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 기자의 짧은 회고록 ⑪ 대항해! 불타는 바다, 괴기스런 해협

슈퍼탱커 타고 戰時下의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를 지나다

  •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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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이란-이라크 전쟁 중 20만t 유조선을 타고 쿠웨이트-페르시아만-호르무즈 해협-인도양-말라카 해협을 지나 울산항까지 오는 데 한 달 걸렸다. 요사이와 닮은 위험한 항로였다.

“그 오렌지는 조 부장님도 맛보셨겠지만 국산과는 달리 참 달지 않습니까? 우리 선원들은 그걸 먹지 않고 식당 냉장고에 모아 둡니다.
울산에서 내릴 때쯤 되면 이삼십 개는 되지요. 그걸 집에 갈 때 가져갑니다.
명색이 중동에 갔다 오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고, 그래서 외제 오렌지로 때우는 거죠. 이 배의 보통선원들은 혼자서는 오렌지를 아무도 안 먹습니다. 자식이란 것이 뭔지….”
1982년 2월 오일로드 취재 당시의 필자. 왼쪽은 당시 동행했던 박상원 사진기자.
나는 1980년 6월 1일자로 또다시 해직 기자가 되었다. 광주(光州)사태를 취재하고 회사로 돌아오니 “왜 병가(病暇)를 내고 취재하러 갔느냐”면서 인사위원회를 열어 해임을 의결했다. 전두환(全斗煥) 그룹이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일종의 혁명위원회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출범시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을 무력화시키고,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김대중(金大中)·김종필(金鍾泌)을 연행하고 김영삼(金泳三)을 가택 연금(軟禁)하면서 정치권을 초토화시킨 가운데, 머지않아 언론계에도 숙청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란 예상은 자연스러웠다. 5월 27일 광주사태가 진압되면서 국민들의 저항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여름 포항 석유가 경제성이 없다는 논문을 썼다가 정보부의 압력으로 해직된 이후 4년 만에 또 험한 꼴을 당한 셈이다. 그해 가을 신군부는 반(反)정부 성향의 기자들을 언론사에서 추방하는데, 이미 해직된 내 이름이 그 명단에 확인사살하듯이 실리는 바람에 다른 언론사 취직도 당분간 불가능해졌다. 살길을 찾아야 했다. 허름한 아파트에 6명의 식구가 사는데 생계를 꾸려 갈 책임은 또 아내에게 홀로 떠넘겨졌다. 《국제신문》에서 나는 사회부 기자, 아내는 조사부 기자로 일했는데 언론사 통폐합으로 《국제신문》은 《부산일보》에 흡수되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이 대견스럽게 생각되는 점이 있는데, 실직자(失職者)는 되었지만 실업자(失業者)는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업(業)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먹고살기 위한 글쓰기
 
  《국제신문》에서 나온 뒤 서울에 올라와 잡지사에 취직할 때까지 1년 3개월간 나는 신문사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글을 썼다. 먹고살기 위하여.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을 받아 진행 중이던 부마사태 실록 집필을 완성, 제출하여 지원금을 다 받았다. 정치 정세로 출판이 불가능하였지만 미래를 위해 예금을 해 놓은 셈이 되었다(1987년 여름에 한길사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
 
  한 신문사에서 모집한 장편소설에 응모하여 석유 개발 음모를 주제로 한 소설을 썼다. 400페이지 분량의 약 2000장에 달하는 원고를, 아내가 복사비를 아낀다고 매일 밤 필사하기도 했다(결과는 꽝이었다).
 
  1차 해직 시절에 재미를 붙였던 잡지 글쓰기에도 박차를 가했다. 한창기씨가 창간한 한글 전용 잡지 《뿌리깊은나무》에 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명(名)편집장 김형윤씨는 경남고등학교 출신으로 동년배였다. 내가 해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같이 일하자고 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이 잡지도 반정부 성향으로 찍혀 신군부에 의하여 폐간되고 말았다.
 
  1979년 말에 《석유사정 좀 훤히 압시다》를 출간한 데 이어 1981년 초엔 《7광구의 대도박》(다락원)을 냈다. 진행 중이던 7광구 해저 시추 과정을 정밀하게 다룬 책이었다.
 
  1980년 10월 《월간조선》에는 단편소설 분량의 취재 기사를 팔았다. 〈한국경제 생명선은 안전한가: 길은 외줄기, 뱃길 3만 리〉란 제목의 글은 중동 석유 항로(‘오일로드’라고 이름 붙였다)를 다뤘다. 1981년 2월호엔 〈남해의 도박〉이란 제목으로 7광구 해저 시추 드라마를 썼다.
 
  1981년 여름 《중앙일보》에서 해직된 《월간중앙》 출신 허술(許鉥) 기자가 전화를 걸어 와, 서울에서 《마당》이란 잡지를 만드는데 취재부장으로 와 달라고 했다. 이 잡지는 1981년 9월호를 창간호로 냈다. 화보를 많이 쓰고 디자인이 참신한 교양 잡지였다. 긴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의 적성에 맞는 월간지의 기자가 되어 심층 취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활동 무대가 서울로 바뀌었다. 해직된 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44년 전의 석유 항로 취재가 오늘에 던지는 의미
 
  허술 편집장은 나의 취향을 존중하여 오일로드 취재를 권했다. 나는 1982년 1월에서 2월에 걸쳐 한국의 생명선인 석유 항로를 입체적으로 답사했다. 사진부 박상원 기자와 동행, 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을 거쳐 쿠웨이트에 도착, 육상 유전을 둘러본 뒤 울산에서 온 20만t 슈퍼탱커 동해2호를 타고 한 달 항해 끝에 울산항으로 돌아왔다. 당시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진행중이었고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은 전시(戰時) 상황이었다. 아마도 유조선을 타고 이 두 곳을 지난 최초의 기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은 고립된 이란을 이라크가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8년간 이어지면서 쌍방이 약 100만 명의 전사자(戰死者)를 냈다. 당시 이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미국이 지원하던 이라크와 싸워 사실상 승리했다(이라크가 전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 이라크는 독가스를 썼지만 서방세계는 이를 묵인했다. 미 해군은 이란 민항기를 격추, 290명이 죽었다. 북한만이 이란을 도왔는데 이게 두 나라의 혈맹(血盟) 관계로 발전하여 핵(核)과 미사일 개발에서 공조(共助)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44년이 지나 터진 지금의 이란 전쟁은 두 핵무장 국가가 작당, 핵무기를 갖지 않은 나라를 기습 공격, 국가 지도부를 몰살시키는 것으로 시작된 점이 특이하다.
 
