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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 이 사람

영원한 33세 김광석이 저편에서 이편의 사람을 일깨우는 이유

“김광석은 우리 시대의 부사(副詞) 같은 존재”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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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로 전시장으로 돌아온 김광석, 입구에서 들리는 육성에 추억 속으로
⊙ “슬픔을 연주하는 가객”
⊙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죽음… 몸에서 지름 0.6~0.5cm 크기 사리舍利 9과顆 나와
‘김광석을 보다 展; 만나다·듣다·그리다’ 전시회에 있는 김광석 밀랍인형.
  ‘영원한 가객’ 고(故) 김광석. 그는 애석하게도 32년간의 짧은 생을 마치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 버렸다. 세월이 흘러 김광석이 떠난 지도 올해로 20주기를 맞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아 우리 삶을 위로해 준다. 1996년 1월 6일,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남긴 기록과 숨결이 스친 유품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6월 26일까지 열리는 서울 종로구 홍익대 아트센터에 마련된 추모전 ‘김광석을 보다 展; 만나다·듣다·그리다’가 그것이다. 아트센터는 김광석이 1000회 넘게 라이브 공연을 했던 대학로 초입의 전시장이다. 이미 고인이 된 대중음악 가수가 전시회로 다뤄지기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는 50% 할인 가격에 입장할 수 있다. 문화가 있는 날은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영화관, 공연장, 미술관 등 주요 문화시설을 무료 또는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정부 캠페인이다.
 
 
  ‘사랑했지만’에 얽힌 사연
 
전시회에는 이창우 작가의 다시 그리기 작품과 이외수, 최루시아의 캘리그라피가 전시돼 있다.
사진=미추홀아트센터, 씨오씨
  기자는 5월 9일 전시회를 찾았다. 평일 이른 오후였지만 매표소 주변에는 이미 여러 관객이 티켓 구매를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 들어선 전시장에선 김광석의 청명하면서도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 노래 ‘사랑했지만’을 사실 별로 안좋아했어요. 사랑하는데 바라보기만 한다는 가사 때문에…. 그러다 좋아하기로 했어요. 어느 할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이 노래가 1926년생인 할머니 마음에 사춘기 소녀 감성을 불러일으켰다고.”
 
  김광석이 1995년 8월 소극장 ‘학전블루’ 공연에서 한 이야기였다. 전시장 벽엔 이 노래에 얽힌 짧은 사연과 자필 악보가 걸려 있었다. 자리를 옮기니 다른 곡도 들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인 ‘이등병의 편지’가 흘러나오는 곳에서 추억을 더듬었다.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면 대위로 군 복무를 하다 사망한 큰형이 떠오른다”는 김광석의 목소리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전시 기획은 김광석의 죽마고우인 이택희 화백이 했다. 김광석과 이 화백은 서울 창신초등학교(창신국민학교), 경희중학교 동창으로 30대 때까지 인연을 이어 갔다. 초등학교 시절 골목을 함께 뛰놀던 그들은 20대 무렵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며 노래 얘기를 나눴고, 30대에는 포장마차에서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논했다.
 
  이 화백은 “광석이는 대화를 주도하기보다 친구의 얘기를 조용히 들어 주며 대답해 주고 위로를 건네는 친구였다”며 “지금도 전시장 벽에 걸린 광석이 사진에 말을 건네면 대답할 것 같다”고 했다.
 
김광석이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며 떠올렸다는 친형 김광동의 군용벨트 버클. 김광동은 대위 때 군에서 숨졌다.
  전시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빼곡했다. ‘나의 노래’ ‘그날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의 자필 악보, 그가 활동하던 그룹 ‘동물원’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발표한 음반과 공연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그가 생전에 쓰던 카메라와 메모장, 심이 굵은 로트링펜, 몽블랑펜, 김광석이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앉곤 했던 낡은 소파 등 여러 유품 앞에는 유독 관람객이 많았다. 김광석이 1993년 SBS에서 방송된 애니메이션 ‘슈퍼 마리오’의 주제가를 불렀다는 흥미로운 설명도 있었다. 김광석과 교우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는 것도 숨은 재미다. 가나다순으로 꼼꼼히 적은 전화기록부엔 임수경, 이은미 등 낯익은 이들의 이름과 집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김광석의 솔로 데뷔곡인 ‘너에게’를 만들어 준 작곡가 김형석과 음악 동지였던 안치환의 앳된 얼굴도 흥미롭다.
 
