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 정계은퇴 선언에 “YS의 정치보복 피하기”라 생각
⊙ 1995년 민주당 경기지사 경선 거치면서 DJ의 非민주성 실감
⊙ 2002년 이회창 측근 찾아와 사과하며 지지 부탁
李基澤
⊙ 76세. 고려대 商大 졸업.
⊙ 제7~10대, 12~14대 국회의원, 신민당 사무총장·부총재, 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 부총재,
5共비리조사특위 위원장, 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공동대표)·대표·총재,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역임.
⊙ 1995년 민주당 경기지사 경선 거치면서 DJ의 非민주성 실감
⊙ 2002년 이회창 측근 찾아와 사과하며 지지 부탁
李基澤
⊙ 76세. 고려대 商大 졸업.
⊙ 제7~10대, 12~14대 국회의원, 신민당 사무총장·부총재, 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 부총재,
5共비리조사특위 위원장, 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공동대표)·대표·총재,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역임.
5공 특위는 위원만 30명이 넘었다. 전문위원들까지 더하면 가히 ‘매머드특위’라고 할 만했다. 간사단 회의 때 각 당 간사들에게 조사대상으로 삼아야 할 사건들의 목록부터 적어내라고 했다. 300개가 넘었다. 1차 조사해야 할 것 44개를 추렸다.
국회에서 과거사와 관련해 특위를 구성한 것은 내가 알기로는 제헌국회 때 반민특위(反民特委) 이후 처음이었다. 국민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장영자가 보낸 2억원짜리 사과박스
한번은 친구 하나가 점심을 같이하자고 했다. 약속 장소에 낯모르는 승려가 한 명 동석했다. 자기소개를 하는데 장영자씨의 재산관리인이라고 했다. 5공 시절 세상을 흔들었던 이철희-장영자 사건도 5공 비리특위에서 다루기로 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 승려는 “장영자씨는 억울한 점이 있다”면서 “잘 좀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런 인사를 하려고 자리에 끼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당시 나는 하도 바빠서 집에 전화받는 것을 전담하는 사람을 두고 있었다. 그가 전화를 받고 대문 밖으로 나가더니 사과박스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박스에는 명함이 하나 붙어 있었다. 명함에는 어제 만났던 승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스를 열어보니 1만원짜리 지폐로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마 2억원쯤 되지 않았을까? 깜짝 놀라 박스를 덮었다. 보좌관에게 박스를 돌려주라고 했다.
재벌그룹 회장들이 국회로 불려 나오자 별의별 얘기가 다 나돌았다. 몇몇 야당 의원이 잘 봐달라고 주는 돈을 받았다는 얘기가 돌았다. 특위 소속 국회의원들 중에는 재벌회장이 돌아갈 때 직접 차문을 열어주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눈총을 받았다.
후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을 할 때의 일이었다. 당에서 급히 돈을 만들어야 할 일이 생겼다.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분담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이 대표, 돈도 많은데 그냥 이 대표 혼자서 다 내는 걸로 합시다.”
여기저기서 “그럽시다”하는 얘기가 나왔다.
“정주영이 돈은 개도 물고 다니는데…”
나는 이의를 제기했다.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세요? 다 같이 내겠다면 내 몫은 내겠지만, 혼자서 다 낼 만큼의 돈은 없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하긴…. 이 대표는 돈 없을 겁니다.”
김원기(金元基) 최고위원이었다.
누군가 “김 최고위원이 이 대표가 돈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하고 물었다. 김원기 최고위원이 말했다.
“얼마 전 정성태(鄭成太, 전 국회부의장) 선배를 만났더니, 정주영(鄭周永) 회장에게 들었다면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얘기인즉, 정주영 회장이 대선(大選) 출마를 앞두고 정씨 문중의 각계 원로들을 모아놓고 식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정주영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거, 정주영이 돈은 개도 물고 다니는데, 내가 주는 돈을 안 받는 희한한 사람이 있어요.”
정계 원로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정성태 전 의원이 “그게 누구냐”고 묻자 정 회장은 “이기택”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5공 비리특위 위원장으로 있을 때, 정 회장 측에서 주겠다는 돈을 거절했던 적이 있는데, 정 회장은 그걸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형욱(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의 아내 신모씨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1979년 파리에서 실종된 남편의 생사(生死)를 특위가 확인해달라는 호소였다. 1969년 3선 개헌을 앞두고 중정(中情) 부장실에서 만났던, 기세등등하던 김형욱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자기가 불과 10년 뒤 망명객이 되어 이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운명이 될 것이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5공 비리특위에는 노무현(盧武鉉), 김정길(金正吉), 김동주(金東周) 의원 등이 있었다. 특히 노 의원은 변호사 출신 초선(初選) 의원답게 논리적으로 잘 따지고 들었다. 나는 당 소속 특위 전문위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을 노 의원에게 많이 내려보냈다.
유감스럽게도 특위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힘이 없었다. 야당은 당초 특위를 구성하면서 청문회 제도와 특별검사제의 도입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여당인 민정당의 반대로 청문회만 도입하고, 특검제는 도입하지 못했다. 5공 비리와 관련해 실체적 진실을 파헤칠 실질적인 수단이 없는 셈이었다. 결국 특위는 전두환(全斗煥) 정권 시절 일해재단 모금, 대통령 별장 건설 등 국민들의 관심을 자극할 만한 사건들을 주로 다루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일단 국민들의 주의를 환기한 후, 여론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사건 조사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증거가 부족했고, 증인들도 혐의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는 사이에 5공 청산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지게 됐다. 결국 1989년 12월 15일 노태우 대통령과 DJ, YS, JP는 청와대 회동에서 백담사에 가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국회 증언대에 세우는 것으로 5공 청산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당초 전두환의 서면 증언을 제안했다. YS로부터 그 얘기를 전달받은 나는 “직접 증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버텼다. 결국 전 전 대통령이 국회에 출석하되 질문도 답변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당시 답답한 청문회에 격분한 노무현 의원은 전 전 대통령에게 명패(名牌)를 집어던져 일약 스타가 됐다.
