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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21세기 시민혁명과 언론 ③ 미얀마

“성장통 겪는 民主主義… ‘수치 政府’ 더 기다려주고, 국민 계몽 위해 언론·교육 강화해야”

글 : 신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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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웅산 수치, 압도적 국민 지지와 2015년 총선 승리로 민간정권 수립… 53년간 지속된 軍政 종식
⊙ 작년 로힝야族 사태 발발, 국제사회 비판 직면… ‘로이터’ 통신 기자 체포로 언론 자유 문제도 지적받아
⊙ 전문가들 “군부, 국회 의석 25% 및 부통령職과 안보 관련 3部 장관 차지해 영향력 유지… 사실상 軍民 연립정권”
⊙ 수치 최측근 우 네 옥 SEI 이사장 “수치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지도자… 그녀만이 국가 안정, 민족 화합, 연방 통치 달성 가능”
⊙ 우 킨 마웅 린 MISIS 부원장 “미얀마 민주주의, 갓난아이 수준이지만 국민들 자유 선호… 언론 자유는 東南亞서 필리핀 다음으로 2등”
아웅산 수치 여사가 2012년 5월 태국을 방문해 현지인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조선DB
  아웅산 수치 의장이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NLD)이 2015년 11월 8일 열린 미얀마 총선에서 압승했다. NLD는 미얀마 국회 전체 의석(657석)의 59%, 전체 선출직 의석의 80%를 차지했다. 과반 의석을 확보한 NLD는 대통령 후보를 지명・당선시켜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미얀마 역사상 최초의 문민정부였다. 식민지 해방 후 1962년부터 시작된 군사정권이 53년 만에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수치 의장은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군부가 2008년 제정한 헌법에 의거, 외국 국적의 배우자 또는 자녀를 둔 인사는 대통령 입후보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다. 영국 국적의 자녀를 둔 수치 의장은 총선 이듬해 NLD 출신의 틴 초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자 국가고문 및 외교장관을 겸직했다.
 
  사실상 수치 고문이 이끌어 온 미얀마 최초의 민간정권은 2017년 민족 문제로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로힝야(Rohingya)족 사태’다. 그해 소수민족 로힝야의 반군단체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이 동족(同族) 보호를 명분으로 미얀마 정부에 항거, 30여 곳의 경찰 초소를 습격하는 등 봉기했다. 미얀마 정부는 8월 25일 변경 지대인 라카인주(州)에서 ARSA를 테러단체로 규정해 강경 진압했다.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 방화, 난민 속출 등이 벌어졌다. 수십만명의 로힝야족이 월경(越境), 방글라데시로 피란을 했다.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인종 청소’ ‘소수민족 탄압’이라며 미얀마 정부를 규탄했고 수치 고문도 비판에 직면했다.
 
  수치 고문은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그의 부친 아웅산 장군은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미얀마 독립을 위해 영국과 일본에 맞서 싸웠다. 민족·종교·이념을 떠나 미얀마 모든 국민이 존경하는 국부(國父)였다. 딸인 수치 고문도 민주화를 위해 군사정권과 싸웠다. 그는 1988년 8월 8일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투쟁 ‘8888운동’을 목격한 뒤부터 투사로 거듭났다. 연설을 통해 민중을 이끌고, NLD를 창설해 군부에 민주화를 요구, 군부에 의해 당원 동지들이 핍박받고, 본인도 오랜 기간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온갖 역경 속에서도 마침내 민간정권을 창출했다.
 
  수치 고문은 민주화 투쟁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지만, 이번 로힝야족 사태로 ‘인권 탄압을 외면한다’는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게 됐다. 아직 실권이 남아 있는 군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오명까지 가해졌다.
 
  미얀마의 언론 자유에 대한 문제점도 제기됐다. 로이터 통신 기자 두 명이 작년 12월 로힝야 문제를 취재하다 미얀마 당국에 체포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4월에는 수치 고문과 군부 인사들을 비판해 온 주간지 《디 아이언 로즈(The Iron Rose)》 발행인이 사무실에서 살해되기도 했다. 미얀마는 최근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발표한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작년보다 6계단 하락해 전체 180개국 중 137위에 그쳤다.
 
