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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 詩人이 쓰는 대한민국 구라열전 ④ 시인 황금찬

“詩에는 마침표가 없다”

글 : 원재훈  시인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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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내가 어떻게 사냐고요? 엄밀히 보면 이건 사는 게 아니지요. 그냥 있는 거지요”
⊙ “詩를 쓴다는 건 가난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
⊙ “지금까지 문학을 버리지 않은 것이, 그것이 성공이라면 성공이지요”

황금찬
⊙ 94세. 일본 대동학원 철학과 중퇴.
⊙ 강남사회복지대 국문학 교수, 숭의여전 강사.
⊙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 시집: 《분수와 나비》, 《산다는 것은》, 《고향의 소나무》 등.

원재훈
⊙ 50세.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공룡시대> 外 여러 편의 시로 등단.
  “요즘은 오라는 데는 많아도, 몸이 늙어 다 다닐 수가 없어요. 가끔 혜화동이나 동네 산책을 하면서 소일하지요. 집으로 후배 시인들이 책을 보내주는데 그것도 다 읽지 못해요. 고마운 사람들이라 전화해 주고, 편지도 쓰지요. 먼 데서 시집을 보내주는 사람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지요. 친구들은 이제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처와 두 자식도 나보다 먼저… 글쎄요. 요즘 내가 어떻게 사냐고요. 엄밀히 보면 이건 사는 게 아니지요. 그냥 있는 거지요. 허허.”
 
  “산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시인(詩人)이 산다는 건 그건 시를 쓰는 일이지요. 시를 쓴다는 건,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욕심들이 많은 것 같아요. 오히려 가난했던 시절에는 욕심이 없었어요. 요즘은 부유해졌는데 더 욕심이 많아진 것 같아요. 저 중동의 독재자 카다피 일가의 몰락을 보면 사람의 욕심이 정말 한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황금을 좋아하던 그 사람, 황금권총으로 죽었다는 외신보도는 정말 눈물나게 싫은 인간의 욕심을 보여줬어요.”
 
  원로시인 황금찬(黃錦燦) 선생에게 근황을 여쭙자 하신 말씀이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3·1운동 한 해 전인 1918년에 태어났다. 지나온 길이 가시밭과 높은 울타리가 많았다. 그런 20세기를 고스란히 살아내고,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21세기를 산책하는 모습은 혜화동 가로수보다도 더 고풍스럽다. 만약에 나무가 걸어 다닐 수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詩는 神을 기억하는 작업
 
  이제 선생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고 시간이 당신 앞을 무심하게 지나간다고 했다. 선생은 항아리 같다. 오래된 조선 백자(白磁)의 텅 빈 공간에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선생의 이야기는 우리 근현대 문학(文學)의 백년사(百年史)이기도 하다. 그 세월을 고스란히 온몸에 담고 있다. 몇 시간에 담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그런 그릇도 못 되고 능력도 없다. 뭘 적겠다는 욕심을 비우고 그냥, 선생에게서 울려나오는 마음의 결을 읽고 싶었다.
 
  혜화동 카페 엘빈은 선생이 단골로 다니는 커피집이다. 카페 벽에 선생의 시가 한 편 걸려 있다. 시를 보고 선생에게 말을 건넨다. 선생은 청력이 약하기 때문에 크게 말을 해야 한다. 청력은 약하지만 음성은 건강하고 굵다. 시인의 목소리는 나이 들지 않았다. 시란 무엇인가, 선생에게 물었다.
 
  “시는 신(神)을 기억하는 작업입니다.”
 
  선생은 말했다. 시는 선하고 착하고 욕심 없는 것을 좋아한다. 착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절대명제 ‘신은 선하다’는 선생의 시 마음이다. 독실한 신자로서, 동시에 시인으로서 그렇다. 선생은 일본의 한 시를 인용하면서 시인의 마음이란 그래야 한다고 했다.
 
  일본 근대문학에 뛰어난 족적을 남긴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의 일화이다.
 
  어느 봄날, 기타하라는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마침 연못가로 새가 날아오는데 한 제자가 돌멩이를 새에게 던졌다. 기타하라는 제자에게 왜 새에게 돌을 던졌느냐고 물었다. 제자가 말하기를 돌멩이와 새대가리가 부딪히면 새가 피를 흘리면서 떨어질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냐고 대답했다.
 
