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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32년간 트로트의 현장을 지킨「애모」의 가수 김수희

『내 노래는 성장의 그늘에 짓눌린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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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색과 분홍색으로 된 심플하지만 강렬한 느낌의 의상이 눈길을 끌었다. 1953년생으로 우리 나이 53세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는 젊고 섹시해 보였다. 인터뷰 자리까지 무대로 여기는 프로 연예인다운 자세였다.

任珍模 음악평론가
대가 센 女가수
  가수 「김수희」 하면 이지러진 삶이 주는 애조 띤 노래가 떠오른다. 「멍에」, 「너무합니다」, 「남행열차」, 「잃어버린 정」, 「서울여자」 그리고 「애모」 …. 세월이 아무리 유쾌하고 최신 감각의 유행가를 요구해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기구한 사연이 담긴 눈물겨운 곡만을 불러 왔다.
 
  애절한 노래는 흔히 가수에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이미지를 가져다 주기 쉽다. 그러나 김수희는 정반대로 「대가 센」 이미지를 갖고 있다. 팬들은 그녀로부터 쉽게 타협하지 않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지난 7월1일 가수노조가 출범했을 때 김수희는 『20년 경력 가수가 TV에 한 번 출연해서 26만원을 받을 때, 같은 경력을 가진 탤런트·배우가 200만원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발언했다. TV에 얼굴을 내밀어야만 하는 현역 가수로서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가수 김수희는 자신의 대표작인 「애모」의 가사처럼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약한 여인이 아닌 셈이다.
 
  이런 이미지의 불일치는 또 있다. 트로트 가수들의 팬은 대개 기성세대다. 그런데 김수희는 유별나게 젊은 층에서 인지도가 높다.
 
  몇 해 전 KBS 라디오가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10代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그녀의 노래 「남행열차」가 10代가 좋아하는 트로트 1위로 선정됐다. 이 노래는 노래방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합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트로트 곡 가운데 하나다.
 
  가수 김수희는 「멍에」, 「남행열차」, 「애모」 세 곡만으로도 대중가요 역사에서 우뚝 선 위치를 점한다. 이 세 노래는 20세기 히트 가요를 조사했다 하면 어김없이 100위 안에 들어갔을 大히트곡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동료가수들이 다 현장을 떠났어도 그녀는 아직 무대를 휘젓는 현역이다.
 
  그녀는 『내 사전에는 은퇴라는 말이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가수 김수희를 만나러 경기 안양에 있는 사무실에 갔을 때 그녀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막 나온 새 앨범을 건넸다. 타이틀곡 「사랑받고 싶은 여자」를 비롯해 총 네 곡이 수록된 미니 앨범이다. 그녀는 『신중해지자는 마음을 가지고 만든 새 앨범』이라고 소개했다.
 
  그녀가 입고 나온 오렌지색과 분홍색으로 된 심플하지만 강렬한 느낌의 의상이 눈길을 끌었다. 1953년생으로 우리 나이 53세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는 젊고 섹시해 보였다. 인터뷰 자리까지 무대로 여기는 프로 연예인다운 태도였다.
 
 
 
 32년 만에 털어놓는 이야기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녀의 매니저가 미리 『사생활에 대한 얘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리는 편이다』라며 「주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김수희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민감한 私的인 얘기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사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해 수준을 정해 놓고 적당히 얘기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었다. 역시 김수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도중 그녀는 여러 번 『32년 가수생활에서 오늘은 처음 털어놓는 얘기가 많다』고 말했다.
 
  ―새 앨범의 타이틀곡 「사랑받고 싶은 여자」는 현악기가 많이 가미된 오케스트라풍의 연주더군요. 좀더 단순한 연주 편곡이 낫지 않았을까요.
 
