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 무렵 (차를 타고 가면서)송창식, 윤형주씨 등의 노래를 틀곤 했는데, 아버지께선 추풍령을 지날 때는 라디오를 끄라고 하세요. ‘여기가 경부고속도로 최대의 난공사 지역이었다. 많은 인부들이 현장에서 일하다 순국(殉國)했으니 묵념을 하라’고 하세요”
⊙ “아버지(朴正熙)께서 임기를 마쳤다면 신당동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살아갔을 것”
⊙ “아버지는 再婚 권유 받을 때마다 ‘난 네 어머니밖에 없다’면서 물리쳐”
⊙ “마치 형제지간에 재산을 두고 다투는 것 같이 보이게 만든 사람들이 아직도 언니와 동생 주변에
있어 안타까워”
⊙ “아버지(朴正熙)께서 임기를 마쳤다면 신당동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살아갔을 것”
⊙ “아버지는 再婚 권유 받을 때마다 ‘난 네 어머니밖에 없다’면서 물리쳐”
⊙ “마치 형제지간에 재산을 두고 다투는 것 같이 보이게 만든 사람들이 아직도 언니와 동생 주변에
있어 안타까워”
1954년생.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딸. 본명 박근영(朴槿映). 박서영(朴書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근령(槿姈)으로 개명. 청운초등, 경기여중, 경기여고, 서울대 작곡과 졸업. 1982년 가을 결혼했다가 이듬해 초 이혼, 1986년 말 도미(渡美)했다가 1990년 귀국해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 이후 육영재단과 어린이회관 운영권을 둘러싼 가족들과의 마찰, 14세 연하의 이혼남과 결혼…. 그의 이력에 그동안의 고단했던 개인사가 묻어 있는 듯하다.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서울 돈암동의 아파트는 박지만(朴志晩) EG 회장이 전세로 구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령씨는 자신의 명의로 된 집 한 칸도 없다. 가지고 있던 반포 잠원동의 아파트는 1990년 육영재단을 맡으면서 직원들의 퇴직금 마련을 위해 처분, 재단에 넣었다고 한다.
박씨는 재혼 후 내 집 마련을 위해 주택청약부금에 가입, 매달 돈을 붓고 있다고 한다. 2007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강제 퇴출당한 뒤 생활비가 없어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데, 대출이자가 몇 개월씩 연체되어 신용불량 위기를 겪고 있고 휴대전화 사용료도 내기 힘들 정도로 어렵게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절 나라를 쥐고 흔들었던 대통령의 딸이 건강을 제대로 돌볼 수도 없고,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까지 처해 있는 모습을 보니 인생무상, 권력무상이란 말이 실감 났다.
최근에는 남편 신동욱(申東旭)씨가 언니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박 전 대표는 제부(弟夫)를 고소한 셈인데, 이 사건과 관련하여 박근령씨는 남편의 사건을 맡고 있는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로써 자매지간의 불협화음이 심화되는 듯한 상황이 연출됐다. 박씨는 자신의 개인사와 대권(大權)을 꿈꾸고 있는 언니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가족사에 대한 비화(示必話)를 담담한 어조로 털어놓았다.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봉사활동에 전념”
―지금은 육영재단에서 손을 뗀 상황입니까.
“재단에 임시이사가 들어와 있는 상태여서 저는 출근하지 않고 있습니다.”
―2007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출근투쟁을 했는데요.
“그건 임시이사가 들어오지 않은 때의 일입니다. 동생이 육영재단에 임시이사를 파견했는데, 저는 임시이사 신청이 법률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밝히려고 합니다.”
―현재 살고 있는 돈암동 아파트는 박지만 회장이 전세로 얻어 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입니까.
“전세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명의는 동생 앞으로 돼 있습니다.”
―육영재단에서 물러난 후 생활이 어렵다고 들었는데요.
“경제적으로는 많이 힘들지만 이런 상황을 잊기 위해 봉사활동에 전념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1992년에 설립한 사단법인 어린이교통안전협회 일로 바쁘고, 최근엔 한국댄스스포츠실업연맹, 바둑표준화협회의 총재를 맡고 있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다고 하던데 상태가 어떻습니까.
“이런 얘기 하면 누가 ‘빨리 병원 가서 수술하면 될 걸’이라고 할까 봐 남들에게는 이런 말을 잘 안하는데, 제가 생각보다 겁이 많습니다. 며칠 전에 종합진단 결과가 나왔는데 양쪽 눈에 녹내장이 왔다고 합니다.”
