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7년 김일성 암살 기도 사건 연루 체포령 내려진 후 무조건 南 향해
⊙ 金日成 외척 강양욱 도움으로 검문에서 풀려나
⊙ 평양 聖都중학 시절 스승인 화가 혜촌 金學洙 선생을 월남 후 끝까지 보살펴
⊙ 혜촌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 생각하며 끝내 재혼 않고 별세
⊙ 혜촌의 장례일은 딸 등 그의 가족을 북에서 탈출시켜 한국에 데려오기 하루 전
洪禹俊
⊙ 1923년생. 경희대 법대 졸업. 미국 리버티대 명예법학박사.
⊙ 경민학원 설립. 경민대 학장, 경민학원 이사장, 11대·12대 국회의원. 現경민학원장.
⊙ 金日成 외척 강양욱 도움으로 검문에서 풀려나
⊙ 평양 聖都중학 시절 스승인 화가 혜촌 金學洙 선생을 월남 후 끝까지 보살펴
⊙ 혜촌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 생각하며 끝내 재혼 않고 별세
⊙ 혜촌의 장례일은 딸 등 그의 가족을 북에서 탈출시켜 한국에 데려오기 하루 전
洪禹俊
⊙ 1923년생. 경희대 법대 졸업. 미국 리버티대 명예법학박사.
⊙ 경민학원 설립. 경민대 학장, 경민학원 이사장, 11대·12대 국회의원. 現경민학원장.
교사였던 홍 원장의 부친은 홍 원장이 다섯 살 때 기독교인이 됐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기독교를 받아들인 가정이 된 것이다.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던 홍 원장의 가족에게 고난이 닥친 것은 부친이 기독교인이 되면서부터다. 지역사회의 따돌림이 먼저 찾아왔고, 부친의 실직(失職)이 다음으로 찾아왔다. 부친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마을 이웃들은 물론 심지어 이웃 지역사회까지 홍 원장네 가정과는 담을 쌓아 버렸다.
떠나야 했다. 정든 고향을 떠나기 위해 집을 내놓았지만 아무도 홍 원장네 집을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웃들은 집을 구입해 주는 자체가 홍 원장네를 도와주는 것으로 비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조용히 인사도 없이, 아니 인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홍 원장네는 쓸쓸히 고향을 떠났다. 마을 사람 누구도 문밖으로 나와 인사하는 이가 없었다. 홍 원장네가 고향에 남긴 것이라곤 빈집과 눈물뿐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마저 팔 수 없었던 홍 원장네는 빈털터리 신세였다. 자동차를 탈 수도 없었다. 걸었다. 무작정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걸었다. 가끔 지나가는 마차를 얻어 타는 일조차 그들에게는 사치였다.
20여 일을 걸어서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당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세가 강했던 평양이었다.
스승 김학수와의 만남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해서 가난한 자들의 안식처가 쉽게 마련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토록 ‘믿음의 동지’들을 갈망하며 20여 일 동안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왔지만 홍 원장네는 셋방조차 구할 수 없었다.
평양 변두리에 있는 오두막집을 하나 구했다. 비바람을 간신히 피할 수 있는 집이었다. 부친은 평양 시내에 있는 장대현교회를 다녔다. 장대현교회는 홍 원장네가 사는 오두막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예배에는 부친이 혼자 참석했다. 부친은 설교를 적어 와 가족에게 들려주었다.
부친은 석공기술을 배워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홍 원장의 형제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일제는 홍 원장의 부친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 강점기에,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그 자녀들의 학교 입학마저 막아 버렸다.
1940년대 들어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홍 원장의 부친은 거부했다. 그 탓에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홍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일제에 의해 감옥에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에야 홍 원장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훗날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박대선(朴大善) 목사, 광복 후 월남해 중앙신학교를 설립한 이호빈(李浩彬) 목사 등 종교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 학교를 세운 것이다. 성도(聖都)중학교가 그곳이다. 일제시대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공부를 못한 사람들과 그 자제들이 모여들었다. 학비도 다른 곳에 비해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홍 원장도 스무 살이 넘어 그 학교에 입학했다. 돈이나 학벌에 상관없이 배우고 싶은 사람은 다 모이라고 했는데 300명의 학생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홍 원장은 그곳에서 훗날 역사풍속화가로 이름을 떨친 혜촌 김학수(金學洙) 화백을 만난다. 김 화백은 성도중학교에서 <명심보감(明心寶鑑)> 강의를 통해 한문과 도덕을 가르쳤다. 네 살 차이인 두 사람의 인연은 지난해 5월 6일 김 화백이 90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사제지간으로서 때로는 말벗으로서 지속됐다.
