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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美 수필가 崔米子의 ‘닥터 골트’ 회상

“인생은 아름답고 경이로워!”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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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Ⅱ》 펴내
⊙ 닥터 골트, 1960년대 서울 의대 戰後 복구 땀 흘려
재미동포 최미자(崔米子)씨와 딸 김수연(金洙延)씨.
  《월간조선》 애독자이기도 한 최미자(崔米子·미국명 Mija Kim)씨는 현재 미국 샌디에이고에 거주하고 있다. 전남여중고와 경북대 사범대학을 나와 물상과 화학을 가르치다가 이민을 갔다. 미국에서도 중학교와 특수학교 등에서 보조교사로 근무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미국 남가주 샌디에이고에서 발행하는 한인동포 월간지 《피플 오브 샌디에이고》 주필을 역임했고 뉴욕에서 발행하는 《미주현대불교》에 오랫동안 글을 기고해왔다. 2009년부터 미국과 한국에서 발행하는 신문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최미자씨의 4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Ⅱ》.
  최근 국내에서 그의 4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Ⅱ》가 간행되었다.
 
  최씨는 “가족과 사람에 얽힌 인연과 업보를 탐구하며 삶을 뒤돌아보았다. 이민 초기, 떠오르는 상념을 놓치기 싫어 가족이 잠든 새벽에 글을 몰래 쓰던 미치광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은사이신 국어 선생님께서 하신 “좋은 글은 사람이 된 맑은 영혼에서 흘러나온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려 했다. 또 피천득의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는 말을 깊이 새겼다고 한다.
 
  피천득의 수필처럼 그의 글은 ‘중년의 고개를 넘어선’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선과 문체로 문장의 감동을 선사한다.
 
  기자는 저자와 전화통화와 소셜미디어로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해외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지만 나라사랑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간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Ⅱ》에 실린 수필 몇 편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소개한다.
 

  〈닥터 골트〉
 
[편집자 註]
  미네소타 의과대학 전 학장인 닐 골트(Neal L Gault. Jr.) 박사는 2008년 12월 11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88세. 1920년 텍사스 오스틴에서 태어났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미 공군병원 행정관으로 복무했으며, 텍사스대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뒤 미네소타 의대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니애폴리스의 재향군인 의료센터, 대학병원 의사로 근무하다 1955년 미네소타 의대 내과교수가 되었으며, 1974년부터 84년까지 미네소타 의대 학장으로 재직했다.
  그의 리더십은 미네소타대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개도국의 여러 의대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수련의에게 다양한 임상과 선진 의료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서울대와 미국 미네소타대가 체결한 상호 기술협정의 수석 자문교수(overall adviser)로서 1959년부터 2년간 한국에 체류했다. 서울대 의대 교육방법 개선 및 교육과정 개발, 6·25로 파손된 의대와 병원 건물 수리 및 개축, 의대 실습실과 강의실, 연구실 등의 시설 보완, 의학도서관 도서 구입 및 도서관 확충 등 전후(戰後) 복구 및 인력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또 많은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 의대생들이 미네소타 의대에 진학할 수 있게끔 도왔다고 한다.
  이후에도 수차례 내한해 국내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미네소타대와 상호협정을 맺은 지 50주년이 된 2004년 9월 서울대 정운찬 총장은 닐 골트 박사에게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골트 박사가 한국에 머무를 당시 서울 이태원에서 살았는데 서울대 의대생이던 최미자씨의 오빠가 영어회화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집에 함께 살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1962년 미네소타 의대 대학원에 입학할 때 큰 도움도 주었다.
  골트 박사의 의대 동료 교수였던 아내 사라(Dr. Sarah Gault)는 1994년 사망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사라 박사는 복합 질병으로 20여 년 넘게 투병했는데 이 기간 골트 박사는 아내를 손수 목욕시키며 헌신적으로 돌보았다고 한다.
  생전 저자에게 골트 박사는 “인생은 아름답고 경이로워!”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한다.
 
