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발굴

포항제철 신화를 도운 일본인들

“배우려는 집념이 무서울 정도였다”

  •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n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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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포철 건설 도운 일본인 기술자들의 《포항제철 건설 회고록 - 한국 기술협력 요보세요회(ヨボセヨ会) 기록》
⊙ “당신도 영원한 포스코 사람입니다”… 20년 만에 돌아온 일본 기술자의 눈물
⊙ “전후 22년 만의 첫 한국 방문은 공기 자체가 긴장이었다”(아리가 도시히코)
⊙ “소주 4병을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의 진심이 들리기 시작했다”(이나자키 고지)
⊙ 박정희 대통령, 일본 기술단장에게 훈장 달아주며 일본어로 “오랜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1973년 6월 9일 포항 1고로에서 첫 쇳물이 터져 나오자 박태준 사장을 포함한 포항제철 임직원들과 일본인 기술자들은 함께 만세를 외쳤다. 사진=포스코
오늘날 포항 영일만을 수놓는 거대한 제철소의 불빛은 대한민국 근대화의 심장박동과도 같다. 우리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기치 아래 박태준(朴泰俊·1927~2011년)이라는 거인이 일궈낸 이 기적을 ‘영일만의 신화(神話)’라 부르며 찬양해 왔다.
 
  이 신화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겨보면, 뜨거운 고로(高爐)의 열기 속에서 우리 노동자들과 어깨를 맞대고 기술적 가교(架橋) 역할을 했던 ‘이방인’들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난다. 바로 일본 철강 산업의 심장부인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과 일본강관(NKK)에서 건너온 기술진이다.
 
  1968년, 자본금 8억원과 단 40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포스코(POSCO)가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이면에는 기술을 전수하고 시스템을 이식했던 일본 엔지니어들의 헌신이 있었다.
 
 
  ‘요보세요’는 한일 간 ‘협력의 첫마디’
 
 
《포항제철 건설 회고록》.
《월간조선》이 입수한 《포항제철 건설 회고록 - 한국 기술협력 요보세요회(ヨボセヨ会) 기록》(1997년 5월 발간. 이하 ‘회고록’)은 정치적 수사(修辭)를 걷어낸 채, 가장 뜨거웠던 건설 현장의 생생한 육성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모임의 명칭인 ‘요보세요(ヨボセヨ)회’는 한국어 호출어인 “여보세요”를 일본식 가타카나로 표기한 데서 유래했다. 당시 일본 내에서 이 용어는 재일한국인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으나, 영일만 현장의 일본 기술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그들에게 ‘요보세요’는 거친 현장에서 한국 동료들을 부르며 소통했던 ‘협력의 첫마디’이자, 국경을 넘어 뜨거운 땀방울을 나눴던 이들의 연대감(連帶感)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이 기록은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불가능에 도전했던 두 나라 기술자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우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회고록 속 일본인 기술자들의 기록은 의외로 담담하다. 감격도 원망도 절제된 문장들. 그러나 그 담담함 뒤에는 당시 현장의 치열함이 켜켜이 배어 있다.
 
  “잠을 자도 귀에서는 계속 쇳소리가 들렸다.”
 
  “실패하면 모두 끝이라는 분위기였다.”
 
  “한국 노동자들의 집념에 놀랐다.”
 
  짧고 무심한 듯한 기록들이지만, 그 안에는 영일만의 차가운 바닷바람과 용광로의 뜨거운 열기, 그리고 산업화 초기 한국 사회 전체를 짓누르던 절박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1973년 6월 8일 오전 10시30분.
 
  포항 영일만의 거친 바닷바람도 그날의 열기만큼은 식히지 못했다. 수백 명의 엔지니어와 노동자들이 쏟아내는 가쁜 숨소리는 회색 철골(鐵骨) 구조물 사이로 흩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제1고로의 출선구(出銑口)에 고정된 그때,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이 정적을 깨뜨렸다.
 
  “붓는다! 드디어 붓는다!”
 
