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아이젠하워 당선자, 한국민에 韓美동맹이란 ‘큰선물’
⊙ 휴전회담 서명한 클라크 사령관, 남북한 전체를 주머니처럼 감싸는 모양의 해상봉쇄선인
‘클라크 라인’(NLL의 전신)을 선포, 수도 서울을 보호
⊙ 7개국어 능통한 軍政家 테일러, 전투에 패한 부대의 지휘관과는 악수도 거절할 만큼 엄격
⊙ ‘해군의 전설’ 알레이 버크, 캐딜락 1대 값에 달하는 함포탄을 무제한으로 지원사격해 줘
⊙ 美軍, 최고의 군사훈련 전문가 브루스 클라크와 전차전의 영웅 에이브럼스를 투입, 한국군 養成해
사진 : 白善燁 예비역 대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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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白善燁 예비역 대장 제공

- 1953년 5월 철원 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응사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해병대원.
내가 가끔 만나는 미군들에게 “6·25전쟁에서 대표적인 전투를 꼽으라”고 물으면 으레 그들은 “장진호(長津湖) 전투와 지평리(祗平里) 전투”라고 말한다. 그만큼 두 전투는 미군에 있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극적으로 잘 수행했던 전투였기 때문이다.1951년 2월 중공군은 산악지대인 동쪽으로 공격해 왔다. ‘유령군대’라고 불린 린뱌오(林彪)의 2만 대군이었다. 미 10군단이 맡고 있던 지역이었다. 6·25전쟁에 참전하는 자국 병사들에게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은 “(화력이 좋은) 미군을 피하고 철저하게 한국군을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남한강 동쪽으로 북진했던 미 10군단은 미 2사단과 7사단에다 국군 5사단 및 8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군단장은 1950년 크리스마스 공세 때 동부 전선을 지휘했던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이었다. 당시에는 미 8군 월튼 워커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으나, 1951년 2월에는 리지웨이 장군의 8군 예하에 들어가 있었다.
아몬드 소장은 횡성과 홍천을 잇는 공격로의 좌익에 국군 8사단(사단장 崔榮喜 준장), 그 우익에는 국군 5사단(사단장 閔耭植 준장)을 앞에 세웠다. 미 2, 7사단은 국군 8, 5사단을 뒤에서 지원하도록 계획을 짰다.
폴 프리먼 대령의 미 2사단 23연대는 포병을 대폭 강화한 연대전투단(RCT)을 구성해 중앙선 철도를 따라 미 10군단의 가장 좌측을 담당했다. 낙동강 전선 다부동에서 국군 1사단에 배속돼 함께 싸웠고, 평안북도 운산 남쪽 군우리(軍隅里)에서 중공군에 미 2사단이 당할 때 다행히 우회로를 선택해 다치지 않고 퇴각했던 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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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육군참모총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지평리 전투의 영웅 프리먼 장군을 만났다. |
돌이켜보면 아몬드 소장의 지휘 방식은 문제가 있었다. 운산 전투 이후 걸핏하면 적이 ‘공격 목표’로 삼고 있는 한국군 사단을 전면에 배치한 점은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국군은 대포와 전차 등에서 미군과는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1951년도 미 10군단 지휘보고서에 따르면, 국군 8사단은 장교 323명, 사병 7142명을 잃었다. 국군 5, 3사단 역시 각각 3000명씩 손실을 보았다. 한국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던 중공군이 공격로를 바꿨다. 이번에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였다.
프리먼 대령의 23연대전투단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전투는 2월 13일부터 나흘 동안 격렬하게 벌어졌다. 23연대전투단 예하 미군 3개 대대와 몽클라 중령의 프랑스 대대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지평리에서 나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중공군 6개 사단에 1개 연대 병력(프랑스 대대 포함)으로 저항했다.
둘레 1.6㎞에 이르는 원형의 진지 속에서 미군과 프랑스군은 끝까지 결전의 의지를 놓지 않고 중공군과 사투를 벌였다. 진지를 넘어오는 중공군과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였다.
프리먼 대령은 전투가 시작된 뒤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나 헬기 후송을 거부하고 싸웠다. 부상이 깊어진 그는 전투가 종료되기 전에 결국 후송됐다. 중공군은 5개 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해 총공세를 펼쳤으나 결국 후방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온 마셜 크롬베즈 대령(미 1기병사단 5기병연대장)의 막강한 화력에 주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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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에서 격전을 치렀던 프랑스 대대원들. 미 2사단 23연대 전투단에 배속됐던 이들은 고립 상태에서 중공군 39군을 물리치고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 |
지평리 전투는 연합군의 대승이자, 중공군에는 씻을 수 없는 패배였다. 이로써 리지웨이가 지휘하는 미 8군은 ‘킬러작전’을 통해 과감하고 폭넓은 북진의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
여기서 두 사람의 전쟁영웅이 탄생한다. 주인공은 프리먼(Paul L. Freeman·1907~1988) 대령과 그의 23연대를 도와 함께 작전을 펼쳤던 프랑스군의 랄프 몽클라(Ralph Monclar·1892~1964) 중령이다.
프리먼 대령은 차분하면서도 심지가 굳어 보이는, 첫 인상이 참 좋은 인물이었다. 그는 2사단 23연대장으로 다부동에서 같이 싸웠다. 1907년 필리핀 출생인 그는 1929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 소령 시절인 1931년, 베이징에 어학장교로 4년간 근무해 중국어를 잘했다. 다부동에 나타난 그는 “중국어를 할 줄 아느냐”고 중국말로 물었고, 나도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중국말로 대답했다.
그는 “그렇다면 중국어로 이야기해 보자”고 말했다. 조금 우습다는 생각에 “그냥 영어로 얘기하자”고 했더니,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영어를 할 수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프리먼은 한국군에 영어가 보급되지 않아 내심 의사소통을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영화
그 명(名)대사의 주인공이 프리먼 대령이다. 내가 프랑스 대사 시절, 그는 유럽지역 사령관이었다. 나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유럽지역 육군사령부로 그를 찾아가 만난 일이 있다. 그의 무공(武功)을 기려 주한미군은 의정부 2사단 본부 건물을 ‘프리먼홀’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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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에 중령으로 참전했을 당시의 몽클라 장군. |
그와 드골 대통령은 나치스 항전 때 같이 싸우다 영국으로 망명한 전우다. 그 뒤로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을 합쳐 함께 싸웠다. 그의 본명은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Raoul Magrin Vernerey)이며,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 활동 때 암호명으로 쓰던 몽클라로 개명(改名)한 것이다.
1950년 8월, 프랑스 정부가 미군 2사단 예하의 파견부대 창설을 발표하자, 몽클라 장군(당시 58세)은 파병 부대가 대대급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부대 지휘관을 자청했다.
당시 국방차관이 “미국의 대대는 중령이 지휘관인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그는 “저는 계급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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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에 2사단 23연대장으로 참전한 당시의 프리먼 대령. 필리핀 출생인 그는 2사단장을 거쳐 1965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
그런 전우의 부음을 들은 드골 대통령은 스스로 장례식을 주관하겠다고 나서, 앵발리드(Invalides) 전쟁기념관에서 장엄한 의식을 거행했다. 그 장례식에 참석해 오직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삼은 참군인의 넋을 위로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역시 드골은 난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파리 주불 한국대사관으로 부인과 딸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던 기억이 난다.
