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에는 시라카와 갓쇼즈쿠리 가옥과 자연·환경지키기 협회가 결성되어 ‘가옥을 팔지 말자’ ‘가옥을 세주지 말자’ ‘가옥을 허물지 말자’는 3대 구호를 내세우고 본격적으로 보존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중부 산악지대에 있는 갓쇼즈쿠리(合掌) 가옥을 처음 본 것은 2005년도 겨울이었다. 평소 여행을 함께하는 부대진(진아건축) 회장과 이기승(모어댄뱅크) 사장과 함께 이시가와(石川) 쪽의 가나자와(金澤)와 노토(能登) 쪽을 들렀을 때였다. 여행할 때마다 그 지역의 건축물에 대하여 알기 쉽게 역사적ㆍ건축공학적 해설을 맡아 하는 부회장이 이왕에 이시가와 지역에 왔으면 갓쇼즈쿠리 가옥이 몰려 있는 곳을 찾아가 보자는 제의를 해 산골로 향했던 것이다. 그날따라 눈 많기로 유명한 일본 동해안지방에는 폭설이 내렸지만 갓쇼즈쿠리를 보러 간다는 나이 지긋한 한국인들을 태운 택시기사는 설국(雪國)으로 변한 산간지역을 조심스럽게 운전하면서도 눈길이 위험하니 중도에 포기하자는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일행을 도야마(富山)현의 산악지대까지 안내했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산 위에서 처음 본 갓쇼즈쿠리 가옥은 환상적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우리 일행은 폭설도 마다않고 눈길을 걸어서 마을에 남아 있는 특이한 농가를 살펴보았다. 갓쇼즈쿠리란 글자 그대로 지붕 모양이 두 손을 합친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부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마을에도 과거에는 수십 채의 갓쇼즈쿠리 가옥이 있었지만 화재로 소실되거나 주인이 떠나버려 폐가로 있다가 없어져서 지금은 10여 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인근 기후(岐阜)현의 시라카와무라(白川村)에는 아직도 100여 채가 남아 있고, 일본정부가 1995년에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했다 한다. 알프스 산악지대가 있는 유럽의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의 산악지방의 가옥인 샬레(CHALET)를 연상시키는 갓쇼즈쿠리는 규모도 대단했지만 일본의 산간지방에 이 같은 형태의 가옥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동안 자신 있게 택시를 운전하던 기사도 계속 눈이 내리는 상황에서 시라카와무라까지는 힘들 것 같다고 하기에 일행과 함께 가나자와로 돌아왔다.
산악 지방에 번듯한 4층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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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붕 교체 작업을 하고 있는 주민들. |
5년 전에는 동해안 쪽에서 택시를 이용하여 도야마 쪽의 갓쇼즈쿠리를 찾았지만 이번에는 태평양 쪽에서 반대편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택한 것이다.
나고야에서 도야마시로 향하는 기차는 기후현의 산간지방을 관통하는 히다(飛彈)강을 따라서 일본의 3대 온천으로 꼽히는 게로(下呂)온천을 지나 다카야마(高山)에 도착했다. 다카야마는 일본의 중세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산간지방의 도시로 제2의 교토(京都)로 불리는 곳이다.
구다야(久田屋)라는 오래된 전통음식점에서 일본된장과 함께 구워내는 불고기 별식을 맛보고 시라카와행 버스에 올랐다.
일본의 시골버스는 1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기후현의 북부산악도로를 2시간 정도 달려 일행을 시라카와무라에 내려놓았다.
지도를 보니 일본사람들이 일본알프스라고 부르는 도야마현, 이시카와현과 기후현이 마주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차장에 있는 관광버스의 번호판을 보니 일본 각지에서 온 버스들이었고 외국인도 많이 보였다. 마침 프랑스 말을 하는 일행이 있기에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물었더니 4년 전 은퇴하여 세계 각국에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ㆍ문화유산을 순방하는 중이라면서 내달에는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미국인 부부는 건축가로 일해 오면서 사진과 자료로만 접했던 일본식 샬레를 직접 보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나고야를 떠난 지 7시간 만에 도착한 시라카와의 갓쇼즈쿠리 마을은 인상적이었다.
수십 채의 갓쇼즈쿠리 가옥이 남북방향으로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는 해발 500m의 마을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리마다 집마다 피어 있는 수십 가지의 꽃과 함께 마을 전체가 일본의 농촌이라기보다는 이국적(異國的)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건물의 크기는 달랐지만 대부분이 4층 구조로 되어 있었고 지붕은 갈대를 수직으로 꽂아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어 우리나라의 초가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붕구조였다.
시라카와에 도착해서부터 생긴 의문은 험준한 산악지방에 4층 규모의 번듯한 건물이 어떻게 수백여 채나 존재할 수 있었느냐였다.
이 같은 의문은 외지(外地)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가옥 중에서 대표적인 간다야(神田家)에 들어가 내부를 살피고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해소할 수 있었다.