  지금 진행 중인 이란 전쟁 중에 이 회고록을 쓰기 위하여 44년 전 석유 항로 취재기를 다시 읽어 보니 석유와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의 중요성이 그대로임을 알고 놀라게 되었다. 20세기를 ‘석유로 쓴 역사’라고 하는데 21세기에 들어와서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석유 항로가 가진 중요성과 함께 기름을 나르는 유조선과 선원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었다. 석유와 바다는 평생 나를 매료시킨 분야인데, 특히 배와 선원에 대하여는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무관심하거나 왜곡된 정보를 가져 세월호 사고에서 드러났듯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어가기도 한다. 언론과 정치권의 선동에 굴복한 박근혜 정부가 죄 없는 해경 해체를 결정한 것이 정권 붕괴로 가는 길을 열었다.
 
 
  처음 만난 이란인
 
  나의 이란에 대한 인상은 쿠웨이트에서 만난 이란 선원에서 시작된다.
 
  석유 항로 취재를 하겠다고 쿠웨이트까지 날아온 우리는 임무를 끝내고 울산으로 가는 20만t 초대형 유조선(VLCC·Very Large Cude Oil Carrier) 동해2호(아세아해운 소속)를 탈 예정이었다.
 

  1982년 1월, 우리 《마당》 취재반이 열나흘 만에 쿠웨이트의 뭍을 떠나는 날, 육상은 고요했으나 해상은 거칠었다. 동해2호는 울산을 출항한 지 스무엿새 만에 이날 정오 미나 알 아하마디 외항에 거체(巨體)를 드러내고 입항 수속을 마쳤지만 초속 15m의 강풍 때문에 해상 부두인 시아일랜드에의 접안(接岸)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동해2호는 시아일랜드 남쪽 해저에 닻을 내리고 1만 2000km의 뱃길을 달려온 고달픈 몸뚱이를 하잘것없는 풍파에 잠시 내맡겨야 했다. 아하마디의 남(南)부두에서 저녁 7시에 겨우 출국 수속을 끝낸 우리는 통선(通船) 선원들 대기소에서 바다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열두서너 명의 선원들은 모두 젊은 이란인들. 우리가 들어섰을 때 그들은 빙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저녁상은 조촐하였다. 방 한복판에 마분지 조각을 깔고 그 위에 된장을 닮은 콩 반죽 양념 접시와 이스트를 넣지 않은 납작한 빵의 무더기. 빵을 조각조각 찢어 콩 반죽에 찍어 먹고 있던 그들은 우리에게 자리를 내주고 빵 몇 개를 안겨 주었다. 속이 빈 우리는 손가락을 수저로 삼고 그들의 만찬에 기꺼이 동참했다. 짧은 영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쁘장하게 잘생기고 잘 웃어젖히는 청년뿐이었다.
 
  그는 우리와 그의 동료들 사이의 통역을 자청하고 나섰다. 모두가 3, 4년 전에 쿠웨이트로 일자리를 구해 나왔다는 것, ‘부자들만 감싸 온’ 팔레비보다는 호메이니를 더 좋아한다는 것,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건설 노동자’와 올림픽 개최(예정) 정도라는 것, 지금 시아일랜드까지 통선이 나가기에는 너무 바다가 험하니 이 방에서 푹 주무실 생각을 하라는 충고 등을 왁자지껄하게 늘어놓았다. 모두가 유쾌한 청소년들처럼 웃고 장난치며 아무런 경계심 없이 우리를 대해 주었다. 내가 영어판 코란을 보여 주면서 이슬람교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더니 옆에 앉았던 깡마른 청년은 만지작거리고 있던 염주를 내 손에 꼭 쥐여 주며 “진실한 교도가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폭풍을 뚫고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쿠웨이트 국영 유조선 회사(KOTC) 직원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시아일랜드 방향의 통선이 났으니 편승하라는 것이었다. 시아일랜드에서 내일 출항할 KOTC 유조선이 하나 있는데 오늘 밤 이 배에 타야 하는 쿠웨이트 선원들이 “위험하다”는 이란인 통선 선원들을 억누르고 한 척을 징발한 것이었다. 마음이 급한 우리는 위험성을 무시하고 책과 사진 기재로 꽉 찬 여섯 개의 가방을 파도에 나부끼는 통선으로 옮겼다. 통선이 남부두의 잔교(棧橋)와 아하마디 정유공장의 불꽃을 어둠 속에 파묻으며 시아일랜드로 출발한 것은 밤 9시쯤. 거추장스럽게 펄럭이는 아랍 전통 옷차림의 쿠웨이트 선원들이 여섯 명, 서너 달 전에 부산과 울산항에 들렀었다는 사관(士官) 선원이 둘 탔다.
 
  해안의 불빛이 멀어지고 해상 대기 중인 유조선들의 불야성이 가까워지면서 통선은 칠흑의 밤바다에서 놀기 시작했다. 길쭉하고 민듯한 너울에 얹혀 10t 남짓한 작은 배가 기우뚱거리며 미끄럼 타기를 계속했다. 물거품이 튀어올라 선교(船橋·브리지)의 앞창을 때리고 선체(船體)를 상하좌우로 부르르 흔들어 놓았다. 쿠웨이트 하급 선원 한 사람은 멀미에 취해 바닥에 드러눕더니 곧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맞바람을 뚫고 꾸역꾸역 한 시간쯤 달려 통선은 한 유조선의 뱃전에 접근했다. 기름을 싣지 않은 유조선이었다. 검고 붉은 철벽 선체가 황파(荒波)에 미동도 않고 아득하게 뻗어 있었다.
 
  그것이 방파제 역할을 했다. 뱃전 아래는 잔잔한 해면(海面)이 되어 있었다. 유조선 갑판에서 굵은 줄에 매달린 선박 부품들이 주렁주렁 내려왔다. 쿠웨이트 선원들은 울렁거리는 갑판 위에서 이것들을 잽싸게 받아 냈다. 가끔 통선이 성벽 같은 유조선의 뱃전과 부대껴 퉁퉁 퉁기기도 했다. 이 유조선은 KOTC 소속의 36만t급이라고 했다.
 
  부품을 받아 실은 통선은 다시 시아일랜드로 출발했다. 한 시간쯤이나 더 걸린 항해 끝에 통선은 시아일랜드에서 기름을 받고 있던 KOTC 유조선 알 파이아호의 우현(右舷)에 당도했다. 통선을 뱃전에 바짝 붙여 놓고 쿠웨이트 선원들은 부품을 먼저 배 위로 달아 올렸다. 풍랑은 먼저 들렀던 유조선에서보다도 더 심해져 작업은 난항을 거듭했다.
 
 
  “여기는 동해2호입니다”
 
필자가 승선했던 동해2호.

  통선이 한곳에 머물며 롤링을 해 대는 바람에 우리도 속이 메스껍게 뒤틀려 왔다. 30분 만에 부품 인양 작업이 끝나자 선원들은 줄사다리를 타고 한 사람씩 갑판 위로 올라갔다. 멀미에 취해 뻗어 있던 선원도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일단 사다리를 붙들자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뱃전을 기어올랐다.
 