딸의 뇌리에 아버지는 평생 군인으로 각인(刻印)돼 있었다. 그의 딸이 오래전에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한국인들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했어요. 한국인들이 35년이라는 긴 일제강점기를 이겨내고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의 딸 뒤푸르는 최근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 600여 쪽의 회고록 집필을 마쳤다고 한다. 몽클라 장군은 당시 지평리 전투를 “베르전투(1차대전 때 가장 치열했던 전투)와 비슷했다”고 회고하곤 했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3400명이 참전, 262명이 전사했고, 1008명이 희생됐다. 수원시 장안구에 1989년 세워진 프랑스군참전기념비 앞에 서면 몽클라 장군 생각이 절로 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英雄, 아이젠하워와 韓美동맹을 담판
내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1890~1969·사진) 미국 제34대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52년 12월 3일쯤이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한국전쟁을 종결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12월 2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 그는 ‘대통령 당선자 자격’이었다. 아이젠하워의 방한은 극비(極示必)에 부쳐졌다.
그는 김포공항에 내린 후에도 동숭동 서울대 건물인 미(美) 8군사령부로 직행해 그곳에서 묵었다. 사흘간의 짧은 체류일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세 차례나 만날 수 있었다. 맥아더 원수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아이젠하워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아이젠하워의 방한 이튿날인 12월 3일 아침, 미 8군사령관실에서 그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아이젠하워가 방한하기 전 이를 미리 알고 있던 밴 플리트 8군사령관은 한국군 증강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나와 라이언 군사고문단장을 두 번이나 불러 협의했고, 나는 이를 토대로 육군본부 작전국장 정래혁(丁來赫) 장군과 함께 이 계획을 수립했다.
나는 이것을 차트로 작성, 미 8군사령관실에서 아이젠하워에게 약 15분 정도 브리핑했다. 아이젠하워, 윌슨 국방장관 내정자, 브래들리 원수, 래드포드 해군대장, 클라크 대장, 밴 플리트 대장 등이 참석했다.
아이젠하워는 회의 직전 복도에서 참석자들과 만나 “굿모닝, 이렇게 모이니 마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D데이 같다”고 조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브래들리 원수(12집단군사령관), 래드포드 대장(태평양함대 사령관), 클라크 대장(5군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3군단장), 라이언 군사고문단장(브래들리 대장의 민사참모) 등을 이끌고 작전을 수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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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12월 3일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경기도 광릉에 있는 국군 수도사단을 방문했다. 앞줄 왼쪽부터 아이젠하워, 이승만 대통령, 송요찬 수도사단장. 뒷줄 맨 왼쪽이 필자다. |
“아이젠하워 중령은 제3사단의 대대장으로 일선(一線)에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선되신 직후에 보직을 대대장에서 3사단 정보참모로 임명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군인 인사(人事)는 군사령관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내 희망은 아들이 적(敵)에게 포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통령의 아들이니 적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염려한 것이었다. 6·25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 8군사령관과 아들을 최전선에 내보낸 아이젠하워 간의 ‘부정(父情)’이 담긴 대화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이날 회의에서 한국군 증편(增編)을 위한 미국의 확약(確約)을 받기 위해 브리핑을 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즉 한국군 20개 사단 증편계획을 아이젠하워에게 설명하는 한편, 미군 1개 사단을 운영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의 유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이젠하워는 내 말을 듣고는 즉석에서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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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12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당선자에게 태극기를 증정했다. 오른쪽은 아이젠하워의 웨스트포인트 동기인 밴 플리트 8군사령관이고, 왼쪽 두 번째로 필자의 얼굴이 보인다. |
세 번째는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경무대에 들러 우리 국군의 의장대를 사열하고 간단한 다과회를 할 때였다. 특히 의장대를 사열할 때 나는 이 대통령·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와 맨 앞줄에 나란히 서서 사열을 했고,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그 뒷자리에 위치했다.
당시 아이젠하워와 이승만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애를 먹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진땀이 난다. 아이젠하워는 10만명이 운집(雲集)한 서울시민 환영대회를 경호상의 이유를 들어 불참하더니, 2박3일간의 방문 일정이 끝나는 날 당연지사(當然之事)로 생각했던 경무대(景武臺) 예방마저도 난색(難色)을 표했다.
서울시민 환영대회 때, 이승만 대통령은 끝내 아이젠하워가 나타나지 않자 나를 단상(壇上)으로 불러 “미국에 아이젠하워라는 2차대전 영웅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백선엽(白善燁)이라는 전쟁영웅이 있다”고 치켜세우는 기지(機智)를 발휘했다.
그런 이 대통령도 경무대 방문이 무산(霧散)될 것이 우려되자 백두진(白斗鎭) 국무총리 등 각료들을 경무대로 소집했고, 김태선(金泰善) 서울시장을 8군사령부로 보냈다. 그러나 미군 측은 보안상의 이유와 ‘대통령 당선자’라는 신분을 내세워 정중히 거절했다. 어찌됐건 국가원수의 체면이 연거푸 손상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통령과 총리는 나를 불러 “밴 플리트 8군사령관을 만나보라”고 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의사를 전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다”면서 “직접 이야기를 건네보라”고 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경호원들이 허락하지 않는 장소는 방문할 수 없다. 대통령 경호업무를 담당하는 미국 재무부 관리들은 융통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만약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을 예방하지 않으면, 이것은 대통령은 물론 한국민들에게 큰 실례를 범하는 것”이라며 “양자간 회담이 실현되지 않으면 미군도 앞으로 한국군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압박을 가했다.
내 말을 듣자 클라크 사령관은 상기된 얼굴로 아이젠하워가 있는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한참 후 사령관실에서 나온 클라크 사령관은 “저녁 6시 경무대에서 만나자”고 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아들 존 중령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이 대통령을 예방해 40분간 환담을 나눈 후 공항으로 직행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후 나는 참모총장으로 방미(訪美)할 때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예방해 만났다. 1953년 5월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초청으로 방미할 때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날 계획이 전혀 없었다.
대구에서 도쿄, 호놀룰루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트래비스 공군기지까지 가는 데 이틀이 걸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군용기 편으로 워싱턴 공항에 내려 양유찬(梁裕燦) 주미대사가 마련한 환영 리셉션에 참석했다. 손님 중에는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원수, 콜린스 대장 등 수많은 6·25전쟁 참전 용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담(歡談)과 축배(祝杯)의 왁자지껄함 속에서 휴전이라는 암담한 장래를 내다보고 있던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로저스 대령(1군단 고문관 역임), 헤이즈레트 대령(1사단 고문관), 하우스만 중령(한국군 육본 참모총장 고문관) 등 과거의 미군(美軍) 전우들과 따로 만났다. 우리는 로저스 대령 집으로 가 새벽 3시가 넘도록 심각한 대화를 나눴다.
해군성 전략기획국장인 알레이 버크 제독은 “이제 휴전은 기정사실이 됐으니 어쩔 수 없다. 한국은 늦기 전에 미국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너럴 백, 당신이 아이젠하워를 만나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날이 밝자 바로 콜린스 참모총장을 찾아가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는 매년 수많은 각국 참모총장이 온다”면서 “대통령이 귀관(貴官)을 만나면 전례가 돼 다른 총장들의 면담도 사절하기 어려워진다”며 난감해했다.
나는 “매일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가며 미군과 함께 싸우고 있는 한국군의 참모총장을 어떻게 다른 나라 총장과 똑같다고 할 수 있나. 더구나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구면(舊面)이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콜린스 참모총장은 할 수 없다는 듯, 옆방에 있던 헐(Hull) 참모차장(클라크 대장 후임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됨)을 불러 “백악관에 연락해 제너럴 백의 방문을 주선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다음날 나는 백악관으로 가 오전 10시 아이젠하워를 독대(獨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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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12월 4일 아이젠하워의 경무대 예방은 어렵사리 성사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가원수의 체면이 손상될까 염려했으나 결국 아이젠하워는 이 대통령을 예방해 40여 분간 환담을 나누고 김포공항으로 직행했다. |
이튿날 워싱턴에서 알레이 버크 제독과 함께 스미스 차관을 찾아가 휴전 후 한국의 방위와 재건(再建)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이것이 바로 1954년 11월 18일 서울과 워싱턴에서 발표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출발이었다.
