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산불로 사라진 경북 문화유산 답사기

하루아침에 폐사지(廢寺址)로… 고운사 품은 등운산의 통곡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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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과 묘목 잃은 농부들, 넋 나간 듯 산기슭 어드메쯤에 시선을 두며 꺽꺽 한숨만
⊙ “宗孫이 어디로 도망간단 말입니까? 이 집과 죽을 작정을 했어요”(안동 오류헌 김상돈씨)
⊙ “흥선대원군 현판, 귀한 병풍·서책이고 뭐고 죄다…”(지산종택 김수형씨)
⊙ 경북도 신고 피해액, 4월 9일 현재 私有시설 3865억원, 공공시설 1조435억원
⊙ “사과나무가 전부 불을 먹어… 올해는 폐농”(세덕사 인근 주민)
국가 지정 보물인 경북 의성 천년 고찰 고운사의 연수전(延壽殿)과 가운루(駕雲樓)가 불에 탔다.
산불 피해를 입은 경상북도 땅을 돌아보았습니다. 화마(火魔)가 산허리를 탐욕스레 삼킨 비극의 현장이었습니다. 아름다웠던 산세(山勢),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맥(山脈)들이 겨우 여맥(餘脈)만으로 몸져누웠더군요. 산 아래 마을과 논밭이 어우러졌던 정든 시골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한 현장이 두고두고 서러웠습니다.
 
  이맘때면 새하얀 벚꽃에 에워싸였을 절의 일주문(一柱門)도 시커멓게 변했더군요. 저마다 다른 표정의 높고 낮은 산야가 쓰러져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집 잃고 묘목 잃은 농부들은 넋 나간 듯 산기슭 어드메쯤에 시선을 두며 꺽꺽 한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두 손을 잡아 주고 싶었습니다.
 
  경상북도는 3월 22일부터 27일까지 산불로 피해를 본 5개 시·군(의성군, 안동시, 청송군, 영양군, 영덕군)의 피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4월 9일 현재 사유시설 신고 피해액은 3865억원, 공공시설의 신고 피해액은 1조435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해액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문화유산과 자연입니다. 채색화가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와 한 줌 재로 변한 아비규환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산허리 한 굽이만 돌아서면 당도하던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抒情)에 어찌 값을 매기겠습니까?
 
  기자는 지난 4월 2일부터 2박3일간 경북 의성과 안동, 청송 지역의 산불 피해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차를 몰고 남안동 톨게이트 근처에 오니 산들이 듬성듬성 시커멓게 보였습니다. 불길이 도깨비불처럼 널뛰듯 날아다니며 나무들을 태운 겁니다. 안동 깊숙이 들어갈수록 참혹했습니다. 골골마다 탄 자국, 덴 자국이 선명했지요. 검게 타 죽거나 그을려 푸르름을 잃은 잿빛 천지. 장하던 그 자태는 어디로 갔나요?
 
 
  화마가 하늘로 데려간 고운사 가운루
 
  오른쪽으로 뻗은 길을 버리고 천년 고찰(古刹) 고운사(孤雲寺) 가로숲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높은 절벽엔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모습도 드문드문 보였지요. 굽이치는 길에 마주 오는 차들은 흙먼지를 덮었는지 잿가루를 뒤집어썼는지 엉망이었습니다. 비원(悲願) 담은 현수막만 하얬습니다.
 
  ‘부처님의 가피(加被)로 조속한 복구를 응원합니다.’
 
  의성군 단촌면의 최치원문학관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고 철골 구조물은 다 내려앉았습니다.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니 손으로 쓴 ‘출입금지’ 표지가 보였습니다. 문학관 뒤편은 더 참혹했습니다. 유리창은 다 깨졌고 기와도 모두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나무들도 죄다 불에 타 숯덩이로 남았고요.
 
  고운사로 꺾어드는 산문(山門) 길목은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신라 말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이 전국을 떠돌다가 들어앉았다는 곳입니다. 이곳에 머물다 고적(孤寂)한 구름처럼 종적을 감췄다지요.
 
