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사상》 이어령 편집주간 시절, 서영은 1976~80년 편집장
⊙ “만약 세계제목뽑기대회 같은 게 있으면 내가 일등 할 거야”(이어령)
⊙ 1~2년씩 기다려 최정희 〈산〉, 김동리 〈을화〉, 김승옥 〈서울의 달빛 0장〉 실어
⊙ 이병주·박완서·최인호·김원일 등 다양한 필진들이 신선한 영감(靈感) 채워
⊙ 서영은, 《문학사상》 떠난 뒤 소설 〈먼 그대〉로 이상문학상… 이어령·김동리 등이 심사
⊙ “만약 세계제목뽑기대회 같은 게 있으면 내가 일등 할 거야”(이어령)
⊙ 1~2년씩 기다려 최정희 〈산〉, 김동리 〈을화〉, 김승옥 〈서울의 달빛 0장〉 실어
⊙ 이병주·박완서·최인호·김원일 등 다양한 필진들이 신선한 영감(靈感) 채워
⊙ 서영은, 《문학사상》 떠난 뒤 소설 〈먼 그대〉로 이상문학상… 이어령·김동리 등이 심사
1970년대 새로운 시대의 열망에 부풀었던 ‘르네상스맨’ 이어령(李御寧·1933~2022년)은 문예지 《문학사상》 편집주간으로 13년간 활약했다. 1972년 10월 창간호부터 1985년 11월 통권 157호까지 기간이다. 유신(維新)과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반발, 《사상계》의 강제 폐간 등으로 지식인층의 사회·문화적 갈증이 커져 가던 시기였다.
이어령은 이러한 지식인의 갈망을 해소할 수 있는 종합문예지의 출간을 구상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문학사상》이다. 대성공이었다. 초판 2만 부가 일주일 만에 다 팔려 급하게 윤전기를 다시 돌려야 했다.
이어령의 《문학사상》에서 소설가 서영은(徐永恩·82)이 1976년부터 80년까지 편집장으로 일했다. 33살에서 37살까지다. 이어령 편집주간과 서영은 편집장 사이는 어땠고 무슨 대화가 오갔을까?
한 줄의 문장, 한 편의 작품이 시대를 흔들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쉼 없이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최인호와의 첫 대면
서영은이 《문학사상》에 재직할 당시는 대표작들을 잇달아 발표할 때이기도 했다. 더러 자신이 몸담은 《문학사상》의 지면을 빌리기도 했다. 반칙 아닐까? 실상은 《문학사상》의 성가(聲價)를 높이는 일이었다.
‘서영은 편집장’의 눈에 비친 편집주간 이어령의 모습이 궁금했다. 또한 연인 관계였던 김동리(金東里·1913~1995년) 선생과의 만남도.
지난 7월 2일 서울 평창동에서 서영은 선생을 만났다.
서영은 선생은 1965년 강릉사범학교를 나왔지만 교사가 될 마음은 없었다고 한다.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 같은 실존주의에 빠져들면서, 강원도의 한갓진 바닷가나 산골 마을의 초등교사로 살아가는 삶을 일찌감치 거부했다.
― 이력을 보니 건국대 영문과 중퇴로 나와 있더군요.
“사범학교를 다녔지만 가르치는 게 너무 싫었어요. 요리조리 피하는 게 입시(대입) 준비를 하는 쪽이었죠. 한 번 떨어지고, 건국대로 가자….”
― 영문학과였으니 문학에 대한 갈망은 채울 수 있었나요?
“생각보다 (영문학이) 재미가 없었어요. 책읽기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당시 제 안에 문인이 되려는 어떤 활력이나 에너지가 그때 좀 꿈틀거려, (학교는) 좀 따분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무렵 초저녁에 잠깐 자고 한밤중에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8년 처음 투고한 《사상계》 신인문학상 공모에서 단편 〈교(橋)〉가 당선됐다.
“시상식에 가니까 무슨 키가 좀 자그마한 사람인데 모자도 군모(軍帽)를 쓰고 같이 시상식에 나왔는데 그 사람이 최인호(崔仁浩·1945~2013년) 씨였어요. 제 작품이 가작(佳作) 일석(一席), 최인호가 이석(二席)이었어요. 계단을 내려오는데 최 씨가 ‘서영은 씨, 저 좀 봅시다’ 했는데 제가 수줍음이 많아 가지고 걸음을 빨리 해서 도망친 기억이 나요. 좀 지나니까 그분이 막 유명해지더라고요.”