우리가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미국 사람들이 원해서 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미국에 가서 아이젠하워에게 매달려 성사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어놓지 않으면 한반도의 안정이 어렵다고 판단해 한미동맹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주저하자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압력을 미국에 가했던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요구대로 휴전 이전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 공산군 측이 휴전협상을 결렬시킬 것을 우려했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방위조약에 대한 언질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이젠하워와 만나서 성사시킨 방위조약에 관한 것들은 귀국해서 이 대통령께 설명을 드렸다. 내가 아이젠하워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한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셨는지 보고를 드리자 “잘했다”며 대단히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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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젠하워가 다녀간 지 보름 후 미 대통령선거에서 아이크에게 패한 스티븐슨이 방한했다. 그는 한국군 1사단부터 제주도 훈련소에 이르기까지 한국군과 미군부대를 샅샅이 시찰했다. 그는 한국군을 증강하면 미군철수가 가능한지 관심을 가졌다. |
1958년 내가 참모총장으로 두 번째 미국 방문을 할 때에는 아이젠하워를 만나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 그는 나의 방문 소식을 듣고 예정에 없이 갑자기 나를 백악관에 초청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재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한국군 현대화는 잘돼 가고 있느냐”며 친근하게 대해줬다.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 때 노르망디 연합군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다. 아이젠하워는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초대규모 전쟁에서 최대규모의 다국적 군대를 총지휘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작전 때 그는 육·해·공 400만명의 대군(大軍)을 장악, 연합군의 총공세를 지휘했다.
특히 북아프리카 침공작전에서 대승한 그는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와 조지 패튼 장군 같은 고집 세고 거만한 휘하 부대장들을 철저하게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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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12월 3일 방한한 아이젠하워가 필자에게 선물한 가죽가방이다. 아이젠하워는 ‘백선엽 참모총장에게 우정의 표시로 선물을 전달한다’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가방에 ‘Lieutenant General paik, DDE’라고 새겨 전달했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가방의 소재를 알 수 없다. |
아이크(Ike)는 그의 애칭이다. 그는 공화당 대통령으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6·25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지었다. 일생 동안 두 개의 큰 전쟁을 자기의 주도로 지휘하고 끝낸 셈이다.
1890년 텍사스주(州) 데니슨의 농가(農家)에서 7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넉넉지 않은 가정 사정으로 웨스트포인트를 선택, 1915년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64명의 졸업생 중 61번째 성적을 받았다. 웨스트포인트 시절, 그는 축구선수였고, 졸업 동기생 중 50여 명이 장군이 됐다.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와 묘한 인연을 맺었다. 1935년 아이젠하워는 맥아더 장군이 육군참모총장 시절, 총장실에서 근무했고, 필리핀에서 3년간 맥아더 장군의 부관을 했다.
그는 1920년 고속승진으로 소령을 달았으나, 이후 20년간 제자리걸음을 하는 바람에 가족의 생계(生計)를 책임지느라 무진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만약 그때 참지 못하고 화풀이로 군대를 떠났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대성공도, 2대(代)에 걸친 8년간의 미국 대통령의 영광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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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12월 4일 철원의 미 3사단을 방문한 아이젠하워가 병사들과 식사를 하고 있다. |
아이젠하워는 퍼싱, 맥아더에게 멀티플레이어 선수처럼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업무추진 능력으로 호감을 얻었다.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1880~1959) 육군참모총장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후 그를 육군 사단장에 임명했다. 마셜은 그를 소장으로 발탁했고, 1942년 7월 중장 진급과 동시에 북아프리카 침공작전인 ‘횃불작전’ 사령관으로 ‘사막의 여우’라고 불린 에르빈 로멜을 격퇴했다.
북아프리카에서 대승한 그는 여세를 몰아 1943년 7월 시실리 상륙작전을 지휘했고, 이어 이탈리아 반도에 입성했다. 1943년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오버로드(Overlord)작전’ 아래 추진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수립과 집행을 총지휘했다. 그의 작전능력 덕분으로 연합군은 유사 이래 최대의 상륙 군사력을 한 곳에 집결시켰고, 기습시각과 장소를 작전 순간까지 독일군이 까맣게 모르게 소름끼치는 철벽보안을 유지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직(職)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국무장관 덜레스와 부통령 닉슨을 중용(重用)했고, 롤백(roll back)정책(反蘇외교정책)을 추진했다. 1948년 2차대전에 참전한 연합군(미군)을 십자군에 비유한 <유럽십자군(Crusade in Europe)>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아이크는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펜실베이니아 게티스버그 농장에서 은퇴생활을 하다 1969년 3월 26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미국의 국가원수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연거푸 다섯 차례나 만났다. 그는 진심으로 한국과 국군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한미(韓美)동맹이란 ‘큰 선물’을 준 고마운 분이다.
NLL 설정으로 수도 서울을 지킨 클라크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1896~1984·사진) 장군은 리지웨이 장군 후임으로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1952년 5월 유럽의 나토군 사령관으로 영전하자, 후임으로 버지니아주 포트먼로(Fort Monroe)에 사령부를 둔 미 야전군(Army Field Forces) 사령관인 클라크 장군을 임명했던 것이다.
그는 1952년 4월 30일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도쿄에 도착했으나, 얼마 후 한국의 거제도(巨濟島)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던 공산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급기야 협상하러 온 포로수용소장 도드(F. T. Dodd) 준장을 감금하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됐다. 그는 포로 폭동사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던 시점인 5월 12일 공식으로 사령관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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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반공포로들을 격려하고 있다. 클라크 장군은 1952년 4월 30일 유엔군사령관에 부임하기 위해 도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군 포로들의 폭동을 맞았고, 이어진 반공포로 석방으로 곤욕을 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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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9월 12일 클라크 5군사령관이 이탈리아 살레르노 전선에서 미군함정에 올랐다. |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패튼 장군이 지휘하는 3군에서 미 육군 사단들을 유럽전선에 파병(派兵)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일명 ‘루이지애나 대연습(Louisiana Maneuver)’ 멤버다.
그는 이탈리아 전선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에서 상륙작전을 통해 주요 거점인 나폴리와 안지오(Anzio)를 탈환했고, 수도 로마를 최초로 점령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카시노수도원을 점령한 독일군 공수부대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미 텍사스 주(州)방위사단(National Guard) 병력을 많이 잃게 된다.