  고운사는 연꽃이 반쯤 핀 형국, ‘부용반개(芙蓉半開)’의 천하명당으로 알려진 절입니다. 고려시대엔 전각과 암자가 366칸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에 전국 14개군(郡)에 말사(末寺)를 둘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다시 지나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둘러봤습니다. 국가 지정 보물인 연수전(延壽殿)과 가운루(駕雲樓)는 흔적도 없이 불타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폐사지(廢寺址)로 변한 겁니다. 고운사를 품은 등운산(騰雲山)이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연수전은 조선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牒)을 봉안하기 위해 1744년에 건립됐다고 합니다. 201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20년 국가유산 보물 제2078호로 승격되었습니다. 가운루는 계곡 바위를 초석(礎石) 삼아 물길 위에 기둥을 세운 팔작지붕 건물이었습니다. 198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작년 7월 역시 국가 보물로 승격되었지요. 두 보물 모두 안타깝게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습니다.
 
 
  “불상만 불타기 전날 간신히 옮겨”
 
  커다란 범종(梵鐘)만 뎅그러니 주저앉은 주변에 깨진 기왓장들이 흩어져 있는 게 보였습니다. 범종각도 전소(全燒)된 겁니다. 산골짜기에서 흐르던 계류(溪流)도 말라 비틀어져 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습니다.
 
  볼품없이 망가진 비극적 광경 앞에 기자와 같은 방문객들은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가지런히 두 손 모아 합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천년 고찰을 무너뜨렸습니까? 합장하며 고개 숙인 그들은 분명 마음으로 울고 있을 겁니다. 참회(慙悔)하고 있을 겁니다.
 

  비구(比丘)스님 두 분이 손가락으로 불탄 산을 가리키며 뒷짐을 지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절하게 아름다운 뒷모습에, 말을 걸기조차 미안했습니다. 한 스님이 뒤를 돌아보곤 다시 어딘가를 향해 손짓을 합니다. 별빛 대신 화염이 쏟아지던 그날 밤 이야기를 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나마 부처님 모신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무사했습니다. 명부전(冥府殿)과 삼성각(三聖閣)도 살아 있었습니다.
 
  “석조여래좌상이 있던 곳도 화마를 피할 수 없었지만, 불상만큼은 전날 승려들이 극적으로 옮긴 덕에 살아남았습니다.”
 
  기자를 맞은 스님 한 분이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목련은 피었습니다. 새하얀 목련이 고운사의 새까만 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방염포 입은 만휴정
 
만휴정은 국가문화유산 명승으로 지정된 누각이다. 방염포를 입고 화마를 피해 갔다.
  고운사에서 79번 국도로 차를 몰았습니다. 안동시 길안면에 있는 만휴정(晩休亭)을 보기 위해섭니다.
 
  불길이 산들을 할퀴고 간 자국이 생생했습니다. 국도 주변 산들 모두 시커멓게 불타 있고, 앙상한 도로만 굽이굽이 속살을 드러내며 허옇게 보였지요. 국도변 모든 숲과 산들이 제 색깔을 잃었습니다. 다시 914번 지방도로 빠졌더니 여기 나무들도 잿빛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풀들은 검게 그을렸고요. 불길이 바람 타고 흩어져 갈비(소나무 낙엽)마저 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나무들은 뼈대만 남아 마치 철골 구조물처럼 보였습니다.
 
  길안면 묵계리에 도착해 차를 세웠습니다. 버스가 한 대 서있었는데 승객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휴정은 2011년 8월 8일 국가문화유산 명승으로 지정된 누각이지요. 조선시대 문신 김계행(金係行·1431~1517년)이 만년을 보낸 곳입니다.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낸 그가 연산군 때 간신들의 미움을 사 낙향한 뒤 만휴정을 세울 당시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계곡 옆에 누각을 세운 건 타오르는 분노를 흘려 보내기 위해서였을까요? 절벽 위 너럭바위부터 떨어지는 24m 높이의 폭포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폐허가 된 매표소에 ‘산불 피해 국가유산 현장 보존 접근 금지. 위반 시 관련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내걸린 경고문을 지나쳐, 걸어서 만휴정 방향으로 올랐습니다. 아름답던 숲길은 흉측했습니다. 만휴정까지 이어진 전깃줄에 매달렸던 알전구들은 녹거나 깨져 산길을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바위 아래 버려진 소화기가 보였습니다. 다급했던 그날 밤(3월 25일)이 떠올랐습니다.
 
