상 근거와 절차를 마련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개정안은 현재 국회 논의 중인데 언제 국회 문턱을 넘을지 알 수 없다. 이런 가운데 대부분의 유가족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 80~90대 연세다.
 

  역설적이게도 6·25전쟁 전후 군경에 의해 사망한 이들의 유족들은 1인당 약 1억5000만원 전후로 보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지급된 금액만 약 8000억원 이상이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이들 중 상당수는 사실상 적대 세력에 동조해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군경에 맞서 싸우다 죽은 이들이다”면서 “하지만 유족에게는 자신들의 선대(先代)가 적대 세력에 동조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군경에 의해 희생됐고, 이를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6·25 당시 인민군이 후퇴하고 빨치산에서 활동한 김용명(가명)씨가 있다. 군경은 인민군 후퇴 이후 남아 있는 적대 세력의 잔당(殘黨)을 소탕하기 위해 토벌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빨치산 근거지에서 군경을 상대로 전투하다 군경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또 다른 사례로 빨치산 소굴로 알려진 곳에 있던 최순덕(가명)씨는 군경의 토벌을 피해 도망치다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배·보상 신청자 중에는 이런 사연을 가진 유가족이 대부분이다.
 
  이들처럼 적대 세력에 동조해 군경과 맞서 싸웠다고 피아(彼我)를 솔직히 공개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세한 내용 없이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고만 적는다.
 
 
  일가족 36명 몰살… 아이들 가마니에 넣어 바다에 던져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학살된 민간인들의 모습. 사진=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안타까운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진실화해위를 찾은 김동재씨는 6·25 당시 가족을 포함해 일가 36명을 잃었다. 36명 중 김씨의 형(김수현)은 전남 장흥군 대덕읍 신리에서 옹암리로 가는 길에 희생됐고, 나머지 가족 35명은 옹암리 바다로 끌려가 수장(水葬)됐다. 시신은 넓게 펼쳐진 옹암리 앞바다 갯벌에서 발견되거나 파도에 떠밀려 왔다고 한다. 김씨 일가족의 떼죽임은 당시 장흥군 일대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씨 가족 중 그의 삼촌 도순씨와 칠순씨만이 살아남았다. 김도순씨는 다른 지역에 피신해 있다가 화(禍)를 면했고, 김칠순씨는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도순씨의 경우 출타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을 주민이 “자네 식구들 다 죽이고 있으니 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 피신했다. 부유한 데다 일찍 신문명의 세례를 받아 식자층이 많은 것이 김씨 일가를 집중적으로 살해한 이유라는 게 당시 사건을 증언한 마을 주민들의 주장이다.
 
  안타까운 희생 당시 신월리 축내마을에 거주하던 참고인 곽명도(가명·당시 17세)씨는 “대덕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김도순 일가족이 몰살당한 이야기를 들었고, 희생자 가족 중 두 사람(도순, 칠순)만 살아남았다”고 진술했다.
 
  같은 마을에 살던 곽명식(당시 21세)씨는 “대덕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김도순씨 일가족이 모두 희생당했는데 가족들을 바다에 가서 빠뜨렸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은 큰 가마니에 넣었는데 영문을 모르던 아이들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다른 마을에 거주했던 이경만(가명·당시 10세)씨는 “옹암리는 전부 좌익들이어서 좌익에 의한 희생이 많았다. 김도순씨가 전남도 교육감 등을 지냈는데 그 집안 가족 모두가 옹암리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 집안이 잘살고 똑똑하니까 좌익들이 그 가족들을 다 죽였다”고 증언했다.
 
 
  좌익들, 얼굴에 고춧가루 뿌리고 몽둥이로 구타
 
  옹암리에 거주했던 참고인 김덕순(가명·당시 17세)씨는 “마을 인근 산에서 보초를 서다가 좌익들이 배 두 척에 사람들을 나눠 태우고 나가 빠뜨리는 것을 봤다. 익사한 시신이 바닷가로 밀려왔고,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해 마을회관 앞에 늘어놓았다. 김도순씨가 뒤늦게 찾아와 다른 시신은 젖혀두고 ‘형님 김기순(김동재씨 부친) 시신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본 뒤 시신을 확인하고 오열했다”고 말했다.
 
  김동재씨의 형인 수현씨는 당시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었다. 전쟁 발발 후 고향으로 오던 길에 같은 마을 출신 좌익들에 의해 희생되었다. 시신은 김도순씨가 수습했다.
 