  기타하라는 대로하여 그 자리에서 그 제자를 자신의 문하에서 쫓아낸다.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자, 시인이 아니다.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 제자가 미(美)는 알아도 선(善)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는 극단을 취하고 진보적이지만, 선은 모든 것을 품고 아우르면서 보수적이다. 선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미가 악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와 눈물
 
2009년 4월 23일 서초구청 1층 조이플라자에서 열린 ‘12시간 릴레이 시 낭송회’에서 황금찬 시인이 시 낭송을 하고 있다.
  선생은 눈물의 시인이다. 선생의 마음은 물에 젖은 한지처럼 조금만 건드려도 찢어질 것 같다. 어떤 인연이 있어 선생을 한 시절 자주 뵈었던 나는 선생에게서 그런 눈물의 흔적을 많이 보았다. 선생은 어떤 말씀을 하시다가 툭, 눈물을 흘리신다. 그 마음을 짐작하기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필자 역시 누군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주르륵 흐르곤 한다.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그 삶의 배경이 짐작되고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패왕별희>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최고의 경극 연기자가 되기 위해 지독한 훈련을 받던 소년들이 견디지 못해 극단에서 탈출한다. 그 소년들이 베이징의 한 공연장에서 경극 <패왕별희>를 관람한다. 열연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그들이 훈련해서 도달해야 할 배우로서의 모습을 거기에서 본다.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그 공연을 넋을 놓고 보던 한 소년이 그만 울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왜 우느냐는 질문에 소년은 대답한다.
 
  “저 배우가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정서는 우리에게도 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분단과 이산가족 등등의 사연들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 우리의 지나온 길, 그 안은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얼룩져 있다. 어찌할 수 없는 고통과 가난을 통과한 사람들의 눈물샘은 깊고 넓다. 공감하고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시는 눈물을 흘리게 한다.
 
  선생과 대화를 나누면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우리 문단의 대가인 김구용 선생 이야기를 여쭈어 보아도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 시인들은 언제 소주 한 잔을 맘 편하게 먹을 수 있느냐 말이야. 이런 거예요. 지난날, 우린 정말 가난했지요. 소주 한 잔을 먹어도 누가 돈을 낼 수 있는지 몰랐어요. 우리 젊은 시절은 그랬어요. 우리 문단은 그렇게 문학을 하고 살았어요. 눈물나는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의 뿌리는 당연히 유년시절에 있다. 유년시절에 관한 선생의 글을 읽으면 선생 인생의 배경은 눈물과 가난, 이 두 단어로 정리된다. 선생의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문학》을 인용한다.
 
  <어머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를 드리셨다. 어머님의 소원을 올리는 기도소리는 가족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음성이 높았다.
 
  “산신님! 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우리 아이들도 장차 커서 저 사람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저 남루한 옷을 벗고 저 사람들처럼 저렇게 양복을 입고 살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무슨 죄로 이렇게 가난합니까. 이 가난을 벗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아이들이 남의 눈에 꽃으로 잎으로 보이게 하여 주십시오.” 가난한 가정의 어머님은 그렇게 빌며 울고 있었다.>
 
 
  떠돌이의 삶
 
  어머니의 가난은 훗날, 자신의 아내에게 이어졌다. 시 <바느질하는 손>은 어떤 산문보다 시인의 자전적인 서사가 뚜렷하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아내는/ 바느질을 하고 있다/ 장난과 트집으로 때 묻은 어린놈이/ 아내의 무릎에서 잠자고 있다
 
  손마디가 굵은 아내의 손은/ 얼음처럼 차다/ 한평생 살면서 위로를 모르는 내가/ 오늘따라 면경을 본다/ 겹실을 꿴 긴 바늘이 아내의 손끝에선/ 사랑이 되고/ 때꾸러기의 뚫어진 바지 구멍을/ 아내는 그 사랑으로 메우고 있다
 
  아내의 사랑으로 어린놈은 크고/ 어린놈이 자라면 아내는 늙는다
 
  내일도 날인데 그만 자지/ 아내는 대답 대신/ 쓸쓸히 웃는다
 
  밤이 깊어갈수록/ 촉광이 밝고/ 촉광이 밝을수록/ 아내의 눈가에 잔주름이 더 많아진다>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은 시공간을 달리할 뿐 다르지 않았다. 선생이 여덟 살 되던 해에 가족은 북간도로 가야만 했다. 바늘 하나 꽂을 땅이 없었던 가난한 고향 마을에서 벗어나 거기에 가면 땅도 밥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선생의 고향인 강원도 속초에는 기차가 없어서 걸어서 원산까지 갔다. 유민, 온 가족이 보따리를 이고 지고 속초에서 원산까지 걸어서 갔다. 거기에서 소년 황금찬은 난생처음 기차를 봤다. 그때까지 철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철길이 철을 녹여서 만든 길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눈앞에 나타난 기차는 충격적이었다. 자전거도 아니고, 자동차도 아니다. 기차가 달리고 있다. 이후로 선생은 눈을 감으면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달리는 꿈을 꾸게 됐다고 한다.
 