그 결과로 텍사스 주 방위사단에 동원됐던 지역에 엄청난 과부(寡婦)가 생겨났고, 클라크 장군은 텍사스 주민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샀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클라크 장군은 내가 2군단장과 참모총장으로 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들을 대거 한국으로 초청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 장군들을 초청, 내가 재(再)창설하고 지휘했던 2군단 예하부대, 특히 포병부대를 방문해 한국군의 발전상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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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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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도쿄 방문 시 클라크 사령관 부부와 만나 담소하고 있다. |
이들 중 드골 대통령과 ‘상시르’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주앙 원수는 한국군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알제리 출신인 주앙 원수는 별이 7개 달린 모자를 썼고, 오른손을 다쳐 왼손으로 경례를 했다. 프랑스는 베트남군의 훈련과 정예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클라크 사령관은 주앙 원수에게 “한국군의 육성과정은 베트남군에게도 모델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53년 봄 베트남군 힌(Hinn) 참모총장(공군 소장)이 프랑스·베트남 혼성 참모진 10여 명과 함께 방한했다. 일행 중에는 훗날 8군사령관 테일러가 주월 미 대사로 재직하던 1963년 11월, 고딘 디엠 대통령을 쿠데타로 제거하고 국가원수에 올랐던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대령도 끼여 있었다. 고딘 디엠 대통령은 1957년 9월 방한해 6군단(白仁燁 중장)을 시찰했고, 1958년 나를 베트남에 초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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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1953년 1월 5일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도쿄에 있는 자신의 관저인 마에다 하우스로 초청해 요시다 시게루 일본수상과의 회담을 주선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부터 요시다 수상, 이승만 대통령, 클라크 사령관, 김용식 주일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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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2군단장일 때 클라크 장군의 초청을 받은 알렉산더 원수(맨 왼쪽)가 밴 플리트 8군사령관(가운데)의 안내로 2군단을 시찰했다. |
이로써 미 8군은 후방임무를 새로 창설된 KCOMZ에 인계하고 전투에만 매진하게 됐다. 우리 군은 1군사령부을 창설해 미 8군을 대신해 전방의 전투사단을 지휘하게 됐고, 1954년 2군사령부를 창설해 KCOMZ 대신 후방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클라크 장군의 공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풍부한 군정(軍政)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후 복구와 한국군 육성에 크게 기여했다. 클라크 장군의 아들 빌(Bill) 클라크 대위는 미 제9군단장 무어 장군의 부관이었으나 일선 소총 중대장으로 자원,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부상을 입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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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골 대통령과 상시르 육사 동기생인 주앙 원수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베트남군의 훈련과 정예화에 관심이 많았다. |
리지웨이 8군사령관 시절, 유엔군사령관으로 한국땅을 처음 밟았던 그는 내게 “한국은 이탈리아 산악지형과 유사하다”며 깊은 애정을 표시했다. 같은 군인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지형(地形)을 전술·전략 측면에서 바라보는 치밀한 군인이었다.
1952년 9월, 그는 남북한 전체를 주머니처럼 감싸는 모양의 해상봉쇄선인 ‘클라크 라인’(NLL의 전신)을 선포,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수도 서울을 사수한 공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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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9월 베트남 고딘 디엠 대통령이 방한해 필자의 아우인 백인엽 6군단장(가운데 서 있는 이)의 브리핑을 받고 있다. |
그러나 그는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 이승만 대통령을 지극히 존경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휴전 후 임무를 마치고 도쿄를 떠날 때까지 반공포로 사건 이야기가 나오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면서도 “명분을 적절히 구사해 실리(實利)를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手腕)을 어디서 터득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미국 역사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분”이라며 “위대한 사람(great man)”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약소국 대통령으로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 거인(巨人) 미국의 월터 로버트슨(Robertson) 특사를 상대로 외롭게 투쟁하며 한국의 장래를 위해 모든 것(2억 달러 원조, 육군 20개 사단에 상응하는 해공군 설치 승인)을 쟁취해 낸 이 대통령을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것이다.
7개 국어 능통한 軍政家, 테일러 美8군사령관
1953년 2월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하는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1901~1987·사진) 장군을 처음 만났다. 과거 8군사령관과는 달리 나는 비교적 대등한 위치에서 그를 만나게 됐다.
이전까지 나의 상관 겸 파트너였던 미 8군사령관들은 나보다 30년 이상 연상(年上)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군단급 이상의 전략 단위 부대를 지휘한 까마득한 ‘대선배’들이었다. 하지만 육군참모차장으로 있다 8군사령관으로 온 테일러는 전임자보다 여러 면에서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나는 국군 최초의 대장(大將)으로 참모총장이었다. 개전 초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사단급 이상 고급 제대 지휘관으로 다양한 전투를 지휘했고, 1952년에는 참모총장에 기용돼 전쟁의 주요 흐름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와 있었다.
특히 그동안 함께 싸웠던 상관이며 전우였던 워커, 리지웨이, 밴 플리트 장군을 통해 리더십의 본질과 연합작전, 그리고 군사전략을 알게 됐다. 게다가 전쟁이 3년째 접어들면서 국군의 작전능력과 지휘관의 지휘능력 향상, 그리고 국군의 전력 증강으로 국군도 개전 초기보다는 크게 발전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테일러 장군의 8군사령관 부임은 나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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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전투가 가열되기 직전인 1952년 말경, 화천 2군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2군단장, 이 대통령, 필자(육군참모총장), 테일러 미8군사령관. |
테일러 장군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면서 명석한 두뇌를 지닌 지휘관이었다. 그는 1922년 웨스트포인트를 4등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을 거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할 때, 그는 미 101공정사단장으로 글라이더를 타고 상륙했다.
이때 그의 전임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4사단 8연대장으로 유타비치에 상륙했고,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8군사령관이었던 리처드 스틸웰(Richard Stilwell) 대장은 그의 작전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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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4월 15일 한국군 최초의 야전군인 1군사령부 창설기념식. 실제 부대창설일은 2월 15일이었으나, 사령부 건물 건축 등 창설준비를 하느라 두 달 정도 늦어진 것이다. |
그는 웨스트포인트에서 5년간 프랑스어·스페인어 전임강사를 했고, 주일(駐日)대사관·주중(駐中)대사관에서 무관을 지낸 경력에서 알 수 있듯 7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한국에 부임한 그는 부관이었던 백행걸(白行傑) 준장(12사단장 역임)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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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4월 15일, 테일러 8군사령관이 육군지도창을 방문했다. |
하지만 1953년 7월 중공군의 공세 때 그는 경(輕)비행기에 의한 병력 수송 등 신속하고도 과감한 조치로 적의 최종 목표인 화천저수지를 사수(死守),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1953년 6월 18일 전국에 걸친 반공포로의 석방은 그에게는 악몽(惡夢)이었다. 그는 그 일을 추진한 원용덕(元容德) 장군을 “반미주의자”라며 적대해 내가 무마시킨 적도 있다.
휴전 후 테일러는 국군 증강과 복구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휴전으로 군사분계선이 새로 설정되자, 군사분계선상에 새로운 방어 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했다.
그는 ‘미군의 한국재건(AFAK: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계획을 수립, 대규모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전방은 미 8군이 맡고 후방은 병참관구사령부(KCOMZ)가 맡아 미군 자재(資材)를 방출하고, 한미 양국군의 노동력을 이용해 약 900개의 학교, 300개의 교회, 200개씩의 병원과 고아원, 100개의 교량을 복구했다.
미군은 연세대의대병원, 대구 효성여대, 강릉 관동대의 건물도 새로 지어줬다. 특히 그는 전투사단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새로 3·5·6군단을 창설, 미군 10·9·1군단과 각각 교대시켜 전선을 담당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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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3월 26일, 미8군사령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테일러 장군이 필자에게 미 공로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
1954년 5월 원주에 정식으로 사령부를 설치한 1군은 4개 군단, 16개 사단을 휘하에 두고 중부·동부전선을 총괄하는 동양 최대 규모의 야전군이었다. 이때 테일러는 이승만 대통령께 “군사령관이 참모총장보다 직위가 낮지만, 야전군이 동양에서 처음 창설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전투 경험이 가장 많은 제너럴(General) 백(白)이 맡아야 한다”며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현리(縣里)전투에서 3군단이 대패하자, 한국군의 정보·작전권을 박탈했던 미군이 휴전 이후 휴전선 155마일 방어를 위해 한국군에 작전권을 되돌려주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그는 또 병참관구사령부(KCOMZ)를 대신해 2군사령부와 그 예하에 10개 예비사단을 창설, 전후 국군 증강에 크게 기여했다(1973년 7월 미7사단이 철수하면서 3군사령부 창설). 그는 극동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지낸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특히 케네디 정부 시절, 1962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까지 11일간 소련이 핵탄도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대치해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을 때, 그는 합참의장으로 해상봉쇄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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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78회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왼쪽부터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 웰스 영연방 1사단장, 이 대통령, 테일러 사령관, 김태선 서울시장 부인. |
그는 이 책에서 핵무기를 통한 대량보복전략으로 미국이나 우방국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오산(誤算)이며, 핵전쟁에 대한 대응전략을 만드는 동시에 게릴라전을 대비한 군사력도 건설하자는 이른바 ‘유연반응전략’을 주장했다.