  저 멀리 만휴정이 보였습니다. 방염포를 입고 있더군요. 불길이 치솟던 그날, 도포에 갓을 쓴 김계행의 영혼이 만휴정을 찾아 불과 사투(死鬪)를 벌이기라도 한 걸까요? 방염포를 뒤집어쓰고 화마를 이긴 만휴정 앞에 큰절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나무다리 아래 시냇물은 태연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바위에 부딪혀 하얀 물거품을 내며 작은 물보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폭포 아래, 용이 승천했다고 해서 해서 용추(龍湫) 또는 호담(壺潭)이라 부르는 못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변 원림(園林)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상해 있었습니다. 국가 지정 명승인 숲이었는데, 불길이 얼마나 거셌는지 산의 갈비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탈길을 내려와 아랫마을을 지나칩니다. 집들도 오토바이도 경운기도 모두 불타 있었습니다. 아궁이에 덩그라니 걸린 커다란 쇠솥만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만휴정 맞은편 묵계서원(默溪書院)도 온전했습니다. 주변 나무는 더러 불탔고 만개한 벚꽃도 불기운에 시든 듯 보였지만, 고택(古宅)들이 불타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주변 흙길을 걸어 보는데, 이상하게도 마을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모두 어디로 떠난 걸까요?
 
  까마귀가 까~ 까~ 울었습니다. 길안천(吉安川) 주변에선 전혀 봄 기운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산들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습니다.
 
 
  “조상 뵐 낯이 없다는 생각밖에…”
 
1700년대 건물로 추정되는 오류헌을 지킨 김상돈·박지안씨 부부.
  이튿날 아침 일찍 안동시 임하면 오류헌(五柳軒) 고택을 찾았습니다. 오류헌으로 가는 길 곳곳도 전쟁터가 따로 없었습니다. 집이 내려앉고, 나무가 불탔으며, 주민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84호 오류헌 주인 김상돈(金相敦·67)·박지안(朴志案·66)씨 내외가 그날의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의성(義城)김씨 승지공파 14대 종손(宗孫)·종부(宗婦)입니다. 오류헌은 원래 안동 임동면 지례리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자 199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했습니다. 안채는 1700년대 건물로 추정되고 사랑채는 1920년에 크게 개축했다고 합니다. 안동이 불바다가 된 그날의 이야기에 빠져들며 상황을 재구(再構)해 봤습니다.
 
  “3월 25일 오후 5시가 넘어서는데, 불이 서쪽부터 동쪽으로 타들어 오는데 하늘이 검다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아마겟돈 같았어요. 길안(면)에서 불이 난 걸 보고 차를 몰아 집(오류헌)으로 돌아오자마자 대비를 했지요. 소방 호스로 대문이고 지붕이고 마루까지 흠뻑 물을 뿌렸어요. 얼마나 무섭던지…. 어서 대피하라는 재난문자가 계속 왔지만, 집 종손이 어디로 도망간단 말입니까? 이 집과 죽을 작정을 했어요. 날아오는 불덩이를 막느라고 대피할 생각도 못했지요. 조상 뵐 낯이 없다는 생각밖에….”(김상돈·박지안)
 
  “국가문화재인데 119에 전화를 걸어도 오지 않았어요. 소방차 한 대라도 와달라고 애원했는데…. 면 소재 학교 마당에 소방차 2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갔더니, 건물 구조하러 온 게 아니라 인명 구조하러 왔다는 거야. 그래서 불 끄러 안 간다? 불 안 끄는 소방차가 소방차냐고요.”(김)
 
 
  부부가 지켜 낸 오류헌 고택
 
  ―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게 이성적 판단이지요. 하늘에서 불똥이 떨어지는데, 여기 끄면 저기 날아오고, 저기 끄면 여기 날아오고…. 남편은 앞마당, 나는 뒷마당에서…. 저기 봐봐요, 우리 뒷집은 모두 불탔잖아요.”(박)
 
  그 말대로 이웃집은 전소(全燒)돼 있었습니다.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김씨 부부와 함께 불을 껐다는 경북인터넷방송 김준종 대표를 만났습니다.
 