  『저는 컴퓨터 사운드나 전자음악이 싫어요. 그래서 장중한 느낌의 실제 연주로 가는 겁니다. 컴퓨터나 전자음악으로 꾸미는 건 음악에 자신이 없다는 뜻 아닐까요? 솔직히 옛날에는 적당히 만들어도 통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래가지고는 일체감과 공감을 얻기 어려워요. 갈수록 음반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이번이 몇 번째 앨범인가요.
 
  『올해로 제가 가수생활 32년째거든요. 그런데 이번 앨범이 11집이에요. 앨범에 「열한 번째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았죠. 앨범이 적죠? 10년도 안 돼 열 번째 앨범을 내는 요즘 가수들과 비교하면 少産(소산)이죠. 제가 앨범을 많이 낸 걸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전혀 아니에요. 열한 장 이외의 많은 히트곡 모음집들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실 거예요. 앨범을 한 장 만들 때마다 열성을 다하다 보니 多産(다산)을 못한 거죠』
 
  ―얼마 전 후배 여가수 박혜경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셨죠. 저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박혜경이 누드촬영을 했다는 점에서 혹시 마음에 걸리지 않았나요.
 
  『주변에서 왜 하필 누드촬영을 한 친구를 도와주느냐는 얘기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누드란 것, 솔직히 생각을 달리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음악을 잘하는 후배라서 도와준 겁니다』
 
  ―가수노조 출범 때 「가수들의 출연료가 턱없이 낮다」고 공개를 하셨죠. 1회 출연료가 26만원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본인 얘기죠? 네티즌들은 용감한 발언으로 높이 평가하더군요.
 
  『제가 방송출연료 산정기준으로는 경력 20년이라서 1회 출연에 26만원을 받아요. 같은 경력의 텔레비전 연기자 출연료의 10분의 1 정도예요. 엄청난 차별대우 아닌가요. 제 얘기기도 하지만 우리 가수들의 얘기죠. 용감할 것도 없어요. 가수노조 집행부에서 참석률이 저조하니 꼭 나와 달라고 전화를 했어요. 나가는 김에 솔직히 한마디를 하게 된 거예요. 대단한 것은 아니고, 단지 부당한 현실을 지적했을 따름이죠』
 
  ―이번 가수노조도 그렇지만 왜 가수들의 모임이나 협회에 젊은 가수들이 소극적인 걸까요.
 
  『바쁘기도 하고, 소속사에 묶여 있고 또 소속사는 방송사의 눈치를 봐야 하고. 저는 그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방송출연료 현실화의 이해 당사자는 우리가 아니라 젊은 가수들이죠. 현실적 장애를 극복하고 자꾸 나와 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방송사와 가수 관계의 진전이나 변화는 없습니다』
 
  김수희는 가수인 동시에 사업가이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기획사 「희레코드」의 사장이다. 최근에는 그것을 「희 엔터테인먼트 앤 코스메틱스」로 확대해서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코스메틱이란 명칭이 말해 주듯 김수희는 화장품 「닥터 스킨 K143」의 중국과 일본 마케팅에 분주하다.
 
  지난 3년간 가수활동이 뜸했던 것도 화장품 사업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사무실의 1층과 2층에 「호계동 갈비」라는 대형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뭐든지 일을 만들어야 하고, 일을 저질러야 하는 게 내 성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신경 분산이 안 돼 한 가지에 몰두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지난 3년은 화장품 연구개발에 치중했고, 다시 노래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가수경력이 32년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1983년에 히트한 「멍에」로부터 김수희란 이름을 알게 됐죠. 그전에 약 10년이란 세월의 간극이 있습니다. 1983년 이전의 상황이 궁금합니다.
 
  『사실 데뷔는 1973년, 작곡가로서 했어요. 그 뒤 美 8군의 업소에서 그룹 「블랙 캐츠」에서 노래를 했어요. 그때는 팝송을 많이 불렀죠. 가수 데뷔작은 「너무합니다」인데요, 실제 데뷔는 음반이 아니라 윤항기씨가 제작한 뮤지컬로 당시 부부였던 남진과 윤복희가 주연한 「춤추는 함대」에서 신인가수로서 그 곡을 불렀어요. 전국순회공연이었기 때문에 눈여겨본 사람들 사이에 관심을 모았지만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죠』
 
  ―그렇다면 음반 취입을 한 뒤에 「너무합니다」가 히트하게 된 거로군요.
 
