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이 통일을 운위(云謂)하는 이유’를 언급하며, 북한 정권이 말하는 통일의 함정, 체제의 모순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관용어처럼 굳어진 ‘종북좌파세력(從北左派勢力)’과 유사한 ‘친공동조세력(親共同調勢力)’이란 표현을 당시 그가 썼다는 점이다.
⊙ ‘반공교육 교재’ ‘주체사상 해독제’ 연상시키는 정세현 전 장관의 과거 글들
⊙ “北의 통일관은 先남한의 폭력혁명·後적화통일… 한반도 적화 전략 목표는 不變”
⊙ “전두환 정권, 통일 핑계 삼아 안보 장사”라고 했던 그, 정작 1·12제의는 ‘勇斷’이라고 표현
⊙ “김일성·김정일 왕조 유지시키려는 욕구가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는 기대할 수 없는 일”
⊙ 두 시간 가까운 전화통화에서 자신의 이념관이 바뀐 이유 고백… ‘北核 문제’ 가지고 舌戰도
⊙ 정세현 전 장관을 둘러싼 ‘이상한’ 소문, 그 眞相을 털어놓다
⊙ ‘반공교육 교재’ ‘주체사상 해독제’ 연상시키는 정세현 전 장관의 과거 글들
⊙ “北의 통일관은 先남한의 폭력혁명·後적화통일… 한반도 적화 전략 목표는 不變”
⊙ “전두환 정권, 통일 핑계 삼아 안보 장사”라고 했던 그, 정작 1·12제의는 ‘勇斷’이라고 표현
⊙ “김일성·김정일 왕조 유지시키려는 욕구가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는 기대할 수 없는 일”
⊙ 두 시간 가까운 전화통화에서 자신의 이념관이 바뀐 이유 고백… ‘北核 문제’ 가지고 舌戰도
⊙ 정세현 전 장관을 둘러싼 ‘이상한’ 소문, 그 眞相을 털어놓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전 장관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겨냥해 ‘재수 없는 사람’ ‘백인 기병대장’이라고 비난한 정세현(丁世鉉・74) 전 통일부 장관은 어떤 인물일까. 북한 고위 당국자의 발언이란 착각이 들 만큼 맹비난을 쏟아낸 정 전 장관의 이념관은 ‘대북(對北) 유화, 대미(對美) 강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 전 장관의 대북관은 지난 2월, 2차 미북(美北)정상회담 당시 극명하게 드러났다. 회담 참석차 베트남 하노이를 향하던 중, 잠시 기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는 북한 김정은을 정 전 장관은 “인간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옆에서 재떨이를 받치고 있던 동생 김여정에 대해선 “자연스럽다”고 평가했다.
북한 독재자 일가(一家)는 다소 긍정적으로 보는 데 반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대해선 비판 일색이다. 북한과 담을 쌓고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다. 한반도 문제의 핵심 쟁점인 북핵(北核)에 있어서도 그는 “북한 핵을 방치하면서 사실상 핵 능력 고도화에 눈을 감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북한 핵 강화의 일등 공신”(2016년 10월 6일 ‘프레시안’ 보도)이라고 비판했다. 사실상 ‘북한=선(善), 대한민국・미국=악(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한반도 현안에 접근하는 셈이다.
기자는 정 전 장관이 1980년대 초중반에 쓴 빛바랜 기고문과 논문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 독후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세현 전 장관이 당시 쓴 글은 ‘반공(反共)교육 교재’ ‘주체사상 해독제’를 연상시켰다. 정 전 장관을 ‘반공주의자’로 분류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의 글은 북한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김일성·김정일은 그에게 있어 ‘반(反)통일·수구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이 정 전 장관의 글을 읽었다면, 그에게 ‘수구・냉전・반동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을지 모른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 세력 중에는 구(舊)소련의 붕괴와 북한 체제의 모순에 환멸을 느껴 전향(轉向), 이념관이 바뀐 사례는 많다. 하지만 정 전 장관처럼 ‘정반대의 사례’는 매우 희귀한 편이다.
정세현 전 장관의 과거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탁월한 문장력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문장은 적확한 단어들로 구성돼 있었다. 통상 학술논문이나 기고문은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정 전 장관의 글은 논리 전개가 빼어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적재적소에 통계를 인용해 정확성을 높인 것도 특징이었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정세현 전 장관의 ‘서재’로 떠나보자. 그곳에서 지금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원고지’를 메웠던 정 전 장관을 만나보자.
‘주사파 운동권’이 說破해온 북측 논리 반박하는 듯
정세현 전 장관은 평화통일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던 1981년 10월 《고시계》에 〈북한의 통일전략 구도와 통일방안 변천 과정〉이란 글을 썼다. 이 글은 “북한의 신문과 방송은 한국 사회가 ‘외국군의 강점하에 있으며 경제는 식민지 예속 경제로서 모든 이윤을 착취당하기 때문에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악선전(惡宣傳)을 되풀이하고 있다”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의 통일관과 통일전략 구도는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터무니 없이 조작된 남한관 위에서 수립되고 전개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전제했다. 이어 “(북한 정권이) 대내(對內)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남한관을 조작하고 거기에서 다시 통일관과 통일전략 구도를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북한이 통일 운운하는 것은 허구에 찬 것이라고 단정할 수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북한이 선전하는 ‘평화’에 대한 정 전 장관의 인식이다. 그는 “북한이 말하는 ‘평화적’이란 공산주의자들끼리의 합작(合作)에 의한 방법을 뜻하는 것으로서 월맹이 월남의 베트콩과 합작 방법으로 남북을 통합시킨 것과 같은 유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합작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남북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남한 내에서 폭력적인 방법에 의해 인민정권(공산정권)이 서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말하는 ‘평화적인 통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 개념의 혼동이 없어야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통일관은 선(先)남한의 폭력혁명·후(後)적화통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한마디로 북한이 선전하는 통일과 평화가 허구임을 정 전 장관이 자인(自認)한 셈이다. 그는 북한 정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적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통일방안이라고 내놓는 대남(對南) 제의의 변천 과정을 보면 한국 측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즉 협력하고 협조해서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는 제의들만 되풀이해왔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수사학적으로는 평화를 위장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 안에는 공산주의 전략, 전술 이론에 입각한 함정을 파놓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이 설파(說破)해왔던 북측의 논리를 통렬하게 반박하는 듯해, 지금의 정 전 장관이 썼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반공교육 교재 연상시키는 내용
이 글에는 북한의 ‘조국통일 5대 강령’에 관한 기술도 있다. 김일성이 대외적으로 체제 선전을 하기 위해 내세운 게 5대 강령이다. 이 강령은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 ▲다방면에 걸친 합작과 교류 ▲대민족(大民族) 회의 소집 ▲고려연방제 실시 ▲단일 국호(國號)에 의한 유엔 가입으로 구성돼 있다. 정 전 장관은 이 중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①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
→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라는 주장의 요점은 미군 철수에 있었다.”
② 다방면에 걸친 합작과 교류
→ “다방면에 걸친 합작과 교류라는 주장에서 주목할 것은 합작이라는 말이다. 공산주의자들의 합작이 상대방의 약점을 극대화시키는 반면, 공산주의자들의 역량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전술이라는 것은 두 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국공합작(國共合作) 사례가 말해주고 있다.”