  화염(火焰)을 삼킨 고로가 육중한 진동과 함께 붉은 선혈(鮮血) 같은 쇳물을 토해냈다. 대한민국 제철 역사상 첫 ‘성공’의 신호탄이었다. 이는 단순한 산업 시설의 가동을 넘어, ‘제철보국’이라는 일념 하나로 모래바람을 견뎌온 이들이 일궈낸 기적이었다. 이날 영일만에서 시작된 고로의 심장박동은 이후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엔진이 되어 전 세계를 누비는 자동차와 배, 가전(家電)제품의 뼈대가 되었다.
 
  현장의 이들에게 그날은 단순한 공정(工程)의 완성이 아니었다. 수년간 이어진 불면(不眠)의 밤, 기술적 한계라는 벽 앞에서 무너질 듯 버텨온 날들, 그리고 “자본도 기술도 없는 나라가 무슨 제철이냐”는 세간의 비아냥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길어 올린 처절한 ‘증명’의 순간이었다. 마침내 붉은 쇳물이 고로를 가득 채웠을 때, 현장을 뒤덮은 것은 뜨거운 열기만이 아니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국가적 자존심이 그 쇳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오늘날 영일만을 밤새 밝히는 제철소의 불빛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살아 있는 상징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일만의 신화’라 부른다. 그리고 그 신화의 중심에는 ‘철강왕(鐵鋼王)’ 박태준이라는 거인이 서 있다. 맨주먹으로 모래벌판에 용광로를 세운 사내, 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겠다고 선언했던 ‘우향우(右向右) 정신’의 주역. 그의 이름은 한국 현대사에 가장 굵은 글씨로 새겨졌다.
 
 
  납빛 서울의 풍경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의 채화식 모습. 사진=포스코

  그러나 거대한 역사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이름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고로의 열기 속에서 한국 노동자들과 어깨를 맞대고 밤을 지새웠던 이방인들. 바로 신일본제철과 일본강관에서 파견된 기술진, 이른바 ‘JG(Japan Group)’ 단원들이다.
 
  시간을 1967년 겨울로 되돌려보자. 당시 후지제철 해외플랜트 부장이던 아리가 도시히코(有賀敏彦)가 김포공항 활주로에 발을 디딘 순간,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서울의 풍경은 훗날 회고록에 남긴 표현처럼 “납빛”이었다. 전쟁의 폐허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도시. 거리 곳곳에는 가난과 긴장이 뒤섞여 있었고, 일제(日帝) 시대의 기억은 아직 사회 깊숙이 남아 있었다. 일본어는 함부로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언어였다. 공항 안내 방송은 한국어와 영어만 흘러나왔고, 일본인 방문객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낮췄다. 아리가는 훗날 “전후(戰後) 22년 만의 첫 한국 방문은 공기 자체가 긴장이었다”고 회상했다.
 
  그해 연말, 모든 일은 도쿄 사무실로 찾아온 몇 명의 한국인 방문객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이 내민 명함에는 ‘대한민국 종합제철건설추진위원회 ○○○○’이라는 긴 직함이 적혀 있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철강업계에 협력을 요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국제사회의 시선은 냉담했다. 세계은행(IBRD)은 “한국은 일관(一貫)제철소를 운영할 경제력과 기술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부정적 판단을 사실상 굳히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 기술진 중심으로 추진되던 국제 컨소시엄 ‘KISA 계획’ 역시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 속에 표류하고 있었다. 한국 내부에서도 회의론이 거셌다. “농업국가가 무슨 제철소냐” “굶는 나라에서 철강은 사치”라는 말이 공공연히 오갔다.
 
 
  “도면과 의지밖에 없던 회사”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리가는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 명동 대한중석 본사 사장실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박태준이었다.
 
  아리가는 조심스럽게 영어로 첫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 순간 박태준이 유창한 일본어로 말을 건넸다.
 
  “일본어로 말씀해 주십시오.”
 
  짧은 한마디였지만, 얼어붙어 있던 공기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일본 유학 경험이 있었던 박태준은 일본 기술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군인 출신 특유의 결단력과 함께 기술과 산업 논리의 이해를 가진 보기 드문 경영인이었다. 무엇보다 “철 없이는 산업화도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날 밤 이어진 술자리에서 박태준은 자신의 구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철강 산업을 일으키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영원히 남의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연간 예산 규모는 약 3억6000만 달러 수준. 그러나 포항제철 건설에는 약 2억 달러가 필요했다. 국가 예산 절반이 넘는 돈을 단일 산업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셈이었다. 무모하다는 평가가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초기 포항제철은 자본금 8억원, 직원 40여 명 남짓의 작은 조직에 불과했다. 일본 기술자들은 훗날 이를 두고 “도면과 의지밖에 없던 회사” “종이 위에서만 존재하던 프로젝트”라고 회고했다.
 