  참고인 박남정(가명·71)씨는 “김수현씨와 함께 있다 살아남은 아버지(박종완)로부터 당시 사건에 대해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렇다.
 
  옹암리 출신으로 서울대 동문이던 김수현과 박종완이 마을에서 만났을 때 김수현이 “옹암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옹암리로 가보자”라고 했고, 두 사람은 가던 길에 좌익들을 만났다. 같은 마을 출신으로 아는 사람이어서 김수현은 “다 아는 사람들인데 설마 우리를 죽이겠어”라고 했지만, 좌익들은 주머니에서 고춧가루를 꺼내 두 사람 눈에 뿌렸다.
 
  박종완은 모내기를 위해 물을 가둬둔 논으로 뛰어가 눈을 씻고 갯벌로 도망쳤다. 박종완은 뒤에서 김수현이 구타당하는 소리, 고함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대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는 이후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환청에 시달렸다고 한다.
 
  신청인 김동재씨는 “당시 같은 마을 출신 박재인(가명)이 빨간 완장을 차고서 손가락질만 하면 다 죽던 시절이어서 마을 사람들도 김씨 일가족이 죽는 것을 목격하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한테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2002년 《월간조선》은 1952년 3월 31일 당시 이승만 정부의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6·25사변 피살자 명부》를 국립중앙도서관과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견해 책으로 출간했다. 이 명부에 김씨 부친과 삼촌 김기백·기성 등이 1950년 10월 1일 대덕면 옹암리에서 희생되었다고 등재되어 있다.
 
  제적등본과 《6·25사변 피살자 명부》에 실린 이름, 수장 현장을 목격한 참고인의 진술 등을 종합하여 김씨 일가족 36명이 1950년 10월 초 좌익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진실화해위는 판단했다.
 
  이렇게 적대 세력에게 억울하게 희생됐지만 현재 이들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배상이나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배·보상 책임이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김광동 상임위원은 “우리나라 역사상 36명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사례는 없을 것”이라며 “이런 사건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친척이 경찰이란 이유로 16명 일가족 죽창에 찔려 희생

 
  진실규명 신청인 강성식씨는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1950년 10월 2일 일가족 16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강씨 집은 많은 전답에다 집 안에 목욕탕이 있을 만큼 살 만했다고 한다. 조부 강주삼은 일꾼을 데리고 농사를 지었으며,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에 소유 산이 있을 만큼 부유했다. 부친 강상국은 일제강점기 ‘농민결사’ 관련 활동을 한 독립유공자다.
 
  형 강인홍은 당시 장흥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석 달 후에 대한민국이 복구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전단을 돌리다가 붙잡혀 감금되었다가 추석 전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러고 얼마 후 가족들과 함께 희생됐다. 경찰관이던 강씨의 삼촌 강상민은 여순사건 당시 전사했다.
 
  관련 증언을 종합하면, 강씨 일가족 16명은 좌익들에 의해 마을회관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대덕초등학교 뒤 야산으로 끌려가 몽둥이로 맞고 죽창에 찔려 희생됐다. 강씨는 가족들이 끌려가던 날 밤, 다른 방에서 자고 있어 끌려가지 않았다. 강씨의 누이인 강연옥(가명)은 그날 밤 삼촌 강상근의 집에서 잤기 때문에 희생을 면할 수 있었다. 강연옥은 이튿날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어 가족들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러다 초등학교 동창들에게 잡혀 학교로 끌려갔다. 강씨를 끌고 간 동창들은 좌익의 자식들이었다. 당시 학교에는 면장과 경찰관 자녀들이 끌려와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친구이고 이념의 때가 덜 묻어서인지 “살려주자”고 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참고인 강영락(가명)씨의 진술에 따르면 같은 날 강(성식)씨 숙모의 오빠인 김철강(가명)도 경찰관이었는데 그의 가족 4명도 끌려가 희생됐다. 마을 좌익들은 강씨의 가족 16명과 숙모 오빠의 가족 4명까지 모두 20명을 한 구덩이에 몰아넣고 생매장했다.
 
