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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⑪ 땅 이야기- 한국인의 뒷모습, 붉은 산,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기뻐서 죽사오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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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지식인 기무라 에이분과의 만남… ‘한국인은 위대한 사람’
⊙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情恨의 밤車 中)
⊙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나는 거의 잊어버렸어. 성경에도 있어요. 용서하라고”(제암리 학살 사건 생존 할머니)
⊙ 6·25 때 줄지어 질서 정연하게 피란하는 모습에 세계가 감탄
⊙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 ‘나’와 ‘삵’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 노래 ‘애국가’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심훈의 ‘그날이 오면’ 中)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9개월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어령 전 장관. 2016년의 환한 모습이다.
  # 한국인의 진짜 뒷모습은…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의 진짜 뒷모습을 몰랐어요. ‘아! 그게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았구나’라고 생각한 것은 내가 이화여대 교수가 된 뒤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년)를 쓴 후예요.
 
  1960년대 남진의 ‘가슴 아프게’라는 노래가 나오고, 이미자 노래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일본에 한류 붐이 막 일려고 할 때였어요. 그때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에 기무라 에이분(木村榮文·1935~2011년)이라는 아주 양심적인 지식인이 있었어요. 상도 많이 타고 다큐멘터리도 아주 잘 찍는 사람이었지요.
 
기무라 에이분이 촬영해 일본 RTV에서 방영한 ‘봉선화 필 때’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그분이 1970년대 초반에 일본 RTV에서 〈봉선화 필 때〉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이 기무라 에이분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있을 때 알던 한국인 친구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래서 그 한국인 친구들이 그 시절, 얼마나 가슴 아프게 지냈는가를 현장 취재하러 오면서 나를 만난 거예요. 그때 취재 대상이 가수 이미자, 나, 그리고 1919년 4월의 비극적인 수원 제암리 사건 때 살아남은 생존자 할머니였어요.
 
  내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전 세계에서 번역될 때였는데 이웃 일본에서는 《恨の文化論(한의 문화론)》으로 소개되었지요. 당시로선 우리나라를 최초로 다룬 ‘한국문화론’이었어요. 그 무렵, 우리는 일본이 그렇게 다들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인데, 그는 한국에 와서 뜻밖에도 ‘한국인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겁니다.
 
  나 역시 ‘한국인의 뒷모습’(《월간조선》 9월호, 10월호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⑨ ⑩편 참조)을 떠올리며 다시 말해, 지프의 경적 소리에 놀란 노부부가 서로 손을 꼭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모습만 생각한 거예요. 그 모습이 떠올라 한국인은 그냥 그렇게 쫓겨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참 불쌍한 한국인, 지지리도 못났다고 생각했죠.
 
 
  우리 민족이 중국을 지배하지 않은 이유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 기무라 에이분.
  고백하자면, 남들은 다른 나라 쳐들어가서 온갖 것을 다 빼앗아 오는데, 물론 그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정복하는 사람이 되지 왜 맨날 정복당하고 빼앗기는가, 하고 답답해했었어요.
 
  중국을 보세요. 원(元)나라를 세운 몽고족,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족,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 모두 중국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와 같은 변방 오랑캐거든요. 그 사람들 중에 중국 전역을 한 번쯤 지배해보지 않은 민족이 없어요. 오직 우리 한(韓)민족만이 중국을 지배해보지 못했죠.
 
  그런데 요즘 보세요. 중국을 지배했던 변방 민족 중 자민족의 국가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다른 민족은 중국 본토에 세웠던 나라가 망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거든요. 우리가 중국을 지배하지 않았던 것도 다 생각이 있었던 거죠.
 
  기무라 에이분의 다큐멘터리는 한국의 여학교 학생들이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해요. 왜 이 노래였을까요? 1920년 만든 홍난파 작곡, 김형준 작사의 이 노래에는 한국 가곡의 효시, 조선 독립을 애타게 기다리던 백성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다큐에는 또 나의 인터뷰와 함께 기차역 장면이 삽입되었죠. 그 인터뷰를 하면서 노래도 불렀어요. ‘정한(情恨)의 밤차(車)’라는 곡인데, 1935년에 발표된 노래예요. 나는 노래를 못하는 사람인데, 이 노래는 잘 불러요.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1.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2. 간다고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으랴.
  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
 
  3. 님이여 술을 들어 아픈 맘을 달래자.
  공수래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

 
  어릴 때의 기차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차와 달랐어요. 나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기차를 타고 우리 고향에 도착했던 사람들은 모두 늑대와 같았어요. 우리 형을 빼앗아가고 우리 어머니나 누이를 능욕한 짐승 같은 사람들이었죠. 기차를 타고 도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 기차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지요. 또 기차를 타고 가는 조선인들은 죄다 고향을 등지거나 고향을 떠나는, 아니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었어요.
 
