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세에 정치 입문, 야당 홍보담당→여당 부대변인·대변인→국회의원→장관까지 입지전적 인물
⊙ ‘수첩공주’ 신조어 만드는 등 언론 감각 탁월… 정당 TV모니터링 선구자로 불리는 ‘언론통’
⊙ 한나라당에서도 “우리도 김현미 같은 인물 있었으면…”
⊙ 노무현 청와대 출범 당시 참모들의 “안 예쁘다” 지적에 靑 대변인직 놓치기도
⊙ 기재위·예결위 경력으로 국토부 장관 발탁 “86세대 중 그나마 경제 아는 사람”
⊙ 주변에선 근성과 권력욕·야심 인정, 여성가족부 장관 언급에 “그런 자리는 안 간다”
⊙ 대통령의 무한신뢰, 비서실장說에 경제부총리 승진說도… ‘순장조’ 유력
⊙ 역대 대통령들의 측근이면서 대권 주자 이낙연·이재명과도 호흡 잘 맞는 관계 “정치적으로 더 성장할 가능성 커”
⊙ ‘수첩공주’ 신조어 만드는 등 언론 감각 탁월… 정당 TV모니터링 선구자로 불리는 ‘언론통’
⊙ 한나라당에서도 “우리도 김현미 같은 인물 있었으면…”
⊙ 노무현 청와대 출범 당시 참모들의 “안 예쁘다” 지적에 靑 대변인직 놓치기도
⊙ 기재위·예결위 경력으로 국토부 장관 발탁 “86세대 중 그나마 경제 아는 사람”
⊙ 주변에선 근성과 권력욕·야심 인정, 여성가족부 장관 언급에 “그런 자리는 안 간다”
⊙ 대통령의 무한신뢰, 비서실장說에 경제부총리 승진說도… ‘순장조’ 유력
⊙ 역대 대통령들의 측근이면서 대권 주자 이낙연·이재명과도 호흡 잘 맞는 관계 “정치적으로 더 성장할 가능성 커”
문재인 정권이 1년 반을 채 남기지 않은 2020년 가을 현재, 이 정권의 장관 중 국민의 속을 가장 까맣게 태운 장관 중 한 명이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라는 데 이견을 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부는 3년 반 동안 20번이 넘는 부동산정책을 내놓았지만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임대차법까지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키면서 전세가도 폭등해 전셋집마저 구할 수 없게 된 수도권의 서민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현 정부를 비판한 ‘시무7조’로 화제를 모은 익명의 필자 ‘진인 조은산’은 김 장관을 ‘3인의 역적’(추미애·노영민·김현미) 중 한 사람으로 지칭한 바 있다. 김 장관을 머리 나쁜 물고기인 ‘붕어’에 비유하기도 했다. 조은산은 “김현미는 국토부 수장의 자리에 오른 이후 여태까지 스물두 번의 정책을 남발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고 오십보백보 따위의 우책으로 또다시 백성들을 우롱하며 또한 그것이 스물두 번인지 네 번인지 기억도 못 하고 있사온데 김현미를 파직하시고 그의 자리에 ‘붕어’를 쓰시옵소서”라고 비꼬았다.
3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문재인 정부의 콘크리트 지지율이 사실상 부동산 문제 하나로 흔들렸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던 청와대 참모들은 다주택자라는 ‘빨간딱지’가 붙으면서 줄줄이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정작 부동산정책의 책임자인 국토부 장관은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야당의 갖은 공세에도 불구하고 “살 집 아니면 팔아야 한다” “집값이 안정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집주인이 어려워졌다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으면 된다” “주택 매매자는 전세가 4년이라고 생각하고 거래하라” 등 발언으로 편가르기 정치를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도 국민들로부터 욕을 먹다 보니 심지어 일각에서는 “김 장관이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집값이 계속 오르는 게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야당에 유리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9월 22일이면 재임 3년 3개월로 역대 국토부 장관 중 최장수를 기록하게 되는 김 장관이 이토록 오래 자리를 지키면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현미 장관의 정치 인생에 그 답이 있다.
김현미 장관의 정치 인생은 크게 4기(期)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야당 언론·홍보 담당 당직자였던 1987~1997년, 2기는 여당 부대변인과 대변인으로 활동한 1998~2004년, 3기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2004~2017년, 4기는 국토부 장관으로 재직 중인 2017년~현재다. 김 장관은 33년간 큰 물의 없이 정치를 해왔고 여당과 언론에서 김 장관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발이 넓은 정치인이다.
야당에서조차 “우리는 김현미 같은 사람 없나”라는 말이 종종 나올 정도로 정치인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최대 정치적 위기는 ‘공공의 적’이 된 바로 지금이다. 중견 기자들 사이에서는 “김현미가 이 정도로 욕을 먹는 정치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반응이 나온다. 김 장관의 33년 정치 인생을 짚어봤다.
1기 | 야당 홍보담당자
김 장관은 1962년 11월 26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1남 7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의원인 고(故) 김종문 의원이며 아버지는 고(故) 김병태 전 정읍시의회 의장이다.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81학번)에 다니며 학생운동권이 됐다.
졸업 후 인천의 한 제조업체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잠시 쉬던 김현미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다. 딸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는 것을 반대하던 부모가 취업을 적극 권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정치적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게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홍보를 담당할 비서진을 충원하는데 그가 홍보담당자로 채용된 것이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평화민주연합(평민련) 당보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대권 후보 단일화를 거부하고 같은 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김현미 장관은 김 전 대통령을 따라 평민당에 참여하면서 평민당보 기자가 된다. 당시 재야 출신으로 평민당에 입당한 정치인은 이해찬, 임채정, 박영숙, 문동환 등이 있다.
대선을 앞두고 당보는 김대중 후보의 연설문과 현장 분위기를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김현미 ‘기자’는 당시 김 후보를 따라 전국 연설 현장을 누비며 현장 연설을 녹취해 글로 풀었다. 평민당보를 거쳐 간 인물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 안규백 의원이 있다. 김 장관은 당보 기자 당시 26세로 “(김대중 후보와 그 측근들로부터) 무한 사랑을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 장관 초선의원 시절 인터뷰했던 전직 기자의 얘기다.
“어릴 때부터 ‘파이터’ 기질이 있었다고 해요. 호불호가 강하고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거죠. 운동권 선배들도 ‘성질이 보통 아니다’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대학 때는 아버지가 데모 못 하게 가둬놓으니까 담 넘어 도망가고 하면서 부모와 충돌이 많았죠. 노동운동한다고 공장에 갔을 때도 부모가 얼마나 속을 끓였겠어요. DJ가 사람 뽑는다니 부모가 등 떠밀다시피 해서 취업시켰다고 합니다.
