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밀 구베로, 1945년 5월 이승만을 찾아와 ‘조선을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의 영향 아래 두기로 했다’는 얄타 밀약설 제보
⊙ 이승만, 얄타 밀약설 폭로… ‘조선’의 존재 확인시키고, 러시아의 한반도 장악 가능성 차단
⊙ 구베로의 실체 알려지지 않아… “이승만이 만든 가공의 인물”로 여겨지기도
⊙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는 ‘공산당을 버린 러시아인’이 아니라 저명한 미국 탐사보도 기자 에밀 고브로(Emile Gauvreau)
⊙ 이승만, “사실이든 거짓이든,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밝히기 위해 지금 그것을 터뜨릴 필요가 있소”
⊙ 이승만, 얄타 밀약설 폭로… ‘조선’의 존재 확인시키고, 러시아의 한반도 장악 가능성 차단
⊙ 구베로의 실체 알려지지 않아… “이승만이 만든 가공의 인물”로 여겨지기도
⊙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는 ‘공산당을 버린 러시아인’이 아니라 저명한 미국 탐사보도 기자 에밀 고브로(Emile Gauvreau)
⊙ 이승만, “사실이든 거짓이든,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밝히기 위해 지금 그것을 터뜨릴 필요가 있소”

- 이승만에게 얄타 밀약설을 제보한 미국 언론인 에밀리 고브로. 그동안 ‘에밀 구베로’라고 잘못 알려졌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정신과 신체가 불구여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인물이다. 우연히 모리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쓴 〈고쿠라 일기〉가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모리가 고쿠라에 남긴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했고, 일기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다듬어나갔다. 그런 작업은 자신의 어머니, 모리의 가족, 그리고 문단의 격려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나름으로 뜻있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죽은 이듬해에 〈고쿠라 일기〉 원본이 발견되었다.
이 작품은 내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름으로 가치를 지녔던 추적 작업이 원본이 발견되면서 한순간에 가치를 거의 다 잃고 하나의 일화로 남는 상황은 여러 생각을 부른다. 가치는 무엇인지, 내재적 가치가 왜 외부적 사건으로 바뀌어야 하는지, 주인공이 자신의 작업이 그런 운명을 맞을 것을 모르고 죽은 것이 차라리 다행인지.
지적(知的) 호기심이 큰 사람들은 이런 일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근년에 내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과 관련된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에 여러 해 매달린 것이다. 실은 우남의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선 구베로의 정체에 관한 논의가 자주 나온다.
우남의 ‘얄타 비밀 협약’ 폭로
얄타 협정에 따라,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UN) 헌장을 기초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 중요한 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청받지 못했다. 우남은 임시정부가 초청받도록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국제연합 회의에 초청받을 가능성이 희미해진 5월 초순, 에밀 구베로라는 사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이 묵고 있는 모리스 호텔로 우남을 찾아왔다. 그는 우남의 오랜 친구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Jay Jerome Williams)가 홍보 전문가로 추천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공산당에서 전향한 러시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석 달 전의 ‘얄타 회담’에 관한 비밀 정보를 우남에게 알려주었다. “얄타 회담에서 미국·영국 및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조선을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의 영향 아래 두며, 미국과 영국은 조선에 대해서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구베로의 정보는 우남의 생각과 부합했다. 우남은 여러 해 전부터 미국 국무부가 조선 문제에 러시아의 이익 위주로 접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번 국제연합 회의에 대한민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도 미국 국무부 안에 러시아의 이익을 앞세우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구베로의 얘기를 듣자, 우남은 곧바로 움직였다. 낯선 사람의 얘기만 믿고 미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행동에 나서는 것은 물론 위험했다. 그러나 그로선 그 정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었다. 전후(戰後)의 국제 질서를 결정하는 국제연합 회의가 끝나기 전 행동에 나서야, 크든 작든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우남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신문들을 거느린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에게 편지를 썼다. 구베로가 제공한 정보를 설명한 다음, 강대국들의 비밀 협정으로 희생된 조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구베로 명의로 의회 지도자들에게 호소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썼다.
구베로는 우남과 신문기자들의 회합을 주선했다. 국제연합에 관한 소식이 드물었던 참이라, 신문들은 우남의 ‘얄타 비밀 협약’ 주장을 크게 보도했다. 특히 허스트 계열의 간판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San Francisco Examiner)》는 우남의 주장을 상세히 소개하고, “만일 사실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각서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이곳에 모인 연합국 회의에 외교적 폭발물이 될 것”이라고 평했다.