  소작 짓던 땅을 빼앗기고, 도저히 조선 땅에서는 먹고살 길이 없어서 저 용정이니 만주, 간도 땅으로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동남아로 징용, 학도병으로 끌려간 사람들….
 
  그래서 한국인의 노래 속에는 기차 타고 떠나는 사람들의 한(恨)이 있어요. 일본에서는 원(怨)이나 한(恨)을 구별해서 쓰지 않지만, 일본 사람들은 원수를 갚는 원이고, 우리는 한을 푸는 한을 써요. 다르죠.
 
 
  # ‘기차는 떠나간다’ 노래에 얽힌 기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담긴 ‘노부부’는 지프에 치일 뻔한 거잖아요. 그러나 그 이전에는 무시무시한 기차가 있었던 거지요. 근대의 상징이 기차라고 해도 한국인에게 기차는 반갑고 고마운 존재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누이, 우리 형, 우리 아버지가 정신대, 강제징병, 징용으로 끌려갈 때 쓰인,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는 검은색 쇳덩어리였어요. 그래서 제가 ‘정한의 밤차’라는 노래만 유독 잘 부르게 되었어요. 다른 노래는 하나도 못 해요.
 
  옛날에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이는 일이 많았어요. 그렇게 바깥에서 손님이 온다든지, 귀한 손님이 오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이들을 불렀어요.
 
  “얘, 아무개 오라고 그래라.”
 
  그러면 제가 가는 거예요. 사랑방에 모인 손님들 앞에. 형은 숫기가 없고, 나는 아직 어려서 뭘 모를 때니까 어른들이 뭘 시키면 부끄럼 타지 않고 그냥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형님은 연출을 맡고 연기는 내가 한 거죠. 형이 “여기서는 좀 구슬프게 불러라” “여기서는 더 애절하게 해줘야지” “그냥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지도하는 걸 받고 어른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분들은 내 노래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그때 그 사랑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들 맘이 안 좋고 슬프니까 김동인(金東仁·1900~1951년)의 소설 〈붉은 산〉에서 ‘삵’이 죽어가면서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한 것처럼 어린애가 부르는 ‘정한의 밤차’(박영호 작사 이기영 작곡)를 듣고 싶었던 거죠.
 
  그 어린애가 부르는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고” 하는, 우리의 그 슬프고 한 많은 노래를 듣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거예요. 어린 내가 그 노래를 하면 듣던 사람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한숨 쉬는 사람도 있고, 아까까지는 침통해하던 사람이 또 막 박수치면서 “야! 너 잘 부른다” 하니까 우쭐했어요.
 
  게다가 용돈도 줍니다. 돈 몇 푼씩을 쥐여줘요. 어렸을 때는 그 재미에 어른들 앞에서 그 노래를 제법 자주 불렀지요.
 
 
  # 기찻길의 주먹감자
 
  그 노랫말을 보면 부슬비를 헤치고 기차가 떠나가는데, 기차가 떠날 때는 왜 밤낮 비가 오는 걸까요? 정한의 기차, 아니 ‘정한의 밤차’에서만 그런 게 아니에요. 1980년대에 가수 김수희가 불러서 지금까지도 전 국민 애창곡인 ‘남행열차’도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고 시작하지요. 왜 우리나라는 기차가 떠날 때마다 비가 올까요? 비가 와야만 기차가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렸을 때는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좋아하니까 그냥 불렀고, 사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그 뜻이 뭔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하교할 때마다 무슨 의식처럼 하던 일이 또 있어요.
 
  하교하는 길에는 철길이 있었어요.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전부 그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어요. 다른 길에서는 안 그러는데, 그 철길을 걸을 때는 다들 장난도 안 치고 말도 안 하고 심각하게 걸어요. 기차를 기다리느라. 기차는 거의 정시에 오니까, 아이들이 시계는 없지만 느낌으로 그즈음이 되면 다들 기찻길 옆에 일렬로 늘어섰어요. 기차 지나가는 걸 보려고요. 그러면 저쪽에서부터 기차가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거죠.
 
