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申鉉碻 前 국무총리 회고록 준비하는 申喆湜 전 차관

“대학 입학하자 ‘경제를 알아야 한다’며 삼성전자·쌍용양회 주식 사주셨죠”

  • : 백승구  eaglebs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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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 다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하는 것이 정치다.”
“자기가 공감하지 못하는 일을 마지못해 하는 공무원은 나라와 국민의 敵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옳다고 믿으면 끝까지 밀고 가라”


申喆湜
⊙ 1954년 경북 칠곡 출생.
⊙ 경기高ㆍ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서울大 행정학 석사, 美 스탠퍼드大 MBA.
⊙ 경제기획원 과장, 재정경제원 예산담당관, 기획예산처 정책홍보관리실장,
    국무총리실 정책차장(차관급) 역임.
신철식 전 국무총리실 정책차장.
申喆湜(신철식·55) 前 국무총리실 정책차장(차관급)은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이었던 故(고) 申鉉碻(신현확·2008년 4월 작고) 前 국무총리의 외아들이다.
 
  최근 신 전 차관은 부친에 대한 회고록(부제: 아버지와 아들, 그 애증의 역학 관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 강남 선릉역 인근에 위치한 신 전 차관 소유의 빌딩 지하 1층에서 그를 만났다. 신 차관은 부친으로부터 증여받은 주식(삼성전자)을 모두 팔아 지난 2004년 빌딩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는 공직 재임 시절 재산순위 1위를 차지하던 재산가다.
 
  개인사무실은 于湖(우호)문화재단 사무실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호문화재단은 신현확 전 총리의 유산 전액을 털어 설립한 재단이다. 재단이사장은 신 전 총리의 의전비서관을 지낸 張永喆(장영철)씨이고, 아들 신철식은 상임고문으로 있다. 于湖(우호)는 신현확 전 총리의 아호로 ‘한 없이 넓고 크게 되어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소년 家長이 되다
 
  신철식 전 차관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사실상 소년 家長(가장)이 됐다고 한다. 李承晩(이승만) 정부 말기에 부흥부장관을 지낸 부친이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처벌을 자청한 까닭이다. 신 전 차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를 잡으러 온 체포조가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저녁 7시쯤이었는데 사랑방에 가니 부친이 앉아 계시고 좌우로 20여 명이 둥글게 앉아있더라고요.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으니까 하시는 말씀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외워라. 이것은 아버지의 유언이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셨어요.
 
  ‘내일부터 아버지는 없다. 더 이상 아버지 노릇을 못한다. 네 생전 다시는 나를 못 볼 것이다. 세상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오만 가지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이건 알아라. 네 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가지고 떳떳하게 남은 네 인생을 살아라. 네가 크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니 아버지는 ‘이제 그만 가봐라. 자기 전에 서른 번 외우고 자거라’고 하셨죠. 제가 올해 쉰 다섯인데 지금까지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해요.”
 
  아버지 신현확은 곧바로 수감됐다. 아들은 일년이 넘도록 아버지가 어디에 갔는지, 무슨 일로 집에 돌아오지 않는지를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2년이 넘도록 수감생활을 한 후 병보석으로 잠시 나오셨어요. 아버지는 ‘신문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시더니 보도내용이 왜곡돼있는 것을 보시더니 매우 화를 내셨어요.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모든 재판에 아들을 참관시켜라. 내 진술을 모두 녹음시켜라’고 지시했어요. 그런데 곧 5·16혁명이 일어났지요. 혁명재판을 한다고 또다시 재판을 받았지요.”
 
  신철식 차관은 “하얀 죄수복에 동아줄에 칭칭 묶인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끝없는 나락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살기 위해,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재판 진행상황을 두 눈 부릅뜨고 봤죠. 눈물을 흘리면 어머니께 몹시 맞았어요. 남자는 부모가 죽었을 때와 자식이 죽었을 때만 우는 거라고 하셨어요.”
 
