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애덤 스미스 탄생 300주년 | 생애와 업적

대한민국은 애덤 스미스가 형성한 ‘경제적 자유주의’의 수혜자

  • 글 : 복거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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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 강조한 《도덕감정론》, ‘자연의 작용’을 중시하는 점에서 ‘자연의 선택’ 주장하는 진화론과 통해
⊙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는 사회의 목표를 실제로 추구하려 의도할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목표를 추진한다” (《국부론》)
⊙ 《국부론》은 경제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고 경제의 모든 분야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자유주의적 정책들을 제시한 첫 저작
⊙ ‘노동가치설’ 주장한 것은 잘못… ‘노동가치설’이라는 관점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의 가장 유명한 추종자
⊙ 대한민국, 종속 이론 거부하고 외부지향적 정책 선택해 ‘한강의 기적’ 달성

卜鉅一
1946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한국과학연구원 부설 선박연구소 연구개발실장, 문화미래포럼 대표, 《조선일보》 아침논단 필진,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민간위원,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 역임 / 저서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역사 속의 나그네》 《비명을 찾아서》 《높은 땅 낮은 이야기》 등
애덤 스미스
1776년 3월 런던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1723~1790년)가 쓴 《국가들의 부(富)의 성격과 요인들에 대한 탐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라는 긴 이름을 단 책이 출간되었다. 흔히 《국부론(國富論)》이라 불리게 될 이 두툼한 책은 개인들의 경제적 자유를 높일 것을 주장했다. 당시로선 낯선 ‘경제적 자유주의’를 설파한 이 책은 큰 인기를 얻어 6개월 만에 초판이 매진되었다.
 
  넉 달 뒤 7월엔 대서양 건너 필라델피아에서 영국 식민지 13개 주(州)의 대표들이 모여 ‘독립 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의결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초고(草稿)를 쓴 이 문서는 13개 주가 영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는 이유로 영국 조지 3세의 통치에 대한 27개의 불만과 자연적 및 법적 권리들을 들었다. 즉 ‘정치적 자유주의’를 선언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진실들이,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창조주에 의해 일정한 빼앗길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받았으며, 이것들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가 포함된다는 것이, 자명(自明)하다고 주장한다”는 구절에 이런 사상이 잘 표현되었다.
 
 
  ‘계몽 시대’
 
  자유를 높이는 주장들이 동시에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1770년대는 계몽 시대(Age of Enlightenment)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는 자유였다.
 
  계몽 시대를 불러온 근본적 힘은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엽까지 진행된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었다. 편리하게 쓰이는 연대는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나온 1543년부터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나온 1687년까지다. 이 시기에 수학,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같은 학문들이 ‘과학적 방법론’을 갖춘 지식 체계가 되면서, 유럽 사회에선 자연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새롭고 풍요로운 지적 풍토를 지닌 계몽 시대는 개인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중심적 이념으로 삼았다. 각기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내세운 ‘독립 선언’과 《국부론》은 이런 시대정신(zeitgeist)에 걸맞았고 덕분에 영향력을 한껏 늘릴 수 있었다.
 

  ‘독립 선언’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민족들에게 영감(靈感)을 주었다. 《국부론》은 대영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중상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자유 무역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자유 무역으로 교역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세계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경제 성장과 문화 발전을 누렸다. 이제 세계는 실질적으로 하나의 시장이 되었고, 자유 무역의 혜택은 많은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국부론》의 이런 공헌을 기려, 1976년엔 《국부론》 출간 200주년 행사들이 성대하게 열렸고 스미스의 지적(知的) 공헌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의 탄생 300주년을 맞아, 올해엔 그의 업적을 새롭게 평가하는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1723년 6월 5일은 세례 받은 날짜
 
애덤 스미스의 스승 프랜시스 허치슨.
  애덤 스미스는 1723년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근처의 커콜디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일은 알려지지 않았고 교회에서 세례 받은 날짜가 6월 5일이라는 것만이 알려졌다. 그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 그의 아버지가 죽어서, 그는 유복자(遺腹子)였다. 그리고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뉴턴도 마찬가지였다. 뉴턴도 유복자였고 평생 독신(獨身)으로 지냈다. 계몽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가 유복자였고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개가(改嫁)로 외할머니 손에 자랐고 어머니와 계부를 미워하게 된 뉴턴과 달리, 스미스는 평생 어머니와 함께 지냈고 어머니의 격려를 받으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스미스는 14세에 글래스고대학에 입학해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을 공부했다. 그의 선생은 뛰어난 계몽주의 도덕철학자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1694~1746년)이었다.
 