  『아니죠. 1978년에 음반을 냈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어요. 1980년, 제가 작곡한 「정거장」을 타이틀로 두 번째 앨범을 냈는데 제목을 「Vol. 1」, 즉 1집으로 표기했을 정도니까. 전에 「너무합니다」 앨범을 냈다는 사실을 무시한 거죠. 그런데 「정거장」도 참패를 했어요. 가수는 힘들다 싶었죠.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전향을 꿈꾸었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죠. 그런데 「너무합니다」가 죽지 않고 마치 구전가요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애창이 됐어요. DJ 이종환씨가 「이 노래를 부른 가수를 찾습니다!」라는 코너를 통해 저를 찾았어요. 방송에서 절 찾아내서 발탁한 경우죠』
 
 
 
 「꺽꺽이」 창법
 
1993년 연말 KBS 가요대상을 수상할 때의 모습. 트로트 가수가 가요차트 정상에 다시 오르는 데 12년이 걸렸다.
  ―가수로 돌아와서 1983년에 크게 히트시킨 「멍에」는 가사 「소중했던…」 다음의 꺽꺽대는 창법이 화제를 모았죠. 당시 일각에서 정통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상당한 논란이 일었어요. 소위 「꺽꺽이」 창법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왜 잘나가다 갑자기 돼지 목 따는 소리를 내느냐」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녹음할 때 그렇게 불러서 좋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우기는 방법이 통합니다.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거죠. 전 제 직관을 믿거든요』
 
  ―방금 말한 「꺽꺽이」 창법은 이후 김수희 노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죠. 아이디어의 발로 같지는 않고 어떤 경험의 산물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멍에」를 취입할 때 상황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지독한 감기에 걸려 노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녹음 날짜가 그 날밖에는 없었습니다. 12시간에 12곡을 녹음해야 했죠. 지금 환경과 비교하면 참으로 열악했어요. 그래도 「멍에」란 곡은 중요했기에 가장 나중에 녹음했죠. 소리가 제대로 나왔겠어요? 자꾸 새는 거죠. 그것을 요령 있게 피해가야 했을 때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는데요.
 
  『美 8군에서 팝송을 부르던 때에 저만의 색깔이 없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그 때문에 방황과 갈등이 심했죠. 제 색깔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판소리 박초월 선생님을 찾아가게 됐어요. 가수 조관우의 할머니인 당대 명창이셨죠. 선생님으로부터 「우리 소리는 영혼」이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그 정체 가운데 하나가 꺾인 소리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소리가 안 나올 때 구사하는 그 꺾인 소리는 제게 굉장한 충격이었고, 그것이 우리의 恨(한) 이라는 것도 배웠어요. 가수로서 전환점이자 부활의 계기가 됐죠. 그 소리가 제 가슴에 항상 있었어요. 그게 최악의 컨디션 때 튀어나온 겁니다』
 
 
 
 룸살롱의 번성과 김수희의 전성기
 
  「멍에」가 全국민의 가요로 부상한 데는 유흥가 풍속과 관련이 있다. 당시 유흥가의 중심이 서울 종로·명동·무교동 등 기존의 강북에서 급속도로 강남으로 이전됐다.
 
  경기가 호황이었던 1980년 초반 강남에는 룸살롱·스탠드바 등 유흥업소들이 만개하고 번성했다. 이른바 「영동문화」가 솟아난 것이다. 유흥업소란 손님들의 질퍽한 주색 파티 뒤에 접대부들의 애환이 그림자처럼 깔리는 곳이다.
 
  당대의 유행에 민감한 대중가요가 영동문화를 놓칠 리 없다.
 