최인호는 고교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견습환자〉로 당선됐다.
“지금도 최인호 씨의 모습이… 자그마한 청년인데 뭐랄까, 밤톨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문학사상》과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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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 편집주간 시절의 《문학사상》 목차.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연재할 때다. |
“그럼요. 《문학사상》에 〈지구인〉이란 장편을 연재하면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 그리고?
“그때 최인호씨가 이어령 선생님과 골프를 시작했어요.”
― 70년대에?
“두 분이 운동량이 없으니까, 누가 권하니 골프를 쳤나 봐요. 골프를 치고 난 뒤 선생님(이어령)이 회사에 오실 때 최인호 씨도 따라왔던 것 같아요. 제가 선생님한테 보고할 것을 들고 주간실에 들어가면 최인호 씨가 탁자 위로 다리를 쫙 올려놓고 있었어요. 발바닥이 선생님이 보이는 쪽으로요. 그 분위기가 굉장히 재기발랄한, 그걸 선생님이 참으로 사랑해 주신 것 같았어요. 그 느낌이란 마치 막내아들 그렇게나 귀여워하듯이….”
서영은 선생은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에 〈나와 ‘나’〉로 당선됐고 꼭 서른 살 때인 1973년 11월 문학잡지 《한국문학》 기자로 잡지와 인연을 처음 맺었다. 《한국문학》은 생일이 《문학사상》보다 한 해 늦다.
《한국문학》이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만 무보수로 일하는 조건으로 편집기자 역할은 물론 회계장부, 원고 청탁, 교정, 정기구독 봉투를 쓰고 우체국까지 가서 책을 우송하는 일 등 잡지 한 권이 나오기까지 필요한 모든 일을 도맡았다.
당시 편집장은 소설가 이문구(李文求·1941~2003년) 씨. 김동리 선생의 두번째 부인 손소희(孫素熙·1917~1987년) 여사가 《한국문학》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김동리 선생님은 한 달에 한두 번 얼굴을 비칠까 말까 하셨고, 손소희 선생님은 비교적 자주 들락날락하시는…. 그 시절엔 아직 이어령 선생님을 뵌 적은 없었어요.”
당시 김동리 선생이 기관장 선거에서 떨어진 것을 분하게 여겨 손소희가 보란 듯이 새 잡지를 창간한 것이 《한국문학》이었다고 한다.
― 그때 《한국문학》과 《문학사상》은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문학사상》은 이어령 선생님의 탁월한 기획력과 고도의 편집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종합교양 문학지로 문학 외에도 다양한 아이템을 다루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죠. 문학이 강한 잡지였어요.”
반면 《한국문학》은 후발주자로 등장해 작가들의 좋은 원고를 계속 실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이문구와 서영은이 마당발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한국문학》은 순수 문예지였던 데 비해, 《문학사상》은 종합교양 문학지이다 보니 독자층이 굉장히 다양하고 커서 비교가 안 됐어요.”
《문학사상》에서 새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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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문학사상사 앞뜰에서 이어령 편집주간. |
이어령 주간은 대뜸 “《문학사상》에 올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는 이문구 씨하고 편집기자인 저, 그리고 영업 한 명과 심부름하는 사람이 전부여서 《한국문학》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물론 《문학사상》에서 일하는 것이 사실 저에게는 훨씬 좋은 일이었지요. 이어령 선생님의 천재적인 기획으로 문학계 전반을 흔들 만큼 중요한 이슈들을 내용으로 실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옮겨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요.”
그 일이 있고 2년 뒤 《한국문학》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서영은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한동안 집에서 머물던 중 다시 이어령 선생에게서 연락이 와서 《문학사상》에서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때가 1976년, 당시 서영은 작가의 소설들이 《문학사상》에 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단편 〈사막을 건너는 법〉이 1975년 4월호에 게재됐고, 〈틈입자〉는 1976년 5월호에 게재됐다.