  북간도로 향하던 선생의 가족은 그 중간 지점인 개마고원에서 짐을 풀었다. 1925년 개마고원, 풍수군 황수원에서도 가난한 살림살이는 이어지지만, 그곳 사람들의 다감한 인정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보따리를 메고 지나가던 나그네도 주인집에서 며칠씩 묵고 가지만 돈을 주고받지 않는다. 주인은 나도 언젠가 당신에게 신세를 질 수 있다는 말로 나그네의 미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그런 곳, 선생은 그런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북쪽 지방이라 너무 추워서 과일도 없고, 감자와 귀리 같은 곡식으로 연명했다.
 
 
  클래식 음악과의 만남
 
서울 마로니에공원 야외무대에서 열린 시 낭송회에서 연극인 박웅씨가 황금찬 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이후 개마고원을 떠나서 성진으로, 성진을 떠나서 명천으로, 명천에서 다시 성진으로 가난한 살림살이는 떠돌이의 삶이었고, 이 추억들은 모조리 시로 남았고, 그 시의 길을 아직도 선생은 걷고 있다. 이제 인생 백 년을 앞두고 있는 선생. 그 삶의 길은 ‘고생길’이었다.
 
  “일제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으면 몰라요. 내 친구 고동재는 북간도 용정의 대성중학교에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학교를 다닌 친구지요. 이 친구는 ‘내가 우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북간도로 떠나서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요. 광복이 되고 나서 용정에 가서 그의 자취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지.
 
  우리 글도 쓰지 못하던 시절이었지요. 글뿐만이 아니라 정신마저도 통제했어요. 내가 정지용의 시 한 편을 보고 있다고 고등계 형사가 끌고 가서 고문을 하던 시절이었어. 지용 선생의 <고향>이라는 시를 보고 조선인 고등계 형사가 일본말로 그러지. ‘고향이 뭐야, 이거 독립을 의미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야. 그러곤 소의 생식기로 때리는데, ‘쇠좆매’라 불렀어. 그걸로 맞으면 엄청 아파, 울다가 지쳐 거품이 날 때까지 맞았지. 그러다가 광복 한 달 전인가에 풀려났는데. 일본어로 취조를 하던 고등계 형사가 취조실을 나가는 내 등 뒤에다 대고 우리말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야. 이 새끼야. 나가서 잘살아라. 이 지독한 새끼야.’ 그 사람 왜 그때 우리말로 욕설을 했을까 싶어요.”
 
  이런 시절을 살면서 선생을 견디게 한 것은 바로 시와 음악이었다. 선생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를 대단히 사랑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 척박한 시대에 클래식 음악은 선생의 유일한 호사였다. 칼라스의 공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들뜬 청년의 모습이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어떻게 클래식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광복 전이지요. 이북의 국경 근처에서 살 때인데 그때 맹인 선생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분은 많은 클래식 음반과 좋은 유성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어요. 겨울에 북쪽이라 눈이 엄청 내리는데, 한밤중에 음악을 듣고 싶어 그분의 집을 찾았어요. 아마도 크리스마스 무렵인데, 눈을 맞으며 철길로 걸어가는데, 눈 내리는 소리에 기차 오는 소리를 못 듣고 가다가 죽을 뻔한 일도 있었지요. 그날 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선생의 집으로 가서 쇼팽의 피아노곡을 들었어요. 지금은 참 오래된 기억이지만 음악은 그 시절 나에게 꿈이랄까, 희망이랄까 이런 걸 줬던 거 같아요.”
 
 
  일제보다 더 무서운 공산주의
 
   선생은 시인이면서 교사이다. 교사는 생업이다. 시와 가족을 지키게 해준 직업이다. 선생은 살면서 한 번도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거룩한 일상인 교사로서의 출발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된다.
 
  “내가 일본 동경에서 공부를 하고 청진으로 돌아오는데 배 안에서부터 열다섯 번 이상 일경에게 조사를 받았어. 정말 무서웠어.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야.
 