한국을 사랑한 닥터 닐 골트 박사.
얼마 전 미네소타 의대에서는 특별한 장례식이 있었다.
 
  1960년대, 나의 고향 집을 찾아온 파란 눈의 아저씨. 안경 너머 인자한 눈빛은 중학생이던 나에게 경이로움이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효자 오빠가 아버지에게는 라디오를, 어머니에겐 전기다리미를 박사님 편에 보내왔다. 우리에게는 코코아와 홍차 한 통을 가지고 오셨다. 그때 처음 느꼈던 코코아 가루의 향기와 맛, 지금도 달콤하다. 어머니가 만든 한국식 저녁을 먹고 아버지의 아이디어로 둥그렇게 앉아 돌아가며 노래를 각각 순서대로 불렀다. 박사님은 우리가 아는 미국 민요를 불렀다.
 
  서양인과의 아름다운 하룻밤의 추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냄새나는 재래식 변소를 사용하며, 아버지 서재에서 발가락이 나온 이불을 덮고 잤던 거인. 미국에서 큰오빠가 의학을 공부하도록 최초로 다리를 놓아준 분. 미국에 첫발을 디딘, 가난한 유학생들을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살게 하고 영어를 배우도록 배려하던 너그러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한 자식을 이역만리의 땅에 보내놓고 노심초사하던 부모님은 그런 미국 의사 선생님 부부의 은혜를 항상 고마워하셨다. 당시 최고품인 담양산 대나무로 만든 바둑판과 한국적인 수예품들을 해마다 보내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분은 1959년 서울의대병원을 복구하는 팀으로 부인과 어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 소달구지가 다니고 흙먼지 날리던 미지의 한국 땅에 왔던 천사 같은 의사 부부였다. 어릴 적 사고로 다친 가짜 눈의 불편함도 잊고 정상인과 똑같이 살아온 닥터 골트(Dr. Neal Gault). 그는 미네소타대학에서 의대 학장을 맡는 동안에는 물론 팔순이 넘도록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도 계속했다. 2004년에는 서울의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일찍 떠난 의학박사 부인을 위하여 만든 미네소타 의대 장학재단은 네 개나 된다. 은퇴한 후에도 미국 전역을 다니며 의대 동문들을 방문하여 기금을 모으는 일은 그의 연중행사였다. 그때마다 식사를 대접할 수가 있어 행복했다.
 
 
  1959년 서울의대병원 복구팀으로 來韓
 
  그런데 지난가을 췌장암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워낙 건강했기에 청천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세인트폴 집에 한 번 다녀가라던 그의 초청에도 늘 응하지 못하고 헐떡거리며 살아온 나의 이민 생활이 원망스러웠다. 소박하게 가리지 않고 식사하는 분이라 전화할 때 가끔 여쭈면 이웃과 맥도날드 햄버거를 드시는 날도 많았다. 홀로 사셨으니 부실한 식사 탓일까. 아니면 스카치나 포도주 같은 약주를 좋아하셔서일까.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슬픈 감정이 조금 누그러진 10월, 드디어 미네소타공항에서 큰오빠 부부랑 만나 이튿날 그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만끽한 화사한 단풍으로 물이 든 가을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대학교 근처의 로렌길(Loren Road)의 집은 높은 나무들이 둘러 있고 담이 없는 이웃들이 사는 동네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박사님은 집안을 보여주셨다. 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고 이미 살림을 정리해서인지 지하실과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박사님이 종종 치던 피아노만 아직 놓여 있었다. 얼마 전 우리 집으로 보내준 소포 속에 아리랑을 비롯하여 한국 민요집 책이 섞여 있던 까닭을 그제야 알았다. 함께 대화하는 동안에도 그는 생전에 쳤던 피아노 책들을 꺼내 정리했다. 서재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진이나 기록들은 이미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은혜를 입은 아시아인들이 보내온 가지가지 선물들은 자녀들에게 분배할 예정이라며 아직 거실에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보낸 선물도 다시 우리 형제들에게 보내졌다.
 