영국 의회에서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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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2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 처칠 영국 총리는 얄타에서 만나 戰後질서에 대해 논의했다. |
이처럼 우남이 제기한 ‘얄타 비밀 협약’ 의혹이 미국에서 관심을 끌자, 영국에서도 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일었다. 의회에서 의원들은 처칠 총리에게 그 의혹에 대해 질의했다. 처칠은 “비밀 협약은 없었지만, 많은 주제가 다루어졌고, 몇 가지 대체적 양해사항이 있었다”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부인하자, 얄타 회담에서 ‘비밀 협약’이 있었다는 의혹은 일단 해소되었다. 그러자 미국에 있던 우남의 적들이 들고일어나서 그의 행동을 어리석은 짓이라 거세게 비판했다. 우남을 반대하는 세력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고 워싱턴에 사무소를 설치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외교부서인 ‘주미외교위원부’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남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거나 활동이 위축되지 않았다. 7월 21일엔 연합국 정상회담을 위해 독일 포츠담에 간 트루먼 대통령에게 긴 전보를 쳐서 조선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7월 25일엔 록하트의 해명에 반박하는 답신을 보냈다. 우남은 미국 정부의 해명이 “일상적 상황에선 충분하다고 간주되어야 하지만” 몇 가지 점 때문에 그의 의심들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썼다.
폭로의 효과
‘얄타 비밀 협약’에 대한 우남의 거듭된 비판은 미국 사회에서 조선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멸망한 나라로선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이 가장 두려운 운명이다. 잊히지 않아야, 언젠가는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지닐 수 있다. 우남은 자기 조국이 잊히는 것을 막기 위해 평생 진력했다. ‘얄타 비밀 협약’을 공개적으로 거론함으로써, 그는 미국 시민과 관료와 정치가들이 ‘Korea’를 결코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서, 우남은 미국 국무부가 비밀 협약이 없다고 확인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런 확인은 평상시엔 결코 나올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러시아가 슬그머니 한반도를 장악할 위험은 크게 줄어들었다.
우남의 이런 헌신적 노력이 실질적으로 작용한 모습을 우리는 ‘38선 획정’ 과정에서 선명하게 본다. 루스벨트는 조선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책을 지니지 않은 채 얄타 회담에 임했다. 조선을 즉시 독립시키는 대신 상당 기간 연합국의 신탁통치 아래 둔다는 방안이 현실적이라 여겼다. 그러나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은 조선의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7월 하순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George Marshall) 대장은 대표단의 일원인 작전참모부장 존 헐(John E. Hull) 중장에게 조선에 병력을 파견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헐과 그의 참모들은 조선의 지도를 살피고서 미군과 러시아군 사이의 적절한 경계를 찾아보았다. 미군 지역에 적어도 2개의 주요 항구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은 러시아군과의 경계는 서울 북쪽에 설정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경계는 북위 38도선과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생각을 포츠담 회담에 참가한 러시아군 지휘관들과 논의하지는 않았다.
‘38선’ 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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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선’을 그은 실무자 딘 러스크는 후일 미국 국무장관이 됐다. |
위에서 보듯, 얄타 회담부터 포츠담 회담까지 5개월 사이에 미국의 조선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조선을 상당 기간 연합국의 신탁통치 아래 두고 조선에서 러시아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군사적으로 점령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도 미리 점령 지역을 획정해서 이미 조선을 점령하기 시작한 러시아에 동의를 요구하는 태도로 바뀐 것이다. 이런 태도의 변화는 어떻게 나왔나?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 사이에 나온 조선과 관련된 사건은 우남의 ‘얄타 비밀 협약’ 폭로뿐이다. 그것은 연합국 정부들이 관련된 국제적 사건이었고, 미국 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국무부가 공식적으로 우남의 폭로를 부인해서 조선이 러시아의 일방적 영향 아래 놓이는 상황을 막았다. 따라서 미군이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게 된 일은 우남의 행동이 영향을, 결정적 영향이 아니라면 적어도 실질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東아시아에 관한 비밀 협약
얄타 협정이 맺어진 지 꼭 한 해 후인 1946년 2월 11일 동아시아에 관한 비밀 협약이 공개되었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뒤 두세 달 안에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약속했다. 단, 참전은 아래 조건들이 충족된다는 것을 전제로 삼았다.
