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가와 같은 필사본 ‘第十四 無窮花歌 二’ 필적 감정 의뢰하니 안창호로 나와
⊙ 애국지사 손승용의 《가사모음집》은 안창호 필사본… ‘第十四 無窮花歌 二’도 실려
⊙ 1930년 8월 황사선 목사, 애국가 가사를 안익태에 건네며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고 해
⊙ “도산이 써두었던 원고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 윤치호에게 보여… 원고엔 ‘동해물과 백두산이~’”(장이욱)
⊙ “‘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하지 않았다”(이광수)
⊙ “선생이 빙그레 크게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다가 재차 물어보니 ‘맞다’”(구익균)
安龍煥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1년 수료, 독학사(교육부 국어국문학과 학사학위), 명지대 사학과 석·박사, KBS·EBS·YTN·MBN·연합뉴스TV·국회방송·채널A 등 출연. 現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 규명위원(흥사단), 안양대 석좌교수
⊙ 애국지사 손승용의 《가사모음집》은 안창호 필사본… ‘第十四 無窮花歌 二’도 실려
⊙ 1930년 8월 황사선 목사, 애국가 가사를 안익태에 건네며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고 해
⊙ “도산이 써두었던 원고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 윤치호에게 보여… 원고엔 ‘동해물과 백두산이~’”(장이욱)
⊙ “‘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하지 않았다”(이광수)
⊙ “선생이 빙그레 크게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다가 재차 물어보니 ‘맞다’”(구익균)
安龍煥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1년 수료, 독학사(교육부 국어국문학과 학사학위), 명지대 사학과 석·박사, KBS·EBS·YTN·MBN·연합뉴스TV·국회방송·채널A 등 출연. 現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 규명위원(흥사단), 안양대 석좌교수

- 2025년 3월 10일 오전 서울 강남 도산안창호기념관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제 87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조선DB
76명에 달하는 친일(親日) 인사가 일제에서 주는 귀족 작위와 은사금(恩賜金)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안창호는 미주(美洲), 만주, 러시아, 멕시코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도산은 당시 2000만 동포를 항일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노래가 절실히 필요했고, 그것이 애국가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애국가는 현재 ‘작사자 미상’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매달렸다. 때로는 과학적 방법으로, 때로는 인문학적 방법으로 접근했고, 오랜 고뇌 끝에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안창호가 작사한 ‘십ᄉᆞ편 무궁화가’와 ‘第十四 無窮花歌 二’를 발굴했는데 지금의 애국가와 매우 유사했다.
무엇보다 도산 선생의 따님인 안수산(安繡山·미국명 Susan Ahn Cuddy·1915~2015년)의 애끊는 증언, 서재필(徐載弼·1864~1951년) 선생과 함께 《독립신문》 기자로 활약한 애국지사 손승용(孫承鏞·1855~1928년) 목사가 남긴 《손승용 목사 가사모음집》을 토대로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펴왔다.
필자는 《월간조선》 2024년 11월호에 (사)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이 기고한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다〉에 대응논리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애국가 계보의 연원
도산 안창호는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성을 보고 민족의 힘없음을 자각, 피란길에 서울로 상경한 뒤 1896년 밀러학당(일명 언더우드 학당, 구세학당)을 졸업했다. 밀러학당과 배재학당에 동시에 합격했으나 고심 끝에 밀러학당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년)와 배재학당 교사 남궁억(南宮檍·1863~1939년)의 주선으로 배재학당의 토론회인 협성회에서 찬성원(동문과 동등한 자격)으로 ‘애국가류’ 가사를 만들었다. 이 ‘애국가류’ 속에 ‘동해물과 백두산이~’가 들어 있었다.
