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맡아
⊙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코엑스서 대회 열려
⊙ 창조인을 만들 생각 말고 ‘창조적인 인재’를 알아보는 인재를 키워야
⊙ 88올림픽 때 성화대를 지하에서 하늘로 치솟게 설치하려고 했다
⊙ 2007년 세례받고 기독교 신앙 받아들여
李御寧
⊙ 1934년생. 부여고·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문학 석사, 단국대 대학원
국문학 박사.
⊙ 서울신문·한국일보·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 이화여대 교수, <문학사상> 주간,
문화부 초대 장관, 이화여대 석좌교수.
⊙ <흙속에 저 바람속에> <장군의 수염>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 160여 권 저술.
취재지원 : 朴熙錫 月刊朝鮮 인턴기자
⊙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코엑스서 대회 열려
⊙ 창조인을 만들 생각 말고 ‘창조적인 인재’를 알아보는 인재를 키워야
⊙ 88올림픽 때 성화대를 지하에서 하늘로 치솟게 설치하려고 했다
⊙ 2007년 세례받고 기독교 신앙 받아들여
李御寧
⊙ 1934년생. 부여고·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문학 석사, 단국대 대학원
국문학 박사.
⊙ 서울신문·한국일보·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 이화여대 교수, <문학사상> 주간,
문화부 초대 장관, 이화여대 석좌교수.
⊙ <흙속에 저 바람속에> <장군의 수염>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 160여 권 저술.
취재지원 : 朴熙錫 月刊朝鮮 인턴기자
평론가로 문단에 첫발을 디딘 이후 그의 행보는 다양한 방향으로 향했다. 언론인으로, 소설가로, 극작가로, 일본문화 연구자로, 88올림픽 개·폐막식 기획자로, 새천년준비위원장으로 그의 보폭은 다양하고도 넓었다. <흙속에 저 바람속에>, <장군의 수염>,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 160여 권의 저작을 발표하며 숱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냈다.
그런 그가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것은 그야말로 적재적소 인사였다. 그는 2000년 새천년준비위원장을 끝으로 정부와 관련된 직책을 맡지 않았다. <월간조선> 2001년 7월호와의 인터뷰에서는 “가을이 와도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이 되고 싶지 않다. 은퇴란 인간의 최고 결단이다”라며 더 이상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1년 9월에는 이화여대에서 마지막 강의를 끝으로 대학 강단에서도 떠났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말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정부가 관여하는 행사의 책임자를 다시 맡게 된 것이다.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는 문화와 학술을 아우르는 예술 분야 세계 최대 행사다. 유네스코 제30차 정기총회(1999년)에서 예술교육이 자라나는 세대의 창의성을 키워주고 누구나 예술교육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인식에서 대회 개최가 합의됐다고 한다. 4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는 2006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1차 대회가 개최된 데 이어 오는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가 두 번째다. 대회 주최 측은 이번 대회에 국내외 전문가 2000여 명이 참가해 세계 예술교육 정책의 흐름과 향후 전망을 다룰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이어령 전 장관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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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1월 27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이어령 전 장관의 저술활동 50년을 기념하는 ‘만남 50년’ 행사. 이 전 장관이 현암사 조미현 대표로부터 모뉴망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
지금까지 해온 일의 마지막 매듭
―또다시 정부 일을 맡았는데요.
“제가 새천년준비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정부 일을 안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가 2000년이었고, <월간조선>과의 대담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죠. 배수진을 치고 안 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제가 88년 서울올림픽, 대전엑스포, 새천년준비위, 2002한일월드컵 등 국가행사는 거의 관여를 해 왔는데 또 이 나이에 유네스코 조직위원장 직을 맡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제가 지금껏 해온 일에 마지막 매듭을 짓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인이 누군지, 우리의 예술문화가 뭘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이번 대회를 통해서 세계에 알릴 생각입니다. 그동안 제가 겪어 왔던 경륜이나 지식을 마무리 짓는, 또 국가적으로는 ‘서구중심주의에서 문화축이 아시아로 옮겨오는 때에, 맡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해서 맡았습니다.”