1961년 4월 소련이 때맞춰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1호 발사에 성공하자, 충격을 받은 케네디 정부는 테일러 장군이 주장한 ‘유연반응전략’을 국가 기본전략으로 채택했다. 미국에서 책이 출간되자마자 주문해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테일러가 부임한 지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아 휴전이 되는 바람에 그의 리더십을 배울 기회는 적었지만, 그는 입버릇처럼 “지휘관은 놀라지 말아야 한다(Commander never surprise)”고 말했다. 리더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갖고 항상 미리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야 하며, 예측하지 못한 사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가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육군을 개편, 당시 155마일 휴전선 전체를 책임지는(현재는 서부전선을 3군이 동부전선은 1군이 각각 담당하고 있음. 3군사령부는 미 7사단 철수에 따른 대응책으로 1973년 용인에서 창설) ‘제1야전군’을 만든 것도 ‘지휘관은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지론(持論)을 실천한 것이다.
‘제독의 반란’으로 좌천당해 참전한 해군영웅, 알레이 버크
1951년 6월, 전선은 임진강에서 철원, 김화를 거쳐 거진에 이르는 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는 ‘공격은 계속하되 대작전은 피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진을 포기한 연합군은 차후 목표를 정전(停戰)에 두었다.
이 무렵 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됐다. 38선 부근에 형성된 현 전선을 중심으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려는 진지전(trench war)으로 굳어졌다. 1차대전 때 서부전선과 흡사한 것이다.
이때 나는 미 해군의 전설적 인물을 만난다. 당시 동해상에는 해롤드 마틴 중장이 지휘하는 미7함대 소속 제5순양함대가 배치돼 있었다. 알레이 버크(Arleigh A. Burke·1901~1996) 소장이 지휘하는 이 함대는 순양함 로스앤젤레스호를 기함(旗艦)으로 미 해군의 순양함·구축함에 캐나다 해군 구축함 두 척이 가세(加勢)하고 있었다. 때로는 미주리, 뉴저지, 아이다호 등 전함까지 더해 교대로 함포사격을 지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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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무렵 미 해사 생도 시절의 알레이 버크. |
바다와 거리가 먼 콜로라도주 출생인 버크 제독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임관했다. 2차대전 때는 미첼 제독의 참모장을 역임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중 솔로몬 해전에서 구축함대를 지휘했고, 오키나와 작전 중 가미카제(神風)특공대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일본군의 순양함(1척)·구축함(9척)·잠수함(1척)·항공기(30대) 등을 격파하는 전과를 기록했다. 구축함을 엔진이 폭발할 위험성을 무릅쓰고 31노트(시속 57.4km)로 달려 ‘31노트 버크’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전후 일본 해상자위대를 건설한 주역이었다. 그는 해상자위대에 초계함(PF) 30여 척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일본 해군을 재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1949년 소위 ‘제독의 반란(Admiral Revolt)’ 사건으로 미 극동해군으로 좌천해 있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제독의 반란’이란 당시 존슨 국방장관이 “B-36 폭격기만 있으면 항공모함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펴자, 이에 반기(反旗)를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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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당시 미 7함대 소속으로 알레이 버크 제독이 지휘하는 제5순양함대가 교대로 함포사격을 지원하고 있다. |
버크 제독은 내게 “나는 귀하의 포병사령관”이라며 내 지원 요청이 있을 때마다 최대한 받아주었다. 돌이켜 보면, 전쟁 중 이처럼 미 육해군에서 가장 탁월한 군인들과 만나 함께 싸우게 된 것은 나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버크 제독은 훗날 퓰리처상 수상작가 존 토어랜드가 그에 관한 책을 준비하기 위해 작성한 인터뷰 초고(草稿) 중 나와 관련한 부분을 내게 보내기도 했다. “혹시 착오가 있다면 조언해 달라”는 세심한 배려였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내가 제5순양함대에 있을 때 중요한 일로 기억되는 것이 있다. 그해(1951년) 5월 내 오랜 친구 백선엽 소장이 지휘하는 아군 지상군 한국군 1군단은 공산군을 격퇴하고 있었다. 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북진했고, 나는 해안 함포사격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함대의 함포는 백 소장이 가진 화력의 전부였다. 우리가 가진 함포는 6인치, 8인치 포와 구축함의 함포 및 기관포 등이었다. 상당한 화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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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함포 지원을 협의하기 위해 이따금 로스앤젤레스함으로 가 버크 제독(맨 왼쪽)을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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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은 밴 플리트 8군사령관과 함께 알레이 버크 제독을 만나러 가다 돌풍이 부는 바람에 헬기가 추락할 뻔한 적도 있었다. |
알람 손목시계를 오후 4시에 맞추고 전선에 들어갔으나 곧 고장이 나버렸다. 우리 일행은 신속히 매복했다. 곳곳에는 수많은 참호(塹壕)가 있었다. 밤새 수많은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 … 밴 플리트 사령관이 방문하자 백 소장이 전황을 보고했다. 보고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그가 나를 지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은 본관의 포병사령관 알레이 버크 제독이 설명하겠습니다.”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해 주지 않았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주섬주섬 브리핑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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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순양함대에 배속된 순양함 미주리호를 방문해 사열을 하고 있다. |
나는 당시 일을 통해 해군은 육군과 여러 가지 다른 관행을 갖고 있음도 볼 수 있었다. 함대사령관은 정보, 작전, 통신장교로 구성된 참모진을 갖고 있다. 전함이나 순양함장들은 식당조차 가지 않고 함교를 지키며 군함을 지휘한다.
전문(電文)도 함장에게 가장 먼저 전달된다. 식사는 하루 네 끼였다. 미 해군은 함정에서 금주(禁酒)인 반면, 캐나다 해군은 음주(飮酒)가 허용됐다. 따라서 내가 보트 편으로 오갈 때 캐나다 구축함장은 나를 초대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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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9월 16일 필자는 생전의 알레이 버크 제독과 함께 그의 이름을 딴 알레이버크급 구축함(DDG-51·사진) 명명식에 참석했다. |
미 해군에서는 새로 건조한 신형구축함 이지스형을 ‘R. E. 버크’라고 명명할 정도였다. 미 해군 역사상 생존해 있는 사람의 이름을 구축함에 명명(命名)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989년 9월 16일, 나는 알레이 버크 제독과 함께 그의 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미 동부 메인주(州)의 바스메인조선소(Maine shipyard Bath)를 방문했다. 바스메인조선소는 2차대전 기간 중 구축함 40여 척을 건조한 조선소였다. 미 해군이 알레이 버크 제독의 이름을 딴 8000t급 알레이버크 1호함(DDG-51)의 진수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알레이 버크 제독은 그의 부인과 함께 앞자리에 앉아 감개가 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알레이 버크 제독의 부인은 관례에 따라 샴페인을 터트렸고, 남편보다 멋진 연설을 해 참석자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스웨덴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그는 1973년 스웨덴 국왕(國王)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사망하자 미국을 대표해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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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7월, 망중한을 즐기는 유엔 측 휴전회담 대표들. 왼쪽부터 미8군참모부장 호디스 소장, 알레이 버크 제독, 연락장교 이수영 대령, 그리고 필자다. |
그는 1951년 초 해군사관학교를 방문, 도서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미국으로 돌아가 해군 잡지
알레이 버크 제독은 6·25전쟁 당시 로스앤젤레스함 연락장교(중위)였던 박찬극(朴贊極) 준장 등 한국 해군 장교 5명을 ‘양아들’로 삼기도 했고, 1967년 봄 한국의 구축함 도입문제가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부결됐을 때, 몸소 ‘해결사’로 나선 친한파(親韓派)였다.
