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와 앨범

탄생 100주년 박고석 화백과 50주년 커트 코베인

‘산정(山頂)이 안 보이는 산을 닮은 두 인물’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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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사나이’ 박고석의 산 그림은 추상을 뛰어넘는 생명력 담아
⊙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의 록 음악, 동시대에 역류하지 않는 물결
스캐치를 하고 있는 박고석 사진 곁에 선 미망인 김순자 여사. 사진=현대화랑 제공
남색, 거친 ‘산 사나이’의 빛깔
 
  화가가 ‘산(山) 사나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다. 그의 산 그림은 그만이 그릴 수 있으니까.
 
  고 박고석(朴古石·1917~2002) 화백은 산의 화가였다. “산을 그리는 것이 아닌, 산과 하나가 되어 그린”(미술평론가 오광수) 화가였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에서 특별 기념전이 열렸다. “산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산이 되는 경지”라는, 1970~80년대 한국의 산을 모티브로 한 유화와 수채화, 드로잉 작품 40여 점이 전시됐다.
 
  한국 서양화단에서 ‘산을 그린 화가’로 박고석, 김원, 김영재, 김인화 화백을 꼽는다. 그중 박고석은 맨 앞자리다. 그의 그림은 산 사나이의 강렬한 색채가 느껴진다.
 
  속도감이 느껴지는 대담한 붓질과 선명하고 굵은 붓놀림, 조각보를 잇댄 듯 산·나무·구름이 이어진 기하학적 느낌, 추상을 뛰어넘는 시각적인 즐거움과 화려함까지, 그는 관점·계절·강조점에 따라 산과 나무의 생명력을 자유롭게 표현할 줄 아는 화가였다. 화풍 역시 야수파적인 화풍에서 완전 추상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다양한 화풍을 구사했다.
 
〈외설악〉, 1984, 캔버스에 유채, 60.6 x 72.7 cm. 사진=현대화랑 제공
  생전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소재가 어떻든 무엇보다도 화폭에 생명력이나 생동감이 넘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치 살아서 숨 쉬고 있는 한 생물처럼 …. 또 한국인의 소박하고도 진지한 정신적인 의식을 밑바탕에 깔고 현실을 보는 그런 작품이 그려져야 된다고 믿어요.” (《경향신문》 1983년 2월 25일자 2면)
 
  “50여 년간 산만을 그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산이란 밋밋한 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와 같은 역사와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산을 그릴 때는 반드시 몇 번씩 찾아가 산과 만나고 나서 집에 돌아와 혼자 캔버스와 만납니다.”(《동아일보》 1990년 3월 6일자 8면)
 
1957년 이중섭 1주기 당시 벗들과. 왼쪽부터 고은, 박경리, 박고석. 사진=현대화랑 제공
  박고석 화백의 그림 중 70% 이상이 산일 정도로 그에게 산은 절대적이다. 그의 아내 김순자 여사는 현대화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남편이 아니다. 산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산에서는 쓴 물도 아무 데나 못 버렸어요. 산에다 못 버리고 딴 데 가서 버렸어요.”
 
  박 화백이 처음부터 산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6·25 부산 피란시절, 암울함을 담은 〈범일동 풍경〉(1951)을 시작으로 풍경, 인물, 정물, 동물, 나무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다 1960년대 말부터 설악산, 월악산, 도봉산 등을 오르며 두꺼운 재질감과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조화를 캔버스에 담았다.
 
〈쌍계사 길〉, 1982, 캔버스에 유채, 53 x 65.1 cm. 사진=현대화랑 제공
  시인 고은(高銀)은 젊은 시절, 박고석의 그림에, 그림 속 선(線)에 매료됐다. 고은은 자전소설 《나의 산하 나의 삶》에서 “박고석은 하나의 작품이다. 예술적인, 너무나 예술적인 예술가”라고 했다.
 
  고은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고석 그림의 선은 ‘마구 그어 버린’ 선이다. 마치 깡패가 상대방의 얼굴을 칼로 그어 버리듯 긋는다. 그럼에도 그 선은 다른 선들과 어우러져 세차가 쏟아지는 소나기를 이루거나 윤곽이 내용을 결정하는 데까지 좌우하는 역동성을 발휘한다. 고은은 “박고석의 예술과 인간, 어느 쪽에도 환장했다”고 말했다.
 
