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 한예종, 세계 유수의 국제대회에서 총 4069회 수상, 그중 1위만 1262회
⊙ 임윤찬의 국제 콩쿠르 우승 이후 해외서 입학 문의 많아… “유학 오는 학교”로
⊙ “무대 위 무의식의 세계에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할 일”
⊙ “연주, 가짜가 되지 말고, 흉내 내지 말고, 모방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金大鎭
1962년생.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 졸업, 同 대학원 박사 / 한예종 예술영재교육원 원장, 한예종 음악원 원장, 수원시향·창원시향 상임지휘자, 여수음악제 음악감독,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 루빈스타인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역임. 現 한예종 총장
⊙ 임윤찬의 국제 콩쿠르 우승 이후 해외서 입학 문의 많아… “유학 오는 학교”로
⊙ “무대 위 무의식의 세계에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할 일”
⊙ “연주, 가짜가 되지 말고, 흉내 내지 말고, 모방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金大鎭
1962년생.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 졸업, 同 대학원 박사 / 한예종 예술영재교육원 원장, 한예종 음악원 원장, 수원시향·창원시향 상임지휘자, 여수음악제 음악감독,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 루빈스타인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역임. 現 한예종 총장
- 사진=조준우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주례사 같은 인터뷰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여러 겹으로 겹쳐지는 그의 삶은 모나거나 구석진 데가 없어 보였다. 살아온 삶이 예술 통섭, 융합의 길 그 자체였다.
피아니스트 김대진(金大鎭·61). ‘젠틀한’ 외골수. 건반 위의 진화론자. 머무르지 않아 고이지 않은 연주자. 수원시향을 지휘(2008~2017년)해 차이콥스키 교향곡(전 6곡)과 시벨리우스 교향곡(전 7곡) 전곡을 녹음 출시했는데 이는 한국 지휘자 최초의 기록이었다. 몹시도 어려운 시벨리우스 곡을 말이다.
〈예수, 인류 소망의 기쁨〉을 연주하다
스승으로서 김대진은 또 어떤가. 엄격한 ‘악마 쌤(선생)’. 피아노 전공자가 아니라도 기억하는 손열음, 김선욱, 문지영, 박재홍을 가르친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총장 김대진은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교직원과 학생의 투표를 거쳐 선출됐다. 식당·청소 담당 직원들도 투표에 참여했단다. 팬데믹 시절, 온라인 취임식에서 바흐의 〈예수, 인류 소망의 기쁨〉을 연주했다는데 듣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CEO로서 개교 30주년을 준비하고 맞이했다는 사실도 다소 운명적이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대진 총장을 두고 4색(色)이 겹쳐지는 것은 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를 가만 놔두지 않은 운명론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기자는 지난 3월 말 김 총장을 만나러 서울 석관동을 찾았다. 그곳에서 우연히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2022년 11월 28일 자)을 접하게 되었다.
1면 머리기사 제목이 이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30주년 기념작 〈빌어먹을 예술 따위〉 감독—영상원 방송영상과 조한나, 이찬열 인터뷰.”
학생 기자의 질문에 이·조 교수의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 〈빌어먹을 예술 따위〉에 우리 학교의 어떤 특징을 담아내고 싶으셨나요.
이 “진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세간에 우리 학교는 천재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스스로가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또 천재라는 게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중략)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우당탕탕 작품을 만들어가고자 노력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조 “돕바 입고 늦은 시간에 불 켜진 학교로 출근하는 거…. 사람들하고 팀플하다가 서로 밑바닥까지 보고 손절하는 거…. 그런 우리 학교만의 분위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학교 복도를 떠도는 외로운 영혼들이 있고(하략).”〉
자칫 오해를 살 만한(한예종 학생들이 진짜 천재인가?) 이 인터뷰 속에 한예종 30년의 시간이 모두 압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예종. 교육부가 아닌 문화부의 감독을 받는 교육기관. 초대 문화부 장관이던 이어령(李御寧) 선생이 물러나기 전, 그러니까 1991년 12월 19일 국무회의 당시 한예종 개교를 위한 설치령을 몰래 밀어 넣어 빛을 보게 된, 태생부터 순탄치 않았던 학교. 이어령 장관이 불만에 찬 장관들에게 “모내기 신동이 있으면 농림부에서 학교를 만드시오”라고 윽박질렀다는 ‘불협화음’의 전설….
이어령과 이강숙
이어령 선생이 꿈꿔온, “종합대학 안에서 엘리트를 키우는 예술대학 말고 아티스트를 키우는 학교”가 바로 한예종의 태몽(胎夢)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김 총장을 만난 선생이 “이젠 어딜 가든 예술은 한예종이 아닌가”라는 한마디에 오늘과 어제의 30년을 집약할 수 있다.
― 이어령 선생이 ‘한국 안에서 오갈 데 없는 영재들을 불쌍히 여기자’고 해서 한예종이 만들어졌다는데, 사연 많은 건국(建國)신화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어령 선생님은 당신이 계시지 않은 30년 후 지금과 더 먼 미래까지도 내다보신 것 같아요. 지금의 한예종이 존재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 선구안(選球眼)을 지니신 선생님의 의지와 확신, 또 그 의지를 받아 교장(설립 초기에는 직함이 ‘교장’이었다)이 되신 이강숙(李康淑) 초대 총장님 덕분이었어요.
국내 예술계뿐 아니라 전 세계 예술계 어디든 곳곳에 심어져 있는 한예종의 씨앗을 선생님이 뿌리셨고, 애써 일군 땅의 뜻깊은 첫 수확을 초대 총장님이 해내셨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학교 설립과 관련된 분들, 그리고 어떻게 보면 학교의 상징이셨던 분들이 다 가셨지 않습니까? 이어령 장관님이 가시고, 이강숙 총장님 가시고, 지난 3월 12일 김남윤(金南潤) 선생님이 가시고…. 뭐랄까요, 굉장히 외로워진다고 할까요? 그러나 제가 학교 일을 하면서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분들의 존재만으로 힘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젠 뭔가 외로워지고…, 그만큼 더 책임감이 생긴다고 할까요?”
물 양동이와 김선욱
― 한예종 30년 역사에 기억할 만한 사건 몇 가지를 꼽아주십시오.
“제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때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5층을 교사(校舍)로 빌려 쓰고 있었는데 교수 연구실이 다 차 있었어요. 지하 자료관으로 내려가면 연구실로 쓸 수 있는 방이 몇 개 있다고 하더군요. 첫 출근해 가 보니 복도 여기저기에 물 양동이가 있었어요. 그날 비가 왔었거든요. 비가 새고 있던 겁니다.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그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을 비우는 것이 (막내 교수인) 제 담당이었는데 아무튼 연구실 복도인데 빗물이 샌다? 이것 잘한 결정인가? 하하하.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잖아요.”