 
  인류애 넘치고 평화를 사랑해
 
1964년 닐 골트 박사와 함께한 전남여중 시절의 최미자씨와 어머니 이순옥 여사, 남동생 최용택.
  3일 동안 머무르며 그분이 살아온 일상 이야기를 박사님과 아들을 통하여 나는 더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생전에 의학도에게는 가르침을, 병든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은퇴 후에도 주말이면 차가 없는 노인들을 태우고 마켓에 다니셨다 했다.
 
  무릎 수술을 했기에 대학 교정의 운동장에서 매일 20바퀴를 걸었다. 아침마다 한국의 저명한 옛 친구들, 의학박사들과 이메일로 대화를 나눈다며 컴퓨터를 열어 나에게 보여주셨다. 그의 부지런한 삶의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날이 쇠약해져 갔지만 책을 읽는 모습도 대단했다. 복도에는 티베트 불교 그림 벽걸이가 걸려 있었다. 인류애가 넘치고 평화를 사랑하며 스스로 늘 휴머니스트라고 그는 강조했다.
 
  또 88세인 여름에 받았던 새 운전면허증(유효기간 2012년)을 꺼내 보여주며 갑작스러운 병에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면역이 떨어져서인지 그가 낮잠 자는 시간이면 나는 복도에서 흐느끼기도 했다. 아버지 같은 사랑을 느끼게 해준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낙천적인 인생철학과 농담도 잘하셨는데, 하루는 심장마비로 죽지 않아 우리처럼 찾아온 지인들에게 하직 인사를 할 수 있어 자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라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셨다. 분주하게 살면서 늘그막에는 여자친구랑 데이트도 한 멋쟁이 박사님. 불안감으로 안절부절못하던 말기 암 환자가 아니었다.
 
  다음 날은 오빠 부부가 마켓에 가서 불고기 재료를 사 왔고 나는 박사님의 아들인 폴과 잡채를 만들었다. 아들도 한국 음식을 좋아해서 자기가 만든 양배추 백김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오래된 스테인리스 한국 밥통도 간직하고 있어 우스웠다. 저녁에는 박사님이 초청한 이웃 부부와 함께 모여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처럼 즐거우면서도 슬픈 식사를 했다. 박사님이 먼저 잠자리에 들어가 우리도 식탁에서 일어났다.
 
 
  오래된 스테인리스 한국 밥통 간직해
 
최미자씨와 애완견 ‘똘이장군’.
  이른 아침,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을 다녀온 후 깨어 있는 정신으로 고결한 임종을 보여준 분. 물리학박사 아들로부터 당당하게 보살핌을 받으며 살던 집 침대에서 운명했다. 절대로 양로원에는 가지 않겠다던 강한 의지로 그렇게…. 장례식 날엔 너무 추운 겨울 1월이고 당시 내 건강도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많은 도움을 받은 의학도 제자들도 먼저 이세상을 떠나버렸다.
 
  처음으로 찾아간 미네소타주 세인트폴(Saint Paul)은 닥터 골트가 살아온 덕행 때문인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도착했던 날 비행기 곁자리에 앉았던 음악가 부부가 복잡하고 낯선 비행장을 나에게 친절하게 안내해주던 일. 기어코 지팡이를 짚고 공항까지 나를 배웅해준 그의 앙상한 마지막 모습. 나는 그분에게 직접 도움받은 일이 없지만, 대를 이어 그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다. 정원에서 보았던 귀여운 다람쥐들도 집주인이 기르는 조그마한 화분에 매달려 있던 토마토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처럼 당분간은 그분을 그리워하겠지.
 