1996년 정월 초하룻날, 버크 제독은 42년의 전설 같은 해군 복무의 기록을 뒤로하고 메릴랜드에서 94세를 일기로 사망해 아나폴리스의 해사 묘지에 묻혔다. 그는 갔지만 그의 이름을 딴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은 오늘도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전술’을 폭로한 찰스 조이 제독
북한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크게 당황했다. 휴전회담은 소련 부외상 겸 유엔대표 말리크가 1951년 6월 23일, 미국 CBS방송을 통해 최초로 제의했고, 일주일 뒤인 6월 30일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이 원산항에 정박한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 선상에서 회담을 열자고 장소를 제안하면서 성사됐다.
내가 휴전회담 유엔군 측 수석대표인 미 해군의 찰스 터너 조이(Charles Turner Joy·1895~1956·사진) 제독을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7월 초였다. 알레이 버크 제독이 속초 1군단사령부를 찾아와 “급한 용무가 있으니 도쿄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이임(離任) 인사를 왔다. 급한 일은 다름 아닌 곧 열리게 될 휴전회담 대표요원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버크 제독이 다녀간 다음 날 밴 플리트 사령관으로부터 군단사령부가 아닌 간성(杆城) 해변가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점심으로 준비한 샌드위치를 나눠주며 “휴전회담이 곧 열리게 된다는 뉴스를 들었느냐” “중국어를 하느냐”고 뜬금없이 묻고는 별 말 없이 떠났다.
다음 날, 이종찬(李鍾贊) 참모총장이 전화를 걸어 “곧 휴전회담이 열리는데, 유엔군 측 요청으로 한국 측 대표가 됐다”고 했다. “군단장 임무는 계속 수행하되, 부군단장 장창국(張昌國) 준장에게 군단장을 대신 맡게 하고 즉시 부산으로 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7월 8일 경비행기 편으로 부산으로 날아가 경무대를 찾았다.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미국사람들은 휴전을 하려고 하는데, 100만 중공군이 내려와 있는 마당에 휴전이 말이 되는가. 우리는 통일이 목표야. 지금 휴전하는 것은 국토를 분단하는 것이야. 나는 절대 반대다.”
나는 “저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참모총장께서 휴전회담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했으나 각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참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사람들이 저러니 안 갈 수도 없다”면서 “미국사람에게 협조하는 뜻도 있고 하니 참석하라”고 했다.
문산 동편 개울가 사과밭에는 휴전회담 관련 요원들이 묵을 천막촌이 ‘평화촌’이라는 이름으로 차려져 있었다. 유엔 측 회담대표는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을 수석(首席)으로 미 8군참모부장 행크 호디스 소장, 미 극동공군 부사령관 로렌스 크레이기 소장, 미 극동해군 참모부장 알레이 버크 소장, 그리고 나였다.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극동해군 총사령관으로 서열상 2인자인 조이 제독을 회담 수석대표로 임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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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7월 10일 개성 회담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한 유엔군 측 대표들. 왼쪽 두 번째부터 크레이기 소장, 필자, 수석대표 조이 해군제독, 리지웨이 대장, 호디스 소장. |
회담장소는 개성 동북쪽 선죽교(善竹橋)에서 멀지 않은 내봉장(來鳳莊)이라는 한옥이었다. 내봉장에서 가까운 인삼관(人蔘館)이 유엔 측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장소로 지정됐다. 헬기로 인삼관 근처에 내려 육상으로 온 실무진과 합류해 다시 지프로 옮겨타고 내봉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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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장인 내봉장 앞뜰에 선 공산 측 대표단. 왼쪽부터 중공군 대표 셰황, 덩화와 북한 측 수석대표 남일, 이상조, 장평산. |
조이 사령관은 첫 발언에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투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휴전선 확정, 포로교환, 휴전의 시행과 보장을 위한 방안 등을 의제로 제안했다.
남일 중장은 “38선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선이고 전쟁 전에도 38선이 경계선이었으므로 휴전선은 마땅히 38선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녹음테이프를 틀어놓은 것처럼 반복했다. 이럴 때마다 조이 사령관은 “전쟁에서 잃은 것을 회담에서 되찾으려 하지 말라”고 응수했다.
회담이 두세 차례 진행됐을 즈음, 나를 찾아온 이기붕(李起鵬) 국방부장관은 “우리 정부 입장으로는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휴전을 해야지, 현 상태로는 반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말이나 이기붕 장관의 말을 종합하면, 나는 평화회담에서 내 입장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나는 친분이 있는 버크 제독에게 “우리 정부가 이 회담에 반대하는데, 내가 한국 측을 대표해서 계속 회담장에 앉아 있기가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상의했다. 버크 제독은 “수석대표인 조이 제독과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며 조이 제독과의 면담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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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 후 필자의 도움을 받아 헬기에서 내리는 조이 수석대표. |
조이 대표는 내 설명을 듣자 당황했다. 그는 “공산 측은 물론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때에 휴전회담 대표단 안에 불화(不和)가 있는 것처럼 알려지면 곤란하다”며 “당신은 지금 국군이 아니라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휘하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어떻든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보고해 결론을 얻어줄 테니 그때까지 회담에 계속 참석해 달라”고 했다.
내가 조이 제독에게 입장을 전달한 지 2~3일 후에 이기붕 국방장관이 평화촌으로 찾아와 ‘나는 유엔군 측이 대한민국을 분단하는 여하한 협정도 원하지 않으나, 유엔 측에 협력해 휴전회담에 계속 참석하라’는 요지의 이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다. 나는 우리 정부의 희망을 그때그때 유엔 측에 전달해 회담에 반영시켰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도쿄에서 날아와 평화촌을 방문했기 때문에 자주 대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나라가 과거 통일국가로서의 전통을 갖고 있어 휴전도 통일을 전제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도 어디에서 들었는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일본 발음으로 외우기도 하고, 삼국시대를 예로 들며 “한국은 과거에도 세 갈래로 나뉜 적이 있었다”고 반론을 폈다.
터너 조이 제독은 공산 측의 합의 위반·변덕·술수·골탕 먹이기로 곤욕을 치렀다. 일찍이 조이 제독은 북한의 회담 전술을 ‘살라미(칼로 잘게 썰어 먹는 이탈리아 소시지) 전술과 벼랑끝 전술’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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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7월 10일, 개성 회담장으로 조이 수석대표의 아들 조이 중위가 찾아왔다. 그는 제10군단 제4통신대대 장교였다. |
즉 상대방의 협상제의에 서둘지 말고 느긋하게 대처할 것, 상호주의에 입각해 양보가 없는 일방적 양보를 하지 말 것, 협상 전에 목표를 설정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칙을 고수(固守)하라는 충고다.
6·25전쟁 50주년 때, 공병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조이 제독의 아들은 1950년 웨스트포인트 졸업 동기생 20여 명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휴전회담장인 판문점으로 아버지 조이 제독을 찾아왔을 때, 본 적이 있어 구면(舊面)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작고 전 내 이름을 쓰고 사인까지 해 놓은 책을 가져왔다. 감개가 무량했다.