  딸을 안은 채 행복하게 웃는 그의 사진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가수 김광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버지 김광석’의 모습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했는데요. 얼마 전에 마누라 말고…. 그냥 좋더라고요. 아침마다 같이 눈 뜨고 그랬는데 계속 보고 싶어요. 우리 딸내미 하고요.”
 
  장난기 어린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고의 가수였던 김광석도 무대 밖에서는 가족, 동료 등 지인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곤 했다. 김광석의 숨결이 느껴진 전시의 마지막은 그의 ‘1001번째 콘서트’가 장식했다.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대구시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과 신천대로 사이에 위치한 김광석길. 연간 100만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대구의 유일한 명소다. 관광객 중 70~80%는 외지에서 온다.
  대구시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과 신천대로 사이 한 골목길에도 김광석을 추억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가족나들이객에서부터 중·고등학교 학생들, 대학생, 젊은 연인 등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특별한 공연이나 행사가 열리지 않는데도 관광객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최근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떠오른 김광석길(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다. 연간 100만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대구의 유일한 명소다. 관광객 중 70~80%는 외지에서 온다. 원래 이 길은 신천대로 둑길 아래 방천시장이 끝나는 지점으로 난 좁은 골목이었다. 해가 지면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상인들이 버린 쓰레기만 가득 쌓여 있던 어둡고 냄새 나는 뒷골목이었다. 이 골목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9년이다. 쇠퇴하는 전통시장을 문화예술과 연계해 살려내자며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한 ‘문전성시 사업’에 방천시장이 선정됐고, 공공예술로 시장환경을 개선하려는 목적을 가진 지역의 예술가들이 몰려왔다.
 
  담벼락과 골목길의 재해석을 위해 벽화 그리기 작업이 시작됐다. 동피랑 벽화마을, 감천동 문화마을을 모델로 삼았다. 단순한 벽화보다는 지역 출신 명사를 그려 넣자는 합의도 봤다. 누굴 그려 넣을까. 고민은 시작됐다.
 
  김광석은 1964년 1월 22일 대구시 남구 대봉동에서 태어났다. 남구 대봉동은 이후 행정구역이 중구 대봉동으로 바뀌었다. 대봉동은 방천시장에서 버스로 10분 거리. 대봉동에서 태어난 김광석은 유년기의 대부분을 범어동에서 살았다. 그리고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 갔다. 김광석의 입장에서 보면 대구는 유년기의 추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주저하지 않고 김광석을 주제로 택했다.
 
  불량 청소년이나 길고양이 차지가 되었을 뻔한 후미진 골목길은 김광석이라는 가수의 노래와 인생이 입혀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길로 태어났다.
 
  김광석길 입구에는 그가 앉아 노래하는 동상이 있다. 손에는 낡은 통기타가 들려 있는데 당장에라도 ‘사랑했지만’을 속삭일 것 같다. 히트곡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벽면은 그림과 노랫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가로 10m의 벽면에 노부부가 두툼한 점퍼를 걸치고 난간에 기댄 채 바다를 응시하는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벽화에 새겨진 노랫말과 그림이 어우러지면서 노부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는 그의 노래가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김광석길은 예술공간으로 계속 진화 중이다. 골목 구석구석에 공방이 들어서고, 꽃꽂이, 캘리그라피, 인형 만들기 등을 배우려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창작하는 사람들이 대거 몰리고 있다. 초 만들기, 유자청 만들기, 세라믹 페인팅, 아크릴화 그리기, 프랑스 자수, 소원 팔찌 만들기 등 창작의 모든 것이 김광석길 주변에 생기고 있다. 새로 생긴 갤러리에서는 사진전이나 미술전 등이 연중 열린다.
 