평민당에 들어간 후엔 20대 여성이 활보하고 다니니 귀엽게 보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버릇없다고 밉게 보는 사람도 있었겠죠. 정치권에 젊은 여성이라곤 전화 받는 비서나 서기 정도밖에 없던 시절이니 김현미의 존재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권에 입문한 초반부터 김현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건 그의 정치 행보에 크게 유리한 점이었어요.”
對언론 업무만 15년
김 장관은 평생의 인연도 이때 만난다. 두 살 연상인 남편 백장현씨와는 1987년 출범한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백씨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서울대를 졸업한 후 운동권 출신들과 함께 평민연에 들어왔고, 정책실장으로 활동했다.
백씨는 결혼 후 둘 중 한 명은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한동안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다 김 장관이 청와대를 거쳐 국회의원이 되면서 가정형편이 안정을 찾자 백씨는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을 주제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한신대 초빙교수와 인천대 연구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평민당은 1990년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 출범 후 세가 크게 줄었고, 1991년 신민주연합당으로 명칭을 바꿨다가 같은 해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과 합당해 통합민주당이 된다. 이 통합민주당이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이다. 김 장관은 통합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으로 당명이 바뀌는 동안 TV모니터링팀장, 기획부 국내언론 비서관실 부장, 부대변인, 공보실장 등 쭉 대(對)언론 업무를 15년여간 맡아왔다.
특히 이전까지 정당의 홍보 및 대언론 업무가 기자들을 상대하고 신문기사에 대응하는 수준이었던 것에 비해 김 장관은 TV를 중심으로 새로운 홍보전략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97년 대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기획조정실 언론분석부 TV모니터팀 팀장을 맡았다.
TV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토론 모니터링을 통해 방송국의 편파성 지적과 대응방안을 마련했고, 선거를 앞두고 TV 토론을 어떻게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것인지 전략을 세우기도 했다. “뉴스에 여당 대표는 30초 나왔는데 우리 대표는 10초밖에 안 나왔다”거나 “상대 후보의 문제성 발언과 행동은 편집해주고 우리 후보의 것은 그대로 내보냈다”며 방송국에 항의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민주당은 당내 TV 모니터링 시스템이 탄탄하게 구축돼 있고, 종편(종합편성채널) 출범 후에는 종편 역시 꼼꼼하게 모니터링했다. 불공정한 보도가 있으면 즉시 방송통신위원회에 민원을 넣는 ‘애프터서비스’까지 당의 업무다. 야당도 사무처에 미디어국을 신설하는 등 비슷한 조직을 만들었지만, 20년 이상 이어진 민주당의 노하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다. 민주당에서 자리 잡은 이 같은 언론 모니터링은 2017년 대선 성공의 요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2기 | 여당 부대변인·대변인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에 공을 세운 김 장관은 1998년 1월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임명받는다. 36세 여성이 여당 부대변인이 된 것이다. 지금은 당 부대변인이 수도 많고 중책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당시엔 언론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대응하는 요직이었다.
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 청와대 홍보수석실 국내언론비서관이 될 때까지 약 5년간 ‘김부(김부대변인)’로 불리며 최장수 부대변인 기록을 세웠다. 그가 부대변인으로 일하는 동안 거쳐 간 대변인만 12명이다. 기자실을 거쳐 가면서 ‘김부’와 막역하게 지냈던 기자는 1000명이 넘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를 출입했던 전직 기자는 “각 언론사 말진까지 살뜰히 챙기는 부대변인은 처음이라 고마웠다”며 “단순히 기자들을 챙기는 수준이 아니라 고위 당직자들과 친밀한 관계여서 나 같은 말진에게도 고급 정보를 주곤 했다”며 대부분의 기자가 일이 있으면 ‘김부’부터 찾았다고 전했다.
이처럼 김 장관은 당과 언론의 대화 채널 역할을 하며 부대변인 역할을 확실히 했다. 이후 유은혜, 서영교 등 당직자 출신 여성 부대변인이 등장한 것도 김 장관의 성공 사례 때문이다.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비서관을 거쳐 당직자로 일했던 A씨는 “그동안 우리 정치권에서 눈에 띄지 않는 부대변인이라는 역할을 중책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김현미”라며 “그전까지는 부대변인이 대변인을 보좌하는 역할이나 명목상의 당직 정도로 여겨졌지만, 김현미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 지망생들이 부대변인 자리를 얻고자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했다. 그는 또 “TV모니터링 등 부대변인의 새로운 업무를 개척해낸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언론계에서 김현미 장관의 존재감이 워낙 독보적이어서 당시 야당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2001년 7월15일자 《매일경제》에는 이런 기사가 나온다.
〈한나라당이 여성 부대변인 찾기에 발벗고 나섰다. 민주당 김현미 부대변인의 입심에 맞설 대항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1997년 당보 기자를 최초로 공개채용했고, 2002년 당직자 출신 20대 여성 부대변인을 임명했다. 이때 당보 기자 출신인 김현미 부대변인이 모델이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김현미 대변인’의 촌철살인은 지금도 회자된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며느리의 미국 출산에 대해 ‘원정출산’이라는 단어를,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붙인 사람도 김현미 장관이다.
노무현 청와대 대변인이 못 된 이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인 2003년 초 당선인 부대변인이었던 김 장관은 노무현 청와대의 초대 대변인으로 유력했다. 노무현 당선인은 초대 대변인에 반드시 여성을 임명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당선인 시절 부대변인을 지내며 당과 당선인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는 한편 언론과 관계가 끈끈한 김 장관이 1순위였다고 한다(당시 노무현 당선인 대변인은 이낙연 현 민주당 의원이었다).
그러나 김현미 대변인 임명안(案)은 일부 참모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외모가 예쁘지 않아 ‘청와대의 얼굴’인 초대 대변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치권이 여성 정치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해프닝이다. 결국 초대 대변인 자리는 정치권과 관련이 없던 아나운서 출신 여성에게 돌아갔고, 김 장관은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으로 임명받았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전직 비서관의 얘기다.