― 그리고 한예종 위상을 높인 사건이 있다면.
“제자 김선욱(음악원 12기)이 2006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거요. 사실 저는 학창 시절 1차에서 떨어졌거든요. 어떻게 보면 안 좋은 기억이죠. 그런데 제자가 1등을 한 겁니다. 지금은 콩쿠르 1등이 큰 뉴스가 아니지만, 당시 한예종을 봐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야, 이게 진짜 가능한 것이구나. 국내에서만 공부해도 세계의 벽을 넘을 수 있구나’ 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죠. 학교 구성원 모두가 어떤 희망을 보았다고 할까요?”
“지금 라이벌은 우리 자신”
― 갓 서른이 된 한예종 출신 중에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을까요? 졸업 1기생 나이가 50대 초반이거나 40대 후반이겠네요.
“굉장히 많아서 나중에 자료로 드릴게요. 보면 놀랄 겁니다. 연극원 졸업생들이 아무래도 사회에 일찍 진출해 어떤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고, 각계에서 활약하다 한예종 교수로 돌아온 분도 굉장히 많죠.”
― 서른 한예종이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한예종의 교육방향이나 선발방식, 철학과 관련이 있는 질문인데 지금 우리 사회가 개성과 창의력을 중시하고 있잖아요. 한예종은 이미 30년 전에 상상력, 창의력을 강조했어요. 당시만 해도 모범적이고 객관적이며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을 요구하던 시절이었지만, 예컨대 우리는 입시(조형과) 전형에서 염소를 풀어놨어요.”
― 염소를요?
“염소에게 영감을 얻어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취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일찌감치 창의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겁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상보다 먼저 앞서간 것이죠.”
― 당시엔 라이벌이 없었겠죠?
“있었죠. 아무래도 S대? 제일 큰 라이벌이었죠.(웃음)”
―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라이벌은… 우리 자신? 제가 총장 선거에 나가서도 이런 말을 했는데, 분명히 성취감이나 만족감, 약간의 피로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학교가 처음 생겼을 때의 예술적 동력(動力)을 다시 한 번 발휘해보자는 말을 했어요.”
“궁극적으로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소통”
― 두렵다는 말씀은 자극제가 대내외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인가요.
“여러 가지가 다 있을 수 있고요, 30년 전 시작할 때 가졌던 생각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고, 목표로 보자면 목표를 달성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거든요.
다만 (목표 달성을) 증명해야 한다면, 증명이 1~2년 사이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 테니까, 어떻게 보면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도 같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비전을, 향후 30년을 위해 재조명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대진 총장은 작년 1월, 그러니까 이어령 선생이 별세하기 한 달 전 선생을 만났다. “체력이 버티지 못해 만남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주변의 전언이 무색하리만큼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끄셨다”고 기억한다. “선생님 앞에선 여전히 가르침이 필요한 초보(初步) 총장이었다”고 덧붙였다.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하나는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를 활용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었어요.
선생님은 ‘창의력이 결국엔 자기 경험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셨어요. ‘학교가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고도 하셨죠. ‘서로 다른 6개 장르(음악, 연극, 영상, 무용, 미술, 전통예술)가 합쳐진 학교가 없으니까 예술적 교류를 많이 하다 보면 그런 기회가 생겨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셨어요.
융합예술은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이 필요하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6개 원(院) 간의 교류를 더 활발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만남은 어떻게 풀었나요.
“예술과 기술의 병합 문제는 고전적인 토론 제목이거든요. ‘바흐 시대에는 저런 피아노가 없었는데 바흐 곡을 모던 피아노로 연주하는 게 맞아?’라는 논쟁 말입니다. 시대 악기로 연주하는 바흐가 있고, 모던 피아노로 연주하는 바흐가 있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느냐는 것이죠.”
‘오갈 데 없는 영재를 불쌍히 여기자’
― 어떤 답을 얻었나요.
“‘우리가 활용을 할 수 있는 기술적인 가치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바흐를 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던 피아노의 모든 요소를 충분히 활용해야 하고, 바흐 시대의 어떤 사회·문화적 면면이나 당대인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시대의 테크놀로지를 이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선생님도 굉장히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 한다’고요. 어떻게 그 연배에 이런 생각을 하시나, 혜안(慧眼)이랄까 굉장히 놀랐어요.”
― 이어령 선생께서 처음 한예종을 만들 때 ‘예술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핸디캡을 가진 아이들’ ‘오갈 데 없는 영재를 불쌍히 여기자’고 하셨다던데 지금도 유효한 이야기인가요.
“일정 부분 맞는 말씀이고요, 한 가지의 특출 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허술함이랄까? 평소 학교 생활이라든지 대화술? 생각? 이런 것을 들으면 그들이 하는 연주의 세계하고 연결이 잘 안 되거든요.”
― 그렇습니까?
“네, 잘 안 돼요. 그걸 아시기에 불쌍하다고 표현하셨던 것 같은데 그런… 체계적이지 못하고, 허술한 면이 많은 점을 학교가 보충해줘야 되지 않겠느냐는 차원에서 하셨던 말씀이고요, 30년 전과 지금의 학생들이 크게 바뀌었다는 생각은, 사실 안 하고요, 학생들에게 사회와 사람 간의 호흡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 호흡이라….
“작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2021년 입학)이 기자회견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냥 산속에 들어가서 피아노와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잖아요. 그 얘길 들으면서 굉장히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저부터도 어린 시절 굉장히 외톨이였고, 혼자 있고 싶어 했고, 피아노 연습실에 들어가면 안 나오고 그랬거든요.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소통(疏通)입니다. 음악을 통해 표현하는 것도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고 또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 한예종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있는데, 교육부로 옮기는 게 맞지 않나요? 3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까.
“예컨대 한국에너지공과대학은 산업통상자원부, 농수산대학은 농림축산식품부, 전통문화대학은 문화재청 산하에 있어요. 전문적인 것을 더 전문화시켜야 하는 구조로 사회가 바뀌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문화예술의 콘텐츠를 창조하는 학교니까 문화부의 명분이 학교의 설립 취지와 의도에 더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 그러니까 교육부 산하로 갈 필요는 없다?
“네, 굳이….”
김대진 총장은 지난 3월 16일 개교 30주년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한예종은, 30년 전의 ‘유학 갈 필요 없는 학교’에서 나아가 ‘유학 오는 학교’로서 준비를 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 어떤 의미인가요.