월남 후 60여 년을 독신으로 살다 간 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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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충효 위인 도감>을 출판, 스승 김학수 화백에게 전달한 후 악수를 하고 있는 홍 원장. |
1964년부터 2006년까지 한강과 그 일대를 답사하며 화폭에 담은 <한강전도>를 남겼다. 폭 48㎝, 총 길이 400m에 한강 1300리를 담은 대작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성화(聖畵)도 많이 남겼다.
6·25전쟁 때 월남한 김 화백은 북에 부인과 2남2녀를 두고 온 후 별세할 때까지 재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 홍 원장이 전하는 인간 김학수의 모습은 이렇다.
“우리는 자주 만났어요. 그분이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언제든 갔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오시곤 했죠. 그렇게 사제지간으로서는 가장 끈끈하게 지내던 사이예요.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위지만 어떨 땐 형님 같기도 하고, 어떤 땐 부모 같기도 했죠. 보통 법도를 지키는 분이 아닙니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지만 찾아뵐 때는 항상 큰절을 해야 했어요. 그걸 어기면 혼나죠. 제자의 실수는 한 번은 용서하는데, 두세 번 반복되면 ‘넌 우리 집에 오지 마’라며 출입을 금지해 버리셨죠.”
김 화백이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홍 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분의 그림은 3000만원짜리 이하 작품이 없어요. 경제적 여유도 있으셨죠. 그러니 주변에서 결혼을 권유하는 분들도 많았고 여성들의 접근도 많았죠. 그분도 사람이니까 재혼 문제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토로한 적도 있으시고요. 하지만 재혼을 하게 되고 언젠가 남북통일이 되면 북에 두고 온 아이들이나 부인에게 무슨 얘기를 하겠느냐는 거였어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없어서 재혼을 못 한다고 하셨는데 그분의 진심일 거예요. 제자들도 이혼을 하고 오잖아요?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면 ‘나도 잘 사는데, 왜 마누라를 버리느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다시 합한 사람들도 있고요. 그만큼 권위가 있었어요. 권위는 돈이나 명예도 있겠지만 인격적으로 하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것 같아요.”
김 화백은 1985년 북한을 드나들던 제자로부터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이 백두산 인근 지역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때까지 무사하다는 소식에 기뻐했다고 한다. 김 화백의 가족을 방문한 이 제자는 김 화백이 아직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과 김 화백의 사진도 함께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화백은 끝내 부인(이정란)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 2007년 2월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만 전해 듣게 된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김 화백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 후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김 화백은 북에 두고 온 자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깊어졌다. 나중에는 대화조차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지난해 초 홍 원장은 김 화백을 찾아갔다. 김 화백은 어눌한 말투로 “혈육이 그립다”고 했다. 홍 원장은 김 화백의 눈빛을 보고 그 말을 이해했다. 스승의 절박한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2009년 초, 북에 있는 김 화백의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 가능한지를 백방으로 확인해 봤다. 돈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소재를 파악해 보니 함경남도 혜산에 길도 없고 집도 없는 곳에서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어요. 나중에 듣고 보니 그게 차라리 평양에 있을 때보다 살기가 낫다고 그래요. 거기에서는 옥수수라도 심어 먹을 수 있으니까요. 애초 저는 김학수 선생의 2남2녀 가운데 한 명만 데리고 오려고 수소문을 했어요. 그런데 한 가족을 데리고 오려면 다 데려와야지, 누굴 놔두면 죽는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자녀와 손자까지 6명을 중국으로 데리고 나왔지요.”
김 화백의 가족을 중국까지 무사히 데리고 나왔지만 선양(瀋陽)영사관에 도착하기 전에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결국 변칙적인 방법을 통해 중국 공안으로부터 김 화백의 가족을 구해냈다. 김 화백의 가족은 선양영사관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곧바로 입국할 수 없었다. 그 시각 김 화백은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외교부에 호소해 인도적 차원에서 딸 한 명만이라도 부친의 임종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절차를 밟는 사이 김 화백은 60년 넘게 그리던 부인 곁으로 떠났다. 5월 6일이었다.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 김 화백의 딸이 서둘러 서울에 도착했지만 장례식(5월 8일) 다음 날이었다. 부인과 자식을 못 잊어 혼자 산 김 화백이었지만 이 세상에선 그들의 손을 잡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후 김 화백의 나머지 가족도 입국했다. 김 화백의 유해는 의정부 경민대학 캠퍼스 내에 있는 경민학원 동산에 안치돼 있다. 그곳을 가끔 둘러보는 것도 홍 원장의 주요 일과 중 하나다.