  오늘날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는 보장받고 있는 것일까. 반세기 군정(軍政)을 끝내고 어렵게 일궈낸 민주화가 로힝야 사태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아웅산 수치의 문민정부는 3년 전 출범 당시 ‘변화를 원하는 국민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했을까.
 
  《월간조선》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미얀마 현지 정세와 사회 동향을 취재했다. 국내외 학자부터 전직 대사, 현지 교민, 독립 언론인, 민주화 운동가, 수치 고문의 최측근 인사까지 만나 연쇄 인터뷰했다.
 
 
  “로힝야 사태는 쉽지 않은 문제”
 
2017년 9월 10일 오후 국내 무슬림 외국인 노동자들이 서울 한남동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미얀마 정부군의 로힝야족 진압 규탄 집회를 벌이고 있다. 사진=조선DB
  최근까지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 유혈사태의 가해자로 지목돼 왔다. 소수민족에 대한 군인들의 강경 진압과 민간인 학살, 이에 대한 ‘수치 정권’의 침묵과 방관은 국제사회를 경악게 했다. 반면 미얀마 군부는 강경 진압을 인정하면서도 “이번 사건(진압)은 불교도 주민들이 테러범들의 위협과 도발에 직면한 가운데 이뤄졌다”고 반박했다. 로힝야 반군 ARSA가 먼저 테러를 자행하고 경찰을 습격해 군부의 강경 진압을 유발했다는 뜻이었다. 미얀마 국민 대부분은 불교를 믿는 반면, 로힝야 반군은 이슬람교를 믿는다.
 
  로힝야 반군의 학살을 증명하는 주장이 지난 5월 나오기도 했다. 표적은 같은 로힝야족 내 힌두교도들이었다. 로힝야 반군이 불교 사회인 미얀마에서 무슬림으로서 차별받았던 분노를 힌두교도에게 쏟아냈다는 것이었다.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는 같은 달 22일 보고서를 통해 반군이 작년 힌두교도 마을 두 곳을 습격, 최소 99명을 학살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반군은 붙잡힌 힌두교도에게 “너희와 라카인(미얀마인)은 같다”면서 폭행·갈취·살해를 자행했다. 반군은 보고서의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유혈 충돌의 책임은 군부에 있을까, 반군에 있을까. 로힝야 사태의 본질은 무엇일까. 기자가 만난 전문가와 현지인들은 로힝야 사태의 이면을 주목했다. 이는 종교나 이념 갈등보다는 역사와 민족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또 수십 년 동안 내전을 야기한 ‘해묵은 문제’라서 원인 규명과 해결 방법이 복잡하다고 했다.
 
  박현용 경희대 미얀마지역센터 연구교수는 “로힝야족을 (미얀마를 구성하는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보느냐, 이주민으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며 “로힝야족은 역사적으로 (영국의) 앞잡이 역할을 했었고, 종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미얀마 국민 대다수는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 (로힝야 사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얀마 연구가 양길현 제주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군부의 로힝야 탄압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는 일인 건 맞다”면서도 “종족 문제는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두 민족이) 종교도 문화도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말했다.
 
  실제 로힝야족과 전통 버마족 간의 적대관계는 오래됐다. 로힝야족은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이던 시절, 인종분리 정책에 따라 천대받던 버마족과 달리 준지배층으로 등용됐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로힝야족은 영국을, 버마 정부군은 일본을 지원했다.
 
 
  “로힝야 사람도 軍部보다 反軍 더 무서워한다”
 
2017년 9월 14일(현지시각) 방글라데시 샤포리르드위프 해안에서 로힝야족 난민 남성이 생후 40일 된 아들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고 있다. 이 남성은 벵골만을 통해 미얀마·방글라데시 국경을 넘다가 배가 침몰하면서 아들을 잃었다. 사진=조선DB
  현지인들은 더욱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로힝야족 인권 보호에는 찬성하지만 유혈사태를 초래한 반군의 도발, 역사·민족적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특히 미얀마 정부는 1982년 제정된 국적법에 의거, 이주 기간 등 요건이 맞는 로힝야족에 한해서 시민권을 부여하려 해도 반군의 횡포로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전직 미얀마 외교부 관리를 역임한 우 킨 마웅 린(U Khin Maung Lynn) 미얀마전략국제문제연구원(MISIS) 부원장의 말이다.
 