 
  李秉喆 회장에게 100만환 빌려 탁구장 운영
 
申鉉碻 前 국무총리.
  ―선친이 수형 생활 하실 때 가정은 어떻게 꾸려나갔습니까.
 
  “저한테 유언한 그날 밤 어버지는 삼성 李秉喆(이병철) 회장께 전화하셔서 이런 부탁을 하셨대요. ‘나라는 뒤집혔고, 나는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갚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 못하지만 살아서 나온다면 꼭 갚겠다. 100만환을 빌려주시오.’ 100만환은 화폐개혁 후에 십만원이었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1억원 정도 될 거예요(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빌린 돈은 신현확 총리가 기업체 사장으로 있으면서 번 돈으로 갚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병철 회장한테 빌린 돈으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탁구장을 운영했어요. 탁구장 수입으로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셨죠.”
 
  ―당시 분위기로 볼 때 학교생활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왕따가 아니라 그야말로 이지메를 당했어요. 4·19 직후 이승만 정권의 국무위원 18명 중 여덟 명의 국무위원을 ‘8인의 원흉’이라고 불렀어요. 선친도 그 중 한 분이었죠.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지만, 아버지는 ‘해외 도피자산 내놓으라’고 추궁당했어요. 그래서 학교 친구들에게 ‘원흉의 자식’이라고 놀림 받았죠.”
 
  학교 성적이 뛰어났던 초등학생 신철식은 아버지로 인해 매일같이 주먹질을 해댔다. 전교에서 공부도 1등, 싸움질도 1등을 하는 ‘이상한’ 학생이 됐다고 한다.
 
 
  한겨울 마당에 나가 이불 펴고 취침
 
신현확 父子(부자).
  신철식은 당시 명문중학교로 유명했던 경기중학교에 수석 입학했다. 입시과외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경기중에 입학하면서 아버지와의 갈등이 시작됐다” 면서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래야 하나’하는 불만을 생겼다”고 했다.
 
  “선친께서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영하의 이 추위에 시멘트 바닥에 주무시는데 네가 감히 안방에서 자느냐’며 집안 마당에 이불을 깔고 자게 했어요. 아버지가 감옥에 계시는 3년 동안 매년 겨울을 그렇게 보냈어요.”
 
  아버지 신현확은 출소 후 자식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식에게 스파르타식 교육을 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유신체제가 시작됐어요. 아버지가 유신을 반대하셨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생을 조금 했지요. 朴正熙(박정희) 정권은 아버지의 국회의원 출마를 요구했습니다. 1973년 1월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해 아버지는 고향에 자주 오갔죠. 1972년 겨울 대학예비고사 소집한 날이었어요. 폭설이 와서 교통이 다 끊겼지요. 할 수 없이 두 시간 동안 걸어서 집에 왔는데 그날 밤 제가 폐렴에 걸린 거예요.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데 선거운동으로 지방에 내려가 계시던 아버지가 예비고사 전날에 병원에 오셨어요.
 
  아버지는 대뜸 ‘예비고사는 네가 성인이 되는 첫 관문인데, 이번에 예비고사를 못 보면 넌 1년을 꿇어야 한다. 인생에서 1년을 그렇게 허비한다는 것은 너무나 값 없는 일이다. 네가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링거주사를 꽂더라도 예비고사를 치르는 게 좋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오기로 ‘알겠습니다.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시험 치겠습니다’고 했죠. 시험을 본 후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맸지요.
 
  그 후 아버지께서 또 병원으로 오셔서 ‘폐렴은 누워있는다고 낫지 않는다.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면 출석일수를 채워야 한다.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거라’고 하세요. 집에 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면서 본고사 시험을 준비했어요.”
 