1899년 6월 29일자 《독립신문》에 따르면 배재학당 학생들이 방학 예식에 ‘무궁화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곡을 애국가 계보의 연원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가사와 후렴 부분이 거의 흡사하다.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ᄅᆞᆷ 대한으로 길이 보죤ᄒᆞ셰.〉
밀러학당 밀러 목사가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시키면서 1896년 독립문 정초식(定礎式) 때 부를 노래를 짓자고 해서 제출받은 것 중 안창호가 지은 ‘무궁화 노래’가 선택되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강행된 갑오경장(甲午更張)과 단발령(斷髮令)을 겪으며 느꼈던 항일의식, 민족의식을 담아 지었다.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
무궁화는 꽃 이름으로 쓴 게 아니고 우리 백성을 뜻한다. 이 땅에서 무궁하게 꽃처럼 피고 지는 억조창생(億兆蒼生) ‘무궁화 조선사람’을 왜놈으로 만들지 말고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자’고 읊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에는 “대한사람 대한으로~”로 바꾸어 불렀다.
안창호는 밀러학당을 졸업한 뒤 1898년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명연설로 전국적으로 독립협회 결성에 기여했고, 평양 지역의 독립협회 관서지부 창립을 주도하면서 이미 스무 살에 일약 최고의 청년 명사로 떠올랐다. 바로 이 시점에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활용하여 ‘애국가류’를 신문에 싣는 등 애국창가 계몽운동을 펼쳤다. 도산은 임시정부를 통해 이 애국창가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 학교와 각 기관에서 국가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부르기를 정례화하도록 노력했다. 특히 50여 개의 ‘애국가류’를 지어 보급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무궁화 노래’이다.
도산의 따님인 안수산 커디가 1985년 3월 11일 아버지의 유품 3000여 점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할 당시 ‘무궁화가’가 실린 책이 나왔다. 독립기념관 학예팀은 도산이 직접 작사(일부), 수집, 편집했다는 것을 전제로 그 책을 《애국창가집》(자료집 일련번호 도15-31)이라 명명했다. 책 구성이 독특하다. 1~8쪽은 유실되었고 9~11쪽은 제목 없이 1~10절로 되어 있는 노래가 실렸다. 그리고 14쪽에 ‘십ᄉᆞ편 무궁화가’가 실렸다.
〈一 셩ᄌᆞ신손 五百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ᄂᆞᆫ 우리 본국일세.
二 ᄋᆡ국ᄒᆞᄂᆞᆫ 열심의긔 북악갓치 놉고 충군ᄒᆞᄂᆞᆫ 일편단심 동ᄒᆡ갓치 깁헤.
三 쳔만인 오직 한ᄆᆞᄋᆞᆷ 우리 황실이오 ᄉᆞ롱공상 귀쳔 업시 직분만 다ᄒᆞ셰.
四 우리나라 우리 황뎨 황텬이 도으샤 군민공락 만만셰에 태평독립ᄒᆞ셰.
(후렴) 무궁화 아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ᄅᆞᆷ 대한으로 길이 보죤ᄒᆞ셰.〉
‘무궁화’라는 제목이 뚜렷하고 특히 후렴은 현행 애국가 후렴과 똑같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애국창가집》에 수록된 안창호 작사의 ‘십이편 권학가’의 제목 밑에 ‘무궁화가와 한 곡됴(曲調)’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이는 ‘무궁화가’와 동일한 가락이라는 의미다. 즉 애국가의 작사자가 안창호라는 것을 확실히 뒷받침한다. 당시 ‘권학가’는 안창호의 인기 노래였다고 전한다.
안창호는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고 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도산이 미국에 갈 때 애국가인 “성자신손(聖子神孫) 오백년은~”을 가지고 가서 미국 전역 교포 사회에서 애국가 대용(代用)으로 불렀다.
1907년 도산의 환영 행사에서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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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 안창호의 따님인 안수산 커디 여사가 생전 흥사단에 “왜 저의 부친의 이름이 작사자로서 애국가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
안수산 커디는 2015년 6월 19일 흥사단을 통해 이런 편지를 필자에게 보내왔다.