“30년 전에는 선수들을 키워내는 것이 중요했겠으나, 모두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이들이 국가대표 선수는 못 하지만, 사회 각 분야로 들어가 국가대표 선수를 키워내는 데 일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체대를 생각하면 돼요. 국가대표를 길러내는 곳이지만 석사 과정, 박사 과정도 있습니다.”
― 한예종에도 석·박사 과정이 있나요?
“전문예술사 과정이 있지만 (입사 지원서를 낼 때) 일반 대학에 부여하는 코드 자체가 없어요. 우리 학교 미술원 디자인과를 나와 어느 기업의 디자이너로 취직하는데 알고 봤더니 석사로 인정이 안 되더군요.”
‘한 가지만 잘하는 음악인은 필요 없다’
잠시 생각하더니 이런 말을 보탰다.
“모두 국가대표 선수가 될 순 없습니다. 선수를 키워내는 데 일조할 수 있거든요. 연주계를 보면 우리나라에 전문 연주자가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거든요. 즉 연주로만 생활할 수 있는 사람들, 없죠.”
― 거의 없죠.
“아예 없다고 보는 게, 진짜 한 명도 없거든요. 결국에는 연주자와 교육자를 분리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물론 교육자도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만, 핵심은 전문 연주자만큼 하느냐거든요. 그런 인프라를 만드는 데 많은 사람의 역할이 지금 필요합니다.”
이 대목에서 김 총장은 뜻밖에도 줄리아드 음악원 시절의 실패 경험을 꺼냈다.
“1987년 줄리아드 박사 과정에 지원할 때, 사실은, 첫해에 안 됐어요.
떨어졌어요. 실기시험을 끝내고 면접을 하러 들어갔는데 당시 줄리아드 음악원장인 조셉 폴리시(Joseph William Polisi)가 제 파일을 유심히 보더니 한 가지만 묻겠다는 겁니다.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의 사상적 배경을 얘기하라’고 해요. 그러면서 ‘한 가지만 잘하는 음악인은 필요 없다. 이젠 교육된 아티스트(educated artist)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베토벤이 〈황제〉를 작곡할 무렵 프랑스혁명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다고 하지요. 그 곡을 이해하기 위해선 유럽사상사를 공부해야 했던 겁니다. 지금 가치관으론 많이 공감하는 말씀이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이었지요.”
이후 줄리아드 음악원의 커리큘럼도 악기 연습 중심에서 인문학이나 예술과목 등 다양한 학문을 함께 공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40년 가까이가 흘렀습니다. 콘서바토리(conservatory·음악전문학교)도 그런 교육이 필요합니다. 외국에선 벌써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교육입니다.”
임윤찬 신드롬 이후
한예종 재학생인 임윤찬이 작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기록한 이후 ‘임윤찬 신드롬’이 일어났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그가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를 연주하며 “이 곡을 이해하려면 단테의 《신곡》을 읽어야 한다. 전체 내용을 외우다시피 했다”고 밝힌 이후 《신곡》의 판매량이 급증했단다.
“임윤찬의 콩쿠르 우승 이후 한예종 입학 문의가 많이 오고 있습니다. 특히 해외문화원을 통해 굉장히 많은 문의가 오고 있어요. 유학생 유치를 위해선 한예종만 통하는 플러그로는 안 됩니다. 지금이 골든타임입니다. 전 세계와 호환이 될 수 있게 학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조금 전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융합 이야기를 했잖아요.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와 MOU를 맺고 무언가 해보자고 했는데 이후 진전이 안 돼요. 학제가 다르니까 서로의 교육시스템에 녹아들 수가 없는 것이죠.”
김 총장은 작심한 듯 이렇게 속내를 털어놨다.
“기본적으로 봤을 때 대학원이 없는 학교, 그러니까 대학원 석사가 인정 안 되는 학교, 박사 과정이 없는 학교에 누가 유학을 옵니까. 우리가 유학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 학교에 가겠습니까.”
“실기는 이론 교육과 함께 가야”
기자는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올해 낸 책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로 화제를 돌렸다. 백혜선은 한때 ‘처참한 탈락으로 피아노를 포기하고 전화회사 영업사원이 된 적도 있다’고 한다. 책에 ‘좌절할 때가 가장 좋은 때이고, 기쁘고 성취감을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적었다.
― 김 총장께서는 이 말에 공감이 가나요.
“추측건대 그가 말하는 ‘좌절’은 무슨 콩쿠르에 나가서 떨어졌을 때의 좌절이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음악세계에 만족 못 하는 그런 좌절이 아닐까요?”
― 한예종 출신 영재(英才)들도 죄다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을 텐데….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부분이 그겁니다. 영재라는 타이틀이 평생 따라다니지는 않잖아요.”
― 신동(神童)도 한때죠.
“결국에는 영재나 신동도 기성 연주인, 성인 연주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이 과정에서 여러 시련을 맛보고 좌절을 겪게 마련입니다. 제가 줄리아드에서 공부할 때 무슨 신동이라는 친구들이 즐비했는데 지금 다 없어졌거든요. 사실 시련을 겪었을 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풀어나가는 방법은 결국 ‘교육의 힘’에서 나오거든요.
사람들이 실기만 하는 학교라고 한예종을 생각하는데 결국 실기라는 게 이론교육과 함께 가야 합니다. 매일 손만 돌리는 도제식 주입교육만 할 순 없어요. 제발 실기교육에 박사가 왜 필요하냐는 논쟁은 하지 말아주세요.”
‘神童 김대진’
피아니스트 김대진은 그야말로 신동이었다. 11세 때인 1973년 국립교향악단과 협연하며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1번을 연주했었다. 예원학교, 서울예고를 다니는 동안 국내 주요 콩쿠르는 모두 섭렵했었다. 서울대 음대에 입학했으나 3학기 만에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고, 1985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주최한 로베르 카자드쉬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전 세계 교향악단과 협연한 적도 있다.
다음은 《조선일보》 1985년 8월 28일 자 7면에 소개된 “김대진 미(美) 콩쿠르 1위” 기사다.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 유학 중인 김대진군이 24일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로베르 카사드쉬 피아노 국제 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했다.
김군은 1등 입상에 따라 클리블랜드 교향악단, 파리 파드루 교향악단과 협연하며, 클리블랜드와 뉴욕, 프랑스, 리옹, 세스네, 말메종 등지에서 독주회를 갖게 된다.〉
― 기억나세요?