  “로힝야 사람들이 미얀마로 귀순하고 싶어도 ARSA가 이를 막습니다. 로힝야 사람들이 귀순을 위해 작성해야 할 문서가 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제출하지 않습니다. ARSA의 방해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ARSA는 그곳(라카인주)을 무슬림의 지역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로힝야 사람들도 미얀마 국민과 군부보다 ARSA를 더 무서워할 정도입니다.”
 
우 킨 마웅 린(U Khin Maung Lynn) 미얀마전략국제문제연구원(MISIS) 부원장.
  우 킨 마웅 린 부원장은 “우리는 예전부터 그들을 미얀마 국민으로 받으려 했었다. 그런데 로힝야 측에서 바라는 것은 (여러 심사 조건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다 받아주는 것이었다”며 “어느 나라도 그런 법은 없다. 우리는 (심사 조건을) 확인한 뒤 그들을 받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얀마는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 외신에서는 우리가 그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제압한다고 보도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인종청소 논란에 대해 반박했다.
 
  독립언론인 쪼 즈와 모(Kyaw Zwa Moe) 《이라와디(irrawaddy)》 편집장은 “미얀마 민주주의가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로힝야 사태가) 장애물이 되면 안 된다”며 “하지만 모든 로힝야도 기본적인 인권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의 말이다.
 
  “로힝야 문제는 너무 복잡합니다. 역사적으로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 온 문제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르고 그 의견이 맞다 틀리다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로힝야는 (미얀마 정부 기준으로) 소수민족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끼리만 해결할 수는 없고, 국제사회에서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익명을 요구한 양곤시의 한 교민은 로힝야와 적대관계가 깊었던 미얀마 민족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들이 화내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미얀마 사람 입장에서 보면 (영국 식민지 시절) 자기 부모(조상)를 죽인 사람인데 그게 이해가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나가라고 한 거예요. 물론 인종이나 민족 문제를 떠나서 인권만 놓고 보면, 미얀마 군인들이 폭행하고 사살한 게 더 큰 문제죠.”
 
  한편 최근에는 로힝야 사태가 봉합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타웅 툰 미얀마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6월 2일(현지시각)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안보회의에서 “(미얀마에서) 방글라데시로 대피한 로힝야 난민들이 자발적으로 돌아온다면 70만명을 모두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미얀마는 지난 1월 방글라데시와 2년 내 모든 로힝야 난민을 송환한다는 데 합의한 바 있다. 지난 5월 31일에는 유엔 난민기구(UNHCR)와 로힝야 난민 송환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툰 보좌관은 “이것을 인종청소라고 부를 수 있느냐”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므로 전쟁범죄란 있을 수 없다. (로힝야 진압 과정에서) 불법행위를 저지른 게 드러나면 군에 대해서도 조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 보도, 군사 영역 외에는 자유로워”
 
쪼 즈와 모(Kyaw Zwa Moe) 《이라와디(irrawaddy)》 편집장.
  외신기자 구속 사건에서 알 수 있듯, 로힝야 사태와도 결부된 ‘언론의 자유’ 문제는 아웅산 수치 민간정부가 국내외 비판을 받게 된 또 다른 이유였다. 현지 언론인 시두 아웅 민(Sithu Aung Myint) 《프론티어 미얀마(Frontier MYANMAR)》 기자는 작년 2월 26일 자 보도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미얀마에서 NLD 정부에 의한 언론 자유가 개선되지 않았다. 향후 TV 라이선스에 대한 통제 수준, 정보에 대한 권리를 제정하고 시행하려는 명백한 정부의 요구, 가혹한 법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민감한 기사의 자체 검열 등은 모두 우려의 대상이다.〉 민간정부는 군부 시절에 비해 언론 자유를 얼마나 보장했을까. 미얀마에서 언론은 민주주의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을까.
 
