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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탈북자 출신 이혁 화가

“이주민들의 이상향 그려내고 싶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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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들개는 남한 사회에서의 내 모습…” ‘자화상’ 연작과 조선 시대 산수화에서 출발한 ‘산수화’ 연작 그려
⊙ 각 道에서 한 해 13명 뽑는 예술전문학교에서 미술 배워
⊙ “북한에서 성년 맞을 생각 없었다”… 2006년 탈북, 2009년 입국
⊙ “아무리 힘들어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李革
1988년생. 북한 예술전문학교 중퇴, 한국외대 영어통번역학과 졸업, 홍익대 미술대학 대학원 석사
  열아홉 살 이후 이혁 작가의 삶에는 ‘빼기’뿐이었다. 탈북(脫北)을 위해 그림을 포기해야 했다. 홀로 국경을 넘으며 고향을 등졌다. 가족을 인생에서 지워야 했다. 한국에 정착해 어머니를 빼내왔지만, 병은 다시 어머니를 빼앗아 갔다.
 
  그의 그림을 처음 본 건 2023년 3월 경남도립미술관에서였다. 김종원 전 경남도립미술관장과 함께 심문섭 작가의 회고전을 보러 간 참이었다. 같은 시기 미술관에서는 〈N ARTIST 2023:더 느리게 춤추라〉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전시였다.
 
 
  북한의 들개는 나의 모습
 
이혁 작가의 작품 〈자화상〉
  그곳에서 어떤 그림과 조우했다. 들개를 그린 그림이었다. 어두운 밤 어스름 속에 앉아 있는 개, 뒤편 저 멀리 불 켜진 집이 보인다. 밤이 되어도 돌아갈 집이 없는 개의 옆모습에서 전해지는 체념 탓일까, 붓질이 남긴 흔적마저 쓸쓸하고 쓸쓸하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평생을 움츠러든 자세로 살아온 듯한 개 한 마리가 등장한다. 개는 캔버스 밖 어딘가를 응시한다. 밝은 세상은 개의 편이 아니다. 개는 발 딛고 있는 어두운 대지에 언제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무구(無垢)한 표정 때문일까, 구부정한 잔등이 더 애처롭다. 들개 연작에 붙어 있는 제목은 〈자화상〉.
 
  도대체 이 작가가 누구냐고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사에게 물었다. 탈북자 출신 화가이고 대구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 번은 꼭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 서울에서 다시 그의 그림을 만났다. 2023년 11월 16일부터 12월 23일까지 서울 두손갤러리에서 열린 〈최진욱·이혁 2인의 개인전〉에서였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혁 작가의 눈빛 속에서 언뜻 그림 속 들개의 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왜 개를 그리며 자화상이라 이름 붙였는지 물었다.
 
  “남한의 개들은 귀엽고 사람을 잘 따르잖아요. 북한에서 제가 만난 개들은 달랐습니다. 비굴하고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사람의 손길을 바라는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사람도 그런 개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받아줄까,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인간과 개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죠. 제가 이주민으로 한국에 왔을 때 제 모습이 그 개와 같았어요. 한국 사회와 저의 관계에도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지요. 지금도 저 개를 볼 때마다 저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전시를 한 최진욱(68) 작가는 이혁의 그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그림에는 허위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혁 작가는 그걸 다 걷어낸 느낌이에요. 상당한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이건 어마어마한 칭찬이지만, 동시에 ‘과연 그럴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화가 되면 평양시민권도 받을 수 있어”
 
  북한에서 태어난 이혁은 열한 살에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북한에는 사교육이 없잖아요. ‘소년회관’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과외 시간에 예체능을 가르치는 학교 같은 곳이지요. 각 시에 한 곳씩 있습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먹고살기 힘드니 보통은 예체능을 배울 생각을 잘 안 해요. 제 조부모님은 재능을 찾아야 한다며 예술을 배우라고 독려했어요. 그림을 잘 그렸는지 각 도에서 13명만 뽑는 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온 가족이 박수 치며 좋아했지요.”
 
  예술전문학교(예전)는 각 도에 하나씩 있다. 김정일 정권 시기 설립됐다. 예전을 졸업하면 도 예술단과 예술선전대에서 전문 예술인으로 활동하거나 공무원이 되어 지역의 선전·선동과 문예 분야를 이끌게 된다. 우수한 학생들은 평양에 있는 중앙예술대학이나 예술기관으로 진출할 수 있다. 이 작가의 설명이 이어졌다.
 

  “예전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이 함께 있는 10년제 학교입니다. 그런 학교가 있는지 일반인들은 잘 모릅니다. 북한에서 화가는 좋은 직업입니다. 김정일 시기부터 체제 유지 수단으로 예술을 택해 키웠으니까요. 화가가 되면 공무원도 될 수 있고 평양 시민권도 받을 수 있어요. 예전 후배를 탈북 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 동기 중 3명이 평양에 갔다고 들었어요.”
 
  ― 그림만 잘 그리면 성공이 보장되는 거군요.
 
  “권력의 가장 옆자리에서 권력가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도 있어요. 제도 안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면서 돈도 벌 수 있지요. 북한에서는 국가가 인정한 예술가들 외에는 아무도 예술가로 활동을 못 하니까요.”
 