“안 예쁘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그것보다 노무현 정권은 과거 정권과 달리 신선함과 탈권위주의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에 오래 있었던 김현미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었던 거죠. DJ 직계에 정동영계라고, 또 친노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당내에는 김현미에 대적할 만한 대변인 후보가 없다 보니 아나운서 출신 영입 인사를 데려온 거죠. 그런데 대변인이 기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도 못 하고 기자들과 스킨십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후회가 청와대 내에서도 많았습니다.”
김 장관의 청와대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와 열린우리당 분당, 이어지는 총선 등 정치 환경이 급변하면서 여당이 그를 원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 국내언론비서관과 정무2비서관을 지냈던 그는 2004년 4월 17대 총선을 석 달 앞두고 열린우리당 공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열린우리당 총선기획단 부단장 겸 상황실장으로 활약한 김 장관은 비례대표 11번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다.
3기 | 국회에서 경제 공부
김 장관이 국회에 입성하면서 주변에서는 그가 날카로운 언변으로 화려한 정치 활동을 펼칠 것으로 기대했다. 국회의원이 된 김 장관은 초선임에도 열린우리당 경기도당위원장, 원내부대표, 대변인 등 주요 당직을 맡는다. 특유의 권력욕과 근성이 빛을 발해 주목받기도 했다. 2005년 7월 한나라당의 유승민 대표비서실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에도 김현미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당 일에 대해서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독종”이라고 평가했다.
김 장관은 열린우리당 내 ‘정동영 직계’로 불렸다. 지역(전북 전주) 연고 덕에 정 의장과 가까웠던 김 장관은 1998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정동영)과 부대변인(김현미)으로 호흡을 맞췄고, 정 의장이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완주할 때 끝까지 도운 바 있다.
그런 인연으로 2007년 대선에서도 김 장관은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을 맡았다. 그러나 정동영 후보의 참패는 정치인 김현미에게도 암흑기의 서막이었다. 김 장관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도전하기 위해 경기 고양일산을에 출마했지만 현역인 김영선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했다. 정동영계로 찍히면서 당내에서 활동 반경이 좁아졌다는 시각이 있었다.
10년간 여당의 부대변인과 대변인, 청와대 비서관과 국회의원을 지내며 승승장구하다 일순간 야당 원외 정치인이 된 그는 ‘이렇게 열심히 정치를 해왔는데 왜 낙선했는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는 2011년 펴낸 저서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동안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갖고 왜 민주정부가 외면받았는지 고민했다. 간절하고 고단한 서민들의 삶을 외면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했다. 비슷한 나이의 여성들을 만나기로 마음먹고, 마트, 급식소, 요양원, 공장 등에서 일하는 40~50대 주부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계파 싸움 멀리 해
이때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강한 아줌마, 약한 대한민국》(2011년, 메디치미디어)이다.
원외로 지내는 시간 동안 지역구를 누비고 사람을 만나며 절치부심하던 김 장관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다시 맞붙은 김영선 새누리당 의원을 꺾고 재선에 성공한다.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전략홍보본부장 등 당직을 맡다 2015년에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비서실장이 된다. 문 대표가 비서실장을 제안했을 때 “지역구 의원이라 가까이서 도와드리기 힘들 것 같다”고 사양했지만, 문 대표는 “비서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정무적 판단만 잘 해주면 된다”고 했고 김 장관은 이를 받아들였다.
더불어민주당 출범 후에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와 원내정책수석부대표를 지냈고, 2016년 4월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김종인)의 2기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당시 2~3년에 걸쳐 민주당 내에서는 친노와 비노의 대립 등 계파 경쟁이 치열했는데, 그는 당내 계파싸움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동교동계·정동영계·평민련계·범친노 등 다양한 계파로 불리는 동안 특별한 색깔을 드러내지 않았고, 각 계파 인물들과 두루 친했던 이유도 있다.
민주당 한 전직 의원은 “김현미는 일찍 정당에 들어와 젊을 때부터 계파와 줄서기에 휘말려 피해를 입은 적이 많았기 때문에 친노-비노의 대립에는 애써 휘말리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이 혼란한 시기에 당과 잠시 거리를 두기로 작심한 김 장관은 국회 상임위(기재위) 활동과 경제 공부에 더욱 전념했다. 20대 국회 출범 직후인 2016년 6월 13일엔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20대 1기 위원장에 선출됐다. 여성 의원이 해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다.
4기 | 국토교통부 장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후 김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토교통부 장관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 장관의 접점은 세 군데다. 노무현 청와대 시절 민정수석과 국내언론비서관으로 근무했고, 2015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당대표와 대표비서실장으로 함께했다. 세 번째로 대통령과 국토부 장관으로 국무회의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에 함께 있었던 기간은 10개월, 당대표와 비서실장으로 함께했던 기간은 4개월에 불과하다. 그가 김대중-노무현-정동영 측근이었던 기간에 비하면 길지 않은 시간이다. 김 장관은 본인이 장관이 될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앞서 김 장관은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문 대통령이 김현미, 유은혜와는 같이 일할 생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정무위와 기재위에서 오래 활동했고 국회 예결위원장도 했기 때문에 경제부처 중 하나일 것으로 짐작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정치학을 전공한 ‘언론통’인 그를 국토부 장관으로 임명한 명분은 무엇일까. 김 장관이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면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를 지냈고, 기재위 활동을 오래했으며, 여성 최초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 경제 관련 상임위 경력이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김 장관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시절 당 부대변인을 지내며 “경제를 알아야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여성 정치인들이 주로 담당하는 문화·여성 분야가 아닌 경제 분야에 욕심이 있었다. 문 대통령 취임 직후 의원 출신 장관 후보에 김현미 의원이 포함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료 의원들이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가느냐’고 묻자, 그는 “그런 자리엔 안 간다”고 답했다고 한다.
문재인, 김현미의 정무 감각 높이 평가
문 대통령은 김 의원의 상임위 활동 경력과 함께 정무 감각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비서실장 임명 시에도 중시했던 점이다. 또 운동권, 당직자 출신으로 3선까지 한 인물인 만큼 검증된 당과 정권에 대한 충성심 역시 고려 대상이었다. 이 밖에 예결위원장 시절 서민을 위한 정책과 제도 마련, 청년과 중소기업 및 자영업자 지원에 앞장서온 점도 문재인 정부와 코드가 맞았다.
한 여당 전직 의원은 문 대통령의 김현미 장관 발탁에 대해 “한마디로 문 대통령이 믿을 수 있는 그룹, 즉 운동권 86세대 안에서 장관감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의 얘기다.
