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재인 대통령 시대 - 역대 대통령들에게 배워라

최규하의 ‘후임자를 위한 침묵’

“재임 중 행위에 대한 증언은 삼권분립에 영향”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공직자로서 매너가 되었고, 사심(私心)이 없고, 청렴결백… 일본처럼 안정된 나라 같으면
    총리도 할 수 있는 사람”(송인상 전 재무부 장관)
⊙ 12·12사태 당시 “관례가 어쨌든 나는 법에 규정된 절차대로 하려고 하니 국방장관을 찾아오라”며
    9시간30분 버텨
⊙ 12·12사태 및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거부는 ‘대통령직(職)에 대한 존중과 후임자에 대한 배려’로
    볼 수 있어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96년 11월 14일 12·12 및 5·17 재판과 관련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증언을 거부했다.
  10・26사태 이후 8개월 동안 대통령으로 재직했던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하 최규하)은 대한민국 현대사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막간극에 잠깐 얼굴을 내밀었던 조연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최규하는 외무관료 출신이다. 일제(日帝)시대에 도쿄고등사범학교를 나와 만주국의 공무원 양성기관인 대동학원(大同學院)을 나왔다. 해방 후 최규하는 3개월 정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용태 전 공화당 원내총무가 이 시절 그의 제자다.
 
  1946년 1월 최규하는 미(美)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 건국 후에는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외무관료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사심 없는 공직자
 
  그와 함께 일했던 상사(上司)들은 그를 ‘건국 후 최고의 관료 중 하나’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와 함께 ECAPE(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에 참석했던 송인상 전 재무부 장관은 1960년대 말 방송에서 “지난 20년 동안 출중한 관리가 3명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최규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규하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송 전 장관에게 “최규하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냐?”고 묻자, 송 전 장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공직자로서 매너가 되었고, 사심(私心)이 없고, 청렴결백한 사람이다. 일본처럼 안정된 나라 같으면 관료의 최고봉인 사무차관은 물론이고 총리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와 함께 일했던 유태하 전 주일대표부 대표도 “최규하는 정말 사심이 없는 사람이다. 다들 자리를 기웃거리는데 최규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뭘 시켜도 잘 해낸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반면에 최규하는 외무부 후배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외무부의 3대 거물은 최규하・김용식(전 외무부・국토통일원 장관, 주미대사), 김동조(주일・주미대사) 등이었다. 김용식・김동조 전 장관은 자기 이름을 딴 ‘사단’이 있었지만, 최규하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최규하는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썼지만, “사람이 정(情)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외무부에는 최규하, 김용식, 김동조 세 사람에 대한 이런저런 농담들이 많이 돌았다.
 
  “돌다리를 건널 때 김동조는 그냥 건너간다. 김용식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건너간다. 최규하는 남이 건너는 걸 본 후에도 엎드려서 기어서 건너간다.”
 
  “길에 돈이 떨어져 있으면 최규하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멀찍이 돌아서 간다. 김용식은 일단 본 후 10여 발자국쯤 갔다가 되돌아와서 ‘이게 뭘까’ 하면서 슬그머니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는다. 김동조는 돈을 발견한 즉시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총리 시절 ‘외교총리’ 역할
 
최규하 전 대통령은 외무부 장관 시절 1·21사태 후 사이러스 밴스 미국 대통령 특사(왼쪽)와 담판, 1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받아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에는 최규하를 몰랐다. 군사정부 시절 누군가 그를 추천했지만 자유당 말기에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는 말에 “혁명정부가 어떻게 자유당 때 사람을 쓰느냐?”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이동원 외무장관 시절이던 1964년에야 그는 말레이시아 대사로 나갈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면서 말레이시아를 방문했다. 연일 계속되는 공식 오찬・만찬에 진력이 난 박 대통령은 “한국식으로 술이나 한 잔 하고 싶다”며 말레이시아 대사관저를 찾아갔다. 다음날 박 대통령은 이동원 외무부 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 대사 말이야. 그런 애국자가 없더라고. 글쎄 그 친구 집에 갔더니 술이랑 안주가 몽땅 국산이야. 막걸리에다 시큼한 김치에다…. 게다가 날 접대한답시고 그 키 큰 친구가 고무신을 신은 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걸 보니 꽤나 부지런해 보여….”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든 최규하는 이듬해 6월 외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4년간 재임했다. 1968년 1・21사태 후에는 사이러스 밴스 미국 특사와 협상을 벌여 1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따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최규하와 밴스가 협상을 벌이는 동안 20여 잔의 커피가 들어갔고, 재떨이를 6차례나 바꾸었다. 밴스는 한국을 떠나면서 주한미국대사관 직원들에게 “최 장관의 애국심과 쇠고집, 인내력, 그리고 그가 계속 뿜어대는 담배연기에 손을 들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1976년 최규하는 김종필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최규하가 총리로 발탁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후 15년 동안 박정희 대통령 측근이나 혁명 주체들 중에서 부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나? 김종필 총리도 금전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얘기들이 끊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규하처럼 청렴결백한 사람을 총리로 앉혀서 이완된 공직사회의 분위기를 다시 잡으려 했던 것 같다.”
 
  최규하를 오래 모셨던 정동렬 전 의전수석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최규하를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최 총리, 1961년에 권력을 잡은 후, 내정(內政)은 내가 다 장악할 수 있었소. 경제도 발전시켰고, 산림녹화도 했고, 내가 하려고 한 일은 다 내 뜻대로 했소. 그런데 외교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려. 이제 나는 외교에서는 손을 뗄 테니, 당신이 외무부 장관과 의논해서 잘 처리해 주시오.”
 