③ 대민족 회의 소집
→ “대민족 회의를 소집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북한은 ‘통일을 위한 대화는 당국자들만이 할 것이 아니라 전(全) 민족적 범위에서 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이는 통일 문제를 군중대회에서 결의하자는 것이며 선동에 의해서 공산측안(共産側案)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겠다는 저의(底意)에서 나온 것이다.”〉
‘5대 강령’ 역시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 전술에 불과하다는 게 정 전 장관 주장의 요지다. 그는 또 “북한의 선전 선동에 현혹됨이 없이 분석적으로 그들의 제의를 검토하면서 자유민주 통일만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할 수 있으며 민족 성원(成員) 전체에게 통일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신념을 키워나가야 한다”며 “이 길만이 북한의 적화통일 망상(妄想)을 분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반공교육 교재를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從北左派勢力’과 유사한 ‘親共同調勢力’이란 표현 쓰기도
같은 해 쓴 〈한국의 통일정책 전개 과정〉이란 글에서 정세현 전 장관은 “3·8 이북(以北)만의 공산기지를 건설하여 남한 적화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김일성의 적화 전략은 북한 사회를 남한 지역과는 엄청나게 다른 사회로 변질(變質)시키는 결의적인(결정적인-기자 註) 원인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김일성의 대남 적화 전략이 북한 사회를 망가트린 결정적 계기였다는 지적이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이 통일을 운위(云謂)하는 이유”를 언급하며 북한 정권이 말하는 통일의 함정, 체제의 모순을 통렬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관용어처럼 굳어진 ‘종북좌파세력(從北左派勢力)’과 유사한 ‘친공동조세력(親共同調勢力)’이란 표현을 당시 그가 썼다는 점이다. 그 내용 중 일부다.
〈첫째, 북한은 김일성 유일 독재체제의 유지와 그 세습을 목적으로 통일을 국호(國號)처럼 활용하고 있다. 무리한 정책 수행으로 내부 체제의 모순이 누적되고 정책 실패로 인한 주민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으나 “모든 것은 통일을 위해 참아야 한다”는 식으로 모순과 불만을 무마하고 나아가서는 더 많은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통일이라는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 북한은 남한 내부에 ‘친공동조세력’을 부식(扶植)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대남 적화 폭력혁명 노선을 은폐하기 위하여 통일이라는 구호를 적극적으로 외쳐대고 있다. 북한은 걸핏하면 ‘자주’ ‘왜세(倭勢) 배격’ ‘민족대단결’ 등의 구호를 통일과 결부시켜 논거하는데, 이를 민족주의 세력의 감정에 호소하여 그들을 기만·선동하고 나아가서 다 포섭하므로써(포섭함으로써-기자 註) 친공세력화하려는 의도가 담겨진 것이다.
셋째, 한국의 국제적 고립을 초래하기 위하여 통일지향세력을 가장(假裝)하는 것이다. 북한은 “국제사회에 대해서 한국은 분단고정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으나 북한은 자주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투의 모략선전(謀略宣傳)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 문제(분단의 배경, 남북 긴장도, 남북한의 통일정책의 내용 등)에 무지(無知)하거나 큰 관심이 없는 국가들-예컨대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한 모략이며 ‘반(反)제국주의·반(反)식민주의’ 등의 선전과 기만전술을 구사하여 그들을 ‘친공(親共)세력화’하려는 의도의 발로(發露)인 것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우리는 진정한 민족통일을 위해서 통일을 논의하는 데 반해 북한은 무력이나 폭력으로 남한지역을 점령하여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기본 전략 목표는 불변(不變)”이라고도 했다. 이어 “(북한은) 독재체제의 유지와 세습화를 위해서 또는, 대남적화 폭력혁명 역량을 강화하고 나아가서는 이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통일이라는 문제를 구호처럼 쓰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폭력혁명에 의한 적화와 그 이후의 남북합작에 의한 전(全) 한반도 공산화를 ‘평화적 방법’이라고 우기는 북한 이외에도 6·25와 같은 전면인 무력남침에 의한 적화전략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군사력을 계속 증강하는 한편, 주한미군 철수를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하는 것은 이른바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려는 것이다… 북한이 폭력사용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민족 성원 전체를 통일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고, 계급논리에 입각하여 공산당과 그에 동조하는 특정 계급만을 통일의 주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全 대통령의 1·12제의를 ‘勇斷’이라고 평가
정세현 전 장관은 《MB의 비용》(2015)이란 대담집에서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남북 화해 협력이 정권에 도움이 되지 않고, 국제적으로도 냉전 시기였기 때문에 통일을 핑계 삼아 안보장사를 했던 때”라고 비판했다. 전두환 정부의 통일정책을 냉담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 시절(1981) 쓴 이 글에는 전혀 다른 인식이 투영돼 있다. 정 전 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의 대북 대화 제의에 ‘역사적 의의’가 있고, ‘제5공화국의 용단(勇斷)’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전(全) 대통령은 1981년 1월 12일, 북측에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했다. 남북한 최고 당국자가 아무런 조건 없이 서울이나 평양에서 만나 허심탄회하게 한반도 통일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를 ‘1·12제의’라고 부른다.
그는 1·12제의에 대해 “일제 식민통치 기간과 맞먹는 분단 36년의 비극적인 민족사에 대한 반성 위에서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그 첫 번째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제 36년 암흑통치하에서도 민족의 회생을 되찾을 수 있었듯이 분단 36년 동안에 입은 민족적 상처를 극복하고 자주·민족·민주 국가로 통일하여 민족의 비극을 청산하자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어 “70년대 10년간에 있었던 남북대화 과정에 대한 실천적 비판 위에 80년대를 내다보는 시점에서 환기되었다는 점에서 그 두 번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며 “형식적 합의를 지양하고 단 한 가지의 합의라도 행동으로 입증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출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12 제의를 “제5공화국의 평화통일 의지를 표명한 용단”이라고 평가하기에 이른다. 이어지는 내용이다.
〈상호신뢰를 조성하기 위해서 남북한최고당국책임자가 상호방문을 하자는 1·12대화 제의는 실천적 의지의 결집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행동과 실천에 의한 상호신뢰의 조성과 이를 바탕으로 분단 조국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분단 36년 사상 초유의 일로써 제5공화국의 평화통일 의지를 용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단된 남북대화를 재개하여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고야 말겠다는 실천적 의지에 충만한 제의였기 때문에, 1·12대화 제의는 73개국으로부터 약 300여회에 달하는 지지와 찬양(보도·논평 형식)을 받았다.〉
《수용소 군도》 인용해 김일성 독재의 폭압성 지적
정세현 전 장관은 김일성 정권의 ‘우상화’와 ‘정통성’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1983년 쓴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이란 글에 그러한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이 글에서 정 전 장관은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 부재(不在)부터 짚는다. 그는 “소련에 의해 권좌에 앉게 된 김일성은 자신의 정통성 결여를 원천적으로 만회하기 위하여 해방 직후부터 6·25 직전까지 소련의 비호하에 북한 지역 내의 민통주의(民統主義) 세력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60~1970년대까지 이어진 김일성 정권의 숙청사를 언급하며 “북한의 정치사는 곧 ‘숙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김일성 1인 독재체제와 부자 세습을 위한 숙청이 계속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당·정·군 모든 면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는 김일성의 1인 독재체제를 밑에서 보필하는 것은 가족과 친척들”이라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다.