  “오류헌 주변 집들은 죄다 전소됐으나 조상님들의 돌봄과 종손·종부님의 노력 덕에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집을 지켜 냈습니다. 마을은 전쟁터였어요. 옆집, 뒷집이 타들어 가는데 사투를 벌이며 아름다운 고택을 지켰어요. 정작 대피 문자를 받고 피신한 집들은 모두 불타고 말았어요. 소방 당국의 도움 없이 오류헌을 부부가 합심해 지켜 낸 것은 거의 기적입니다. 기적이라고요.”
 
  오류헌과 5분 거리의 국탄댁(菊灘宅)으로 갔습니다. 조선 영조 33년(1757)에 지은 국탄댁은 민속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된, 역시 의성김씨 종가와 관련 있는 고택이었습니다. 오류헌과 마찬가지로 임하댐 건설로 1988년 지금 자리로 옮겼지요. 길잡이로 함께 온 김상돈씨는 국탄댁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ㅁ자형 집 안채는 앞면 4칸, 옆면 3칸이고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 규모였어요. 대문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70cm 정도 높이의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세운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보이고, 사랑 마당은 매우 넓으며….”
 
  그러고는 한참 말문을 더 잇지 못했습니다. 이 국탄댁 옆집은 완전히 전소가 됐는데, 피신 못 한 노부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뒤늦게 불을 끄러 사람들이 왔을 때는 뼈만 남았다는 기가 막힌 사연이었습니다.
 
 
  부처님은 말이 없고…
 
안동 용담사 무량전 밖으로 피신한 금동보살좌상.
  굽이굽이 차를 몰아 길안면 금곡리에 위치한 용담사(龍潭寺)에 도착했습니다. 황학산(黃鶴山) 기슭에 위치한, 신라 문무왕(文武王·?~681년) 때 화엄화상(華嚴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사찰입니다. 한창 번창할 때는 승려들 공양을 위해 쌀 씻은 뜨물이 7km 떨어진 묵계의 만휴정까지 이어졌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용담사 무량전(無量殿) 부속건물과 금정암(金井庵) 화엄강당(華嚴講堂)도 불타 버렸습니다. 무너진 축대와 부서진 기왓장, 검게 그을린 흙, 대들보 역할을 하던 나무들이 불에 타 수북하게 쌓여 있더군요. 화엄강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었는데, 이 터는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 또는 아름다운 여인이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玉女織錦)’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변 황학산의 산세가 비범해 보였습니다. 산비탈에 압도될 정도였습니다. 자그만 돌멩이 하나가 굴러도 온 산이 구르는 듯한 웅장함이 느껴졌어요.
 
  용담사의 다른 부속건물은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고 댓돌 위 고무신과 운동화만 덩그렇게 놓여 있습니다.
 
  “계십니까? 스님, 계십니까?”
 
  불러 봤지만 스님도 맏상좌도 불목하니(절에서 밥짓고 물 긷는 일꾼)도 기척이 없었습니다. 무량전 앞을 걷다가 보니 금동보살좌상이 있었습니다. 지난 화재 때 급히 옮겼던 걸 다시 가져다 놓은 겁니다. 실눈을 뜬 말 없는 부처님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산 다 타는 데 5분도 안 걸렸다”
 
  다시 차를 몰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인 세덕사(世德祠)에 도착했습니다. 길안면 구수리에 있는 세덕사는 임진왜란 때 훈련대장을 지낸 탁순창(卓順昌·1495~1593년)이 6대조 경렴(景濂) 탁광무(卓光茂)와 5대조 탁신(卓愼)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99년(숙종 25)에 세웠습니다. 건물은 멀쩡했습니다. 산기슭과 맞닿은 사당 뒤편이 불에 검게 그을려 있을 뿐, 다행히 화마는 피해 갔나 봅니다.
 