  이 말을 기자에게 해준 이정빈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사람들은 흔히 총리 시절의 최규하 대통령을 아무 실권이 없었던 ‘대독(代讀)총리’로 기억하고 있지만, 유신(維新)체제하의 박정희 대통령 아래서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박 대통령 말기에 ‘외교총리’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동진 외무부 장관이 5년간 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최장수 외교수장(首長)’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 아래서였다”고 말했다.
 
 
  대통령권한대행에서 대통령으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됐다. 외교관 출신 총리는 황망 중에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다. 아무도 18년 동안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대통령의 자리를 메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재야(在野) 세력 일각의 반대가 있었지만, 대통령권한대행이던 최규하가 과도기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형성됐다.
 
  최규하는 11월 17일 발표한 특별담화에서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빠른 기간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해 12월 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는 “10・26 이후의 난국에 대해서 순시(瞬時)라도 헌정이 중단됨이 없이 대한민국의 계속성을 견지하고 국가의 보위와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면서 안정과 질서 속에 평화적 정부 이양을 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는 것이 본인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12월 6일 취임사에서는 자신이 이끌 정부를 ‘국난 타개를 위한 위기관리 정부’라고 정의(定義)했다.
 
 
  “국방장관을 찾아오라”
 
  최규하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12・12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측에서는 ‘10・26사태와 관련한 정당한 수사’였다고 주장하고, 반대 측에서는 ‘하극상(下剋上)’ 내지 ‘군권(軍權) 장악을 위한 군사반란’ ‘사실상의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6시30분 총리 공관으로 들어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에 대해 보고하자 최규하는 “국방부 장관은 알고 있느냐?”면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불러오라고 했다. 하지만 노재현 장관은 장관 공관 인근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들리자 잠적해 버린 뒤였다. 정승화 참모총장을 지지하는 세력과 긴장이 고조되자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전두환 측 장성 5명은 9시30분경 총리 공관으로 들어가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이들은 “과거 관례상 수사책임을 맡고 있는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재가를 받는 것이 지금까지의 수사 관례”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최규하는 “관례가 어쨌든 나는 법에 규정된 절차대로 하려고 하니 국방장관을 찾아오라”고 했다. 결국 최규하는 노재현 국방장관이 나타난 다음날 새벽 5시경에야 정승화 총장 체포를 재가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측에서는 당시 대통령에 대한 겁박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당시 일단의 신군부 장성들의 ‘체포 사인 요구’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국방장관의 허가부터 받아오라’며 밤새워 버틴 용기와 대범함은 두고두고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봄’
 
1980년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한 전두환 장군에게 계급장을 달아주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 11일 후 최 대통령은 하야했다.
  12・12사태 이후 권력은 급속도로 신군부로 쏠리기 시작했다. 신군부 측에서는 그것이 자신들이 의도했던 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그것은 진공(眞空)상태를 용납하지 않는 권력의 속성일 것이다.
 
  최규하를 흔든 것은 신군부뿐이 아니었다. ‘서울의 봄’ 상황에서 대권을 노리고 있던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씨도 ‘최규하 대통령’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80년 들어 정부가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하자 최규하가 3김씨 중 한 명이나 혹은 신군부를 비롯한 경북 세력과 손을 잡고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해서 외치(外治)를 담당하는 대통령을 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3김씨는 “빨리 개헌을 하고 물러나라. 엉뚱한 생각을 하면 재미없다”는 신호를 계속 보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유혈사태는 최규하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광주사태 후 ‘계엄업무에 대한 대통령의 자문기관’으로 설립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국민들의 눈에는 ‘군사혁명위원회’로 비쳤다.
 
  결국 1980년 8월 16일, 최규하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최 대통령은 대(對)국민성명에서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헌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하야(下野)가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에 의한 것이고, ‘합헌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군부, 즉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겁박에 의한 ‘강제하야’라고 생각했다.
 
 
  침묵
 
  전두환 시대가 끝나자 12・12사태와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최규하에게도 입을 열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1988년 광주사태 등 5공 청산 청문회가 열리자 최규하는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라는 동행명령장을 받았다. 최규하는 이를 거부했다. 그를 찾아간 언론인이나 지인(知人)들이 그때의 일을 물어보면, “그런 얘기 그만하자”며 말을 돌렸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우며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신군부 핵심인사들을 법정에 세웠다. 최규하도 1996년 11월 14일 12・12 및 5・17 재판과 관련해 서울고등법원에 증인으로 불려 나갔다. 최규하는 증인선서에 앞서 입장발표를 통해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에 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후일 일일이 소명이나 증언을 하는 것은 국가원수의 지위와 삼권분립상의 독립성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며 “일시적 비난의 화살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선서나 증언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최규하는 인정신문에만 대답했을 뿐,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후일 최규하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전두환은 최규하에게 편지를 보냈다. 최규하의 사임과 자신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이 최규하 본인의 의사에 의한 것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전모를 당당히 밝혀달라는 내용이었다. 전두환은 그에 대한 답신을 받지 못했다. 그 얼마 후인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는 세상을 떠났다.
 
  최규하는 모범적인 공직자였지 위기시의 리더는 아니었다. ‘성공한 대통령’도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공직생활 중 보여줬던 ▲법과 절차를 중시하는 자세 ▲공평무사한 인사 ▲청렴결백함 ▲끈질긴 외교협상력 등은 대통령에게도 요구되는 덕목들이다. 그가 격동기의 역사에 대해 침묵하고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리가 많다. 하지만 많은 역대 대통령이 자신의 전임자 혹은 후임자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하는 소리를 했다가 모양새를 구겼다. 때문에 최규하의 침묵은 오히려 ‘대한민국 대통령직(職)’에 대한 존중과 후임자들에 대한 배려로 여겨지기도 한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711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정기구독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