  여기서 도덕철학의 뜻을 살피는 것이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 데 긴요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철학자(philosopher)라는 말을 ‘지적 탐구를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썼다. 그래서 철학(philosophy)은 과학 지식의 총체를 뜻했다. 이런 관행은 중세를 거쳐 18세기까지 이어졌다.
 
  18세기까지는 발전한 유럽 사회에도 집적된 지식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모든 분야에 정통한 박학자(博學者)들이 많이 나왔다. ‘Polyhistor’ 또는 ‘polymath’라 불린 이들을 대표한 사람으로는 독일 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1646~1716년)를 들 수 있다. 그는 수학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니, 뉴턴과 별도로 미적분(微積分)을 발명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형이상학(形而上學), 신학(神學), 윤리학, 정치학, 법학, 경제학, 언어학, 역사학에 두루 정통했다. 그러나 여러 분야 사이의 연관은 작았고, 그것들을 통합해서 보편적 과학(universal science)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집적된 지식의 양이 빠르게 늘어나고 여러 분야에서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철학은 둘로 분화되었다. 뒤에 자연과학이라 불리게 된 분야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사회과학이라 불리게 된 분야는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런 분화 과정은 가속되어서, 스미스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는 이미 도덕철학 전반을 한 사람이 잘 아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스미스의 스승 허치슨은 도덕철학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지만, 스승보다 29세 아래인 스미스는 도덕철학의 특정 부분만을, 주로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라 불린 영역을 다루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1740년 스미스는 옥스퍼드의 베일리얼대학(Balliol College)에서 대학원 공부를 할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옥스퍼드의 교육에 크게 실망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공식 교수들의 다수는 여러 해 동안 가르친다는 시늉조차 내지 않았다”고 그는 《국부론》에서 회고했다. 심지어 그가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1776년)의 위대한 저작 《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읽는 것을 보자, 대학 직원들은 그 책을 압수하고 그에게 벌을 주었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장학금이 끝나기 전인 1746년에 옥스퍼드를 떠났다.
 
  1748년에 스미스는 에든버러대학에서 공개 강좌를 시작했다. 그가 다룬 주제들은 수사학(修辭學)과 문학이었다. 뒤에 그는 “부유(富裕)의 진보”를 추가했는데, 이 주제에 관해서는 “자연적 자유”에 바탕을 둔 경제 체제를 주장했다.
 
  당시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Scottish Enlightenment)가 한창이었다. 1707년에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병합해 대브리튼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의 일부가 되었다. 그 충격으로 스코틀랜드에선 경험주의(empiricism)와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조가 일어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로 발전했다. 세월의 시험을 견딘 업적을 남긴 학자들만 꼽더라도, 도덕철학자 허치슨, 의사 윌리엄 컬런(William Cullen·1710~1790년),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흄, 지질학자 제임스 허턴(James Hutton·1726~1787년), 사회학자 애덤 퍼거슨(Adam Ferguson·1723~1816년),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조지프 블랙(Joseph Black·1728~1799년),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1759~1786년)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이끌었다. 이 명단에 스미스까지 들어갔으니, 당시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를 중심으로 한 스코틀랜드 지식인 사회의 활력을 짐작할 수 있다.
 
  1750년에 스미스는 흄을 만났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두 지적 거인은 거의 모든 주제에 관해 생각이 같았고 상당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깝게 지냈다.
 