  이제 통선에는 우리 두 사람과 이란인 선원 두 사람만 남게 됐다. 선장격의 깡마른 사나이는 나에게 염주를 선물한 이란 청년. 그는 어디로 가겠느냐고 물었다. “코리아 동해 넘버 투!”라고 했더니 그 배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시아일랜드 주위에는 대기중인 유조선들과 LPG 운반선들이 수십 척 떠 있었다. 불빛만 가지고는 동해2호를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달도 없는 암흑 속 거친 파도 위에서 우리는 미아(迷兒)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무턱대고 VHF 무전기를 잡고 선박에서 쓰는 공통 채널 16번으로 다급하게 불렀다.
 
  “코리아 동해 넘버 투, 하우 두 유 리드 미? 오버.”(동해 2호 감도가 어떠합니까?)
 
  반가운 한국인의 목소리가 바로 나왔다.
 
  “여기는 동해2호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오버.”
 
  동해2호의 당직사관은 자기들 배가 시아일랜드에서 남서쪽 1.5해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알려 왔다. 통선 선장에게 영어로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사우스웨스트’를 알아듣지 못했다. 박상원 기자가 종이에다가 방위표를 그려 놓고 고함을 치면서 손짓을 해 대자 뱃머리를 돌렸다.
 
  남서쪽으로 나갈수록 바다는 더욱 험해졌다. 통선은 이제 파도의 골 속으로 자맥질을 해 댔다. 뱃머리에 부딪친 파도가 통선을 통째로 덮어 눌렀다. 물세례를 거푸 받는 창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 낡은 통선에는 신호등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회중전등을 껐다가 켰다가 하며 이 통선이 제 길로 가고 있는지를 동해2호 항해실에 확인시켜야 했다.
 
  30분쯤 걸려 우리는 동해2호의 우현 아래에 이르렀다. 이란인 통선 선원 두 사람은 파도에 흠뻑 젖은 몸으로 자기들끼리 악을 써 가며 통선을 동해2호의 뱃전에 밀어붙이려고 했지만 번번이 퉁겨 나왔다. 동해2호의 검붉은 뱃전은 꿈쩍 않고 버티고 있었으나 울렁거리는 파도가 둘을 계속 갈라 놓고 있었다.
 
 
  시아일랜드로 도약 성공!
 
  통선이 동해2호의 선측(船側)에 부딪칠 때마다 가냘픈 통선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요동을 쳤고 우리의 가방들이 나뒹굴었다. 동해 2호의 선원들은 우리를 맞기 위해 쇠다리를 Z자로 뱃전에 내려놓고 있었다. 노란 헬멧을 쓴 한 선원이 손전등을 들고 쇠다리 끝에서 우리를 향해 안타까운 손짓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쇠다리 끝은 아득하게 멀리 위에 붙어 있었다. 거기에 줄사다리를 매달아 늘어뜨려 놓고 있었다. 통선이 바짝 뱃전에 붙었을 때 줄사다리 끝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보았으나 1m 이상의 간격이 있었다. 통선이 파도에 차여 올려지는 순간을 잡아 뛰어오르면 잡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실패하면 통선과 유조선의 철벽 사이에 끼여 중상 아니면 즉사할 판이었다.
 
  더구나 동해2호는 우리가 울산에서 보았던 납작한 그런 배가 아니었다. 공선(空船) 상태라 선체가 6층 높이로 까마득하게 높이 솟구쳐 있었다. 파도에 씻기는 검붉은 뱃전과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흉터처럼 드러난 철판은 인간의 체력을 비웃는 철옹성 그것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한 번 더!” 하며 통선 선원들을 내몰았으나 그들은 “노 굿!”을 연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동해2호 승선을 일단 단념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다시 두 시간 동안 흔들리며 쿠웨이트 뭍으로 돌아가기는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우리는 대신에 시아일랜드 상륙을 모험해 보기로 했다.
 
  통선을 돌려 시아일랜드의 잔교 밑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밤 11시30분을 넘고 있었다. 잔교에는 쇠계단이 해면(海面) 바로 위까지 내려와 붙어 있었다. 여기서는 통선에서 쇠계단으로 뛰어 건너게 돼 있었다. 5년 전에 시아일랜드 근무자가 이곳에서 발을 헛디뎌 바닥에 떨어졌다가 통선과 잔교 사이에 눌려 압사(壓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에 알았다. 우리를 태우고 온 이란인 통선 선장은 바로 다섯 달 전에 통선이 전복되는 사고를 일으켜 그 자신은 헤엄쳐 살아났으나 그 배에 타고 있던 승객 한 명은 익사하고 말았다는 것도 뒤에 알았다.
 
  그런 불길한 사정을 몰랐던 우리는 다급함과 오기를 추진력으로 삼고 시아일랜드로 도약,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두 이란 청년은 윗옷을 벗어젖혀 알몸을 드러내 놓고는 나뒹구는 조각배를 수십 번이나 잔교로 밀어붙여 우리가 가방들을 건네받도록 해 주었다.
 
 
  트럼프의 이란에 대한 無知
 
 
신재현 변호사
요사이 미국과 이스라엘 전투기가 이란을 폭격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그때 만났던 성실한 이란 사람들이 생각났다. 나중에 여행을 많이 하면서 체험한 지식이지만, 중앙아시아와 중동에서 이란은 동북아에서 중국과 같은 나라이다. 국가라기보다는 문명권이다. 사막 종교로 출발한 이슬람이 이란 문명을 흡수하면서 기독교와 맞설 수 있는 교양적 토대를 갖추었다. 한때는 문화·예술·과학 부문에서 유럽 기독교 문명을 앞서기도 했다.
 
  이란 사람들은 페르시아 등 다섯 개의 세계적 제국을 만들고 운영해 온 DNA가 있다. 2600년에 걸친 그런 문명의 축적은 47년간의 호메이니-하메네이 세력 통치나 250년 역사의 미국 문명이 없앨 수 없는 거대한 것이다. 트럼프가 네타냐후의 설득에 넘어가 레짐 체인지를 목표로 이란을 친 것은 이란 문명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개전(開戰) 첫날, 이명박(李明博) 정부 때 에너지 대사를 지낸 신재현 변호사는 “미국이 지는 게임”이라고 예언했다. 이란 정부 요인들과 많이 알고 이란을 좋아하는 그가 말한 전망은 두 달 뒤 거의 적중했다.
 
  “이란 사람들을 이슬람교도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들은 페르시아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더 강합니다. 미국이 이들의 자존심을 무시하고 때리면 미국이 기대하는 민주화 세력도 반미(反美)로 돌아 정권과 한 덩어리가 될 겁니다. 두고 보세요.”
 
  2007년 나는 시리아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요르단에서 만난 한 한국 외교관이 조용히 말하던 게 생각나기도 했다.
 
  “미국이 이란을 저렇게 대하는 건 실수입니다. 한국인들까지 미국과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이란을 보는 것도 위험합니다.”
 
  신재현 변호사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개전 첫날 하메네이 등 이란 지도부를 몰살시켰을 때 “미국이 순교자(殉敎者)들을 만들었다. 시아파의 트럼프에 대한 복수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주한 이란 대사관엔 하메네이 빈소가 차려졌는데 한국 외교부의 참배는 격에 맞지 않았다. 이란은 이미 망한 나라라고 생각한 듯했다.
 