  「멍에」의 애절한 색조와 김수희의 감칠맛 나는 보컬은 사람들을 그 유흥문화의 짙은 뒤안길로 데려갔다. 유혹적이면서도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의 김수희와 그녀가 부르는 도시의 블루스는 단숨에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연 많은 여자」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조금 쑥스러운 얘기지만, 「멍에」가 당시 룸살롱 여인들이 가장 즐겨 부른 노래였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웃으며) 그럼요. 왜 모르겠어요? 영동에 유흥업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시절에 경제적인 이유였든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받았든, 사연 많은 여자들의 단골 레퍼토리로 사랑을 받았죠.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많이들 연관지은 것 같습니다. 「멍에」가 그런 사람들,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었다고 봐요. 成人的(성인적)인 필은 분명했으니까요. 만화가 이현세씨가 저를 「영동 언니」로 표현했던 게 기억납니다. 황필호 교수 같은 분은 「김수희의 노래가 나오지 않는 술집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셨을 정도니까요』
 
 
 
 
旣婚 사실을 스스로 공개

 
경기도 안양의「희 엔터테인먼트 앤 코스메틱스」사무실에서.
  ―「멍에」가 초기에 막 히트되던 때만해도 김수희씨는 미혼의 처녀로 알려졌지요. 하지만 인기가 절정이던 때에 결국 실제로는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때 심정이 매우 착잡했을 듯한데요.
 
  『사실이 밝혀진 게 아니라 제 스스로 밝혔지요. 당시 가요계에는 「처녀가 아닌 여가수는 노래할 수 없다」는 묘한 속설이 있었어요. 당연히 결혼 전력과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습니다.
 
  소문이 퍼지자 저는 밝히고자 했지만 매니저는 숨기려고 했죠. 양단간 결정을 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노래처럼 기로에 선 시점이었죠. 그렇게 휩쓸려가는 삶이 싫었습니다. 그때 내린 결론은 「피할 수 없으면 돌파하라!」였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가수생활을 끝낼 각오로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서 TV 생방송에 딸을 데리고 나갔지요. 「가요 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해서 골든 컵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시청자가 보는 앞에서 떳떳이 밝히자는 것이었죠. 진실해야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시청자들은 전력을 숨긴 것보다는 고백의 용기에 손을 들어 주었어요. 이 사건은 제 자신과 저의 판단을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멍에」와 함께 무명의 고통을 일순간에 벗어나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후 김수희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었고 내리 발표한 노래들 「마지막 포옹」, 「잃어버린 정」, 「고독한 연인」은 실패는 아니었어도, 너무 강하게 각인된 「멍에」의 그늘에 가려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일시적 침체가 찾아온 1985년, 김수희는 한 차례 연예 주간지들의 집중포화를 받게 된다. 필리핀의 한 심령사에게 후두염 치료를 받은 사실이 사진과 함께 공개되면서 최고 스타답지 않은 「이상한 여자」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상한 여자」라는 멍에
 
  ―1980년대 중반 필리핀의 심령술사 치료 사건은 떠들썩한 연예가 화제였죠. 그 때문에 김수희씨가 사람들한테 미신이나 非과학적인 신념을 따르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쳐졌습니다.
 
  『처음으로 털어놓는 이야기지만 본디 저는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 삶은 전부 보이는 것에 잣대를 두잖아요. 전 비현실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해 왔어요.
 
  예를 들어 병이 났을 때 다들 병원에 가지만 저는 지금도 자연치유법을 택합니다. 氣·에너지·대체의학을 믿는 거죠. 필리핀 심령술이 보도되었을 때 암으로도 번질 수 있는 악성 후두염으로 고생하고 있었어요. 그런 순간에 무엇보다 자신을 믿습니다. 「에너지가 생길 것」이라는 신념을 갖는 거죠. 심령술은 사실 그것을 위한 매체일 뿐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괴이하게 바라봤습니다. 이전 대마초 사건이 더욱 그런 인식을 부채질했을 거예요. 거기서 「이 바닥에 오래 있으려면 자기성찰이, 자기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쳤어요. 「모든 답은 세월한테 물어보라」 그거죠.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하지만 돌이켜 보면 당시는 썩은 무 자르듯 화끈한 성격이었어요. 남들 신경 안 쓰고 내 우물만 팠던 거죠』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역동적인 삶, 요동치는 인생이 된 것은 아닐까요.
 