―이번에도 88올림픽 때 굴렁쇠 소년을 등장시킨 것처럼 기발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까.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홀로그램(3차원 영상으로 실물과 똑같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영상) 기술을 활용하려고 합니다. 기술 하면 으레 서양을 생각하지만, 이제 한국에서 그들이 생각지 못한 기술을 보여 주자는 거죠. 우리의 상품 선전이 아니라 홀로그램 같은 기술을 교육 문화 쪽으로 최초로 사용한다는 걸 보여 주자는 겁니다.”
이어령 전 장관은 지난 1월 홀로그램을 이용한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일이 있다. ‘디지로그 사물놀이-죽은 나무 꽃피우기’라는 제목의 공연으로, 이 전 장관은 이 공연의 대본을 맡아 참여했다. 이 공연에는 홀로그램 기술이 도입돼 실제 현실과 가상 현실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전 장관은 이 작품에 대해 “이미 만들어진 3D 홀로그램에 실제 연주자의 공연을 더해 기술을 예술로 만든 것”이라고 자평했다. 이 전 장관은 홀로그램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만약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에 대통령께서 연설을 하게 된다면 홀로그램을 활용할 생각이에요. 그렇게 되면 최초로 홀로그램을 이용한 연설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몰라요. 그게 현실인지 가상현실인지. 그냥 사라지니까 가상현실이라고 아는 거죠. 색채만 조금 차이가 있지, 중량감은 똑같아요. 만약 실물이 60kg라면 진짜 60kg의 중량감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과 거의 차이가 없어요. 그런 걸 해보려고 하는데 잘될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저는 평생 용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데 실제로는 뱀 그림밖에 못 그렸거든요.”
이 전 장관은 자신이 용을 그리려다 뱀을 그리게 된 이유로 사회분위기와 예산지원과 관련된 공무원들의 사고방식을 문제로 꼽았다. 사회분위기에 대한 그의 비판이다.
“저는 창조인을 만든다고 하지 말라고 해요. 창조인을 알아보는 사회를 키워야 하는 거죠. ‘창조적인 인재를 알아보는 인재를 키워라. 그런 사람이 CEO가 되고, 장관이 돼야 한다’고 말이죠. 창조는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공부시켜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변종으로 태어나는 걸 알아주는 사회가 있고, 짓밟는 사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뉴턴, 아인슈타인 같은 창조인을 받아줄 그릇이 작아요. 다행히 지금은 좀 나아진 것 같아요.”
그의 이야기는 갑자기 미디어 이야기로 넘어갔다.
“우리 사회의 그런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는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월간조선>, <조선일보> 등의 활자매체가 인터넷 시대에서 주류 미디어에서 밀려났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 올라갔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활자매체는 모든 미디어를 비평하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요. 그 홍수 속에서 잘못된 정보를 거를 수 있는 노아의 방주 같은 역할이 필요한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게 활자매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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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2월 4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창립총회. |
“2010가지 색깔 보여줄 것”
예산지원과 관련된 공무원들의 사고방식의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88올림픽 당시, 자신이 기획했다가 사장(死藏)된 아이디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화대 설치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이 전 장관은 애초 성화대를 지하에서 하늘로 치솟게 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개막식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온 관중은 물론이고 전 세계 시청자들도 성화대가 보이지 않는 올림픽 개막식장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려면 올림픽 주경기장 땅 밑을 파야 하는데 담당 공무원들이 밑에 전깃줄이 있어서 안 된다, 예산이 많이 들어간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를 해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 기술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지금도 그걸 했으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창조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식전행사에 홀로그램 기술을 이용하는 것 외에 색다른 아이디어는 없나요?
“역시 홀로그램을 이용한 것인데 금년이 2010년이니까 2010마리의 컬러 피시(color fish)를 행사장에 띄울 계획입니다. 2010마리 물고기의 색깔이 전부 다르죠. 아이들은 보통 색깔이 빨·주·노·초·파·남·보밖에 없는 줄 알아요. 그런 아이들에게 색의 다양성을 가르쳐주자는 거죠. 2010개의 각기 다른 색을 가진 물고기들이 상상의 바다에서 다니고 있고, 아이들은 그것을 상상의 그물로 낚죠. 홀로그램을 이용해서 대회장 전체가 수족관인 것처럼 떠다니게 만들 작정이에요. 그렇게 해서 한국에 온 모든 전문가가 그런 다양한 상상력을 가지고 세미나를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겁니다. 물론 이것도 아직은 계획일 뿐입니다. 또 예산이 문제가 되겠죠.”