  가족 중에 경찰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민군과 좌익 세력에 무고하게 희생된 희생자는 4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제대로 된 명예회복이나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경찰청 차원에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기자는 이와 관련해 경찰청에 6·25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경찰관들과 그의 가족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이 이뤄지고 있는지 문의를 했다. 경찰청 역사기록계 관계자는 “6·25전쟁 당시 피해 경찰관이나 그 가족들에 대해선 역사기록계에서는 담당하지 않고 있다”면서 “다른 부서에서 하고 있는지 파악한 후에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연락이 없었다.
 
 
  구덩이서 빠져나오려 하자 좌익들 죽창으로 찔러
 
  신청인 김기홍씨는 1950년 10월 1일 잘산다는 이유로 일가족 12명을 모두 잃었다. 김씨의 큰할아버지 김병식은 광주농고 1회 졸업생으로 고향에 내려와 해태조합(현 수산업협동조합)에 근무한 적이 있고, 기와공장을 운영했다. 김씨 조부 김준식도 광주농고 졸업 후 금융조합과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일가족이 희생된 그날, 마을 좌익들은 김씨 조부의 집으로 쳐들어와 어린 아기와 일꾼, 연로한 증조부와 증조모만 남겨놓고 모두 끌고 갔다. 국군이 마을을 수복한 후 가해자들을 심문, 이들에게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참고인 김처선(가명)씨는 “시신은 수복 후인 음력 10월 11일 수습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어 누가 수습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으나 총을 든 경찰이 있었다. 또 구덩이에서 시신을 꺼냈는데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관정 옆 냇가에서 양동이로 물을 퍼다 시신을 씻고 큰 집 밭에 매장했다”고 진술했다.
 
  김씨 사촌 김영심(가명)씨는 당시 사건을 목격한 마을 주민들로부터 다음과 같이 전해 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김준식)가 좌익을 피해 산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할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하루에 한 번씩 밤늦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할머니는 누가 따라올까 봐 몰래 다녔는데, 매일 좌익들이 감시하고 집에도 찾아오니까 며칠 동안 음식을 가져갈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구하려고 나왔고, 누군가 할아버지를 목격하고 좌익들에게 일러 할아버지는 끌려가 총살됐다. 총살되던 날 밤, 좌익들이 집으로 와서 가족들을 끌고 가 구덩이에 산 채로 밀어넣었다. 큰아버지 김진환·창환이 ‘우리가 무슨 죄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 하자 좌익들은 죽창으로 찌르며 다시 밀어넣었다고 한다. 당시 할머니가 만삭이었는데 다른 임신부 두 명은 살려주었지만 할아버지가 좌익들에게 눈엣가시여서였는지 할머니는 살려주지 않았다.”
 
  김씨 가족의 희생 사실 또한 《6·25 사변 피살자 명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민군, 좌익 앞세워 무고한 주민 36명 학살

 
  6·25 당시 피살된 5만9964명 가운데 전남 지역 사망자가 72.6%(4만3511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 영광군 지역에서 숨진 희생자가 2만1225명에 달했다.
 
  1950년 7월 23일. 전라남도 영광 지역이 인민군에게 점령됐다. 영광을 점령한 부대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이었다. 영광에 들어온 인민군은 해방 이후 남로당과 빨치산 활동을 해온 이들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통치했다.
 
  노동당 영광군위원회(위원장 정태송)는 영광면 도동리에 자리 잡았다. 인민위원회는 군청에, 내무서는 경찰서 자리에 들어섰다. 이들은 점령 직후 인민재판을 열고 군수, 읍장, 은행장 등 우익 인사들을 잇따라 처형했다. 좌익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군경이 수복 작전을 시작하고 더욱 극심해졌다. 영광 지역은 수복이 늦어지면서 후퇴했던 좌익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와 군경 가족이나 우익 가족, 빨치산에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모두 살해했다.
 
 
  좌익들, 공무원·경찰가족 모조리 처형
 
  진실화해위는 1950년 8월부터 11월 사이 영광 지역 주민 350명이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밝혔다.
 
  적대 세력에 희생된 이들 중에 당시 가족 19명을 억울하게 잃은 이가 있다. 바로 진실규명 신청인 김종기(가명)씨다. 김씨의 가족은 공무원이면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지역 좌익들에게 희생당했다.
 
  김씨의 조부 김원진(가명)씨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었고 당시 마을 교회 장로였다. 자연히 김씨의 집안은 교회 신자가 많았다. 가족 중 한 명은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인민군은 완장을 찬 마을 좌익들을 앞세워 주민들을 모두 저수지 인근 정자나무 밑으로 모이게 했다. 이들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씨 일가 19명, 박정도(가명) 가족 7명, 임택길(가명) 가족 10명을 죽창으로 무참히 찔러 죽였다.
 