“그랬었군요. 애송이 시절이네요. 하하하. 프랑스 출신 피아니스트 로베르 카사드쉬를 기리기 위해 만든 콩쿠르였어요. 부인도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는데 제가 나갔을 때 심사위원장을 맡았었죠. 몇 년 후에 클리블랜드 콩쿠르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그러고 보니 임윤찬도 2018년 클리블랜드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를 했었다.
― 제자들 사이에서 ‘악마 쌤(선생)’으로 유명하던데 나름의 교육철학이 궁금합니다.
“어떤 학생이든 장단점이 있고 장점을 살려주는 선생, 단점을 보완해주는 선생이 있겠지요. 저는 철저하게,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단점을 보완해주는 선생이거든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 출발합니다. 장점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장점이 된 게 아니라 자기네들이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장점인 것이고, 갖고 태어났다는 것은 소멸되지 않겠죠.
반면 단점은 자신이 갖고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보완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더러 ‘악마 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저를 벗어나 외국 스승을 만났더니 ‘뭔가 가슴이 뚫리는 것 같다’고 표현한 유명한 제 제자도 있고…. 저는 다 이해가 가요. 왜냐하면 장점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으니까요.”
김 총장은 “가장 이상적인 가르침은 ‘싫은 소리는 담당 선생에게 듣고, 좋은 소리는 다른 선생에게 듣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출발점은 이 안에서(학교에서) 레슨을 받고 연습해서 완벽한 연주를 한다는 것은, 좀 저렴한 표현입니다만, 가짜라고 표현하는데, 진짜는 무대에서 나와야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연주를 할 때 우리의 의식은, 의식이 있는 상황이고요, 무대에 올라갔을 때는 철저하게 무의식의 세계로 바뀌거든요. 그러니까 무의식의 세계에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왜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대처하는 것, 그거야말로 자기 무의식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무대에 올라가는 그 순간, 떨리기도 하고, 그 무대라는 상황에서 발현되는 무의식에 접근해야지….”
“무의식의 세계에서 표현할 수 있게”

― 어떻게 접근해야 됩니까
“그건 의식적으로 접근해야 됩니다.”
― 연습인가요.
“네. 그런 방향…, 무의식의 세계를 수정하기 위해선 반복적인 의식의 세계가 필요합니다. 연습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채우는 일종의 자기 명세서입니다.”
― 연습으로 단점이 장점으로 바뀔까요.
“장점으로 바뀔 수는 없으나 치명적인 단점을 고칠 순 있죠. 그리고 그 단점은, 피아노 앞에서만 나오는 단점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왜 연주가 부산스러운 학생이 있잖아요. 그런 학생은 레슨이 끝난 뒤 귀걸이 한 짝을 흘리고 가거든요. 그래서 한동안은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도, 음악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사람(의 근본)을 가르치는 수준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되면 (학생들에게) 성격적인 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이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코드가 맞았을 때는 자기 문(門)이 열려서 소통이 되지만, 어떤 학생은 철저하게 (내면을) 가리는 경우도 있어요. ‘왜 피아노 선생이 나의 다른 면까지 이야기하냐’고….”
― 왜 그럴까요.
“방어하는 것이죠.”
김 총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 과정에서 주저앉고 포기하는 아이들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힘든 나약한 의지를 가진 경우겠지요. 어쩌면 그런 의지로는 음악 전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을 해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이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죠.”
‘생긴 대로 연주한다’
그는 우리 대화의 마지막 결론을 내리듯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생긴 대로 연주한다’고 하잖아요. 자기 음악이 자기 삶이 돼야 합니다. 자기가 표현해내는 연주 세계와 자기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은 둘 중의 하나가 분명히 가짜일 것이고, 둘이 같게 될 때 비로소 연주자의 진심이 들려온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어떤 음악가가 되느냐, 어떤 삶을 사느냐는 건 결국 본인이 규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규정을 도와주는 것은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냐가 중요합니다.”
― 학창 시절이 중요하군요.
“사회에 나가 현장 경험을 쌓으면서 가치관이 정해지겠지만,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결국엔 학창 시절에 자기가 느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예술교육에서 학창 시절,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이가 자기 전공 선생입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연주하라’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가짜가 되지 말고, 흉내 내지 말고, 모방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네 진심이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 어떻게 생각하면 피아니스트, 지휘자, 스승, 대학 CEO 등 4가지 길을 걸어온 셈입니다. 원하는 삶이었나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나요?
“두 가지 다 있고요, 사실은….
음악잡지 쪽에서 가끔 이런 질문을 던지는데 저는 주저 없이 답할 수 있어요. 제 본모습은 ‘나는 선생입니다’예요. 시작이 무엇이든 점점 저 자신에 대해 깨달아 가는 것은, ‘나는 뼛속까지 선생이구나’ 하는 겁니다. 아주 확고하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 이외의 것은, 조금 여러 가지 상황이 필요해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겠고….
2003년 《동아일보》가 선정한 ‘프로들이 뽑은 우리 분야 최고’ 부문에서 국내 최고 클래식 아티스트로 선정되었어요. 그걸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이건 문제가 있다’였어요.
물론 선생으로서 연주를 할 순 있지요. 그러나 저 자신이 프로 연주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오늘 아주 솔직한 얘기를 하는 건데, 사실은 없고요, ‘선생으로서 연주…는 계속 한다’입니다.
진짜 프로 연주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주자… 이렇게 생각해본 적은 솔직히 한 번도 없었고요.”
김 총장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획 지었다. 연주자보다는 스승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이었다.
“외국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명한 대학교수가 피아노 독주회를 엽니다. 똑같은 연주지만 기본적인 출발점을 어디에 두느냐인데, 저는 ‘선생이 하는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연주자로서가 아니라 선생으로, 스승으로 남길 원했다. 더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기대하지 않는 듯 보였다.
“저, 음악가 아니에요”
― 요즘도 (피아노) 연습합니까.
“저, 음악가 아니에요.(웃음) 이제 음악가가 아니라고 저 자신한테 이야기하는데, 저 피아노(총장실 한쪽에 놓인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가리키며) 괜히 갖다 놨어요. 시간 날 때 연습하려고 했는데 거의 못 치잖아요.”
― 세월이 흘러 김대진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까요.
“예술가로서의 포부…, 이런 것은 이제 많이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냥… 훌륭한 스승이었다!(웃음) 그러나 총장으로서 나중에 내려질 평가에 대해선 두려운 게 사실입니다.”
― 진심이군요.
