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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2〉

인조반정과 西人의 득세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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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와 사돈 관계인 신경진과 구굉이 反正의 武力 제공
⊙ 광해군, 反正에 대한 告變 받고도 대처 게을리하다가 정권 잃어
⊙ 反正 주역 김유·신경진은 송익필, 이귀는 이이, 김자점은 성혼의 제자
⊙ 反正 세력의 멘토 김장생, 정치보복 금지, 공정한 인사, 개혁 등 강조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인조반정을 일으킨 西人들의 멘토 김장생.
  실록 속의 광해군(光海君)은 강명(剛明)과는 거리가 멀다. 강(剛)하여 한결같지도 못했고 명(明)하여 눈 밝지도 못했다. 이렇게 되면 권간(權奸)의 세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이첨(李爾瞻·1560~1623년)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이첨의 출발은 눈부셨다. 1608년 문과 중시에서 장원을 차지할 만큼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선조 말기 후사(後嗣) 문제가 제기됐을 때 대북(大北)의 영수가 돼 정인홍(鄭仁弘)과 손잡고 광해군 옹립을 주장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선조의 뜻은 영창대군(永昌大君)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해 2월에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불려와 예조판서에 올랐다.
 

  즉위 초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을 옹위하던 소북(小北)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어서 억울한 옥사(獄事)를 일으켜 선조의 손자 진릉군(晉陵君)을 죽이고 이어서 영창대군도 죽였다. 그 밖에도 역모를 빌미로 왕실의 능창군(綾昌君)을 죽이고 연흥군(延興君)을 찢어 죽인 다음에 1617년(광해군 9년) 폐모론(廢母論)을 발의해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켰다. 이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은 폐모 반대론으로 맞서다가 관직에서 쫓겨나고 먼 지방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대북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영의정이던 기자헌(奇自獻·1562~1624년)은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길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기자헌의 말년을 보면 당시 당쟁이 어느 정도 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광해군 말기에 유배에서 풀려나 강릉에서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을 준비하던 김유(金瑬·1571~1648년)와 이귀(李貴·1557~1633년) 등이 그에게 모의 가담을 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또 반정(反正) 후에 인조가 등용하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같은 해 7월 역모죄로 서울로 압송됐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內應)을 우려한 서인들에 의해 옥에 갇힌 사람 모두와 함께 처형되고 일족도 몰살당했다.
 
 
  남사고의 예언
 
  조선 중기의 술사(術士) 남사고(南師古·1509~1571년)는 호가 격암(格庵)이다.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년)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임진년(1592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倭將) 가토(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특히 한양의 산세와 관련해 여러 가지 진단을 내렸는데 그중 하나가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에 실려 있어 소개한다.
 
  〈나라의 도읍지인 동쪽에 낙봉(駱峯)이 있고 서쪽에는 안현(鞍峴)이 있어 두 산이 서로 다투는 기상이다. 반드시 동인과 서인의 다툼이 있을 것인데 낙(駱)이라는 글자는 각마(各馬)이므로 동인은 반드시 분열되어서 각자 다 자립하고 안(鞍)자는 혁이안(革而安)이라 서인은 반드시 혁명한 다음에야 편안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같은 성리학 내에서도 동인에서 출발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고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지만, 이들은 대체로 군왕(君王) 중심을 인정하는 편에 속한다. 반면에 서인은 주희(朱熹)를 교조적으로 받들기 때문에 철저한 신권(臣權)주의자들이다.
 
  기자헌의 경우 폐모론에 반대하기는 했어도 신하가 왕을 바꿀 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서인의 당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임금도 자기들 뜻대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장한 것이 서인이었다.
 