“대통령을 끝까지 비호할 운동권 출신 정치인 중 정치나 통일 분야 전문가는 많았지만 경제 전문가는 없었고, 그나마 경제를 안다는 사람이 김현미 정도였던 거죠. 기재위 경력과 예결위원장 경력이 얼마나 전문성을 갖게 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이 정부가 믿고 쓸 수 있는 인재풀이 그 정도였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김 장관 입장에서는 여성 장관이 많았던 여성가족부나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가 아니라 국토교통부의 수장이 된다는 게 얼마나 좋았겠어요. 국회의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지역구를 관리하기 위해 국토위를 가고 싶어 하는 형편에 국토부 장관이라니 감사할 일이죠. 1~2년 하다가 지역구로 돌아가 4선 의원이 되면 정치인 경력으로는 베스트 아닙니까. 국토교통부 장관이 되면서 ‘이번에 잘해서 한 단계 정치적으로 점프하겠다’는 의욕이 넘치다 보니 계속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가 궁금해하던 김현미 국토부 장관 발탁 이유는 문재인 정부의 좁은 인재풀 내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지적이다.
“부동산정책은 정부가 결정해야”
국토교통부 수장이 된 김 장관의 목표는 확실했다. 투기 세력 근절과 서민 주거 안정이었다. 2017년 6월 23일 취임식을 가진 그의 취임사 중 일부다.
“국토는 국민의 집입니다. 그리고 아파트는 ‘돈’이 아니라 ‘집’입니다. ‘돈’을 위해 서민들과 실수요자들이 ‘집’을 갖지 못하도록 주택시장을 어지럽히는 일이,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대책은 그러한 분들에게 보내는 1차 메시지입니다. 부동산정책은, 투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부가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현미 장관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여러 차례 강성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부대변인-대변인 시절 ‘말발’이 죽지 않았다는 평가다. 그러나 대변인 시절엔 상대 당을 공격하는 상황이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국토교통부 장관의 강성 발언은 사실상 국민을 공격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문제다. 또 끊임없이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잘 되고 있다” “집값이 안정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김현미 장관의 국토부 장관 1기(2017~2019년)는 큰 무리 없이 지나가는 듯 보였다. 그는 적당한 시점에 장관직에서 물러나 2020년 4월 총선을 준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2019년 3월, 후임으로 지명됐던 최정호 장관 후보자가 다주택 논란으로 사퇴하는 바람에 김 장관은 어쩔 수 없이 유임하게 됐다. 여러 차례 지역구로 돌아갈 것이라고 공언해왔던 김 장관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유은혜 교육부 장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과 함께 21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김 장관은 유임이 결정되고 이른바 장관 임기 2기가 시작되면서 “유임이 아닌, 문재인 정부 두 번째 국토부 장관으로 일하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배수의 진을 치고 국토부 장관으로서의 족적을 남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시 지역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더 악바리가 된 장관
2019년 5월 3기 신도시가 발표되면서 일산 주민들이 일제히 폭발한 것이다. 이때 발표된 창릉신도시는 일산보다 더 서울에서 가까워 일산의 기능을 약화시킬 것이 예상됐다. 일산 주민들은 “김현미가 이렇게 일산의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김현미가 전북지사나 총리로 가기 위해 일산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분노했다. 김 장관에 대한 일산 주민들의 민심은 계속 나빠졌고, 갈등의 정점은 2020년 일산 서구청에서 열린 신년회였다. 일부 주민이 김 장관을 향해 “고양시를 망쳤다”고 항의하자 김 장관은 “그동안 동네 물이 나빠졌네”라고 했다. 장관이 주민을 상대로 비아냥거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 장관은 비난에 휩싸였고, 8일 만에 주민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수양이 충분치 못했다”고 사과했다.
2019년 한 해 동안 김 장관은 총선 불출마와 지역구 상실, 창릉신도시 관련 일산 민심 악화, 집값 상승으로 인한 여론 악화 등으로 위기에 몰리게 된다. 3040세대 사이에서 김 장관은 ‘공공의 적’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오히려 김 장관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30년 넘게 정치해온 김 장관이 지금 상황을 큰 위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와 20년 이상 가까이 지냈던 전직 기자의 얘기다.
“일단 보스(대통령)의 무한 신뢰가 있지 않습니까. 집값이 더 올라도 대통령은 김 장관을 경질하기는커녕 잘하고 있다고 격려할 겁니다. 김 장관을 잘라내면 부동산정책의 완전한 실패를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김 장관도 문 대통령의 의중을 알고 있고 끝까지 이 정권을 위해 충성할 겁니다. 더 악바리에 독종이 되는 중인데, 장관에서 물러난 후엔 더 큰 자리에 도전할 가능성도 크죠.”
그는 “고향인 전북이나 수도권에서 서민층이 많은 지역에 출마하면 얼마든지 당선될 것”이라며 “전북도지사 출마설도 있다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성격이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김 장관은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퇴임이 거론될 당시 비서실장 물망에 올랐고, 경제부총리 승진설이 돌기도 했다. 국민 입장에선 기함할 일이었지만, 문 대통령의 그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게 하는 풍문이다.
‘강남 좌파’ 논란과 거리
김 장관은 장관 임기가 끝나면, 혹은 문재인 정권 임기가 끝나면 어떤 길을 걷게 될까. 대부분의 국민은 지역구도 잃었고 ‘부동산 역적’ 또는 ‘공공의 적’으로 불리는 김 장관이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지만, 국민 정서와 달리 여당 내에서는 긍정적인 전망이 대세다.
김 장관은 민주당의 역대 대통령 후보(김대중·노무현·정동영·문재인) 모두의 측근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부대변인이었으며, 정동영 대통령 후보의 대변인이었고 문재인 대통령의 신뢰를 얻는 장관이다. 워낙 오랜 시간을 당에서 활동하다 보니 특정 계파에 휘말리지도 않았다. 차기 대권 주자가 누구여도 도움을 줄 만한 인물이라는 의미다.
이낙연 의원과는 노무현 당선인의 대변인과 부대변인으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지역구가 경기도였고 경기도당위원장을 지낸 김 장관은 수도권 부동산 및 교통 정책과 관련해 이재명 경기지사와도 긴밀하게 협조하는 사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는 종종 충돌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김 장관이 현 정부의 기득권층, 이른바 ‘강남 좌파’들의 도덕성 및 금수저 논란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도 그가 정치적으로 롱런할 가능성에 힘을 보탠다. 남편은 조용히 학업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고, 20대 후반인 두 아들도 해외유학을 하거나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재산도 많지 않다.