“30주년을 맞이한 이때 총장이 된 것이 운명이고, 앞으로 30년 뒤를 바라봐야 할 위치도 운명이라 봅니다.”⊙
피아니스트 김대진(金大鎭·61). ‘젠틀한’ 외골수. 건반 위의 진화론자. 머무르지 않아 고이지 않은 연주자. 수원시향을 지휘(2008~2017년)해 차이콥스키 교향곡(전 6곡)과 시벨리우스 교향곡(전 7곡) 전곡을 녹음 출시했는데 이는 한국 지휘자 최초의 기록이었다. 몹시도 어려운 시벨리우스 곡을 말이다.
〈예수, 인류 소망의 기쁨〉을 연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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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무렵, 독주회를 앞두고 연습 중인 피아니스트 김대진. 사진=뮤직필 |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총장 김대진은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교직원과 학생의 투표를 거쳐 선출됐다. 식당·청소 담당 직원들도 투표에 참여했단다. 팬데믹 시절, 온라인 취임식에서 바흐의 〈예수, 인류 소망의 기쁨〉을 연주했다는데 듣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CEO로서 개교 30주년을 준비하고 맞이했다는 사실도 다소 운명적이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대진 총장을 두고 4색(色)이 겹쳐지는 것은 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를 가만 놔두지 않은 운명론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기자는 지난 3월 말 김 총장을 만나러 서울 석관동을 찾았다. 그곳에서 우연히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2022년 11월 28일 자)을 접하게 되었다.
1면 머리기사 제목이 이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30주년 기념작 〈빌어먹을 예술 따위〉 감독—영상원 방송영상과 조한나, 이찬열 인터뷰.”
학생 기자의 질문에 이·조 교수의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 〈빌어먹을 예술 따위〉에 우리 학교의 어떤 특징을 담아내고 싶으셨나요.
이 “진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세간에 우리 학교는 천재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스스로가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또 천재라는 게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중략)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우당탕탕 작품을 만들어가고자 노력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조 “돕바 입고 늦은 시간에 불 켜진 학교로 출근하는 거…. 사람들하고 팀플하다가 서로 밑바닥까지 보고 손절하는 거…. 그런 우리 학교만의 분위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학교 복도를 떠도는 외로운 영혼들이 있고(하략).”〉
자칫 오해를 살 만한(한예종 학생들이 진짜 천재인가?) 이 인터뷰 속에 한예종 30년의 시간이 모두 압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예종. 교육부가 아닌 문화부의 감독을 받는 교육기관. 초대 문화부 장관이던 이어령(李御寧) 선생이 물러나기 전, 그러니까 1991년 12월 19일 국무회의 당시 한예종 개교를 위한 설치령을 몰래 밀어 넣어 빛을 보게 된, 태생부터 순탄치 않았던 학교. 이어령 장관이 불만에 찬 장관들에게 “모내기 신동이 있으면 농림부에서 학교를 만드시오”라고 윽박질렀다는 ‘불협화음’의 전설….
이어령과 이강숙
이어령 선생이 꿈꿔온, “종합대학 안에서 엘리트를 키우는 예술대학 말고 아티스트를 키우는 학교”가 바로 한예종의 태몽(胎夢)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김 총장을 만난 선생이 “이젠 어딜 가든 예술은 한예종이 아닌가”라는 한마디에 오늘과 어제의 30년을 집약할 수 있다.
― 이어령 선생이 ‘한국 안에서 오갈 데 없는 영재들을 불쌍히 여기자’고 해서 한예종이 만들어졌다는데, 사연 많은 건국(建國)신화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어령 선생님은 당신이 계시지 않은 30년 후 지금과 더 먼 미래까지도 내다보신 것 같아요. 지금의 한예종이 존재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 선구안(選球眼)을 지니신 선생님의 의지와 확신, 또 그 의지를 받아 교장(설립 초기에는 직함이 ‘교장’이었다)이 되신 이강숙(李康淑) 초대 총장님 덕분이었어요.
국내 예술계뿐 아니라 전 세계 예술계 어디든 곳곳에 심어져 있는 한예종의 씨앗을 선생님이 뿌리셨고, 애써 일군 땅의 뜻깊은 첫 수확을 초대 총장님이 해내셨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학교 설립과 관련된 분들, 그리고 어떻게 보면 학교의 상징이셨던 분들이 다 가셨지 않습니까? 이어령 장관님이 가시고, 이강숙 총장님 가시고, 지난 3월 12일 김남윤(金南潤) 선생님이 가시고…. 뭐랄까요, 굉장히 외로워진다고 할까요? 그러나 제가 학교 일을 하면서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분들의 존재만으로 힘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젠 뭔가 외로워지고…, 그만큼 더 책임감이 생긴다고 할까요?”
K-컬처의 근간 한예종 예술가들 한예종은 2016년 QS 세계대학평가 공연예술 부문에서 46위로 첫 진입해 주목받았고, 작년 42위를 차지했다. 학생들은 세계 유수의 국제대회에 나가 총 4069회를 수상하고 그중 1위 입상만 1262회에 이르는 성과를 냈다. 2021~2022년 사이에는 118회 수상에 1위 수상은 41회다. 퀸 엘리자베스 국제 음악 콩쿠르,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 등 음악 분야는 물론 바르나 국제 발레 콩쿠르, 모스크바 국제 발레 콩쿠르, 칸 국제영화제, 아카데미상 수상 등 음악, 무용, 영화 등 전 분야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무용원 출신 발레리나 박세은은 세계 최고의 발레단 파리오페라발레단(POB) 350년 역사상 동양인 최초 에투왈로 승급하며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음악원에 재학 중인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임윤찬, 첼리스트 한재민은 세계 음악 콩쿠르 1위를 차지하며 K-클래식의 미래를 보여줬다. 특히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2022년 6월 열린 제16회 반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연주로 60년 역사상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다. 영상원과 연극원의 성과도 주목할 만하다. 이선균, 장혜진, 박소담, 이하준, 김병인, 최세연 등 한예종 출신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한 영화 〈기생충〉은 비영어권 작품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전통예술원 출신 배우 한예리는 제93회 아카데미 작품상 ‘초청’에 빛나는 영화 〈미나리〉의 주역 모니카 역으로 활약했다. 연극원 출신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알리 역을 맡아 얼굴을 알렸다. 무용원 출신의 정금형은 사물을 활용한 독창적 퍼포먼스로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초청돼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예종의 견고한 교육시스템, 전공에 특화된 밀도 높은 수업이야말로 한예종이 뿜어내는 힘의 원천이자 지금의 K-컬처 열풍의 출발점”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
물 양동이와 김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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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함께 피아노에 앉은 선생 김대진. 15년 전 모습이다. 사진=조선DB |
“제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때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5층을 교사(校舍)로 빌려 쓰고 있었는데 교수 연구실이 다 차 있었어요. 지하 자료관으로 내려가면 연구실로 쓸 수 있는 방이 몇 개 있다고 하더군요. 첫 출근해 가 보니 복도 여기저기에 물 양동이가 있었어요. 그날 비가 왔었거든요. 비가 새고 있던 겁니다.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그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을 비우는 것이 (막내 교수인) 제 담당이었는데 아무튼 연구실 복도인데 빗물이 샌다? 이것 잘한 결정인가? 하하하.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잖아요.”