  보통 아이들의 놀이에는 리더가 있어요. 그땐 남자아이들이 주로 전쟁놀이를 할 때니까요. 그런데 기차를 기다릴 때는 리더도 없어요. 그냥 다들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기차만 보고 있다가 기차가 자기 앞으로 오면 욕을 해요. 주먹감자를 먹이는 거죠. 그건 일종의 의식이었어요. 기차에다 대고 하는 의식…. 아이들끼리 서로 어쩌는지 쳐다보지도 않아요, 기차를 보느라.
 
  내 누이를 뺏어간 기차, 면소(面所)까지 와서 누구를 잡아간 기차. 아이들이 그 기차에 대고 주먹감자를 먹이면서 “야! 이 새끼들아” 하고 욕을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상스럽게 그런 욕을 했다고요. 그 기차가 얼마나 많은 분노를 내려다 놓고 얼마나 많은 슬픔을 싣고 갔으면 그랬을까요. 어린 아이들이 가본 적 없는, 말로만 들은 저 만주 벌판으로 쪽박 찬 우리 아버지·어머니, 아저씨·아주머니를 실어 나르던 기차를 향해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기차의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철길에 서서 매일같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요즘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가든 말든 관심도 없죠? 아주 어린 아이들은 좋아서 박수치고. 이게 우리 역사의 변화입니다. 참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되던 시절의 사연인데 지금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 기차와 恨의 정서
 
일본이 1906년 설립한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의 특급열차 아시아호. 증기 기관차로는 이례적으로 유선형이었던 아시아호는 최고 시속 134㎞로 만주를 누볐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그런데 요즘 기차, KTX나 SRT, ITX-새마을호는 너무 쏜살같이 달려요. 완행열차도 있어야 합니다. 비 내리는 기찻길을 느리게 달리는 완행열차…. 요즘은 그 기차의 정서가 다 사라지고 빠른 이동 수단으로만 남았어요. 유행가 가락처럼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하는 슬픔, 한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한을 잊고 있어요. 한국인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한을 푸는 민족입니다.
 
  예를 들어 너무 가난해서 대학에 못 갔어요. 가난의 이유는 누구누구 때문에 우리 땅을 빼앗기고, 그래서 가난해진 거라고 칩시다. 커서 복수를 위해 그 사람을 죽이거나 막 겁박을 해요. 그럼 원수를 갚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대학에 가집니까? 아니잖아요. 나를 대학에 못 가게 만들었다고 그 사람을 나쁘게 대하는 건 그저 단순한 화풀이밖에 안 됩니다. 한 맺힌 근본은 내 안에 덩그러니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요. 그러면 원수는 못 갚았지만 한은 풀잖아요.
 
  우리 민족의 한, 분단의 한, 역사의 한을 푼다는 것은 어느 사람을 죽이고, 중국과 싸워 이기고 일본과 싸워 이기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복수를 했다고 한들 우리의 한은 그대로 남아요.
 
  기무라 에이분이 나를 만나고, 그다음으로 초기 한류(韓流) 붐을 일으킨 이미자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제암리 사건 때 살아남은 할머니였어요.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영문 화보집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한국독립운동)》. 이 사진은 제암리 학살 때 가족을 잃은 여성들의 모습이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그때의 사건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해요.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나는 거의 잊어버렸어. 이제 생각도 안 나. 한밤중에 가끔 생각이 나긴 해요. 그러나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성경에도 있어요. 용서하라고.”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그 할머니의 뒷모습이에요. 뒷짐 지고, 시골의 호젓한 오솔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은 당당했어요.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 뒷모습이 이렇게 말하는 거죠.
 
  ‘모든 것을 잃고 아들도 죽었지만 일곱 손자를 거느리고 사는 지금, 나는 괜찮아. 원수를 사랑하라고 성경에도 그랬어. 가끔 생각은 나지만 용서할 거야.’
 
  그 뒷모습이 어떻게 가축처럼 도망가는 모습이겠어요? 그 뒷모습에서 쫓겨 가던 슬픔이 아니라 그 쫓김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어떤 침략자보다 강한 한국인의 생명력을 본 겁니다.
 