 
  시대를 상징하는 목소리
 
김광석이 생전 사용했던 수첩. 그의 노래 제목이 빼곡히 적혀 있다.
  1984년 대학생 놀이패인 ‘새벽’에서 활동했던 김광석은 1987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참여했다. 이어 김창기, 유준열, 박기영과 함께 ‘동물원’을 결성해 1집을 선보였다. 타이틀곡은 ‘사랑의 썰물’이었다. 이 노래는 동물원 멤버이자 ‘거리에서, 그날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기다려줘, 변해가네’ 등 그야말로 김광석이라는 가수를 있게 한 김창기가 만든 곡이다. 동물원에서 2집까지 참여했던 김광석은 이후 솔로 활동에 나섰다. 당시 동물원의 음악 수준은 기성 가수들과 충분히 비견될 수준이었지만, 팀원 간의 지향점이 달라지면서 탈퇴를 결정한 것이다. 솔로 가수로 가요계에 발을 디딘 그에게 첫 앨범은 고난의 과정이었다. 첫 앨범부터 미미한 흥행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음악적 자아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3집부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의 앨범을 선보이며 수많은 명곡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광석이 마니아뿐 아니라 대중의 사랑을 받는 가수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광석이 대가수임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죽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중이 그에게 이토록 열광하는 것은 이해가 쉽지 않다. 서른둘의 나이에 멈춰 섰는데도 그는 저편에서 이편의 사람을 쉼 없이 일깨우고 있다. 똑같은 레퍼토리로 통기타 달랑 들고 노래만 했던 김광석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류근 시인의 이야기다. 그는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작사했다.
 
  “김광석의 목소리는 아픈 것을 더 아프게, 슬픈 것을 더 슬프게 들리게 합니다. 겉모습은 그냥 ‘동네 형’인데 묘한 감동을 주지요. 비애(悲哀)롭지만 깊이 있고, 아름다운 어떤 것. 이게 김광석의 느낌 아닐까요. 누군가 김광석보다 더 정확한 음정과 화려한 바이브레이션으로, 더 깊고 튼튼한 호흡으로 우렁차게 노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처럼 목소리에 감정이 배어 나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김광석은 우리 시대에 부사(副詞) 같은 존재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 고 3때 ‘그대 웃음소리’를 만들었다는 김광석의 학창시절.
사진=미추홀아트센터, 씨오씨
  그가 말을 이었다.
 
  “김광석의 노래를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해서 부르는데, 김광석이 줬던 감동이 없습니다. 슬프게 부르는 것 같지만,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 것이지요.”
 
  언니네 이발관 멤버인 이석원씨도 비슷한 답을 내놨다.
 
  “대한민국 땅에 통기타 한 대 들고 저마다 제 목소리를 뽐내며 기막힌 실력으로 라이브를 하는 가수들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런데 김광석은 좀 다릅니다. 목소리가 슬프지요. 그게 김광석이라는 가수가 뿜어 내는 매력의 핵심이고, 거기에는 그 어떤 재능도 연습도 당할 수 없습니다. 슬픔을 무슨 재주로 연습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안타깝지만, 제가 만나본 대부분의 통기타 가수들은 쓸데없이 명랑하거나, 아니면 궁상으로 빠지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아이돌로 천편일률화한 가요계에 대한 식상함과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복고열풍’도 원인으로 꼽힌다. 김광석추모사업회를 이끄는 가수 박학기씨는 “똑같은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아이돌 중심의 가요계에 새로운 바람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라고 김광석 열풍을 분석했다.
 
  다수의 공감을 자아낼 만큼 생활밀착형이면서도 매우 현학적인 김광석의 가사도 그의 노래가 사람들 머릿속에 이토록 오래 기억되는 이유로 꼽힌다. 김광석은 살아생전 글쓰기를 좋아하고 많은 메모와 일기를 남겼다.
 