  쪼 즈와 모 편집장 주장에 따르면, 미얀마는 1962년부터 1988년까지 군부독재와 사회주의 체제였고 언론의 자유는 없었다.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되던 1988년부터 2012년까지도 언론의 자유는 없었다. 이때까지도 미얀마의 모든 언론은 관영매체로 소속돼 정보부 검열을 거쳐야만 보도가 가능했다. 또 1962년부터 2012년 8월까지 일간지는 정부에서만 발간했다. 2012년 8월 이후에서야 비로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언론 매체가 등장할 수 있었다. 수치 정부가 들어서기 3년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의 언론 자유는 사실상 없는 셈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미얀마 ‘8888운동’에 참여한 대표적 민주화 운동가이자 전직 기자 출신인 진미 씨.
  미얀마 ‘8888운동’에 참여한 대표적 민주화 운동가이자 전직 기자 출신인 진미(활동명, Kyaw Min Yu) ‘88세대 평화와 개방 사회(The 88 generation peace and open society)’ 제2총괄비서는 “1988년 당시 군부의 관영 언론만 있었다”며 “군부의 감찰부가 너무 엄격했다. 정보 교환이 어려웠고, 외신 기자들도 국내 취재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말이다.
 
  “나는 그때 (민주화운동 참가죄로) 감옥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보 하나를 얻기 위해 미국과 영국 대사관을 통해 노력했습니다. 언론을 통해 정보를 제공받기가 그만큼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언론의 자유가 없을 때라서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는 7년 징역형에 처해질 정도였습니다. 옛날에는 외신들도 제3국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현지에 외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1988년도에 운동했던 동지들이 해외 언론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민간 신문들도 많이 발간되고 있고, 정부에 대한 평가나 비판 등이 자유로운 편입니다. (이제는 국민 개개인이) SNS를 통해 정치에 대한 견해를 밝힐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언론인) 체포나 구속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 킨 마웅 린 부원장은 “언론 자유는 많이 개선된 편이다. 동남아 국가 중 필리핀 다음으로 언론의 자유도가 높다”며 “군사 관련 정보에 대한 보도 외에 나머지 정보 보도는 자유롭다”고 말했다. 곽희민 양곤 코트라 주임은 “예전에는 군부를 비판한다든지 정치적 상황을 적어서 보도하면 진짜 잡혀갔었다. 언론인은 물론 개그맨도 정부를 비판하면 큰일 났었다”며 “요즘은 (언론에서 정치 문제를) 약간 희화화해도 놔두고 있다. 점점 나아지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박현용 교수는 “정부에 대해 우리나라 언론처럼 (선진국 수준으로 견제적인) 기능을 하지는 못하지만, 지금 (미얀마) 언론이 느끼는 부담감은 (예전에 비해) 굉장히 덜하다”면서 “강력한 비판은 못해도 ‘앞으로 이렇게 해야 된다’ 제안하는 기사는 낼 수 있는 정도”라고 말했다.
 
 
  “민주화 위해 수많은 기자 희생했다”
 
시두 아웅 민(Sithu Aung Myint) 《프론티어 미얀마(Frontier MYANMAR)》 기자.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언론 자유가 과거에 비해 개선된 건 확실한 듯하다. 언론 자유가 얼마만큼 증진됐는지, 그 정도에 대한 시각차는 분명 있다. 아직까지도 자체 검열 시스템이 존재하거나 군사적 영역에 대한 자유로운 취재·보도는 제한받고 있기 때문이다. 장준영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교수는 “원래 (언론 보도) 검열법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면서도 “(미얀마) 언론의 정권 견제 기능은 초기단계라고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언론들도 군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주흠 전 주(駐)미얀마 대사는 “군부정권 독재하에서 언론이 육성될 수 없었다”며 “지금 민주주의가 들어왔다고는 해도 언론이 제 기능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고 말했다. 익명의 한 교민은 “예전보다는 비교적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내거나 취재를 하면 체포되는 경우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쪼 즈와 모 편집장 또한 “현재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언론은 온전하지 않고 굳건하지도 않다”고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면 군사정권 치하에서 성장하기 어려웠던 미얀마 언론은 민간정부 수립에 있어 어떤 기능도 하지 못했던 걸까. 미얀마 문화부 역사연구부 차관보를 역임한 묘오(Myo Oo) 부산외대 동남아창의인재 융합학부 미얀마어 트랙 교수는 “미얀마 언론인들은 1988년부터 시작된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며 “수많은 기자가 삶을 희생해 왔고 몇몇은 아직도 감옥에 있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지금도 평소와 같이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두 아웅 민 기자는 “기자들은 주로 (현재의 정치구도에) 의문점을 던지고, 군대가 여전히 정치적인 상황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며 “그때는 (언론사가) 정부의 약점을 비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군부 시절보다 75% 발전”
 