 
  〈아름다운 만남〉
 
미국 이민을 떠날 즈음, 최미자씨는 광주 금호중앙여고 교사를 그만두었다. 당시 2000여 명의 전교생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사시는 김봉소 은사님(경북대 명예교수-편집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학생 때 유네스코 서클의 지도교수셨고 사범대학에서 교육심리학을 가르쳐준 분이다. 교수님의 한 제자가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했기에 만나고 싶어 우리 집에 오시겠다는 전화였다. 연락을 받고 차를 몰고 다운타운 역으로 갔더니 기차로 내려온 노 교수의 성의 못지않게 근처 컨벤션센터에서 택시를 타고 온 제자랑 벌써 역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배인 양 교수는 오전에 발표가 끝났는데 중요한 세미나로 저녁시간까지 일정이 잡혀 있었다.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어딘가 가기로 하고 나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온화한 봄인데도 싸늘하게 예사롭지 않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하늘에는 여객기가 날고, 차창 너머 태평양 바다 위로 떠다니는 군함이랑 돛단배를 바라보며 모두 오랜만에 평화로움도 느꼈다. 시간이 없어 당장 내려 산책할 수도 없으니 차 안에서 살아온 이야기로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사범대학 동문인지라 주로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였다. 지구촌의 올바른 교육을 위한 미국평등권회(AERA) 회의는 세계의 교육학자 1만5000명이 모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연중행사란다. 한국인 교수들도 참가하고 발표한다니 자랑스러웠다. 그의 세미나 시간이 되어 나는 후배를 내려주고 잠시 컨벤션센터에 들어가 기념촬영도 했다. 한쪽에서는 교육에 관한 책과 자료 박람회를 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뉴욕에서 온 한인 여류학자를 만났는데, 김치 생각이 난다며 한국음식점이 근처에 있느냐고 물었다. 고속도로로 반 시간은 가야 하니 안타까웠다. 저녁에는 또 다른 동문이 찾아와 오랜만에 만난 교수님 부부와 우리를 식당에서 대접했다.
 
 
  후다닥 만든 새우전골이 손님들의 입맛을 끌었다니…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은 함께 점심을 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갔는데, 나는 만나서 일정을 변경하여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식당에서 먹을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였다. 은사님의 사모님이 도와주신다기에 나는 용기를 내어 밥을 하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있는 대로 꺼내 벼락같이 점심상을 차렸다. 조금 긴장한 탓인지 현미가 고두밥이 되어 말썽을 부렸다. 반찬을 상에 놓으며 다른 재료도 넣지 못하였음을 뒤늦게야 알고 아쉬움뿐이었는데, 후다닥 만든 새우전골이 손님들의 입맛을 끌었다니 한숨을 놓았다.
 

  저녁에 로스앤젤레스 댁으로 돌아가신 은사님이 잘 가셨는지 전화를 드린 후 안심했다. 설거지 기계에 빈 접시들을 넣고 나니 피곤함이 찾아와 나는 일손을 놓고 드디어 뻗어버렸다. 손님들은 헤어질 때 미국 동네에 피어 있는 꽃과 조용함을 보고는 모두가 그림 같다며 웃었고, 우리와의 시간도 고마워하는 얼굴이었다. 조금 바빴지만, 즐거운 이틀이었다.
 
  다음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후배도 공항으로 잘 가셨나 하고 궁금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심전심이었다. 양 교수는 비행기 탑승 전 전화를 했다며, 귀한 만남의 시간이었고 나의 작은 대접에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했다. 처음 만나는 동문이었지만, 은사님 덕에 소중한 인연의 향기를 피우던 시간이었다.
 
 
  〈레몬나무 앞에 서서〉
 
교사 시절의 최미자씨. 제자들과 함께.
  포근했던 겨울과 달리 강추위가 며칠간 불어닥쳤다. 추위라야 화씨 40도 정도이니 10도 안팎이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대에 있는 샌디에이고는 지역에 따라서 꽃들이 일 년 내내 피어난다. 그런데 밤이면 몸이 오싹해지고 손발이 시리다.
 