YS와의 언쟁
그 무렵 정계개편설이 솔솔 나돌고 있었다. “정계개편을 한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과 DJ의 평민당이 통합하지 않겠느냐. DJ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얘기가 많았다. 평생 군사독재와 싸워온 YS가 노태우와 손을 잡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3당 합당 열흘쯤 전인가, YS가 나와 김동영(金東英) 의원을 롯데호텔의 한 음식점으로 불렀다. YS는 약속시각보다 30분 정도 늦게 왔다. 식사를 하는데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정계개편 소문이 한창이던 때라,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뭐 중요한 얘기 해주실 거는 없습니까?”
“별로 없어. 별로 없어.”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1990년 3당 합당(合黨) 이틀 전이었다. 정동성(鄭東成) 민정당 원내총무가 내게 편지를 건네며 말했다.
“이걸 김영삼 총재께 전해주십시오.”
“이게 뭐요?”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親書)입니다. 3당 합당과 관련, 청와대 회동에 관한 것입니다.”
머리가 띵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3당 합당이라니, YS가 군사정권의 노태우, JP와 손을 잡다니….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상도동에 있는 YS의 집으로 달려갔다. 아침부터 들이닥친 나를 본 YS는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3당 합당을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한순간 YS가 흠칫했다.
“이 부총재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게 그만한 정보망은 있습니다.”
YS는 “그거 이상한데…”라고 혼잣말을 하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안 그래도 이 부총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나 했는데, 잘됐소. 내 얘길 들어보시오. 4당 체제 아래서 국정(國政)이 목표도 없이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어요. 3당 합당은 우리가 사는 길이고, 나라가 사는 길이오. 우리 같이 갑시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군사독재정권과 손을 잡는단 말입니까? 우리가 평생 군사정권과 싸워왔는데, 국민이 그걸 용납하겠습니까? 총재님, 생각을 돌려주십시오.”
“이미 다 결정된 일이에요. 우리 다 함께 갑시다.”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우리는 40~50분 정도 옥신각신했다. 나는 그날 오후 부산에서 재혼(再婚)을 하는 친구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로 되어 있었다. 부산행 비행기표도 끊어놓은 상태였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일어나야 했다.
“실은 제가 오늘 부산에서 주례를 서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만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천하대세가 결정되는 판인데 주례는 무슨…. 결론을 내지 않고는 절대로 못 나갑니다!”
“이제 가봐야 합니다. 그럼 주례를 마치고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약속 지킬 거죠?”
“제가 왜 총재님과의 약속을 어기겠습니까?”
부산에서 주례를 마치고 오후 4시 서울로 돌아왔다. 상도동으로 갔다가는 YS에게 붙잡힐 것 같았다. 수행비서에게 “YS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비행기를 놓쳐서 못 올라간다고 전하라”고 했다.
3당 合黨 거부
1990년 1월 20일, 노태우 대통령과 YS, JP는 청와대에서 3당 합당을 선언했다. 고민이었다. 따라가지 않는다면,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서 정치를 할 수도 없었고, DJ에 기대 살 수도 없었다. 내가 독자적으로 당을 꾸린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때는 아직 3당 합당을 거부하는 의원들이 나오기 전이었다.
YS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1988년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제3당으로 전락하면서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제1야당 당수로 주목받는 DJ를 보면서 감정적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3당 합당은 그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며칠 후 3당 통합준비위원회 모임이 열렸다. YS는 준비위원에 내 이름을 집어넣었다. 모임 장소는 국회에 있는 통일민주당 원내총무실 바로 윗방이었다. 모른 척할 수도 없어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바로 원내총무실로 내려왔다. 그런 나를 보면서 기자들은 “이 총무, 왜 나왔어요?”라면서 의아해했다.
1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3당 통합추진 15인 위원의 오찬에 참석한 것은 YS와의 인간적 의리 때문이었다. YS는 그의 계보도 아니었던 나를 부총재, 원내총무, 5공특위 위원장으로 중용해주었다. 인간적으로 고마웠다. 헤어지더라도 그 정도까지는 해주고 싶었다. 통합준비위 2차 모임부터는 아예 나가지 않았다. YS가 나를 찾았다. 나는 잠적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3당 합당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국회의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찬종(朴燦鍾), 김광일(金光一), 노무현, 김정길, 장기욱(張基旭), 장석화(張石和), 서청원(徐淸源), 홍사덕(洪思德), 김현규(金鉉圭) 의원 등 소장파(少壯派)는 물론, 최형우(崔炯佑), 황낙주(黃珞周), 신상우(辛相佑) 등 중진(重鎭)들도 동참했다.
누나와 姊兄도 3당 통합 동참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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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창당 대회. 왼쪽부터 홍사덕, 조순형, 김현규, 박찬종, 나, 김광일, 노무현 의원. |
“이 부총재, YS가 엄포를 놓고 난리입니다. 가는 게 맞겠습니까, 안 가는 게 맞겠습니까?”
“절대 가지 마소! 당신은 민주화운동 경력도 있고, 사람들의 기대도 큰데, 가면 안 됩니다! 우리 같이 손을 잡고 다른 길을 모색해봅시다.”
장석화 의원도 YS의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 결국 최형우, 황낙주, 신상우, 서석재(徐錫宰) 등은 마음을 바꿔 3당 합당에 합류했다. 2월 28일 통일민주당은 문을 닫았다.