〈장남 김정일은 후계자로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고, 처(妻) 김성애는 여맹(女盟)위원장, 외조부의 재종제(再從弟) 강양욱은 국가부주석, 종매부(從妹夫) 박성철은 국가부주석 겸 정치국원, 종매(從妹) 김신숙은 사회과학원부원장, 김신숙의 남편 양형섭은 사회과학원장, 종매 김정숙은 직총(職總)부위원장, 김정숙의 남편 허담은 부총리 겸 외교부장, 조카 황장엽은 최고인민회의의장 직에 있는 실정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김일성 개인의 우상화와 가계 우상화를 통한 부자 세습”을 위해 ‘김일성 1인 독재체제’를 ‘족벌정치’로까지 발전시켰다는 취지의 주장도 했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 적용’한다는 미명하에 ‘주체사상’을 내세워 사회 전체의 잠재역량을 오히려 묻어버린 채 김일성 개인의 주체만을 따르고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지도(指導)를 최선의 것으로 여기도록 세뇌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결국 “그러한 공작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전(全) 사회를 병영화한 채 대외적으로 폐쇄성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런 예측도 덧붙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김일성 1인 독재와 부자 세습에 관련지어 유리한 것은 강화하고 불리한 것은 억제·저지시키려는 정책은 북한 사회의 문제점을 더욱 증대시켜 나갈 뿐이고, 나아가서는 북한 공산집단의 존재 이유 자체에 대한 부인현상(否認現像)을 유발시키고 말 것이다. 주체사상을 김일성 우상화 및 세습체제의 합리화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쓰므로써(씀으로써-기자 註) 북한 사회는 사실상 이에 저항하는 세력을 수용하는 ‘수용소 군도화’해가고 있다.〉
구(舊)소련 강제수용소의 잔인성을 전 세계에 고발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인용한 것으로 보아, 정 전 장관은 북한 체제를 사실상 소련에 버금가는 ‘폭압 체제’로 규정했던 것 같다. 이렇듯 혹독하게 북한 체제를 비판한 그이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北 경제의 낙후성, 공산주의 자체 때문”
정 전 장관은 북한 경제를 사실상 소련에 예속된 구조라고 봤다. 1982년 〈북한의 경제체제와 산업관리 실태〉란 글에서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의 경제관리 체계는 소련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며 북한 경제의 낙후성을 지적했다. 경제가 낙후한 원인 역시 ‘김일성・김정일 왕조적 공산주의 체제’에 있다고 분석했다. 관련 내용이다.
〈북한 경제가 낙후성을 면할 수 없는 것은 이처럼 공산주의 체제 자체 때문이며, 그것도 김일성・김정일 왕조적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려는 기도(企圖) 때문에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북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과감한 자본주의적 방식의 도입뿐이지만, 북한에 김일성・김정일 왕조를 유지시키려는 정치적 욕구가 존재하는 한 이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어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김일성과 김정일 체제의 종언(終焉)을 뜻한다”고도 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의 외교정책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1981년 쓴 〈북한의 외교정책〉이란 글에서 정 전 장관은 “국제정치와 외교를 계급투쟁 논리에 입각한 세계 적화혁명의 과정으로 보는 입장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세워진 외교정책의 기준 목표는 “미제를 국제적으로 철저히 고립시키고 조국통일과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촉진시키는 데 있다”고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북한의 대서방(對西方) 접근, 즉 대미(對美)·대일(對日) 관계 개선에 나서려는 시도를, 한국 정부가 경계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폈다.
〈대미·대일 관계의 기본 목표에서는 미일(美日)의 대(對)한국 지원을 약화시킨다는 정치적 성격이 크게 중시되는데, 이를 위해 북한은 통일 문제를 중심으로 위장평화공세 전술을 활용하고 있다. 즉 그들의 적화야욕이 노동당 규약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음은 은폐한 채 ‘고려연방제’ 등을 들고 나가 한국을 분단세력으로 몰아부치는(몰아붙이는-기자 註) 모략·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연방제 주장의 저의를 정확히 인식하고, 또 대외적으로 인식시킬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북한이 ‘적화야욕’을 기반으로 ‘계급투쟁 논리’에 입각한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고, 우리 스스로 이를 깨달아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다.
“1993년 ‘제네바 합의’ 이후 北 변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지금과 전혀 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그의 문헌(文獻)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정 전 장관의 입을 통해 그의 인식이 180도 바뀐 이유에 대해 들어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종(變種)인 북한의 세습체제를 사실상 옹호하고, 대한민국 정부와 동맹국 미국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정 전 장관과의 전화통화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예상대로 그는 모든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 다소 불리해 보이는 듯한 질문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념관이 바뀐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이) 경제 능력이 빵빵할 때는 고압적으로 나오고, 1980년 5·18 등 남한 내부의 국론 분열을 틈타 ‘고려연방제 하자’고 그러고…. 그게 안 되니까 1983년 랭군 사건(아웅산 테러)을 일으켰죠. 그거 면죄부 받으려고 (1984년에) 남북체육회담을 제안했고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이 점점 새로운 길을 찾는 거 같더라고요.
1993년 3월 북핵문제가 터지면서 통일연구원 부원장으로 있던 내가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갔습니다. 북미(北美) 간의 협상 과정을 보니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이유가 어떤 면에서는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을 받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더라고요.
사실 북한은 1992년 1월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을 받으려고 미군(美軍) 주둔을 전제로 북미(北美)수교를 요구한 적이 있었어요. 근데 미국 아버지 부시 정부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고는 부시 정부가 IAEA(국제원자력기구)를 시켜 북한의 핵시설을 특별사찰하게 했습니다. 불심검문처럼 ‘아무 데나 뒤지라’고 한 거죠.
그렇게 약 1년 동안 실랑이를 하더니 1993년 3월,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해버렸어요. 이때 미국 클린턴 정부가 북한의 의도를 알고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하면 3개월 이내에 수교 협상을 개시한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그렇게 이뤄진 게 바로 ‘제네바 합의’(1994년 10월 21일)입니다. 그때부터 북한이 상당히 유순해졌어요. 변한 겁니다.
1995년 8월 3차 쌀회담(공식명칭은 남북당국대표회담) 당시 내가 대통령 통일비서관 자격으로 중국 베이징에 갔어요. 그때 카운터파트로 나온 전금철(당시 정무원 책임참사)하고 북측 인사들을 보니까 ‘이 사람들 이젠 우리가 겁낼 것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냥 ‘그럭저럭 잘해보자. 먹을 거나 챙기자’ 하는 식으로 바뀐 거죠.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개최된 차관급 비료회담에서 북한 사람들 태도를 보니까 정말 처량할 정돕디다.
1970년대 내가 통일원에 들어가서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 1980년대 후반의 북한을 죽 보다 보니까 슬슬 대남(對南)전략에 변화가 오는 걸 감지할 수 있었어요. 그런 사람으로서 1990년대 들어서는 더 이상 (북한을) 비판할 일이 없어진 거예요. 비판이 의미 없고 북한의 대남전략이 고약해지지 않은 거예요. 말하자면 ‘위장평화공세’ 같은 걸 하지 않더라는 거죠. 쌀회담 때나 비료회담 때 겪어본 그 사람들의 표정으로 봐서는 ‘안 도와주면 안 되게’ 생겼더라니까요. ‘햇볕정책’이 드디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북한이 변화했기 때문에 대북정책도 변해야 되니, 나는 1970년대, 1980년대와는 다른 얘기를 하게 된 거죠.”
북핵 문제 둘러싸고 벌인 舌戰
그의 얘기를 듣고 있다 보니 북한의 변화는 언급하면서, 정작 중요한 ‘북핵 문제’는 간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핵은 현존하는 한반도 정세의 핵심 현안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과 나눈 문답이다.
― 말씀 중에는 북한 핵문제가 빠져 있습니다. 북핵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까.
“1992년 1월 21일 북한 김용순(전 노동당 국제비서·사망)이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차관에게 ‘(미북) 수교만 해주면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 통일되면 위상과 역할은 바뀌겠지만 미군은 조선반도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그때 내가 통일연구원 부원장 하고 있을 때인데, 외무부가 청와대에 보낸 외교전문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때 노재봉(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교수가 ‘이거 큰일 났어. 이렇게까지 됐는데 우리가 어떻게 역할 해야 하나. 빨리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어요. 그때 ‘(북한이) 진심일까’라고 생각했어요. 위장평화공세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계속 지켜보다가 미국이 하는 걸 보고 우리가 따라가야 한다’는 식으로 대책 보고서에 밝혔을 거예요.