  세계은행은 등을 돌렸고, 해외 전문가들도 냉소적이었다. 미국·유럽 중심의 KISA 계획 역시 사실상 좌초 수순에 들어갔다.
 
  결국 박태준은 방향을 일본으로 틀었다. 그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전 총리),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전 총리),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寛·신일본제철 회장, 일본경제단체연합회장) 등 일본 정·재계 핵심 인사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다.
 
  일본 내부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기술을 넘겨주면 미래의 경쟁자를 키우는 것 아니냐”는 이른바 ‘부메랑 효과론’이 거세게 제기됐다. 일본 철강업계 일각에서는 한국의 제철소 건설 자체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경영진은 “식민지 시대 이후 한일 관계를 고려할 때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록’은 기억한다.
 
  박태준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세 가지 원칙을 내걸었다.
 
  첫째, 인사(人事)는 회사가 책임진다.
 
  둘째, 정치 헌금은 하지 않는다.
 
  셋째, 자재 조달은 회사가 직접 한다. 당시 한국의 국가 주도 사업 관행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정치권 낙하산 인사를 차단하고, 관료 개입을 최소화하며, 공사를 효율 중심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의지였다. 일본 기술자들은 훗날 “포항제철이 정치와 행정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한국인들, 열악한 환경임에도 “반드시 해낸다” 투지 보여
 
1970년 4월 1일 거행된 포철 1고로 공사 착공식. 오른쪽부터 김학렬 부총리,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이 버튼을 누르고 있다.

  1971년 1월, 대한(大寒)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일본 기술진이 마주한 포항은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모래벌판이었다. 바닷바람은 살을 에듯 거칠었고, 현장엔 제대로 된 기반 시설조차 없었다. 숙소에는 변변한 목욕 시설도 없었으며, 임시 가설 건물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렸다. 생활환경 역시 쉽지 않았다. 식탁에는 매일 마늘과 고추 냄새가 강한 한국 음식이 올라왔고, 언어 장벽은 늘 문제였다.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인과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인이 거대한 설비 도면 위에 연필로 선을 긋고, 손짓과 몸짓으로 의사를 전달해야 했다. 때로는 단어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 공정 전체가 멈춰 서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기술자들을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열악한 환경 자체가 아니었다. 그들을 진짜 당황하게 만든 것은, 실패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아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자금은 부족했고 경험도 없었으며 국제사회의 시선도 냉담했다. 이럼에도 현장의 한국인들은 “반드시 해낸다”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아리가는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것이 당시 한국인들의 무서운 점이었다.”
 
 
  “겐차나요(ケンチャナヨ)”
 
  포항 영일만의 거센 모래바람 속에서 일본 기술자들이 가장 먼저 익힌 한국어는 의외로 “안녕하세요”가 아니었다. 그들이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은 “괜찮아요”였다. 일본 기술진은 그 표현을 일본식 발음으로 “겐차나요(ケンチャナヨ)”라고 기억했다.
 
  약속 시각이 조금 늦어져도 “괜찮아요”.
 
  도면 수치에 약간 오차가 생겨도 “괜찮아요”.
 
  작업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해도 “괜찮아요”.
 
  전후 일본의 중공업 현장을 꾸리며 혹독한 품질관리 문화가 몸에 밴 엔지니어들에게 이 말은 낯설고 불안한 신호였다. 당시 포항제철 건설 현장은 단순한 공장이 아니었다. 수천 도의 쇳물이 흐르고, 초대형 압력 설비와 가스 배관이 얽혀 있는 초정밀 산업 시스템이었다. 단 하나의 볼트, 단 1mm의 오차(誤差)가 수천억원 규모의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후지제철 해외플랜트 책임자였던 아리가 도시히코는 회고록에서 이 장면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의 눈에 “괜찮아요”는 단순한 생활 언어가 아니었다. 산업화 초기 한국 사회에 남아 있던 느슨한 작업 관행의 상징처럼 보였다.
 