청와대 오찬이나 3당 통합준비위에 얼굴을 내밀었던 것 때문에 당시 내가 우왕좌왕했다는 얘기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건 YS와의 최소한의 인간적 의리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3당 통합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그런 의사(意思)를 YS에게 분명하게 표시했다. 또 내가 YS와 ‘감투’ 흥정을 하다가 뜻대로 안 되자 3당 합당에 함께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어이없는 얘기다. 그때는 YS의 위치와 장래도 불분명할 때였다. 그런 판에 ‘감투’를 놓고 흥정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YS 말고도 내가 3당 합당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원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누님과 자형(姊兄)이었다. 야당을 하는 동생을 둔 죄로 박정희(朴正熙)-전두환 정권 시절 허구한 날 세무조사에 시달리던 누님과 자형으로서는 내가 여당이 된다는 얘기에 얼마나 기뻤을까? 그런데 내가 그 복(福)을 걷어차고 있으니, 두 분은 또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두 분은 내가 태광에 취직시켜준 내 친구들을 앞세워 숨어 있는 나를 붙잡겠다고 난리를 쳤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나는 3당 합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의원들과 함께 3월 2일 신당(新黨) 창당을 선언했다. 온갖 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3당 합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것은 4·18 고려대생 데모 주도,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지지 선언 등과 함께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다.
3·3·3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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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3월 3일 오후 3시 舊부산상고 운동장에서 열린 3당 합당 규탄 대회. 2만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
지금 와서 생각이지만, 그때 3당 합당을 거부한 현역 정치인 중심으로 정당 창당을 서두른 것은 잘못이었다. 소장파 의원들이 정당 창당을 서두르자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는데, 그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뜻을 같이하는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친목모임을 만든 후, 재야(在野), 시민단체,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외연(外延)을 넓혀나갔으면 3당 합당에 반대하는 세력을 망라한 비(非)호남 야당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몇 명 안 되는 현역 의원 중심으로 당을 만들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이다.
내가 당 대표(총재)를 맡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선배들이 이끌던 기존 정당과는 다른, 구성원의 자유로운 의사 표명과 활동을 보장하는 정당,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정당, 약하지만 색다른 정당을 만들어보려 노력했다. 민주당을 두고 ‘8인(人)8색(色)’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였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인기는 대단했다. 발기인 서명자만 1만2000명에 달했다. 1990년 3월 3일 오후 3시 구(舊)부산상고 교정에서 열린 3당 합당 규탄 집회(3·3·3집회)에는 2만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DJ, 조윤형·이해찬 공천에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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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과 DJ의 신민주연합당의 합당에는 김관석 목사(가운데)가 애를 많이 썼다. |
당시 민주당은 서울 및 부산 출신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92년 제14대 총선(總選)이 다가오면서 서울 출신 의원들이 먼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을 흔들기 시작했다. 당 안팎에서 DJ와의 통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재야의 김관석(金觀錫) 목사가 특히 애를 많이 썼다. 김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입장은 아니지만, 3당 합당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소. 이런 부정한 세력에게 나라를 맡겼다가는 대한민국에 무슨 희망이 있겠소? 방법은 야당 통합밖에 없습니다. DJ와 통합하세요.”
나도 통합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민주자유당(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야권 통합은 피할 수 없었다. 민주당을 창당할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민주당 내에서 서울 출신 의원들과 부산 출신인 나, 노무현, 김정길 의원은 통합에 찬성했다. 박찬종, 김광일 의원은 ‘세대교체’를 내세워 DJ의 2선 후퇴를 요구했다. 그들은 “DJ를 앞세우는 통합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지역을 따지지 말고 대승적(大乘的) 차원에서 통합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결국 1991년 9월 민주당과 신민주연합당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대권 도전을 노리고 있던 DJ는 많은 것을 양보했다. 나를 공동대표로 하는 데 동의했고, 민주당이라는 당명(黨名)도 받아들였다. 실제 민주당과 DJ계의 세력분포는 2대 8이었지만, 당내 지분은 4대 6으로 하는 데도 동의했다.
제14대 총선을 앞두고 후보를 공천할 때의 일이다. DJ는 조윤형(趙尹衡), 이해찬(李海瓚) 등 4~5명의 공천에 반대했다. 나는 DJ에게 따졌다.
“좋은 사람들 다 버리고 무슨 통합을 하겠다는 겁니까?”
결국 DJ는 내 뜻을 거의 받아줬다. 그러면서도 딱 한 사람, 조윤형 의원의 공천에는 반대했다.
“이 총재, 조윤형만은 안 됩니다. 이건 내 뜻을 받아주시오.”
조병옥 선생의 아들이고, 박정희 정권 시절 혹독한 고초를 겪었던 조윤형 의원을 왜 그렇게 완강하게 거부했을까? 조윤형 의원이 평민당 총재비서실장을 할 때, 직언(直言)을 많이 해 DJ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DJ, 정계은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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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9월 민주당과 DJ의 신민주연합당은 민주당으로 통합했다. |
선거 다음 날인 12월 19일 아침, DJ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 대표, 나는 정계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어떻게 더 정치를 할 수 있겠소?”
그 순간 ‘DJ가 정말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이구나. YS의 정치보복을 피하려고 정계은퇴를 선언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정계은퇴 선언을 정말로 믿었다. 후일 “DJ의 정계은퇴 선언 당시, 그가 정말로 은퇴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사람들을 보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게 안 보였다.
DJ는 영국으로 출국하기 전, 수천 명의 환송객 앞에서도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내게 정치를 하라, 대통령에 다시 출마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동지로,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1993년 3월 나는 DJ가 떠난 민주당의 대표가 됐다. 전당대회에서는 나와 김상현(金相賢) 의원, 정대철(鄭大哲) 의원이 당 대표직에 도전했다. 동교동계에서는 적극적으로 나를 지원해주었다. 권노갑(權魯甲), 박지원(朴智元), 한광옥(韓光玉) 의원 등이 애를 많이 써주었다. 나도 최고위원에 도전한 권노갑, 한광옥 의원의 표가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고 지원해주었다.