“《한국문학》에 비해 《문학사상》은 아무래도 편집 내용들이 다양하니까, 한 호를 낼 때마다 새로 원고를 청탁할 분이 30명 이상이었던 것 같아요.”
― 시와 소설 합치면 청탁하는 건수는?
“그달그달 특집이 늘 있었어요. 특집물 필진이 거의 15명가량, 기사 꼭지가 특집은 한 20~30꼭지인데, 시는 5~6명, 소설은 연재까지 합치면 7~8명에게 했는데, 크고 작은 연재물까지 합치면 전체 한 50꼭지는 됐어요. 교수나 학자들의 원고 청탁은 수월했지요. 문제는 소설이죠. 꼭 받아 보고 싶은 작가들이 딱딱 써내지를 못하니까. 그러다 보니까 거의 투쟁하는 분위기였어요.”
전화로 ‘두드려 대야’
이병주(李炳注·1921~1992년), 박완서(朴婉緖·1931~ 2011년), 최인호, 김원일(金源一·1942~) 등 당대의 걸출한 필진이 신선한 영감(靈感)을 주는 내용들로 지면을 풍성하게 채웠다. 그중에서도 너무 잘 쓰는데 오랫동안 못 쓴 작가, 공백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허물어져 글을 안 쓰려나 보다 하는 작가가 김승옥(金承鈺·1941~)이었다.
“썼다 하면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런 작가들 중 원로 작가들이 한 7~8분 되고 중진도 한 10명 되는데, 이분들은 항상 전화로 ‘두드려 대야’ 했지요.”
― ‘두드려 댄다’는 표현이 너무 웃겨요.
“그래서 작가보다는 그 부인하고 통화를 할 때가 더 많았어요. 연재는 필자가 쓰고 안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잡지에 매여 있는 그런 거니까. 그런 원로급으로 거의 절필하다시피 한 작가들 중에 김동리, 최정희(崔貞熙·1912~1990년), 김승옥 하여튼 그런 분들은 매달 전화를 해야 했어요.”
그렇게 1년, 2년씩 기다려 《문학사상》에 실은 글들이 최정희의 〈화투기〉 〈산〉, 김동리의 〈을화〉 〈만자동경(萬紫洞景)〉,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 등이었다.
― 김동리 선생의 〈을화〉는 한국문학사에서도 굉장히 비중 있는 작품인데 《문학사상》에 게재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제가 《문학사상》에 들어간 초장(初場)부터 청탁한 분이 김동리, 최정희 같은 원로들… 잘 안 쓰시는 분들이었어요. 이어령 선생님이 딱 집어 가지고 ‘그거를 꼭 받아 내면 좋겠다’고 하셨죠. 김동리 선생님은 항상 써야 한다는 부담을 늘 갖고 계셨는데 대학(중앙대 예술대 초대 학장·1974~1979년)에 몸담고 계셨고, 뭐 집중적으로 쓰려고 하면 후배 문인들이 와가지고 무슨 청탁이 그렇게 많은지…. 또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술자리로 이어지니까….”
― 〈을화〉를 쓰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셨겠네요.
“아뇨. 학교에서 주로 쓰시는 것 같았어요.”
이어령은 둘의 관계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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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리 선생과 서영은 선생. |
“전혀. 나중에 제일 놀랐던 분이 이어령 선생님이었던 것 같아요.”
‘두드려 대야’ 했던 작가 중에는 황순원(黃順元·1915~2000년), 오영수(吳永壽·1914~1979년), 안수길(安壽吉·1911~1977년)도 있었다. 여러 작가들이 몇 년씩 혹은 몇 달씩 걸쳐서 쓸 경우도 그 자체가 문학 기사가 되고 화제가 되지만, 거의 절필 상태였던 작가는 작품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글을 다시 썼다는 것 자체가 이슈였다. 이런 작가들의 이름이 목차에 들어가면 독자들이 잡지를 펴보고 “우와” 하는 거고 그 반응은 곧바로 판매로 직결되었다.
― 편집장 역할을 하셨으니까 기사들의 큰제목이나 중간제목 뽑는 일도 하셨겠네요.
“네, 그런 걸 제가 주로….”
― 그 일이 소설 창작에 도움이 됐나요? 작품 쓰는 데?
“전혀.”