1.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에서의 현상(status quo)은 유지된다.
2.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잃은 권리들은 복원된다.
(a) 남부 사할린과 둘레의 섬들은 러시아에 반환된다.
(b) 다롄(大連)항은 국제항이 되고 이 항구에 대해서 러시아가 지녔던 특권들은 복원된다. 러시아가 뤼순(旅順)항을 해군기지로 조차한 것은 복원된다.
(c) 만주의 동중국철도와 남만주철도는 중국과 공동으로 운영된다.
3. 쿠릴 열도는 러시아에 할양된다.
러시아의 위성국가인 외몽골의 현상 유지를 빼놓으면, 이 협약은 모두 일본이 차지했던 지역들을 [일본 본토, 일본 조차지인 관동주(關東州), 그리고 일본 위성국가인 만주국을] 대상으로 삼았다(쿠릴열도의 북부는 원래 러시아 영토였으나, 북부 사할린과 맞바꾸어 일본 영토가 되었다). 우남이 줄기차게 주장한 ‘얄타 비밀 협약’은 실체가 있음이 밝혀졌지만, 일본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조선은 협약 대상에서 빠졌다.
스탈린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해서 일본에 넘긴 이권(利權)들을 되찾는 데 마음을 쏟았다. 현실적 이익도 중요했지만, 제정(帝政)러시아가 당한 패배의 치욕을 씻는다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제정러시아가 만주에서 지녔던 철도와 항구에 대한 권리처럼 자잘한 이권까지 챙겼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전국의 지위를 누리게 된 중국 정부로 당연히 넘어갈 만주국의 자산을 차지하겠다고 전략회담인 얄타 회담에 어울리지 않는 탐욕스러운 행태를 보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조선은 러시아가 줄곧 노린 땅이었다. 한때는 조선에서 압도적 지위를 누렸다. 애초에 러일전쟁은 두 나라가 조선에서의 우위를 다투는 싸움이었고, 그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러시아는 조선에서 지녔던 이권과 영향력을 모두 잃었다. 당연히 스탈린으로선 조선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도 조선은 중요했다. 비밀 협약에 나온 외몽골, 남부 사할린, 쿠릴열도, 다롄과 뤼순, 그리고 만주철도를 다 합쳐도,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전략적으로도 조선 하나보다 훨씬 덜 중요했다. 그런데도 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런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스탈린의 속셈
우리가 당시 스탈린 입장에 서서 동아시아의 상황을 살피면, 자연스러운 설명이 떠오른다. 미국이 요구해온 대로, 그리고 얄타 협정에서 합의한 대로,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가 일본을 공격하게 되면, 러시아군은 필연적으로 만주의 관동군과 먼저 싸우게 된다. 관동군을 공격하려면, 러시아군은 조선으로 진입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북쪽 만주의 관동군을 포위하기 위해선, 남쪽의 조선을 점령해서 관동군의 퇴로를 끊어야 한다. 아울러 일본 본토~부산~서울~안둥(安東)~펑톈(奉天)으로 이어진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해야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쉽게 이길 수 있다. 러시아군이 일단 조선 북부에 진입하면, 조선의 지형과 수송망은 조선 전역의 장악을 필수적으로 만든다. 조선의 철도망은 서울을 중심으로 건설되었으므로, 한반도 동북부에 진입한 러시아군이 서북부 만주 국경으로 이동하려면, 먼저 수도인 서울을 점령하고 경의선을 이용해서 서북부로 향해야 한다. 그리고 후방의 안전을 위해 조선 남부를 점령해야 한다.
한번 러시아군에 점령되면, 조선은 아주 오래 러시아의 통치를 받을 터였다. 만주국의 영토인 만주는 중국에 반환되겠지만,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조선이 실제로 독립 국가로 부활하는 과정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연합국 수뇌들은 조선을 몇십 년 동안 연합국의 신탁통치에 둔다는 방안에 대체로 합의한 상태였다. 일본 본토의 점령에 총력을 기울이는 미국으로선 조선 문제에 관심을 쏟을 새가 없을 터였다.
당연히 스탈린으로선 조선에 관해 어떤 합의도 언급도 없는 편이 나았다. 1943년 겨울의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조선을 40년 동안 신탁통치 아래 두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스탈린은 어물어물 넘어갔다. 얄타 회담에서도 루스벨트는 조선 문제에 대해 합의하고자 했지만, 스탈린은 다시 그냥 넘어갔다.