미국이 그걸 거절하고, IAEA를 앞세워 북한을 상대로 특별사찰을 세게 하니까, (북한이) 반발하면서 NPT 탈퇴하고 핵개발하겠다고 겁주고 나섰죠. (북한에) 핵이 있었다고 하는 건 사실과 다른 얘기예요. 핵 문제는 처음부터 미국과 북한 사이의 문제예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피해자는 우립니다.”
― 우리가 북핵의 피해 당사자이지 않습니까. 근데 미북 간의 문제라고만 볼 수 있습니까.
“피해 당사자인데, 미국이 (한국을) 안 끼어주고 북한도 우릴 못 들어오게 하니까…. 북한은 우리를 못 들어오게 했어요. ‘핵 문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우리(북한)가 하자’고 해 처음부터 북미 문제로 갔던 겁니다. 지금도 그렇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중재자 노릇밖에 안 돼요.”
― 현실적 측면에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아니면 원칙적으로 그게 맞다고 보시는 겁니까.
“현실이 그렇고, 원칙이 그렇죠. 원칙이라는 것도 현실을 종합한 것이 원칙이지 별겁니까. 원칙이 하늘에 떠 있는 건 아니잖아요.”
― 장관님은 미국을 한반도 통일에 있어 장애물이라고 보십니까.
“그건 아니죠. 트럼프 대통령은 6·12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북미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를 시퀀싱(sequencing·순서대로)으로 풀어나가는 데까진 (북한과) 합의를 봤어요. 그런데 이행하는 과정에서 실무자들이 ‘선(先)비핵화’를 자꾸 들고나와 지금 완전히 판을 바꿔놓은 거 아닙니까. 미국의 소위 군산(軍産)복합체와도 연결돼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미국은) 통일이고 평화고 관계없이 (북한) 비핵화가 돼버리면 무기 시장이 없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 제 얘기는 북한의 비핵화는 노무현 정부 등 이른바 진보 정권도 늘 앞장서서 외치던 건데, 마치 ‘비핵화 때문에 미북회담이 결렬됐다’ 이런 시각은….
“그건 아니죠. 노무현 정부 때는 비핵화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문제가 없었으니까….”
― 그건 아닙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때는 ‘선비핵화’가 아니라 (2005년) 9·19공동성명이 노무현 정부 작품인데 그 1항이 비핵화예요. 2항이 북미·북일수교고, 3항이 경제지원이고, 4항이 정전체제·평화체제 전환, 5항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으로 이행입니다. 즉 비핵화를 해나가면서 북미수교도 하고 북일수교도 하고 경제지원도 하자는 순서로 잡았을 뿐입니다. ‘북한이 선비핵화해야만 우리가 남북 교류 협력도 한다’ 그거는 아니었어요.”
― 북한의 비핵화는 우리 정부가 남북대화 때마다 내세우던 중요 조건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거의 상실됐습니다.
“뭐가 상실돼. 하나도 진도가 안 나가니까…. 남북관계가 한 발이라도 앞서 나가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모멘텀’을 형성하고, 북미관계 개선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해 남북관계 개선으로 순서가 바뀌었을 뿐, 비핵화를 안 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죠. 선비핵화가 아니라 남북관계 선행론으로 바뀐 거예요. 그 선행론은 ‘비핵화를 끌어내기 위한 마중물 차원에서 한다’ 그렇게 문재인 정부의 로직(logic)이 바뀐 거죠.”
정 전 장관과의 통화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4·11 한미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시점에 이뤄졌다. 회담 전망에 대해 그는 성과를 낼 확률과 그렇지 못한 경우를 ‘반반’으로 봤다.
“연막을 세게 치는 거 보니 뭔가 있을 것 같아요”
회담 이후 ‘사실상 성과가 없는 회담이었다’는 비관적인 평가가 나왔다. 정세현 전 장관도 4월 12일 KBS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한미 간 전혀 접점을 찾지 못한 ‘워싱턴 노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한미정상회담이 끝난 후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의 설명을 보니 외교적인 수사(修辭)로 가득해 이번에 별로 성과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평가가) 박한 게 아니라 그게 현실”이라고도 했다. 정 전 장관은 한미관계에 균열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관련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이번에 문 대통령을, 그야말로 불러들이는 걸 보고 대북 메시지도 줄 가능성이 있지만 뭔가 지금 만나면 방위비 분담을 증액하라고 압력을 넣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또 그 이야기 관련해서 무기 판매도 좀 세게 할 것 같다 하는 짐작을 했었는데 그쪽으로 오히려 지금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미국은…. 우리가 1950년 7월 14일 6·25전쟁 발발 20일도 안 되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용감하게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미국에 넘겨놓은 탓에 지금까지 군사 문제에 관해서는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이 되어 있습니다. 운명이죠, 운명.〉 (출처: KBS 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 녹취록)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한테 은밀하게 쥐여준 메시지의 내용이 5월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결정하리라고 본다”고 예측했다. 사회자가 ‘그게 (무엇인지)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하자, 정 전 장관은 “있을 것 같아요. 연막을 세게 치는 거 보니까 뭔가 있을 것 같아요”라며 일말의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세현 전 장관과 B씨의 관계, 그리고 민화협
정세현 전 장관을 취재하던 중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정 전 장관과 친분이 두터운 학계 인사 A씨는 정 전 장관과 B씨(칼럼리스트)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증언했다. B씨가 2011년 모 대학에서 박사 논문 심사를 받을 때, 정세현 전 장관이 심사를 맡은 교수들에게 ‘B씨를 잘 좀 봐달라’며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논문 심사 교수 중 한 명이 서훈 현 국정원장이라는 게 A씨의 주장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B씨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 주요 직위에 임명될 수 있도록 정 전 장관이 민화협 고위 관계자에게 부탁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이로 인해 민화협 내에서 정세현 전 장관과 B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는 게 A씨의 주장이었다.
복수의 민화협 측 관계자들은, B씨가 대북 문제와 관련해 전문성이 없어 민화협 고위직에 걸맞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최근 민화협은 내부 인사 문제로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가는 등 내홍(內訌)을 겪은 바 있다. A씨와 민화협 관계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 전 장관이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리하게 B씨를 챙겼다는 뜻이 된다.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인 정 전 장관은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을 역임(2005.2〜2009.5) 한 바 있고, 현재 민화협 고문직을 맡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 전 장관과 나눈 문답이다.
― B씨 박사 논문 심사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2007년 내가 대학에 있을 때인데, B씨가 박사 논문 주제로 ‘북중(北中)관계’를 쓰겠다고 발표를 합디다. 그 발표를 듣고 나서 B씨한테 ‘중국어 할 줄 알아요’라고 했더니, ‘모르는데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중국어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북중관계 박사 논문을 써요. 중국 문헌을 읽지도 않고 어떻게 북중관계를 연구합니까’ 그랬죠. 그랬더니 B씨가 얼굴이 빨개지더라고요.
몇 년 뒤에 B씨가 나를 찾아왔어요. ‘다시 박사 논문을 써야 하는데 장관님이 지도교수를 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그런 건 내가 아니라 지도교수하고 상의를 해야지’라고 했죠. 그땐 내가 학계를 떠나 있어 지도교수 할 자격이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B씨는 ‘외부에서 조언이라도 좀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내가 B씨한테 면박을 준 적이 있어 어떤 면에서는 악연(惡緣) 아닙니까. 그런 미안한 사연이 있어 내가 (박사 논문 관련해) 코치를 좀 해줬죠.”
― 당시 B씨의 논문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서훈 국정원장한테 B씨를 잘 봐달라고 한 적 없습니까.
“서훈 교수한테 스스럼없이 얘기할 사이는 되죠. 뭐 ‘(심사를) 너무 까다롭게 하지는 마라’ 정도의 얘기는 할 수 있었겠지만 압력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압력이라는 건 누군가 내 말을 안 들었을 때 불이익을 줄 수 있어야 압력 아닙니까. 근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압력을 넣어요. 참 나…. 내가 박사 논문을 써본 경험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석·박사 논문을 지도하고 심사도 한 사람으로서 B씨에게 조언해준 게 답니다.”