“나는 기독교 정신 구현을 위해 경민학원을 설립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스승을 잘 섬기는 것도 기독교정신과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효를 가르치고 명심보감 강의를 듣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죽을 때까지 김학수 선생을 스승으로 모실 겁니다.”
김일성 암살 시도 발각 후 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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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수 화백의 작품 앞에 선 홍 원장. |
1945년 10월 중순, 김일성(金日成)의 첫 평양연설이 있었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많은 평양시민이 평양공설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김일성의 연설 가운데는 모든 기독교인을 지체없이 체포해 투옥시키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홍 원장은 지역경찰대에 함께 자원했던 친구와 지하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자유국가를 수립하는 게 목표였다. 주로 야간에 활동을 하며 운동대원들을 포섭했다. 수주일이 지나자 지하운동대원은 16명이 됐다. 소련군의 화약고를 폭파하는 등 소련군에 유익한 모든 것이 이 지하운동대원들의 목표물이었다.
나중에는 김일성 암살이 목표였다. 홍 원장의 지하운동대원들은 김일성 암살을 위한 디데이(D day)를 1947년 3월 1일로 잡아 놓고 있었다. 그날 3·1절 기념행사의 초청연사 중 한 명이 김일성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방법은 행사 전날 연단 밑에 시한폭탄을 장치했다가 행사 당일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폭탄 장치는 홍 원장이 맡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를 며칠 앞둔 2월 24일 저녁 계획이 누설되고 만다. 지하운동대원 중 김윤근이라는 청년이 계획을 그의 아버지와 의논했다가 소련군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채 몇 시간도 안돼 지하운동대원 16명 중 14명이 체포됐다. 홍 원장에 대한 체포령도 떨어졌다.
홍 원장은 그 길로 집에도 들르지 않고 남쪽을 향했다. 평양을 떠나 해주로 향했다. 해주로 가는 도중 사리원에서 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신분이 탄로나면 사형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강양욱과의 만남
절체절명의 순간, 홍 원장은 강양욱(康良煜·1903~1983) 전(前) 북한 국가부주석의 도움을 받는다.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척(外戚)이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의 6촌 동생이라는 설과 친동생이라는 설이 있다. 평남 대동군에서 태어난 그는 1923년 평양신학교를 나온 뒤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했다. 1928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다. 형 강돈욱과 함께 평양 칠골 창덕학교 건립에 참여해 교사로도 활동했다. 창덕학교 교사 시절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일성의 담임을 맡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강양욱이 일제시대에 민족혼과 애국혼을 학생들에게 일깨워 준 참된 스승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당간부들을 동무라고 호칭했지만 강양욱에게만은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여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김일성이 광복 후 귀국하자 자연스럽게 김일성의 자문역 등을 맡았다고 한다. 광복 후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조선민주당에 참여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강양욱은 1946년 2월, 북한 정권의 모체가 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됐다.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후 최고인민회의 제1~5기 대의원을 지냈다. 1972년에 국가부주석 겸 최고인민회의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82년에는 국가부주석에 재선됐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된 그해에는 월남 인사들을 중심으로 1945년 11월에 조직된 극우 청년 테러단체인 백의사에 의한 암살을 모면했지만, 대신 아들과 며느리, 딸이 피살됐다고 알려졌다.
홍 원장과 강양욱의 관계는 교회에서 맺어졌다. 광복 후 강양욱은 평양 가현(加峴)교회의 담임목사였고 홍 원장은 그 교회의 신도였다. 두 사람은 자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홍 원장이 강양욱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강양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으로 나서기까지 김일성과 얽힌 일화다.