  동경에서 돌아온 나는 청진에 있는 마그네사이트 공장에서 인부로 일을 했어요. 주로 벽돌을 치는 일을 했는데 무척 고단한 일이었어. 인부가 칠십여 명 있었는데 쇳물에 녹지 않은 벽돌을 치는 일을 했지. 어느 날 인부 한 사람이 와서 ‘우린 막노동꾼이라 아무것도 모르는데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에게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라고 부탁을 하는 거야. 한 시간 정도 뭘 가르쳐달라는데 나도 아는 게 없다고 거절을 하다가 여러 번 부탁을 해서 인부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했어요.
 
  그때 노산 이은상 선생의 책 《삼국유사 이야기》를 교본으로 해서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 줬어요. 강의를 하는 동안 사람들이 하나 둘 느는 거야.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당연히 일제의 감시에 걸리게 되지. 어느 날 일본인 공장장이 ‘빠가야로, 너 위장취업자지, 너 독립운동가지’라면서 겁을 주는 거야. 그러더니 봐줄 테니까, 공장에서 일하지 말고 정식직원으로 일하라고 하더군, 나는 겁이 나서 그 다음 날 새벽에 성진에서 기차를 타고 양양으로 도망쳤어. 그리고 양양에서 광복을 맞았지.
 
  양양에서 일본 천황의 방송을 들었는데 잡음이 워낙 심해서 그냥 우는 소리같이 들리더라고, 그게 바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이었어. 너무 기뻐서 그 자리에서 뛰쳐나왔지만, 일본군들이 총칼을 들고 있어서 그 자리에서 만세는 못 불렀어. 죽을까 봐 겁났지. 꿈 같은 이야기지. 잠시 서성거리다가 그다음에 울면서 만세를 불렀어.
 
 
  공산당 주축의 교육자대회서 파문당해
 
  광복이 되고 나서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쳤어요. 그런데 마을 주민 수십 명이 와서 어서 피하라는 거야. 일제가 물러가니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어요. 참 기구하기도 하지. 기독교 신자인 나를 그들이 곱게 보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널 잡으려고 한다고 했지만 다행히 나를 잡으러 오지는 않았어요.”
 
  선생이 양양에서 강릉으로 38선을 넘어오게 된 것도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38선만 없었어도 나는 양양에 정착했을지도 몰라요. 일단 교장선생님이 양양에 남아 있어 달라고 했어요. 당시에는 우리말 교과서가 없었어요. 교과서도 없이 학생들을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내가 다섯 명의 선생과 함께 교과서를 만들었어요. 엉성하지만, 옛날 복사기라고 할 수 있는 ‘가리방’으로 밀어서 각 군에 보냈어요. 그 허름한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줄 수가 없었어요. 교과서는 선생만 있고, 아이들에게 칠판에 판서를 해서 가르쳤지요. 그래서 지금도 김소월을 비롯한 많은 시를 외워요.
 
  그런데 1946년 3월 달에 공산당이 주축이 된 교육자대회가 열렸어. 내가 교재를 만들어서인지 교재연구부장으로 참가했는데, 노동복을 입은 사람이 일어나서 ‘황금찬이가 누구냐’고 하는 거야. 그래서 대답을 했더니 대뜸 당신은 어느 형무소를 나왔느냐고 하더군, 형무소는 안 갔다고 하니까. 당장 욕을 하는 거야. ‘이 새끼야. 너는 무슨 자격으로 교재연구부장이 됐느냐’고 말이야. 그러더니 나에게 ‘모든 교재는 유물론에 입각해서 만들라’고 하더군. 나는 ‘사람들은 유물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유심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기독교 신자다’라고 했더니, ‘저 새낀 당장 쳐 죽여야 되지만 오늘 같은 날 그럴 수는 없고 당장 나가 이 새끼야’라고 욕을 해서 나왔어. 집에 왔는데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거야.
 
  그때 밤 12시 반경에 유재춘(독립운동가 유관순의 친척)씨가 와서는 선생님 내일 아침에 저들이 당신을 죽인다고 하는데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거야. 공산주의자들이 내일 아침에 죽인다는 데 얼마나 무서워요. 그 길로 아내를 집에 두고 혼자 38선을 넘어왔어. 집에서 8km 정도를 뛰어 도망쳐 속초에서 배를 타고 강릉으로 피신을 한 거야. 겨우 살았지. 나중에 아내도 거기를 빠져나왔어.”
 