 
  시아일랜드 탐험
 
알 파히아호가 시아일랜드의 송유관으로부터 받은 기름을 가득 싣고 페르시아만으로 다시 나가고 있다.

  세 시간 동안 파도 위에서 비틀거리다가 든든한 육지―그것이 비록 쇳덩어리로 만든 인공 섬일지라도―에 두 발로 확실하게 선다는 것은 하나의 쾌감이자 안도였다. 폭풍 속에서, 어둠 속에서, 절해고도 속에서 불빛과 사람의 웃음소리와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확인하고, 파도 위에 허옇게 떼 지어 앉아 둥둥 떠다니는 갈매기들을 향해 냅다 고함을 질러 보고, 아랍 노무자들과 뒤섞여 히히덕거리곤 한 것은 속이 후련해지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울부짖는 밤바다에 더는 겁을 먹지 않고서 아랍 노무자의 합숙소에서 그들이 데워 주는 홍차와 ‘걸레빵’으로 밤참을 즐겼다.
 
  콧수염을 길러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쿠웨이트 청년 후세인(23) 씨와 아랍, 코란, 그리고 한국을 토론하며, 그 몇 년 전에 죽은 전설적인 이집트 여가수 칼솜의 아랍 송을 소개받고, 사람을 날려 보낼 것 같은 바람에 비틀대면서도 시아일랜드를 자정에 관광한답시고 싸돌아다녔다.
 
  동해2호가 입항하기 하루 전에 접안한 알 파히아호는 시아일랜드의 송유관으로부터 시간당 1만 톤씩 기름을 받아 마시며 바닷속으로 서서히 하체를 가라앉히고 있는 중이었다. 시아일랜드의 통제실에 올라갔더니 7층 높이의 이 방은 흔들흔들 움직이고 가끔 바닥이 지진을 탄 듯 덜덜 흔들리고 있었다. 야간 당직자인 잔교감독 오말 슐리만(36) 씨는 “원유가 폭포수처럼 탱커로 쏟아져 들어가는 충격으로 섬 전체가 이렇게 떨린다”고 설명했다. 통제실의 풍속계는 30노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아일랜드는 1968년 9월에 완공된 것으로 아하마디 항구의 육상 부두에 접안할 수 없는 초대형 유조선들에 기름을 실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쿠웨이트 수출 원유의 약 3분의 2가 여기에서 실리고 있다고 했다. 바다 한가운데 이런 접안 시설을 만들기로는 세계에서 첫 시도였다.
 
 
  슈퍼탱커 도선사
 
  그 뒤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라스타누라와 주아이마, 이라크의 시트 알 아랍 수로 앞, 이란의 카그아일랜드 등지에서도 비슷한 시설이 만들어졌고 한결같이 ‘시아일랜드’로 불리고 있다. ‘시아일랜드’는 고유명사와 보통명사를 겸하고 있는 꼴이다.
 
  우리가 잠을 포기하고 시아일랜드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있는 사이 근방에 있던 동해2호는 새벽 1시에 닻을 감아 올리고 접안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시아일랜드 전속 도선사(導船士) 세리프 사우디(37) 씨가 전용 통선으로 동해2호에 올라갔다. 이어서 힘센 두 척의 예인선이 어둠과 풍랑을 무릅쓰고 동해2호 뱃전을 향해 달려와 바짝 붙었다.
 
  이덕인 선장은 선교에서 워키토키를 만지작거리며 도선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예인선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강풍에 밀려 도저히 동해2호를 밀어붙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터그보트(예인선)의 도움 없이는 잔교 접안이 되지 않는다. 도선사는 “바람이 잘 때까지 기다리자”면서 돌아왔다. 동해2호는 다시 15톤짜리 닻과 전봇대만큼 굵은 쇠닻줄을 270미터나 풀어 해저에 박아 놓고 떠 있을 수밖에.
 
  동해2호에서 시아일랜드로 막 돌아온 도선사 사우디 씨를 통제실에서 만났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앳된 얼굴을 갖고 있는 그는 이집트인. 서로 인사가 끝나자 청산유수처럼 달변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이집트인들의 특징이다).
 
  “슈퍼탱커를 잔교로 모셔 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인지 압니까? 나는 도선사가 되기 전에는 한 주일에 꼭 다섯 번씩은 아내를 즐겁게 해 주었소. 지금은 두 번밖에 못 해요. 신경쇠약 때문이오.
 
  탱커의 접안을 유도한다는 것은 여자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기교를 필요로 하는 일이에요. 그것도 아내가 아닌 생판 모르는 여자를 말입니다. 도선사는 늘 다른 상황에서, 늘 다른 유조선과 만납니다. 배 무게가 다르고 원유 적재량이 다르고, 선원들이 다르고, 조류와 해류와 바람이 다르고, 거기에 따라 탱커의 노는 가락이 다르고…. 나는 비행기 조종사 면허도 갖고 있어요. 비행기는 조종사의 눈, 손, 다리, 귀의 각 기능을 기민하게 종합 조정하여 모는 것인데 슈퍼탱커의 유도는 눈과 경험에만 의존하니 더 어렵지요. 나는 십 년 동안 슈퍼탱커를 도선했는데도 새 배를 만날 때마다 불안한데, 비행기 조종은 열흘 만에 자신을 얻었단 말입니다.”
 
 
  왜 배를 여성명사로 부르나?
 
  배에 대해서 좀 아는 편인 내가 들어 주니 그는 신이 났다.
 
  “슈퍼탱커의 도선법은 또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이론이 정립된 게 없고 비행기 조종처럼 모의훈련을 할 수가 없거든요. 경험과 지식의 전승(傳承)이 어려워 발전이 없고, 신참은 늘 제로에서 새로 출발하여 시행착오를 통해 요령을 터득하는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왜 배를 ‘she’라고 여성명사로 부르는지 아십니까?”
 
  “내가 만난 탱커 선원들의 평을 해 볼까요. 일본 선원들은 가장 능률적이고 조직적이에요. 그리스 선원들은 너무 말이 많습니다. 싸우는지 그냥 대화를 하는지를 분간 못 해요. 중국 배에 오르면 누가 선장인지 누가 말단 갑판원인지 알 수가 없어요. 독일 선원들은 영리하죠. 노르웨이 선원들은 술과 여자에 너무 빠져요. 한국 선원들은 최상급이지요. 아마 국가별 선원 순위를 내 보면 일본 바로 다음쯤이 될 거예요.”
 
  사우디 씨는 입술이 붙어 있을 틈이 없을 정도로 쉼 없이 지껄여 댔다. 절묘한 비유와 용어 선택, 폭넓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로 그는 두 시간 동안 우리를 포함한 통제실 근무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새벽 네 시가 되자 그는 통제실 아래층의 자기 침실을 우리 두 사람에게 양보하고는 자기 사진을 멋지게 잡지에 내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울산을 향해 출항!
 