 
  # 임진왜란 때의 조선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김씨열체〉라는 그림이다. 박신간의 부인인 김씨가 임란 당시 노모를 업고 뛰어가고 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김씨열체(金氏裂體)〉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 곡산군 사람이자 박신간(朴信幹)의 부인인 김씨는 스무 살 때 임진왜란을 만나 그 어머니를 업고 피란을 가다 왜적을 만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왜구에게 쫓겨 도망가면서도 노부모를 업고 뛰었다고 해요. 지금 왜구가 쳐들어오고 내 목숨이 다급한 상황인데도, 걷지도 못하고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부모를 버리지 않은 거예요. 그걸 보고 일본인들이 ‘우리는 전쟁이 났을 때 노부모를 업고 뛸 사람이 있을까’ 하고 감탄한 거죠. 그래서 임진왜란 때 쳐들어왔던 장수들 중에 “야만인이 문화의 국가를 쳤구나, 나는 모든 걸 버리겠다” 하고 부하를 데리고 귀순해서 한국의 장군으로서 일본과 맞선 사람도 있어요.
 
  수원 제암리 사건 때 스물여덟 명이 죽었어요. 그 교회에 없던 사람들도 찾아가서 죽여 30명이 죽어요.
 
  그때 할머니가 정말 기가 막힌 말을 해요.
 
  “사람은 죽여도 집은 태우지 마라.”
 
  놀라운 이야기지 않아요? 그런데 그 일본군은 사람도 죽이고 민가도 다 태웠어요. 그럼에도 그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나한테 묻지 마, 나는 다 잊어버렸어.”
 
1969년 3월 1일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의 교회에서 3·1절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제암리는 기독교 교세가 아주 강한 곳이니까 이 할머니도 기독교인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분의 속마음까지 보태어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 그러니 나는 너희를 용서할 거야. 슬프지도 않아. 나한테는 손자가 있어. 씨가 있어. 너희가 씨를 말려?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내 아들은 죽었지만 나는 손자들 보는 재미로 살아. 가끔 생각나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
 
  그러곤 의연하게 뒷짐 지고 싹 사라지던, 기무라 에이분의 다큐 속 당당한 뒷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그 할머니, 한국의 여성들은 가축처럼 쫓겨 가지 않았어요. 인간의 모습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고 강한 사람으로 쫓겨 갔기에 그 씨, 그 손자들이 이젠 더는 쫓기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이죠.
 
 
  # 질서 정연하게 피란 가는 사람들
 
6·25 당시 줄 지어 북상하는 유엔군과 남하하는 피란민의 모습이다. 사진=이어령 제공
  미 국무성에 보관되어 있는 한 장의 사진이 있어요.
 
  세상 어느 나라, 어느 전쟁에서 피란민이 이렇게 질서 정연하게 가는 거 본 적 있어요? 옆의 군대는 전장을 찾아 북상하는 유엔 군대고, 그 옆은 길을 막지 않으려고 리더도 없는 피란민이,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이건 쫓기는 모습이 아니에요.
 
  세상에 이런 모습이 어디 있어요? 다른 곳은 서로 도망가느라 길을 막아서 군대가 전장에 투입되지 못해요. 다들 탱크가 가는 길 앞을 막아서 아수라장이 되는 거죠.
 
  6·25 때 이 기적 같은 사진 한 장에 전 세계 사람들이 놀랍니다. ‘한국인이 대단한 민족이구나!’ 감탄했죠. 저 피란민 무리에 무슨 리더가 있었겠어요. 남편 잃고 자식 잃은 여자들이 대부분인데, 모두 경황이 없을 텐데, 젖먹이 아이를 등에 업고, 짐 보퉁이는 머리에 이고, 정처도 없어요. 그저 살려고 남쪽으로 갈 뿐, 기다리는 사람도 반기는 사람도 없는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고 의연한 거예요.
 
  당시를 떠올려봐요. 한강 다리는 이미 폭파되어 건널 수 없잖아요. 나룻배 하나를 얻어 타고 겨우 한강을 건너 걷기 시작한 겁니다. 서로가 이 살육의 전쟁을 겪으며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겠지만 그렇게 걸어갔던 겁니다. 긴긴 여름 해를 따라 저녁에는 모닥불 옆에 누워 자기도 하며 걸어갔던 거예요.
 
  이 사진 한 장이 한국은 야만의 국가, 쫓겨 다니는 야만의 국가가 아니라고 알려준 거죠. 서구 사람들, 아프리카인을 동물 취급하지 사람 취급을 했어요? 노예로 만들어 동물처럼 부리고. 그러나 여긴 아니라는 거죠.
 
  ‘아프리카 사람들과 똑같이 가난해도 여긴 아니다! 봐라, 짐승이 언제 산불 날 때 이렇게 일렬로 가는 걸 봤냐?’
 
  이게 바로 한국인의 뒷모습인 겁니다.
 
  한국 근대문학 개척자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金光明·한양대 의대 명예교수)씨의 육성을 들은 적이 있어요.
 