 
  인목대비의 교서
 
  훗날 인조반정의 최대 명분 중 하나가 바로 광해군의 불효(不孝), 즉 폐모(廢母)였다. 인조 1년(1623년) 3월 14일 왕대비가 된 인목대비는 교서를 내려 광해군의 죄목을 크게 두 가지를 말하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에 대한 불효이고 또 하나는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다.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天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先王)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宣廟·선조)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 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심지어는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선왕조의 구신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와 부시(婦寺)들만을 높이고 신임하였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 있고, 돈을 실어날라 벼슬을 사고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께선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에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중국 사신이 본국에 왔을 때 그를 구속하여 옥에 가두듯이 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평산 신씨와 능성 구씨
 
  광해군은 광해군 15년(1623년) 3월에 무력에 의해 쫓겨나기는 했지만 이미 광해군을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1620년경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그렇다면 당시 무력(武力)을 장악하고 있던 광해군이 1500여 명의 오합지졸에 의해 폐위됐다는 것은 곧 그의 무능과 연결 짓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인조반정을 주도한 2인을 말할 때 신경진(申景禛·1575~1643년)과 구굉(具宏·1577~1642년)을 꼽는다. 두 사람 모두 당대의 무장이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 주변의 혼맥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구조적 요인들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제의 인물은 신화국(申華國)이다. 그의 두 아들이 신립(申砬)·신잡(申磼)이고 그의 장녀는 구사맹(具思孟)과 혼인을 했다. 신경진은 신립의 아들이고 구굉은 구사맹의 아들이다.
 

  평산 신씨 집안과 능성 구씨 집안은 각각 선조와도 사돈 관계였다. 신립의 장녀가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 신성군(信城君)과 결혼했다. 인조(능양군)는 신성군의 친동생 정원군의 장남이었으니 신립의 장녀는 인조의 큰어머니였다.
 
  그리고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구사맹의 다섯째 딸과 결혼을 했다. 따라서 신경진은 인조의 큰어머니의 남자 형제였고, 구굉은 인조의 외삼촌이었다.
 
  두 사람의 모의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광해군 7년(1615년) 신경희(申景禧)가 능창군을 추대하여 정변을 모의했다는 사건이 터져 결국 신경희는 국문(鞫問)을 받던 도중 옥사하고 능창군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능창군은 능양군(인조)의 동생이었다. 신경희는 신립의 형 신잡의 아들이었다.
 
  능양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친동생을 잃었고 신경진의 입장에서는 사촌 동생(신경희)을, 구굉의 입장에서는 조카(능창군)를 잃은 셈이었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이미 이 무렵부터 신경진과 구굉은 동조 세력 규합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항복 인맥
 
이항복
  서인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광해군은 중앙정치는 대북 세력(정인홍·이이첨)에 맡기면서 북방은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을 비롯한 서인에게 맡겼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했을 만큼 군무(軍務)에 정통했다. 광해군 초에는 좌의정을 거쳐 북방 수비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를 지냈고 광해군 9년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를 가 이듬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훗날 인조반정 4대장(大將)이라고 할 때 신경진 외에 이서(李曙·1580~ 1637년), 김유, 이귀 등이 꼽히는데 이들 4명은 모두 이항복의 도체찰사 시절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또 최명길(崔鳴吉) 또한 일찍이 이항복에게서 《주역》 등을 공부했다.
 
  신경진은 이항복이 도체찰사로 있을 때 막료로 데리고 있었고 이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유는 당대의 실력자 정인홍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이항복의 천거로 관리로서 성공했으며 이귀는 이항복과 가까웠던 이덕형의 지원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들 네 사람은 하나같이 서인 계통의 인물들이었다.
 
  한편 중앙 정계는 대북 세력과 소북 세력의 당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각종 역모사건 등으로 희생자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광해군 정권에 반감을 갖고 초야에 숨는 인사도 많아졌다. 이런 가운데 광해군 9년 인목대비 폐비가 이뤄졌다. 여론은 급속도로 반(反)광해군으로 돌아섰다.
 
  신경진과 구굉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다. 다만 능양군은 능창군 사건 이후 집도 빼앗기고 감시가 워낙 심해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일차적으로 무신(武臣) 이서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 두 사람은 이어 문무(文武)를 겸비했다는 김유를 포섭하고 나아가 능양군 추대 계획을 완성하고서 원로정객 이귀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이귀는 이미 대북 세력으로부터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감시를 받아오고 있던 인물이었다. 최명길은 이귀와의 인연을 고리로 해서 그의 아들 이시백과 함께 거사에 참여했다. 그런데 광해군 정권은 위험인물인 이귀를 광해군 13년(1621년) 4월 연금에서 해제한다. 그만큼 무능했던 정권이었다.
 