정치 명문가 출신이지만 8남매의 둘째로 부모로부터 특별한 원조를 받지도 못했다. 김 장관은 결혼 전까지 부모님 집인 전북 정읍이 주소로 돼 있다가 결혼 직후인 1989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전셋집으로 들어가면서 처음 서울로 전입했고, 12년 동안 6차례 이사했다.
2001년 12월에야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 빌라를 1억원에 매입했다. 이후 일산에서 몇 차례 이사를 거쳐 아파트를 분양받았고, 장관 임명 시점에도 주택담보대출을 갚고 있었다. 취임 당시 “주택담보대출을 갚고 있는 장관은 처음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김 장관의 이 같은 ‘스토리’에도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입자를 비롯해 서민의 입장을 깊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文 대통령의 숨결 읽는 수준”
공직자재산신고에 따르면 김 장관의 재산은 2019년 기준 9억7000만원이다. 장관 중에서는 적은 편이다. 또 9월 1일 경실련 발표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장관들이 2년 전보다 평균 77% 재산이 늘었지만, 김 장관은 2019년 9억7000만원에서 2020년 9월 현재 9억2000만원으로 오히려 줄었다. 취임 당시에는 2주택이었으나 경기도 연천의 단독주택을 처분해 현재는 1주택자다. 다주택자이거나 강남 거주자라는 이유로 공격받다 직(職)을 내놓은 청와대 참모들과는 결이 다른 셈이다. 김 장관은 대통령의 레임덕이 시작된 후에도 대통령 곁을 지키며 정권의 끝까지 함께하는 장관, 이른바 ‘순장조’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여권에서는 보고 있다.
여당 출신 한 전직 의원은 “김현미 장관이 뭘 그리 크게 잘못했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주택정책이란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나 가족이 투기를 하거나 자녀 교육 또는 병역에 관한 비리가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문 대통령도 그 점을 높이 사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정책이 빨리 효과가 나지 않는다고 장관을 잘라내는 정권이 비정상 아닌가. 믿고 맡겨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또 김 장관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을 고집스럽게 관철하고 있는 점도 김 장관의 정치적 미래가 밝다는 시그널이다. 전직 민주당 고위 당직자의 얘기다.
“김 장관의 발언을 보면 논리적 약점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세입자편을 들고 있다. 이는 문 대통령의 ‘숨결을 읽는’ 수준이다.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정부정책을 밀고나가는 모습이 대통령 입장에선 얼마나 든든하겠나.”
아무리 국민이 분노해도 정치권의 속내는 민심과는 다른 모양이다.⊙
현 정부를 비판한 ‘시무7조’로 화제를 모은 익명의 필자 ‘진인 조은산’은 김 장관을 ‘3인의 역적’(추미애·노영민·김현미) 중 한 사람으로 지칭한 바 있다. 김 장관을 머리 나쁜 물고기인 ‘붕어’에 비유하기도 했다. 조은산은 “김현미는 국토부 수장의 자리에 오른 이후 여태까지 스물두 번의 정책을 남발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고 오십보백보 따위의 우책으로 또다시 백성들을 우롱하며 또한 그것이 스물두 번인지 네 번인지 기억도 못 하고 있사온데 김현미를 파직하시고 그의 자리에 ‘붕어’를 쓰시옵소서”라고 비꼬았다.
3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문재인 정부의 콘크리트 지지율이 사실상 부동산 문제 하나로 흔들렸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던 청와대 참모들은 다주택자라는 ‘빨간딱지’가 붙으면서 줄줄이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정작 부동산정책의 책임자인 국토부 장관은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야당의 갖은 공세에도 불구하고 “살 집 아니면 팔아야 한다” “집값이 안정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집주인이 어려워졌다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으면 된다” “주택 매매자는 전세가 4년이라고 생각하고 거래하라” 등 발언으로 편가르기 정치를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도 국민들로부터 욕을 먹다 보니 심지어 일각에서는 “김 장관이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집값이 계속 오르는 게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야당에 유리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9월 22일이면 재임 3년 3개월로 역대 국토부 장관 중 최장수를 기록하게 되는 김 장관이 이토록 오래 자리를 지키면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현미 장관의 정치 인생에 그 답이 있다.
김현미 장관의 정치 인생은 크게 4기(期)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야당 언론·홍보 담당 당직자였던 1987~1997년, 2기는 여당 부대변인과 대변인으로 활동한 1998~2004년, 3기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2004~2017년, 4기는 국토부 장관으로 재직 중인 2017년~현재다. 김 장관은 33년간 큰 물의 없이 정치를 해왔고 여당과 언론에서 김 장관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발이 넓은 정치인이다.
야당에서조차 “우리는 김현미 같은 사람 없나”라는 말이 종종 나올 정도로 정치인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최대 정치적 위기는 ‘공공의 적’이 된 바로 지금이다. 중견 기자들 사이에서는 “김현미가 이 정도로 욕을 먹는 정치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반응이 나온다. 김 장관의 33년 정치 인생을 짚어봤다.
1기 | 야당 홍보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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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8주기인 2017년 8월 18일 김현미(왼쪽에서 두 번째) 국토교통부 장관이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에 헌화하고 있다. |
졸업 후 인천의 한 제조업체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잠시 쉬던 김현미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다. 딸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는 것을 반대하던 부모가 취업을 적극 권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정치적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게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홍보를 담당할 비서진을 충원하는데 그가 홍보담당자로 채용된 것이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평화민주연합(평민련) 당보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대권 후보 단일화를 거부하고 같은 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김현미 장관은 김 전 대통령을 따라 평민당에 참여하면서 평민당보 기자가 된다. 당시 재야 출신으로 평민당에 입당한 정치인은 이해찬, 임채정, 박영숙, 문동환 등이 있다.
대선을 앞두고 당보는 김대중 후보의 연설문과 현장 분위기를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김현미 ‘기자’는 당시 김 후보를 따라 전국 연설 현장을 누비며 현장 연설을 녹취해 글로 풀었다. 평민당보를 거쳐 간 인물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 안규백 의원이 있다. 김 장관은 당보 기자 당시 26세로 “(김대중 후보와 그 측근들로부터) 무한 사랑을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 장관 초선의원 시절 인터뷰했던 전직 기자의 얘기다.