― 그리고 한예종 위상을 높인 사건이 있다면.
“제자 김선욱(음악원 12기)이 2006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거요. 사실 저는 학창 시절 1차에서 떨어졌거든요. 어떻게 보면 안 좋은 기억이죠. 그런데 제자가 1등을 한 겁니다. 지금은 콩쿠르 1등이 큰 뉴스가 아니지만, 당시 한예종을 봐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야, 이게 진짜 가능한 것이구나. 국내에서만 공부해도 세계의 벽을 넘을 수 있구나’ 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죠. 학교 구성원 모두가 어떤 희망을 보았다고 할까요?”
― 갓 서른이 된 한예종 출신 중에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을까요? 졸업 1기생 나이가 50대 초반이거나 40대 후반이겠네요.
“굉장히 많아서 나중에 자료로 드릴게요. 보면 놀랄 겁니다. 연극원 졸업생들이 아무래도 사회에 일찍 진출해 어떤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고, 각계에서 활약하다 한예종 교수로 돌아온 분도 굉장히 많죠.”
― 서른 한예종이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한예종의 교육방향이나 선발방식, 철학과 관련이 있는 질문인데 지금 우리 사회가 개성과 창의력을 중시하고 있잖아요. 한예종은 이미 30년 전에 상상력, 창의력을 강조했어요. 당시만 해도 모범적이고 객관적이며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을 요구하던 시절이었지만, 예컨대 우리는 입시(조형과) 전형에서 염소를 풀어놨어요.”
― 염소를요?
“염소에게 영감을 얻어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취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일찌감치 창의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겁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상보다 먼저 앞서간 것이죠.”
― 당시엔 라이벌이 없었겠죠?
“있었죠. 아무래도 S대? 제일 큰 라이벌이었죠.(웃음)”
―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라이벌은… 우리 자신? 제가 총장 선거에 나가서도 이런 말을 했는데, 분명히 성취감이나 만족감, 약간의 피로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학교가 처음 생겼을 때의 예술적 동력(動力)을 다시 한 번 발휘해보자는 말을 했어요.”
“궁극적으로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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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향 상임지휘자 시절의 김대진. 그는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교육자이자, 대학 CEO인 한국 음악계의 팔색조(八色鳥)다. 사진=수원시향 |
“여러 가지가 다 있을 수 있고요, 30년 전 시작할 때 가졌던 생각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고, 목표로 보자면 목표를 달성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거든요.
다만 (목표 달성을) 증명해야 한다면, 증명이 1~2년 사이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 테니까, 어떻게 보면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도 같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비전을, 향후 30년을 위해 재조명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대진 총장은 작년 1월, 그러니까 이어령 선생이 별세하기 한 달 전 선생을 만났다. “체력이 버티지 못해 만남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주변의 전언이 무색하리만큼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끄셨다”고 기억한다. “선생님 앞에선 여전히 가르침이 필요한 초보(初步) 총장이었다”고 덧붙였다.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하나는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를 활용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었어요.
선생님은 ‘창의력이 결국엔 자기 경험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셨어요. ‘학교가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고도 하셨죠. ‘서로 다른 6개 장르(음악, 연극, 영상, 무용, 미술, 전통예술)가 합쳐진 학교가 없으니까 예술적 교류를 많이 하다 보면 그런 기회가 생겨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셨어요.
융합예술은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이 필요하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6개 원(院) 간의 교류를 더 활발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만남은 어떻게 풀었나요.
“예술과 기술의 병합 문제는 고전적인 토론 제목이거든요. ‘바흐 시대에는 저런 피아노가 없었는데 바흐 곡을 모던 피아노로 연주하는 게 맞아?’라는 논쟁 말입니다. 시대 악기로 연주하는 바흐가 있고, 모던 피아노로 연주하는 바흐가 있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느냐는 것이죠.”
― 어떤 답을 얻었나요.
“‘우리가 활용을 할 수 있는 기술적인 가치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바흐를 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던 피아노의 모든 요소를 충분히 활용해야 하고, 바흐 시대의 어떤 사회·문화적 면면이나 당대인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시대의 테크놀로지를 이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선생님도 굉장히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 한다’고요. 어떻게 그 연배에 이런 생각을 하시나, 혜안(慧眼)이랄까 굉장히 놀랐어요.”
― 이어령 선생께서 처음 한예종을 만들 때 ‘예술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핸디캡을 가진 아이들’ ‘오갈 데 없는 영재를 불쌍히 여기자’고 하셨다던데 지금도 유효한 이야기인가요.
“일정 부분 맞는 말씀이고요, 한 가지의 특출 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허술함이랄까? 평소 학교 생활이라든지 대화술? 생각? 이런 것을 들으면 그들이 하는 연주의 세계하고 연결이 잘 안 되거든요.”
― 그렇습니까?
“네, 잘 안 돼요. 그걸 아시기에 불쌍하다고 표현하셨던 것 같은데 그런… 체계적이지 못하고, 허술한 면이 많은 점을 학교가 보충해줘야 되지 않겠느냐는 차원에서 하셨던 말씀이고요, 30년 전과 지금의 학생들이 크게 바뀌었다는 생각은, 사실 안 하고요, 학생들에게 사회와 사람 간의 호흡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 호흡이라….
“작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2021년 입학)이 기자회견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냥 산속에 들어가서 피아노와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잖아요. 그 얘길 들으면서 굉장히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저부터도 어린 시절 굉장히 외톨이였고, 혼자 있고 싶어 했고, 피아노 연습실에 들어가면 안 나오고 그랬거든요.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소통(疏通)입니다. 음악을 통해 표현하는 것도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고 또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 한예종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있는데, 교육부로 옮기는 게 맞지 않나요? 3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까.
“예컨대 한국에너지공과대학은 산업통상자원부, 농수산대학은 농림축산식품부, 전통문화대학은 문화재청 산하에 있어요. 전문적인 것을 더 전문화시켜야 하는 구조로 사회가 바뀌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문화예술의 콘텐츠를 창조하는 학교니까 문화부의 명분이 학교의 설립 취지와 의도에 더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 그러니까 교육부 산하로 갈 필요는 없다?