“DJ가 정계복귀 하면 ×××”라 했던 모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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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12월 19일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민주당사를 떠나면서 김영배 의원(가운데)과 작별인사를 하는 DJ. |
“DJ의 롤백 설이 있는데 사실일까?”
“소문일 뿐이지, 절대 안 나올 거요. 국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은퇴선언을 했는데, 어떻게 또 나오겠소?”
“그래도 여러 가지 돌아가는 정황을 종합해보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에이, 그러면 ×××지. 절대로 안 나올 거요.”
그랬던 그가 나중에 DJ정권 아래서 장관을 했다. 세상사는 참 모를 일이다.
1993년 6월 나는 유럽 순방길에 나섰다. 21세기를 몇 년 앞두고 정보화, 세계화시대의 도래를 얘기하고 있는데, 선진국들은 21세기에 대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국회의원 10여 명, 수행기자단 20여 명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6월 20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DJ를 만났다.
“언제쯤 귀국하실 생각입니까?”
“아직 계획이 없어요.”
“국내 정국이 돌아가는 것이나 저희가 야당 하는 것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많으시죠?”
“나는 전혀 몰라요. 누가 얘기를 꺼내면 말도 못 하게 하고 있어요. 이 대표, 나는 정계에서 은퇴한 사람이에요.”
나로서는 정계복귀 의사를 에둘러 타진한 것인데, DJ는 딱 잡아뗐다.
YS, JP와 與野대표회담 권유
YS정부는 30년 만에 등장한 문민(文民) 정부였다. 국민들의 기대가 높았다. 타고난 대중정치인인 YS는 하나회 숙정(肅正) 등 개혁드라이브를 걸면서 그러한 기대에 부응했다. 야당의 존재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감히 말하지만 YS의 성격으로 보아, DJ가 야당 당수였다고 해도 당시에는 DJ를 제대로 대접해주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UR(우루과이 라운드)협상과 쌀 개방, 전두환-노태우 기소 등의 현안에 대해 YS정권에 할 말은 했다고 자부한다.
한번은 여야 영수(領袖)회담을 마치고 난 후 YS가 말했다.
“이 총재, 내가 부탁이 하나 있소.”
“무엇입니까?”
“야당이 걸핏하면 여야 영수회담을 하자고 하는데, 대통령이 돼서 보니까 시간을 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또 영수회담 하면 이런저런 말도 많이 나오고…. 그러니 현안이 있을 때마다 JP(민자당 대표최고위원)와 여야 대표회담을 자주 갖도록 하세요. 두 사람이 합의했다고 하면 나는 무조건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당 대표는 엄연히 당총재인 대통령 아니십니까? JP는 ‘대표’라지만, 사실 관리인에 불과한데 어떻게 JP와 여야 대표회담을 하라고 하십니까?”
“이 총재, 그러지 말고 생각 좀 해보세요.”
대통령이 그렇게 말하는 데 더 이상 자르기도 뭣해서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나왔다.
몇 주 후,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 총재님 되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의아했다.
“누구십니까?”
“호호호, 이 총재님이 제 목소리를 못 알아들으시네요. 저, 박영옥이에요, 박영옥.”
박영옥이라면, JP의 부인. 공식석상에서 인사를 나눈 적은 있어도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사모님이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여자가 끼어들 일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 집 사람(JP)이 하도 고민을 해서 제가 전화를 했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통령께서 여야 대표회담을 자주 가지라고 하셨다는데, 이 총재님께서 응해주지 않는다고 고민을 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YS와의 영수회담이 있은 후 JP 측으로부터 몇 번 만나자는 전화가 왔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JP가 많이 속상해했고, 그걸 보다 못해 부인이 직접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박영옥씨가 말했다.
“우리 신랑이 늙어서 못났지만, 한번 식사라도 같이해주세요.”
“그동안 바빠서 응하지 못했을 뿐이지, 식사야 못할 것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날 통화 이후에도 나는 JP와 여야대표회담을 하지 않았다.
경기도 지사 競選
1993년 7월 4일, DJ가 6개월여 만에 영국에서 돌아왔다. DJ는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남북관계 개선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정계복귀설에 대해서는 늘 단호하게 부인했다.
1994년 말부터 이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 체제 개편론이 나왔다. DJ의 입김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런데도 DJ는 여전히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정계복귀 가능성을 부인했다.
1995년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DJ는 경기지사 후보로 이종찬(李鍾贊) 의원을 밀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종찬 카드를 고집하는 DJ를 보면서 비로소 ‘아, DJ가 정계에 복귀해 대선 4수에 도전하려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경기도 지사 경선에서는 장경우(張慶宇) 의원과 이종찬 의원의 대타(代打)로 나온 안동선(安東善) 의원이 맞붙었다. 개표에서 안동선 후보의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안 후보 측 당원들이 마지막 남은 투표함 3~4개를 개표하지 못하도록 난동을 부렸다.
나는 문제의 투표함들을 중앙당으로 가져오게 한 후 창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호남 출신의 존경받는 변호사 출신인 홍영기(洪英基) 국회부의장을 개표위원장으로 임명해 투표함을 열도록 했다. 결과는 장경우 후보의 승리였다.
DJ가 보자고 했다. DJ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이번 경선은 없었던 걸로 하고 후보를 다시 세우자”고 했다. 장경우・안동선 후보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합의로 이종찬 의원을 후보로 세우자는 얘기였다. 나는 DJ에게 말했다.
“당 대표는 저입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응접실에는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표 권한으로, 경기지사 후보는 장경우 의원으로 확정됐음을 알린다”고 했다.
이로써 DJ와 나는 결별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민주당의 공식적인 후보는 장경우였음에도, 동교동계에서는 호남향우회를 통해 장 후보를 찍지 말라고 선동했다. DJ에게는 경우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남들보고는 민주주의를 하라고 그렇게 외쳤던 사람이 말이다. 그래야 대통령이 되는 것인지….