앨저 히스
이런 경우, ‘증거의 부재(不在)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Absence of evidence is not evidence of absence)’라는 얘기가 나온다. 조선에 관한 비밀 협약의 증거로 드러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비밀 협약이 없었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조선에 관한 비밀 협약의 경우엔 그런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조선이 그리도 두드러지고 중요한 존재였으므로, 조선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수상하고 간접적으로 비밀 협약의 존재를 가리킨다. 모든 일에 용의주도하고 자잘한 이권들까지 챙기는 스탈린이 조선처럼 탐이 나고 두드러진 존재를 적극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전혀 하지 않은 채 그냥 운에 맡겼을 것 같지는 않다.
동아시아에 관한 협약은 두 가지 이유로 비밀에 부쳐졌다. 하나는 아직 러시아와 일본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가 탐낸 만주의 이권들은 연합국의 일원인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될 사항들이었다. 따라서 우남이 지목한 ‘비밀 협약’은 동아시아에 관한 공식 협약이 아니라 스탈린이 따로 미국의 누군가와 협의한 일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렇게 보아야, 스탈린의 이상한 행태가 설명된다. 단순히 발표되지 않았다는 뜻에서의 ‘비밀 협약’이 아니라 협약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다는 얘기다. 그것은 구두 합의였음이 확실하다.
그러면 스탈린은 미국의 누구와 언제 어디서 조선 문제에 대해 양해를 주고받았을까? 그 미국인이 얄타에서 실질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얄타 회담이 끝난 뒤 따로 모스크바로 갔던 국무부 장관 특별보좌관 앨저 히스(Alger Hiss)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미국 육군의 비밀 암호 해독 작전인 ‘베노나 사업(Venona Project)’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을 밝혀냈다.
‘구베로’는 누구인가
조선에 관한 ‘비밀 협약’이 실제로 있었든 없었든, 그것에 대한 논란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근본적 영향을 미쳤다. 만일 우남이 그것의 존재를 폭로해서 미국과 영국에서 큰 논란이 일지 않았다면, 아마도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미군이 진주하는 상황은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모든 것이 에밀 구베로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쉽게도, 우리는 그에 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우남의 전기 《이승만: 신화 뒤의 사람(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에서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는 구베로를 ‘공산당을 떠난 러시아 사람’이라고 기술(記述)했다. ‘공산당을 떠났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든, 구베로는 국제연합 회의에 참석한 러시아 대표들과 안면이 있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얘기다. 자연히, 러시아의 비밀문서들에는 그의 이력과 ‘얄타 비밀 협약’ 폭로와 관련된 그의 활동에 관한 기록들이 많을 것이다. 러시아가 그런 기록을 공개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으므로, 오래 세월이 지나야 우리에게 큰 혜택을 준 은인(恩人)의 모습이 좀 더 자세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상이 2018년 여름에 《악극 프란체스카: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 여인》을 펴낼 때 내가 구베로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의 전부다. 그 책의 후기(後記)에서 아는 것들을 모두 밝히고 나서, 나는 그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해 더 알게 되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물론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우남의 삶에 관한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로서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남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얄타 비밀 협약’을 폭로한 것이 그의 큰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구베로는 이승만과 한미협회가 만든 가공의 인물로, 대외적(對外的)으로는 단 한 번도 그 이름과 신분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우남을 세상을 속인 인물로 모는 학자도 있다. 그에 대해 호의적인 학자 가운데도 그의 폭로가 충동적이고 경솔했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윌리엄스 소개로 우남과 만난 ‘고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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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과 한미협회 이사들. (왼쪽부터) 이승만, 메이어스 부인, 스태거스 변호사, 더글러스 아메리칸대학 총장, 호머 헐버트 박사, 제이 제롬 윌리엄스 INS 기자. |
거기서 나는 1947년 4월 17일에 펜실베이니아주(州) 포인트 플레전트의 에밀 고브로(Emile Gauvreau)가 워싱턴의 제이 제롬 윌리엄스(Jay Jerome Williams)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寫本)을 찾았다. 레터헤드가 있는 편지지에 서명이 있고 사본(carbon copy)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편지 원본으로 보인다. 두 장으로 된 그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고브로는 윌리엄스의 소개로 우남을 만났다.