 
  기초 중시하는 북한의 미술 교육
 
작품을 그릴 수 없던 시기 밥상을 마주하며 떠올린 작품 〈반상1〉. 반상 연작 중 하나다.
  ― 거기에선 주로 어떤 걸 배웠나요.
 
  “기초를 굉장히 오랫동안 익혔어요. 소묘를 많이 연습했지요. 고등학교 올라와서 수채화를 그렸어요. 단계가 굉장히 철저히 나누어져 있어요. 선생님들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물감을 써서 그림을 그리면 크게 질책을 받아요. ‘네가 지금 색을 다룰 만한 실력이 되냐’ 북한에 아크릴 물감은 없었던 것 같아요. 유화와 수채화 물감만 봤어요.”
 
  ― 소묘를 할 때 사진을 찍듯 사실적으로 그려야 되나요?
 
  “그렇지요. 같은 소묘라도 한국과 차이가 좀 있습니다. 한국은 입시(入試)를 위해 데생을 배우잖아요. 그러니 외워서 빠른 시간 안에 그리는 걸 연습합니다. 북한은 시간을 무한대로 줍니다. 외워서 그리면 크게 혼나요.”
 
  ― 예전 시절이 기억에 남아 있나요?
 
  “그럼요. 지도해주신 선생님들이 자주 생각납니다. 운이 좋았는지 6년 내내 좋은 선생님들만 만났어요. 그분들은 계산을 안 한다고 할까, 돈을 받고 가르치는 게 아니니 사심 없이 사명감을 갖고 가르쳐주셨어요.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정적으로 강의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 그런 점에서는 한국의 예술학교와 좀 다를 수도 있겠네요.
 
  “북한에서는 교사가 돈 문제에 신경을 쓴다거나 수강생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니 학생들에게 실력을 더 높이라는 요구를 끝없이 할 수 있어요. 사실 어릴 때 그분들에게 배운 게 저한테는 축복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15세 때부터 탈북 꿈꿔
 
  ―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고민과 토론은 안 하나요?
 
  “북한에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어떤 대상을 어떤 방향에서 그릴 건가, 예를 들면 금강산을 이쪽 방향에서 그릴지, 저쪽 방향에서 그릴지 정도는 선택할 수 있지요. 손이 가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상상 자체를 못 합니다. 미술 배우는 6년 동안 단 한 번도 끄적끄적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어요.”
 
  ― 그럼 학교에서 뭘 그리나요.
 
  “사람의 얼굴을 주로 그립니다. 얼굴을 정확하게 빠른 시간 안에 옮겨 그리는 연습이지요. 풍경도 많이 그렸고요.”
 
  그는 2006년 북한을 탈출했다. 19세였다.
 
  “저는 북한에서 성년을 맞을 생각이 없었어요. 바깥세상이 더 크고 좋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열다섯 살쯤일까, 그때부터 탈북을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 나올 때 가족에게 말했나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성격상 거짓말을 못 하는 분이었어요. 거짓말을 하면 표정과 말투에 ‘나 거짓말하고 있다’ 티가 나는 사람 있잖아요. 제가 사라진 후 어머니가 추궁당할 걸 생각하면 모르시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절대 안 된다’고 탈북을 반대할까 봐 두렵기도 했고요. 그래서 얘기 안 했습니다. 북한은 길거리에서 죽어도 신원 확인이 안 되니 제 행방을 몇 년간은 모르셨을 겁니다.”
 
  ― 그 나이에 혼자 국경을 넘다니 대단하네요.
 
  “아닙니다. 누구나 그 상황이라면 저처럼 할 겁니다. 중국으로 넘어가서 3년을 숨어 지냈습니다. 휴지 만드는 공장에서 숙식하며 하루에 12시간씩 일했어요. 한국으로 갈 날을 기다렸지요.”
 
  ― 고향을 왜 떠났을까 후회한 적은 없나요?
 
  “후회 자체를 할 수 없었어요. 북한에서의 삶은 그 어떤 희망도 없는,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삶이니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놀란 건 일하면 돈 준다는 것”
 
  중국에서 숨어 살던 그는 2009년 한국에 입국했다.
 
  ― 한국에 도착하니 어땠나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지요. 신기했던 걸 열거하면 끝도 없습니다. 수돗물이 나오는 것도 신기한데, 거기에 뜨거운 물까지 나오다니…. 무엇보다 놀란 건 일을 하면 돈을 준다는 거였습니다. 남한에 와서 1년간 엘리베이터 시공 현장에서 일했어요. 하루 일하면 수수료 10% 떼고 칠팔만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자본주의를 처음 경험한 거죠.”
 
  2011년 그는 어머니를 북한에서 탈출시켰다. 5년 만의 재회였다.
 
  “원래는 대학 갈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을 이렇게 살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북한에서 오로지 미술만 공부하다 온 터였다. 미술을 빼면 잘하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건 언어밖에 없었다. 언어는 공부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는 2013년 한국외대 영어통번역학과에 입학했다. 졸업해 직장인이 되어서 살면 되겠다 싶었다. 그러면 어머니도 잘 모실 수 있겠다 싶었다.
 