“강양욱 목사의 집과 우리 집은 별로 멀지 않았어요. 그분은 교회 사택에 있었는데 하루는 김일성이 온 거예요. 강 목사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더군요. 김일성이 ‘정부수립을 도와 달라’고 했는데 자기는 목사이기 때문에 정부에는 갈 수 없지 않느냐면서 거절했다고 해요. 그리고 일주일 뒤에 김일성이 또 왔다고 해요. 그때는 ‘와서 6개월만 봐주고 목사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정도는 해 주마’ 하고 들어간 것이 서기장이었죠. 그렇게 되니까 교회나 기독교계에서는 강양욱이가 진짜 목사로서 유명한 사람인데, 말려들어 갔다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분은 끝까지 목사로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당시 평양에 있던 숭실대학을 임시인민위원회 본부로 삼았어요. 거기에는 좋은 집이 많았어요. 총서기장 집으로 좋은 집을 줬는데도 이사를 안 가고 목사 사택에 온 가족이 머물러 있었어요.”
강양욱 목사 암살 기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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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 원장은 1954년 6월 대구 서문교회에서 이연신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
“저는 그 단체가 서북청년단이 중심이 된 것으로 아는데 원래는 김일성을 암살하러 왔었어요. 그런데 김일성에 대한 경비가 삼엄하니까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북쪽에서 2인자인 강 목사를 겨냥했던 거지요. 강 목사가 교회 사택에 있으니까 경비도 덜 심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요. 내가 월남 후 그 일에 관계했던 사람들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다 들었어요.”
―강 목사 대신 가족이 희생당했다고 하던데요.
“강 목사님 친구 중에 정읍에 있는 교회에서 시무하는 분이 있었어요. 강 목사님 하고는 동기동창이었죠. 그분이 강 목사의 큰아들 중매를 서려고 했어요. 그 큰아들은 나와 동갑이었어요. 그분이 사건이 있던 날 강 목사님의 집을 찾아온 거예요. 내가 강 목사님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예요. 강 목사님은 그날 교회 사택 경비를 서고 있던 경비들을 돌려보냈대요. 밤 11시쯤 해서 암살단이 습격을 했죠. 그런데 강 목사는 자신이 거처하던 안방을 그날 손님에게 내주고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방에서 잠을 잤던 거예요 암살단은 안방을 공격했고 그 목사와 딸 등 3명이 죽었어요. 그 사건 후 강 목사님은 우리를 모아놓고, ‘나는 교회목사로서 마지막을 맞으려고 했는데 내 마음을 정말 몰랐다. 이제 할 수 없다’면서 그대로 보따리를 싸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관사로 들어갔어요. 그 뒤로는 그분을 못 만났죠.”
―그런데 1947년 3월에 월남할 때는 어떻게 강양욱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남쪽으로만 가면 38선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사리원까지 왔어요. 거기서 해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사리원에서 우리로 말하면 경찰한테 붙잡힌 거죠. 눈앞이 캄캄했죠. 그때 떠오른 게 강 목사가 내게 준 조그만 성경책이었어요. 그 성경책에는 ‘무슨 일이 있으면 이리로 전화하라’면서 적어 준 강 목사의 전화번호가 있었어요. 그 전화번호가 0002예요. 아마 김일성이 0001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에 전화를 해 봐’라고 했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전화를 못 하는 거예요. 내가 전화를 했죠. ‘내가 홍우준인데 사리원에 와 있다고 강 목사님한테 전해 달라’고 했죠. 새벽 2시쯤에 그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연락을 받고는 나를 체포한 사람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더군요. 내가 특수 임무를 띠고 38선으로 간 것으로 안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나를 38선까지 안내해 주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강 목사가 ‘내가 보낸 사람한테 손대지 마’라고 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38선을 넘어올 수 있었던 거예요. 강 목사님에게 내 목숨을 신세진 거였죠. 제가 만난 강양욱 목사는 진짜 목사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존경할 만한 종교인이었어요. 난 지금도 그분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해요.”
남북 분단으로 끊겼던 강 목사와의 인연은 1994년에 이어졌다. 당시 북한 정무원총리 강성산의 사위인 북한군 대좌 출신의 강명도(康明道)씨의 귀순 때문이었다. 그의 귀순 기자회견을 보다가 강양욱 목사의 손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안기부에다 강명도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렵사리 강 대좌를 만나 대화를 해보니까 틀림없이 강 목사의 손자뻘이었다. 강명도씨는 북한에 있을 때 정치보위부의 부책임자를 지낸 김일성 가계의 로열패밀리였다. 홍 원장은 강명도씨가 귀순한 후 남한에 일가친척이 없는 강명도씨를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 강 목사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다. 홍 원장은 강명도씨에게 신학 공부를 권했다.