세인트루이스 출신인 조이 제독은 1916년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함 ‘펜실베이니아’에서 4년간 근무하며 1차 세계대전을 치러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대(對)일본 해상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42년, 그는 순양함 ‘루이스빌’ 함장으로 남태평양과 알류산 열도에서 전공을 세웠다. 1년 반 동안의 활약으로 그는 순양함대 사령관의 자리에 올랐다.
6·25전쟁이 발발할 무렵, 그는 극동함대사령관으로 부임했고, 1952년 5월까지 활약했다. 1951년 휴전회담 유엔군 측 수석대표를 맡았고, 귀국해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1954년 퇴역했다.
영국 담배를 즐겨 피운 ‘체인스모커’인 그는 철저한 제해권(制海權)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성품이 젠틀한 ‘네이비맨’(navy man)이었던 그는 1956년 샌디에이고 해군병원에서 사망했고, 모교인 해군사관학교에는 ‘터너 조이 로드’가 생겼다. 미 해군은 그의 이름을 기려 1959년 구축함 ‘터너 조이’를 진수할 때 그의 이름을 붙였다.
미군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GI General’, 브래들리
1951년 9월 하순, 미국의 합참의장 오마르 브래들리(Omar Bradly·1893~1981·사진) 원수가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내가 군단장으로 있던 속초의 1군단사령부를 방문했다.
내가 군사고문단장에게 “미군 원수가 오셨으니 군사고문단장이 예우상 운전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자, 군사고문단장은 “좋은 생각”이라며 운전대를 잡았다. 뒷좌석에는 1군단장인 나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앉았다.
그는 휴전회담에 임한 미군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따른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온 것이다. 내가 휴전회담 대표에서 1군단장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전선(戰線)은 소강상태가 지속됐다. 그러나 우리가 동쪽 측면을 지키고 있는 동안 뒤처진 미10군단이 10월 중순까지 양구지구와 사태리(沙汰里)와 문등리(文登里) 계곡을 빼앗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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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포인트 시절의 브래들리. |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공산군이 부대를 재편하고, 진지(陣地)를 요새화(要塞化)하는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군에게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준 결과, 유엔군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고, 그 이후 큰 작전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았다.
동부전선을 담당한 1군단은 전선이 고착(固着)된 가운데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분투했다. 지도를 보면 휴전선이 향로봉(香爐峰)에서 곧장 동북쪽으로 치솟아 동해안의 해금강(海金剛) 아래로 빠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해안은 당시 국군 군단이 담당한 유일한 정면(正面)이었다. 만약 그때 이곳을 유엔군이 맡고 있었다면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유엔군은 영토(領土) 확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북진의 선봉에 선 수도사단은 최북단(最北端)까지 진출해 치열한 적의 반격을 저지했다. 이때 함참의장 브래들리 원수가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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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6월, 프랑스 북부 셰르부르에서 1군사령관 오마르 브래들리 중장(왼쪽)이 로톤 콜린스 소장으로부터 전황보고를 받고 있다. |
당시 프랑스 해안으로부터 돌파구를 마련한 직후 그는 130만명으로 구성된 제12군 지휘를 맡아 독일 내륙까지 깊숙이 쳐들어가 나치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한 사람의 전쟁영웅으로 성공할 수 없는 대규모 전투였다. 미국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는 물론 브래들리,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 등이 긴밀하게 협력해 이룩한 공동의 승리였다.
이때 130만명의 대군은 미군 역사상 단일 편성으로는 최대의 군사력이었다. 브래들리는 큰 전투에서도 항상 상식(常識)에 충실하고, 일반 병사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펴 ‘병사 장군(GI General)’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브래들리는 개성과 쇼맨십이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미군 내에선 패튼보다 더 인정받는 군인이었다. 보병전술도 능했다. 인덕(仁德)이 있어 ‘적장(敵將)도 존경하는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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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노르망디 해변에서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가운데)과 육군 항공작전사령관 헨리 아널드 대장(오른쪽)이 브래들리 중장과 작전을 협의하고 있다. |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했던 브래들리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지 9년 만에 겨우 소령 계급장을 달았고, 중령 진급 때까지 1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 기간 그는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의 주목을 받는다. 1941년 2월 마셜 장군은 브래들리에게 보병학교 교장 자리를 추천했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때 브래들리는 잠시 82사단장·28사단장을 연속으로 맡는다.
브래들리의 최초 전투 임무는 동기생인 아이젠하워 장군의 부관 역할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당시 북아프리카 주둔 미군사령관이었다. 그의 첫 일선 전투임무는 또 한 사람의 전쟁영웅인 조지 패튼 장군 밑에서 제2군단 부사령관을 맡아 지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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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1월, 브래들리 원수가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의 수행을 받고 필자가 군단장으로 있던 속초의 1군단사령부를 방문했다. 뒷좌석에는 1군단장인 필자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앉았다. |
그러나 1943년 10월 아이젠하워는 브래들리를 미 제1군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제1군은 ‘오버로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이때 다혈질인 패튼 장군은 여러 명의 부하를 구타한 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1군사령관으로 발탁되지 못했다. 거꾸로 그의 부하였던 브래들리의 부하로 ‘강등’돼 전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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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6·25전쟁 발발 직전의 오마르 브래들리 합참의장. |
1950년 브래들리는 출중한 극소수 미군 장성들에게만 수여되는 영광의 5성장군(원수)으로 진급했고, 1953년 8월 예비역으로 물러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하고 본토 근무만 하며 울분을 삭였던 브래들리는 꾸준한 노력과 각고의 인내로 다져진 강인함과 포용력으로, 유능했지만 성급했던 패튼을 누르고 군인으로 성공했다. 전형적인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인물이다. 5성장군의 영광, 두 번 임기의 초대 합참의장까지 역임한 그는 1981년 4월 8일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미 육군의 M2·M3 보병 전투장갑차를 ‘브래들리’ 장갑차로 부를 만큼 그는 미군 장성 중 가장 사랑받는 전설적 영웅으로 남아 있다.