  “제철소는 ‘대충’으로 움직이는 시설이 아니다. ‘이 정도면 된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고방식이었다.”
 
  실제로 일본 기술자들은 현장 곳곳에서 긴장했다. 규격보다 약간 덜 조여진 볼트, 미세하게 어긋난 배관 축, 작업 순서를 생략하려는 습관 하나까지… 그들에게는 잠재적 위험 요소였다. 당시 일본 철강업계는 이미 수십 년간 축적된 품질관리와 안전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막 중화학공업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한 단계였다. 양국 기술자들 사이에는 기술 수준의 차이뿐만 아니라 산업 문화 자체의 간극 또한 존재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적당주의’를 가장 격렬하게 거부한 인물이 일본인이 아니라 박태준이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제강공장 철골 구조물 점검 과정에서 일부 볼트가 완전히 체결되지 않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미 공정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다. 현장을 다시 뜯어내면 공기는 지연되고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었다. 당시 포항제철은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프로젝트였다. 하루 지연이 곧 막대한 손실이었다. 현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정도는 넘어갈 수 있지 않으냐”는 분위기도 감돌았다. 그러나 박태준의 반응은 단호했다.
 
  “전부 풀어. 처음부터 다시 조여.”
 
  순간 현장 관계자들은 말을 잃었다. 이미 세워진 철골 구조물을 다시 해체한다는 것은 사실상 공사를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과 다름없는 결정이었다. 수만 개의 볼트를 다시 점검하고 재조립해야 했다. 공기 지연과 비용 손실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박태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일본 엔지니어 고야마 다다시(幸山 正)는 훗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평화와 안정에 익숙해져 있던 일본 기업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군대식 완벽주의에 가까웠다.”
 
 
  日 기술 시스템과 韓 압축 성장 방식의 융합
 
  실제로 당시 일본 기술자들 사이에서는 포항제철 현장 지휘부를 두고 ‘롬멜의 오두막’이라는 별칭까지 돌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야전사령관 에르빈 롬멜처럼, 박태준과 현장 간부들이 사무실보다 공사판을 더 중시하며 직접 현장을 누볐기 때문이다. 사무실 책상보다 먼지 날리는 공사 현장에서 결정을 내리는 문화, 보고서보다 실물을 먼저 확인하는 방식은 일본 기술진에게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기술자들이 처음에는 불안하게 바라봤던 한국식 현장은 시간이 흐르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로 대표되던 느슨함은 점차 사라졌고, 대신 타협 없는 품질관리와 속도전이 결합된 독특한 산업 문화가 형성됐다. 일본의 기술 시스템과 한국 특유의 압축 성장 방식이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충돌하고 융합한 결과였다.
 
  그리고 일본 엔지니어들은 훗날 회고했다. 포항제철이 단순히 일본 기술을 ‘이식(移植)’한 공장이 아니었다고. 오히려 극한의 절박함 속에서 한국식 실행력과 일본식 정밀함이 결합하며 전혀 새로운 생산 문화를 만들어낸 공간이었다고.
 
  ‘겐차나요’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순간, 바로 그때부터 영일만의 신화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옥의 자갈층과 ‘제트 수류 공법’
 
  포항 영일만의 공사 현장은 전쟁터였다. 설계도가 있음에도, 적혀 있지 않은 변수들이 모래바람처럼 밀려들었다.
 
  열연공장 부지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현장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사고가 발생했다. 콘크리트 말뚝이 지하 깊숙이 박혀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단단한 자갈층에 걸려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것이었다. 수십 개의 말뚝이 지표 위로 5m 가까이 삐죽삐죽 솟아오른 광경은 마치 거대한 철기둥 숲 같았다고 당시 관계자들은 회고한다.
 
  공사는 멈췄고 일정은 밀렸다. 현장에는 초조함이 번졌다. 당황한 한국 측 담당자들은 일본 기술자 하기와라 요시오(萩原義夫)를 찾아왔다.
 
