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교생 158명 중 125명(중복 수상 포함)이 전국 규모 글짓기대회 입상
⊙ 작가·PD 등 창의력 요하는 직업 꿈꾸게 된 아이들
⊙ 가을엔 시화전, 졸업할 때는 문집… 학교의 전폭적 지원이 ‘글쓰기 명문’ 만들어
⊙ 작가·PD 등 창의력 요하는 직업 꿈꾸게 된 아이들
⊙ 가을엔 시화전, 졸업할 때는 문집… 학교의 전폭적 지원이 ‘글쓰기 명문’ 만들어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 위치한 합천여자중학교 전경. 사진=합천여중
경남 합천여자중학교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환한 얼굴로 말하자, 주변 친구들도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국어는 수험생들에게 가장 어렵고 부담스러운 과목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합천여중 학생들에게는 국어 실력을 키우는 특별한 비결이 있다. 바로 ‘글짓기’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얼굴인데, 합천여중은 처음이시죠?”
합천여중에 도착하니, 맞춤형 학교 점퍼와 단정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명랑한 목소리로 다가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지만 이들은 90도로 인사하며 정중하게 기자를 맞았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기자에게 말없이 자신의 우산을 내어 주는 학생도 있었다. 그들의 밝은 웃음과 자연스러운 배려에서 단순한 천진난만함을 넘어 순수함과 예의, 그리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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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여중 ‘무궁무진’ 동아리원으로 활동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 왼쪽부터 이지민, 김다윤, 허희진, 박소연, 김나현 학생. 이하 사진=고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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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여중 ‘무궁무진’ 동아리원들. 뒷줄 왼쪽부터 전다혜, 문옥현, 정다원, 김민주, 앞줄 왼쪽부터 정보민, 류예린, 문정현 학생. |
‘글빛터’ 도서관에서 손으로 李箱 시 필사하는 학생들
합천여중은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 위치한 사립 중학교로, 1966년 학교법인 근화학원에 의해 설립됐다. 지난해에만 전교생 158명 중 무려 125명이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글짓기대회에서 상을 탔다(중복 수상 포함). ‘글짓기 명문’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글빛터’라는 이름의 도서관에는 40명가량의 학생이 모여 각자 활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시를 필사(筆寫)하고 있었고, 어떤 학생은 글을 쓰고 있었다. 모바일 기기를 사용하는 학생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종이에 직접 손글씨로 내용을 작성했다. 요즘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사용이 과도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종이와 펜을 이용한 활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시를 필사하고 있어요. 좋은 시를 따라 쓰다 보면 생각이 깊어지고 정리되는 것 같아요.”
한 학생의 노트를 들여다보니 빽빽하게 채워진 검은 글씨로 여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글씨체는 단정하고 정성스러웠다. 학생이 필사하고 있던 작품은 이상(李箱) 시인의 ‘이런 시(詩)’. 학생의 진지한 표정에서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글짓기 동아리 ‘무궁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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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선 합천여중 교사. |
‘무궁무진’ 동아리 수업은 단순한 독서 시간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김수선(金修仙· 33) 교사와 즐겁게 소통하며 글을 써내려 갔다. 김 교사는 제자들과 장난도 주고받으며 다정한 가족처럼 아이들을 대했다. 이날 아침 기상 악화로 김 교사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들은 누구랄 것 없이 선생님의 건강을 걱정했다. 교사와 제자 간 깊은 신뢰와 애정이 느껴졌다.
합천여중이 본격적으로 글쓰기 명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2023년, 국어 교사 김수선 씨가 부임하면서다. 김 교사는 독서 동아리 ‘무궁무진’을 만들어 학생들의 글쓰기 실력은 물론 사고력까지 키우는 데 힘썼다. 이 모든 수상 실적의 중심에는 김수선 교사가 있다.
“어떤 점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냐”고 묻자 김 교사는 “아이들에게 동아리 활동이 삶의 즐거움이 되고 있다고 느낄 때 잊지 못할 감동을 받는다”고 답했다.
― 무궁무진 동아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국어 수업을 하며 해마다 아이들의 문해력(文解力)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경남교육청의 ‘독서인문학교’ 사업을 알게 되어 지원했고, 이를 계기로 무궁무진 동아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요.