  광해군 14년 8월 신경진과 이귀의 정변 모의가 누설돼 대간의 탄핵이 시작됐다. 그런데도 처벌은 ‘외직 좌천’에 그쳤다. 심지어 조정에서는 “이귀와 김자점이 반역을 꾀하니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됐지만 광해군의 귀는 밝지 못했다[不聰].
 
 
  反正 속으로: 1623년 3월 12일 밤
 
  이날 밤 실록 속으로 들어가 보자.
 
  〈무인 이서와 신경진이 먼저 대계(大計)를 세웠으니, 경진 및 구굉·구인후는 모두 상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이에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 문사 중에서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하고자 했다. 곧 전 동지(同知) 김유를 방문한 결과 말 한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드디어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곧 경신년(庚申年·1620년)이었다. 그 후 경진이 전 부사(府使) 이귀를 방문하고 사실을 말하자 이귀도 본래 이런 뜻을 두었던 사람이라 크게 좋아했다. 드디어 그 아들 이시백·이시방(李時昉) 및 문사 최명길·장유(張維·1587~1638년), 유생 심기원(沈器遠·?~1644년)·김자점(1588~1651년)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임술년(壬戌年·1622년) 가을에 마침 이귀가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되자 신경진을 이끌어 중군(中軍)으로 삼아 중외에서 서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모의한 일이 누설되어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김자점과 심기원 등이 후궁에 청탁을 넣음으로써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신경진과 구인후 역시 당시에 의심을 받아 모두 외직에 보임되었다.
 
  마침 이서가 장단부사(長湍府使)가 되어 덕진(德津)에 산성 쌓을 것을 청하고 이것을 인연하여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다가 이때에 와서 날짜를 약속해 거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1624년)이 당시 정승 박승종(朴承宗·1562~1623년)과 서로 인척이 되는 사이라 뭇 의논이 모두들 ‘도감군(都監軍)이 두려우니 반드시 이흥립을 설득시켜야 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장유의 아우 장신(張紳)이 흥립의 사위였으므로 장유가 흥립을 보고 대의(大義)로 회유하자 흥립이 즉석에서 내응할 것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이서는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고 이천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도 편비(褊裨·비장)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파주(坡州)에서 회합하였다.
 
 
  告變과 擧兵
 
이귀
  그런데 이이반(李而攽)이란 자가 그 일을 이후배(李厚培)·이후원(李厚源) 형제에게 듣고 그 숙부 이유성(李惟聖)에게 고하자, 유성이 이를 김신국(金藎國·1572~1657년)에게 말하였다. 이에 신국이 즉시 박승종에게 달려가 이이반으로 하여금 고변(告變)하게 하고 또 승종에게 이흥립을 참수하도록 권하였다. 이반이 드디어 고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2일 저녁이었다. 그리하여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하고 먼저 이후배를 궐하에 결박해놓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하는데, 광해는 바야흐로 후궁과 곡연(曲宴)을 벌이던 참이라 그 일을 머물러 두고 재결하여 내리지 않았다. 승종이 이흥립을 불러서 ‘그대가 김유·이귀와 함께 모반하였는가?’ 하므로 ‘제가 어찌 공을 배반하겠습니까?’라고 하자 곧 풀어주었다.
 
  의병은 이날 밤 2경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김유가 대장이 되었는데 변란을 고발했다는 말을 듣고 포자(捕者)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 가고자 하였다.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심기원과 원두표(元斗杓) 등이 김유의 집으로 달려가 말하기를, ‘시기가 이미 임박했는데, 어찌 앉아서 붙잡아 오라는 명을 기다리는가’라고 하자 김유가 드디어 갔다.
 
  이귀·김자점·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김유와 장단의 군사도 모두 이르지 않은 데다 고변서(告變書)가 이미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흉흉하였다. 이에 이귀가 병사(兵使) 이괄(李适)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김유가 이르러 전령(傳令)하여 이괄을 부르자 괄이 크게 노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이귀가 화해시켰다.
 