  “문제없다는 확인 서명만 해주십시오.”
 
  하기와라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원인을 해결하기보다 일단 공정을 얼렁뚱땅 넘기려는 접근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일본 중공업 현장에서 품질 보증 서명은 사실상 기술자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훗날 “당시엔 문화적 충격에 가까웠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비난보다 필요한 것은 해결책이었다.
 
  하기와라는 과거 일본 항만 공사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강관 끝 노즐로 초고압수를 분사해 자갈층을 무너뜨리는 방식, 이른바 ‘제트 수류 공법’이었다.
 
  곧바로 시험이 시작됐다. 첫 번째 시도. 말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세 번째. 네 번째.
 
  현장 공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실패가 반복될수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수가 사라졌다. 만약 이 공법이 실패한다면 공정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할 판이었다. 이어진 다섯 번째 시도.
 
  굉음과 함께 거대한 콘크리트 말뚝이 갑자기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내려앉기 시작했다. 순간 현장에서 함성이 터졌다. 흙먼지와 기름투성이가 된 작업자들이 서로 등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는 헬멧을 벗어 허공으로 던졌고, 누군가는 털썩 주저앉은 채 웃었다.
 
  그날 이후 일본 기술자들은 포항 현장을 단순한 공사장이 아니라 ‘즉흥과 창조가 뒤엉킨 거대한 실험실’로 기억하게 됐다.
 
  영일만에서는 설계가 현장에서 수정됐다. 기술은 책상 위가 아니라 모래벌판에서 완성됐다.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달려들어 몸으로 답을 만들었다. 오늘 실패한 방법은 내일 새로운 공법이 됐다. 당시 포항제철 건설은 단순한 산업 프로젝트가 아니라, 산업화 경험이 거의 없던 나라가 현장 자체를 학교 삼아 기술 문명을 체득해 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여기에 일본 기술자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한국인들의 학습 속도였다. 낮 동안 일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던 한국 기술자들이 밤이면 사전을 펼쳐 들고 기술 용어를 하나씩 번역했다. 일본어로 진행된 회의가 끝나면, 다음 날 아침에는 정리된 한국어 회의록이 일본 기술진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누군가 밤새 번역 작업을 했다는 뜻이었다.
 
  회고록 곳곳에는 비슷한 표현이 반복된다.
 
  “배우려는 집념이 무서울 정도였다.”
 
  “기술 흡수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한 번 익힌 것은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화입식 전날 발생한 비상사태
 
  1973년 6월 8일. 마침내 대한민국 산업화의 운명을 가를 ‘화입(火入)’의 날이 밝았다.
 
  전날 밤 박태준은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불씨를 붙이는 ‘채화식(採火式)’이었다. 인공의 불이 아닌 하늘의 불씨로 고로를 깨운다는 상징적 의식이었다.
 
  그러나 낭만적인 상징과 달리 현장의 현실은 극도의 긴장 그 자체였다. 예비 설비는 충분치 않았다. 운영 경험도 없었다. 누구도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 고로가 정상적으로 가동될 것이라 장담하지 못했다. 실패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공장 사고가 아니라 국가적 좌절이었다.
 
  그리고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화입 후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원료 컨베이어 벨트가 쇳조각에 걸려 찢어져버린 것이다. 송풍(送風)이 장시간 멈추면 고로 내부 반용융(半熔融) 상태의 쇳물이 그대로 굳어버릴 수 있었다. 이는 곧 수천억원 규모 설비의 폐기를 뜻했다.
 
  뜻하지 않은 비상사태에 관계자 모두 분주히 움직였다.
 
  “휴풍(休風)은 몇 시간까지 가능합니까?”
 
  정비 책임자의 다급한 질문에 일본인 고로 기술자 우노 나루키(宇野成紀)가 짧게 대답했다.
 
  “2시간 안에 복구해야 합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기계 고장이 아니었다. 포항제철의 운명이 달린 싸움이었다.
 
 
  “이 사람들은 아직 서툴 뿐이다”
 
  곧 한국 노동자들이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기름 범벅이 된 손으로 찢어진 벨트를 이어 붙이고, 쇳조각을 걷어냈다. 누군가는 맨손으로 뜨거운 철판을 밀어냈고, 누군가는 허리까지 기름에 젖은 채 컨베이어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현장 곳곳에서 고함과 쇳소리가 뒤엉켰다.
 