― B씨가 민화협 고위직으로 가는 데에도 장관님의 역할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하하, 있었지. 근데 그 자리가 고위직? 천만에! 여러 사람이 하고 책상도 없고 월급 받는 자리도 아닌데.”
― 민화협 전·현직 관계자 얘기를 들어보니 그 일 때문에 장관님과 B씨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고 합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설명을 할게요. B씨가 박사 학위를 받은(2012년) 뒤에 저한테 ‘저도 북한 문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민화협이나 통일부 같은 데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요’라고 해요. 그때 나는 민화협을 떠난(2009년) 상태였죠. 잘 보세요. B씨는 박사가 된 후 이미 2~3년간 민화협 정책위원을 한 경험이 있어요.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북한 관련 박사 학위 소지자 아닙니까. 그쪽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달라요.”
― 민화협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B씨와도 관련 있는 것 아닙니까.
“김홍걸 의장이 취임 후 민화협 인사 문제와 관련해 나와 여러 가지로 상의를 많이 했습니다. 김 의장도 B씨를 잘 알아요. 그래서 내가 B씨를 김홍걸 의장을 통해 해당 직위에 추천했어요.”
― 전임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으로서 B씨를 추천한 셈이군요.
“그렇지.”
― 그럼 장관님과 B씨는 어떤 관계입니까.
“내 제1제자죠.”
이 밖에도 정세현 전 장관은 기사화할 수 없는, 자신과 관련한 다른 몇 가지 소문에 대해서도 시시비비를 정확히 밝혔다.⊙
정 전 장관의 대북관은 지난 2월, 2차 미북(美北)정상회담 당시 극명하게 드러났다. 회담 참석차 베트남 하노이를 향하던 중, 잠시 기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는 북한 김정은을 정 전 장관은 “인간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옆에서 재떨이를 받치고 있던 동생 김여정에 대해선 “자연스럽다”고 평가했다.
북한 독재자 일가(一家)는 다소 긍정적으로 보는 데 반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대해선 비판 일색이다. 북한과 담을 쌓고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다. 한반도 문제의 핵심 쟁점인 북핵(北核)에 있어서도 그는 “북한 핵을 방치하면서 사실상 핵 능력 고도화에 눈을 감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북한 핵 강화의 일등 공신”(2016년 10월 6일 ‘프레시안’ 보도)이라고 비판했다. 사실상 ‘북한=선(善), 대한민국・미국=악(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한반도 현안에 접근하는 셈이다.
기자는 정 전 장관이 1980년대 초중반에 쓴 빛바랜 기고문과 논문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 독후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세현 전 장관이 당시 쓴 글은 ‘반공(反共)교육 교재’ ‘주체사상 해독제’를 연상시켰다. 정 전 장관을 ‘반공주의자’로 분류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의 글은 북한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김일성·김정일은 그에게 있어 ‘반(反)통일·수구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이 정 전 장관의 글을 읽었다면, 그에게 ‘수구・냉전・반동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을지 모른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 세력 중에는 구(舊)소련의 붕괴와 북한 체제의 모순에 환멸을 느껴 전향(轉向), 이념관이 바뀐 사례는 많다. 하지만 정 전 장관처럼 ‘정반대의 사례’는 매우 희귀한 편이다.
정세현 전 장관의 과거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탁월한 문장력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문장은 적확한 단어들로 구성돼 있었다. 통상 학술논문이나 기고문은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정 전 장관의 글은 논리 전개가 빼어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적재적소에 통계를 인용해 정확성을 높인 것도 특징이었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정세현 전 장관의 ‘서재’로 떠나보자. 그곳에서 지금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원고지’를 메웠던 정 전 장관을 만나보자.
‘주사파 운동권’이 說破해온 북측 논리 반박하는 듯
![]()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1980년대 쓴 각종 논문과 기고문. |
정 전 장관은 “북한의 통일관과 통일전략 구도는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터무니 없이 조작된 남한관 위에서 수립되고 전개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전제했다. 이어 “(북한 정권이) 대내(對內)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남한관을 조작하고 거기에서 다시 통일관과 통일전략 구도를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북한이 통일 운운하는 것은 허구에 찬 것이라고 단정할 수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북한이 선전하는 ‘평화’에 대한 정 전 장관의 인식이다. 그는 “북한이 말하는 ‘평화적’이란 공산주의자들끼리의 합작(合作)에 의한 방법을 뜻하는 것으로서 월맹이 월남의 베트콩과 합작 방법으로 남북을 통합시킨 것과 같은 유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합작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남북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남한 내에서 폭력적인 방법에 의해 인민정권(공산정권)이 서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말하는 ‘평화적인 통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 개념의 혼동이 없어야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통일관은 선(先)남한의 폭력혁명·후(後)적화통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한마디로 북한이 선전하는 통일과 평화가 허구임을 정 전 장관이 자인(自認)한 셈이다. 그는 북한 정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적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통일방안이라고 내놓는 대남(對南) 제의의 변천 과정을 보면 한국 측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즉 협력하고 협조해서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는 제의들만 되풀이해왔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수사학적으로는 평화를 위장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 안에는 공산주의 전략, 전술 이론에 입각한 함정을 파놓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이 설파(說破)해왔던 북측의 논리를 통렬하게 반박하는 듯해, 지금의 정 전 장관이 썼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반공교육 교재 연상시키는 내용
![]() |
정세현 전 장관은 자신의 글에서 김일성 일가를 우상화하는 체제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했다. 사진은 북한 개성시에 위치한 김일성·김정일 동상. 사진=뉴시스 |
〈①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
→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라는 주장의 요점은 미군 철수에 있었다.”
② 다방면에 걸친 합작과 교류
→ “다방면에 걸친 합작과 교류라는 주장에서 주목할 것은 합작이라는 말이다. 공산주의자들의 합작이 상대방의 약점을 극대화시키는 반면, 공산주의자들의 역량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전술이라는 것은 두 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국공합작(國共合作) 사례가 말해주고 있다.”
③ 대민족 회의 소집
→ “대민족 회의를 소집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북한은 ‘통일을 위한 대화는 당국자들만이 할 것이 아니라 전(全) 민족적 범위에서 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이는 통일 문제를 군중대회에서 결의하자는 것이며 선동에 의해서 공산측안(共産側案)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겠다는 저의(底意)에서 나온 것이다.”〉
‘5대 강령’ 역시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 전술에 불과하다는 게 정 전 장관 주장의 요지다. 그는 또 “북한의 선전 선동에 현혹됨이 없이 분석적으로 그들의 제의를 검토하면서 자유민주 통일만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할 수 있으며 민족 성원(成員) 전체에게 통일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신념을 키워나가야 한다”며 “이 길만이 북한의 적화통일 망상(妄想)을 분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반공교육 교재를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從北左派勢力’과 유사한 ‘親共同調勢力’이란 표현 쓰기도
같은 해 쓴 〈한국의 통일정책 전개 과정〉이란 글에서 정세현 전 장관은 “3·8 이북(以北)만의 공산기지를 건설하여 남한 적화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김일성의 적화 전략은 북한 사회를 남한 지역과는 엄청나게 다른 사회로 변질(變質)시키는 결의적인(결정적인-기자 註) 원인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김일성의 대남 적화 전략이 북한 사회를 망가트린 결정적 계기였다는 지적이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이 통일을 운위(云謂)하는 이유”를 언급하며 북한 정권이 말하는 통일의 함정, 체제의 모순을 통렬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관용어처럼 굳어진 ‘종북좌파세력(從北左派勢力)’과 유사한 ‘친공동조세력(親共同調勢力)’이란 표현을 당시 그가 썼다는 점이다. 그 내용 중 일부다.