“어릴 때부터 ‘파이터’ 기질이 있었다고 해요. 호불호가 강하고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거죠. 운동권 선배들도 ‘성질이 보통 아니다’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대학 때는 아버지가 데모 못 하게 가둬놓으니까 담 넘어 도망가고 하면서 부모와 충돌이 많았죠. 노동운동한다고 공장에 갔을 때도 부모가 얼마나 속을 끓였겠어요. DJ가 사람 뽑는다니 부모가 등 떠밀다시피 해서 취업시켰다고 합니다.
평민당에 들어간 후엔 20대 여성이 활보하고 다니니 귀엽게 보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버릇없다고 밉게 보는 사람도 있었겠죠. 정치권에 젊은 여성이라곤 전화 받는 비서나 서기 정도밖에 없던 시절이니 김현미의 존재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권에 입문한 초반부터 김현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건 그의 정치 행보에 크게 유리한 점이었어요.”
對언론 업무만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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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시절 김현미 대변인은 야당 저격수로 활약했다. |
백씨는 결혼 후 둘 중 한 명은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한동안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다 김 장관이 청와대를 거쳐 국회의원이 되면서 가정형편이 안정을 찾자 백씨는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을 주제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한신대 초빙교수와 인천대 연구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평민당은 1990년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 출범 후 세가 크게 줄었고, 1991년 신민주연합당으로 명칭을 바꿨다가 같은 해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과 합당해 통합민주당이 된다. 이 통합민주당이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이다. 김 장관은 통합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으로 당명이 바뀌는 동안 TV모니터링팀장, 기획부 국내언론 비서관실 부장, 부대변인, 공보실장 등 쭉 대(對)언론 업무를 15년여간 맡아왔다.
특히 이전까지 정당의 홍보 및 대언론 업무가 기자들을 상대하고 신문기사에 대응하는 수준이었던 것에 비해 김 장관은 TV를 중심으로 새로운 홍보전략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97년 대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기획조정실 언론분석부 TV모니터팀 팀장을 맡았다.
TV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토론 모니터링을 통해 방송국의 편파성 지적과 대응방안을 마련했고, 선거를 앞두고 TV 토론을 어떻게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것인지 전략을 세우기도 했다. “뉴스에 여당 대표는 30초 나왔는데 우리 대표는 10초밖에 안 나왔다”거나 “상대 후보의 문제성 발언과 행동은 편집해주고 우리 후보의 것은 그대로 내보냈다”며 방송국에 항의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민주당은 당내 TV 모니터링 시스템이 탄탄하게 구축돼 있고, 종편(종합편성채널) 출범 후에는 종편 역시 꼼꼼하게 모니터링했다. 불공정한 보도가 있으면 즉시 방송통신위원회에 민원을 넣는 ‘애프터서비스’까지 당의 업무다. 야당도 사무처에 미디어국을 신설하는 등 비슷한 조직을 만들었지만, 20년 이상 이어진 민주당의 노하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다. 민주당에서 자리 잡은 이 같은 언론 모니터링은 2017년 대선 성공의 요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2기 | 여당 부대변인·대변인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에 공을 세운 김 장관은 1998년 1월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임명받는다. 36세 여성이 여당 부대변인이 된 것이다. 지금은 당 부대변인이 수도 많고 중책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당시엔 언론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대응하는 요직이었다.
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 청와대 홍보수석실 국내언론비서관이 될 때까지 약 5년간 ‘김부(김부대변인)’로 불리며 최장수 부대변인 기록을 세웠다. 그가 부대변인으로 일하는 동안 거쳐 간 대변인만 12명이다. 기자실을 거쳐 가면서 ‘김부’와 막역하게 지냈던 기자는 1000명이 넘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를 출입했던 전직 기자는 “각 언론사 말진까지 살뜰히 챙기는 부대변인은 처음이라 고마웠다”며 “단순히 기자들을 챙기는 수준이 아니라 고위 당직자들과 친밀한 관계여서 나 같은 말진에게도 고급 정보를 주곤 했다”며 대부분의 기자가 일이 있으면 ‘김부’부터 찾았다고 전했다.
이처럼 김 장관은 당과 언론의 대화 채널 역할을 하며 부대변인 역할을 확실히 했다. 이후 유은혜, 서영교 등 당직자 출신 여성 부대변인이 등장한 것도 김 장관의 성공 사례 때문이다.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비서관을 거쳐 당직자로 일했던 A씨는 “그동안 우리 정치권에서 눈에 띄지 않는 부대변인이라는 역할을 중책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김현미”라며 “그전까지는 부대변인이 대변인을 보좌하는 역할이나 명목상의 당직 정도로 여겨졌지만, 김현미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 지망생들이 부대변인 자리를 얻고자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했다. 그는 또 “TV모니터링 등 부대변인의 새로운 업무를 개척해낸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언론계에서 김현미 장관의 존재감이 워낙 독보적이어서 당시 야당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2001년 7월15일자 《매일경제》에는 이런 기사가 나온다.
〈한나라당이 여성 부대변인 찾기에 발벗고 나섰다. 민주당 김현미 부대변인의 입심에 맞설 대항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1997년 당보 기자를 최초로 공개채용했고, 2002년 당직자 출신 20대 여성 부대변인을 임명했다. 이때 당보 기자 출신인 김현미 부대변인이 모델이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김현미 대변인’의 촌철살인은 지금도 회자된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며느리의 미국 출산에 대해 ‘원정출산’이라는 단어를,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붙인 사람도 김현미 장관이다.
노무현 청와대 대변인이 못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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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장관은 한때 ‘정동영계’로 불렸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의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
그러나 김현미 대변인 임명안(案)은 일부 참모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외모가 예쁘지 않아 ‘청와대의 얼굴’인 초대 대변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치권이 여성 정치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해프닝이다. 결국 초대 대변인 자리는 정치권과 관련이 없던 아나운서 출신 여성에게 돌아갔고, 김 장관은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으로 임명받았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전직 비서관의 얘기다.
“안 예쁘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그것보다 노무현 정권은 과거 정권과 달리 신선함과 탈권위주의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에 오래 있었던 김현미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었던 거죠. DJ 직계에 정동영계라고, 또 친노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당내에는 김현미에 대적할 만한 대변인 후보가 없다 보니 아나운서 출신 영입 인사를 데려온 거죠. 그런데 대변인이 기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도 못 하고 기자들과 스킨십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후회가 청와대 내에서도 많았습니다.”
김 장관의 청와대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와 열린우리당 분당, 이어지는 총선 등 정치 환경이 급변하면서 여당이 그를 원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 국내언론비서관과 정무2비서관을 지냈던 그는 2004년 4월 17대 총선을 석 달 앞두고 열린우리당 공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열린우리당 총선기획단 부단장 겸 상황실장으로 활약한 김 장관은 비례대표 11번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다.