  세덕사 바로 아랫집 주민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황망하게도 세덕사 아래 마을은 거의 불타 버렸습니다. 웅성웅성 대화를 나누는 주민들에게 다가가 얘기들을 들어 봤습니다.
 
  “우리 집, 요 집 빼고 다 탔니더.”
 
  ― 아이고.
 
  “어디서 오셨는데요?”
 
  ― 《월간조선》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피하고 난 다음에 늦게 소방차가 와서…. 여기 산 다 타는 데 5분도 안 걸렸습니다.”
 
  ― 그래도 소방차가 왔군요.
 
  “저기 산 밑자락까지 다 탔는데 이거(세덕사)라도 안 타서….”
 
  ― 천운이십니다. 올해 농사는 어떨 것 같습니까?
 
  “아이, 농사 올해 폐농입니다. 이 동네 사람 다 사과 농사를 짓는데 사과나무가 완전 불타 가지고…. 아까도 누가 와서 조사해 갔지만 사과나무가 전부 불을 먹어 가지고….”
 
  ― 누가 조사했는데요?
 
  “안동시하고, 보험회사도 오고….”
 
  ― 아이고, 힘내십시오.
 
  “예, 예, 수고하세요.”
 
 
  “옷 한 벌 못 챙기고 나왔어요”
 
300년 역사를 지닌 경북 문화재자료 안동시 길안면 약계정.
  차를 몰고 비좁은 산길을 올랐습니다. 맞은편에 차라도 오면 돌릴 수 없는 외길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여느 해 같으면 한창 아름다울 봄 산들이 처연하게 느껴졌습니다. 산 아래 집 마당에 호박을 심어 놓고 그 꽃을 보고 싶어 봄과 여름을 기다리는 서정을 더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불길이 거쳐간 가파른 산길이 서러웠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바위틈에 자란 소나무 밑둥치가 검게 그을렸습니다.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약계정(藥溪亭)에 도착했습니다. 정자는 폐허로 변해 있었습니다. 기왓장과 흙더미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약계정은 조선 후기 약계(藥溪) 권순기(權舜紀·1679~1746년)가 강학(講學)하던 정자입니다. 300년은 족히 된 고택이지요.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정면 4곳에만 원주(圓柱)를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집이었다는데, 안타깝게도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됐습니다.
 
  약계정이 있는 마을은 검박골이라고 하는데 안동권(權)씨 6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무너진 약계정 옆에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34살 청년 권빈씨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권씨는 불이 나던 그날(3월 25일)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손짓으로 산허리를 가리키며) 저기서 일을 하고 있는데 면사무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얼른 대피하라고. 얼마 후 이쪽에서 트럭 한 대가 오더니 경적을 마구 누르면서 도망가라고, 빨리 나오라고 해서 옷 한 벌 못 챙기고 나왔어요. 옆집 노인 두 분 모시고 바로.”
 
  약계정 바로 옆 권씨의 집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무너져 내려 있었습니다.
 
  “만휴정이나 약계정이나 똑같은 문화재 아닙니까. 여기 약계정엔 소방차 한 대도 안 왔어요.”
 
  그리고는 개 한 마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급히 나온다고 개를 묶어 놓은 채로 나왔는데… 죽었을 줄 알았는데 살았어요. 화상을 입어 몸이 벌겋게 다 익어 버렸어요.”
 
  ― 개 이름이 뭔가요?
 
  “이름이….”
 
  ― 이번 기회에 이름을 지어 주세요. 이름 지으면 전화 주세요.
 