―언니 박근혜 전 대표가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언니가 정치에 투신한 것이 10년이 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언니가 왜 그 어려운 정치에 몸담게 됐는지 그 절절한 심정을 이해합니다.”
―동생 입장에서 보기에 박 전 대표는 어떤 스타일의 정치인인가요.
“원칙을 중시하는 정치인이고, 침착성과 품위 있는 자태는 언니의 큰 장점이지요. 원칙의 틀에서 이것이라고 생각하면 중도에 흔들림 없이 끝까지 그것을 관철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상대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스타일의 정치인이죠.”
인터뷰 도중 휴대전화로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됐고, 표결 직전 박근혜 전대표가 의정활동 사상 처음으로 본회의에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대토론을 했다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박 이사장은 “세종시 문제와 관련, 언니가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세종시에 대해 언니와 생각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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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 공관 마당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박정희 의장 가족. 왼쪽부터 육영수 여사, 박 의장, 박근혜, 박근령. 박 의장 품에 박지만이 안겨 있다. |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세종시 원안은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지 언니가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故 박정희 대통령)도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옮기려고 할 때, 단순히 행정부서를 옮기겠다는 발상이 아니라 과학비즈니스벨트로 만들려는 구상을 했던 것으로 압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이명박(李明博) 정부가 내놓은 수정안이 사실은 아버지가 구상한 안이었습니다.”
―그러면 세종시 문제에 대해 언니가 주장하는 ‘원안 고수’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의견에 반(反)하는 건가요.
“언니는 경제대통령인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수정안’에 찬성했어야 마땅합니다. 왜냐면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수정안은 사실상 과거 아버지 재직시 안보적 차원에서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 밖에 위치한 충청권의 한 지역에 서울과 비슷한 경제과학기술 기반의 복합단지를 조성하여 국가 성장동력의 근간이 되는 산업형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설계와 거의 같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 건설방안은 안보상의 이유와 국토균형발전 차원에서 구상된 것이었다.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입안한 이 계획에 의하면, 행정수도는 미국의 워싱턴D.C와 같은 순수 행정도시로 건설하되, 주변에 교육도시 등 중핵(中核)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오원철 수석은 이와 함께 서해안 가로림만 일대에 대규모 산업-항만도시 건설을 건의했다. 이 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나 대외적으로 공표되지는 않았으며, 박 대통령이 검토하던 단계에서 10·26사태가 발생하면서 사장되었다. 박근령씨가 이 부분을 혼동한 듯하다.-편집자 주)
“인심 잃고, 건강 잃고, 돈 잃고”
―2007년 11월에 육영재단에서 물러난 후 생활이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가 있던데.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19년 동안 지내면서 느낀 것은 ‘인심 잃고, 건강 잃고, 돈 잃고’,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싶네요.”
―원래 본명이 박근영(朴槿映)인데, 이름을 서영(書永)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근령(槿姈)으로 개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격암유록>을 쓴 분이 서영으로 바꿔 줬는데, 한참 후 동양철학을 하는 분을 만났더니 상생(相生)하는 쪽으로 가려면 서영보다는 근령이 낫다고 해서 바꾸게 됐어요. 현실의 삶이 고달프다 보니 작은 돌파구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죠.”
―신당동 사저에 대해서는 어떤 기억이 남아 있습니까.
“아버지가 어머니 돌아가신 후 우리에게 예쁜 노트를 나누어 주고는 ‘뭐든 좋으니 어머니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생각날 때마다 모두 적어 두라’고 했어요. 그때는 내 머리에 다 입력되어 있는데, 왜 그런 것까지 쓰라고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아버지 말씀이 정말 옳았어요.”
―그래도 몇 가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초등학교를 여기서 다녔는데, 집에 오니 너무나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거예요. 어머니께서 한복에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도넛을 만들고 계셨어요. 또 어린이날에는 직접 꽃밭도 만들어 주시고…. 아버지께서 신당동 집은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이니 돌 한 조각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마 아버지께서 임기를 마쳤다면 신당동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살아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신당동에서 살다가 장충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을 거쳐 청와대로 갔는데, 이 집을 떠난 건 몇 살 때입니까.
“1963년에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취임식이 12월이었고, 의장 공관에서는 혁명 후 1년8개월 정도 살았습니다.”
―신당동에서 태어났나요.
