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강경상업학교와 일본 오이타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44년 조선은행에 입행해 금융인·재무관료의 길을 걸었다. 1964년 5월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하게 되자, 고인에게 경제정책 방향을 자문했다. 고인은 경제정책의 방향을 시장자유화, 수출입국, 공업입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에 공감한 장 부총리는 고인을 상공부 차관으로 발탁했다.
1969년 10월 내각 총사퇴로 상공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고인을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고인은 “정치는 전혀 모른다”며 사양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야말로 국정(國政)의 기본”이라면서 “나는 국방과 외교안보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어 경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으니, 경제문제는 비서실장이 대신 잘 챙겨달라”고 당부했다. 이후 고인은 9년3개월간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사실상 ‘경제대통령’ 역할을 했다.
비서실장이 되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비서실 근무자들에게 명함을 파지 못하게 한 것이다. ‘비서는 뒤에서 소리 없이 대통령을 돕는 존재’라는 것이 고인의 비서관(秘書觀)이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겸양으로 고인은 재직 중 잡음을 전혀 내지 않았다. 1970년대 말 차지철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간의 갈등 와중에서도 고인은 권부의 무게중심 역할을 했다. 1978년 12월 제10대 총선 이후 대통령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 주일(駐日) 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1990년대 이후 《김정렴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한국경제정책 30년사》 《김정렴정치회고록/ 아, 박정희》 등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인품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말년에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을 완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