  명함을 건네고 돌아왔는데 보름 지난 현재까지 전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기왓장과 돌무더기, 흙만 남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인 지산서당(위 작은 사진)과 지촌종택. ㅁ자형의 정침과 방앗간, 별묘, 곳간, 사당, 대문간이 있었다.
  계속 차를 몰아 안동 일원에 산재한 문화유산들을 더 둘러보았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인 임호서당(臨湖書堂)은 일부 소실됐습니다. 100년 전인 1921년 지어진 건물인데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년)을 비롯해 운천(雲川) 김용(金涌·1557~1620년) 등의 항왜(抗倭) 정신을 기리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인 송석재사(松石齋舍)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타버렸습니다. 오직 기왓장과 돌무더기, 흙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송석재사는 대박(大朴) 김철(金澈·1569~1616년)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김철은 의성김씨 중 안동에 처음으로 정착한 김만근(金萬謹)의 4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안동 지역을 지켜 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하지요. 조선 중기에 세운 이 건물은 제사를 지내는 방인 정침(正寢)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을 두고 앞쪽으로 5칸의 누각을 둔 ㅁ자형 구조였는데 다시는 이 고택을 꿈에서조차 볼 수 없게 됐습니다. 문을 여닫을 때 들리던 돌쩌귀 소리도 영원히 추억으로만 남았습니다.
 
  안동에서 영덕 방면으로 국도 34호선을 따라가다가 20km쯤에서 우측 수곡교(水谷橋)를 건너서, 동남쪽으로 12km가량 비탈을 타고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길을 따라가면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들인 지산서당(芝山書堂)과 지촌종택(芝村宗宅)이 나옵니다. 흔히 지례예술촌이라고 알려진 곳입니다.
 
  지산서당은 의성김씨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1623~1695년)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후손과 고을 선비들이 세운, 220년 된 서당입니다. 지촌종택은 김방걸의 가옥입니다. 1663년에 건립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30년에 재건했다고 합니다. ㅁ자형의 정침과 방앗간, 별묘(別廟), 곳간, 사당, 대문간은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습니다. 전소된 겁니다. 이 광경을 볼라치면 아무리 감각이 둔한 사람도 눈물이 터져나올 겁니다. 임하댐을 끼고 가장 안쪽 자리, 높은 산골짜기에 터를 잡은 이곳은 이제 영영 세월 속에 잊히겠지요.
 
 
  “가보처럼 내려온 촛대라도 찾았으면…”
 
대한민국 명승 제2호로 지정된 안동 임하면 개호송 숲. 산불로 솔숲이 누렇게 변했다.
  대를 이어 이곳을 지켜 온 김수형(金秀炯)씨를 만났습니다.
 
  “서당과 종택은 이 산골짜기의 가장 끝자락에 있어요. 안동시내에 살다가 2017년 이곳으로 왔는데 그사이 산불이 두 번 났습니다. 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기에 임동면 쪽에서 산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었습니다.
 
  그날(3월 25일) 할아버지 제사여서 음식을 준비하다가 하늘을 보니 심상치 않았어요. 바람 세기를 보니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죠. 동네 주민이 전화를 걸어 와 빨리 대피하라고 하길래 그 길로 집을 나섰지요. 집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현판도 있고, 귀한 병풍, 서책이고 뭐고 죄다…. 저 잔해 속에서 집안 가보(家寶)처럼 내려온 촛대라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곤 한숨을 내쉬면서 보탰습니다.
 
  “늦게 대피하던 아랫집 두 부부는 끝내…. 자욱한 산불 연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몇 번이고 산길 벼랑 끝으로 떨어질 뻔하다가 도랑에 처박혀 가지고….”
 
  김수형씨와 헤어져 다시 차를 몰아 임하면 천전리 백운정(白雲亭)과 개호송(開湖松) 숲 일대를 둘러보았습니다. 의성김씨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씨족 촌락인 ‘내앞마을’ 앞 개호송 숲은 낙동강의 제1지류인 반변천(半邊川)과 어우러져 뛰어난 절경을 자아내는 경승지였습니다. 대한민국 명승 제2호로 지정됐지요. 고고한 자태의 소나무가 완만한 모래사장 곁에 똬리를 틀고 세월을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그렇게 아름답고 유연한 자태를 지닌 소나무를 다시 못 봤습니다. 그러나 개호송 숲도 화마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가득한 송진 내음 속 송뢰(松籟) 울던 솔숲은 검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소가 누워 되새김질하는 ‘와우(臥牛)’형 솔숲, 이 천변 숲이 다시 살아날지는 시간이 더 지나 봐야 알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강 건너 백운정 쪽으론 불길이 번지지 않았더군요.
 