  강릉에서 선생은 강릉농고의 교사로 취직을 한다. 이후 6·25전쟁이 터지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했다. 선생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전쟁 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운전 집중이 안 될 정도로 아슬아슬한 고비가 많았다. 죽창에 찔려 죽은 사체들, 기차를 타고 가다 터널 안에서 집단학살이 벌어진 장면도 목격했다. 선생이 체험한 전쟁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선생의 장수는 무난한 것이 아니었다. 굽이굽이 강원도 고갯길 같은 지난한 삶의 길이었다. 선생의 인생길에는 참 많은 사람의 주검이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선생의 증오는 가난과 주검의 가시밭길을 걸어오면서 온몸에 새겨진 상처에 기인한다. 거기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변방의 냄새
 
  선생은 강릉농고, 중앙신학대, 추계예술대에서 일을 하고 정년을 맞았다. 시인으로서는 1947년부터 《월간 새사람》에 시를 발표했고, 53년에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지만, 그 잡지는 폐간됐다. 다시 박두진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이 됐다. 이후 시집 40권, 수필집 24권의 저서를 내고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다.
 
  이광수, 박목월, 조지훈, 서정주, 정지용 등등 우리 근현대 문학의 천재들과 한 시절 어울려 살았다.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에게 시달렸고, 또 노태우 대통령과 관련된 시를 한 편 썼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온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엄청난 협박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친일문제의 중심에 있는 이광수 선생에 대해서는 그가 왜 그런 인생을 살았는지 알아야 된다고 했다. 하루의 일과를 시간과 분 단위로 적어서 매일 일제에 보고를 해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광수에 대해서는 여러 칭찬의 말씀을 했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의 비운이랄까. 선생의 이야기는 기존의 가치와 평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선생의 일생은 러시아 소설 《닥터 지바고》를 떠올리게 한다. 선생이 살아온 역사와 시, 그리고 현실이 영상처럼 펼쳐지기도 했다. 이렇게 선생은 우리나라 시단의 중앙부에 있으면서 항상 변방의 냄새가 풍긴다. 외롭고 고독한 노시인의 모습이다. 선생은 자신이 시인으로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문학을 버리지 않은 것이, 그것이 성공이라면 성공이지요.”
 
  선생은 슬하에 3남2녀를 뒀다. 선생은 노년이지만 기골이 장대하다. 용감한 장수와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다. 자서전을 보니까 선생의 할아버지가 장사인데, 그 할아버지를 마을 원님이 끌로 어깨뼈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원님의 말이 이런 장사를 그냥 두면 역적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힘을 못 쓰게 해야 한다고 했단다. 할아버지는 마을 장정들이 업고 왔는데, 몇 개월을 못살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선생의 부친은 유복자였다. 선생은 이미 뱃속에서 어떤 가난과 고생의 전주곡을 들었다. 당신은 이 가난을 부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부자로 살 수 없을 바에야 가난을 종처럼 부리면서 사는 거다.
 
 
  먼저 보낸 딸
 
  선생의 말대로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지독한 고생은 했지만 평생 교단에 몸담으며 가족을 건사하고 노년은 아들 며느리와 함께 그리 쓸쓸하게 보내지는 않는다.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시인은 많은 경험을 해야 해요. 왕자에서부터 거지까지 다 만나야 하고, 전쟁과 분단 같은 아픈 경험도 시인에게는 약이 돼요. 하지만 살면서 경험하지 말아야 할 일이 딱 하나 있어요. 그건 자식을 먼저 보내는 거예요. 그 경험은 정말 하지 말아야 해.”
 
  선생의 딸은 이화여자대학교 졸업을 24일 남겨놓고 병사했다. 참척지변(慘慽之變·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일찍 죽는 변고)이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참척의 경험으로 정지용은 아들을 잃고 <유리창>이라는 절창을 남겼다. 이 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이 시의 문학적인 평가보다는 그 근본적인 인간 슬픔에 뭔가 찢어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충무공 이순신, 고산 윤선도, 허난설헌, 가까이는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 소설가 정도상 선배가 참척의 변을 겪었다. 나는 아직도 정도상 선배가 자식을 보낸 그 장례식장의 겨울 풍경이 소름끼친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간혹 악몽처럼 떠오른다. 그 이상 검고 우울하고 처참한 풍경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선생은 이 경험만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딸을 먼저 보내고 남긴 시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가 있다.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 밤하늘의 별빛만/ 네 눈빛처럼 박혀 있구나
 
