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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面談기록 입수 - 아웅산 테러 犯人 강민철, 한국에 오고 싶어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미얀마·북한 復交 직후 사망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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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아웅산 테러 사건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처리한 것은 앞으로 정말로 과거사 조사 대상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져야 됩니다. 본인이 오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본인이 한국에 와서 살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여러분이 북한 눈치 보고 지금 막고 있는 겁니다”(鄭亨根 의원)
1983년 10월 9일 발생한 버마 아웅산 테러범 진모 (왼쪽에서 두번째)와 강민철(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버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 6월 30일에 있었던 황장엽(黃長燁) 선생 출판기념회에서 황 선생은 아웅산 테러에 대하여 재미있는 비화(示必話)를 소개하였다. 북한 소행임을 확인한 미얀마가 북한과 국교(國交)를 단절하고, 미국 일본 등 국제사회의 대북(對北)제재가 들어가자 당황한 북한 수뇌부는 공작원을 원망했다고 한다. “왜 땅을 파고 숨어 있지 않고 나돌아 다니다가 잡혔는가”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어느 날 김일성(金日成)이 김정일(金正日), 황장엽, 허담(許淡), 김용순(金容淳)과 만난 자리에서 말하였다.
 
  “야, 이거 국제여론이 너무 나쁜데. 이렇게 하면 안 될까? 밑에서 실무자들이 저지른 일이다. 지도부에선 몰랐다고 하면 어떨까?”
 
  김정일이 강하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무조건 잡아떼야 합니다”라고 했다. 김일성도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김정일에게 아웅산 테러의 범인(犯人) 강민철이 미얀마 감옥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을 것이다. 좌파(左派)정권 10년간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金賢姬)는 정권, 방송, 단체들의 협공을 받아 ‘숨어 다니는 처지’가 되고 입이 봉해졌다. 같은 시기에 강민철은 한국 정부 인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털어놓았다.
 
  김정일이 테러 주범(主犯)임을 증명하는 두 사람이 한국에서 같이 활동하고 다녔다면 북한정권에 큰 심리적 압박이 되었을 것이고, 천안함 폭침(爆沈)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달, 일본 정부는 특별기를 보내서 김현희씨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전(前) 총리 별장에 머물게 하는 등 국빈(國賓) 대접을 하였다. 김정일 정권에 납치된 일본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한국 정부는 오고 싶다는 강민철에 대하여 어떻게 하였던가?
 
 
  강민철을 살려준 미얀마
 
  미얀마 정부는 1983년 11월 4일 아웅산 테러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공식 발표하고 북한에 대하여 단교(斷交) 및 정부인정 취소 조치를 취하는 한편, 한국에 조문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UN에도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공식 보고하였다.
 
  이후 코스타리카, 서(西)사모아 등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단절하였으며, 그 외 세계 69개국이 대북(對北) 규탄성명 발표, 인적·물적(人的·物的) 교류제한 등의 응징 조치를 취했다. 미얀마 정부의 공식발표 내용은 이런 요지였다.
 
  <아웅산 국립묘지 폭발사건으로 한국인 장관을 포함, 공직자 17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하였으며, 버마(미얀마의 옛 이름) 공무원 4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당하였다. 정부는 내무종교상(相)을 위원장으로 5인(人) 조사위원회를 구성, 산하 6개의 소(小)위원회를 두고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정부는 사건발생 1주일 만에 2명의 한국인(Koreans) 혐의자를 생포하였고, 1명은 체포과정에서 사살되었다. 생존자 진술과 수집된 각종 증거물에 의거, 이번 사건은 북한의 명령(the order of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에 따라 3명의 북한인(North Koreans)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북한에 대한 정부승인을 취소하였다.>
 
  1983년 12월, 미얀마 지방재판소는 ‘생포된 2명의 진술과 증거자료를 종합해 볼 때 범인들이 북한군 육군 소장(少將) 강창수로부터 대한민국 대통령과 수행원에 대한 폭탄공격 명령을 받고 범행을 한 것이 인정되므로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하였다. 미얀마 최고 재판소는 1984년 2월 두 범인의 상고(上告)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하였다.
 