양곤박물관에 전시된 미얀마 소수민족의 의복들. 13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미얀마는 로힝야 사태 외에도 60년 동안 여러 부류의 내전을 겪고 있다.
  로힝야족 사태, 언론 자유 문제 등으로 수치 정부가 과연 ‘미얀마에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가져다줬는가’ 하는 근본적인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현지인들은 수치 정부가 가시적 성과를 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변화를 위해 수치 정부를 믿고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또 아직 실권이 남아 있는 군부와의 관계도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미얀마는 현재 민정(民政)과 군부가 권력을 나눠 가져, 사실상 연립정부(聯立政府) 체제로 운영된다.
 
  쪼 즈와 모 편집장은 “현재 미얀마는 민간정부이기 때문에 관리들을 부릴 만한 100%의 권리와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헌법상 군인들이 국회의 25% 의석을 차지한다. 국회의원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할당량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얀마에는 20개 정도의 정부 부처가 있는데, 그중 3개 부처(국방부·내무부·접경부)는 민간정부가 지휘할 권한이 없다. 군부에서만 3개 부처 인사를 지명할 수 있다”며 “3개 부서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전부 군복을 입는다. 민간정부 부서라기보다는 군부 부서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여기에 미얀마 군부는 부통령 2명 중 1명을 지명할 권리를 가진다. 광산 운영권 등 ‘경제 권력’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수치 정부는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룩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걸까. 진미 제2총괄비서는 “평균적으로 군부 독재 시기보다는 지금 민주주의가 75% 정도 발전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며 “군부는 헌법을 제정하고 (의석) 25%를 가진다. 그래서 (민간권력이) 75%”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까지도) 25% 권력이 75% 권력보다 강하다”며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우 킨 마웅 린 부원장은 “현재 미얀마의 민주주의는 갓난아이 수준이다. 약 50년 정도 군부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민주주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서도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미얀마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딱 맞다. 미얀마인들은 자유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만난 미얀마 현지인들은 수치 정부 수립 이후 또렷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없다는 지적에도 그녀에 대한 강한 신임을 밝혔다. 물론 최저임금 대폭 인상(지난 5월 14일 33% 인상)과 민간정부의 개방 외교 정책으로 인한 집값 폭등, 교통체증 문제가 발생해 오히려 군정 때보다 살기가 어려워졌다는 말도 있다. 그럼에도 미얀마 국민은 수치를 지지한다. 왜 그럴까.
 
  우 킨 마웅 린 부원장 주장에 따르면 수치 정부 수립 이후 미얀마는 여러모로 발전했다. 첫째, 외국인 투자법 제한이 줄었다. 둘째, 조금 더 취업 기회가 많아졌다. 셋째, 인력 수출이 늘었다. 넷째, 교육이 개선됐다. 다섯째, 교사를 비롯한 공무원들 월급이 인상됐다. 그는 “이러한 변화들이 (국민) 피부에 와 닿지 않더라도, 우리 국민들은 50년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수치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法治·평화’ 정착이 목표
 
미얀마의 황금 사원 ‘쉐다곤 파고다’에서 관광객들이 참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운 심성만큼 미얀마의 국민의식도 더 깨어나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이주흠 전 대사는 작년 2월 20일 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수치 고문이 안고 있는 정치적 딜레마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천신만고 끝에 쿠바 혁명에 성공했다. 그런 그가 “통치에 성공하기가 집권하기보다 다섯 배 어렵다”는 말로 정치적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요약했다. 수치가 바로 그 딜레마에 빠졌다.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국민 기대에 맞추려면 군이 쌓은 기득권의 철옹성을 허물어야 하지만 그러면 정권이 위험해진다. 그래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실망한 이들이 그녀에게 “지난날의 투쟁은 구국을 위한 것이었는가, 권력욕 때문이었는가” 묻는다. 1990년 선거에서 이겨 집권할 기회를 군의 개입과 국민의 저항의지 상실로 놓친 이후 수치에게 정치는 ‘불가능한 최선’보다 ‘가능한 차선을 찾는 기술’이었다. 그는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정치 도박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운전석(권좌)에 앉았지만 자동차(국가) 운전법은 모른다고 세상이 비난한다면? 그건 아웅산 수치가 조국의 민주화 연착륙을 위해 감내해야 할 짐이다.〉
 