“아닙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아는데, 동네가 고사북동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느 동네인지 모릅니다(당시 성북구 보문동-편집자 주). 저는 어린 시절부터 피부가 좋지 않았어요. 언니나 동생은 햇볕에 타도 금방 하얗게 되는데, 저는 그렇게 안됩니다. 제가 어머니께 ‘제 피부가 왜 이렇게 거칠죠’라고 하면 어머니는 ‘널 가졌을 때 사과가 먹고 싶었는데, 사과 사 먹을 형편이 안돼서 그렇게 됐다’라고 하셨어요. 신당동에서는 남동생이 태어났죠.”
―청와대에는 언제 들어갔나요.
“의장 공관에서 짐 싸는 문제도 있고, 어머니께서 ‘신당동에 할머니와 있다가 청와대가 다 정리가 되면 그때 와라’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늘 사적(私的)인 일보다는 공적(公的)인 부분을 먼저 생각했는데, 그때도 우리 식구 생활보다는 청와대를 하루빨리 안정시켜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대통령의 딸이라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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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의 세 남매가 청와대 경내에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놀고 있다. 왼쪽부터 박지만, 박근령, 박근혜. |
―처음에 청와대에 들어가서는 어리둥절했겠네요.
“그렇죠. 너무 넓으니까. 여기가 방인 줄 알고 열면 현관이 나오고….”
소녀 박근령은 장충초등학교를 다니다 청운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초등학교에 대한 사연이 좀 있다.
“1961년 5·16 나기 전에 어머니가 이화여대 사대부속 초등학교에 저를 넣고 싶었나 봐요. 뺑뺑이(추첨)를 돌리는데 어머니가 그걸 창밖에서 열심히 지켜봤죠. 불행하게도 저는 꽝 먹었어요.”
그는 경기여중,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어떤 계기로 음악을 전공할 생각을 했나요.
“어머니가 제 생일날 용돈을 주면서 ‘사고 싶은 거 마음대로 사라’고 했는데, 저는 명동에 있는 한 가게에서 장난감 북을 사 왔습니다. 장난감인데 그 소리가 그렇게 좋더군요.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 주제곡을 들으면 제가 피아노로 그 노래를 치곤 했습니다.”
―피아노는 언제 배웠습니까.
“어렸을 때 언니하고 같이 배웠는데,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건 너무 어려워서 하기 싫고, 영화 주제곡 같은 걸 치고 싶은데, 선생님들은 손이 망가진다고 못하게 했어요. 어쨌든 작곡을 해 보겠다고 해서 부모님이 허락한 것 같습니다.”
―청와대 시절 대통령의 딸이라 불편했나요.
“그렇죠.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하고 자꾸 누가 따라다니니까. 그분(경호원)들 힘든 건 생각 못하고 갑자기 없어지고 사라지고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미안하지요. 결국에는 경호원들이 자동차를 타고 따라오더군요.”
―대학 재학시절 서울대생들의 데모를 많이 목격했다고 하더군요.
“유신 반대 시위가 자주 일어나 휴교가 되면 아버지는 저희에게 방학 때 놀 생각 하지 말고 산업시찰을 하고 오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차 안에서 담배를 많이 피우는 바람에 우리의 멀미가 심했는데, 어머니는 향나무 잎이나 귤껍질을 코에다 대고 ‘창 좀 내려라. 멀미 난다’고 했어요. 제가 부모님 가운데 껴 앉아 지방을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 무렵 송창식, 윤형주씨 등의 노래를 틀고 가곤 했는데, 아버지께선 추풍령을 지날 때는 라디오를 끄라고 하세요. ‘여기가 경부고속도로 최대의 난공사 지역이었다. 많은 인부들이 현장에서 일하다 순국(殉國)했으니 묵념을 하라’고 하세요.”
―아버지가 고속도로에 애착이 많았군요.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저에게 ‘아까 지나친 터널 이름이 뭔지 맞혀 봐라’ 또는 ‘다리 이름이 뭔지 아느냐’고 물어보곤 했어요. 덕분에 저는 제3한강교(현재의 한남대교)에서부터 다리 이름, 터널 이름을 줄줄이 외우게 됐습니다.”
―언니 박근혜 전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나 꿈이 있었습니까.
“어머니 피격 후 아버지가 우리 끌어안고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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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6월 30일 박근령의 생일잔치. 박정희 대통령이 이쑤시개로 애견 진도의 이빨 사이에 낀 음식찌꺼기를 제거해주고 있는 모습을 박근령과 박지만이 구경하고 있다. |
―박근혜 전 대표는 1974년 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는데, 유학 중 어머니 피격 소식을 들었나요.