  새벽녘/ 너의 창 앞을 지날라치면/ 언제나 애초롭게 들리던/ 너의 앎음소리/ 그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그 어느 땐가/ 네가 건강한 날을/ 향유하였을 때/ 그 창 앞에는/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나비부인 중의 어떤 개인 날이/ 조용히 들리기도 했었다
 
  네가 그 창 앞에서/ 마지막 숨을 걷어 갈 때/ 한 개의 유성이/ 긴 꼬리를 끌고/ 창 저쪽으로 흘러갔다
 
  다 잠든 밤/ 내 홀로 네 창 앞에 서서/ 네 이름을 불러 본다
 
  애리야! 애리야! 애리야! 하고 (후략)>
 
  딸을 여읜 선생의 부인은 그렇게 몇 년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과 인연을 놓아버렸다. 당신 나이 쉰일곱이었다. 이후로 선생은 사십 년 이상의 세월을 더 견디고 있다. 간혹 선생은 말씀 도중에 텅 빈 눈동자를 보여주기도 한다. 딸의 이야기를 할 때 특히 그렇다.
 
  “이 시를 신봉승씨가 각색을 해서 영화로 만들었는데,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었어…”
 
  고통이나 절망, 혹은 한은 극복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견디면서 관통하는 것이다. 노예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그대로 그 모양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이 있다.
 
 
  “시인은 시를 쓸 때 사는 것. 아니면 그냥 사는 것”
 
  카페 엘빈에서 나와 우리는 칼국수를 먹었다.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주유소를 거쳐 혜화 칼국수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서점 자리를 가리키면서 여기가 조병화 시인이 살았던 집이라고 했다. 금방이라도 조병화 시인이 나올 것 같다고 한다. 모두 이 세상에 흔적만 남겨두고 떠났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혜화동 길을 걸었다. 나는 선생에게 아주 오래전에 들은 눈물의 시인 박용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인사동 한식집에서 역시 문단의 어른에게 들은 이야기다. 박용래 시인이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들면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친구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박용래 시인이 말하기를 단무지가 너무 맛있어서 그런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모두 한바탕 웃고 말았다.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칼국수를 먹고 가난과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박용래 시인의 단무지와 눈물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무지는 가난한 음식이다. 가난한 음식을 먹고 눈물을 흘린 시대의 시인들이 우리 시단의 거인들이 되었다. 그리고 시인들이 이제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최근에 김규동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그 빈자리에 황금찬 시인이 외롭게 서 있다.
 
  혜화 초등학교를 지나는데, 초등학교 벽에 시화가 붙어 있었다. 거리에 붙어 있는 시는 떨어진 낙엽처럼 퇴락해 있었다. 박목월, 조지훈, 이성부, 안도현의 이름이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시와 그림이 지워지고 낡고 볼품없는 폐지처럼 벽에 붙어 있다.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간혹 아직도 나무에 붙어 있던 가로수 잎처럼 떨어져 뒹군다.
 
  많은 시인이 시를 적을 때 문장이 끝나도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나 역시 시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마침표는 그 시를 읽고 있는 독자의 마음이 찍는 것이다. 시는 여로이고, 시장통이고, 전쟁터이며, 창녀촌이자 사찰이고 성당이다. 거기를 걸어가는 자가 쉬고 싶을 때 쉼표를 찍고 여기다 싶으면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철들기 전부터 시를 써 온 황금찬 시인은 아직도 시의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선생은 앞으로 시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의 마침표다.
 
  “21세기에 어떤 시를 써야 할까,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 질문도 없고 응답도 없는 것 같아요. 이러한 시대에 시인들은 어떤 시가 필요한지 성찰할 필요가 있지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지요. 우리 근대 시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과 아주 비슷하지요. 《창조》와 《백조》 등 많은 문예지가 어떤 주의를 내세웠지요. 낭만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우리 문단을 휩쓸고 지나간 문예사조라는 것은 졸속으로 들어왔다 나갔어요. 내용이 없는 껍데기만 있는 거지요.
 
  적어도 한 사조는 십 년 이상은 지속하면서 숙성되고 그 분야에 대가도 나와야 하는데…, 과거 우리 시단은 그런 역량이 없었지요. 그런 세월을 산 노인의 말이에요. 내가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도 있지만요. 앞으로 21세기의 문예사조는 우리나라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게 뭔지는 젊은 시인들의 몫이겠지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글이라는 문자를 가진 나라예요. 자긍심을 가지고 좋은 시…, 더 좋은 시를 써야 합니다. 말했지요. 시인은 시를 쓸 때 사는 거라고. 아니면 그냥 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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