〈첫째, 북한은 김일성 유일 독재체제의 유지와 그 세습을 목적으로 통일을 국호(國號)처럼 활용하고 있다. 무리한 정책 수행으로 내부 체제의 모순이 누적되고 정책 실패로 인한 주민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으나 “모든 것은 통일을 위해 참아야 한다”는 식으로 모순과 불만을 무마하고 나아가서는 더 많은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통일이라는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 북한은 남한 내부에 ‘친공동조세력’을 부식(扶植)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대남 적화 폭력혁명 노선을 은폐하기 위하여 통일이라는 구호를 적극적으로 외쳐대고 있다. 북한은 걸핏하면 ‘자주’ ‘왜세(倭勢) 배격’ ‘민족대단결’ 등의 구호를 통일과 결부시켜 논거하는데, 이를 민족주의 세력의 감정에 호소하여 그들을 기만·선동하고 나아가서 다 포섭하므로써(포섭함으로써-기자 註) 친공세력화하려는 의도가 담겨진 것이다.
셋째, 한국의 국제적 고립을 초래하기 위하여 통일지향세력을 가장(假裝)하는 것이다. 북한은 “국제사회에 대해서 한국은 분단고정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으나 북한은 자주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투의 모략선전(謀略宣傳)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 문제(분단의 배경, 남북 긴장도, 남북한의 통일정책의 내용 등)에 무지(無知)하거나 큰 관심이 없는 국가들-예컨대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한 모략이며 ‘반(反)제국주의·반(反)식민주의’ 등의 선전과 기만전술을 구사하여 그들을 ‘친공(親共)세력화’하려는 의도의 발로(發露)인 것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우리는 진정한 민족통일을 위해서 통일을 논의하는 데 반해 북한은 무력이나 폭력으로 남한지역을 점령하여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기본 전략 목표는 불변(不變)”이라고도 했다. 이어 “(북한은) 독재체제의 유지와 세습화를 위해서 또는, 대남적화 폭력혁명 역량을 강화하고 나아가서는 이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통일이라는 문제를 구호처럼 쓰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폭력혁명에 의한 적화와 그 이후의 남북합작에 의한 전(全) 한반도 공산화를 ‘평화적 방법’이라고 우기는 북한 이외에도 6·25와 같은 전면인 무력남침에 의한 적화전략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군사력을 계속 증강하는 한편, 주한미군 철수를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하는 것은 이른바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려는 것이다… 북한이 폭력사용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민족 성원 전체를 통일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고, 계급논리에 입각하여 공산당과 그에 동조하는 특정 계급만을 통일의 주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MB의 비용》(2015)이란 대담집에서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남북 화해 협력이 정권에 도움이 되지 않고, 국제적으로도 냉전 시기였기 때문에 통일을 핑계 삼아 안보장사를 했던 때”라고 비판했다. 전두환 정부의 통일정책을 냉담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 시절(1981) 쓴 이 글에는 전혀 다른 인식이 투영돼 있다. 정 전 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의 대북 대화 제의에 ‘역사적 의의’가 있고, ‘제5공화국의 용단(勇斷)’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전(全) 대통령은 1981년 1월 12일, 북측에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했다. 남북한 최고 당국자가 아무런 조건 없이 서울이나 평양에서 만나 허심탄회하게 한반도 통일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를 ‘1·12제의’라고 부른다.
그는 1·12제의에 대해 “일제 식민통치 기간과 맞먹는 분단 36년의 비극적인 민족사에 대한 반성 위에서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그 첫 번째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제 36년 암흑통치하에서도 민족의 회생을 되찾을 수 있었듯이 분단 36년 동안에 입은 민족적 상처를 극복하고 자주·민족·민주 국가로 통일하여 민족의 비극을 청산하자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어 “70년대 10년간에 있었던 남북대화 과정에 대한 실천적 비판 위에 80년대를 내다보는 시점에서 환기되었다는 점에서 그 두 번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며 “형식적 합의를 지양하고 단 한 가지의 합의라도 행동으로 입증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출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12 제의를 “제5공화국의 평화통일 의지를 표명한 용단”이라고 평가하기에 이른다. 이어지는 내용이다.
〈상호신뢰를 조성하기 위해서 남북한최고당국책임자가 상호방문을 하자는 1·12대화 제의는 실천적 의지의 결집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행동과 실천에 의한 상호신뢰의 조성과 이를 바탕으로 분단 조국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분단 36년 사상 초유의 일로써 제5공화국의 평화통일 의지를 용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단된 남북대화를 재개하여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고야 말겠다는 실천적 의지에 충만한 제의였기 때문에, 1·12대화 제의는 73개국으로부터 약 300여회에 달하는 지지와 찬양(보도·논평 형식)을 받았다.〉
《수용소 군도》 인용해 김일성 독재의 폭압성 지적
![]() |
정세현 전 장관은 구소련 강제수용소의 만행을 폭로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사진)의 《수용소 군도》를 인용해 북한 체제의 혹독함을 설명하기도 했다. |
이 글에서 정 전 장관은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 부재(不在)부터 짚는다. 그는 “소련에 의해 권좌에 앉게 된 김일성은 자신의 정통성 결여를 원천적으로 만회하기 위하여 해방 직후부터 6·25 직전까지 소련의 비호하에 북한 지역 내의 민통주의(民統主義) 세력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60~1970년대까지 이어진 김일성 정권의 숙청사를 언급하며 “북한의 정치사는 곧 ‘숙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김일성 1인 독재체제와 부자 세습을 위한 숙청이 계속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당·정·군 모든 면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는 김일성의 1인 독재체제를 밑에서 보필하는 것은 가족과 친척들”이라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다.
〈장남 김정일은 후계자로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고, 처(妻) 김성애는 여맹(女盟)위원장, 외조부의 재종제(再從弟) 강양욱은 국가부주석, 종매부(從妹夫) 박성철은 국가부주석 겸 정치국원, 종매(從妹) 김신숙은 사회과학원부원장, 김신숙의 남편 양형섭은 사회과학원장, 종매 김정숙은 직총(職總)부위원장, 김정숙의 남편 허담은 부총리 겸 외교부장, 조카 황장엽은 최고인민회의의장 직에 있는 실정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김일성 개인의 우상화와 가계 우상화를 통한 부자 세습”을 위해 ‘김일성 1인 독재체제’를 ‘족벌정치’로까지 발전시켰다는 취지의 주장도 했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 적용’한다는 미명하에 ‘주체사상’을 내세워 사회 전체의 잠재역량을 오히려 묻어버린 채 김일성 개인의 주체만을 따르고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지도(指導)를 최선의 것으로 여기도록 세뇌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결국 “그러한 공작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전(全) 사회를 병영화한 채 대외적으로 폐쇄성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런 예측도 덧붙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김일성 1인 독재와 부자 세습에 관련지어 유리한 것은 강화하고 불리한 것은 억제·저지시키려는 정책은 북한 사회의 문제점을 더욱 증대시켜 나갈 뿐이고, 나아가서는 북한 공산집단의 존재 이유 자체에 대한 부인현상(否認現像)을 유발시키고 말 것이다. 주체사상을 김일성 우상화 및 세습체제의 합리화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쓰므로써(씀으로써-기자 註) 북한 사회는 사실상 이에 저항하는 세력을 수용하는 ‘수용소 군도화’해가고 있다.〉
구(舊)소련 강제수용소의 잔인성을 전 세계에 고발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인용한 것으로 보아, 정 전 장관은 북한 체제를 사실상 소련에 버금가는 ‘폭압 체제’로 규정했던 것 같다. 이렇듯 혹독하게 북한 체제를 비판한 그이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 전 장관은 북한 경제를 사실상 소련에 예속된 구조라고 봤다. 1982년 〈북한의 경제체제와 산업관리 실태〉란 글에서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의 경제관리 체계는 소련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며 북한 경제의 낙후성을 지적했다. 경제가 낙후한 원인 역시 ‘김일성・김정일 왕조적 공산주의 체제’에 있다고 분석했다. 관련 내용이다.