낙선 후 ‘눈물의 회갑연’
결국 지방선거가 끝나고 난 후 DJ는 민주당을 포기하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착수했다. DJ가 한번 깃발을 들자 당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내게 남은 것은 ‘민주당’ 간판뿐이었다.
1997년 15대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DJ는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먼저 민주당에 잔류해 있던 강창성(姜昌成)・박은태(朴恩台) 의원을 통해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권노갑・한광옥・박지원 의원이 찾아왔다. 그들을 통해 전해온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내가 대권 4수에 도전하는데, 한번만 도와주시오. 당선되든 안 되든, 그다음에는 꼭 이 총재를 대통령으로 만들겠소.”
1996년 총선을 앞두고 나는 재야에서 장을병(張乙炳) 교수를 영입했다. 이와 함께 민주당을 김원기-장을병 공동대표 체제로 전환했다. 나는 상임고문으로 물러났지만, 당은 두 공동대표와 내가 협의해서 운영했다.
그해 4월 제15대 총선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신한국당에서는 나를 ‘DJ사람’으로 낙인 찍고 집중 공격을 했다. 신한국당 공천만 받아도 당선이 됐던 신한국당 부산지역 후보들은 자기 선거구는 제쳐놓고 내 선거구로 와서 낙선운동을 했다. 낙선해서 부끄럽다는 생각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내와 미국 로키산맥 여행을 다녀왔다.
이듬해 7월 포항북(北) 선거구에서 보궐선거가 실시됐다. 포항은 어릴 적 떠나오기는 했지만, 내 고향이었다. 박태준(朴泰俊) 전 포철(포스코) 회장이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했다. 나는 박태준씨가 포철을 자기 개인 소유처럼 여기면서 포철의 자원을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보궐선거에 나섰다.
그때 박태준씨는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DJ, JP와의 공조(共助)를 약속한 뒤였다. 포철 및 유관 회사에 다니는 유권자들에 호남, 충청표가 박태준씨에게 몰렸다. 선거 막판이 되자 처음 내가 인사를 다닐 때면 “고향으로 돌아왔다”며 반겨주던 지역 유지들마저 돌아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선거 다음 날인 7월 25일은 내 회갑(回甲)이었다. 당원들이 포항의 한 횟집에서 회갑연을 열어주었다. ‘눈물의 회갑연’이었다.
趙淳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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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순 서울시장은 1997년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대선후보와 총재직을 요구했으나, 대선 완주를 위한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
“대선 출마 준비가 됐습니까?”
“됐습니다.”
“꼭 대선을 완주할 것입니까?”
“후보만 주십시오.”
당시만 해도 여론조사를 해보면 이회창(李會昌) 신한국당 후보, 조순 시장, DJ의 지지도가 비슷하게 나왔다. 조순 시장을 지지하기로 했다. 그런데 조 시장은 처음에는 대통령 후보 자리만 달라고 하더니, 다음에는 총재 자리도 달라고 했다. 그래야 대선 준비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민주당 총재로 복귀해 있던 나는 총재 자리도 내주었다. 8월 28일 63빌딩에서 총재추대대회도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조순 총재가 대구 경북대 강연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조언을 했다.
“내려간 김에 총재께서 당원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막걸리도 한 잔 하고 오십시오. 그게 야당 당원들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다음 날 아침 대구에 있는 당원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도대체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식사는커녕 당원들과 인사도 없이 그냥 올라가 버렸어요.”
경남 진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신문 가십난에 조순 후보가 신한국당 서석재 의원, 국민회의 한화갑(韓和甲) 의원과 바둑을 두었다는 기사가 났다.
‘아니, 대선후보가 무슨 시간이 있어서 남의 당 국회의원들과 바둑을 둔단 말인가? 아! 이 사람은 대통령을 하려고 나온 사람이 아니구나. 자신의 세(勢)를 과시해서 국무총리를 하려고 나온 사람이구나.’
조순 후보를 만나서 따졌다.
“서석재나 한화갑이 조 후보를 위해 표를 끌어다 줄 사람입니까? 한 표는커녕 반(半) 표도 없는 사람들과 만나 뭘 하자는 겁니까? 출마하려는 생각은 있는 겁니까?”
그러자 조순 후보는 실토했다.
“사실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습니다.”
李會昌을 선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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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1999년 5월 10일 내가 운영하는 민주동우회 현판식에 참석했다. 가운데는 조순 명예총재. |
“조 총재가 총리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모양인데, 그럼 우리가 이회창 후보를 한번 밀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순 후보도 선뜻 응했다. 이회창 후보 측에 만나자고 했다. 이 후보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 총재가 고맙다고 했다. 그에게 당 대 당(黨對黨) 통합을 요구했다. 이 총재는 흔쾌히 응했다. 나는 “정당에서 해볼 것은 다 해봤다”면서 새 당의 총재 자리는 조순 후보에게 양보했다. 당 이름은 한나라당으로 하기로 했다.
김윤환(金潤煥) 의원과 함께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선거대책위원장은 이한동(李漢東) 의원이 맡았다. 모두 열심히 뛰었지만, IMF사태로 인한 충격,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 의혹, 이인제(李仁濟) 후보의 출마로 인한 표의 분산이라는 악재(惡材)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회창 후보는 패배했고, DJ는 그토록 원하던 대통령이 됐다.