“문예 동아리 경험이 전무(全無)했기에 모든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실력 향상이 눈에 바로 보이지 않자 포기하려는 아이들을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팠습니다.”
― 동아리 이름을 ‘무궁무진’으로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교 교화인 무궁화에서 ‘무궁’을,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뜻의 ‘무진’을 따서 ‘무궁무진’이라 지었습니다. 아이들이 끝없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학교, 독서인문학교 사업 계속 지원”
김수선 교사는 최근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21세기 신문맹(新文盲)’ 문제에 대해서도 소신을 밝혔다. OECD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실질 문맹률은 75%에 달하는데, 그는 “영상 세대인 아이들에게는 예견된 일이지만, 학교와 사회가 문해력 향상을 위해 적극 나선다면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글보다 영상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어떻게 지도하나요?
“첫째는 기본기를 다지는 것입니다.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등 국어의 기초를 탄탄히 가르칩니다. 둘째는 개별 맞춤 지도입니다. 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향기가 있으니, 획일적인 글쓰기 대신 아이들 고유의 색을 살리려 노력합니다.”
― 합천여중이 글쓰기 명문이 된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아이들의 성실함, 선생님들의 정성,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입니다.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지금의 결과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 학교 차원의 지원이 많이 있었나요?
“2023년에는 경남교육청 일괄공모사업 ‘독서인문학교’로 선정되어 교육청에서 사업비도 받고, 학교 예산도 지원 받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고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과 올해는 독서인문학교 사업이 교육청에서는 폐지되었지만 학교에서 이를 계속할 수 있도록 예산 부분, 공간적 부분, 시간적 부분 모두를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글쓰기 연습 덕에 국어 성적 잘 나와”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학교 3학년 전다혜·문옥현·정다원·김민주·정보민·류예린·문정현 학생과, ‘무궁무진’ 동아리 활동을 거쳐 합천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한 이지민·김다윤·허희진·박소연(이상 1학년), 김나현(2학년) 학생을 만났다.
이날 별도의 교실에서 만난 학생들은 깍듯한 인사로 기자를 맞이했다. 이들은 모두 전국 규모 글짓기 대회에서 굵직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학생들이었다. 전국대회 1등부터 모든 입상자가 합천여중 출신인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학생들이 글쓰기에 흥미를 느끼게 된 데는 김수선 교사의 따뜻한 지도와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문정현 학생의 말이다.
“제 꿈은 작가예요. 처음 글을 쓸 때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는데, 계속 쓰다 보니 문장 구상력이 좋아지는 걸 느꼈어요.”
― 글쓰기가 힘들 때는 어떻게 극복했나요?
“책을 읽고, 시를 필사했어요. 글을 쓸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도전했는데, 선생님께서 늘 곁에서 응원해 주셨어요. 제가 울 때 함께 울어 주시기도 했고요. 덕분에 결국 1등상을 받을 수 있었어요.”
문정현 학생의 이야기에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저마다 수상 경험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며, 글쓰기 교육을 통해 키운 다양한 꿈들을 들려주었다. 작가, 방송작가, PD 등 창의력을 요하는 직업이 주를 이뤘다. ‘중학 시절의 글쓰기 활동이 꿈을 이루는 데 어떤 도움이 되나’ 하는 물음에, 방송 PD를 꿈꾸고 있다는 류예린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방송 PD가 되려면 전달력 있는 글을 쓰고 구상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꾸준히 글을 쓰며 실력을 키우고 있어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고등학생들에게도 ‘무궁무진’ 동아리 활동은 큰 의미가 있었다. 박소연 학생은 글쓰기가 국어 성적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 글쓰기가 성적에도 영향을 줬나요?
“네. 특별히 국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국어 과목 성적이 잘 나오는 편입니다. 글쓰기 연습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최고가 되기보다, ‘글을 자유롭게 활용하기’를 지향”
박소연 학생의 말에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글쓰기와 국어 실력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비싼 학원 수강이나 과외 없이, 꾸준한 글쓰기 경험이 학생들에게 국어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 준 것이다. 문옥현 학생은 글쓰기를 통해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말했다.