  김광명이 신경외과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말년의 아버지가 앓던 중풍과 관련이 있다고 하지요. 6·25가 터지자 가족이 아버지 김동인을 업고 피란을 갔어요. 왕십리에서 응봉동 고개를 넘어 한강까지 가서 밤을 꼬박 새워 줄을 섰습니다. 이튿날 아침 나룻배를 타려고요. 놀랍지 않아요?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워 밀려드는데 나룻배를 타려고 밤새 줄을 섰다고 하니까요. 다행히 나룻배에 가족 모두가 올랐는데 아버지 김동인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대요. 할 수 없이 가족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듬해 다시 1·4후퇴 때 피란을 갔어요. 김광명의 증언은 이랬어요.
 
  “신당동, 약수동을 거쳐 한남동 쪽을 향하다 보니 피란민 수가 상당히 많았어요. 길 양쪽으로 국군이 새끼줄을 쳐놓아 새끼줄을 넘어 흑석동(김동인의 딸이 출가한 집)으로 갈 수도 없었고 밀려드는 인파 탓에 뒤돌아 서울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안 됐어요. 그렇게 새끼줄 안쪽에서 걸어 첫날 도착한 곳이 경기도 수원이었습니다.”
 
  새끼줄이 있어 하루 만에 경기도 수원까지 피란 갈 수 있었던 겁니다.
 
 
  # 김동인의 〈붉은 산〉, 흙, 황토의 의미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
  한국인의 이런 의연한 모습은 사진으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으로도 형상화되어 있어요.
 
  소설 〈붉은 산〉은 1932년 김동인이 발표한 단편인데, 일제 강점하니까 차마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한반도를 배경으로는 말을 못 하고 만주로 무대를 옮겨서 쓴 소설이에요. 대개 만주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한국인들끼리 모인 마을을 만들어서 살았어요.
 
  그 조선인 마을에 의사인 ‘나[余]’가 들어가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나’는 화자(話者)이면서 관찰자예요. 진짜 주인공은 이 마을에서 나가 만나게 되는 ‘삵’이라는 별명의 정익호입니다. 멀쩡한 이름을 두고, ‘삵’, 그러니까 거친 육식동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주인공의 성격은 별명 그대로입니다. 생긴 것도 표독스러운 데다가 투전에 싸움으로도 모자라 부녀자 희롱까지 더해지니 이 조선인 마을에서는 골머리가 아픈 거죠. 그렇다고 한 동포를 차마 내치지도 못하고요. 이 ‘삵’에 대한 이야기가 쭉 이어집니다.
 
  만주의 한국인 마을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 온 사람들이죠. 조선의 내 땅을 빼앗기고 소작권도 잃어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까 만주까지 들어가 남의 땅 부쳐 먹고 사는 거예요. 얼마나 비참한 삶이겠습니까. 지주는 밤낮 왜 소출이 이거밖에 안 되냐, 너 어디에 감춰놓은 거 아니냐 윽박지르며 때리고 소작인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그 소출을 지키는 그런 관계였어요. 그 불쌍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곳에서 남 해코지나 하고 사는 ‘삵’은 또 모두에게 얼마나 미움의 대상이겠어요. 불쌍한 한국인끼리 왜 저리 괴롭히나 하겠지요.
 
  풍토병 연구를 위해 그곳까지 간 의사인 ‘나’는 사람들에게 들어 이런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나’를 불러서 급히 가보니, 송노인이라는 한국인 소작농이 소출이 적다는 이유로 만주인 지주에게 맞아 다 죽게 되어 나귀에 실려 온 거예요.
 
  실제로 나귀에서 내리는 순간 절명하고 말죠.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지주에게 항의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힘이 없으니까. 저쪽은 지주들이고, 주변에 사람도 많은 데다 제 나라 제 땅이고 이쪽은 땅도 없고, 자기 몸 하나 지켜줄 나라도 없는 쫓겨 온 소작농이잖아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화자인 ‘나’, 의사도 너무너무 화가 나고 분하고 서러워도 어디에 가서 호소할 데도 보호해줄 데도 없으니 참을 수밖에요. 그런데 그 말썽꾼인 ‘삵’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말 한 마디 없이 어디로 사라져 버려요. 혼자서 만주인 지주네 집에 쳐들어간 거예요. ‘삵’이 아무리 깡패고, 한국인 마을에서는 싸움꾼이라고 한들, 싸움이 됐겠어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죠. 결국 마지막엔 죽도록 맞아서 한국인 마을로 돌아오는데 집까지 가지도 못하고 마을 입구에서 그냥 쓰러져 버려요.
 