  참고인 김덕상(가명·김종기씨 이웃)씨는 “6·25 당시 좌익들은 김씨 일가의 세 살, 다섯 살 어린아이들까지 죽창으로 살해했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빨치산과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살해한 것”으로 기억했다. 좌익들은 김씨 가족뿐만 아니라 지주, 공무원과 그의 가족들까지 죽창으로 끔찍하게 살해했다.
 
  진실규명 신청인 지현서(가명)씨의 가족은 부친이 면장을 하고 큰오빠가 은행원이란 이유로 좌익들에게 학살당했다. 좌익들은 먼저 면장 출신인 지씨 부친을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그러고 좌익 세력을 피해 숨어 있다가 집 담을 넘어 도망치던 큰오빠를 살해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 집에 남아 있는 가족 7명을 모두 끌고 가 죽였다. 희생자 중에는 10세미만 등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좌익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부유하거나 공무원과 경찰 가족이면 모조리 잡아다 처형했다는 것이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의 증언이다.
 
 
  복길마을 희생 사건, 한 마을에서 86명 희생
 
  1950년 7월 인민군 6사단 제13연대는 목포로 가는 길목인 무안군 청계면을 점령하고 1개 분대를 복길마을로 보냈다. 이들은 후퇴할 때까지 복길교회에 상주하며 이 지역을 점령했다. 복길마을 주민들은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인민군에게 이불과 식량을 제공했다. 인민군들은 마을에서 매일 교육과 회의를 하면서 주민들을 세뇌시켰다. 당시 인민군들은 교육이나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주민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구타하는 등 강압적으로 통치했다고 한다.
 
  복길마을은 1927년 설립된 복길교회로 인해 마을 주민의 80%가 신자들이었다. 인민군과 좌익들은 이 마을을 우익 기독교 마을로 인식했고, 퇴각 시 이들을 바다에 수장하거나 마을 뒷산에 생매장해 죽였다.
 
  인민군 주둔 이후부터 퇴각할 때까지 희생된 주민이 86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민군과 마을 좌익들은 주민들을 배에 나눠 타게 한 뒤 바다로 나가 그대로 수장시켰다. 바다에 빠진 마을 주민 중에는 헤엄쳐 해변으로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겨우 헤엄쳐 나왔지만, 해변에는 인민군과 좌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해변으로 나온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죽창으로 찔러 그 자리에서 죽였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당시 앞바다에서 오전에 시작된 총소리가 오후까지 들렸다고 한다.
 
  일부 주민은 산으로 끌고 가 구덩이를 파게 한 다음 그곳에 밀어넣고 생매장했다.
 

  진실규명 신청인 정삼성(가명)씨의 부친은 당시 면사무소에 다녔고 적대 세력이었던 같은 마을 주민의 상가에서 “대한민국이 되돌아온다. 좌익 세상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좌익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씨 부친은 이후에도 좌익들과 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좌익들은 눈엣가시였던 정씨 부친을 몽둥이로 때려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한 다음 그대로 산에 묻어버렸다.
 
  김정태(가명)씨 부친은 마을 구장(區長)이었다. 부친은 일본 유학도 다녀온 지식인이었다. 구장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 이념을 신봉하던 좌익들을 훈계한 일이 있었다. 전쟁이 나자 이들은 우익 성향 구장이라고 밀고했다. 이후 김씨 가족들은 유치장에 감금된 부친에게 밥을 날랐다. 그러던 중 하루는 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희생된 것이었다. 좌익들이 김씨 부친과 당시 경찰, 구장, 면사무소 직원 등 우익 인사 19명을 뒷산으로 끌고 가 처참하게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밖에 경찰, 공무원, 부유하다는 이유만으로 적대 세력에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사례가 계속해서 진실화해위에 접수되고 있다.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진실규명 신청서에는 저마다의 눈물겨운 사연이 빼곡히 명시되어 있다. 물론 신청인들의 기억 이외 주변 사람들의 증언, 진실화해위의 조사내용도 포함돼 있다.
 