  시아일랜드에서 폭풍의 밤을 보낸 우리는 맑게 갠 아침을 맞았다. 15km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아하마디의 정유공장과 정유탱크들이 가물가물 보일 정도로 시정(視程)도 좋았다. 바람과 파도도 느릿느릿 누그러지고 있었다.
 
  오전 10시30분. 22만t의 기름을 실은 알 파히아호가 시아일랜드의 잔교를 떠나 수평선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 지중해로 들어가는 2만km의 항로(港路)가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동해2호는 시아일랜드에 접안하여 33시간 머물면서 기름을 싣고 출항했다. 하루 남짓한 체류 중에 쿠웨이트의 뭍을 밟은 선원은 아무도 없었다. 구실을 달면 통선을 타고 나가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럴 시간, 흥미, 의욕을 가진 선원이 없었다.
 
  이덕인 선장은 출항을 몇 시간 남겨 놓고 배에서 시아일랜드로 건너갔다. 잔교에 자리를 잡고 낚싯줄을 던졌다. 한 무리의 고기떼가 잔교 밑을 지나갔다. 이 선장은 30분 사이에 손바닥만 한 준치를 들통으로 하나 가득 ‘주워 담았다’. 2등기관사 최용선씨는 “상륙하는 기분이라도 내야겠다”면서 강철의 뭍-시아일랜드로 건너가 한 바퀴 돌고 왔다. 다른 선원들은 15km 저쪽에서 어렴풋이 빛나는 알 아하마디의 무미건조한 해안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하얀 강철로 덮인 정유공장, 송유관 등의 비인간적인 풍경은 스무엿새 동안 파도 위에 떠 있었고 이제 또 그만한 거리의 뱃길에 오르려는 선원들의 눈망울을 채웠다.
 
  밤 9시45분, 전날 접안을 유도했던 이라크인 도선사가 브리지로 올라와 동해2호의 출항을 명령했다. 시아일랜드에 동해2호를 묶었던 열여섯 가닥의 줄을 풀었다. 조류는 예인선의 도움도 청하지 않고 23만t 무게의 기름배를 슬그머니 잔교에서 밀어냈다. 동해2호는 잔잔해진 해면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미리 미리 살살’
 
  “슬로!”
 
  “하프 어헤드!”
 
  “레디!”
 
  “풀 어헤드!”
 
  도선사는 미련한 소를 몰듯 쇳소리 나는 목청을 높여 명령을 내렸고 선장은 이를 받아 3항사를 향해 복창했다. 3항사의 명령에 따라 조타수는 키를 빙글빙글 돌리며 진로를 잡았다. 3항사 박영간(25)씨는 손잡이를 밀었다가 당겼다 하며 42t짜리 네 잎사귀 모양 스크류의 회전 속도를 조정했다.
 
  도선사가 진로 각도를 명령하고서 선체가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눈치를 챌 수 있을 때까지는 삼사 분의 시간차가 필요했다. 트럭 6만 대의 무게, 인간 400만 명의 무게와 맞먹게 된 이 괴물의 반응 속도는 초저속 화면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다가 급정거를 위해 ‘전속후진’을 걸어도 5km쯤은 관성으로 그냥 미끄러져 버리는 이런 초대형 유조선의 조종 원리는 ‘미리 미리 살살’이란다.
 
  출항 30분 만에 아하마디항을 빠져나온 동해2호는 마침내 침로를 150도 방향으로 굳히고 ‘RPM(분당 회전 속도) 70’의 12노트 속도로 3만 리 동쪽에 있는 울산항을 향해 항진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밤하늘의 별자리들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와글와글 붙박혀 있었고 그 밤하늘의 한 가장자리를 태우는 정유공장과 유전의 불길은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페르시아만의 이상한 낚시
 
  이덕인 선장은 동해2호의 침로(針路)가 고정되고 방향 잡는 기능이 수동 키에서 자동항해장치(Autopilot)로 넘어가자 브리지를 항해사에게 물려주고 선장실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기관장과 동승선장 최화섭(36)씨,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초대해 술판을 벌였다. 이 선장이 몇 시간 전 시아일랜드에서 잡은 준치들이 신선한 회로 변해 한 접시 가득 담겨 있었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선장은 억양이 없는 차분하고 느릿한 말투로 낚시 얘기부터 꺼냈다.
 
  “‘PG(페르시아만)’ 물고기들은 순해 빠졌어요. 오늘 수십 마리를 잡았는데 이건 낚시질이 아니라 그냥 팔운동이었습니다. 미끼도 안 달고 낚싯바늘만 줄 끝에 매달아 던져 놓고 아령 체조하듯 팔만 들어올리면 한 마리씩 걸려 올라와요. 고기떼가 한참 지나갈 때에는 배나 옆구리에 바늘이 박혀 올라오는 놈들도 있었어요. 웨이팅(장기 해상 대기)할 동안에는 도미나 가오리, 점백이도 많이 잡았는데 영악한 한국 물고기와는 달라요. 쇠고기를 미끼로 써도 덥석, 플라스틱으로 만든 새끼 물고기 미끼를 던져도 덥석, 아무거나 삼키는 겁니다. 점백이 같은 놈은 걸려도 몸부림을 안 쳐요. 묵직해서 바위에 걸렸나 슬슬 당겨 보면 1, 2m짜리가 멍청하게 달려 올라오는 게 가련하기도 하고….”
 
  이 선장에게 있어서 ‘PG’의 추억은 주로 낚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선장뿐 아니라 많은 한국의 탱커 선원들은 낚시 도구를 필수품처럼 갖고 다니며 바보 같은 아랍 물고기들을 요절내고 있다.
 
  PG행 한국의 선원들 사이에 낚시 풍조가 퍼지게 된 것은 1970년대 초·중반기의 장기 대선(待船)에서 비롯된 것 같다. 중동의 개발 붐을 타고 PG의 항구에는 갖가지 화물선들이 몰려들었으나 항만 하역 능력 부족으로 보통 서너 달, 늦으면 여섯 달~1년까지 배를 외항에 띄워 놓고 짐 부릴 차례를 기다리는 체선(滯船) 사태가 빚어졌다. 이 기간에는 입항 허가를 얻은 상태가 아니라서 상륙도 안 된다. 감옥처럼 한정된 갑판과 선실을 맴돌며, 그것도 찌는 태양과 달아오른 철판 위에서 미치지 않고 몇 달을 견디려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구명정을 내려 같이 대기 중인 한국 배들을 찾아다니며 친구나 동창들을 만나고, 해외 수출 선원들이 탄 배에 가서는 소주로 양주를 바꾸어 오고, 그리고 낚시질. 상선 선원이 어부로 둔갑하는 것이었다.
 