  미얀마는, 1986년에 ‘진모(某)’는 사형집행을 하였으나 수사에 협조했던 강민철에 대해서는 집행을 유보하였다. 일부 국내 언론에서는 강민철이 무기(無期)징역으로 감형(減刑)되었다고 보도한 바 있으나 우리 정부의 확인결과 공식적인 감형 조치는 없었다.
 
1998년 11월 한국 정부인사를 만났을 때의 강민철 면담 기록. 왼쪽은 1983년 체포 당시, 오른쪽은 1998년 면담 당시의 강민철.
 
  강민철, 정부 인사 만나 “한국 가고 싶다” 밝혀
 
  미얀마와 북한은 2007년 4월 국교를 회복하였다. 지금 국제사회는 미얀마와 북한정권이 핵(核)개발에 협력하고 있다는 의혹을 품고 있다. 북한이 미얀마에 군사용 땅굴을 파 주고, 영변형(型)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지어 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두 정권이 생존 차원의 협력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인종차별로 국제봉쇄를 당하였던 남아공(南阿共)이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였던 적이 있다.
 
  미얀마와 북한이 국교를 회복하는 데 걸림돌이 있었다면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의 존재였을 것이다. 미얀마 정부는 아웅산 사건 이후 한국 정부측에 대하여도 강민철 면담을 허용치 않는 등 보안을 유지하였다. 필자가 입수한 정부의 대외비(對外示必) 자료에 의하면 한국 정부 인사가 교도소에 가서 수감 중인 강민철을 비(非)공식으로 처음 면담한 것은 사건발생 15년이 지난 1998년 11월이었다.
 
  정부 인사들은 그 후 10여 차례에 걸쳐 면담을 이어 갔다. 강민철의 건강 및 심리상태 등을 파악하는 한편, 한국음식과 의약품 및 소액의 영치금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강민철은 한국 정부 인사를 만날 때마다 “미얀마 및 한국 정부에서 허용한다면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음이 필자가 입수한 면담(面談) 보고서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미얀마 정부는 강민철 석방 및 한국행(行)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향(意向)도 표명한 바 없으나, 1999년경 현지의 한국 대사관측에 비공식적으로 ‘정상(頂上) 간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강민철은 체포당할 때 자폭(自爆)시도로 왼팔이 절단되고 창자가 보일 정도로 복부(腹部)에 중상을 입었다. 한국측과 면담할 때는 건강한 상태였다. 강민철은 미얀마 주재 한국 대사관에 편지를 써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면담은 2005년 9월이었다. 강민철과의 면담으로 그가 1955년 4월 18일 강원도 통천에서 났으며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대위였고 북한엔 아버지 강석준, 어머니 김옥선, 누이동생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국정원, “데려올 수 있다”
 
2007년 9월 6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오른쪽)이 정형근 의원(왼쪽)과 인사하며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2006년 3월 국가정보원은 정형근(鄭亨根) 한나라당 의원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하여 강민철을 한국 정부가 데려오는 데 대한 검토를 하였는데, 긍정적인 의견이었다. 국정원은, ‘북한은 사건 발생 당시부터 동(同) 사건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강민철 송환조치와 관련, 일절 대응을 하지 않거나 반발하더라도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북핵(北核)·위폐(僞幣)·인권문제 등과 관련, 국제사회의 대북압박이 강화되고 있고 우리로부터 비료·식량 등의 지원 및 획득이 절실한 입장에 있어 반발하더라도 극히 제한적·일시적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데려올 가치가 있는지에 대하여는 정부 차원에서 판단하여야 할 것이란 입장이었다. 즉, ‘아웅산 테러 사건은 미얀마 정부가 북한의 소행임을 명백히 밝히고 북한과 단교조치까지 취했으므로 실체가 이미 규명된 사안(事案)으로 보나 사실관계 추가 규명을 위해 강민철을 국내 송환할 필요성이 있는지 여부는 정부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것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힘을 쓰면 강민철을 데리고 올 수 있다는 게 국정원의 판단이었던 듯하다.
 