3기 | 국회에서 경제 공부
김 장관이 국회에 입성하면서 주변에서는 그가 날카로운 언변으로 화려한 정치 활동을 펼칠 것으로 기대했다. 국회의원이 된 김 장관은 초선임에도 열린우리당 경기도당위원장, 원내부대표, 대변인 등 주요 당직을 맡는다. 특유의 권력욕과 근성이 빛을 발해 주목받기도 했다. 2005년 7월 한나라당의 유승민 대표비서실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에도 김현미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당 일에 대해서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독종”이라고 평가했다.
김 장관은 열린우리당 내 ‘정동영 직계’로 불렸다. 지역(전북 전주) 연고 덕에 정 의장과 가까웠던 김 장관은 1998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정동영)과 부대변인(김현미)으로 호흡을 맞췄고, 정 의장이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완주할 때 끝까지 도운 바 있다.
그런 인연으로 2007년 대선에서도 김 장관은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을 맡았다. 그러나 정동영 후보의 참패는 정치인 김현미에게도 암흑기의 서막이었다. 김 장관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도전하기 위해 경기 고양일산을에 출마했지만 현역인 김영선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했다. 정동영계로 찍히면서 당내에서 활동 반경이 좁아졌다는 시각이 있었다.
10년간 여당의 부대변인과 대변인, 청와대 비서관과 국회의원을 지내며 승승장구하다 일순간 야당 원외 정치인이 된 그는 ‘이렇게 열심히 정치를 해왔는데 왜 낙선했는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는 2011년 펴낸 저서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동안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갖고 왜 민주정부가 외면받았는지 고민했다. 간절하고 고단한 서민들의 삶을 외면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했다. 비슷한 나이의 여성들을 만나기로 마음먹고, 마트, 급식소, 요양원, 공장 등에서 일하는 40~50대 주부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계파 싸움 멀리 해
이때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강한 아줌마, 약한 대한민국》(2011년, 메디치미디어)이다.
원외로 지내는 시간 동안 지역구를 누비고 사람을 만나며 절치부심하던 김 장관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다시 맞붙은 김영선 새누리당 의원을 꺾고 재선에 성공한다.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전략홍보본부장 등 당직을 맡다 2015년에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비서실장이 된다. 문 대표가 비서실장을 제안했을 때 “지역구 의원이라 가까이서 도와드리기 힘들 것 같다”고 사양했지만, 문 대표는 “비서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정무적 판단만 잘 해주면 된다”고 했고 김 장관은 이를 받아들였다.
더불어민주당 출범 후에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와 원내정책수석부대표를 지냈고, 2016년 4월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김종인)의 2기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당시 2~3년에 걸쳐 민주당 내에서는 친노와 비노의 대립 등 계파 경쟁이 치열했는데, 그는 당내 계파싸움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동교동계·정동영계·평민련계·범친노 등 다양한 계파로 불리는 동안 특별한 색깔을 드러내지 않았고, 각 계파 인물들과 두루 친했던 이유도 있다.
민주당 한 전직 의원은 “김현미는 일찍 정당에 들어와 젊을 때부터 계파와 줄서기에 휘말려 피해를 입은 적이 많았기 때문에 친노-비노의 대립에는 애써 휘말리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이 혼란한 시기에 당과 잠시 거리를 두기로 작심한 김 장관은 국회 상임위(기재위) 활동과 경제 공부에 더욱 전념했다. 20대 국회 출범 직후인 2016년 6월 13일엔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20대 1기 위원장에 선출됐다. 여성 의원이 해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다.
4기 | 국토교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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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장관은 최초의 여성 예결위원장이 됐다. 2016년 8월 예결위를 주재하고 있는 김현미 예결위원장. |
문재인 대통령과 김 장관의 접점은 세 군데다. 노무현 청와대 시절 민정수석과 국내언론비서관으로 근무했고, 2015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당대표와 대표비서실장으로 함께했다. 세 번째로 대통령과 국토부 장관으로 국무회의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에 함께 있었던 기간은 10개월, 당대표와 비서실장으로 함께했던 기간은 4개월에 불과하다. 그가 김대중-노무현-정동영 측근이었던 기간에 비하면 길지 않은 시간이다. 김 장관은 본인이 장관이 될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앞서 김 장관은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문 대통령이 김현미, 유은혜와는 같이 일할 생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정무위와 기재위에서 오래 활동했고 국회 예결위원장도 했기 때문에 경제부처 중 하나일 것으로 짐작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정치학을 전공한 ‘언론통’인 그를 국토부 장관으로 임명한 명분은 무엇일까. 김 장관이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면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를 지냈고, 기재위 활동을 오래했으며, 여성 최초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 경제 관련 상임위 경력이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김 장관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시절 당 부대변인을 지내며 “경제를 알아야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여성 정치인들이 주로 담당하는 문화·여성 분야가 아닌 경제 분야에 욕심이 있었다. 문 대통령 취임 직후 의원 출신 장관 후보에 김현미 의원이 포함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료 의원들이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가느냐’고 묻자, 그는 “그런 자리엔 안 간다”고 답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김 의원의 상임위 활동 경력과 함께 정무 감각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비서실장 임명 시에도 중시했던 점이다. 또 운동권, 당직자 출신으로 3선까지 한 인물인 만큼 검증된 당과 정권에 대한 충성심 역시 고려 대상이었다. 이 밖에 예결위원장 시절 서민을 위한 정책과 제도 마련, 청년과 중소기업 및 자영업자 지원에 앞장서온 점도 문재인 정부와 코드가 맞았다.
한 여당 전직 의원은 문 대통령의 김현미 장관 발탁에 대해 “한마디로 문 대통령이 믿을 수 있는 그룹, 즉 운동권 86세대 안에서 장관감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의 얘기다.
“대통령을 끝까지 비호할 운동권 출신 정치인 중 정치나 통일 분야 전문가는 많았지만 경제 전문가는 없었고, 그나마 경제를 안다는 사람이 김현미 정도였던 거죠. 기재위 경력과 예결위원장 경력이 얼마나 전문성을 갖게 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이 정부가 믿고 쓸 수 있는 인재풀이 그 정도였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김 장관 입장에서는 여성 장관이 많았던 여성가족부나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가 아니라 국토교통부의 수장이 된다는 게 얼마나 좋았겠어요. 국회의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지역구를 관리하기 위해 국토위를 가고 싶어 하는 형편에 국토부 장관이라니 감사할 일이죠. 1~2년 하다가 지역구로 돌아가 4선 의원이 되면 정치인 경력으로는 베스트 아닙니까. 국토교통부 장관이 되면서 ‘이번에 잘해서 한 단계 정치적으로 점프하겠다’는 의욕이 넘치다 보니 계속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가 궁금해하던 김현미 국토부 장관 발탁 이유는 문재인 정부의 좁은 인재풀 내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지적이다.