― 물론 제목을 잘 뽑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이어령 주간이 제목에 손을 대면 느낌이 달라졌나요?
“네, 확실히. 이어령식(式) 감성이죠.”
― 조금 풀어서 설명하시면?
“그만의 지적(知的) 감성!”
서영은 선생과 함께 《문학사상》에 근무했던 홍영철 시인에 따르면 이어령 주간은 매달 그 많은 원고의 제목을 일일이 체크했다. 1차 수정이 끝난 교정지를 테마별로 모아 주간실로 가져가면 이어령 주간은 빠르게 교정지를 넘기며 제목들을 손질했다. 그 모습이 흡사 입시를 치르는 수험생 같았다고 한다. 이어령 주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내용 보고 잡지를 살 것 같아? 제목 보고 사는 거라고.”
당시 《문학사상》의 목차는 4~5쪽를 접지해서 길게 펼쳐 볼 수 있도록 꾸몄다. 과거 1980~90년대 《월간조선》 목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펼치면 한 호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요즘은 손이 많이 가서 거의 쓰지 않는다. 가로 60cm가량의 기다란 대지가 주간실 책상 위에 놓이고, 이어령 주간의 OK 사인이 떨어지면 한 호의 편집 일이 끝난다. 이어령 주간은 강의하고 강연하고 칼럼과 책을 쓰면서 매번 그렇게 일했다. 13년 150여 달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그랬다.
한번은 이어령 주간이 책상에서 검토를 마친 교정지를 건네주고는,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는 작가들 쪽으로 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세계제목뽑기대회 같은 게 있으면 (내가) 일등 할 거야.”
김승옥 〈서울의 달빛 0장〉이 완성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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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무렵의 이상문학상 심사위원들. 왼쪽부터 김동리 김윤식 김화영 이어령 선생이다. |
“하여튼 김승옥 씨가 글을 쓴다고 약속했을 때, 그 약속을 지킬 것처럼 보였지요. 그래서 하루하루 매일 전화하다시피 하는데, 원고 마감을 한 열흘 정도 남겨 두고 전화를 안 받는 겁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김승옥이 잠적하자 서영은 편집장은 하늘이 노래졌을 것이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추적에 추적을 거듭했다.
이틀 뒤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영화사 시나리오 때문에 장충동 여관에 갇혀 있다는 풍문을 입수한 것이다. 이번만은 반드시 김승옥 원고를 받아 내자는 각오로 무작정 장충동으로 달려갔다.
“지금 소설을 내놔도 마감시각에 맞출까 말까지만, 어쨌든 이번 호에는 반드시 김승옥 소설을 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찌 됐든 그런 분위기가 형성이 돼가지고, 추적을 해서 장충동에 있는 그 장급 여관에 찾아간 겁니다. 혼자 찾아갈 수 없어서 곁에서 《문학사상》을 돕던 한 여성과 같이 김승옥 씨가 기거하는 옆방을 얻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소설을 쓰고 있냐가 초미의 관심이잖아요. 한번은 방문에다 귀를 기울여 봐도 도무지 인기척이 없으니까, 창가에 의자를 놓고 옆방 창문으로 그쪽을 바라봤어요.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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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자는 소설가 김승옥이었다. 1977년 9월 29일 시상식 장면이다. |
“침대에 걸터앉아 뭘 쓰는 건 아니고, 하여튼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그 주변에 구겨진 원고지가 깔려 있었어요. 꽃잎 떨어져 있듯이. 그걸 보고 정말 충격을 먹었어요. ‘야… 우리가 이렇게 해서까지 원고를 받아 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저 사람은 저 정도로, 글을 짜내야 할 정도로 치열하구나!’ ‘저 사람은 정말 자기 진액을 다 짜내 글을 쓰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까 깊은 성찰이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김승옥 씨가 방 밖으로 나와서 ‘밥 먹으러 갑시다’ 이러는 거예요. 문득 그분 얼굴을 보니 머리(카락)를 하도 쥐어뜯어 이마에 뻘겋게 피가 묻어나 있었어요.”