 
  기왓장만 남은 만세루
 
청송 보광사의 만세루는 600여 년 된 2층 누각이다. 경북 유형문화유산이다. 작은 사진은 불타기 전 모습.
  태백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가는 청송군은 동쪽으로 930m의 태행산과 720m의 주왕산 같은 산이 솟아 영덕군과 경계를 이루는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푸른 솔’ 청송(靑松) 이름 그대로 공해에 찌들지 않은 깨끗한 산촌 이미지가 강하죠. 어쩌면 지금도 산비탈을 일구어 고추나 담배를 심는 화전민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조선 500년에 걸쳐 세력을 떨쳤던 권문세가인 청송심(沈)씨의 관향(貫鄕)이기도 합니다.
 
  청송 역시 산불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청송심씨 시조 묘역 가까운 보광사(普光寺)를 찾아가 봤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인 보광사 만세루(萬歲樓)가 서있던 자리엔 기왓장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조 건물은 불타 사라졌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었더군요. 만세루는 조선 세종이 부사(府使) 하담(荷擔)에게 명해 건립했다고 합니다. 하담은 집현전 학사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명인 하위지(河緯地)의 아버지입니다. 만세루는 세종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친정인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沈洪孚)의 묘재각(墓齋閣)이기도 했습니다. 발음하기도 사랑스러운 ‘겹처마 맞배지붕’은 이제 추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무너진 잔해 앞에서 보광사 주지 무구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청송군민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만세루에 올라 봤을 겁니다. 만세루에 관한 추억 하나씩은 갖고 있어요. 모두들 안타까워 합니다.
 
  불나던 그날 소방차 한 대만 보내 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했지요. 막 불이 벌겋게 타들어 오는데, 전각에 모신 부처님 세 분만 간신히 모시고 피신했는데… 그때 정말 남아서 불을 껐어야 했을까요?”
 
 
  “그렇게 소방차 한 대 보내 달라 했건만…”
 
  ― 저기 소화전이 보이는데 불이 났을 때 문제가 있었나요?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과부하가 걸려서 물을 쓸 수 없었어요. 불길은 얼마나 센지, 바람은 또 얼마나 거센지. 아름다운 건물이, 정말 아름다운 600년 누각이 없어져 안타까운데….”
 
  무구스님의 말이 오랜 여운을 남깁니다.
 
  “정말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면, 한번 잃으면 다신 문화유산을 되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면, 저 불길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방차를 보내 사투를 벌였을 겁니다. 군청 문화재 담당자들에게도 소방차를 그렇게 보내 달라 했건만….”
 

  만세루와 거의 맞닿은 보광사 극락전은 피해를 입지 않았더군요. 한 건물은 전소됐는데 그 뒤 극락전은 멀쩡하니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갈증이 나서 그 유명한 청송 달기약수를 찾았습니다. 바위틈 버드나무를 뽑아 내자 가스와 함께 물줄기가 솟아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전하는 달기약수는 청송의 자랑입니다. 영계에다 옻나무 껍질을 넣고 약수로 삶은 옻닭은 고장 별미입니다.
 
  그러나 약수가 있어야 할 약수촌은 참혹했습니다. 3년 묵은 체증까지도 뚫리게 한다는 약수 주변 식당들이 모조리 불탔습니다.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한 광경에 기가 막혀 말문이 트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모조리 불탈 수가 있을까요? 그래도 약수는 나오지 않을까 싶어 우물터를 찾아가 봤습니다. 바가지가 불에 타 떠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불에 덴 흰둥이 진돗개는 짖어 대고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인 청송 파천면 병보재사. 1830년대 건물이다. 작은 사진은 불타기 전 모습.
  청송 소재 문화재들을 이곳저곳 둘러보았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이 결정되는 순간을 승용차 라디오로 들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인 청송 파천면 신기리 기곡재사(崎谷齋舍) 앞에서였습니다. 기곡재사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시조이며 퇴계 이황(李滉)의 6대조인 이석(李碩)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합니다.
 