“부동산정책은 정부가 결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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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김현미 국토교통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유은혜 교육부 장관 등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 겸직 장관 3명이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기자회견을 열고 총선 불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
“국토는 국민의 집입니다. 그리고 아파트는 ‘돈’이 아니라 ‘집’입니다. ‘돈’을 위해 서민들과 실수요자들이 ‘집’을 갖지 못하도록 주택시장을 어지럽히는 일이,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대책은 그러한 분들에게 보내는 1차 메시지입니다. 부동산정책은, 투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부가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현미 장관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여러 차례 강성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부대변인-대변인 시절 ‘말발’이 죽지 않았다는 평가다. 그러나 대변인 시절엔 상대 당을 공격하는 상황이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국토교통부 장관의 강성 발언은 사실상 국민을 공격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문제다. 또 끊임없이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잘 되고 있다” “집값이 안정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김현미 장관의 국토부 장관 1기(2017~2019년)는 큰 무리 없이 지나가는 듯 보였다. 그는 적당한 시점에 장관직에서 물러나 2020년 4월 총선을 준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2019년 3월, 후임으로 지명됐던 최정호 장관 후보자가 다주택 논란으로 사퇴하는 바람에 김 장관은 어쩔 수 없이 유임하게 됐다. 여러 차례 지역구로 돌아갈 것이라고 공언해왔던 김 장관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유은혜 교육부 장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과 함께 21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김 장관은 유임이 결정되고 이른바 장관 임기 2기가 시작되면서 “유임이 아닌, 문재인 정부 두 번째 국토부 장관으로 일하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배수의 진을 치고 국토부 장관으로서의 족적을 남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시 지역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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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김현미 신임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2019년 한 해 동안 김 장관은 총선 불출마와 지역구 상실, 창릉신도시 관련 일산 민심 악화, 집값 상승으로 인한 여론 악화 등으로 위기에 몰리게 된다. 3040세대 사이에서 김 장관은 ‘공공의 적’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오히려 김 장관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30년 넘게 정치해온 김 장관이 지금 상황을 큰 위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와 20년 이상 가까이 지냈던 전직 기자의 얘기다.
“일단 보스(대통령)의 무한 신뢰가 있지 않습니까. 집값이 더 올라도 대통령은 김 장관을 경질하기는커녕 잘하고 있다고 격려할 겁니다. 김 장관을 잘라내면 부동산정책의 완전한 실패를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김 장관도 문 대통령의 의중을 알고 있고 끝까지 이 정권을 위해 충성할 겁니다. 더 악바리에 독종이 되는 중인데, 장관에서 물러난 후엔 더 큰 자리에 도전할 가능성도 크죠.”
그는 “고향인 전북이나 수도권에서 서민층이 많은 지역에 출마하면 얼마든지 당선될 것”이라며 “전북도지사 출마설도 있다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성격이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김 장관은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퇴임이 거론될 당시 비서실장 물망에 올랐고, 경제부총리 승진설이 돌기도 했다. 국민 입장에선 기함할 일이었지만, 문 대통령의 그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게 하는 풍문이다.
‘강남 좌파’ 논란과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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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20회 이상 부동산 안정 대책을 내놓았지만 집값은 계속 오르고 있다. |
김 장관은 민주당의 역대 대통령 후보(김대중·노무현·정동영·문재인) 모두의 측근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부대변인이었으며, 정동영 대통령 후보의 대변인이었고 문재인 대통령의 신뢰를 얻는 장관이다. 워낙 오랜 시간을 당에서 활동하다 보니 특정 계파에 휘말리지도 않았다. 차기 대권 주자가 누구여도 도움을 줄 만한 인물이라는 의미다.
이낙연 의원과는 노무현 당선인의 대변인과 부대변인으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지역구가 경기도였고 경기도당위원장을 지낸 김 장관은 수도권 부동산 및 교통 정책과 관련해 이재명 경기지사와도 긴밀하게 협조하는 사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는 종종 충돌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김 장관이 현 정부의 기득권층, 이른바 ‘강남 좌파’들의 도덕성 및 금수저 논란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도 그가 정치적으로 롱런할 가능성에 힘을 보탠다. 남편은 조용히 학업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고, 20대 후반인 두 아들도 해외유학을 하거나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재산도 많지 않다.
정치 명문가 출신이지만 8남매의 둘째로 부모로부터 특별한 원조를 받지도 못했다. 김 장관은 결혼 전까지 부모님 집인 전북 정읍이 주소로 돼 있다가 결혼 직후인 1989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전셋집으로 들어가면서 처음 서울로 전입했고, 12년 동안 6차례 이사했다.
2001년 12월에야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 빌라를 1억원에 매입했다. 이후 일산에서 몇 차례 이사를 거쳐 아파트를 분양받았고, 장관 임명 시점에도 주택담보대출을 갚고 있었다. 취임 당시 “주택담보대출을 갚고 있는 장관은 처음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김 장관의 이 같은 ‘스토리’에도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입자를 비롯해 서민의 입장을 깊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文 대통령의 숨결 읽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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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청와대에서 대화 중인 ‘86세대’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현미 장관. |
여당 출신 한 전직 의원은 “김현미 장관이 뭘 그리 크게 잘못했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주택정책이란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나 가족이 투기를 하거나 자녀 교육 또는 병역에 관한 비리가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문 대통령도 그 점을 높이 사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정책이 빨리 효과가 나지 않는다고 장관을 잘라내는 정권이 비정상 아닌가. 믿고 맡겨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또 김 장관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을 고집스럽게 관철하고 있는 점도 김 장관의 정치적 미래가 밝다는 시그널이다. 전직 민주당 고위 당직자의 얘기다.
“김 장관의 발언을 보면 논리적 약점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세입자편을 들고 있다. 이는 문 대통령의 ‘숨결을 읽는’ 수준이다.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정부정책을 밀고나가는 모습이 대통령 입장에선 얼마나 든든하겠나.”
아무리 국민이 분노해도 정치권의 속내는 민심과는 다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