독일군조차 인정한 ‘번개 조(lightning Joe)’ 콜린스 합참의장
조셉 콜린스(Joseph Lawton Collins·1896~1987·사진) 육군참모총장은 6·25전쟁 기간 동안 세 차례나 한국을 방문, 전선을 시찰했다. 다부동 전투가 한창인 1950년 7월 워커 8군사령관을 대동하고 다부동의 동명초등학교를 방문했는가 하면, 1951년 10월 5일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 부근을 시찰했다. 1952년 6월 22일 그는 2군단 포병지휘소를 방문, 포병의 계산법 등에 대해 질문했고, 사격명령을 즉석에서 내린 후 2군단 포병이 제원(諸元) 산출 등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시간을 측정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군 포병들의 수학적 계산 능력이 너무 빨라 놀랍다”면서 “미군 포병 노하우를 단시일 내에 따라잡을 것 같다”며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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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1월 26일, 육군본부를 방문한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태극기를 전달했다. |
그의 군인으로서의 인생은 퍼싱 장군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퍼싱의 부관과 제11기병사단 중대장을 거쳐 1920년부터 4년간 육군성 참모로 워싱턴에서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맥아더 태평양사령관 밑에서 하와이주둔 태평양 제25사단장으로 활약했다. 1943년 1월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잔인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유명한, 과다카날의 일본군사령부가 있는 코쿰보나 전투에서 일본군 40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번개 조(lightning Joe)’라는 별칭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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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부동 전투가 한창인 1950년 7월 워커 8군사령관을 대동하고 다부동 동명초등학교를 방문한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
콜린스는 유럽전선에서 제7군단장을 맡아, D데이에 맞춰 그의 부대원들을 유타비치에 상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셰르부르까지 순조롭게 진군했고, 생로에서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해 브리타니에 있는 조지 패튼 장군과 미 3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7군단은 1945년 3월 11일 프랑스 레지스탕스군과 연합, 나치독일 점령지역으로 진군했고,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루르와 콜론네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파더본에선 치열한 접전 끝에 독일의 발터 모델 장군이 이끄는 30만명의 독일군을 패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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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6월 22일, 2군단 포병지휘소를 방문한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이 포병 요원들에게 포병의 계산법 등에 대해 질문했고, 사격명령을 즉석에서 내린 후 2군단 포병이 제원(諸元) 산출 등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시간을 측정하고 있다. |
그는 1956년 전역했고, 1979년 자서전 <번개 조>를 펴냈다. 그의 형(兄) 제임스 로톤 콜린스는 육군 소장, 그의 조카 마이클 콜린스는 공군 소장 출신으로 1969년 아폴로 11호 우주인으로 달에 착륙했다. 1987년 9월 12일 워싱턴DC에서 사망,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미군 최고의 군사훈련 전문가’, 브루스 클라크
패튼 전차군단에서 이름 날린 명장, 에이브럼스
1954년 봄, 미 8군사령부는 1군사령부를 창설, 한국군 요원들의 훈련을 담당할 미 10군단장에 브루스 클라크(Bruce C. Clarke·1901~1988) 중장을 임명했다. 퉁퉁한 인상의 그는 미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훈련 전문가였다. 그는 27연대장으로 다부동에서 함께 싸웠던 마이켈리스 대령과 웨스트포인트 동기였다. 국군의 군단이 단기간에 5개군단으로 확대 편성됨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의 지휘체계에도 변화가 왔다. 그것은 1군사령부의 창설로 상징된다. 1953년 12월 2사단장 김웅수(金雄洙) 소장이 후임을 강영훈(姜英勳) 소장에게 넘겨주고 1군참모장에 내정됐다. 그는 강원도 인제군 관대리 미 10군단사령부로 창설준비 요원들과 함께 들어갔다.
요원들의 훈련을 담당할 미 10군단장에 유럽주둔군 사령관을 역임한 브루스 클라크 중장, 참모장엔 에이브럼스 대령이 임명됐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군인이었다. 테일러 8군사령관은 내게 “미군 전체를 통틀어 군사훈련에 관한 한 브루스 클라크를 능가하는 군인은 없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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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봄 미8군으로부터 1군야전군사령부 창설 임무를 띠고 온 브루스 클라크 10군단장. 그는 미군 교육훈련의 일인자다. |
나는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4성 장군이었지만, 국군은 그때까지 군단급보다 상위의 사령부를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대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배울 것은 겸허히 배워야 했다.
나는 미 10군단에 합류, 1군 창설작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나 자신도 클라크 군단장과 에이브럼스 참모장이 실시하는 교육에 참가했다.
1군사령부는 1954년 4월 강원도 원주에서 정식으로 발족했다. 1군사령부는 1, 2, 3, 5군단을 휘하에 두고, 중부와 동부전선을 총괄하게 됐다. 그리고 4개 군단의 16개 사단을 지휘하게 돼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 야전군의 하나로서 위용을 갖추게 됐다.
서부전선은 미1군단(3개 사단), 국군 6군단(4개 사단)을 합해 제1집단군단(1st Corps Group)으로 재편됐다. 이것이 훗날 한미야전사령부의 전신이다. 한미야전사령부는 1992년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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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이 1군사령부 창설을 위해 파견된 클라크 중장 등 미8군장성들을 격려하고 있다. |
1군사령부가 전방을 담당한 데 이어 2군사령부 휘하에도 1955년부터 예비사단이 창설돼 후방의 향토방위 및 유사시의 예비전력으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광주, 전주, 조치원, 증평, 안동, 원주, 대구, 창원, 수색, 소사의 10개 예비사단이 그것이었다.
클라크 장군은 1917년 뉴욕주 방위군 소속으로 육군에 입대했고,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했다. 1925년 졸업한 그는 공병단에 배속됐다. 그는 독특한 학력의 소유자다. 그는 코넬대에서 엔지니어링으로 학위를 받았고, 라살르대학에서 받은 법학사 학위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12월 기갑부대장(준장)으로 발지(Bulge) 전투(일명 독일의 아르덴 반격작전)에서 교통 요지인 생비트(St.Vith)와 바스토뉴(Bastogne)에서 독일군의 물밀듯한 공격에 쐐기를 박았다.
그 결과, 5000대가 넘는 연합군 항공기들이 독일의 기갑부대와 병참선을 강타했고, 패튼 휘하 미 제4기갑사단이 바스토뉴의 독일군 포위망을 풀고, 고군분투(孤軍奮鬪)해 온 제101공수사단을 구출했다. 당시 제4기갑사단 로버츠 대령(초대 군사고문단장)이 지휘하는 전차연대 소속의 에이브럼스 중령은 일착으로 101공정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진격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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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11월 6일, 미 육군참모총장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대장(왼쪽)이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다. |
당시 그의 전공(戰功)에 대해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격찬했다. 그는 6·25전쟁에서 1군단장과 10군단장을 역임했다. 1958년 대장으로 승진했고, 1960년 미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다 1962년 퇴역했다.
유럽전선의 미 7군 전차훈련장을 만든 클라크 장군은 한국군의 훈련장도 마치 ‘골프장을 디자인하듯’ 인구 밀집지역을 피해 건설했다. 포천의 나이트메어, 동두천의 로드리게스 훈련장을 비롯해 한국군과 미군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훈련장은 그의 손을 거쳐갔다.
그는 내게 “훈련장은 인구가 밀집되기 전에 조성해야 한다”면서 “군인은 좋은 상관을 만나야 성장한다”고 말하곤 했다. 클라크 장군의 뒤를 이어 큰아들은 육군소장으로 전역했고, 차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 지상군 교육사령관(대장)을 지냈다.
베트남전 영웅인 크레이튼 에이브럼스(Creighton Williams Abrams·1914~1974) 대령 역시 2차대전 당시 패튼 3군사령관 휘하에서 이름을 날린 명(名)전차 대대장이었다. 1914년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서 기관사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1936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미1기병사단 장교로 근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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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 근처에서의 패튼(왼쪽). 그는 에이브럼스를 “최고의 전차지휘관”이라고 했다. 패튼은 1945년 12월 9일 독일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
미군은 최신형 전차(M1)에 그의 이름을 따 ‘에이브럼스 전차’로 부르고 있다. 패튼 장군은 “에이브럼스는 가장 위대한 전차 지휘관”이라면서 “나는 에이브 에이브럼스(Abe Abrams·라이프誌에서 붙인 에이브럼스의 애칭)라는 동료를 가졌다. 그는 진정 세계 챔피언”이라고 했다.
그는 예의도 발랐다. 1967년 5월, 그가 베트남 주둔 미군사령관으로 간 지 나흘 만에 베트남 참모총장 초청으로 그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함께 자리한 신상철(申尙澈) 주월 대사에게 “옛날의 상관(나)이 오셨는데, 제가 헤드테이블에 앉지 않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에이브럼스 장군은 세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다. 재미있는 것은 세 아들 모두 육군 장교가 됐고, 세 딸은 모두 육군 장교의 아내가 됐다. 큰아들 크레이튼 윌리엄스 에이브럼스는 예비역 준장, 둘째 존 넬슨 에이브럼스는 예비역 육군대장, 셋째 로버트 부르스 에이브럼스는 예비역 육군준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