“내가 노골적으로 얘기했어요. ‘네가 대한민국에서 살려면 대한민국을 정말 지지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데, 내가 바꿀 수 없고 네 스스로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서 신학 공부를 권했어요. 강 목사가 다녔던 평양신학교가 지금은 서울 광나루에 있어요.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이 운영하는 장신대가 그곳이죠. 내가 그곳에 있는 강양욱 목사의 성적증명서 등 학적부를 복사해서 강 대좌에게 줬어요. 그러면서 ‘여기서 공부해서 진정한 목사가 돼라. 공산당이 되기 전의 강양욱이 돼라. 그러면 내가 도울 것은 돕겠다’고 했죠. 지금 3학년입니다. 집안의 가업을 대한민국에 와서 잇게 된 거죠.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쁩니다.”
경민학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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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경민학원을 세울 대지 위에 기초공사 말뚝을 박고 있는 홍 원장. |
한편으로는 교육시설을 짓기 위해 땅을 사들였다. 당시는 계란 4개의 값으로 땅 1평을 살 수 있었다. 1965년에는 당시 양주군에 속해 있던 현재의 서울 수유동에 1만 평의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 개발이 진행되면서 그 지역의 땅값이 오르자 홍 원장은 그 땅을 팔고 경기도 의정부에 16만 평의 땅을 샀다. 그의 오랜 숙원인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부지였다. 그는 1968년 이 땅 위에 경민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자신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교육사업에 뜻을 두게 된 건 선친의 영향 때문일 거예요. 우리 집안에 훈장이 여럿 있었대요. 나도 집에서 집안 어른에게 한문을 배웠어요.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국가가 어떻고, 민족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그게 마음속에 굳어졌어요. 강양욱 목사 같은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도 하고요. 다른 직업을 가지려고 생각을 안 했어요.”
홍 원장은 의정부에서 11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치도 했잖습니까.
“정치는 더구나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던 거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 전국의 유명 정치인들을 다 묶어 놓고, 참신한 사람들을 정치인 시킨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도 그 참신한 대상이 된 거죠. 처음에 불려갔을 때는 ‘국회의원 될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어요. 그런데 나를 부른 사람이 화를 내더군요.”
―누가 불렀습니까.
“권정달씨였죠. 그분이 그때는 조직의 책임자였으니까요. 얼마 후에 불러서 또 갔어요. 그때 ‘나는 교육만 하게 해 달라’고 하니까, ‘나라가 망한 다음에 혼자 학교를 하겠소? 그 대답을 할 수 있으면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뒤 3주를 끌다가 ‘한 번만 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건 그때 가서 얘기고, 우선 도장 누르시오’라고 해서 팔자에 없는 국회의원을 했어요. 정치에 돈이 그렇게 들어가는지 몰랐는데, 당시 국회의원 하려면 30억원이 들어갔어요. 내가 30억원을 학교에 내면 300명의 학생을 교육시키고도 남아요.”
―그런데 왜 또 국회의원을 했습니까.
“‘여기에 다른 사람을 보내고, 나는 학교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나를 부르더라고요. ‘양심적으로 하는 것은 좋은데, 나라가 이 꼴이면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아무 소리 말고 하시오’라고 해요. 나는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전 대통령이 ‘내가 다 책임질게’라고 하니 어떻게 합니까? 또 했죠.”
교육을 통한 제2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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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본 경민학원 전경과 정문. |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우리 대학이 학생들에게 명심보감을 가르치고 있잖아요? 명심보감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이 없지만 기독교인 중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있죠. 하지만 명심보감은 성경과 같은 뜻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잘 정착이 됐어요. 저는 학교의 건립정신이 아주 중요하다고 봐요. 평북 정주에 있던 오산학교를 보세요. 그 학교 출신은 애국자는 안 되더라도 친일파는 없어요. 민족교육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우리 나이로 올해 88세인데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건강은 타고난 것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집안에 아버지를 비롯해서 모두가 노약해서 세상을 뜬 사람은 없어요. 잠은 하루에 4~6시간 정도 자요. 평생 술담배를 안 했고요. 국회에 가서 그 야단을 해도 술담배는 안 했습니다. 그게 건강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난 후 홍 원장은 2층 계단을 내려와 기자 일행을 배웅했다. 경민대의 설립정신은 ‘교육을 통한 제2의 독립운동’이다. 설립정신을 상징하듯 정문에는 독립문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사진 : 서경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