  그래서 사람들은 또 ‘나’를 불러요. 소설 〈붉은 산〉의 마지막 장면은 이 삵의 임종 장면입니다.
 
  〈“선생님 노래를 불러주세요. 마지막 소원… 노래를 해주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여는 머리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여의 입에서는 창가가 흘러나왔다. 여는 고즈넉이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고즈넉이 부르는 여의 창가 소리에 뒤에 둘러섰던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숭엄한 코러스가 울리어 나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광막한 겨울의 만주벌 한편 구석에서는 밥버러지 익호의 죽음을 조상하는 숭엄한 노래가 차차 크게 엄숙하게 울리었다. 그 가운데 익호의 몸은 점점 식어갔다.〉

 
  ‘삵’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지만, 사실은 의협심이 강했던 사람인 거예요. 늘 망나니처럼 자기 동포들을 괴롭혔지만, 또 막상 자기 동포가 외부의 사람에게 핍박을 당했을 땐 죽은 사람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서는 그런 사람인 거죠.
 
  그 ‘삵’이 임종하며 보는 것이 붉은 산과 흰 옷의 환상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소원은 노래를 불러달라는 거였죠. ‘애국가’를.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 선생이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것이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였으니까, 이 소설 발표 당시에 사람들이 불렀던 애국가는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춘 창가였을 거예요.
 
  죽어가는 ‘삵’을 앞에 두고, 또는 삵의 머리를 끌어안고, ‘나’는 노래를 하는 거죠.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러자 ‘나’와 ‘삵’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 노래가 나와요. 참으로 장엄한 코러스 아니었겠습니까?
 
 
  디아스포라, 望鄕歌…
 
  요즘 한국에서 행사할 때 ‘애국가’를 잘 안 불러요. 대개 애국가 제창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가끔 올림픽 같은 국제경기에서 1등 해서 시상식 때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이 곡조가 나오면 눈물이 핑 돌아요. 왠지 마음이 찡해지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메달을 따기까지 자기의 고생을 생각하며 우는 경우가 많겠지만 우리는 그냥 태극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는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서럽고 가슴이 북받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삵’이, 그 장엄한 코러스를 들으면서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이 무엇이었어요? 붉은 산이죠. 푸른 산도 아니에요. 붉은 황토 흙 산. 그리고 흰 옷 입은 사람들. 그러니까 만주 땅까지 쫓겨 와가지고 겉으로는 그 개망나니 짓을 했지만 가슴속에는 늘 떠나온 고향이 있었던 거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예요. 고향에서 쫓겨나 만주까지 온 농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떠나온 독립군도, 심지어 일제에 의해 전 세계로 노예처럼 팔려간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노래는 ‘애국가’라기보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망향가(望鄕歌)인 거죠. 땅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노래예요.
 
 
  사람들이 황토방에 가는 이유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할 때의 그 흙인데 그것도 그냥 흙이 아니고 황토 흙이에요, 황토 흙! 이 황토 흙이라는 게 참 묘해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의 땅이 황토 흙인데 ‘황톳길’ 그러면 마음이 찡해지거든요. 황토라는 말만으로도 말이죠. 뒤에서 말하겠지만,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황토방을 가는 거예요. DNA가 남아 있어서 그래요. 황토방이 바로 그 붉은 산이에요.
 
  ‘삵’이 죽어가는 순간에 그리워하며 환상으로 본 것은 화려한 도시, 풍요한 감나무·대추나무, 기름진 황금들판이 아니라 그 메마르고 황폐한 붉은 산이었어요. 이중섭(李仲燮·1916~1956년)이 그린 듯한 그런 붉은 산. 거기에 흰 옷 입은 고향 이웃들이 보입니다. 만주벌판 그 황량한 땅에서 환상으로 보는 고향의 붉은 산과 흰 옷 입은 사람들….
 
  ‘삵’의 마지막 소원에 따라 사람들은 노래를 불러요. 힘없어서 몸을 사리기만 했던 사람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고 말이죠. 그야말로 장엄한 코러스입니다.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고, 두려움을 잊게 만든 노래잖아요.
 
  지금 우리는 이 노래가 아무렇지도 않고, 큰 감동도 없지만 어디에서 어느 때에 부르는 것인가에 따라 똑같은 노래인데 그렇게 다르죠. 이게 결국 디아스포라, 약소민족으로 고향을 상실하고 쫓겨 온 사람끼리 남에게 받은 핍박과 설움을 서로 위로할 수밖에 없을 때, 그 순간에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가 ‘애국가’예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감히 ‘애국가’를 생략하자는 말이 안 나와요. 생각해보세요.
 