“네, 굳이….”
김대진 총장은 지난 3월 16일 개교 30주년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한예종은, 30년 전의 ‘유학 갈 필요 없는 학교’에서 나아가 ‘유학 오는 학교’로서 준비를 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 어떤 의미인가요.
“30년 전에는 선수들을 키워내는 것이 중요했겠으나, 모두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이들이 국가대표 선수는 못 하지만, 사회 각 분야로 들어가 국가대표 선수를 키워내는 데 일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체대를 생각하면 돼요. 국가대표를 길러내는 곳이지만 석사 과정, 박사 과정도 있습니다.”
― 한예종에도 석·박사 과정이 있나요?
“전문예술사 과정이 있지만 (입사 지원서를 낼 때) 일반 대학에 부여하는 코드 자체가 없어요. 우리 학교 미술원 디자인과를 나와 어느 기업의 디자이너로 취직하는데 알고 봤더니 석사로 인정이 안 되더군요.”
‘한 가지만 잘하는 음악인은 필요 없다’
잠시 생각하더니 이런 말을 보탰다.
“모두 국가대표 선수가 될 순 없습니다. 선수를 키워내는 데 일조할 수 있거든요. 연주계를 보면 우리나라에 전문 연주자가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거든요. 즉 연주로만 생활할 수 있는 사람들, 없죠.”
― 거의 없죠.
“아예 없다고 보는 게, 진짜 한 명도 없거든요. 결국에는 연주자와 교육자를 분리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물론 교육자도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만, 핵심은 전문 연주자만큼 하느냐거든요. 그런 인프라를 만드는 데 많은 사람의 역할이 지금 필요합니다.”
이 대목에서 김 총장은 뜻밖에도 줄리아드 음악원 시절의 실패 경험을 꺼냈다.
“1987년 줄리아드 박사 과정에 지원할 때, 사실은, 첫해에 안 됐어요.
떨어졌어요. 실기시험을 끝내고 면접을 하러 들어갔는데 당시 줄리아드 음악원장인 조셉 폴리시(Joseph William Polisi)가 제 파일을 유심히 보더니 한 가지만 묻겠다는 겁니다.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의 사상적 배경을 얘기하라’고 해요. 그러면서 ‘한 가지만 잘하는 음악인은 필요 없다. 이젠 교육된 아티스트(educated artist)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베토벤이 〈황제〉를 작곡할 무렵 프랑스혁명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다고 하지요. 그 곡을 이해하기 위해선 유럽사상사를 공부해야 했던 겁니다. 지금 가치관으론 많이 공감하는 말씀이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이었지요.”
이후 줄리아드 음악원의 커리큘럼도 악기 연습 중심에서 인문학이나 예술과목 등 다양한 학문을 함께 공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40년 가까이가 흘렀습니다. 콘서바토리(conservatory·음악전문학교)도 그런 교육이 필요합니다. 외국에선 벌써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교육입니다.”
임윤찬 신드롬 이후
한예종 재학생인 임윤찬이 작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기록한 이후 ‘임윤찬 신드롬’이 일어났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그가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를 연주하며 “이 곡을 이해하려면 단테의 《신곡》을 읽어야 한다. 전체 내용을 외우다시피 했다”고 밝힌 이후 《신곡》의 판매량이 급증했단다.
“임윤찬의 콩쿠르 우승 이후 한예종 입학 문의가 많이 오고 있습니다. 특히 해외문화원을 통해 굉장히 많은 문의가 오고 있어요. 유학생 유치를 위해선 한예종만 통하는 플러그로는 안 됩니다. 지금이 골든타임입니다. 전 세계와 호환이 될 수 있게 학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조금 전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융합 이야기를 했잖아요.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와 MOU를 맺고 무언가 해보자고 했는데 이후 진전이 안 돼요. 학제가 다르니까 서로의 교육시스템에 녹아들 수가 없는 것이죠.”
김 총장은 작심한 듯 이렇게 속내를 털어놨다.
“기본적으로 봤을 때 대학원이 없는 학교, 그러니까 대학원 석사가 인정 안 되는 학교, 박사 과정이 없는 학교에 누가 유학을 옵니까. 우리가 유학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 학교에 가겠습니까.”
“실기는 이론 교육과 함께 가야”
기자는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올해 낸 책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로 화제를 돌렸다. 백혜선은 한때 ‘처참한 탈락으로 피아노를 포기하고 전화회사 영업사원이 된 적도 있다’고 한다. 책에 ‘좌절할 때가 가장 좋은 때이고, 기쁘고 성취감을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적었다.
― 김 총장께서는 이 말에 공감이 가나요.
“추측건대 그가 말하는 ‘좌절’은 무슨 콩쿠르에 나가서 떨어졌을 때의 좌절이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음악세계에 만족 못 하는 그런 좌절이 아닐까요?”
― 한예종 출신 영재(英才)들도 죄다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을 텐데….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부분이 그겁니다. 영재라는 타이틀이 평생 따라다니지는 않잖아요.”
― 신동(神童)도 한때죠.
“결국에는 영재나 신동도 기성 연주인, 성인 연주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이 과정에서 여러 시련을 맛보고 좌절을 겪게 마련입니다. 제가 줄리아드에서 공부할 때 무슨 신동이라는 친구들이 즐비했는데 지금 다 없어졌거든요. 사실 시련을 겪었을 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풀어나가는 방법은 결국 ‘교육의 힘’에서 나오거든요.
사람들이 실기만 하는 학교라고 한예종을 생각하는데 결국 실기라는 게 이론교육과 함께 가야 합니다. 매일 손만 돌리는 도제식 주입교육만 할 순 없어요. 제발 실기교육에 박사가 왜 필요하냐는 논쟁은 하지 말아주세요.”
‘神童 김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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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 피아니스트 김대진군. 11세 때인 1973년 국립교향악단과 협연을 할 정도였다. |
다음은 《조선일보》 1985년 8월 28일 자 7면에 소개된 “김대진 미(美) 콩쿠르 1위” 기사다.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 유학 중인 김대진군이 24일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로베르 카사드쉬 피아노 국제 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했다.
김군은 1등 입상에 따라 클리블랜드 교향악단, 파리 파드루 교향악단과 협연하며, 클리블랜드와 뉴욕, 프랑스, 리옹, 세스네, 말메종 등지에서 독주회를 갖게 된다.〉
― 기억나세요?