〈북한 경제가 낙후성을 면할 수 없는 것은 이처럼 공산주의 체제 자체 때문이며, 그것도 김일성・김정일 왕조적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려는 기도(企圖) 때문에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북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과감한 자본주의적 방식의 도입뿐이지만, 북한에 김일성・김정일 왕조를 유지시키려는 정치적 욕구가 존재하는 한 이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어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김일성과 김정일 체제의 종언(終焉)을 뜻한다”고도 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의 외교정책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1981년 쓴 〈북한의 외교정책〉이란 글에서 정 전 장관은 “국제정치와 외교를 계급투쟁 논리에 입각한 세계 적화혁명의 과정으로 보는 입장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세워진 외교정책의 기준 목표는 “미제를 국제적으로 철저히 고립시키고 조국통일과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촉진시키는 데 있다”고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북한의 대서방(對西方) 접근, 즉 대미(對美)·대일(對日) 관계 개선에 나서려는 시도를, 한국 정부가 경계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폈다.
〈대미·대일 관계의 기본 목표에서는 미일(美日)의 대(對)한국 지원을 약화시킨다는 정치적 성격이 크게 중시되는데, 이를 위해 북한은 통일 문제를 중심으로 위장평화공세 전술을 활용하고 있다. 즉 그들의 적화야욕이 노동당 규약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음은 은폐한 채 ‘고려연방제’ 등을 들고 나가 한국을 분단세력으로 몰아부치는(몰아붙이는-기자 註) 모략·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연방제 주장의 저의를 정확히 인식하고, 또 대외적으로 인식시킬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북한이 ‘적화야욕’을 기반으로 ‘계급투쟁 논리’에 입각한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고, 우리 스스로 이를 깨달아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다.
“1993년 ‘제네바 합의’ 이후 北 변했다”
![]() |
북한의 NPT 탈퇴를 보도한 1993년 3월13일자 《조선일보》. |
정 전 장관과의 전화통화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예상대로 그는 모든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 다소 불리해 보이는 듯한 질문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념관이 바뀐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이) 경제 능력이 빵빵할 때는 고압적으로 나오고, 1980년 5·18 등 남한 내부의 국론 분열을 틈타 ‘고려연방제 하자’고 그러고…. 그게 안 되니까 1983년 랭군 사건(아웅산 테러)을 일으켰죠. 그거 면죄부 받으려고 (1984년에) 남북체육회담을 제안했고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이 점점 새로운 길을 찾는 거 같더라고요.
1993년 3월 북핵문제가 터지면서 통일연구원 부원장으로 있던 내가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갔습니다. 북미(北美) 간의 협상 과정을 보니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이유가 어떤 면에서는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을 받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더라고요.
사실 북한은 1992년 1월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을 받으려고 미군(美軍) 주둔을 전제로 북미(北美)수교를 요구한 적이 있었어요. 근데 미국 아버지 부시 정부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고는 부시 정부가 IAEA(국제원자력기구)를 시켜 북한의 핵시설을 특별사찰하게 했습니다. 불심검문처럼 ‘아무 데나 뒤지라’고 한 거죠.
그렇게 약 1년 동안 실랑이를 하더니 1993년 3월,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해버렸어요. 이때 미국 클린턴 정부가 북한의 의도를 알고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하면 3개월 이내에 수교 협상을 개시한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그렇게 이뤄진 게 바로 ‘제네바 합의’(1994년 10월 21일)입니다. 그때부터 북한이 상당히 유순해졌어요. 변한 겁니다.
1995년 8월 3차 쌀회담(공식명칭은 남북당국대표회담) 당시 내가 대통령 통일비서관 자격으로 중국 베이징에 갔어요. 그때 카운터파트로 나온 전금철(당시 정무원 책임참사)하고 북측 인사들을 보니까 ‘이 사람들 이젠 우리가 겁낼 것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냥 ‘그럭저럭 잘해보자. 먹을 거나 챙기자’ 하는 식으로 바뀐 거죠.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개최된 차관급 비료회담에서 북한 사람들 태도를 보니까 정말 처량할 정돕디다.
1970년대 내가 통일원에 들어가서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 1980년대 후반의 북한을 죽 보다 보니까 슬슬 대남(對南)전략에 변화가 오는 걸 감지할 수 있었어요. 그런 사람으로서 1990년대 들어서는 더 이상 (북한을) 비판할 일이 없어진 거예요. 비판이 의미 없고 북한의 대남전략이 고약해지지 않은 거예요. 말하자면 ‘위장평화공세’ 같은 걸 하지 않더라는 거죠. 쌀회담 때나 비료회담 때 겪어본 그 사람들의 표정으로 봐서는 ‘안 도와주면 안 되게’ 생겼더라니까요. ‘햇볕정책’이 드디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북한이 변화했기 때문에 대북정책도 변해야 되니, 나는 1970년대, 1980년대와는 다른 얘기를 하게 된 거죠.”
북핵 문제 둘러싸고 벌인 舌戰
그의 얘기를 듣고 있다 보니 북한의 변화는 언급하면서, 정작 중요한 ‘북핵 문제’는 간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핵은 현존하는 한반도 정세의 핵심 현안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과 나눈 문답이다.
― 말씀 중에는 북한 핵문제가 빠져 있습니다. 북핵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까.
“1992년 1월 21일 북한 김용순(전 노동당 국제비서·사망)이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차관에게 ‘(미북) 수교만 해주면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 통일되면 위상과 역할은 바뀌겠지만 미군은 조선반도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그때 내가 통일연구원 부원장 하고 있을 때인데, 외무부가 청와대에 보낸 외교전문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때 노재봉(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교수가 ‘이거 큰일 났어. 이렇게까지 됐는데 우리가 어떻게 역할 해야 하나. 빨리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어요. 그때 ‘(북한이) 진심일까’라고 생각했어요. 위장평화공세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계속 지켜보다가 미국이 하는 걸 보고 우리가 따라가야 한다’는 식으로 대책 보고서에 밝혔을 거예요.
미국이 그걸 거절하고, IAEA를 앞세워 북한을 상대로 특별사찰을 세게 하니까, (북한이) 반발하면서 NPT 탈퇴하고 핵개발하겠다고 겁주고 나섰죠. (북한에) 핵이 있었다고 하는 건 사실과 다른 얘기예요. 핵 문제는 처음부터 미국과 북한 사이의 문제예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피해자는 우립니다.”
― 우리가 북핵의 피해 당사자이지 않습니까. 근데 미북 간의 문제라고만 볼 수 있습니까.
“피해 당사자인데, 미국이 (한국을) 안 끼어주고 북한도 우릴 못 들어오게 하니까…. 북한은 우리를 못 들어오게 했어요. ‘핵 문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우리(북한)가 하자’고 해 처음부터 북미 문제로 갔던 겁니다. 지금도 그렇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중재자 노릇밖에 안 돼요.”
― 현실적 측면에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아니면 원칙적으로 그게 맞다고 보시는 겁니까.
“현실이 그렇고, 원칙이 그렇죠. 원칙이라는 것도 현실을 종합한 것이 원칙이지 별겁니까. 원칙이 하늘에 떠 있는 건 아니잖아요.”
― 장관님은 미국을 한반도 통일에 있어 장애물이라고 보십니까.