  소실, 중건, 이건을 거듭한 끝에 1851년 지금 자리에 정착했다는 이 기곡재사도 전소돼 있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이지요.
 
  다시 차를 몰아 파천면 중평리 병보재사(丙甫齋舍)로 향했습니다. 2005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이 건물도 잿더미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그 어느 것 하나 건질 게 없었습니다. 의성김씨 청계공 김진(金璡)의 7대손인 김성탁(金聖鐸·1684~1747년)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1830년대 건물이라는 안내판만 쓸쓸히 남아 있었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며 근처 서벽고택(棲碧古宅)과 사남고택(泗南古宅)으로 향했습니다. 두 고택 모두 국가지정 민속문화유산이었습니다. 사남고택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927년)의 31세손이 1700년대에 지었다고 합니다. 경북 북부 지방의 전통가옥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ㅁ자형 가옥의 자취를 눈으로 훑으며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전소돼 폐허로 변해 버린 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놀랍게도, 바로 옆 서벽고택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두 고택 사이에 있던 마을 이장 집은 완전히 불타 있었습니다. 불에 덴 흰둥이 개가 기자를 향해 뭐라 뭐라 짖었습니다. 그날 얼마나 짖었을지 아직도 목소리가 쉬어 있었습니다. 사남고택에 살던 평산신씨(平山申氏) 후손 신응석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 불은 처음 봤어요”
 
1700년대에 건립된 사남고택은 국가지정 민속문화유산이다. 작은 사진은 불타기 전 모습.
  “그런 불은 처음 봤어요. 반딧불 같은 게 뭉티기(뭉치)로 돌아다니면서 퍽퍽 불을 질러 대더군요. 소화기로 불을 끄려는데 태풍이, 태풍 같은 바람이 무지하게 몰아쳤어. 불길이 마구 앞으로 오고 이러니까 연기도 자욱하고 숨도 못 쉬겠고… 그냥 도망쳐 나왔지요.”
 
  ― 화재경보기는 작동했나요?
 
  “경보기가 막 울리는데, 평소 같으면 5분, 10분이면 딱 오거든.”
 
  ― 뭐가요?
 
  “소방차가. 그런데 그날은 청송 전체가 불이 나서 그런지….”
 
  ― 사남고택 안에 다른 유물은 없었나요?
 
  “안방에 가문에 내려오는 족자(簇子)도 있고 장(欌)도 있었지만 꺼낼 수 없었어요.”
 
  ― 다친 사람은 없고요?
 
  “내가 나오다가 넘어져 가지고 허벅지를 다쳐서 파스를 붙였는데, 이제 좀 걸을 만하네.”
 
  ― 앞으로 농사는 어떻게 지을 생각이신가요?
 
  “저는 농사를 짓지는 않습니다. 화가입니다. 6년 전에 고향에 내려왔지요. 그간 그려 놓은 그림이랑 화구도 모두 타버렸지요.”
 
  ― 아이고,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죠.”
 
 
  ‘옛것이 문득 새로워 보이는’ 기쁨도 사라져
 
  경북에서도 가장 유서 깊다는 고장들을 둘러보고 돌아왔습니다. 골골 산중에, 진입로 비탈길이며 꺾어드는 산맥 줄기 아래 자리했던 문화유산들이 잿더미가 돼버렸거나 반파된 모습을 눈으로 보고야 말았습니다. 호방한 기상으로 산천을 밝히던 절집과 고택들은 허물어졌거나 뼈대만 앙상했습니다. 유산들을 수호하던 아름드리 나무들도 함께 재로 변했습니다. 철 따라 옷 갈아입던 나무와 숲을 몇십 년이나 지나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문화유산을 지키지 못하는 후손은 과거와 절연한 것이고, 그 벌로 미래와도 절연될지 모릅니다. ‘어느 날 옛것이 문득 새로워 보이는’ 개안(開眼)의 기쁨도 더는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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