  우리 정부측 인사가 강민철과 면담을 이어 가던 시기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두 정권이 편 대북 굴종적 정책과 외교-안보 관련 인사(人事)를 볼 때 강민철을 한국으로 데리고 오려는 진지한 노력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시의 국정원 고위 간부는 “강민철 문제를 보고받은 기억이 없다”고 했다. 실무자의 노력이 있었을 뿐 정책화를 위한 공론(公論)이 이뤄지지 못하였다는 이야기이다.
 
  2006년 봄 당시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강민철이 한국측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는 사실을 확인, 송환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정형근 의원의 소개로 양영태씨 등 70여명이 서명하여 국회에 제출한 송환촉구 청원서는 “북한은 1983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과 수행원을 암살하기 위해 유례없이 처참한 폭탄테러를 자행했다”면서 “이러한 반(反)인간적 잔혹행위에 대해, 북한은 여태까지 사과는커녕 자신들의 범행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원서는 이어 “북한 공작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민철은 미얀마 당국에 체포돼 복역하며, 한국에 가서 참회하며 살겠다는 뜻을 수차례 밝힌 바 있다”면서 “미얀마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석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만큼, 유일한 생존 테러범을 우리가 송환해 관련 진상을 낱낱이 파헤쳐 온 국민들에게 알리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줘야 한다”고 촉구했었다.
 
  2006년 11월 2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김만복(金萬福)씨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이 자리에서도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이 한국행을 원하고 있는데 이를 정부측에서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북한 눈치 보고 막고 있는 겁니다”
 
  <정형근: 후보자는 1983년 10월 아웅산 폭탄테러 공작원으로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북한 공작원 강민철이 수감 중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김만복: 예,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본 위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강민철이 한국의 관계기관에 전향(轉向)의사를 표시했으며 한국으로의 송환을 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김만복: 듣고 있습니다.
 
  정형근: 듣고 있습니까?
 
  김만복: 예.
 
  정형근: 국정원은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면회 등 강민철과 접촉한 내용 및 시기에 대해 외교상 밝힐 수 없다고 하여 접촉한 사실을, 말을 하지는 않고 있는데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요, 밝힐 수 없습니까?
 
  김만복: 아닙니다.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강민철과 접촉한 일이 없다고요?
 
  김만복: 예.
 
  정형근: 그것 자신할 수 있습니까? 위증죄(僞證罪) 됩니다.
 
  김만복: 확인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정형근: 확실히 없습니까?
 
  김만복: 그것을 제가 보고받은 일이 없습니다.
 
  정형근: 아니, 본인이 모릅니까? 보고받은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김만복: 지금 대답은 ‘모른다’고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정형근: 아니, 밝힐 수 없다는 것하고는 다르지요. 면회를 했어요. 면회를 했는데, 지금 오려고 그러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김만복: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은, 북한은 남쪽이 했다고 그렇게 주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정형근: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김만복: 그러니까 그 주동자를 남쪽이 데리고 오면 ‘봐라, 너희들이 시킨 사람 이제 너희들이 너희 나라로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라고 북한이 선전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형근: 그것은 말이 안되지요. (미얀마 정부가) 조사를 해 가지고 단교까지 한 사례인데, 그것을 안 데려온다면 말이 안되고요. 내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아웅산 테러 사건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처리한 것은 앞으로 정말로 과거사 조사 대상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져야 됩니다. 본인이 오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본인이 한국에 와서 살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여러분이 북한 눈치 보고 지금 막고 있는 겁니다.>
 
 
  의문의 죽음
 
  2007년 미얀마와 북한이 국교를 복원하기 직전 이상한 기사가 국내 언론에 실렸다. ‘북한 공작원 강민철씨가 최근 북한과 미얀마 사이 외교관계 복원 가능성이 엿보이는 상황에서 자신은 남북한 어느 곳에도 가기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외신이 보도했다’(한겨레)는 것이다.
 