  그 시절 우연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봤다. 현대적인 퍼포먼스를 하는 화가를 보고 생각했다. ‘저게 예술이라고? 자본주의 놈들이 드디어 미쳐가는구먼.’
 
 
  北 병원에서 간염 옮은 어머니
 
조선시대 산수화에서 영감을 얻은 이혁 작가의 작품,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 산수화 연작 중 하나다.
  2014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북한에 있을 때 간염에 걸렸다. 병원에서 재사용 주사기로 링거 주사를 맞은 게 원인이었다. 한국에 와서 치료를 받긴 했지만 이미 병이 깊어진 후였다. 어머니가 떠나자 회사원으로 안정된 삶을 꾸릴 이유도 사라졌다.
 
  “어머니를 잃자, 나에게 남은 건 화가로서의 꿈 하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설사 망한다 해도 나 혼자 망하는 거 아닌가. 사실 그림에 대한 꿈은 가슴 한 편에 늘 있었어요. 미술 전시를 보면 심장이 막 뛰었습니다.”
 
  ― 나도 이걸 하고 있어야 하는데 하는 감정인 건가요?
 
  “‘난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 더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올라왔어요. 그림을 보면 솜털이 서는 것 같을 때도 있었어요. ‘나 혼자 살아가기도 힘든데 어떻게 미술을 할 수 있겠나 싶어’ 포기하고 있던 꿈이 그림을 볼 때마다 수면으로 올라온 것 같아요.”
 
  그는 2019년 홍익대 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열아홉에 떠난 캔버스 앞으로 서른한 살에 다시 돌아왔다.
 
  ― 한국에서 미술 수업을 들어보니 어떻든가요.
 
  “추상화며, 인상주의니 초현실주의…. 미술 세계가 이렇게 넓었구나. 우주선 타고 우주로 나가 그 광활한 광경을 직관하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미술은 대상을 똑같이 옮기는 것이었어요. 혼란을 엄청 느꼈어요. 나는 뭘 그릴 건가. 대학원 2년 내내 ‘그림을 왜 그리나, 어떤 그림을 그릴 거냐’라는 교수님의 질문을 붙잡고 있었어요. 처음 1년 반 동안은 아예 그림을 못 그렸어요.”
 
 
  ‘자화상’ ‘반상’ 연작에서 ‘산수화’ 연작으로
 
이혁 작가의 작품 〈문안도〉. 산수화 연작 중 일부다.
  ― 그림을 그릴 자신이 없었나요?
 
  “북한에서 그리던 대로 그릴 순 없잖아요. 뭘 그릴지 고민했지요. 그 시간 동안 동시대 미술을 공부했어요. 네오 라우흐(Neo Rauch),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 줄리 머레투(Julie Mehretu),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그림을 봤지요. 그러다 혼란에서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린 게 ‘자화상’ 연작입니다.”
 
  ― 반상 연작도 그때 그린 건가요?
 
  “그림을 못 그리던 시기에 그렸습니다. 한국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탈북하기 전 가족들과 함께 먹었던 밥상을 떠올렸어요. 밥그릇에 물감을 묻혀 찍어봤어요. 내가 홀로 마주하는 현실의 밥상과 북한의 밥상을 한 화면에 배치했지요.”
 
  그는 요즘 산수화(山水畵) 연작을 그리고 있다. 〈수하석상관월도〉와 〈문안도〉 같은 작품이다.
 
  ― 왜 산수화인가요?
 
  “조선 시대 산수화는 선비들이 이상향(理想鄕)을 상상하며 그려낸 공간이잖아요. 제가 살아오며 만난 이념들을 빼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은 산수화밖에 없다… 그곳엔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없어요. 그곳을 확장해 저 같은 이주민의 이상향으로 그려내 보자 생각했어요.”
 
 
  산수화라는 이상향
 
  ― 이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향은 어떤 공간인가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북한에 있어서든, 세상을 떠나서든 이 생에선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공간을 제 그림 안에서 만들고 싶어요. 그 안에서는 어머니, 할머니,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어요. 우리나라의 강제 이주 역사, 디아스포라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제 개인의 얘기만은 아닐 겁니다.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그리고 싶어요. 그곳은 뿌리 없는 사람들에게 고향이 될 수도 있겠지요.”
 

  문득 리히터가 떠올랐다. 독일의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생존 작가 중 최고 수준의 그림값을 받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 동독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배웠다.
 
  리히터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즈음 서독으로 탈출했다. 자유 진영의 미술계는 리히터의 그림에 주목했다. 동독에서의 기억을 그만의 방식으로 재현한 작품들에 열광했다. 그 찬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전체주의에서 간헐적으로 튕겨져 나온 이질적인 존재들이 자유주의 세계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건 아닐까. 그들의 그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절대적인 절망과 고독의 세계를 일순간이라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혁 작가는 1월 현재 거제도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화기 너머 작가의 목소리에서 바다 냄새가 묻어났다. 바다에는 이념도 진영도 없다. 이혁은 순백의 캔버스에 한 획 한 획 삶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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