 
  “하게 하라, 지나가게 하라”
 
  1751년에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도덕철학 학과장이 되었다. 13년 동안 글래스고대학에서 강의한 뒤, 1764년에 한 귀족 아들의 가정교사로 일하기 위해 사직했다. 가정교사 봉급이 교수 봉급의 곱절이었다.
 
  가정교사 직무는 젊은 귀족과 함께 외국을 여행하면서 가르치는 것을 포함했다. 덕분에 그는 유럽 대륙의 저명한 지식인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제네바에선 볼테르(Voltaire)를 만났고 파리에선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을 만났다. 지적으로 가장 뜻있는 교유는 프랑스의 중농주의(重農主義·physiocracy) 학자들과 사귄 것이었다.
 
  중농주의자들은 중국 도교(道敎)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래서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상당하는 ‘자연적 질서’를 추구했다. 그들은 개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교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노동이 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며, 특히 농업에 투입된 노동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믿었다. 이들의 신조들은 1758년에 뱅상 드 구르네(Vincent de Gournay)가 외친 “하게 하라, 지나가게 하라(Laissez faire, laissez passer)”라는 힘찬 구호에 집약되었다. (이 구호에서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라는 말이 나왔다.) 중농주의자들의 신조들은 스미스가 쓰게 될 《국부론》에 형성적 영향을 미쳤다.
 
  1766년에 고향으로 돌아오자, 스미스는 《국부론》의 집필에 전념했다. 1784년엔 모친이 죽었고, 1790년엔 그 자신이 죽었다. 그의 저작에 관한 유언 집행자는 조지프 블랙과 제임스 허턴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출간에 적합하지 않은 원고들을 없애라고 당부했다. 그가 괜찮은 저술이라고 얘기한 《천문학의 역사》는 1795년에 출간되었다.
 
 
  ‘공감’ 강조한 《도덕감정론》
 
《도덕감정론》. 사진=브리티시 라이브러리
  스미스가 처음 출간한 책은 1759년에 나온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이다. 그는 도덕적 감정이 공감(sympathy)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직접 느낄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상상해보고서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일들을 하고 싫어할 일들은 피한다는 얘기다.
 
  자연은,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만들 때, 사람에게 그의 형제들을 즐겁게 만들고 싶은 본원적 욕망과 그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대한 본원적 혐오를 부여했다. 자연은 사람에게 형제들의 호의적 평가에 즐거움을 느끼고 비호의적 평가에 아픔을 느끼도록 가르쳤다. 자연은 형제들의 찬동을 그 자체로 그에게 가장 만족스럽고 가장 기분 좋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비난을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기분 나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형제들의 찬동에 대한 욕망과 비난에 대한 혐오는 그것들만으로는 사람이 그가 속하도록 만들어진 사회에 적합하도록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은, 그래서, 찬동받음에 대한 욕망만이 아니라 찬동받아야 할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그에게 부여했을 것이다. 또는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찬동하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첫째 욕망은 그가 사회에 적합한 듯 보이기만을 원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둘째 욕망은 그가 실제로 적합하게 되기를 바라도록 만드는 데 필요했다. 첫째 욕망은 그로 하여금 덕성을 지닌 듯 꾸미도록 하고 죄악을 감추도록 할 수만 있었을 것이다. 둘째 욕망은 그에게 덕성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악(惡)에 대한 진정한 혐오를 고취하는 데 필요했다.〉
 
 
  利己心이 利他的 행동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주장에는 신(神)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들어설 틈이 없다. 모든 현상이 자연의 작용으로 설명된다. 나아가서, ‘자연의 작용’을 ‘자연 선택’이란 말로 바꾸면, 바로 인성(人性)의 발전을 현대 진화론으로 설명한 것이 된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보다 꼭 100년 전에 나왔지만, 스미스의 통찰은 조금도 생기를 잃지 않았다.
 