  아들은 아버지처럼 공무원이 되기 싫어서 법학 대신 경제학(서울대)을 선택했다. 아들은 폐렴으로 고생했지만 대학 관문을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합격자 발표가 나는 날, 저는 밖에서 술 마시며 놀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가만히 놔둘 리 없지요. 집안으로 곧장 돌아왔더니 어머니는 ‘고생했다’며 껴안았는데 서재에 계시던 아버지는 ‘뭐 하느냐 이리 건너 오너라’고 하셨어요. ‘아침 6시부터 7시까지는 日語(일어), 7시부터 8시까지는 中國語(중국어)를 배워라. 네가 활동하는 시대에는 영어는 기본이고 일어와 중국어를 몰라서는 안 된다. 미리 선생님을 준비해 뒀다’고 하시는 거예요. 다음날 아침부터 일본어, 중국어 교습을 받았죠.”
 
 
  대학 합격한 날부터 일어·중국어 공부
 
  신현확은 1973년 1월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는 절대 정치를 하지 마라”며 정치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했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은 계속된다. 경제학을 전공하는 아들에게 대학 입학 선물로 주식을 증여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영감께서 ‘너도 이제 경제인이 됐으니까 경제를 알아야 한다. 학교에서 이론으로 배우는 것보다 직접 주식을 해봐라’며 삼성전자와 쌍용양회 주식을 주셨어요. 지금이야 삼성전자 주식의 가치가 엄청나지만, 그때는 비상장주식에 평범한 주식에 불과했죠. 아버지는 ‘내가 볼 때 앞으로 전자산업이 발전할 것이다. 주주총회에도 참여해 기업 돌아가는 것도 배워라’고 하셨어요. 그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주식을 30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중간 중간에 팔 생각도 했지만, 그냥 묻어뒀지요.”
 
  신철식 차관은 아버지 덕에 공무원 재산총액 1위를 수년간 차지했다. 그러다가 2003년 12월 한달 동안 모든 주식을 처분했다.
 
  “2003년 12월경, 한 신문에서 삼성전자 최대 주식보유자 1위에서 20위까지 리스트가 공개됐어요. 그때 제가 아마 2만4000주로 11위였을 거예요. 고위공직자가 특정 기업의 몇 대 주주라 것이 오해를 받을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전량 매각했죠.”
 
  이승만, 박정희, 全斗煥(전두환) 정권을 거치는 동안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조국 근대화·민주화·산업화의 기초를 닦은 신현확 전 총리. 그는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와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도쿄의 상무성에서 일했다. 해방 후 대구대(현 영남대)에서 법학을 가르치다가 張澤相(장택상) 당시 수도경찰청장의 추천으로 관직에 복직했다.
 
 
  “8인의 원흉인데 나를 쓰면 세상이 손가락질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집무실 안으로 안내하는 신현확 당시 보사부장관과 차지철 경호실장.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1954년 상공부 국장, 1957년 부흥부 차관, 1958년 외자청장을 거쳐 39세 때인 1959년 부흥부장관으로 발탁됐다. 1960년 4·19 직후 3·15 부정선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2년 넘게 수감생활을 했다.
 
  신현확 전 총리는 1964년 8·15 때 특별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된다.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로 불렀다고 한다. 아들 신철식의 얘기다.
 
  “박 대통령이 ‘나하고 같이 일하자’고 했대요. 아버지 연세가 당시 마흔셋이었는데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제가 소위 8인의 원흉인데 정권 초기에 나를 쓰면 세상이 손가락질한다. 내가 입각하는 것은 대통령께 도움이 안 된다’고요.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그토록 유명한 최후진술을 남긴 신 선배가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문제 없는 건 세상이 다 알지 않느냐’고 했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고사했어요. 박 대통령이 ‘그러면 바로는 못 도와줘도 옆에서 도와달라’고 해서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으로 일하게 됐죠. 당시 아버지는 박 대통령을 잘 몰랐는데, 박 대통령이 아버지를 ‘신 선배’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이 군에 있을 때 아버지가 군 장성들을 불러놓고 강의를 몇 번 하셨대요. 그때 박 대통령이 아버지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현확 전 총리는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 1979년 10·26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1980년 5월까지 국무총리로 재직했다. 그는 10·26, 12·12, 5·17, 5·18이라는 현대사의 광풍 속에서 국가와 헌법을 지키려고 신군부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할 말을 했다.
 
