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악산 서북능선 귀때기청봉(1576m) 털진달래. 서북능선은 설악산에서도 가장 높고 험준한 곳이다. 남한에서 가장 늦게 봄이 찾아오는 동장군의 마지막 보루 같은 겨울 요새다. 서북능선의 정점, 귀때기가 떨어져 나갈 듯 얼음장 같은 바람이 불어 이름이 유래하는 귀때기청봉에 털진달래가 피면 비로소 설악의 봄이 완성된다. 사진=산악사진가 정현석
진달래의 분홍은 촌스럽다. 도시인의 매끈한 넥타이나 연예인의 세련된 립스틱 빛깔과는 결이 다르다. 진달래의 촌스러운 분홍이야말로 이 계절의 정체성이다. 일관성 없이 제멋대로 번져 나가는 저 도발적인 거친 분홍! 아등바등 앞만 보고 달려온 경주마 같은 도시인의 마음을 낚아채 허공을 걷게 할 만큼 아찔하다.
대구와 경북 청도에 걸쳐 있는 비슬산(1083m) 정상부의 진달래 군락과 대견사. 해발 1000m에 이르는 고지대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은 진달래 화원이 펼쳐진다. 비슬산은 진달래가 대규모로 군락을 이룬 산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꼽힌다. 사진=대구시청
전남 강진 덕룡산 서봉 아래 진달래 군락지. 진달래는 강하고 연약하다. 매연이나 오염에 강해 척박한 땅과 공기에서도 꿋꿋이 잘 자란다. 나무들이 기피하는 땅에 먼저 뿌리를 내리고 군락을 이룬다. 하지만 지나치게 가지를 파헤치고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으면 금방 부러지고 마는 것이 진달래다. 사진=산악사진가 정현석무뚝뚝하고 때론 무섭기까지 한 1000m 넘는 덩치들이 발그레 물드는 계절, 봄. 산 아래부터 고도를 높이며 물들어 가는 연애의 감정. 산골 마을 어귀에는 진달래가 난사를 시작했고, 그 곁으로는 철쭉이 거대한 정글을 이룬 채 제 차례를 기다린다.
큰 산은 지금은 초록의 숨을 고르고 있으나, 며칠 뒤면 절절한 연애편지 같은 철쭉의 고백으로 가득 찬 분홍 낙원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산과 봄의 연애를 축하하려는 산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꽃의 바다 위에 사람의 산을 이룰 게 분명하다.
전남 장흥과 보성 경계의 사자산(667m) 철쭉 군락지. 호남정맥의 명불허전 자연 화원인 제암산과 일림산 사이에 사자산이 있다. 바닷바람을 맞으면서도 씩씩하게 핀 철쭉의 낭만과 운해가 환상 교향곡을 경치로 그려 낸다. 사진=민미정
전북 남원 흥부골자연휴양림 인근 철쭉 동산에서 본 지리산 바래봉(1165m). 지리산은 넓고 깊다. 봄이면 골마다 능선마다 분홍 축포로 소란하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고서도 씩씩하게 피었다가 떨어지는 숱한 봄꽃의 향연. 어리석은 이가 머물면 지혜로워진다는 산 이름 유래처럼, 봄날의 지리산을 다녀오면 더 말랑말랑한 가슴의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사진=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전남 보성 초암산(576m)은 비교적 덜 알려진 산이지만, 철쭉의 아름다움은 유명한 산 못지않다. 능선의 아기자기한 바위와 철쭉이 만개한 풍경은 천국을 현실로 소환하는 베테랑 등산인들만의 비결이다. 이름 난 철쭉 명산에 비해 사람이 적어 여유롭다.봄이란 그런 것이다. 온 산을 분홍으로 물들이는 유치한 센티멘털리스트의 절절한 테러. 이 속수무책의 공격 앞에 장사란 없다. 진달래와 철쭉이 퍼붓는 분홍빛 테러에 난사당한 사람들은 취객인 양 비틀거리며 흥겹게 쓰러진다. 꽃이 피어 즐겁고, 그 꽃잎이 지는 소리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는 이 모순적인 감정이야말로 봄 산이 주는 가장 지독한 유혹. 낙화의 소리에 실연당한 여인이 떠난 그대를 떠올린다 해도, 그조차 이 화사한 계절의 일부가 된다.
렌즈가 포착한 꽃의 물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생명이 가장 뜨겁게 내지르는 비명이자, 숨 가쁘게 걸어온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황홀한 독이다. 세련된 도시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유치찬란한 꽃들의 향연이 우리를 다시 산으로 불러들인다. 가식 없는 날것의 색채가 바위산의 거친 근육을 덮을 때, 비로소 산은 가장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온다.
산보다 산 입구가 더 유명한 산이 전남 광양 쫓비산이다. 봄이면 산기슭의 매화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워 전국의 상춘객을 끌어들인다. 매화 농장 주인의 허락으로 봄 밤을 앵글에 담았다. 별과 꽃이 어우러져 봄날이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다. 사진=민미정좋지 않은가. 이 무질서하고 화려한 테러에 기꺼이 포로가 되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산은 분홍빛 화약을 터뜨리며 세상을 향해 가장 평화로운 도발을 하고 있다. 마음속에 쟁여 둔 무거운 고민은 잠시 접어 두어도 좋다. 저 꽃들이 펼치는 유치한 축제에 몸을 던져, 꽃멀미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치를 부려도 좋을 계절이다. 연둣빛 새잎이 돋기 전, 산이 허락한 이 짧고 강렬한 분홍의 전성기를 우리는 온몸으로 맞이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