  이처럼 도덕적 감정은 개인들의 상호 작용에서 출현했다. 개인들의 이기심(利己心)이 놀랍게도 이타적(利他的) 행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이런 도덕적 행태는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라 불린다. 이것이 모든 사회를, 사람들의 사회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의 사회들과 세포들로 이루어진 사회인 다세포 생물들의 몸 자체까지, 나아가서 종(種)이 다른 개체들의 공생(共生)까지, 지배하는 원리다.
 
  경제학은 사람들이 내리는 판단들의 물질적 결과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경제 정책은 사람들이 내리는 판단들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들을 뜻한다. 경제학이 궁극적으로 심리학으로 환원(還元)된다는 얘기는 이런 사정을 가리킨다. 자연히, 《도덕감정론》은 스미스의 경제학 저서인 《국부론》의 바탕이 되었다. 두 책이 함께 논의되어야, 스미스의 사상이 보다 체계적이 되고 그의 주장들이 보다 강력해진다.
 
 
  ‘보이지 않는 손’
 
《국부론》. 사진=브리티시 라이브러리
  《국부론》은 방대한 저작이다. 스미스는 이 책의 대부분을 경제적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정책들을 설명하고 추천하는 데 바쳤다. 그리고 그런 정책들이 조화를 이루어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불러온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런 주장을 떠받치는 근거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들었다. 그는 이 표현을 세 차례 썼는데, 《국부론》에선 한 차례 썼다.
 
  〈국외(國外) 산업의 지원보다 국내 산업의 지원을 선호함으로써, (개인마다)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한다. 그리고 가장 큰 가치를 지닌 제품을 생산하도록 그 산업을 조종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데, 많은 다른 경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그의 의도의 한 부분이 아니었던 목표를 추진하도록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인도된다. 그런 목표가 그의 의도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는 것이 늘 사회에 해로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는 사회의 목표를 실제로 추구하려 의도할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목표를 추진한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은 비유다. 그리고 비유는 아무리 적절해도 이론이 아니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로 개인들의 이기적 판단들이 사회적 공익(公益)을 창출하는 모습을 잘 그렸다. 그러나 그런 ‘의도하지 않은 좋은 결과’가 실제로 나오도록 만드는 과정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실은 스미스는 그런 설명에 필요한 이론적 도구들을 갖추지 못했었다. 이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는 과정을 ‘일반 균형 이론(General Equilibrium Theory)’으로 제대로 설명할 수 있고, 그것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에 대처하는 방책들에 관해서도 상당히 많이 안다.
 
  경제학사의 고전인 《경제 분석의 역사(History of Economic Analysis)》에서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이런 상황을 간명하게 기술했다.
 
  〈어떤 과학의 첫 발견은 자신의 발견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과학의) 근본적 문제의 발견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훨씬 뒤에 온다. 경제학의 경우, 그것은 특히 늦었다. 번쇄철학자들(scholastics)은 그것의 존재를 느꼈다. 17세기의 실업가 출신 경제학자들은 그것에 더 가까이 갔다. 이스나르(Achille-Nicolas Isnard), 애덤 스미스, 세(Jean-Baptiste Say), 리카도(David Ricardo), 그리고 다른 이들이 모두 그것을 찾아서 나름의 방식으로 애썼거나, 좀 더 적절한 표현을 쓰면, 더듬거렸다. 그러나 발견은 발라스(Le´on Walas) 이전에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태적) 균형을 상호 의존적 양들의 체계로 정의하는 그의 방정식들의 체계는 경제 이론의 ‘대헌장(Magna Carta)’이다. 그리고 그 기념비적 헌법의 기술적 불완전함도 유비(analogy)의 한 부분이다.〉
 
  완전 경쟁을 이룬 시장 체계는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배분한다. 그러나 그런 체계에 균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엄격히 증명하는 일은 20세기 중엽에야 이루어졌다.
 
 
  《국부론》의 한계
 
카를 마르크스
  《국부론》에 대한 슘페터의 평가는 냉정하다.
 