  朴正熙 대통령이 시해당한 1979년 10월 26일 밤 육군본부 임시 국무회의장에서 살기등등한 金載圭(김재규)를 눌러 사태를 反轉(반전)시킨 사람이 바로 그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막으려 했던 것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국회해산과 비상계엄령의 전국확대를 ‘헌법위반’이라며 저지하려 했던 이도 그였다. 그는 1980년 5월 신군부의 정권장악 의도를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국무총리직을 내던지고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신현확의 삶’은 ‘신의’와 ‘지조’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아들에게 그렇게 혹독했던 것도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신현확의 ‘고집’은 1979년 10·26 이후 實勢(실세)로 등장한 신군부의 집권욕 저지에도 그대로 발휘됐다. 그가 국무총리직을 내던지기 4일 전인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했다.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 위해 周永福(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과 李熺性(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신현확 총리를 찾았다. 신현확 총리의 육성증언이다.
 
  “마지막에 그만둘 때는, 아마 토요일이었지. 저녁 먹고 공관에 있는데 그때 몇몇이 나를 만나러 왔단 말이야.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서류를 내미는데 ‘질서회복을 위해선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전국계엄 선포해 주십시오. 그리고 국회해산해 주십시오’하고 해. 그리고 비상 무슨 회의, 국보위라 그래. ‘국보위란 게 뭐냐’고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조직으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니 이 세 가지를 결재해 주십시오’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 하느냐. 비상계엄 전국선포는 질서가 문란해서 안 할 수 없다면 제외해 놓고 이야기하자. 국회해산, 그리고 정부가 있는데 또 무슨 정부 같은 국보위, 이게 뭐냐. 이거 혁명 아니냐. 혁명을 결재받아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혁명은 총칼로 하는 거지. (결재) 못한다’고 했어.”
 
  아들 신철식은 당시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세상사를 초월한 超人(초인) 같았다”고 했다.
 
  “고시 합격해 1979년 총무처 수습사무관을 거쳐 이듬해 경제기획원으로 발령났지요. 그때 그런 일들이 터진 겁니다. 당시 거리에서는 아버지가 ‘全權(전권)을 휘두른다’, ‘집권욕이 있다’며 ‘물러나라 신현확, 불쌍하다 최규하’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얘기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어요. 끝까지 헌법을 지켜야 한다, 군부의 등장만은 막아야 한다며 밤잠을 설치셨지요.
 
 
  넘어서는 안 되는 ‘고귀한 산’
 
  당신께서는 인간사의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를 떠나 인생의 스승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죠.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다가 오히려 넘어서는 안 되는 ‘고귀한 산’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아들 신철식은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거쳐 1975년부터 행정부에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공무원의 삶을 그리게 된다. 대학 재학 때 고시에 합격하고도 불합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4학년 때 행정고시 2차에 합격했어요. 그해 사무관 150명을 뽑기로 돼 있었는데 제가 90등을 한 거예요. 그런데 88명만 뽑았어요. 유신사무관 제도가 처음 도입됐는데, 나머지 인원을 군에서 뽑았던 거죠. ‘뭐 이런 게 다 있나. 공무원 절대 안 한다’고 결심하고 유학을 준비했죠. 미국 명문대에 합격까지 해놨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제가 미국으로 가면 ‘노랑머리’ 아가씨랑 결혼할 것 같아서 ‘결혼하면 유학을 허락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죠. 그런데 집사람이 결혼 직후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지. 그렇게 포기할 거냐. 유학은 언제라도 갈 수 있다. 고시생 마누라도 좋으니까 한번 더 시험봐요’라고 하더군요. 1978년에 딸 아이를 얻은 그해 10월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전교조와의 전쟁
 
  아버지는 공직자의 길을 걷게 된 아들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고 한다.
 