 
 
죽음, 그리고 사리

 
서른 즈음에 쓴 친필 악보.
  김광석의 일반적이지 않은 죽음도, 대중이 그를 잊지 못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김광석은 1996년 1월 6일 새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원음빌딩 4층 자신의 집 거실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향년 33세였다. 그는 사망하기 전날 저녁, 곧 있을 그의 콘서트에 대해 논하기 위해 공연 관계자와 반주를 곁들여 저녁 식사를 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작사한 백창우 시인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광석이 죽기 전날 밤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광석이와 한국 현대시를 노래로 만드는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광석이가 세상 떠나기 몇 달 전 1995년 가을 대학가 집회에서 마주친 광석이에게 현대시를 노래로 만드는 운동에 앞장서 달라고 제안했는데, 광석이가 조건 없이 흔쾌히 참여하겠다고 해서 만난 거였거든요. 이날 광석이는 이런 이야길 했어요. ‘이제 음악에 눈이 뜨이는 것 같다. 4집 앨범에 가장 많은 자작곡을 넣었다’고요. 그전까지 광석이는 송라이팅보다는 선곡 능력이 정말 빼어난 가수였어요. 그때 광석이를 붙잡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했었습니다. 헤어지기 전 한잔 더 할까 했지만, 왠지 들여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광석이를 집에 바래다주고 저는 성남 집으로 향했죠. 집에 도착했는데 왠지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커피 탓이려니 했는데, 새벽에 전화가 걸려 왔어요.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이었죠. 광석이가 ‘한국 현대시 대중화의 전도사’가 됐으면 했는데 아쉬움이 너무 커요. 광석이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많은 진전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전날까지도 새로운 앨범 작업에 몰두했던 그의 부고는 어이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경찰은 그의 사인(死因)을 자살로 결론지었지만, 타살설도 여러 번 제기됐다.
 
  과거 가족과 지인들은 “자살이라고 하기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며 김광석이 평소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아내의 말이 신빙성이 없다는 점, 메모광이었던 김광석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김광석의 생전 사진. 1996년 1월 8일 김광석은 경기도 벽제에서 화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그의 몸에서는 사리(舍利) 9과(顆)가 나왔다.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씨는 남편 사망 당시의 나이(33세)에서 따와 이름을 붙인 음반기획사 위드33뮤직을 운영 중이다. 사무실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다. 김광석 노래의 판단 등 모든 권리는 딸에게 있다.
 
  김광석 노래의 저작권에는 해묵은 사연이 있다. 고인이 숨지기 3년 전인 1993년 김광석의 아버지는 김광석의 4개 앨범(김광석 다시 부르기 I·II, 김광석 3·4집)에 대해 음반사와 계약을 맺었다. 1996년 1월 김광석이 죽자 아버지는 이 앨범들에 대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고인의 아내와 딸은 상속인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웠다. 양측은 1996년 김광석 아버지의 권리를 인정하되 아버지가 사망하면 딸에게 권리를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2004년 김광석의 아버지가 숨지면서 이 합의는 깨졌다. 합의 무효를 주장한 김광석의 어머니와 형은 소송을 제기했다. 마침내 대법원은 2008년 음반의 판권 등 모든 권리가 고인의 딸에게 있다고 판결했다. 추모 공연 등에서는 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노래를 사용할 수 있도록 조정이 이뤄졌다. 김광석 20주기를 맞아 서씨와 연락을 취했으나 닿지 않았다.
 
  1996년 1월 8일 김광석은 경기도 벽제에서 화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자신의 맑고 곧음을 증명하고 싶어서였을까. 그의 몸에서는 사리(舍利) 9과(顆)가 나왔다. 지름 0.6~0.5cm 크기의 커다란 사리였다. 참석자 모두가 놀랐다. 불교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1991년 불교방송 ‘밤의 창가’를 진행하며 법정 스님 등 불교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법정 스님으로부터 ‘원음’(圓音, 둥근 소리)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 생을 마친 건물의 이름 원음빌딩도 거기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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