한나라당 총재권한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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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한나라당 총재권한 대행이던 1998년 8월 19일, 총리 인준을 받은 JP가 한나라당을 방문했다. |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조순 총재는 이러한 상황을 감당하지 못했다. 1998년 8월 4일 국회의장 선거에서 박준규(朴浚圭) 자민련 의원이 국회의장으로 당선됐다. 원내 다수당이면서도 국회의장 선거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은 내홍에 휘말렸다. 당내 최고 다선(多選)이었던 내가 총재권한 대행이 됐다. 총재권한 대행이라야 8월 31일 임시전당대회까지 20일 남짓 당을 관리하고 임시전당대회를 잘 치르는 것이 임무였다. 임시전당대회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총재가 되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몇 가지 중요한 일을 했다. 우선 국무총리 인준 문제를 놓고 표류하던 국회를 정상화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의 당론(黨論)은 DJ가 JP를 위헌적인 총리서리로 임명한 것을 사과하고 총리를 새로 지명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DJ로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어서 받아들일 리 없었다. 결국 어느 한쪽은 져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국가위기상황 극복을 위해 한나라당이 무조건 국회에 등원(登院)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론을 바꾸어야 했다.
8월 13일 나는 먼저 소장파 의원 15~16명을 불러 설득했다. 그들은 “JP는 가짜 총리다. 우리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슬그머니 국회로 기어 들어가면 제1야당 체면은 뭐가 되느냐”고 버텼다. 단 한 명도 설득하지 못했다.
“시골 다방 가오마담 같은 자리 때문에 이래서야…”
이어 나는 조순, 이회창, 김윤환, 이한동, 김수한(金守漢)씨 등 당 원로들과 당3역, 전당대회의장 등 10여 명을 소집했다. 이회창 전 후보만 빼고 모두 참석했다.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의 당론을 계속 고집해야 할지, 바꾸어야 할지, 바꾼다면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제 오른쪽에 앉은 분부터 솔직히 의견을 개진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부 “가짜 총리를 인정할 수 없다. 당론을 고수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내심 국회정상화를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낭패였다. 참석자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는데, 내 뜻을 알고 있던 서정화(徐廷和) 전당대회의장이 입을 열었다.
“이 총재, 평소 지론이 있지 않소? 그걸 한번 피력해보시오.”
“전부 당론을 지키자고 하는데, 정치는 현실입니다. 지금 나라가 처한 현실과 등원 거부라는 당론 사이에는 괴리가 있습니다. 지금 하루빨리 IMF사태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인데 여기에 당론인 대통령의 사과와 총리 재지명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국난을 극복하는 게 우리의 도리입니다.
우리 선배 정치인들이 국회 교착상태를 한두 번 겪었습니까? 그때마다 타협에 의해 푼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여당이나 야당이 100% 양보해서 푼 적도 있습니다. 이런 걸 ‘정치적 결단’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지금이 ‘정치적 결단’으로 해결해야 할 때입니다. 한나라당이 대범하게 구국적 차원에서 국회에 들어간다고 해서 국민들이 절대로 욕하지 않습니다. 제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러자 누가 소파 팔걸이를 탁 치면서 발언권을 달라고 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었다. “모두 당론을 지키자고 하기에 나도 그러자고 했지만, 솔직히 내 마음은 이 총재와 같소. 그게 조금이라도 나라를 위하는 길이오.”
김 전 의장의 발언에 용기를 얻은 내가 다시 말했다.
“김 의장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총리 자리가 뭡니까? 그게 천하대세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시골 다방 가오마담 같은 자리 때문에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결국 참석자 모두 국회 등원에 찬성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의원총회에서도 격론 끝에 국회정상화로 당론을 바꾸었다.
국회부의장 지명을 둘러싼 갈등
이어 박희태 원내총무와 한화갑 국민회의 원내총무가 국회정상화에 합의했다. 합의 내용 중에는 민생-예결특위를 구성해 개혁입법 등 현안을 우선 처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박희태 원내총무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박 원내총무는 원(院) 구성과 현안 처리가 급하다는 이유를 댔다.
내가 보기에 민생-예결특위를 구성해 현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것은 원 구성을 한나라당 전당대회와 이회창 전 후보 복귀 이후로 미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야당 몫 국회부의장 지명, 상임위원장 지명권은 내가 행사하게 된다.
나는 박 원내총무를 질타했다.
“국회에서 싸울 때 야당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국회법뿐이오. 그런데 법을 했다는 사람이 법을 어기면 되겠소? 그런 건 과거 여당이 쓰던 수법인데, 야당인 우리가 그래서야 되겠소?”
나는 국회부의장으로 신상우 의원을 지명했다. 사실 총재 복귀를 앞두고 있던 이회창 전 후보는 측근인 양정규(梁正圭) 의원을 부의장으로 지명하려 하고 있었다. 원래 양 의원을 자신의 참모장 격으로 두고 있었던 김윤환 의원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신 의원을 부의장으로 지명한 것은 생각이 있어서였다. 나는 이회창 전 후보가 1997년 대선에서 패한 것은 YS와의 불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상우 의원은 당내에서 YS의 의중을 반영하는 데 앞장서면서 이회창 전 후보와 관계가 안 좋았다. 나는 신 의원을 부의장으로 지명, 그와 이회창 전 후보, 더 나아가 이회창 전 후보와 YS의 화해를 꾀하려 했다.
이회창 전 후보를 만나 국회부의장으로 신상우 의원을 지명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는 펄쩍 뛰었다. 나는 신상우 의원을 부의장에 지명하려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당을 위하고 당신을 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럴 때는 자기 사람을 설득하고, 남을 배려해야 합니다. 자기 사람만 챙기면 누가 이 후보 곁에 있겠습니까?”
이회창 전 후보는 “나는 양해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허주(虛舟)와 의논해보라”고 했다. 김윤환 의원을 만났더니 이미 이 전 후보의 전화를 받았는지 얼굴 표정이 안 좋았다.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상임위원장에서 허주 쪽 사람을 더 챙겨주는 것을 조건으로 양보를 받아냈다.