2. 고브로의 편지는 우남과 만난 뒤에 고브로와 윌리엄스가 한 전화 통화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3. 고브로는 미국의 러시아 승인에 관해 호의적으로 보고한 특별 의회조사단(special congressional mission)의 참관자(observer)로 일한 경력이 지금 자신에게 조선을 위해 일할 능력을 부여한다고 확신한다. 고브로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러시아 승인 문제를 논의했고, 러시아 승인에 관한 홍보를 위해 러시아에 파견되었다는 것을 러시아 사람들은 안다.(미국은 1933년에 공산주의 러시아를 승인했는데, 결과는 미국의 기대에 못 미쳤다. 특별 의회조사단은 승인 이전이나 이후에 부정적 여론을 돌리기 위해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러시아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무자비하게 나올 것 같지 않다. 러시아는 이미 ‘바르샤바 임시정부’가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러시아의 폴란드에 대한 요구를 조선에 유리하게 이용할 여지가 있다.(1939년 폴란드가 독일과 러시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뒤, 폴란드 사람들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전황이 유리해지자, 러시아는 공산주의자들로 ‘폴란드민족해방위원회(PKWN)’라는 괴뢰정부를 조직했다. 흔히 ‘루블린(Lublin) 위원회’라 불린 PKWN은 1945년 1월 1일에 ‘폴란드공화국임시정부(RTRP)’로 바뀌었다.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이런 조치에 반발했고, 미국과 영국도 함께 항의했다. 고브로가 ‘바르샤바 임시정부’라 부른 것은 RTRP를 가리킨다.)
5. 고브로는 우남에게 “다가오는 회의에서 어떤 결정적 순간에 말 그대로 조선을 지도에 집어넣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할 수 있다(at some critical point in the forthcoming conference Russia can be used to put Korea on the map)”고 얘기했다.
6. 그런 행동은 미국 국무부를 부끄럽게 만들어 미국이 조선을 위해서 움직이도록 만들 것이다.
7. 조선은 다른 모든 압제를 받은 소수(少數) 민족들의 문제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고, 바로 이 점이 조선 정부를 위한 가장 강력한 주장이 될 수 있다.
8. 고브로 자신은 러시아 사람들에겐 ‘고마운 사람(persona grata)’이다. 그가 러시아 승인에 호의적인 책을 써서 연봉 3만 달러의 일자리에서 허스트에 의해 해직되었다는 것을 러시아 정부 수장(首長)들은 안다. 《프라우다》는 반 페이지에 걸쳐 그 책의 서평을 실었다. 그때 러시아영사관에서 그에게 전화해서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물었었다.
9. 고브로는 러시아로부터 아무런 대가(代價)를 받지 않았으므로, 이번에 조선 문제를 통해서 보답을 받고 싶다면 러시아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대할 것이다.
10. 고브로가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할 일들은 2000달러가량 드는데, 고브로 자신이 500달러는 낼 수 있으니, 나머지 금액을 마련해주기 바란다.〉
에밀 고브로는 미국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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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고브로의 소련 방문기 《우리가 그리도 자랑스럽게 경례한 것》. |
고브로는 혁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러시아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본명은 에밀리 헨리 고브로(E'mile Henri Gauvreau)였고 1891년에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프랑스계(系) 캐나다 사람들이었다.
부모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서, 맏아들인 고브로는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일찍부터 저널리즘에 종사했는데, 탐사 보도를 잘했고, 선정적 기사들을 즐겨 썼다. 그래서 1924년에 창간된 선정적 타블로이드 《뉴욕 이브닝 그래픽(New York Evening Graphic)》의 초대(初代) 편집인이 되었다. 이 신문은 그의 주도 아래 크게 발전했지만, 후발 주자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1929년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허스트가 자신의 타블로이드 《뉴욕 데일리 미러(New York Daily Mirror)》의 편집인으로 고브로를 발탁했다.
고브로는 1935년에 자신의 러시아 방문에 관한 책 《우리가 그리도 자랑스럽게 경례한 것(What So Proudly We Hailed)》을 펴냈는데, 이 책이 허스트의 분노를 사서 해직되었다. 허스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는데, 고브로는 이 책에서 러시아를 우호적으로 묘사했다. 미국 국가(國歌)의 한 구절을 책 제목으로 쓴 것도 문제를 키웠을 것이다. 윌리엄스에게 보낸 1945년 4월17일자 편지에서 그가 “러시아 승인에 호의적인 책을 써서 연봉 3만 달러의 일자리에서 허스트에 의해 해직되었음을 러시아 정부 수장들은 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일을 가리킨 것이다. 그 뒤로 그는 저술에 힘을 쏟았고 소설도 발표했다. 뒤에는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Philadelphia Inquirer)》 자매지의 편집자도 지냈다. 그는 1956년에 죽었다.