“그건 아니죠. 트럼프 대통령은 6·12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북미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를 시퀀싱(sequencing·순서대로)으로 풀어나가는 데까진 (북한과) 합의를 봤어요. 그런데 이행하는 과정에서 실무자들이 ‘선(先)비핵화’를 자꾸 들고나와 지금 완전히 판을 바꿔놓은 거 아닙니까. 미국의 소위 군산(軍産)복합체와도 연결돼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미국은) 통일이고 평화고 관계없이 (북한) 비핵화가 돼버리면 무기 시장이 없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 제 얘기는 북한의 비핵화는 노무현 정부 등 이른바 진보 정권도 늘 앞장서서 외치던 건데, 마치 ‘비핵화 때문에 미북회담이 결렬됐다’ 이런 시각은….
“그건 아니죠. 노무현 정부 때는 비핵화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문제가 없었으니까….”
― 그건 아닙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때는 ‘선비핵화’가 아니라 (2005년) 9·19공동성명이 노무현 정부 작품인데 그 1항이 비핵화예요. 2항이 북미·북일수교고, 3항이 경제지원이고, 4항이 정전체제·평화체제 전환, 5항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으로 이행입니다. 즉 비핵화를 해나가면서 북미수교도 하고 북일수교도 하고 경제지원도 하자는 순서로 잡았을 뿐입니다. ‘북한이 선비핵화해야만 우리가 남북 교류 협력도 한다’ 그거는 아니었어요.”
― 북한의 비핵화는 우리 정부가 남북대화 때마다 내세우던 중요 조건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거의 상실됐습니다.
“뭐가 상실돼. 하나도 진도가 안 나가니까…. 남북관계가 한 발이라도 앞서 나가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모멘텀’을 형성하고, 북미관계 개선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해 남북관계 개선으로 순서가 바뀌었을 뿐, 비핵화를 안 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죠. 선비핵화가 아니라 남북관계 선행론으로 바뀐 거예요. 그 선행론은 ‘비핵화를 끌어내기 위한 마중물 차원에서 한다’ 그렇게 문재인 정부의 로직(logic)이 바뀐 거죠.”
정 전 장관과의 통화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4·11 한미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시점에 이뤄졌다. 회담 전망에 대해 그는 성과를 낼 확률과 그렇지 못한 경우를 ‘반반’으로 봤다.
“연막을 세게 치는 거 보니 뭔가 있을 것 같아요”
회담 이후 ‘사실상 성과가 없는 회담이었다’는 비관적인 평가가 나왔다. 정세현 전 장관도 4월 12일 KBS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한미 간 전혀 접점을 찾지 못한 ‘워싱턴 노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한미정상회담이 끝난 후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의 설명을 보니 외교적인 수사(修辭)로 가득해 이번에 별로 성과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평가가) 박한 게 아니라 그게 현실”이라고도 했다. 정 전 장관은 한미관계에 균열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관련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이번에 문 대통령을, 그야말로 불러들이는 걸 보고 대북 메시지도 줄 가능성이 있지만 뭔가 지금 만나면 방위비 분담을 증액하라고 압력을 넣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또 그 이야기 관련해서 무기 판매도 좀 세게 할 것 같다 하는 짐작을 했었는데 그쪽으로 오히려 지금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미국은…. 우리가 1950년 7월 14일 6·25전쟁 발발 20일도 안 되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용감하게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미국에 넘겨놓은 탓에 지금까지 군사 문제에 관해서는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이 되어 있습니다. 운명이죠, 운명.〉 (출처: KBS 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 녹취록)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한테 은밀하게 쥐여준 메시지의 내용이 5월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결정하리라고 본다”고 예측했다. 사회자가 ‘그게 (무엇인지)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하자, 정 전 장관은 “있을 것 같아요. 연막을 세게 치는 거 보니까 뭔가 있을 것 같아요”라며 일말의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세현 전 장관과 B씨의 관계, 그리고 민화협
![]() |
2012년 B씨가 쓴 논문에 기재된 지도교수 이름에 서훈 국정원장의 이름이 보인다. |
그뿐만 아니라 B씨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 주요 직위에 임명될 수 있도록 정 전 장관이 민화협 고위 관계자에게 부탁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이로 인해 민화협 내에서 정세현 전 장관과 B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는 게 A씨의 주장이었다.
복수의 민화협 측 관계자들은, B씨가 대북 문제와 관련해 전문성이 없어 민화협 고위직에 걸맞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최근 민화협은 내부 인사 문제로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가는 등 내홍(內訌)을 겪은 바 있다. A씨와 민화협 관계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 전 장관이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리하게 B씨를 챙겼다는 뜻이 된다.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인 정 전 장관은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을 역임(2005.2〜2009.5) 한 바 있고, 현재 민화협 고문직을 맡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 전 장관과 나눈 문답이다.
― B씨 박사 논문 심사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2007년 내가 대학에 있을 때인데, B씨가 박사 논문 주제로 ‘북중(北中)관계’를 쓰겠다고 발표를 합디다. 그 발표를 듣고 나서 B씨한테 ‘중국어 할 줄 알아요’라고 했더니, ‘모르는데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중국어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북중관계 박사 논문을 써요. 중국 문헌을 읽지도 않고 어떻게 북중관계를 연구합니까’ 그랬죠. 그랬더니 B씨가 얼굴이 빨개지더라고요.
몇 년 뒤에 B씨가 나를 찾아왔어요. ‘다시 박사 논문을 써야 하는데 장관님이 지도교수를 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그런 건 내가 아니라 지도교수하고 상의를 해야지’라고 했죠. 그땐 내가 학계를 떠나 있어 지도교수 할 자격이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B씨는 ‘외부에서 조언이라도 좀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내가 B씨한테 면박을 준 적이 있어 어떤 면에서는 악연(惡緣) 아닙니까. 그런 미안한 사연이 있어 내가 (박사 논문 관련해) 코치를 좀 해줬죠.”
― 당시 B씨의 논문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서훈 국정원장한테 B씨를 잘 봐달라고 한 적 없습니까.
“서훈 교수한테 스스럼없이 얘기할 사이는 되죠. 뭐 ‘(심사를) 너무 까다롭게 하지는 마라’ 정도의 얘기는 할 수 있었겠지만 압력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압력이라는 건 누군가 내 말을 안 들었을 때 불이익을 줄 수 있어야 압력 아닙니까. 근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압력을 넣어요. 참 나…. 내가 박사 논문을 써본 경험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석·박사 논문을 지도하고 심사도 한 사람으로서 B씨에게 조언해준 게 답니다.”
― B씨가 민화협 고위직으로 가는 데에도 장관님의 역할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하하, 있었지. 근데 그 자리가 고위직? 천만에! 여러 사람이 하고 책상도 없고 월급 받는 자리도 아닌데.”
― 민화협 전·현직 관계자 얘기를 들어보니 그 일 때문에 장관님과 B씨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고 합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설명을 할게요. B씨가 박사 학위를 받은(2012년) 뒤에 저한테 ‘저도 북한 문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민화협이나 통일부 같은 데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요’라고 해요. 그때 나는 민화협을 떠난(2009년) 상태였죠. 잘 보세요. B씨는 박사가 된 후 이미 2~3년간 민화협 정책위원을 한 경험이 있어요.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북한 관련 박사 학위 소지자 아닙니까. 그쪽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달라요.”
― 민화협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B씨와도 관련 있는 것 아닙니까.
“김홍걸 의장이 취임 후 민화협 인사 문제와 관련해 나와 여러 가지로 상의를 많이 했습니다. 김 의장도 B씨를 잘 알아요. 그래서 내가 B씨를 김홍걸 의장을 통해 해당 직위에 추천했어요.”
― 전임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으로서 B씨를 추천한 셈이군요.
“그렇지.”
― 그럼 장관님과 B씨는 어떤 관계입니까.
“내 제1제자죠.”
이 밖에도 정세현 전 장관은 기사화할 수 없는, 자신과 관련한 다른 몇 가지 소문에 대해서도 시시비비를 정확히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