 
  인민군 점령 때 부친 인민위원장까지 했지만 무고 주장
 
  반면 앞서 언급했지만, 군경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신청서에는 구체적인 증언이나 기록 등이 빈약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일부 진실화해위 측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이들에 대해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은 것”도 사실로 보인다. 또한 “과거의 행적을 숨기고 단순히 경찰이 와서 이유 없이 잡아갔다”는 내용만 적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신청 사례를 살펴보면 이랬다.
 
  이원식(가명)씨의 아버지는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동네에서 높은 직책에 있었던 김덕만(가명)씨는 이씨 아버지에게 어떤 활동을 권했지만, 아버지는 사양했는데 이름이 올라갔다 한다. 김씨는 수복 시 피신해 생존했고, 후에 초대 면의원을 지냈다고 한다. 1950년 9월 27일 밤 선발대 군인이 인민군에게 협력했던 사람들 명단을 가지고 사람들을 잡아갈 때 이씨 아버지도 데려갔다고 한다.
 
  국군은 부역한 주민들을 총살하면서 이씨 아버지도 불러냈다. 이씨 아버지는 현장에서 도주하였다가 붙잡혀 총살됐다. 진실화해위 1기는 이씨 아버지에 대해 ‘희생’이라고 명시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경찰서 ‘부역자 명부’에는 이씨 아버지가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씨 증언대로 김덕만의 잘못으로 인해 이름만 올라간 것치곤 인민위원장 자리는 상당히 ‘무게’가 있는 자리다.
 
  또한 이동문(가명)씨 가족은 전쟁이 터지자 동네 골짜기로 피란을 갔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있는데 경찰이 와서 이씨 아버지를 데려갔다. 이씨 아버지는 싸우거나 저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씨 아버지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하루 이틀 있다가 올 거니까 기다려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고 얼마 지나 총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신을 확인하지 못해 지금까지 사망신고도,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도 진실화해위에서 ‘희생 추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해당 지역 경찰서 ‘신원기록현황’에는 이씨 아버지가 인민군 점령 당시 ‘내무서 서원’으로 활동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내무서 서원이면 현재 북한의 보위부 지도원(국정원 격) 직책이다.
 
  이 밖에도 기자가 검토한 결과, 대부분의 진실규명 신청 내용이 ‘길을 가다가 군경이 쏜 총에 맞아 희생됐다’는 주장이었다. 적대 세력에 가담했음에도 이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희생자 진실규명 신청 却下하기도
 
  진실화해위 한 관계자는 “접수된 내용이 너무 미약해 조사하다 보면 희생자가 인민군 잔존 세력과 좌익 빨치산에 동조해서 싸우다 군경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대부분”이라며 “어떤 이들은 실제 희생된 것이 아니라 월북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이들 가운데 빨치산 근거지에서 군경에 맞서 전투를 벌이다 죽은 이들도 있는데, 자신들은 무고하게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고 주장하면서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고 군경을 상대로 싸우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무고할 수 있느냐”고 했다.
 
  최근 진실화해위는 적대 세력에 맞서 싸우다 죽은 희생자들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조사 개시도 하지 않고 각하(却下)시키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들어 진실화해위가 각하시킨 사건을 살펴보자.
 
  하종훈(가명)씨의 부친은 미군에게 차출되어 군수 물자를 나르는 일을 하게 됐다. 그는 미군들을 따라 전장을 오가며 물자를 운송했다. 그러던 중 미군과 인민군의 전투가 벌어지게 됐고, 하씨 부친은 그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다. 당시 입었던 부상으로 인해 끝내 사망했다. 그런데 진실화해위는 해당 사건이 진실규명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각하시켰다. 이유는 교전 상황에서 입은 부상은 진실규명 범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적대 세력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됐지만 이들 유족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해당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미래가 불투명하다”면서 “이 밖에 인민군이나 적대 세력을 돕다 죽은 이들에 한해 배상과 보상을 받지 못하게 하는 법도 함께 나와야 한다. 나라를 부정해 국군과 경찰을 죽이는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국가가 왜 배상을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6·25 당시 북한 인민군 등 적대 세력에 희생된 민간인 유족에 대해 배상과 보상이 이뤄지도록 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한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은 “야당 의원들도 개정안에 동의하고 비슷한 법안을 발의했다. 적대 세력에 무고하게 희생된 유가족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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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그네    (2022-12-05) 찬성 : 7   반대 : 0
종북좌파 똘갱이들, 이런 사실은 외면하고 관심도 없지? 공산군이 죽인 양민의 수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잊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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