이처럼 고브로는 미국에서 잘 알려진 영향력도 큰 인물이었다. 유명한 칼럼니스트 월터 윈첼(Walter Winchell)과 방송인 에드 설리번(Ed Sullivan)은 그와 함께 《뉴욕 이브닝 그래픽》에서 일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고브로의 이력을 살피면, 그가 탐사 보도에 재능과 열정을 지녔다는 것이 드러난다. 러시아 사람들이 그를 자신의 편이고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로 여겼다는 사실과 그의 탐사 보도의 재능과 열정이 어우러져, 그가 ‘얄타 밀약설’의 핵심이 된 정보를 얻어냈을 것이다.
Gauvreau가 Gouvereau로 바뀌는 과정은 두 개의 복사 오류였다. 우남은 처음엔 Gouvreau라고 썼고 이어 Gouvereau라고 ‘e’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우남의 고독한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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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언론재벌 허스트. |
이어 세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임하는 전략을 세웠다. 먼저, 고브로가 러시아 사람들과 만나 호의적 반응을 얻어낸다. 만일 러시아 사람들이 호의적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바르샤바 임시정부(RTRP)의 국제연합 가입과 조선의 가입을 연계시킨다. 이런 시도가 실패하면, ‘얄타 비밀 협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폭로해서, 미국 정치가들이 부끄러워하도록 만들고 조선의 처지에 동정적인 여론이 일도록 한다.
고브로는 5월 3일이나 4일에 대표단이 묵은 모리스 호텔로 우남을 찾아온 듯하다. 수신자가 밝혀지지 않은 5월2일자 편지에서, 우남은 윌리엄스가 전화로 “오늘 저녁이나 내일” 도착한다고 알려왔다고 썼다. 고브로는 곧바로 러시아 사람들과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
고브로의 기대와 달리, 러시아를 위해 그가 큰 대가를 치렀다는 사실은 러시아 사람들에겐 이미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같은 편지에서 우남은 “처음엔, 그는 그의 ‘친구들’인 소비에트 사람들이 그를 만나는 것조차 거부해서 좀 실망했었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
결국 우남과 고브로는 ‘얄타 비밀 협약’을 폭로하는 극약 처방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감정을 격발시키는 타블로이드 신문들에서 평생 일한 고브로의 경험과 명성은 폭로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우남은 그 충격적이고 중대한 정보를 알고 나서도 차분히 그것의 신빙성을 검토하고 현실적 전략을 세우고 상황에 맞게 실천했다. 그가 경솔하게 판단했다는 평가는 근거가 없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고브로와 윌리엄스로부터 그 정보를 받고 나서도 우남은 주변에 그 정보를 퍼뜨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한경·이원순·임병직과 같은 신임하는 측근들에게도 정보를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이 혼자 결단을 내리고 혼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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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66세가 된 이승만. 그는 늘 외로운 결단을 해야 하는 지도자였다. |
“박사님은 그러한 고발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실제로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 결과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우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박사 얘기대로 나는 증거가 없소. 그것은 오직 나의 관찰에 따른 신념일 따름이오. 한국을 위하여 나는 내가 틀렸기를 바라오. 만일 비밀 협정이 없다면, 그 결과에 대하여 나는 기꺼이 모든 책임을 지겠소. 사실이든 거짓이든,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밝히기 위해 지금 그것을 터뜨릴 필요가 있소. 내가 바라는 것은 얄타협정에 서명한 국가 수뇌들이 그것을 공식으로 부인하는 것이오. 그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할 것이 없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우남의 식견이 그의 인품에서 나온 것임을. 정한경처럼 뛰어난 국제정치학자도 고브로가 제공한 정보의 진위(眞僞)에만 마음이 쏠려서 그것이 가져다준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비밀 거래들로 결정되는 상황에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선의 운명에 관해 최소한의 언질이라도 얻으려면 미국 사회의 관심을 끌어 미국 정부의 팔을 비틀어야 한다는 것을 우남은 깊이 인식했고 고브로의 정보에서 그 기회를 이내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런 통찰은 오직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면서 자신에게 퍼부어질 억측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품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