―세계가 예술교육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예술교육은 문화예술에 담긴 정신적 가치를 탐색하고, 문화예술 체험을 통해서 그 다양한 가치를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을 육성하는 교육이죠. 창의와 소통, 그리고 참여와 실천을 겸비한 글로벌 시민성을 육성하는 최선의 교육이 예술교육입니다.”
‘동북아’ 대신 ‘韓·中·日’ 표현 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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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10월, 한국을 방문한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 여사를 영접하고 있는 이어령씨. |
“동북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표현하면 동북아에서 한국은 떠오르지 않고 중국과 일본만 떠올라요. 그래서 저는 한·중·일(韓·中·日)이라고 한 거예요. 두루뭉수리하게 동북아라고 하면 어디서 어디까지를 말하는지도 모르고요. 이게 바로 전략이라는 거죠. 동북아라고 하면 일본과 중국밖에 없다고 하니까 우리가 치이는 거예요. 그런데 한·중·일이라고 하면 3분의 1 아닙니까. 인구는 일본의 절반도 안 되지만 당당하게 3분의 1에 끼잖아요. 세계인도 우리와 중국과 일본을 대등하게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동시에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강의’하는 그의 화법 앞에 기자가 준비해 간 질문지는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허락한 인터뷰 시간 내에 준비해 간 질문을 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의 말을 끊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와 관련된 일 이외에도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3월 개신교 신앙을 고백한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펴냈다. 이 전 장관은 2007년 7월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성경을 분석하며 기독교를 비판했던 그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일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검사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딸 민아씨에게 닥친 암과 실명위기, 손자의 질병과 사망 등을 겪으면서 세례를 받게 됐다고 한다.
그는 세례를 받은 지 1년 후인 2008년 7월에는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내기도 했다.
―신앙을 고백한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세례를 받은 이후 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왔습니까.
“생활에 구체적인 변화가 왔다면 제가 목사가 됐든지 했을 테지만 하나도 바뀐 것이 없어요. 세례는 형식적인 것입니다. 만약에 세례를 받아서 전부 영성을 얻는다고 하면 값어치가 별로 없는 거죠. 면죄부식으로 세례증명서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죠. 그 전에 나를 소개할 때 종교란을 비워놨는데 이제는 그 칸에 기독교라고 쓰게 됐을 뿐이죠. 물처럼 흘러오던 것을 쫙 잘라서, 전까지는 무신론, 여기서부터는 유신론이라고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삶에 대한 자세의 변화도 없었습니까.
“제가 과거에는 밑의 사람들한테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냈습니다. 그게 꽁하게 남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소리 지르고 1분도 안 돼 사라집니다. 예전에는 이해를 못했지만, 지금은 ‘그래, 그럴만하니까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소위 이웃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나 중심이 아닌 관계 나눔 속에서 휴먼프라이드(인간의 오만)를 버렸습니다. 전에는 지적오만으로 자기가 제일 잘난 것 같았는데 그게 없어졌다는 것이 제일 큰 거죠.”
손자의 죽음으로 신앙에 懷疑 갖기도
―세례를 받은 후에 큰손자가 사망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충격이었죠. 사실 나는 손자가 죽은 이야기를 책에 담지 않으려고 했는데 개정판에는 그 이야기를 담았어요. 교통사고나 병도 아니고 갑자기 죽었어요. 뇌막염 비슷한 거였어요. 걔는 어렸을 때 제가 키운 애예요. 제가 출근하려면 못 나가게 넥타이를 꽉 잡아요. 걔 엄마가 미국에서 시험을 치고 할 때면 보름 동안 한국으로 보냈어요. 그런 애가 죽으니까 성서도 없어지고, 기도도 안 하게 되더군요.”
―기독교 용어로 하면 시험에 빠진 거네요?
“시험에 빠진 거예요. 그러다가 자식 잃고 외손자 잃은 사람이 나 혼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손자가 죽으면 안 믿고, 살아 있다고 믿으면 그건 거래지 믿음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 일들을 겪고 보니까 세상이 따뜻해 보입니까.