 
  창덕궁 점령
 
  상이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서 이서(李曙)의 군사를 맞았는데, 사람들은 연서를 기이한 참지(讖地)로 여겼다. 장단의 군사가 700여 명이며 김유·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송영망(宋英望)·신경유(申景裕) 등이 거느린 군사가 또한 600~700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 전군이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포진하여 군사를 단속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초관(哨官) 이항(李沆)이 돈화문(敦化門)을 열어 의병이 바로 궐내로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는 후원문(後苑門)을 통하여 달아났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에 옮아붙어 여러 궁전이 연소하였다.
 
  상은 인정전(仁政殿) 계상(階上)의 호상(胡床)에 앉았다. 궁중의 직숙관(直宿官)이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 왔는데, 도승지 이덕형(李德泂)과 보덕(輔德) 윤지경(尹知敬) 두 사람은 처음엔 모두 배례를 드리지 않다가 의거임을 살펴 알고는 바로 배례를 드렸다. 명패(命牌)를 내어 이정구(李廷龜) 등을 불러들이니, 새벽에 백관들이 다 모였다. 박정길(朴鼎吉)이 병조참판으로 먼저 이르렀는데, 판서 권진(權縉)이 뒤미처 이르러 ‘정길이 종실(宗室) 항산군(恒山君)과 함께 군사를 모았는데, 지금 들어왔으니 아마도 내응할 뜻을 둔 것 같다’라고 하여 곧 정길을 끌어내어 참수했다. 항산군을 잡아다 문초하니, 혐의 사실이 없어 석방하였다. 그런데 정길은 당연히 참형을 받아야 할 자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참수를 통쾌하게 여겼다.
 
  그리고 상궁(尙宮) 김씨(金氏)와 승지 박홍도(朴弘道)를 참수하였다. 김상궁은 선묘(宣廟)의 궁인으로 광해가 총애하여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줌으로써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 또 이이첨의 여러 아들 및 박홍도의 무리와 결탁하여 그 집에 거리낌 없이 무상으로 출입하였다. 이때에 와서 맨 먼저 참형을 받았다. 홍도는 흉패함이 흉당 중에서도 특별히 심한 자라 궐내에 잡아들여 참수하였다. 광해는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도망쳐 국신이 쓰던 흰 의관을 쓰고 있는 것을 국신이 와서 고하므로 장사들을 보내 떠메어 왔고, 폐세자(廢世子)는 도망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反正의 멘토 김장생
 
이시백
  결국 1623년 3월 13일 광해군은 쫓겨났다. 서인이 드디어 조선의 주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숙종을 제외한다면 어느 누구도 조선의 임금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사실상 300년 서인 집권 시대가 열렸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은 정사공신(靖社功臣), 즉 사직을 안정시킨 공신이라 부른다.
 
  1등 공신은 김유·이귀·김자점·심기원·신경진·이서·최명길·이흥립·구굉·심명세 등 10명, 2등 공신은 이괄·김경징(金慶徵)·신경인(申景禋)·이중로(李重老)·이시백·이시방·장유·원두표·이해(李澥)·신경유·박호립(朴好立)·장돈(張暾)·구인후·장신·심기성(沈器成) 등 15명, 3등 공신은 박유명(朴惟明)·한교·송영망(宋英望)·이항(李沆)·최내길(崔來吉)·신경식(申景植)·구인기(具仁墍)·조흡(趙潝)·이후원(李厚源)·홍진도(洪振道)·원우남(元祐男)·김원량(金元亮)·신준(申埈)·노수원(盧守元)·유백증(兪伯曾)·박정(朴炡)·홍서봉(洪瑞鳳)·이의배(李義培)·이기축(李起築)·이원영(李元榮)·송시범(宋時范)·김득(金得)·홍효손(洪孝孫)·김련(金鍊)·유순익(柳舜翼)·한여복(韓汝復)·홍진문(洪振文)·유구(柳玽) 등 28명으로 모두 53명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이괄은 반란으로, 김자점·심기원 등은 역모로 공신에서 삭제되었다. 그리고 이흥립은 이괄의 난의 책임을 지고 자살했고, 김경징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로 사사(賜死)되어 삭탈되었다.
 