  연합뉴스는, 미얀마와 동남아 일대 뉴스를 전문으로 다루는 <이라와디>가 4월 23일 수도 양곤의 인세인 교도소에서 강씨와 같이 생활했던 한 정치범의 말을 따서 “강씨가 지금은 미얀마 언어를 아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안다”면서 “그는 지금 남북한 어디에도 가기 싫어하고 있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강씨는 북한으로 돌아가면 배신자로 간주할 것이고, 한국으로 가면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죄로 법정에 회부될 가능성이 있어 가기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이라와디>는 덧붙였다.
 
  이는 강민철이 한국 정부 인사를 만나서 한 이야기와 다르다. 강씨가 미얀마-북한 복교(復交)를 앞두고 태도를 바꾼 것인지, 만들어진 기사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행을 바라던 강씨로선 미얀마-북한의 관계 개선은 암담한 소식이었을 것이다.
 
  2008년 5월 AP통신은 미얀마(버마) 수감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 인세인 교도소에서 25년간 수감 중이던 강민철이 죽었다고 보도하였다. 이 관계자는 강씨가 미얀마 감옥에 수감된 외국인 최장(最長) 수형자였으며, 사망 전 간(肝)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 전에 강민철을 면담한 한국측 인사는 그의 건강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했었다. 중병(重病)에 걸렸더라도 한국 정부가 나서서 그를 데리고 왔더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송환촉구 청원인들이, ‘북한은 강민철에 대해 위해를 가할 가능성도 예상되는 만큼 인도적 차원에서라도 조기송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고 한 이야기가 마음에 걸린다. 국가적, 인도적 차원에서 정부는 강민철을 한국에 데려왔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17명의 원혼(魂)에 대한 국가의 의무이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예의였다.
 
 
  김정일이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
 
  아웅산 테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아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 8군단 소속 특공부대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강창수는 6·25 남침 때 전사(戰死)한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의 아들. 폭파임무를 맡은 3인(人)1조(組)의 조장(組長)은 진모 소좌(생포 후 사형), 조원(組員)은 강민철(옥사·獄死), 신기철(체포과정에서 사살됨) 상위였다.
 
  세 사람을 태운 애국(愛國)동건호는 1983년 9월 9일 밤 황해도 옹진항을 출항, 8일 만인 9월 17일 오후 미얀마 양곤 항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내린 세 공작원은 주(駐)미얀마 북한 대사관 전창휘 참사관의 집에 갔다. 그들은 이곳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테러실행 계획을 세웠다. 폭약과 폭파장치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정보기관은 애국동건호가 입항,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미리 탐지, 본부에 보고하였다. 노신영(盧信永) 안기부장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얀마 방문 취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6일 테러범들은 숙소를 나와 전 참사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웅산 묘소를 정찰하였다. 다음 날 새벽 세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아웅산 묘소 건물의 천장에 폭탄 세 개를 설치하였다. 강민철과 신기철이 천장으로 올라가 작업하는 사이에 진모는 밑에서 망을 보았다. 이 폭탄들은 1~2km 이내에서 원격조종으로 터지도록 했으며 유효 살상(殺傷) 범위는 80m 내였다. 세 사람은 이틀간 묘소 주변 숲속에서 잤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30분쯤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양곤(당시 랑군)의 아웅산 묘소에서 한국 외교사절단은 전두환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안내를 맡은 미얀마 외무장관이 숙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3분 늦게 묘소로 출발하였다. 주미얀마 한국 대사 이계철씨가 탄 벤츠차(車)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앞서 달렸다. 이 차에 대통령이 탔다고 오판(誤判)한 것은 길가에서 이를 지켜보던 북한공작원 세 명이었다. 대사 차가 지나가고 조금 있다가 나팔소리가 묘소에서 울려 퍼졌다. 북한 공작원은 참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한국 정부의 장·차관급 엘리트 관료 및 취재기자 등 17명이 죽었다.
 
 
  범행 직후 북한소행이라고 단정한 全 대통령
 
  오전 11시쯤 우산유 미얀마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의 숙소로 달려왔다.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범행을 북한소행으로 단정하였다. 대화록에 의하면 이렇다.
 