“그것보다도 제가 요즘 생명자본주의라는 말을 하고 다닙니다. 기독교를 믿으면서 사랑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보니까 생명자본주의라는 말을 하게 됐죠. 하늘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 신기한 것들이 참 많거든요. 산소와 질소의 비율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바닷물의 염도도 달라지지 않아요. 넘치면 태풍이 불어서 땅으로 보내고…. 이런 것들은 뭔가 주재하는 분이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생명자본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화두를 만들어 내는 데 바탕이 됐죠.”
이어령 전 장관은 만 70세가 되던 2004년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한 연구소로 갔다. 세례받기 3년 전이다. 그가 펴낸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는 그때의 독백을 메모한 것들이라고 한다.
―교토는 왜 간 겁니까.
“제 나이면 이제 ‘의식(意識)의 수의(壽衣)’를 장만해야 하는데, 그 수의를 장만하러 갔습니다. ‘내 인생은 뭔가, 내가 살아온 것은 뭔가’를 고민했던 거죠.”
―의식의 수의를 장만하는 일은 꼭 그렇게 혼자서 고독하게 해야 하는 건가요?
“그렇죠. 자기가 입을 의식의 수의는 자기가 장만해야죠. 그래서 이웃도 떠나보고, 친구도 떠나보고, 직장도 떠나보는 거죠. 로빈슨 크루소에서 무인도라고 했지만 교토가 나에게는 무인도였어요. 거기에는 바퀴벌레밖에 없었죠. 가끔 개미도 있었군요. 사람 한 명 오지 않는 곳에서 1년 동안 고행을 한 거죠.”
문학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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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6월 15일, 이 전 장관이 새천년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밀레니엄 D-200을 맞아 ‘새천년사업’ 구체안을 발표하고 있다. |
“그레이 존은 발 디딜 곳이 없어졌죠. 모든 것이 보수 대 진보로 쫙 나뉘었잖아요. 이번에 천안함 사건이 나오니까 또 쫙 갈리잖아요. 참 불행한 일이죠. 우리에게 다가온 재앙도 꼭 그렇게 둘로 갈라져야 하는가, 참 안타깝죠. 꽃도 그렇고 바람도 그렇고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냥 흑백으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어요.”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보십니까.
“근대화 과정, 식민지 과정의 비극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근대 이데올로기, 특히 마르크시즘이 잘못 전달돼 혁명이론과 결합하면서 과격한 급진세력들이 상대방을 배제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죠. 너는 아니라고 배제를 하면 끼리끼리 뭉치게 되는 거죠.”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지식의 양이 그를 외롭게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친구는 있습니까.
“흔히 말하는 친구는 많지만, 형제처럼 초상나면 그 집에 가서 밤새우고 하는, 쉽게 말해 결혼하면 함을 지고 가는, 경조사를 같이하는 친구는 없어요. 제게는 늘 집단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직장에서도 그랬고, 가정에서도 가족이 저를 잘 안 따랐어요. 제 딸도 제 등만 봤지, 아마 부성애를 못 느꼈을 거예요. 저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완전히 고립됐습니다.”
―일부러 그런 삶을 선택했던 겁니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인간관계가 부담스럽고 힘들어요. 그리고 이상하게 제가 도와준 사람들은 저를 꼭 해쳐요. 그게 징크스이기도 한데 문단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죠. 문단에서 저를 욕하고, 폄훼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전부 제 덕을 본 사람들이에요. 취직시켜 주고, 내가 문단에 데뷔시켜 주고 말이죠. 별과 별자리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억 광년이 떨어져 있잖아요. 그게 실존의식이죠. 세속적 의미의 사회성이 결여돼 있다는 것은 실존의식을 가졌기 때문이고, 결국 그래서 문학을 했던 것입니다.”
―장관께서 갖고 있는 엄청난 지식이 사람들과 사귀는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나한테 호감이 갈까, 나한테 접근할 수 있었을까’라고 가정한다면 저도 저한테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을지 몰라요. 그런데 사회성 없는 제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은 문학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고 봐요. 정치나 경제 쪽으로 갔으면 벌써 파산해 버렸을 거예요.”
그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함께 크게 웃었다.⊙
사진 : 서경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