“그렇게 됐습니다. 그때 언니가 프랑스에서 어머니께 편지를 부쳤는데, 당시엔 국제우편이 많지 않아 배달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어머니께서 사고를 당해 언니가 급거 귀국한 다음에 본인이 그 편지를 받았으니…. 그리던 어머니를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장례를 치러야 했기에 언니의 충격이 너무나 컸죠.”
―박 전 대표는 어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알게 됐다고 하던가요.
“그 무렵 언니는 방학을 이용해 세미나 참석차 프랑스 니스를 방문하고 있었죠. 세미나가 끝나면 서울에 와서 어머니를 뵙고 갈 계획이었대요. 그런데 갑자기 대사관에서 ‘빨리 서울에 들어가야 한다’고 연락이 왔답니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고 대통령께서 빨리 귀국하라는 연락이 와서 가야 한다’고 했대요. 부랴부랴 세미나를 취소하고 차에 타려고 하는데 가판대 신문에 한복을 입은 어머니 사진이 실려 있더랍니다. 호기심이 들어 신문을 사서 펴 보니 ‘한국의 마담 박이 암살당했다’고 실려 있었대요.”
―단란했던 가정이 어머니 돌아가시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렸겠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언니도 갑자기 부름을 받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야 했죠.”
―박 이사장은 어머니가 쓰러진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미8군 측에서 육 여사 총상 치료 제의
“저는 그날 아침 동생과 TV를 보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그날 옷고름 구겨진 걸 펴고 그러느라 하도 바빠서 아침식사도 못하고 가셨어요. 밥상에 덩그러니 식어 있는 미역국을 놔 두고 가셨죠. 동생과 TV를 지켜보는데 식장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탕’ 소리가 나면서 화면이 꺼지더라고요. 뭐가 어떻게 됐는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 나중에 알게 됐죠. 어머니가 수술 중이라는 것만 알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청와대에 오셨다고 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요. 아버지의 눈이 많이 충혈된 채 저희를 끌어안으시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울었어요.”―문세광 저격사건 당시 경호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경호 부분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총기 소지가 금지돼 있기 때문에 총상이 흔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8군은 총상 치료의 달인(達人)이라는 겁니다. 미8군 측에서 ‘우리가 퍼스트레이디를 치료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하는데 서울대병원 측에서 ‘수술이 진행 중이라 그럴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만약 미8군에서 어머니 치료를 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머리 쪽에 총상을 입었으니 결과야 같았겠지만 그래도 총상 치료에 경험이 많은 분들에게 치료 한번 받아 보게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게 되네요.”
―아버지는 청와대에서 술을 많이 들었습니까.
“많이 드셨죠.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늘 걱정했어요. 어떤 때는 아버지 모르게 그 앞에 놓인 술병을 저보고 살짝 가서 들고 나오도록 했어요.”
―주로 누구와 술을 들었나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야 된다고 하면서 청와대 출입기자분들과 많이 잡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 한 분의 말씀을 들어 보니 박정희 대통령의 인품이 남달랐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일본 육사(陸士)의 군인정신, 장교로서의 정신교육을 철두철미하게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기자분의 부친상을 전해 듣고는 그 기자 분에게 청와대에서 매우 정중하게 조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고 그런 말씀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일기도 쓰고 노래도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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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한나라당 후보가 대구 달성 보선에서 당선이 확정된 후 동생 근령씨와 함께 운동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1998년 4월) |
“언니는 편하게 승용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인데, 만약 아무렇게나 앉아서 차를 타고 가면 고생스럽게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자제들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언니는 항상 모범생이었고, 어머니 돌아가신 후에는 언니를 의지하며 더 든든하게 생각했어요. 동생에 대해서는 늦게 얻은 외동아들이라 겉으로는 표현을 잘 안 해도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이 생각했어요. 저는 중간이라 크게 말씀드릴 내용은 없지만 아들만 했겠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후 박 대통령이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언젠가 아버지가 싱싱한 오렌지를 들고 서 계신 어머니 꿈을 꾸었답니다. 너무 반가워서 ‘여보’ 하고 외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대요.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했는지 일기도 쓰고, 노래도 만들고 했던 것 같아요.”
―언니 박근혜 전 대표는 22세에 퍼스트레이디를 맡았는데, 그 역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나요.