  장준영 교수는 책 《하프와 공작새-미얀마 현대정치 70년사》(눌민·2017)에서 수치 정부의 과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기형적인 국가와 권력구조를 낳게 한 헌법을 수정하거나 전면 재작성해야 한다. 헌법에는 국가구조의 재편을 포함한 연방제를 달성하기 위한 조항, 군부의 정치적 역할을 축소하고 병영으로 복귀하여 직업주의를 강화하는 조항이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NLD의 내부 역량 강화를 포함하여 정당정치의 제도화와 발전이 필요하다. 셋째, 민간정부는 경제발전에 성공해야 하며, 이를 통해 신흥계층의 출현을 유도해야 한다.〉
 
미얀마 문화부 역사연구부 차관보를 역임한 묘오(Myo Oo) 부산외대 동남아창의인재 융합학부 미얀마어 트랙 교수.
  권력재편·정당정치·경제발전을 이루려면 먼저 내부 안정이 필요할 것이다. 13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미얀마는 로힝야 사태 외에도 60년 동안 여러 부류의 내전을 겪고 있다. 그래서 미얀마 정부의 당장의 목표는 ‘평화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정착이다. 진미 제2총괄비서의 말이다.
 
  “저희가 1988년에 민주화운동을 했으니까 올해로 30주년이 됐습니다. 미얀마는 소수민족들을 통합한 나라입니다. 그들의 인권과 국민들의 자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갖춘 연방국 제도가 필요합니다. 미얀마는 독립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내전 중입니다. 군부가 독재를 해왔기 때문에 자유가 없었습니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수치의 지도하에 전국적 평화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NC(전국회의)’라고 해서 군부와 무장단체가 서로 전쟁하지 않겠다는 7단계의 협약입니다. 둘째는 ‘21세기 판롱평화회의’입니다. 그 회의의 목적은 민주주의, 평화, 법치주의입니다. … 수치의 민간정부는 무력이 없습니다. 그녀는 무력 없이 평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무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수치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민들의 지지입니다.”
 
  미얀마 전문가 차장섭 강원대 교양학부 교수는 “미얀마는 불교국가라서 사람들의 심성이 굉장히 좋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운 심성만큼 미얀마의 국민의식도 더 깨어나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국민 계몽을 위해선 정부뿐 아니라 교육과 언론이 더 발전돼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한다. 이주흠 전 대사는 “50년 동안 군정이었던 나라에서 개혁이 그렇게 단시간에 이뤄질 수는 없다. 개혁정치가 나오려면 장시간 걸릴 것”이라며 “결국엔 국민이 깨어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진단했다. 한 교민의 말이다.
 
  “(지금 미얀마 사회는) 일종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가만히 있으면 누가 밥 떠먹여 주지 않아요. 스스로 노력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비전을 말해주는 사람이 미얀마에는 별로 없다는 게 문제죠. 누군가는 균형을 잡아주고 조율을 좀 해줘야 하는데. 개인의 의식을 바꿔주는 교육·언론 같은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착하게 살면 다음에 좋은 세상 만날 것이다’라는 사고는 종교적으로는 맞지만, 더 나은 발전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 최측근
  우 네 옥(U Nay Oke) SEI(Suu Education Institute) 이사장
 
  “하루아침에 폐쇄적 나라 바꿀 순 없어… 민족 화합으로 안정된 국가 후대에 물려줄 것”

 
   우 네 옥 이사장은 수치 고문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로 ‘남매나 다름없는’ 사이다. 수치 고문의 부친 아웅산 장군이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 우 네 옥 이사장의 부친은 지금의 국방차관 격인 사무차관이었다. 모친이 우 네 옥 이사장을 낳고 7일 만에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아웅산 가문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젊은 시절 대학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다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수감됐었고, 수치 고문이 민주화운동에 뛰어들 때 함께 활동했다. 수치 고문이 2011년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자 ‘NLD 교육 네트워크’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현재 수치 고문의 이름을 딴 교육 재단 ‘SEI’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월간조선》은 지난 5월 30일 미얀마 양곤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를 통해 수치 고문이 구상하고 있는 향후 국정운영 목표와 방향의 일단(一端)을 파악할 수 있었다.
 