  한때 ‘애국가’는 잘못 부르면 잡혀가는 노래였어요. 누구도 감히 드러내 놓고 가르쳐준다거나 하지 못해서 겨우, 겨우 아버지가 아들에게 집 안에서만 몰래 가르쳐주고, 그 아들이 또 친구에게 몰래 가르쳐주고 하면서 번져갔을 거예요. 가사를 종이에 인쇄하거나 써서 보여준다거나 하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상황에서 뜬소문처럼 번져갔을 노래인데, 1930년대의 〈붉은 산〉에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가사가 나옵니다. 기가 막히지 않아요?
 
 
  # ‘애국가’ 이야기- 고통스러운 영원
 
2022년 6월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과 이집트의 평가전을 앞두고 애국가가 흘러 나오면서 태극기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가 무심코 부르지만 가사를 한번 보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니요? 동해물이 다 말라 없어지고 백두산이 다 닳아 없어지는 건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건 영원(永遠)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 영원이 행복한 영원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영원이에요. 뭔가가 생성하고 커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고 마멸되는 부정적인 영원이죠. 본디 영원이라는 것은 꿈과 희망을 말할 때 쓰는 말이지만 실제로 행복할 때는 꿈과 희망을 말하지 않아요.
 
  한국 불교에서는 ‘옥으로 새긴 연꽃 봉오리가 진짜 꽃이 되어 피어나듯이’라는 비유를 많이 씁니다. 돌이 어떻게 꽃이 되겠어요?
 
  한국 사람은 참 현실적인 사람들이에요. 어느 나라든 관용구를 보면 사는 게 먼저고 죽는 것이 뒤에 오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입니다. 죽는 게 앞서고 사는 게 뒤에 오죠.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하지 ‘살기 아니면 죽기’라고 하지 않잖아요. 무슨 일을 할 때도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라’고 하지 ‘살기 죽기로 열심히 하라’고 해요? ‘죽으나 사나’라고 하지 ‘사나 죽으나’ 안 그러잖아요.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이렇게 썼잖아요.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만약 연극할 때 대사를 이렇게 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해야 맞죠.
 

  한국 사람들의 이런 관용구를 가만 히 보세요. 앞에 좋은 게 오고 뒤에 나쁜 게 오면 결론은 뭐가 되겠어요? 나쁜 거죠. 그런데 앞에 나쁜 게 오고 뒤에 좋은 게 오면 죽음에서 삶으로 오는 게 되잖아요. 삶이 오고 죽음이 오는 것보다는 죽음 뒤에 삶이 오는 것이 좋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trial and error’, 즉 시행착오(試行錯誤)라고 하는데, 심리학자들이 이걸 ‘착오시행’으로 바꾸자고 해요. 시행(試行)하고 착오(錯誤)했다면 그것은 네거티브예요. 착오로 끝났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까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도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지지리도 못난 말이잖아요. 영원에 빗댈 말이 얼마나 많아요. 그것들을 다 버려두고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영원하려면 그 영원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겠어요. 그런데 그게 현실이에요.
 
  영원이라는 건 없어요. 또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지는 건 몇억 겁[億千萬劫]이 지나도 불가능해요. 냇물이 마르고 뒷동산이 없어지는 건 가능해요. 그러나 동해물과 백두산은 안 되죠. 불가능한 영원을 현실적인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 그날이 오면, 인경을 들이받아
 
  그래서 나는 심훈(沈熏·1901~ 1936년) 선생의 ‘그날이 오면’을 보면 참 가슴이 아파요. 해방의 그날이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떡도 해 먹고 막 춤도 추고 그래야 하는데 글쎄 머리로 인경(人定)을 들이받아 피가 흐르고 몸의 가죽을 벗겨서 북을 만들어 치고 싶다니요. 인경은 조선 시대에 통행금지를 알리거나 해제하기 위하여 치던 종을 뜻합니다. 세상에 왜 그 기쁜 날에 머리를 들이받고 자기 가죽을 벗긴답니까?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그 기쁜 날은 기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원하지도 않게 되는 그런 날인 거예요.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설마 그날이 오랴. 그날이 오면 나 죽어도 좋다는 말인 거죠. 한국 사람이 죽음을 함부로 생각해서 죽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좋아, 이 세상에는 죽음보다도 강한 게 있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살을 찢어서 북을 만들어도 신나는 게 있어, 그게 그날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요. “세상에 그날이 왔으면 살아야지 왜 굳이 사람 가죽을 벗겨가지고 북을 만들어 친다니. 아이고 끔찍해라. 이런 메조키스트가 어딨냐”고 말하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예요.
 