공천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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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3월 8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국민당 창당대회. 왼쪽부터 박찬종, 김광일, 김윤환, 이수성, 조순, 장기표, 신상우, 나. |
2000년 총선이 다가왔다. 합당 시 공천지분은 민주당 4, 신한국당 6으로 하기로 했지만, 그걸 따지기는 적절치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이회창 총재에게 “합당 시 약속에는 구애받지 말고, 대신 자기 쪽에서 꼭 공천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우리 둘이 의논해서 공천심사위에 얘기하자”고 했다.
공천을 앞두고 내가 공천에서 탈락할 거라는 얘기가 돌았다. 설마 했다. 2월 18일 공천결과가 나왔다. 공천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나뿐이 아니었다. 신상우・오세응(吳世應) 등 당 중진과 원로들이 대거 탈락했다. 명분은 “당을 젊게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신한국당과 통합할 때 딸려온 민주당 당사를 팔아 자기 선거빚을 갚았다던 사람이…. 생각해보니 총재권한 대행 시절에, 국회정상화와 국회부의장 지명 등을 놓고 내 주장을 관철했던 것이 원인(遠因)이었던 것 같았다. 이회창 총재나 측근들은 내가 녹록지 않은 사람이며, 나를 그대로 놔두면 이회창 총재의 정치가도(街道)에 장애가 될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이회창 총재와 만났다. 그를 거칠게 비판했다. 그가 말했다.
“비례대표를 하시지요.”
“멀쩡한 내가 왜 지역구 공천을 못 받고, 당신이 던져주는 비례대표나 받아야 하오? 더러워서 안 하겠소!”
나는 김윤환 의원을 찾아갔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잠옷 바람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는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호소했다. 우리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민주국민당을 만들었다.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조순 전 서울시장, 신상우 의원, 재야운동가 장기표(張琪杓)씨, 김용환(金龍煥) 전 자민련 부총재, 김상현 의원, 박찬종 의원, 김광일 전 대통령비서실장, 5공 실세였던 허화평(許和平)씨 등이 합류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당선자는 지역구에서 한승수(韓昇洙) 의원, 전국구에서 강숙자 의원, 단 두 사람이었다. 2000년 총선 이후 운동권 출신 젊은 정치인들이 많이 진출한 정치판의 모습은 우리 때와는 많이 달랐다. 그때 나는 사실상 정치를 접었다.
盧武鉉, 내가 지지 결정하자 눈물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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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시절 노무현 의원과 함께. 2002년 대선에서 나는 노무현 후보를 지원했다. |
서 변호사는 “이회창 후보를 용서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회창 후보가 공천이라는 정치적 무기로 나를 학살한 경위를 아느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듣고 판단해보라”한 후, 합당 이후 공천 탈락까지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물러갔다.
서청원 의원도 찾아왔다. 그는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과 함께 이회창 후보에게 나를 끌어들이라고 강권했다고 한다. 이 총재는 “만나기는 해야 하는데 일정이 꽉 차서…”라고 했다고 한다. 서 의원은 “이 후보에게 ‘새벽에라도 가서 만나야 한다. 안 그러면 이기택 총재는 노무현에게 간다’고 했다”면서, 이회창 후보와 만나보라고 부탁했다. 나는 “만나봐야 소용없는 걸 왜 만나겠느냐”며 거절했다.
12월 1일쯤으로 기억하는데, 노무현 후보도 나를 찾아왔다. 김정길 의원 등이 중간에서 애를 많이 썼다. 노 후보는 “제가 선배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서 충성을 다 하지 못하긴 했습니다만,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직을) 잘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며칠 후 나는 노무현 후보 지지를 결정했다. 내 사무실을 찾은 노 후보는 눈물을 보였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노 후보를 도왔다.
金玟河, “평통 수석부의장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자리”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2003년 5월, 나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중앙대 총장을 지낸 김민하(金玟河)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의 전화였다. 그와는 한때 친분이 있었지만, 한동안 연락이 없던 사이였다. 그는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했다. 그와 만난 자리에서 내가 먼저 물었다.
“선배님, 어떻게 지내십니까?”
“몰라요? 나 평통 수석부의장 하고 있지 않소? 내 임기가 다 되어 가는데,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더니, 내 후임자로 이 총재가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한번 만나서 얘기해보라고 하더군요.”
“그거 하면 재미있습니까?”
“대학 총장보다 훨씬 낫소. 책임지는 자리도 아니고, 조직 관리나 하면서 사람들 만나서 통일에 대해 얘기나 해주면 되는 자리요. 나나 이 총재나 우리 세대면 다 통일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지 않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고…. 세상에 이거보다 좋은 자리는 없을 거요. 맡으시오.”
“저는 안 맡겠습니다. 나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돕기는 했지만, 자리를 받으려고 그랬다는 얘기는 듣기 싫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야당을 한 사람들은 평통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자리를 맡겠습니까?”
일주일 후 신상우 전 의원이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 5년이 흘러갔다. 대통령 탄핵 등 많은 일이 있었다. 재임 기간 내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돌출발언으로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지도자로서 소양이나 도덕성이 부족했다. 언행도 비상식적이었다. 민주당 시절 회의 때에도 자기 얘기만 하고,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곤 했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그에게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자리를 거절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런 사람을 왜 지지했느냐고? 이회창 후보는 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힘은 국회와의 소통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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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6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평통 유라시아 지역 자문위원 초청 다과회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함께. |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朴槿惠) 후보와 MB 모두 지지를 부탁해 왔다. 나는 “경선에서 후보가 결정된 후에 ‘한나라당 후보’를 돕겠다”고 했다. MB가 후보가 된 후에는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으로 선거를 도왔다.
MB에게는 기대가 컸다. 젊은 시절 불의(不義)에 항거해 6·3사태를 주도하다가 감옥에도 갔다올 만큼 정의감이 있고, 기업인과 서울시장으로 성공한 데다가, 국회의원 경험도 있고, 부지런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대북(對北)정책으로 내세운 ‘비핵개방3000’ 정책도 공감이 갔다.