  ― 아웅산 수치 민간정부 수립 후 미얀마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발전됐다고 생각합니까.
 
  “과거에 비해 지금 사회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꽉 막힌, 어떤 폐쇄적 성격 때문에 사람들끼리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민들의 얼굴을 보면 자유가 느껴집니다. 또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정부를 많이 비판할 수 있습니다. 가령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이전에는 집회·시위의 자유도 없었는데, 현재는 사소한 일로도 시위를 많이 할 정도입니다.”
 
  ―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고 있습니까.
 
  “미디어 자유가 없다는 등 비판들이 있는데, 현재는 많은 자유를 갖게 됐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정부에서만 신문·방송을 운영했습니다. 지금은 민간 방송국들도 생겼고 검열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쓸 수는 있지만, 군사적 영역과 관련해 지켜야 할 ‘보도 원칙’은 있습니다. 언론에 100% 자유를 줬다고 할 순 없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투명하고 자유롭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가령 한 주지사가 얼마 전에 신도시 개발과 관련한 내용을 공표했는데, 지금 언론이 그 정보에 대해 얘기하고 국민들도 반가워합니다. 언론사가 그런 정보들은 자유롭게 (국민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됐다는 거죠.”
 
  ― 수치 정부가 총선 당시 변화를 바랐던 국민들의 열망을 잘 담아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3년 전 총선 때 (수치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희망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가 우리를 다 좋게 바꿔줄 것으로 믿고 있었죠. 그러나 이 정부가 하루아침에 폐쇄적인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국민은 이해하고, 또 어떤 국민은 ‘왜 아직도 바뀐 것을 실감할 수 없는가’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학부모와 학생들은 수치 정부 출범 후 교육 분야는 좋아졌다고 행복해합니다. 수치 고문도 정부를 구성하면 ‘교육을 우선순위로 바꾸겠다’고 공약을 내건 바 있습니다. 보건 쪽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수치 정부가 ‘보건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양곤에 있는 중앙병원·아동병원, 그 밖의 병원들을 개선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만 인력과 자금력이 부족해 ‘빨리’ ‘쉽게’ 개선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우 네 옥 이사장의 자택 내부.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많다.
  ― 수치 정부의 향후 국정목표는 무엇입니까.
 
  “수치 고문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좋은 지도자입니다. 그는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국가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후손(후대)들에게 이 나라를 물려줄 것입니다. 수치 고문의 국정목표는 135개 모든 민족의 화합, (소수민족이 있는) 각 주마다 정부를 세우는 연방제 도입, 국가의 안정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교육 분야에 기여할 것이고, 의사는 보건, 사업가는 경제 분야에 기여할 겁니다. 이것이 내 일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몫이라고 멀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선 안 됩니다. 모두가 각자 분야에서 국가 안정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한국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짜 좋은 친구’ 나라인 한국에서 미얀마에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한국에서도 수치 정부의 교육 개선 정책을 도와줬습니다. 감사의 말 전하고 싶습니다. 향후 네피도(현 행정수도)에 ‘미얀-코 국제대학’(Myan-Ko International University)이 설립될 예정입니다. 현재 부지를 확보해 5년 안에 사업이 가시화될 것 같습니다. 의대·병원도 들어가는 종합대학입니다. 수치 고문이 질 높은 영화 제작을 위해 연기·연출·메이크업 전반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영상과(연극영화과)’도 설치해 달라고 특별히 요청했습니다. 한국 영화가 매우 대중적이고 고급이기 때문입니다. 수치 고문은 한국의 가르침으로 미얀마의 연극·영화 분야가 개선·발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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