“그랬었군요. 애송이 시절이네요. 하하하. 프랑스 출신 피아니스트 로베르 카사드쉬를 기리기 위해 만든 콩쿠르였어요. 부인도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는데 제가 나갔을 때 심사위원장을 맡았었죠. 몇 년 후에 클리블랜드 콩쿠르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그러고 보니 임윤찬도 2018년 클리블랜드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를 했었다.
― 제자들 사이에서 ‘악마 쌤(선생)’으로 유명하던데 나름의 교육철학이 궁금합니다.
“어떤 학생이든 장단점이 있고 장점을 살려주는 선생, 단점을 보완해주는 선생이 있겠지요. 저는 철저하게,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단점을 보완해주는 선생이거든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 출발합니다. 장점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장점이 된 게 아니라 자기네들이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장점인 것이고, 갖고 태어났다는 것은 소멸되지 않겠죠.
반면 단점은 자신이 갖고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보완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더러 ‘악마 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저를 벗어나 외국 스승을 만났더니 ‘뭔가 가슴이 뚫리는 것 같다’고 표현한 유명한 제 제자도 있고…. 저는 다 이해가 가요. 왜냐하면 장점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으니까요.”
김 총장은 “가장 이상적인 가르침은 ‘싫은 소리는 담당 선생에게 듣고, 좋은 소리는 다른 선생에게 듣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출발점은 이 안에서(학교에서) 레슨을 받고 연습해서 완벽한 연주를 한다는 것은, 좀 저렴한 표현입니다만, 가짜라고 표현하는데, 진짜는 무대에서 나와야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연주를 할 때 우리의 의식은, 의식이 있는 상황이고요, 무대에 올라갔을 때는 철저하게 무의식의 세계로 바뀌거든요. 그러니까 무의식의 세계에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왜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대처하는 것, 그거야말로 자기 무의식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무대에 올라가는 그 순간, 떨리기도 하고, 그 무대라는 상황에서 발현되는 무의식에 접근해야지….”
“무의식의 세계에서 표현할 수 있게”

― 어떻게 접근해야 됩니까
“그건 의식적으로 접근해야 됩니다.”
― 연습인가요.
“네. 그런 방향…, 무의식의 세계를 수정하기 위해선 반복적인 의식의 세계가 필요합니다. 연습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채우는 일종의 자기 명세서입니다.”
― 연습으로 단점이 장점으로 바뀔까요.
“장점으로 바뀔 수는 없으나 치명적인 단점을 고칠 순 있죠. 그리고 그 단점은, 피아노 앞에서만 나오는 단점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왜 연주가 부산스러운 학생이 있잖아요. 그런 학생은 레슨이 끝난 뒤 귀걸이 한 짝을 흘리고 가거든요. 그래서 한동안은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도, 음악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사람(의 근본)을 가르치는 수준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되면 (학생들에게) 성격적인 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이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코드가 맞았을 때는 자기 문(門)이 열려서 소통이 되지만, 어떤 학생은 철저하게 (내면을) 가리는 경우도 있어요. ‘왜 피아노 선생이 나의 다른 면까지 이야기하냐’고….”
― 왜 그럴까요.
“방어하는 것이죠.”
김 총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 과정에서 주저앉고 포기하는 아이들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힘든 나약한 의지를 가진 경우겠지요. 어쩌면 그런 의지로는 음악 전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을 해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이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죠.”
‘생긴 대로 연주한다’
그는 우리 대화의 마지막 결론을 내리듯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생긴 대로 연주한다’고 하잖아요. 자기 음악이 자기 삶이 돼야 합니다. 자기가 표현해내는 연주 세계와 자기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은 둘 중의 하나가 분명히 가짜일 것이고, 둘이 같게 될 때 비로소 연주자의 진심이 들려온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어떤 음악가가 되느냐, 어떤 삶을 사느냐는 건 결국 본인이 규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규정을 도와주는 것은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냐가 중요합니다.”
― 학창 시절이 중요하군요.
“사회에 나가 현장 경험을 쌓으면서 가치관이 정해지겠지만,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결국엔 학창 시절에 자기가 느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예술교육에서 학창 시절,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이가 자기 전공 선생입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연주하라’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가짜가 되지 말고, 흉내 내지 말고, 모방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네 진심이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 어떻게 생각하면 피아니스트, 지휘자, 스승, 대학 CEO 등 4가지 길을 걸어온 셈입니다. 원하는 삶이었나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나요?
“두 가지 다 있고요, 사실은….
음악잡지 쪽에서 가끔 이런 질문을 던지는데 저는 주저 없이 답할 수 있어요. 제 본모습은 ‘나는 선생입니다’예요. 시작이 무엇이든 점점 저 자신에 대해 깨달아 가는 것은, ‘나는 뼛속까지 선생이구나’ 하는 겁니다. 아주 확고하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 이외의 것은, 조금 여러 가지 상황이 필요해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겠고….
2003년 《동아일보》가 선정한 ‘프로들이 뽑은 우리 분야 최고’ 부문에서 국내 최고 클래식 아티스트로 선정되었어요. 그걸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이건 문제가 있다’였어요.
물론 선생으로서 연주를 할 순 있지요. 그러나 저 자신이 프로 연주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오늘 아주 솔직한 얘기를 하는 건데, 사실은 없고요, ‘선생으로서 연주…는 계속 한다’입니다.
진짜 프로 연주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주자… 이렇게 생각해본 적은 솔직히 한 번도 없었고요.”
김 총장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획 지었다. 연주자보다는 스승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이었다.
“외국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명한 대학교수가 피아노 독주회를 엽니다. 똑같은 연주지만 기본적인 출발점을 어디에 두느냐인데, 저는 ‘선생이 하는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연주자로서가 아니라 선생으로, 스승으로 남길 원했다. 더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기대하지 않는 듯 보였다.
“저, 음악가 아니에요”
― 요즘도 (피아노) 연습합니까.
“저, 음악가 아니에요.(웃음) 이제 음악가가 아니라고 저 자신한테 이야기하는데, 저 피아노(총장실 한쪽에 놓인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가리키며) 괜히 갖다 놨어요. 시간 날 때 연습하려고 했는데 거의 못 치잖아요.”
― 세월이 흘러 김대진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까요.
“예술가로서의 포부…, 이런 것은 이제 많이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냥… 훌륭한 스승이었다!(웃음) 그러나 총장으로서 나중에 내려질 평가에 대해선 두려운 게 사실입니다.”
― 진심이군요.
“30주년을 맞이한 이때 총장이 된 것이 운명이고, 앞으로 30년 뒤를 바라봐야 할 위치도 운명이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