  선장실을 나와 새벽 3시에 브리지에 올라갔다. 1시 방향으로 촛불 같은 게 보였다.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중립지대(이곳의 산유량은 두 나라가 2등분함)에 있는 해저 유전 시설의 가스 태우는 불길이었다. 후트 유전의 불꽃을 우현 쪽으로 바라보며 지나치자 곧 카푸지 유전의 불길이 1시 방향에서 나타났다. 그 22년 전 일본인들이 단 한 방의 첫 구멍 시추에서 발견한 매장량 50억 배럴(당시 한국의 25년 소모량)의 대유전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원유는 주로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동해2호가 새벽 4시30분에 스쳐 지나간 카푸지 유전에서 중립지대는 끝났고 그 뒤 또 다른 불길이 동터 오는 수평선상에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우디의 사파니아 해저 유전, 매장량이 200억 배럴을 넘어 해저 유전으로는 세계 최대다.
 
  한국 언론이 자꾸만 7광구와 비교하여 우리 사람들의 귀에도 익은 사파니아 유전 뒤편에는 세계에서 매장량이 열여섯 번째인 마니파 유전(매장량 110억 배럴), 다시 그 북쪽 연안에는 세계 14위 베리 유전(매장량 120억 배럴), 그 한참 뒤에는 아부 사파 해저 유전. 동해2호는 새벽 6시에는 줄루프 유전(세계 22위·85억 배럴)을 오른편에 놓고 불길의 바다를 통과, 이날 오후 2시 라스타누라 항구 동쪽 60km 해상에 이르렀다. 여기를 지날 때 약 9km 서쪽에 회색 군함 한 척이 멈추어 있는 것이 쌍안경에 포착되었다. 이덕인 선장은 “미국 순양함일 것이다”라고 했고 해군 중위 출신인 최 선장은 “1만t급이다”라고 했다. 동해 2호는 며칠 전 쿠웨이트 입항 하루 전날 밤 이곳을 통과할 때 미국 군함을 만나 정중한 질문을 받았었다. 목적 항구, 화물 내용 따위를 VHF로 물어보더란 것이다.
 
 
  송유관 전쟁
 
  1979년 7월 1일 PG의 장래와 이곳을 둘러싼 국제 역학(力學)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변화가 조용하게 일어났다. 페르시아만 라스타누라 항구에서 출발, 아라비아 사막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건너편 홍해의 동쪽 연안 도시 얀부에 이르는 1215km의 송유관이 개통된 것이었다. 16억 달러를 들여 만든 이 송유관 ‘페트로라인’은 세계 최대 가와르 유전의 원유를 하루 185만 배럴씩 흘려보내고 있었으며 몇 년 안으로 송유 능력은 두 배로 늘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2026년 2월에 시작된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자 이 송유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보통 때는 매일 200만 배럴을 보냈는데 요사이는 700만 배럴까지 늘려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피해를 상당히 만회해 주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매일 통과하는 원유량은 약 2000만 배럴.
 
  PG는 만(灣)으로 불리지만 동해만큼 넓은 바다다. 길이가 약 900km, 최대 폭은 300km쯤. 깊이는 100m 미만. 동해2호는 반월도(半月刀)처럼 생긴 PG의 한복판을 가르며 호르무즈 해협을 향해 12노트 속도로 순항하고 있었다. 쿠웨이트에서 보았던 초록색의 바닷물은 짙은 청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푸른 광활한 들판 위를 뉘엿뉘엿 기어가는 듯 동해2호는 1분당 50만t톤의 바닷물을 양쪽으로 밀어붙이며 미련스럽게 나아갔다. 가벼운 배들은 해면을 지치고 파도를 타지만 이 빙산 같은 유조선은 바다를 무지막지하게 찢어 벌리며 헤쳐 나가는 꼴이었다.
 
  높이 24m의 선체 가운데 19m를 물속에 잠근 이 배는 사실상 半잠수선. 워낙 흔들림이 적어 날개처럼 선수(船首)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는 물결과 배꼬리에서 뒤로 뻗은 물길이 없다면 동해2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수평선에는 PG로 들어오는 높은 탱커와 빠져나가는 납작한 탱커가 끊임없이 엇갈리고 있었다. 일반 화물선은 슈퍼탱커의 그림자에 가렸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뱃사람들의 고향 그리는 형체 없는 목소리
 
  동해2호가 바레인 앞을 지날 때 선교에서 당직을 서던 2항사 이종권(28)씨가 심심했던지 VHF로 “한국 배 있습니까?”라고 불렀다. 선박 VHF는 반경 50km 이내에서 교신이 가능하다. “한국 배 여기 있습니다”라고 곧장 받고 나온 것은 아세아상선(주)의 예인선 청룡1호였다. 사우디의 주베일항에 건설 자재를 실어 주고 카타르의 도하항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청룡1호의 당직사관은 동해2호가 귀항길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부러운 듯 “우리는 돌아갈 기약이 없다”고 했다. 청룡1호는 한국을 떠나온 지 1년 반이나 됐다는 것이었다. 선원들은 배 안에서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청룡1호는 바지선을 끌고 다니는 배다. 이 바지는 길이가 170m, 너비가 40m나 되는 거대한 사각 철판. 바지에는 대규모 공사 현장에 공급할 철 구조물, 공장 시설, 건설 자재 등 무거운 화물들이 실린다. 청룡1호와 바지선은 1700m나 되는 쇠줄로 이어져 있어 한국 선원들은 이 예인선을 만나면 “세계에서 제일 긴 배다!”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속도는 8노트 정도이지만 풍랑을 만나거나 엔진이 고장 나면 가벼운 예인선이 무거운 바지선에 끌려 뒷걸음을 칠 때가 있다. 엔진을 끄고 기관을 수리 중인 청룡1호를, 해·조류에 밀려온 바지선이 쿵쿵 들이받는 바람에 침몰 위기에 빠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을 떠나 중동까지 오는 데만 50일쯤 걸린다는 굼벵이 청룡1호의 당직사관은 향수에 젖은 목소리로 본국 사정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얘기 좀 해 달라고 이종권씨를 재촉했지만 이씨마저 사오십일 만에 한국에 들러도 하루밖에 상륙할 수 없는 몸, 뾰족한 정보를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몇 시간 뒤에는 동해2호의 자매선인 동해1호가 VHF에 나왔다. 동해1호의 성명한 선장은 이덕인 선장을 불러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난해 12월 25일부터 라스타누라에서 앵커 박고 웨이팅하고 있습니다. 벌써 40일이 흘렀습니다. 연가(年暇) 가야 할 선원도 많은데 이거 큰일 났습니다. 본국에 돌아가시면 정기휴가자들이라도 빨리 교체해 달라고 잘 좀 말씀해 주십시오….”
 