  한편 인조반정은 서인 사이에 반정에 참가한 공서(功西)와 김상헌(金尙憲) 등 직접 참여하지 못한 청서(淸西)로 나누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 1등 공신 상당수는 송익필(宋翼弼)이나 그의 수제자 김장생(金長生)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먼저 김유는 신립을 보좌해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김여물(金汝岉)의 아들인데 부자가 다 송익필의 제자다. 신경진도 송익필에게 배웠다. 이귀는 송익필의 벗 이이에게 배웠고 김자점은 또 다른 벗 성혼(成渾)에게 배웠다. 심기원은 송익필의 행동대장 정철의 제자 권필(權韠)에게 배웠다. 심명세는 송익필의 벗 심의겸(沈義謙)의 손자이고 이서와 구굉 또한 김장생의 문인이다.
 
  이렇게 해서 김장생은 사실상 배후의 스승으로 추앙을 받게 된다. 그리고 훗날 그의 제자가 바로 송시열(宋時烈)이다.
 
 
  김장생의 혁명공약
 
  반정 후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관)에 임명된 김장생은 자리를 사양하면서 대신에 일종의 ‘혁명공약’이라 할 향후 지침 8가지를 이귀·김유·장유·최명길에게 보낸다. 이를 통해 서인들이 품고 있었던 바람직한 정치관을 살필 수 있다.
 
  〈국가가 불행하여 적신(賊臣)이 날뜀으로써 200년 예의의 나라로 하여금 모두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빠지게 하였는데, 일찍이 구국 혁신의 대공이 이처럼 갑자기 공들의 손에서 이루어질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이미 땅에 떨어진 기강을 바로잡고 망해가는 국운(國運)을 부지하였으니 이는 실로 불세출(不世出)의 의거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시작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유종(有終)의 미가 어려운 것이니, 반드시 시종일관 선처하여 인심이 흡족해한 후에야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고 사우(師友)를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어 인심에 차지 못하면 훗날 말하는 자는 필시 오늘날의 의거는 나라를 위해 역적을 토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귀를 위해 한 것이라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무한한 행복은 또한 무한한 걱정이다”라고 하였듯이 오늘날의 책임은 전부 공들의 몸에 모인 것이라 삼가 공들을 위해 걱정하는 바이다.
 
  첫째, 임금이 즉위한 처음에는 오직 보좌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의당 가언(嘉言)과 지론(至論)으로 날마다 상 앞에 개진하면서 좌우로 보도하여 요순(堯舜) 이상의 임금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서경》에 이르기를 “처음을 조심하고 마침을 삼가라”고 하였으니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오늘날의 형세는 마치 거꾸로 매단 것을 풀어놓은 격이다. 기갈(飢渴)이 극심할 때에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 맹자의 말에 “일은 옛사람에 비해 절반이나 공로는 반드시 배나 된다”는 것이 바로 지금을 두고 한 말이다. 만약 그대로 폐습을 답습하며 급급히 구제하지 않는다면 크게 기대하던 나머지 필시 백성들이 실망할 것이다. 난리 후 백성을 괴롭히던 폐정과 잡세를 모두 면제하며 공안(貢案)을 고치고 방납(防納)을 막은 후에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이 위로될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세자 죽이지 마라
 
  둘째, 폐조(廢朝·광해군을 말함-편집자 주)가 윤리와 기강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화(禍)를 취한 데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으나 일국에 군림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고, 세자는 실덕(實德)은 없으나 특별한 과오도 드러나지 않았으니, 더럽더라도 참고 둘 다 목숨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실로 성세(聖世)의 미덕이다. 처음에는 도로에서 와전하기를, 세자가 반란군에게 잘못되었다고 하였으나, 며칠 안 되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병인반정(중종반정) 때 세자와 왕자가 모두 보전되지 못한 데 비하여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직 여러분이 끝까지 잘 주선하여 후세의 구실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또한 훌륭하지 않겠는가. 병인반정 때에는 주문(奏聞)이 명확하지 못하여 양위(讓位)라고 일컬었으니, 노산군(魯山君) 때의 일(단종 폐위와 세조의 즉위-편집자 주)과 같은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중원 사람들이 오랫동안 의심을 품어 심지어는 그대 나라 상왕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까지 하였다. 지금은 솔직하게 말하여 전일과 같은 일이 없게 하라.
 