  “이 테러행위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하고도 집요한 파괴공작의 일환이며 한국, 버마 두 나라의 관계를 갈라 놓으려는 폭력사태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취지가 버마(당시 國名) 정부가 발표할 성명서에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우산유 대통령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심증(心證)을 재차 강조하였다.
 
  “북한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복(顚覆)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IPU(국제의원연맹) 총회를 집요하게 반대하면서 오늘과 같은 수법으로 테러를 자행하였습니다.”
 
  오후 3시경 미얀마 군부(軍部)의 실력자 네윈 의장이 사죄차 방문하였다. 네윈 의장은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정보국에서 숙청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경호에 차질이 있었습니다. 책임자가 제대로 체크를 못한 듯합니다. 사건은 내부 소행일 수도 있고 외부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전 대통령은 네윈에게도 북한소행이라고 강조하였다.
 
  “수사에 참고되는 말을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대치 상황은 의장께서 이해하시기 어려울 만큼 긴장이 고조돼 있습니다. 북한은 서울에서 개최키로 된 IPU 총회에 대해 온갖 방해공작을 펴 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총회 개최 10일 전에 대구 미(美)문화원 폭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수법이 오늘 사건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 점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는 그때 사건도 북한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네윈 의장은 오히려 미얀마 내부 사정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발언을 하였다.
 
  “우리는 범죄자를 꼭 잡아낼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복잡한 파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 오후 서울에서 긴급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는 물증(物證)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천인공노할 북괴의 국제테러 집단으로서의 본성을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았다>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직전에 있었던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에 대한 수사보고를 받고 사용한 폭발물에 관한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가 아웅산 테러의 상황과 연결시켜 범인을 적중시킨 예언을 한 셈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1사단장일 때 제3땅굴을 발견하였다.
 
[1983년 9월 22일 밤 9시33분경 대구시 삼덕동2가 미국문화원 정문 앞에서 폭발물이 터져 대구 영남고등학교 1학년생인 허병철 군이 현장에서 숨지고 대구 중부경찰서 김철호 순경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1983년 12월 8일 다대포 해안에서 생포된 북한 공작원 전충남과 이상규에 의하여 북한소행임이 확인되었다.]
 
 
  天佑神助로 잡힌 두 범인들
 
아웅산 테러 희생자 영결식장에서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눈을 감은 채 두 아들 한회,승회 군의 손을 잡고 있다.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천안함 폭침의 주범이 김정일로 밝혀진 것은 민족반역적 범죄에 대한 천벌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우연적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란 말은 이를 두고 한 것이리라.
 
  10월 9일 오전 범행에 성공한 북한 공작원 세 사람은 항구로 가서 북한 선박 편으로 귀환하기로 하고 일단 흩어졌다. 조장 진모는 10월 10일 저녁, 강을 헤엄쳐 바다로 향하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었다. 주민들이 포위망을 압축해오자 수류탄을 터뜨렸다. 그를 건져냈더니 목숨이 붙어 있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11일 어선에 편승, 항구로 내려가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어부들의 신고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이 초소로 끌고 온 두 사람을 수색하려 하자 둘은 수류탄을 던지고 응사하면서 달아났다. 신기철은 경비병에 의하여 현장에서 사살되고 강민철은 도망쳤다가 다음 날인 12일 군인들에게 붙들리기 전에 수류탄을 터뜨렸다. 왼쪽 아래 팔이 날아갔으나 목숨은 건졌다.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하였고 진모는 거부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강민철은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사형이 유보되었다.
 
  고등학교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이 잘못한 부분은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북한 정권이 저지른 만행은 축소, 왜곡, 비호하는 내용이 많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과 아웅산 사건을 다루지 않은 교과서가 태반이다. (주)천재교육에서 펴낸 교과서는 기술은 했으나 표현이 애매하다.
 
  <남북한의 관계는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였을 때, 수도 랑군에 있는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 폭발사고로 각료를 포함한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발사건 역시 남북한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아웅산,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의 범인이 북한정권임을 애써 감춘 기술(記述)이다. 이 내용만 읽어선 누가 범인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사건의 진상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쓰고 있다. 이 두 사건이 터졌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오늘의 고교생들이 이 글을 읽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더구나 ‘아웅산 폭파사건’이라고 해야 테러라는 느낌이 들 터인데, ‘폭발사고’라 표현하니 가스폭발사고처럼 들린다.
 