  걱정되어 나가보니 봄이나 가을에 만발하던 세이지가 전멸 상태였고, 다른 나무들도 볼품없다. 하나 반갑게도 강하게 살아 있는 레몬나무와 언덕 구석에서 자라는 오렌지나무가 싱싱하다. 두 나무를 샅샅이 보다 놀랐다. 이파리 뒤쪽에 흰 혹파리 알들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덩어리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손으로 만지면 향기가 풀풀 나는 예쁜 레몬을 나는 한국에서 처음 보았다. 외국산 물건을 파는 도깨비시장에서 보았다. 값이 좀 비싸 구경만 했다. 이 집에 이사 와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첫 레몬나무는 잘 돌보지 못해 죽어서 다시 심었는데, 껍데기가 두꺼운 유레카종이다. 가끔 잡지에서 보거나 화장품으로 이름만 들었던 레몬나무를 우리 집 마당에서 기르다니!
 
  나는 레몬나무와 살며 감개무량했다. 나의 첫 수필집 제목도 《레몬향기처럼》이다. 한 번은 나의 책 출간을 축하해주던 뉴욕의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어 내가 먹지 않고 정말 큰 레몬 몇 개를 소포로 보내기도 했다. 이민 초기 무렵 나는 꽃꽂이 자격증 수업을 친구랑 미국 고등학교 학생들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레몬 잎을 꽃꽂이 배경 재료로 듬뿍 사용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이파리에서 풍기던 풋풋한 레몬 향기.
 
 
  친정어머니 방에 있던 레몬과 메마른 루주
 
2007년 5월 첫 수필집 《레몬향기처럼》을 펴낸 뒤 고향 광주에서 지인·제자들과 가진 출판기념회 모습.
  친정어머니의 방에는 늘 레몬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레몬즙을 화장수로 사용하시며 나에게도 권했는데, 나는 끈적거린다며 싫어했다. 이제야 얼굴에 생긴 검버섯을 걱정하며 어머니 말씀을 떠올린다. 또 뜰에 나가 레몬나무 앞에 서서 꽃이 몇 개 피었나 하나 둘 세고 있으면, 올곧으신 어머니 성품이 생각난다. 정의로운 어머니는 동네 반장과 모교 동창회장으로 봉사하셨는데, 우리 집에 전화가 없어 늘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늘 아양과 아첨을 싫어하시며 이웃과 약자를 돕던 용감하고 생각이 깨어 있는 신여성이었다. 한국전쟁 때 대학교수였던 나의 숙부가 친구 집에 쌀을 꾸러 갔다가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남로당 빨갱이에게 몽둥이로 맞아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며, 순천에서 살며 여순사건 체험으로 우리에게 반공사상을 철저히 가르쳐주시던 어머니는 팔십이 되어서도 신문을 보고 독서를 즐기셨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싶어 가게를 열자며 아버지를 졸랐다던 어머니는 고운 얼굴에 바를 화장품도 제대로 없었다.
 
  농의 서랍 속에 있던 메마른 루주를 난 지금도 기억한다. 지혜로운 어머니의 열정으로 우린 굶지 않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내가 대학교를 중간에 포기하려 할 때도 어머니는 한석봉 어머니처럼 떡 장사를 해서라도 등록금을 마련하겠다며 나의 학업을 끝까지 이어가게 해주셨다.
 
  레몬나무처럼 꽃과 잎과 열매로 온몸의 향기를 피우며 세상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해도, 최소한의 양심적인 도리를 강조하시던 친정어머니의 참 교훈들. 우리가 교육을 통해 사람이 되어가는 인격을 가꾸어나가듯 나무도 정기적으로 좋은 거름을 주고 물을 주지 않으면 대부분 병들어 죽어갔다. 나도 그렇게 노력하면서 하루하루 사람이 되어간다. 레몬나무 앞에 묵묵히 서서 나를 잠시 돌아본다. 사철 푸른 레몬나무에 향기로운 꽃 한 송이가 피어서 노랗게 열매로 익어 가기까지는 최소한 반년은 걸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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