  “끌어!”
 
  “조여!”
 
  “빨리 돌려!”
 
  시간은 초 단위로 흘러갔다. 그리고 기적처럼, 정확히 2시간 만에 설비 복구가 완료됐다.
 
  다음 날 아침.
 
  마침내 첫 쇳물이 붉은 강물처럼 고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순간 현장은 울음과 환호로 뒤섞였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고, 누군가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그 순간만큼은 국적도 과거도 잠시 잊었다.
 
  물론 시행착오는 계속됐다. 초기 조업 단계에서는 쇳물과 슬래그(불순물 찌꺼기)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슬래그까지 제강용 국자에 담아버리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자석에 붙지 않는 쇳덩이가 나오자 현장은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일본 기술자 나카가와 요시오(中川美男)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확신하게 됐다.
 
  “이 사람들은 아직 서툴 뿐이다. 하지만 가르쳐주면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함께 살아낸 공간’
 
1974년 12월 포스코 현장에 수출 1억 달러 달성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사진=포스코

  포항의 기억은 거대한 고로와 붉은 쇳물만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일본인 기술자들의 회고록 곳곳에는 철 냄새 사이로 사람 냄새가 배어 있다. 낮이면 영일만의 거센 해풍과 모래 먼지 속에서 철골과 씨름했고, 밤이면 국적과 직급을 잠시 내려놓은 채 허름한 식당에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전쟁 직후의 가난과 냉전의 긴장 속에서 시작된 포항제철 건설 현장은 이렇게 조금씩 ‘함께 살아낸 공간’으로 변해갔다.
 
  일본 기술자들은 포항 사택에 머물며 한국인 직원들과 뒤섞여 생활했다. 언어도 서툴렀고 문화도 낯설었지만, 술자리에서만큼은 늘 시끌벅적했다. 작업복에 쇳가루를 묻힌 채 마주 앉아 소주병을 돌리다 보면 어색함도 조금씩 허물어졌다. 후지제철의 이나자키 고지(稲崎宏治)는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소주 4병을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의 진심이 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포항의 술자리는 단순한 회식이 아니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자리에서 기술이 오갔고, 현장의 불만과 고민이 풀렸으며, 서로의 삶이 공유됐다. 술에 취한 일본인 기술자를 한국인 직원이 등에 업고 사택까지 데려다주는 일도 흔했다. 그중 한 사람이 압연부 소속의 김종진이었다. 훗날 그는 포항제철 출신 철강 전문경영인으로 성장한다. 당시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영일만의 허름한 선술집에서는 이미 차세대 철강인들의 인맥과 신뢰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보신탕의 충격
 
  포항 생활은 일본인들에게 낯선 문화의 연속이었다. 음식도 예외가 아니었다. 구마자와 마사루(熊澤 勝)는 1978년 여름 처음 접한 보신탕의 충격을 또렷하게 기록했다. 뚝배기 안에 담긴 짙은 국물과 고기를 본 순간 선뜻 수저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한참 동안 주변 눈치만 보다가 겨우 한 숟갈을 떠먹었고, 특유의 향 때문에 얼굴까지 찌푸렸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며칠 뒤 그는 다시 그 식당을 찾았다.
 
  “먹고 나면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포항은 단순한 해외 근무지가 아니었다. 낯선 음식과 언어, 거친 공사 현장, 술잔과 인간관계 속에서 그들은 한국 사회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었다. 회고록에는 새벽 포장마차에서 한국 노동자들과 어깨동무한 채 노래를 불렀다는 기억도 남아 있다. 어떤 이들은 한국 생활을 “가장 힘들었던 시절”로 기록했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으로 살았던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장기 파견은 삶 자체를 바꾸어놓기도 했다. 어떤 기술자들은 한국에서 사랑을 만났고, 어떤 이들은 귀국 명령과 함께 그 사랑을 남겨둔 채 떠나야 했다. 회고록 속 한 장면은 특히 처연하다.
 