모든 상황이 서로에게 너무나 절박했다. 서영은 선생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때 저는 김승옥 씨의 글쓰기 모습을 보며 예술에 대한 열정과 고통을 같이 느꼈지요. 〈서울의 달빛 0장〉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서울의 달빛 0장〉은 1977년 《문학사상》 10월호에 실렸고 김승옥은 제1회 이상(李箱)문학상을 수상했다.
서영은, 1983년 이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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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983년 9월 29일 자 2면에 실린 서영은 작가의 이상문학상 수상 기사. 당시 상금 150만원을 받았다. |
― 《문학사상》에서 일하랴, 김동리 선생과 연애하시랴 바빴을 텐데 바로 그 무렵 중요한 작품도 쓰셨잖아요.
“연애는 연애고, 쓰는 건 쓰는 거고. 그러니까 그땐 잠을 많이 줄였죠. 퇴근해서 돌아오면 3~4시간 잠깐 자고 새벽 2~3시에 일어나 쓰는데 저는 오히려 그 시간이 굉장히 행복했어요. 만날 남의 글(의 제목을) 뽑아 내느라고 난리를 치고 두드리다가 집으로 돌아와 자기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뭐랄까, 어떤 이상한 ‘자유함’이랄까….”
― 1980년에 《문학사상》을 그만두셨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에너지를 너무 소진했던 것 같아요. 이어령 선생님이 저한테 의지하는 게 너무… 점점 더… 이렇게 해가지고는…. 물론 잡지 일이 창작과 무관한 것은 아니어서 좋은 점도 많았으나 탈진이 된 느낌 같은 게 있잖아요.”
서영은 선생은 《문학사상》을 떠나고 3년 뒤 《한국문학》 1983년 5월호에 게재된 단편 〈먼 그대〉로 제7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상문학상은 《문학사상》이 제정한 상이다. 심사는 이어령 주간, 김동리·백철·최정희·김윤식·김화영 선생이 맡았다. 서영은–김동리 두 사람은 당시 이미 깊은 연인관계였다. 김동리 선생은 심사평에서 이렇게 썼다.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이 그려져 있다’는 뚜렷한 인상은 부인할 수 없다. 소설에서 나름대로의 인생이 그려졌다면 그것은 어느 경우나 존중되지 않을 수 없다.”
― 김동리 선생의 심사평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지금 기억이 안 나요. 근데 그분의 소설 쓰는 경향이 저하고 완전히 다르시잖아요. 세계에 대한 통찰이 굉장히 깊으시고 소설에 대한 기본이 확고하게, ‘소설은 이야기여야 하고, 삶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사상이나 뭐든 이야기로 펼쳐져야지….”
― 관념이 아니라.
“제가 그걸 이해하는 데 좀 시간이 걸렸죠. 다시 소설에 달라붙는다면 서사를 이야기로 다 바꿔서 작품을….”
나귀와 낙타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4년이 지나 손소희가 사망하자 서영은은 30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김동리와 결혼했다. 1990년 김동리 선생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서영은 선생이 그를 간호했으나 그는 1995년 하늘의 별이 되었다. 올해가 동리 30주기다.
서영은 선생을 만나는 자리엔 계간지 《문학나무》의 소설가 안지현 편집장이 자리를 함께했다. 안 편집장이 건넨 이 잡지 여름호에 이어령 선생이 생전에 쓴 김동리 회고 글이 실려 있었다.
〈동리선생은 재생한다. 그의 문학은 나귀처럼 지금도 어느 길에선가 천천히 걷고 있다. (중략) 동리 문학은 나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귀이다.〉
기자는 서영은 선생의 이상문학상 수상 연설문을 다시 펼쳐 들었다. 제목은 ‘생(生)의 중심으로 가는 낙타’. 그중에서도 “작가는 가장 아프게, 가장 나중까지 우는 자입니다”라는 문장이 오래 여운을 주었다. 연설이 있던 날, 청중들 가운데는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례적으로 연설문 전문(全文)이 신문에 실릴 만큼 깊은 울림을 남긴 자리였다. 어쩌면 그 연설 속 ‘낙타’라는 상징을 내포한 표현이야말로 서영은 선생의 삶을 지탱해 온 내면의 원천이었는지 모른다.
〈자기에게 지워진 이 짐이 너무 무겁고, 홀로 가는 그 길이 너무 외로워 신음하면서도, 그는 그 길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생(生)의 중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