  “‘公私(공사)를 철저히 구분해라’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라’고 하셨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강조하셨던 것은 ‘소신대로 일해라’였어요. ‘자기가 공감하지 못하는 일을 마지못해 하는 공무원은 나라와 국민의 敵(적)이다’라고 하셨지요. 저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그 가르침을 99% 실천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무관 때부터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부총리까지 설득해서 밀어붙였어요.”
 
  ―정책 결정할 때 아버지의 조언을 자주 구했습니까.
 
  “2002년 당시 기획예산처 사회예산국장으로 있을 때 전교조와 크게 다투면서 너무 힘들어 아버지와 상의한 적이 있어요. 전교조 측이 ‘담임수당, 교직수당 인상 등 세 가지를 안 들어주면 가만히 안 있겠다’는 거예요. 당시 金大中(김대중) 대통령 때 전교조의 힘이 대단했어요. 여기저기서 압력이 들어왔죠. 교육부는 ‘전교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했고, 저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텼지요.
 
  국회에서도 전교조 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분위기였어요. 그 건으로 정부 예산안 전체가 통과되느냐 마느냐 갈림길에 서 있었어요. 정부 내부에서, 국회와 정부 간의 갈등이 심각했어요. 당시 부처 장·차관들은 서둘러 예산안이 통과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끝까지 안 된다는 입장이었어요. 별도로 조사를 해보니 교육부가 ‘물밑 협상’을 했던 거예요. 저는 국회와 교육부 측에 ‘매번 부처이기주의로 언더테이블 협상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일처리 방식 자체가 틀렸다’고 주장했죠.
 
  그때 아버지는 ‘너 예산국장까지 했으면 공무원생활 충분히 했다. 그것 때문에 위에서 ‘사표 내라’고 하면 공무원 그만둬라. 나는 네 논리가 옳다고 생각한다. 한번 굴복하면 계속 굴복하게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만둘 생각을 하니 무서울 게 없었어요. 결국 제 뜻대로 전교조 案(안)은 부결됐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부담주지 않겠다”
 
  ―盧武鉉(노무현) 정부 때는 갈등이 없었습니까.
 
  “제거 대상 1호였지요. 오늘이라도 그만둘 각오로 생활했어요. 사실 노무현 정부 중간 때 사표를 낸 적이 있어요. 청와대에서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며 사표를 내라고 합디다. 그런데 제가 모셨던 몇몇 장관님과 동료들이 청와대 측에 반대를 하더군요. 당시 실세그룹이었던 386 라인에 저항을 했던 겁니다. 결과는 승진으로 이어졌어요. 승진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신철식 전 차관이 우호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우호학술상을 제정한 것도 부친의 遺志(유지)를 받들기 위함이다.
 
  “5~6년 전쯤의 일로 기억해요. 아버지와 저녁식사를 하는데 제가 그랬죠. ‘저는 재산도 충분하고 아쉬울 거 없으니까 아버지의 남은 재산으로 문화재단을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여쭈었지요. 아버지께서 ‘내가 재산을 내놓으면 나한테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 미안해서라도 뭘 내놔야 할 거 아니냐. 마지막 가는 길까지 주위사람들한테 부담을 지워서야 되겠느냐’고 해요.
 
  신 전 차관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5개월 뒤인 2008년 9월 상속재산 전액을 털어 재단을 설립했다.
 
  아들은 부친의 뜻을 기려 ‘국가지도자 엘리트 양성기관’을 만들 계획이다.
 
  “아버지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려면 보편타당한 생각을 가진, 그 시대의 주류에 서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도자로서 필요한 자질을 가르치는 교육시스템이 없다. 선배들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하셨어요. 정상적인 교육과정과, 정상적인 엘리트 코스를 거친 편견 없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거죠. 이를테면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이나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과 비슷한 취지의 기관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평준화 교육도 필요하지만, 엘리트 교육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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