  이 선장은 “우리 배 몰고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 당장 교대합시다”라는 농담으로 성 선장을 달래려고 했으나 성 선장의 목소리에서는 답답, 허전, 다급한 가락이 사그러들지 않았다. 부정기 유조선인 동해1호는 기름 수출량의 격감으로 짐을 못 구해 타국만리의 바다에서 하염없이 떠 있기만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검푸른 해원(海原) 저 건너 열사(熱砂)의 하늘 밑, 철판으로 둘러싸이고 바다에 의해 이중으로 고립된 뱃사람들의 고향 그리는 형체 없는 목소리는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지리적 핵폭탄’
 
 
로버트 D. 카플란. 사진=조선DB
미국의 지정학(地政學) 전문가 로버트 D. 카플란은 이란을 국민국가가 아닌 문명(文明)국가로 부른다. 페르시아만의 가장 긴 해안선을 점유한 이란은 자연요새와 같은 나라라고도 했다. 북으로는 카스피해, 남쪽으로는 페르시아만(인도양으로 연결된다), 서쪽으로는 자그로스산맥, 북동쪽으론 코페트다그산맥, 중앙엔 거대한 고원이 있다. 그는 이란을, 영국이 바다에 의하여 보호되듯이 산에 의하여 보호받는 나라라고 했다.
 
  이란은 중동의 지리적 문화적 중심 국가이다.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레반트 지역,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북쪽으로는 캅카스(코카서스) 지방, 남쪽으로는 페르시아만을 연결한다. 중동,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의 십자로이다.
 
  이란은 그런 지리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제국이 되는 지리이다. 페르시아로 더 알려진 아케메니드 제국, 파르티아 제국, 사산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레반트 일부를 공통적으로 지배했다. 카플란은 “이란은 이런 지리(地理)로 해서 역사적으로 늘 제국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잘 조직된 국가이다. 사우디는 부족국가, 이라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 시리아는 분열 국가, 이란은 문명국가란 것이다. 카플란은 “이란은 중동의 가장 잘 조직된 문명국가”임을 강조하는데 이는 오랜 역사적 경험의 축적에서 우러나오는 국민들과 지도부의 교양과 술수가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란은 중동 시아파 네트워크의 중심이고 해양의 길목을 누른다. 즉 호르무즈 해협의 지배자이다.
 
  카플란은 이란을 “자연요새이고, 문명국가이며, 잠재적 제국”으로 정리했다. 트럼프가 카플란의 책(《The Revenge of Geography》)을 읽었으면 이란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이번 이란 전쟁으로 이란과 세계인들이 새로 깨달은 사실이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라는 지리적 핵폭탄을 갖고 있음을. 이란이 이사를 가지 않는 한 이 핵폭탄을 제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으로!
 

  쿠웨이트 시아일랜드 출항 사흘째가 되는 날 오전, 동해2호는 아랍에미리트연합국(UAE) 해안을 오른쪽으로 60해리쯤 거리에 두고 해안선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해저 유전의 철 구조물과 불꽃이 구름 깔린 수평선 위에서 점점이 보이다가 뒷전으로 밀리며 사라져 갔다. 호르무즈 해협이 가까워지면서 오가는 유조선들이 많아졌다. ‘BERGESEN D.Y. TANKER’ ‘STAVANGER BERGE KING’ 따위의 선명(船名)을 쌍안경으로 읽을 수 있을 만큼 1해리 이내로 가깝게 스치기도 했다.
 
  오전 10시 동해2호는 시리섬 남쪽 12해리 해상을, 오후 2시에는 부무사섬 남쪽 12해리 해상, 오후 4시에는 툰브섬 12해리 바깥을 지나 호르무즈 해협을 향해 다가갔다. 이 세 섬은 모두 이란령.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이란 정부는 어떤 선박들도 이들 섬에서 12해리 안쪽으로 들어와선 안 된다고 경고, 종전의 항로가 약 30해리쯤 남쪽으로 붙게 되었다. 이 바람에 한국 유조선들은 왕복 80해리, 기름값으로 환산하면 1000만원어치의 거리를 더 항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이들 탱커 선원들에게 끼친 영향은 보험료가 전쟁 지역 적용을 받게 된 것, 또한 1000만원이나 일곱 시간쯤의 손해뿐이 아니다. 동해2호의 브리지에는 바레인 무선국(局)이 보낸 항행 경보가 붙어 있었다. “북위 29도3분 이북으로 들어가는 배는 이라크 해군이 부설한 기뢰에 신경을 쓰도록 하라.”
 
  이덕인 선장은 그 전해 두 번 동해1호를 몰고 이란의 원유 적출항 카그아일랜드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쌍용정유에 갖다줄 기름을 싣기 위해서.
 
  “으스스하더군요. 밤에는 항해등까지 완전히 끄도록 합디다. 이란 측의 대공(對空) 포화가 이라크 전투기를 향해 터져 나가는 것이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휘황하였습니다. 공습으로 부서져 새까맣게 탄 항만 시설과 유조선도 보았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선원들은 전쟁위험수당을 받게 됩니다.”
 
  1981년 6월에는 파나마 선적의 3만t급 화물선이 PG 북단의 이란령 호메이니항 부근에서 이라크 공군의 공습을 받고 침몰했다.
 
  동해2호가 ‘세계의 목구멍’ 호르무즈 해협으로 기어든 것은 이날 저녁,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2월의 밤 기온은 섭씨 30도를 약간 밑돌고 있었다. 이 선장은 해협 통과를 1등항해사에 맡겨 두고 배의 사령탑인 선교에는 올라오지도 않았다. 지도에는 잘록한 목구멍처럼 그려져 있으나 동해2호는 여전히 수평선으로 둘러싸인 원의 중심을 달리고 있었다.
 
  저녁 7시, 어둠이 깔린 후덥지근한 바다에 빗발이 가볍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른편 1시 방향으로 거무스름한 섬이 나타난 것은 이 무렵. 호르무즈 해협의 가장 좁은 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섬은 셋으로 분리되어 그 자태를 드러냈다. 맨 끝에 있는 섬에서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탐조등처럼. 그때마다 세 개의 섬들은 형광을 발하듯 잠시 그 윤곽을 또렷이 보여 주곤 다시 어슴푸레한 어둠에 묻혔다.
 
  맨 첫째 섬, 곧 그레이트 쿼인은 부산의 아치섬과 모양이나 크기가 거의 같은 반월형의 돌섬이었다. 두 번째 섬, 갭아일랜드(키슘)는 오륙도처럼 이등변삼각형으로 뾰족 솟아 있었다. 등대가 있는 마지막 섬, 리틀 쿼인은 세 형제섬의 막내같이 금방이라도 바닷속으로 잠길 것처럼 나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그 앞에는 섬보다 더 큰 슈퍼탱커 한 척이 판잣조각처럼 납작하게 하체를 잠근 채 가는지 멈추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련스럽게 떠 있었다. 항구의 불빛을 떠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둑한 해면(海面) 위를 쓸고 가는 등대의 불빛은 어떤 안도감과 함께 인간의 숨소리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뭍에서 ‘구경하는’ 등대의 하얀 건조물과는 판이한 느낌이었다.
 