  셋째, 역적이 창궐하여 그 무리가 많다. 모후(母后)를 유폐하고 강상을 무너뜨린 것, 유폐와 시해를 청한 상소, 정청(庭請)한 처사 등 그들의 죄상을 추구하면 비록 모두 죽이고 용서하지 않아도 가하다. 그러나 왕자(王者)의 옥을 다스리는 법에 있어 차등의 분별이 없을 수 없다. 오형(五刑)과 오류(五流)의 경중 대소가 법전에 소상히 실려 있으니, 저울대를 잡고 신중히 살펴 혹시라도 남형(濫刑)이 없게 하라. 흉도(凶徒)라 해서 꼭 죽이고자 하지 말고 같은 무리라 해서 꼭 용서하고자 하지 마라. 그리고 인척이라 해서 의심을 두지 말고 거짓 명성으로 해서 꺼리지 마라. 죽일 수도 있고 안 죽일 수도 있는 자에게는 되도록 가벼운 형을 가하라. 세상에선 오왕(五王)의 유화(遺禍)로 경계를 삼으나 이는 군자의 말이 아니다.
 
 
  人事를 바로잡아라
 
  넷째, 지난 폐조 때에는 사람을 위해 벼슬을 택하고 정사는 재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간신배를 신임하고 현량한 자들을 내쫓아 끝내는 나라를 잃고 말았다. 지금의 계책은 먼저 조정을 바루고 널리 인재를 거두어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의(私意)를 막는 데 있다. 피차를 논할 것 없이 현량(賢良)하면 곧 등용하며,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여 모두 그 직위에 적합한 연후에 백관들이 협력과 화합을 이룰 것이며 모든 업무가 밝아질 것이다. 정청(庭請)한 무리와 인척 중에는 쓸 만한 사람이 있어도 먼저 이들을 등용하여 임금의 사심을 열어놓고 사방에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서경》에 이르기를 “관직은 오직 뛰어난 인재에게 내린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서관(庶官)은 임금이 친애하는 사람을 시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섯째, 국가의 치란(治亂)은 기강의 수립 여하에 달려 있고, 기강의 수립 여하는 임금이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달렸다. 진실로 임금의 강단을 분발하고 나라의 대강(大綱)을 정리하여 상하가 서로 노력해서 상호 협력의 조화를 이루며, 백관들이 서로 규계(糾戒)하여 각기 분당하는 사심이 없으며, 상줄 건 상주고 벌줄 건 벌주어 권장과 징계를 적절히 하며, 뛰어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며 좋고 나쁜 것을 제대로 밝히며 궁부(宮府)가 일체가 되어 내외가 서로 도운 연후에야 조리가 바르고 매사가 순조로워 나라의 다스림이 날로 빛나는 발전을 이룩할 것이다.
 
  여섯째, 정의와 영리, 공과 사의 분별은 성인의 말씀에 몹시 분명하다.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먼저 대본(大本)을 세우고 공명정대한 길을 넓히고 일대의 선치를 크게 천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고질적으로 쌓인 폐습을 혁신할 수 있겠는가. 폐조가 사심을 따르고 공의를 무시한 처사를 말할 만한 것이 비일비재하지만 사람을 쓰고 과거를 보이는 것에서 더욱 심하였다. 현우(賢愚)와 재부재(才不才)를 막론하고 오직 뇌물 바친 다소만을 보았으므로 결국 나라가 나라 꼴이 못 된 것이다. 반드시 이 두 가지 일을 공정히 하고 이 공정심을 미루어 나아가 모든 분야에 확장시켜, 한 가지의 일도 공정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한 사람도 공정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가 없은 후에야 요행을 바라는 것과 부정한 벼슬길을 막을 수 있어 치도(治道)가 크게 변할 것이다.
 