〈저는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한국 국가인 애국가를 도산이 작사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들은 젊었을 때 매일 그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여기에 있는 개척자 세대인 우리 모두는 도산이 작사하셨다는 것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왜 저의 부친의 이름이 작사자로서 애국가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안수산은 이 편지를 보내고 닷새 뒤인 6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전 마지막 글이었고 마지막 자필 서명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제십사 무궁화가 2’ 발굴
필자는 도산이 쓴 소책자 아니면 습작 노트라고 여겨지는 문헌에서 ‘第十四 無窮花歌 二’를 발굴했다. 이로써 《애국창가집》에 실린 ‘십ᄉᆞ편 무궁화가’와 더불어 시리즈가 완성된 셈이다.
〈一 동ᄒᆡ물과 ᄇᆡᆨ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ᄂᆞ님이 보호ᄒᆞ샤 우리 대한 만셰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젼ᄒᆞ셰
二 남산 우헤 뎌 쇼나무 쳘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ᄒᆞᆷ은 우리 긔샹일셰.
三 가을하ᄂᆞᆯ 공활ᄒᆞᆫ데 구름 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셰.
四 이 긔샹과 이 마ᄋᆞᆷ으로 님군을 셤기며 괴로오나 질거오나 나라 ᄉᆞ랑ᄒᆞ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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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애국창가집》에 실린 ‘십ᄉᆞ편 무궁화가’ |
또 하나의 특이점은 가사 배치 순서이다. 《애국창가집》에 실린 ‘십ᄉᆞ편 무궁화가’와 소책자에 적힌 ‘第十四 無窮花歌 二’ 모두 같은 14번째 곡이다. 두 노래가 ‘14’를 매개로 하여 일관성 있게 기술돼 도산 작(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第十四 無窮花歌 二’의 좌측 가장자리에 “힘을 쓰고 힘을 써서”라고 쓴 종서(縱書)를 통해 도산의 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도산의 4대 정신인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이다. 무실의 ‘무’는 ‘힘쓰고자’라는 뜻이다. ‘실’은 진실, 성실, 거짓 없는 것을 말한다. 역행은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의미다. 진실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꾸준히 노력하고 실천하라는 무실역행은 도산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다. 따라서 “힘을 쓰고 힘을 써서”는 도산의 저작권 표시다.
필자는 지난 2017년 ‘第十四 無窮花歌 二’가 적힌 소책자의 필적 감정을 예일문서감정원에 의뢰했다. 놀랍게도 도산의 친필이라는 답을 받았다.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손승용 목사 가사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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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혜성 교수는 《손승용 목사 가사모음집》의 필체를 손 목사의 것으로 보아 필사본을 《손승용 수진본 창가집》이라 명명했다. 원본은 손 목사 후손의 기증으로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박스 친 ‘힘을 쓰고 힘을 써서’는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도산 선생의 저작권 표”나 마찬가지다. 반혜성 교수 제공. |
《독립신문》 주필(主筆) 서재필과 더불어 손승용은 ‘조필(助筆)’과 기자로 주시경(周時經·1876~1914년)과 함께 《독립신문》의 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평소 도산을 존경했고 ‘무궁화가’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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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지사 손승용 목사. 《손승용 목사 가사모음집》을 통해 안창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반혜성 교수의 논문에서 가져왔다. |
모음집을 일일이 살펴보면 안창호 작품이 많다. 소년가, 대한혼가, 第十三 無窮花歌 一, 第十四 無窮花歌 二, 국권회복가, 수절가 등이 대표적이다. 필적 감정을 의뢰하니 역시 필체가 도산의 것과 똑같았다. 도산이 직접 쓴 필사본 가사집을 손승용이 교육적 목적으로 소장하며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가사모음집 외에 손승용 유품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초등학교 교장이던 둘째 아들 손대벽이 인민재판에 몰리자 손승용의 유품 상자를 모두 불태웠다고 전한다.