  “《국부론》은 전혀 새로운 분석적 아이디어, 원리, 또는 방법을 단 하나도 포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스미스는 이미 낡은 ‘노동가치설(labor theory of value)’을 따랐다. 그나마 노동가치설의 내용을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해, 세 가지 노동가치설을 주장한 셈이었다. 슘페터는 이 셋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이 ‘노동량 가치설(labor quantity theory of value)’이라고 지적했다.
 
  슘페터는 이처럼 혼란스럽고 애매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덕분에 《국부론》이 방대한 추종자들을 얻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이론과 주장들을 그 책에서 발견했다는 얘기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사람은 마르크스(Karl Marx)였다. 이 점을 고려하면, 《국부론》이 후대(後代)에 미친 영향은 훨씬 커진다.
 
 
  최초의 경제학 교과서
 
  《국부론》이 줄곧 인기가 높았고 스미스가 추앙을 받은 것은 그것이 담은 자유주의 정책들 덕분이었다. 그의 정책들은 경제적 자유주의에 바탕을 두었고,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자유주의는 계몽 시대 이후로 줄곧 시대정신이었다. 그가 추천한 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은 실제로 실행되었고 아직도 유효하다.
 
  《국부론》이 오래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첫 경제학 교과서였다는 사정이다. 《국부론》은 경제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고 경제의 모든 분야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자유주의적 정책들을 제시한 첫 저작이었다. 자연히, 그 책은 출간 이후 경제학 교과서로 쓰였다. 어려운 경제학 이론들을 다루지 않고 일상적 일들을 실례로 삼아 쉽게 설명해 교과서로 아주 적합했다.
 
  이런 사정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교과서인 에우클레이데스(Eucleides)의 《원론》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정리들 가운데 에우클레이데스 자신이 생각해낸 것은 없다. 현대 수학의 높은 수준에서 살피면, 여러모로 부족하고 틀린 부분들도 있지만, 《원론》은 기하학 지식을 감탄할 만큼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그 기하학 교과서는 정의(定義)들, 공리(公理)들 및 공준(公準)들을 제시하고 그것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정리들을 끌어낸다. (고대 그리스에선 모든 학문에 공통된 원리들은 공리라 불렀고 특정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들은 공준이라 불렀다.) 덕분에 《원론》은 2000년 넘게 내용과 체계가 바뀌지 않은 채 교과서로 쓰였다.
 
 
  대한민국은 애덤 스미스의 수혜자
 
  300년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난 경제학자를 지금 우리가 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중 매체마다 애덤 스미스 특집을 꾸미는 지금,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본질적 이유는 스미스의 지적 업적이 우리를 형성한 힘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다. 19세기에 서양 문명이 세계를 정복한 뒤, 지구의 모든 사회에서 문화의 주류는 서양 문화가 되었다. 전통적 문화는 빠르게 활력을 잃고 사라졌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체제의 원리로 삼은 터라, 우리 사회는 서양의 자유주의 전통을 깊이 받아들였다. 자연히, 경제적 자유주의의 형성과 전파에 크게 공헌한 스미스로부터 우리는 깊은 혜택을 받았다. 북한의 실상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근본적인 결정이고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날마다 일깨워준다. 우리로선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현황을 성찰(省察)하도록 만든다.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행운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해방이 되고 미군의 남한 진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적 질서로 부여받은 행운을- 제대로 지켜나가고 있는가? 두렵게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선뜻 나오지 않을 만큼, 지금 우리 사회 체제는 흔들리고 있다.
 

  근본적 문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서 나왔지만, 가장 큰 요인은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이 부족한 세력이 학교 교육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은 어릴 적부터 대한민국의 역사와 구성원리를 비하한 교과서들을 좌파 성향의 교원노동조합에 속한 교사들로부터 배운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학생들은 우리 사회의 정설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그동안 좌파 정권들 아래서 우리 사회는 크게 허물어졌다. 정부 부문의 비대화, 너무 무거운 세금, 기득권을 지키고 혁신을 막는 규제들, 정상적 경제 활동을 방해하는 노동조합들의 득세, 정부의 경제 정책을 옭아맬 만큼 커진 정부 부채, 민중주의(populism) 정책으로 타락한 시민 정신, 어느 것 하나 풀기가 쉽지 않은 문제들이 우리 앞길을 막는다. 이런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면, 아니 더 악화되는 것이라도 막으려면,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에 대한 믿음을 젊은 세대들이 지니도록 만들어야 한다.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대한민국
 