  멋진 산 사나이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그림은 여전히 산을 노래하고 있다. 그 노래는 비록 추상에 가깝지만 맑고 청명하다. 산을 탈 줄 아는 사람만이 부르는 산 사나이의 고독한 외침이다.
 
 
  물빛, 고여 있지 않는 너바나(Nirvana)의 정신
 
너바나의 2집 앨범 《Nevermind》.
  1991년 출시된 너바나(Nirvana)의 2집 앨범 〈Nevermind〉의 커버는 물속에서 달러를 쥐려고 헤엄치는 아이의 모습이다.(돈을 쫓는 자본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첫 번째 트랙인 ‘Smells Like Teen Spirit’은 차트 1위에 올랐다. 너바나 전곡을 통틀어 가장 많이 알려진 대중적이고 실험적인 곡이다. 커트 코베인의 허스키한 절규가 담긴 ‘Territorial Pissings’, ‘Drain you’, 반항적인 보컬과 드럼 비트, 베이스 라인이 인상적인 ‘Come As You Are’, ‘Lounge Act’도 이 앨범에 실렸다.
 
  재킷은 온통 물빛이다. 고여 있지 않고 시대에 역류하지 않는 물결을 상징한다. 바로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의 음악정신을 보는 듯하다.
 
  지난 2월 20일은 너바나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고 커트 코베인(Kurt Cobain·1967~1994)이 50세가 되는 날이었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너바나와 그의 이름은 여전히 많은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금발에다 어깨 길이의 치렁치렁한 머리. 어딘지 지쳐 보이는 듯한 눈빛. 그러나 왠지 말할 때 친근함이 느껴지는 발랄한 얼굴 …. 커트 코베인은 1990년대 로큰롤의 가장 상징적인 얼굴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이었다. 1994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명성은 사후 더 높아졌다고 할까. 요절이 가져온 후광효과 때문인지 모른다.
 
  영국 BBC 방송은 지난 2월 20일 ‘우리가 커트 코베인을 아직도 사랑하는 6가지 이유’라는 인터넷판 기사를 통해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의 인기를 이렇게 분석했다.
 
  ① 너바나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로 시대를 앞섰다. ②커트 코베인은 빼어남의 전형일지 모르지만 그는 인기에 무심했다. ③그가 만든 음악은, 당대 세대에게 영감 받은 것이었다. ④너바나의 공연은 전설이었다. ⑤커트 코베인의 말은 지금도 울림이 있다(His words still resonate today). ⑥너바나의 마지막 앨범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pointed the way forward).
 
요절한 가수 커트 코베인.
  커트 코베인의 죽음 이후, 너바나의 영향을 받은 이들보다 받지 않은 이들을 열거하는 게 더 쉬울지 모른다.
 
  리나 델 레이(Lena Del Rey), 블링크(Blink)-182, 저스틴 팀벌레이크(Justin Timberlake), 제이지(Jay Z) 같은 뮤지션들은 모두 너바나의 곡을 자신의 노래에 가져다 썼다. 가수 위저(Weezer)는 너바나의 노래로만 콘서트를 가졌었다. 미국 록밴드 리빙컬러(Living Colour)의 버논 레이드(Vernon Reid)는 이런 말을 했다.
 
  “음악 역사의 한 축을 비튼 이들 중에 헨드릭스(Jimi Hendrix)는 중추적 존재였고 프린스(Prince)도, 코베인도 그렇다.”
 
  너바나는 그들의 사운드를 표방하는 수백만 개의 밴드를 탄생시켰다.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주할 때 집게손가락으로 현을 눌러 울리는 코드주법(일명 barre chords)은 기타를 처음 배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배우게 된다. 하지만 생전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재능에 심드렁했다. 1991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나는 너바나가 다른 이들의 노래를 배우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그렇게 밴드를 만들지 않았다. 우리는 충분히 좋지 않았고, 인내심을 가졌기에 우리는 그 에너지를 우리가 지닌 재능에다 쏟아부을 수 있었다. 당신이 학교에서 배우듯, 우리도 배움으로부터 나왔고 여전히 배움 속에 있다.”
 
  너바나는 해체되고 커트 코베인은 세상을 떠났으나 그들은 미국 록 음악 역사에 신화가 됐다. 마치 아무리 올라도 산정(山頂)이 안 보이는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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