 
  청렴하라
 
  일곱째, 《서경》에 이르기를 “치도에 오르내림이 있으며 정치는 그 풍속으로 말미암아 변한다”라고 하였으니, 풍속을 바꾸는 것은 오직 임금의 심기일전(心機一轉)에 있는 것이다. 지금 탐욕의 풍속이 세상을 옮겨놓았고 사욕의 물결이 하늘에 닿았다. 조정의 치란과 민생의 고난이 이로 말미암는 것이다. 반정 초기니, 먼저 본원을 맑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검약으로 아랫사람을 통솔하여 혼탁한 자를 물리치고 청백한 자를 등용하며, 아랫사람을 해치고 윗사람을 이롭게 하던 폐정을 모두 혁파하고, 백성을 해치고 자신을 살찌우던 수령을 일체 제거하여 염치를 숭상하며 지치(至治)를 기필하라. 공들도 청렴 조신으로 처신하여 조정을 격려하며, 주고받는 일을 반드시 엄격하고 정직하게 하여 정국(靖國·중종반정) 때 삼대장(三大將)의 소행과 같이 하지 마라.
 
  여덟째, 나는 공들이 거사한 이후 기쁜 마음은 적고 걱정되는 생각이 많다.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며 걱정되는 마음이 조금도 풀리지 않는다. 지금 공들의 성대한 덕업으로 태평을 이룩한다면 내 비록 물러나 초야에 있어도 또한 그 혜택을 받는 것이 많으리라. 지금 정목(政目·인사발령)을 보건대 나를 대관(臺官)으로 삼았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오랫동안 버려진 중에 이처럼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니, 의당 신병(身病)을 참고 나아가 새 임금에게 사은하며 그 화기 넘치는 존안을 뵙고 물러나 제공들과 함께 두루 주선하여 성대한 업적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해야 할 것이나, 나이 80에 가깝고 보니 두 귀를 전혀 들을 수 없다. 일찍부터 조정에 있던 자라도 물러나야 할 처지인데 더구나 몸을 부축받고 다니며 다시 벼슬의 반열을 수행하겠는가. 이에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심을 말하여 멀리 있는 나의 얼굴을 대신한다. 여러분은 채택하여 처리해주기 바란다. 그러면 그보다 더한 다행함이 없겠다.〉
 
 
  山林 정치의 탄생
 
  여기서 말한 오왕의 유화에서 다섯 왕이란 부양군왕(扶陽郡王) 환언범(桓彦範), 평양군왕(平陽郡王) 경휘(敬暉), 한양군왕(漢陽郡王) 장간지(張柬之), 박릉군왕(博陵郡王) 최현위(崔玄暐), 남양군왕(南陽郡王) 원서기(袁恕己)를 말한다. 당(唐)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위독할 때,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 형제가 그를 시병(侍病)하면서 역모를 꾀했다. 그러나 오왕이 협력하여 그 둘을 죽이고 중종(中宗)을 옹립하여 황제로 세우고 공신이 되었다. 중종의 황후 위후(韋后)가 정치에 간여하고, 측천무후의 조카 무삼사(武三思)가 위후와 간통하여 집권한 다음 오왕을 모함하여 외방에 귀양보냈다가 제명(帝命)을 위조하여 주이정(周李貞)을 시켜 다 살해하였다. 그런데 오왕이 역모를 평정하고 공을 세웠을 당시에 낙주장사(洛州長史) 설계창(薛季昶)이 경휘에게 말하기를 “두 역적을 죽였지만 무삼사 일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아, 무삼사가 먼저 도모하여 오왕이 모두 패망하게 되었다. 오왕의 유화란 역적의 무리를 살려두어 화를 자초한 것을 말한다.
 
  이귀 등이 이 글을 받고 크게 기뻐하면서 이 글을 상에게 올렸다. 인조는 이를 보고 나서 가상히 여기며 찬탄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김장생은 사심(私心)을 버리고 공의(公義) 혹은 공의(公議)를 따르라고 했지만 이미 서인 일당 독재에서 공의가 설 자리는 없어졌다. 그것은 곧 편중된 인사(人事)로 나타나게 된다. 산림(山林) 정치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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