  이 과제를 마주하면, 뜻있는 시민들은 누구나 마음이 막막해질 것이다. 한 가지 현실적 방안은 대한민국의 성취를 우리가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1960년대 말엽부터 한국의 경제 발전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고속도로가 나고 철강 공장이 들어선 것은 세상에 한국이 경제 발전의 길로 들어섰음에 대한 알림이었다. 이어 발전된 경제를 바탕으로 삼아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발전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렸다.
 
  한국의 경제적 성취를 기적으로 일컫는 것은 한국 경제가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자라났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까지는 한국의 경제 성장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고 기적으로 꼽힌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서독과 일본의 경제 성장보다도 더 성공적이었으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경제적 성취를 기적이라 부르는 것엔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적 성공엔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한국의 성취는 우리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고른 모험 덕분이었고, 바로 그런 모험적 결정이 ‘한강의 기적’을 더욱 기적적으로 만들었다. 당시 한국만이 애덤 스미스의 교훈을 따라 과감히 자유 무역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뒤처진 나라들의 경제 발전에 관해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이론은 아르헨티나 경제학자 라울 프레비시(Raul Prebisch)의 주장이었다. 그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던 경험이 뒤처진 나라들의 경제 구조를 뒤틀리게 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뒤처진 나라들은 앞선 나라들에 원자재들을 수출하고 앞선 나라들로부터 공산품들을 수입하도록 강요받는 등 교역 조건도 뒤처진 나라들에 불리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뒤처진 나라들이 앞선 나라들에 경제적으로 종속된다는 뜻을 담고 있어서, 이 주장은 ‘종속 이론(Dependency Theory)’이라 불렸다.
 
  종속 이론의 관점에서 살피면, 앞선 나라들과의 교역은 가난한 나라들의 종속을 더욱 깊게 할 따름이어서 궁극적으로 해롭다. 그래서 프레비시는 교역을 줄이고 수입 대체 산업들을 육성하는 내부지향적 경제 정책을 추진하라고 가난한 나라들에 조언했다. 실제로 많은 나라가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내부지향적 정책을 추진했다.
 
 
  ‘한강의 기적’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중 매달 무역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고 난 후에는 수출상품 전시장을 찾아 수출을 독려했다. 사진=조선DB
  종속 이론을 따른 내부지향적 경제 정책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정책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종속 이론의 본질적 오류는 교역의 이점을 설명하는 비교 우위(comparative advantage)라는 개념을 잊은 데서 나왔다. 뒤처진 나라들은 자본도 기술도 숙련된 인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별다른 설비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광물이나 농수산물을 생산해 수출하면서, 차츰 기술과 자본을 축적해 연관 산업들로 진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지만, 그래도 비교 우위가 있는 분야는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정을 무시하고, 갑자기 경쟁력이 없는 분야들에서 수입 대체를 시도했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종속 이론의 처방을 따른 나라들은 모두 생산성과 경쟁력이 줄어들었고 사회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대한민국은 외부지향적 정책을 골랐다. 무역 장벽을 낮추고, 교역을 장려하고,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유망한 산업에 투자했다. 이런 정책은 당시로선 아주 드물고 과감한 선택이었다.
 
  식민지에서 독립하자 곧바로 긴 전쟁을 치른 나라가 경이적 경제 발전에 성공하자, 가난한 나라들이 대한민국의 경제 정책을 본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나라들은 거의 다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이것은 한반도의 오랜 역사에서 우리가 인류 사회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이다.
 
  우리는 이 업적을, 이제는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 ‘한강의 기적’을, 젊은 세대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이 일은 쉽지 않지만, 우리가 분발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원조 자유주의자의 탄생 300주년을 맞아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가르침을 새기는 지금, 우리는 이 일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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