― 어떤 두려움이었나요?
“제 마음을 표현하는 게 두려웠어요. 그런데 글을 쓰면서 점차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예전엔 ‘재밌었다’ 같은 간단한 표현밖에 못 했지만, 이제는 ‘우스꽝스럽다’ ‘기쁘다’ ‘슬프다’처럼 감정을 다양하게 담아낼 수 있어요.”
김수선 교사는 학생들의 태도와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무엇을 하든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도심 학교에서 근무했는데, 그곳에서는 학원 위주의 학습으로 학교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합천여중 학생들은 공부든 체육이든 생활지도든, 주어진 활동에 성실하게 임합니다. 교사에 대한 신뢰도 높고, 교사 역시 그 마음을 느끼기 때문에 더욱 책임감을 갖고 지도하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가 선배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김 교사는 글쓰기의 교육적 의미를 강조하기도 했다.
“글쓰기를 통해 특정 과목에만 치중하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학생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내용을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분야든 글을 통해 사고를 확장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학생이 최고 수준의 글을 쓰는 것은 어렵겠지만, 누구나 글이라는 도구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사 잘하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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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국 합천여중 교장. |
“아이들이 인사성이 밝다”고 하자 문성국(文成國·61) 교장은 “수학여행 때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골 아이들 같지 않다’ ‘표정이 참 밝다’며 칭찬하더라”고 말했다.
― 가을에는 시화전(詩畵展)도 연다고 들었습니다.
“교문부터 시화를 쭉 전시합니다. 축제가 끝난 뒤에도 일주일간 전시해 놓는데, 정말 장관입니다.”
최근 한 70대 할머니가 《조선일보》에 실린 합천여중 기사를 보고 감동해 사비 500만원을 기부한 일도 있었다.
“처음엔 100만원을 기부하러 오셨는데, 저희가 감사 인사를 드리자 오히려 감동하셔서 400만원을 더 보태 주셨어요. 기부금은 작가 초청 특강, 문학 기행, 문집 제작에 사용할 예정입니다.”⊙
| 변을유 근화학원 이사장 “꽃 심고 나무 다듬으며 학교를 가꾸는 게 제 일” 합천여중이 속한 학교법인 근화학원의 변을유(卞乙囿·80) 이사장은 학생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학생들이 좋은 것을 보며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 직접 교정에 꽃을 심는다”고 말했다. 학교에 변화를 일으킨 김수선 교사를 면접장에서 직접 알아보고 채용에 힘쓴 것도 변 이사장이다. “처음 면접 볼 때부터 김 선생은 수업도 잘하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넘쳤어요. 수업을 보면 어떤 교사인지 감이 오죠. 참 감사한 인연입니다. 글쓰기는 국어의 기본인 만큼, 학생들이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대견합니다.” -글쓰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국어의 기본이 되나요? “요즘 아이들은 핸드폰에 익숙하고 글쓰기를 어려워합니다. 사실 저도 글 쓰는 걸 미루는 편이에요. 하지만 글쓰기는 창의력을 기르고, 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글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게 중요하죠. 졸업장과 함께 문집을 받아 간직하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오래도록 남을 겁니다.” -합천여중이 글쓰기 명문이 된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한 가지 비결이 아니라, 모든 요소가 어우러졌기 때문입니다. 실력과 인성을 갖춘 교사들, 깨끗하고 꽃이 가득한 교정, 교직원 간의 화합 등이 합쳐져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합천여중은 글쓰기 외에 예체능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네요. “근화오케스트라도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후원 대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체육, 음악, 글쓰기 등등, 다 잘해요. 아이들이 순수하게 서로 좋은 분위기에 물들어 가며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변 이사장은 지금도 자주 학교를 찾으며 학생들을 위한 손길을 아끼지 않는다. “꽃을 심고 나무를 다듬으며 학교를 가꾸는 게 제 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순수하고 참 예뻐요. 합천여중에서 받은 교육이 아이들의 미래에 큰 힘이 되길 바랍니다. 학교는 앞으로도 아이들의 꿈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할 겁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