황사선 목사와 안익태의 역사적 만남
황사선(黃思善·1885~1974년) 목사와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의 역사적 만남이 애국가의 산실이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안익태는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는 애국가를 처음 접하게 됐다.
평북 의주군 위화면 위화도의 한 농가에서 8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난 황사선은 16세 때쯤부터 ‘천주학쟁이’라는 비방을 받으며 교회에 다닌 것으로 보인다. 큰누나 황사성의 권유로 17세부터 28세까지 평양까지 걷기도 하고 당나귀도 타면서 숭실학교의 중학 과정과 대학 과정을 거치며 교장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로부터 성경과 신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1911년 미국으로 떠났다.
반면 안익태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0년 도쿄국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안익태는 평양에 있을 때 문중 어른들로부터 애국가 가사는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같은 안씨라는 사실에 인상적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황사선 목사와 안익태의 역사적인 만남은 1930년 8월 8일 미국 오클랜드시의 상항(桑港)교회에서 이뤄졌다. 황 목사는 먼저 안경을 낀 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저는 평양에서 온 안익태입니다. 황 목사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자, 이리로 오십시오.”
황 목사 부인이 이런 말을 건넸다.
“누가 여기까지 안내해 주셨나요? 아침식사는 했나요?”
안익태가 커피와 케이크를 들면서 자신의 고생담을 차근차근 설명하자 황 목사 부부는 혀를 차기도 하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안익태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황 목사는 안익태를 위해 67달러 30센트를 모금하고 다과회를 베풀었다. 다과회가 끝난 후 안익태는 황 목사로부터 받은 애국가 가사를 정확하게 베꼈는데,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고 했다.
애국가 가사를 지을 때 이틀씩이나 금식을 하면서 기도했다는 말도 들었다. 안익태는 황 목사로부터 만년필을 선물받았고, 황 목사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 목사님! 제가 이 가사에 알맞은 곡을 몇 년이 걸리더라도 꼭 작곡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황 목사는 큰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장이욱·안태국의 역사적 증언
독립운동가 장이욱(張利郁·1895~ 1983년)은 외교관, 서울대 총장, 주미 대사를 지냈다. 안창호의 흥사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장이욱의 역사적 증언(《위대한 한국인 6》)에 의하면 평양 대성학교 대리교장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윤치호에게 부탁하였다.
“이 (애국가)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보는데,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오.”
당시 애국가의 첫 구절은 “성자신손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로 되어 있었다.
그러자 윤치호가 이렇게 말했다.
“미처 좋은 생각이 안 나니 도산이 생각해 놓은 게 있으면 수정해 보우.”
그러자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두었던 원고를 꺼내 보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첫 절이 이러하였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거 매우 잘 되었소” 하며 찬성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
도산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윤치호가 광복이 되자마자 애국가 작사자 주인(안창호)에게 바로 되돌려줬으면 오늘날 이런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장이욱 박사의 이 증언은 안태국(安泰國·?~1920년) 선생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안태국은 양기탁, 이동휘, 안창호, 이승훈, 김구 등과 함께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창립했고 평양 대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한국 근대사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주요한(朱耀翰·1900~1979년)이 쓴 《안도산 전서》(삼중당 1963년, 흥사단 출판부 1999년)에도 이 같은 내용이 담겨 있는데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이 장인에게 전해 들었다”고 적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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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협회 평남지회 회원으로 활동할 당시인 1897년 안창호 선생(가운데). |
〈도산이 상해 임정(臨政) 시대에 현행 애국가 작사 중 “님군(임금)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하였다. (중략) 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십 편이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가장 잘된 작품이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1892~?)도 안창호 애국가설에 힘을 싣는 여러 증언을 남겼다. “애국가 제4절 ‘임금을 섬기며’ 대신에 ‘충성을 다하여’로 고친 것은 안창호” “원래 이 노래(애국가)는 도산의 작이어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러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하지 않았다.”