  귀국을 앞둔 한 일본인 기술자가 부산 부관연락선 안벽에 서 있었다. 회색 선체가 천천히 부두를 떠나자, 방파제 끝에 서 있던 한 여성이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바닷바람 속에서 그녀의 실루엣은 점처럼 작아졌지만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동료가 조용히 물었다.
 
  “괜찮습니까?”
 
  한동안 침묵하던 그는 술기운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녀에게 전부 주고 왔습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포항제철 건설 회고록 - 한국 기술협력 요보세요회(ヨボセヨ会) 기록》은 단순한 산업 건설사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의 기록과 함께, 낯선 땅에서 청춘을 바친 사람들의 우정과 갈등, 사랑과 이별, 자부심과 고독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거대한 고로와 압연기 뒤편에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당신도 영원한 포스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다. 1978년 제3고로 화입식이 열린 영일만은 다시 한 번 긴장과 환희로 들끓었다. 붉은 화염이 거대한 고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육중한 설비가 진동하기 시작하자 현장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일본 측 기술단장 가슴에 직접 훈장을 달아주었다. 그러고 조용한 일본어로 짧게 말했다.
 
  “오랜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불과 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일본 기술자들에게 그 말은 오래 남았다. 식민지와 전쟁의 기억을 넘어, 함께 쇳물을 만들어낸 세월에 대한 일종의 승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회고록 속 일본인 엔지니어들은 그 순간을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듯했던 시간”이라고 적고 있다.
 
  1960~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일본인은 결코 편한 존재가 아니었다. 거리에는 식민지 시대의 기억이 남아 있었고,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이런 시대에 일본 기술자들은 포항의 모래바람 속에서 한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철골을 세우고, 설비를 조정하고,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견뎌냈다. 오해와 충돌도 있었지만, 현장은 결국 국적보다 공정 일정이 우선인 공간이었다.
 

  이로부터 약 20년 뒤인 1995년. 백발이 성성해진 일본 기술자들이 다시 포항을 찾았다. 그들이 처음 도착했던 영일만은 허허벌판에 가까운 황량한 모래사장이었다. 바닷바람만 거세게 몰아치던 그 땅 위에는 이제 거대한 제철 도시가 들어서 있었다.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고로의 불빛, 끝없이 이어지는 압연 라인, 쉼 없이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는 더 이상 ‘개발도상국의 실험’이 아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 생산 기지였다.
 
  야마네 시게하루(山根重春)는 그날 옛 한국 동료에게서 작은 선물을 받았다. 오래 사용해 빛이 바랜 포스코 배지 하나였다.
 
  한국인 엔지니어는 조용히 말했다.
 
  “일본의 기술과 마음은 아직도 이곳 포항에 남아 있습니다. 당신도 영원한 포스코 사람입니다.”
 
  순간 야마네는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회고록에는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는 짧은 문장만 남아 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며 일했다”
 
  회고록 전체에는 묘한 정서가 흐른다. 거대한 산업화를 함께 만들어냈다는 자부심, 청춘을 바쳤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세월 속에 점점 잊혀간다는 쓸쓸함이다. 자신들이 피와 땀으로 세운 공장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정작 그 현장을 함께 버텨낸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고록을 기획한 아리가 도시히코는 말년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이 시절을 단순히 ‘유착(癒着)’이라 규정하며 지우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파견단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모욕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며 일했습니다.”
 
  물론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일본 측 인사들이 남긴 회고라는 한계를 갖는다. 당시 한국 산업화 과정의 권위주의, 노동 착취 논란, 군사 정권의 강압적 동원, 대일(對日) 기술 의존 문제 등은 다뤄지지 않았다. 당연히 무조건적인 성공 신화나 미화된 우정담으로만 읽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오늘도 영일만의 고로에서는 붉은 쇳물이 쉼 없이 흘러나온다. 그 쇳물 속에는 이름 없이 사라져 간 한국 노동자들의 땀과 함께, 머나먼 타국의 모래바람 속에서 청춘을 바쳤던 일본 기술자들의 시간 역시 합금(合金)처럼 녹아 있다. 그들이 남긴 가장 오래가는 유산은 어쩌면 제철 기술이 아닐지도 모른다. “철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영일만의 파도는 여전히 단순한 진실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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