“어머니를 대신한다는 사명감도 있었고,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주변 참모들이 박 대통령에게 재혼(再婚)을 권유했다고 하던데요.
“아무래도 혼자 있으면 외로워 보이니 주위 참모분들이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재혼을 권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때마다 ‘난 네 어머니밖에 없다’면서 물리쳤어요.”
―언니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부담을 느끼지 않았나요.
“언니는 부담이라기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힘든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어요.”
―언니가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습니다만 가족들 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해묵은 얘기가 되겠지만 아마 육영재단에 들어올 때의 오해가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최근에 마치 형제지간에 재산을 두고 다투는 것 같이 보이게 만든 사람들이 아직도 언니와 동생 주변에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박지만 회장이 충격을 많이 받았나요.
“동생이 감수성이 예민할 때라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방황을 많이 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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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제32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표와 박지만씨 부부, 박근령씨 (오른쪽부터). |
아버지의 피 묻은 옷 언니와 함께 빨아
1977년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한 박근령씨는 2년 후 10·26이라는 비극을 또 다시 맞게 된다. 그는 그 무렵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언니 박근혜 전 대표의 개인비서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유학을 꿈꾸었으나 언니를 위해 그 꿈을 포기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할 무렵 언니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느라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언니를 도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언니의 개인비서를 자청하게 됐죠.”
―10·26 때 아버지의 서거 소식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청와대에서 잠자리에 들려는 참에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와대 가까운 곳에서 사건이 발생했는데 혹시 그날 밤 총성은 못 들었나요.
“기억이 안 납니다. 그때 제1부속실에 근무하던 분이 올라와서 ‘아버지 옷을 챙겨 달라’고 하자, 언니는 그분에게 ‘휴전선은 무사합니까’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워낙 경황이 없어 그날 밤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피 묻은 옷을 가지고 와서 빨았다고 들었습니다.
“예. 언니와 함께 빨았어요. 국군통합병원에 가서 피 묻은 옷을 받아 왔는데….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된 거죠. 두 분 모두 갑작스럽게 유언 한마디 없이….”
―1979년 아버지마저 비극적으로 돌아가셨을 때는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청와대는 공적(公的)인 곳이니까 되도록 빨리 짐을 싸서 떠나야 한다는 것과 아버지의 유품들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1986년부터 4년간 미국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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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여의도의 한 웨딩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차녀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과 신동욱씨의 결혼식이 열렸다. (2008년 10월) |
“대부분 총무처에 보관하고 있고, 서류는 개인적으로 언니가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까.
“저는 그런 예감이 전혀 없었고요. 당시 언니에게 어떤 분이 ‘한 번 뵐 거면 두 번 뵙고, 두 번 뵐 거면 세 번 봬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박 이사장은 1986년 4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유는 뭡니까.
“미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면서 돈도 좀 벌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고 갔지요.”
―미국에서 생활할 때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언니가 보내 주는 돈으로 살았어요. 대부분 학원비로 들어갈 정도였어요. 그때 틈나는 대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코리아타운의 미장원에 가면 잡지 같은 게 한국보다 한 달이 늦습니다. 거기에 우리 기사가 심심치 않게 실리지만, 그 책을 보고 있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전혀 없더라고요.”
―LA에 사는 교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거기 살았다는 걸 몰랐겠네요.
“아는 분이 거의 없었죠. 신경 쓰는 사람이 없으니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타인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잖아요. 미국에서 가게를 하나 차리고 싶었는데 경제적 여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귀국한 것이 1990년인데요.
“네. 비자가 만료되기 전이었고, 또 영주권을 따기 위해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언니, 독신으로만 살겠다고 한 적도 없다”
―지난 총선 때 한나라당에서 활동했는데 앞으로 정치할 생각이 있습니까.
“정치라는 것이 제 적성에는 안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정치권에서 풀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해법을 내놓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언니는 현재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입니다.
“언니는 22살 때부터 퍼스트레이디를 시작했잖아요.”
―언니에게 ‘결혼하라’는 조언을 한 적은 없나요.
“언니는 평소 결혼을 안 했다고 해서 큰일 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언니가 독신으로만 살겠다고 한 적도 없어요.”
―친박(親朴)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친이’나 ‘친박’이라는 말은 경선 때 경쟁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는 있지만 지금까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경선 때 언니를 도울 생각은 없었습니까.
“왜 도울 생각이 없었겠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저를 언니 캠프와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됐어요.”⊙
사진 : 서경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