 
  “아웅산 테러는 가짜 김정일이 지령한 것인가”
 
  한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김정일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은 2000년 6월의 김대중-김정일 회담 이후부터이다.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김재익(金在益) 경제 수석의 부인 이순자(李淳子) 교수는 이 회담 직후 예언적 글을 남겼다(月刊朝鮮 2000년 7월호).
 
  <북한의 김정일은 지난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수행원을 평양으로 초청하고, 사흘 내내 우리 언론과 방송으로부터 ‘인간적인’, ‘자상한’, ‘정중한’, ‘합리적인’, ‘겸손한’, ‘세련된’ 등의 수사(修辭)를 받았으며, ‘드디어 진짜모습’을 보게 됐다고 흥분하는 전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내 남편을 포함한 열일곱 분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은 ‘가짜’ 김정일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며, 그 5년 뒤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도 진범(眞犯) 없는 사건이 되어 버린 셈인가.
 
  남편을 잃고 슬픔과 증오를 감내하며 살아 왔지만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방송과 언론에 휘둘리며 김정일을 ‘보기’ 시작하는 것만큼 참기 어려운 고통도 없을 성싶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달리 고난을 많이 겪으며 평생 대통령이 되려고 노력한 분이다. 김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이란 도박에서 노벨평화상을 얻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 국민의 자산(資産) 중 조국, 반공, 애국, 충성, 명예, 정의, 용기, 자유를 잃고 돌아온 것은 아닐까. 김대중 대통령 개인의 소원은 성취했을지 몰라도 우린 그만큼 불행한 국민이 될 것 같다.>
 
  북한 땅이 건너다 보이는 임진각 평화공원 안에 ‘버마 아웅산 순국(殉國) 외교사절단 위령탑’이 서 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에서 급거 귀국하여 국민들에게 발표한 성명서의 한 구절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임진각 아웅산 테러 殉國者 위령탑 아래서
 
  <아무리 사악한 무리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더라도 우리의 숭고한, 평화와 전진을 향한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북면(北面)한 쪽에는 이런 돌판 글도 보인다.
 
  <열일곱 탑신(塔身)으로 높이 솟은 넋들이
  원한을 넘어서서 북녘 향해 합장했네
  이념의 악몽서 한시바삐 깨어나라
  한겨레, 한 울타리, 한 품속에 같이 살자
  허공에 메아리치는 저 외침을 못 듣는가
  님들이 틔워놓은 선진화의 그 한 길을
  넓히고 다져가며 줄기차게 나아가서
  끊어진 남북의 길도 이어놓고 마오리라>
 
  악(惡)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의(善意)로써 녹여 버리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아웅산 테러와 86년의 김포공항 테러, 그리고 1987년의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정권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 한 짓이었다. 하늘의 도움이 있었던지 아웅산과 KAL기 테러범들이 현장에서 모두 잡히고 북한정권은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올림픽에 대항하여 주최한 평양 세계청년축전엔 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하여 경제가 멍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악의(惡意)는 그들의 목줄을 죄기 시작하였다.
 
  잇단 테러를 당하면서도 참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던 한국은 북방정책으로 그 성과를 확대하고 한중(韓中)수교로 경제의 활로(活路)를 만들었다. 1983년 전두환 정부가 전략적으로 대응한 결과 북한정권은 망해 가고 있고, 한국은 소란 속에서도 성장하고 있다.
 
  임진각에 서니 순국기념탑이 파란 하늘을 이고 다보탑처럼 빛나고 있었다. 못된 짓만 골라서 한 민족반역자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까지도 제 명(命)대로 산다면 이야말로 민족의 수치란 생각이 들었다. 아웅산 테러의 진정한 비극성은 범인 강민철이 한국에 오고 싶어 해도 한국 정부의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사건은 잊고 싶어 할수록 다시 찾아오는 법이다. 천안함 폭침은 아웅산을 잊은 대가(代價)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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