국회의원과 민선 서울시장을 지냈음에도 MB는 정치를 싫어했다. 청와대에서 MB를 만났을 때 이렇게 조언했다.
“평생 정치를 하면서 보니, 대통령이 국정을 원만하게 수행하려면 국회와 정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대통령의 실질적인 힘은 국회와의 원활한 소통에서 나옵니다.”
MB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글쎄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요….”
MB는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 한미동맹 강화, G20정상회담 개최 등에서 볼 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다만 ‘정치’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고, 그 때문에 임기 내내 ‘소통부재(疏通不在)’니 ‘불통(不通)’이니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아쉽다. MB정권에서 나는 2008~2011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다. 그가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 지원연설을 간 적이 있었다. 메모를 또박또박 읽는 것을 보면서 ‘저래서 되겠나’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난 대선 때에는 박 후보 관계자로부터 지원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지만 “박 후보를 지지하지만, 마이크 잡고 직접 나서는 일은 이제 그만할 생각”이라고 했다.
MB에게도 한 얘기지만, 박근혜 대통령도 정치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하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공화당이 똘똘 뭉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YS·DJ와 나의 차이
내가 막연하게나마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건강이 안 좋아 산사(山寺)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곳에는 고시공부를 하는 대학생이 여러 명 있었다.
하루는 대학생 하나가 신문을 하나 사가지고 올라왔다. 신문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급서(急逝)를 알리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대학생들은 모두 땅을 치면서 오열(嗚咽)했다. 그걸 보면서 나는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다니, 정치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나도 그런 존재가 되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960년 4·18 고대생 시위에 앞장섰던 것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67년 제7대 국회 때 29세의 나이로 등원한 후, 내게는 ‘4·19세대의 대표주자’라는 과분한 칭호가 늘 따라다녔다. 한때는 YS와 DJ의 뒤를 이을 정치인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시대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YS보다는 열 살, DJ보다는 열한 살 아래였다. 두 사람과 같은 반열에 설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한참 아래로서 명확히 차별되는 나이도 아니었다. 이런 애매함이 내 운신의 폭을 많이 제한했다.
둘째, 너무 이른 나이에 정치에 뛰어들다 보니, 제대로 공부하고 진지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성숙해질 기회를 놓쳤다.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했을 때,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려 했지만 YS 단식 투쟁 소식을 듣고 1년 만에 귀국했다.
1987년 통일민주당에 들어간 후, 한동안 당직을 맡지 않고 충전(充塡)의 시간을 가지려 했지만, 이때는 부총재, 원내총무, 5공 비리특위 위원장 등을 맡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내게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권력의지가 부족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YS처럼 3당 야합을 하거나, DJ처럼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정치를 하면서 두 사람보다는 원칙과 과정을 더 중시했다고 자부한다. 그것은 일제(日帝)시대에 교육을 받은 사람과 광복 후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취재 후기 지난 4월경, 임헌조 범시민사회단체연합(범사련) 공동대표로부터 이기택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마포구 아현동 범사련 사무실에서 소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를 통해 이기택 전 수석부의장에게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를 위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더니 바로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생각해온 신민당 이래 야당 정치인의 모습은 ‘투사’였다. 이 전 수석부의장 역시 그런 모습을 연상했다. 하지만 범사련 고문실 문을 열었을 때,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혼자서 붓글씨를 쓰고 있는 온화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책장에는 국내외 정치인들의 회고록, 4·19 관련 도서 등이 많이 꽂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던진 첫 질문은 “4·18 고대생(高大生) 데모를 이끌었던 것이 정치이력의 시작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내 정치인생의 출발점이자, 내가 정치를 한 이유”라고 했다. 이어 그는 4·18, 4·19 때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신이 나서 얘기한다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4·19 전후, 전경환씨로부터 “당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일, 신한민주당 창당 전후 야당 정치인들의 움직임, 3당 합당, 1995년 민주당 경기지사 경선, 한나라당 총재대행 시절, 2000년 총선 공천 탈락 등의 얘기도 생생하게 풀어나갔다. DJ,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조순 전 서울시장에 대해서는 서운한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DJ에 대해 얘기할 때는 “남들보고는 민주주의를 하라고 그렇게 외쳤던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경우도, 민주주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과 국민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했다. “DJ가 대선 3수 후 국민 앞에서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4수에 도전했던 것을 어떻게 용납하느냐”는 것이었다.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해서는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강도 높은 비판을 여러 번 했다. 2000년 한나라당 공천 탈락 후 정체성(正體性)이 서로 다른 여러 정당의 공천 탈락자들을 모아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던 것에 대해서는 후회스러워했다. “평소 ‘호랑이는 배가 고파도 풀을 먹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는 “그것도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이야기”라면서 “이회창씨에게 배신을 당하고 선거는 목전에 닥치다 보니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했다. 길이 있으면 갔을 텐데, 길을 잃고 산길로 가서 헤매다가 스타일을 구긴 게 되어버렸다”며 씁쓸해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이승만(李承晩) 재(再)평가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럼 4·19가 잘못됐다는 것이냐”며 불만스러워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을 지칭할 때에는 ‘군사독재정권’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그때마다 그가 ‘4·19세대’이고 ‘뼛속까지 야당’임을 실감했다. “인생에서 가장 큰 결단은 역시 4·18을 주도한 것과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를 지지한 것 아니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노(No)”라고 말했다. 그는 1990년 ‘3당 야합’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것을 더 큰 결단으로 꼽았다. 30년 넘게 정치를 해왔고, 여러 번 야당 총재(대표)를 했지만, 이리저리 잔 계산을 하기보다는 직정적(直情的)으로 살아온 사람,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정문을 박차고 뛰쳐나오던 ‘고대생’의 정신과 자세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