 
  괴기스러운 해안 절벽
 
  칠흑의 바다에서 선박과 인간의 존재, 그리고 온 길과 갈 길을 ‘확인시켜 주는’ 뚜렷한 징표로서 등대는 암초 위에 굳건히 박혀 있었다. 최 1항사는 리틀 쿼인 등대를 기준하여 동해2호의 정확한 위치를 내고 있었다. 인공위성과 자이로콤파스가 수시로 이 배의 위치, 속도, 침로를 확인시켜 주고는 있었지만, 땅을 딛고 있는 등대만큼 확실한 위치 계산의 근거는 없는 법이다. 이 리틀 쿼인 등대는 유조선 선원들에게 긴장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 주는 PG의 관문(關門)으로서 귀에 익은 이름이 되었다. 이 세 섬을 지금 이란이 영유하고 있으므로 미군은 호르무즈 해협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기가 어렵다.
 
  “기름을 실으러 들어갈 때 리틀 쿼인을 지나면 바짝 정신이 차려지지요. 이제는 PG다. 기름을 실을 준비가 다 되었나,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긴장의 상징이 저 등대지요. 귀항길에 저놈을 지나가면 비로소 우리가 울산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실감을 갖게 됩니다.”
 

  최 1항사는 약간 들뜬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리틀 쿼인을 통과하면 유조선에서 본사로 위치 보고를 한다. 울산 귀항 날짜가 서울 본사에서 유조선으로 하달되는 것도 이 무렵. 이번에도 귀항 날짜는 리틀 쿼인 통과 직전 서울에서 날아왔다.
 
  “2월 21일 오전 8시까지 울산에 입항하라.”
 
  스무 날 뒤라는 귀항 날짜가 선원들에게 알려진 이날 선내(船內) 분위기는 한결 설레고 있었다. 가족과 만날 확실한 날짜, 막연한 희망이 아닌 구체적인 기대감의 근거가 생긴 때문이다. 기관부원들은 갑판부원들을 만나면 입버릇처럼 “싱가포르는 언제 통과하냐?”고 묻고 있었다. 인도양의 최북단에서 6000해리 저편에 있는 울산항을 꿈꾸기는 스스로 외람되다고 생각했는지 그 중간쯤 되는 싱가포르에다가 희망의 중간 지점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덕인 선장은 항해장인 2항사에게 “속도별로 싱가포르 통과 시간을 계산하되, 낮에 통과할 수 있도록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선장은 벌써부터 말라카 해협 통과에 대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3형제섬’
 
  리틀 쿼인 등 3형제섬은 이란령인데 호르무즈 해협에서도 전략상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다. 오일로드는 여기서 너비 7.5해리의 항로로 좁혀져 이 3형제섬에서 북쪽으로 불과 4해리 떨어진 해협을 지나간다. 너비 7.5해리의 항로는 너비 2.5해리의 중앙분리선에 의해 양쪽으로 갈라진다. 북쪽의 너비 2.5해리 항로는 PG로 들어가는 배가, 남쪽의 너비 2.5해리 항로는 PG를 빠져나오는 배들만이 이용할 수 있다(배는 우측 통항이 원칙). 통항 분리는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해사기구(IMO)가 설정한 것으로, 통항량이 많은 도버 해협, 발트해, 말라카 해협 등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나는 선실에서 자다가 창문을 통하여 호르무즈 해협의 이란 쪽 해안 절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밤이어서 더 괴기스러운 바위 절벽이었다. 바다와 절벽의 검푸른 색깔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로써 나는 전쟁 중 20만t의 원유를 실은 유조선을 타고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최초의 한국 기자가 된 것이었다.
 
 
  “처자식 생각하면 담배 한 개비도 아깝다”
 
  리틀 쿼인을 지나 동해2호가 ‘불의 바다’ PG를 하직하고 인도양의 최북단인 오만만으로 접어든 날 저녁, 선내에는 활기가 돌고 있었다. 외지(外地)수당과 초과근무수당이 지급된 때문이었다. 총무 역할을 하는 통신장 안장열(34)씨가 수당 명세서와 함께 돈을 내주었다. 본봉은 육상에서 가족들이 대신 받기 때문에 탱커 선원들이 돈을 만지는 것은 이때뿐. 보통 선원들은 5만~10만원의 수당을 받았는데 선내 매점에서 사 쓴 물건값은 공제되었다. 매점에서는 담배, 맥주, 콜라, 소주, 양주를 면세로 팔고 있었다. 24개가 든 깡통 맥주 한 상자는 5500원, 콜라는 5900원, 거북선 담배 열 갑이 2500원, 양주 한 병이 5000원.
 
  수당 명세서를 보니 선원 35명 가운데 여섯 명은 외상 실적이 전혀 없었다. 온몸의 골조가 통뼈로 된 듯 완강하게 생긴 펌프맨 김무씨는 “처자식 생각하면 담배 한 개비도 아깝다”고 하면서 유조선 선원들만큼 돈을 짜게 쓰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상륙할 곳이 없어서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동해2호에서는 점심 식탁에 싱가포르에서 통선으로 조달한 오렌지를 하나씩 내놓고 있었다. 나는 오렌지가 나온 날 보통선원 식당에 들렀다가 그들의 식탁에는 그것이 빠져 있는 걸 보고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윤 기관장에게 넌지시 “사관들 식사와 선원들 식사가 다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 차별 하다간 반란이 일어나라고요?”라고 그는 내뱉었다.
 
  그러면 오렌지는 어디로 갔는가? 며칠 뒤 의문이 풀렸다. 조타수 주문길(40)씨가 말했다.
 
  “그 오렌지는 조 부장님도 맛보셨겠지만 국산과는 달리 참 달지 않습니까? 우리 선원들은 그걸 먹지 않고 식당 냉장고에 모아 둡니다. 울산에서 내릴 때쯤 되면 이삼십 개는 되지요. 그걸 집에 갈 때 가져갑니다. 명색이 중동에 갔다 오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고, 그래서 외제 오렌지로 때우는 거죠. 이 배의 보통선원들은 혼자서는 오렌지를 아무도 안 먹습니다. 자식이란 것이 뭔지….”
 
  양정모 선수와 함께 레슬링을 배웠다는 기관수 백평호, 제주도의 이름난 역도 선수였다는 갑판원 변기찬, 집안에서 대대로 역사(力士)들이 나왔다는 김무씨 등 험상궂고 무심하게만 보이는 선원들이 노란 오렌지가 든 선물 보따리를 감싸안고 집으로 들어서는 광경을 상상하니 나의 무딘 가슴 한구석도 얼얼해 왔다.
 
  수당이 지급된 날 밤 선원 휴게실과 사관 휴게실에선 ‘새잡이(고스톱)’가 벌어졌다. 다음 날 아침에 결과를 물어보니 선원 쪽은 기백원, 사관 쪽은 기천원을 상한으로 하여 얘기되고 있었다. 선내의 화투는 심심풀이가 목적, 뭍의 10분의 1 단위도 안 되는 판돈은 그저 구색으로 맞춘 것에 불과한 듯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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