춘원의 부인 허영숙(許英肅·1897~ 1975년)의 증언도 있다. 허영숙은 도산의 따님인 안수산 여사와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나는 융희(隆熙) 2년 진명학교 때와 그 후 상해(上海) 시대에 두 번씩이나 도산 선생께 ‘애국가는 내가 지었다’는 말을 들었다. 춘원이 도산 전기에 애국가의 작사자가 도산이라고 쓴 데 대하여 윤치호 씨의 자제가 문의를 하러 왔는데 춘원이 유래를 설명하니 해득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3·1만세운동의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崔南善·1890~1957년)도 이런 증언을 남겼다.
“애국가가 도산 작이라고 세상에 전해진 것은 도산이 대성학교에서 매일 이 애국가를 애창하였으므로 도산 작이라고 믿어진 것 같다.”
독립운동가 이유필(李裕弼·1885~ 1945년)의 부인 김경희(金敬姬·?~ 1967년) 여사도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술회했다. 김 여사는 3·1운동 때 상하이로 망명한 이래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남편 이유필의 독립운동 뒷바라지로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67년 8월 5일자 7면에 도산 선생이 이유필 자택에 들렀다가 체포되었다는 내용이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허영숙의 지인으로 알려진 최일봉의 증언도 나온다.
“안도산 선생이 융희 시대에 의주 익원학교에서 애국사상 연설을 한 후 자기가 지었다는 애국가를 배워 주었다. 상해임시정부 내부(內部) 총장(안창호) 비서실에서 비서 이유필 입회 하에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는 내가 창작자야’라고 언명하였다.”
임채승과 구익균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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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채승 선생은 장이욱 박사가 자신의 대학원 논문을 지도하며 “애국가 작사가는 도산”이라고 말했다.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6번째가 장이욱 박사, 셋째 줄 오른쪽에서 4번째(화살표)가 임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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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 안창호 선생 비서 구익균 선생. 2008년 3월의 모습이다. 사진=조선DB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구익균(具益均·1908~2013년) 선생은 1929년 3월 신의주학생의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다. 이후 도산의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도산을 빼놓고는 그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다음은 《동아일보》 2011년 10월 26일자에 실린 구익균의 말이다.
“나는 그때 도산 선생을 만나 평생 초상화를 방안에 모셔 두며 그의 뜻을 받들어 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루는 도산 선생에게 ‘애국가 가사를 직접 쓰신 게 맞느냐’고 물어봤는데 선생이 빙그레 크게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다가 재차 물어보니 ‘맞다’고 하셨다.”
애국가 ‘작사자 미상’ 77년째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준으로 애국가 작사자 미상이 77년째가 된다. 더 이상 타이밍을 놓치지 말자. 애국가 작사자 규명을 ‘단군신화’처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미·영전쟁(1812~1814년) 당시 영국의 함대는 미국의 볼티모어 항구에 있는 맥헨리 요새에 밤새도록 맹폭격을 했다. 그 이튿날 새벽에 뜻밖에도 성조기가 멀쩡하게 펄럭이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미국 시인 프랜시스 스콧 키가 ‘성조기여 영원하라’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쓰고 그 당시 영국의 음악인 존 스탠퍼드 스미스가 작곡을 하였다. 그 후 적국 영국 사람이 작곡하였다 하여 계속 논란이 있었지만, 전통과 역사를 중요시하여 1931년 미국 후버 대통령의 요청으로 의회에서 공식 통과된 노래가 지금의 미국 국가(國歌)이다. 119년 만이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도 1795년부터 불리기 시작했는데 가사가 15절까지로 너무 길다고 하여 논란 끝에,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여 84년 만인 1879년 공식 국가로 승인하였다.
우리나라 애국가도 정부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여 ‘안창호 작사, 안익태 작곡’임을 천명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