  여자들이 가장 사랑할 때 역설적으로 “죽고 싶어”라고 말해요. “오빠, 나 죽고 싶어” 그러는 건 그 오빨 그만큼 크게 사랑한다는 얘기예요. 내 마음을 강조하기 위한 최상의 말이 죽음이에요. 우리가 또 뭔가를 절대로 반대할 때 흔히 쓰는 관용구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라는 말도 쓰이잖아요. 눈에 흙이 들어간다는 게 바로 죽음을 뜻합니다.
 
 
  # 흙의 중요성
 
3년 전 대형 산불이 발생했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 일대 야산. 1960~70년대 산림 녹화 이전 우리나라 산은 대개 붉은 산이자 민둥산이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세요? 흙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붉은 산. 그 흙을 빼앗긴 거예요. 내 땅을 빼앗긴 거죠. 그 흙을, 고향의 흙을 잃으면 ‘삵’처럼 환상에서밖에 보지 못해요. 그것도 초록이 무성한 풍요한 산이 아니고 붉은 황톳길처럼 붉은 산. 그것을 토포필리아(Topophilia), 혹은 장소애(場所愛)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땅의 8할이 산이에요. 과거엔 헐벗은 붉은 산, 민둥산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도 우리는 ‘금수강산 삼천리’라고 했어요. 그걸 ‘진짜 금수강산(錦繡江山) 보지도 못했나 보다’고 어처구니없어 할 게 아니에요. 메마를수록, 붉은 산일수록 애정이 가는 겁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모의 살림이 넉넉하고 건강하면 자식들이 부모 걱정을 안 해요. 사랑도 없죠, 나 살기 바쁜데.
 
  그런데 그 부모가 가난하게 살면 그 어린애가 효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조국도 그래요. 우리 조국이 나한테 뭘 해줄 만큼 넉넉하고 잘살면 나는 내가 더 잘살 수 있는 곳으로 이민 가서 조국 잊고 편안하게 잘살 수 있어요. 남편도 잘나야 이혼하는 거죠. 지지리 못난 남편은 버리지도 못해요. 사람이 그래요.
 
  내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조국이 너무 딱하니 버리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붉은 산, 이게 더 가슴이 아파요. 남들이 보면 이렇게 비웃을지 모르겠어요.
 
  ‘아이고, 그것도 산이라고…. 그 황토산, 나무 하나 없고 사슴은커녕 토끼 한 마리 없는 그런 산이 뭐가 좋다고….’
 
 
  “붉은 산, 이게 더 가슴 아파요”
 
  하지만 나에게는 가슴 에이게 절절히 그리운 곳이 되죠. 흰 옷도 보세요. 그게 뭐 금의환향(錦衣還鄕)의 비단옷도 아닌 헤질 대로 헤진 무명옷을 입은 그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니 이 흙이 뭘까요? 이 흙에 대한 사랑이 뭔가 생각해보면 그게 토포필리아, 장소애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 집에 돌아오면 항상 어머니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셨어요. ‘아이고 이 녀석 흙 묻혀왔어?’ 그러고 그 옷을 빨아주셨죠. 내 옷에 흙이 묻었다는 이야기는 내가 흙과 놀고 왔다는 이야기예요. 친구와 함께 놀았든 혼자 놀았든 어린 저는 흙과 놀았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길을 걸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엄지족이 된 아이들은 흙과 너무 멀어요. 흙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요. 예전에 도시 아이들이 흙을 너무 모르니까 쌀이 벼에서 자라는 게 아니라 쌀나무에서 난다고 아는 아이도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요.
 
  우리가 해방 이후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제일 많이 잃어버린 게 뭘까요? 그 지겨운 농촌 떠나 서울 와서 다들 출세하고 우리 참 행복해졌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흙을 잃어버렸어요. 저 황토 흙의 우리 산, 그 흙이 우리가 먹을 풀, 우리 나물들, 곡식들,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게 해줄 것들을 키워냈어요. 식물, 동물, 벌레, 인간 모두 흙이 없으면 죽어요.
 
  그런데 그 흙을 언제 밟아봤나 싶어요. 어딜 가나 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된 걸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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