석기(石器)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이곳 산간지역은 16세기 들어 누에치기가 본격화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7세기 에도(江戶)막부의 직할지가 될 때까지만 해도 50여 호에 불과하던 시라카와 마을은 에도 말기에 100여 호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누에치기만으로 어떻게 첩첩산중의 산간마을에 4층짜리 큰 가옥이 300여 호나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다야의 벽면에 붙어 있는 기후대학교수의 연구결과로 설명되고 있었다.
보조금 지급해 상주 장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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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소화관이 최근 완성되어 실험분사를 하고 있다. |
누에치기마을이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누에에서 나오는 부산물 등으로 화약을 만들어 일본 각지에 판매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국(戰國)시대를 거쳐 에도 막부(幕府) 시절에도 산간마을에서는 누에치기를 하면서 부가가치가 높은 화약(火藥)을 만들어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간다야는 와다(和田)가의 차남이 1820년대에 축조한 집으로 누에치기와 화약제조 이외에도 양조업(釀造業)으로 수익을 올렸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고도성장에 접어든 초기만 하더라도 시라카와의 갓쇼즈쿠리 마을은 국민적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고 폐옥(廢屋)이 되어 갓쇼즈쿠리 가옥이 하나둘씩 없어지기 시작하자 1967년 전통가옥을 보존하자는 운동이 마을의 뜻있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72년에는 시라카와 갓쇼즈쿠리 가옥과 자연ㆍ환경지키기 협회가 결성되어 ‘가옥을 팔지 말자’ ‘가옥을 세주지 말자’ ‘가옥을 허물지 말자’는 3대 구호를 내세우고 본격적으로 보존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주민운동은 점차 기후현청과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던 113채에 달하는 갓쇼즈쿠리 가옥을 계속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976년에는 일본정부의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중요전통건축물 보존지역으로 선정되어 행정ㆍ예산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협회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113동(棟) 중 109동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주인들이 거주하지 않아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으면 상대적으로 보존이 어렵고 폐가가 되는 경우가 많아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는 갓쇼즈쿠리 상주보조금을 지급하여 주민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배려하고 있다고 한다.
1998년에 설립된 세계유산 시라카와 갓쇼즈쿠리 보존 재단은 여러 업무 가운데 거주자보조금 지급이 주요업무라는 것이다.
일본인의 지혜가 결집된 목조건축의 진수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보조금까지 지급해 가면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마을을 만들고 있는 일본인들의 빈틈없는 정책적 배려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보존재단에서는 지방 및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화재가 발생했을 때 마을 전체의 피해를 막기 위해 완벽한 소방시설을 최근 완성했다고 했다. 소방관(管)의 수압을 높여서 화재에 약한 갓쇼즈쿠리 가옥 높이의 두 배가 넘는 물기둥으로 만약의 화재에 대비하고 있었다.
간다야의 내부를 둘러보면서 한 층이 50여 평이나 되는 규모도 놀라웠지만 지진(地震)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큰 건물에 못을 쓰지 않고 나무와 새끼줄만을 써서 4층 건물을 단단하게 축조한 그 지혜도 놀라웠다
1년에 3개월 이상은 눈에 덮이기 때문에 지붕경사도 몹시 가파를뿐더러 태풍이 불 때는 강을 따라서 남북으로 광풍이 불어 지붕면은 모든 가옥이 동서로 향하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보면서 다시 만난 미국인 건축가는 일본인들의 지혜가 결집된 목조 건물의 진수(眞髓)라고 격찬했다.
간다야를 보고 나오면서 색다른 구경거리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시라카와 방문의 또 다른 소득이었다. 20여 명에 달하는 마을 사람들이 간다야의 옆집 지붕을 새로 갈고 있었는데 그 작업이 정말 볼 만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아래쪽에서 갈대를 올려주고 이것을 받아서 지붕에 촘촘하게 박으면 다른 사람들이 톱으로 갈대 윗부분을 가지런히 자르고 다시 톱으로 자른 갈대 면을 망치로 치면서 지붕면을 고르게 하는 4단계 작업을 진행하는 장면은 분업(分業)작업의 상징처럼 보였다.
소형크레인과 전기톱을 이용하는 오늘날의 작업에도 가옥 하나의 지붕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2~3일이 소요된다는데 기계가 없었을 당시에는 마을 사람 전체가 매달리는 큰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공동 작업을 통해 누에치기를 하고 화약을 만들어 산간지방에서의 부(富)를 가능케 한 것은 오늘날 경제대국 일본의 서막(序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간 200만명 이상 관람
일본정부가 1995년 나라(奈良)의 도다이지(東大寺)와 함께 시라카와의 갓쇼즈쿠리 마을을 처음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오지(奧地) 산간지방에 건축학적으로도 가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대형건물이 100여 채 이상 남아 있는 것을 세계에 자랑하면서 영구히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순간 세계적인 명소(名所)가 되어 많은 사람이 찾게 되고 결과적으로 보존사업에도 탄력이 붙게 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마을을 보호하자고 나섰던 젊은이들은 이미 70~80대의 연령층이 되었지만 이들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시라카와 마을은 세계적 명소, 연간 200만명 이상이 찾아오는 고급관광지로 변모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