  『저는 사람한테 누구나 보이지 않는 磁氣場(자기장)이 있다고 믿어요. 어릴 적 어머니와 절을 다니면서 정신세계, 내면의 세계를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역경이나 곤란과 부딪힌 순간마다 그 자기장이 에너지로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절대 포기하지 마라, 실패가 포기일 수 없다」는 의지를 되새기곤 했습니다』
 
  ―다시 음악 이야기로 돌아와서 「멍에」가 떠오른 뒤 이전에 발표한 「너무합니다」와 자작곡인 「정거장」도 소급되어 마침내 히트를 기록했죠. 특히 록 비트의 「정거장」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름의 반향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일본 곡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할 만한 데도 당사자의 항변이 전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정거장」은 1972년 그러니까 제가 열아홉 살이었을 때 작곡한 곡이에요. 일본 가요를 표절했다고 하지만 그때 저는 일본음악을 듣지 않았어요. 구설수에 오른 것 자체가 싫어서 항변할 의욕이 없었습니다. 이후 「정거장」은 부르지도 않았고, 작곡도 완전히 그만두어 버렸어요.
 
  처음에 음반으로 냈을 때는 실패해 한동안 가수를 그만두게 했고, 뒤늦게 알려졌을 때는 표절로 걸려 작곡을 그만두게 하고… 참 기구한 운명의 곡이죠. 그런데 최근 후배 여가수 김현정이 댄스곡으로 리메이크했더군요.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았어요』
 
 
 
 
뒤늦게 뜨는 김수희의 히트곡들

 
사무실을 돌아보는 김수희씨.
  ―김수희 노래 중에서 젊은 층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행열차」도 발표한 뒤 한참의 세월이 흘러 히트했죠? 얼마 전 TV 가요 프로그램에서 스스로 「내 인생 최고의 노래」로 이 곡을 꼽은 것을 봤습니다.
 
  『그래요. 1987년에 발표했는데 당시의 반응은 미약했습니다. 그러다가 7~8년 정도가 흘러서 널리 알려졌죠. 히트의 진원은 지금은 기아로 변신한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였습니다. 「비 내리는 호남선/남행열차에/흔들리는 차창 너머로…」로 시작되는 가사 덕분에 호남을 연고로 한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 채택된 거예요. 해태가 경기에서 자주 이기는 최강 팀이었던 시절이라 전국 구장 어디를 가도 열심히 불렸죠.
 
  그 덕분에 죽었던 노래가 되살아난 겁니다. 지금도 제 노래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들이 해태 타이거즈 팬들입니다. 그들이 「내 인생 최고의 노래」를 만들어 주신 거죠. 또한 앨범의 형태가 LP와 카세트테이프에서 CD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호응을 얻은 곡이라 개인적으로도 기념비적인 곡이구요. 카세트테이프와 LP 때의 가수가 CD 시대에서도 히트를 거둬 느낌이 각별하지요』
 
  ―조금 도식적인 구분인지는 몰라도 부산이 고향인 김수희씨가 어찌해서 「비 내리는 호남선…」 하는 노래를 부르게 된 건가요.
 
  『작곡가 김준현씨가 이 곡으로 데뷔했는데요, 사실은 제 주문에 의해 노래가 탄생했어요. 가사를 한번 보세요.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흔들리는 차창 너머로/빗물이 흐르고/내 눈물도 흐르고/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조금 전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진짜를 추구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눈에 드러나지 않으나 진정한 민심, 그 밑바닥의 정서를 훑는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곡이에요. 그런 메시지가 恨으로 목이 멘 우리만의 가락에 실린 노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리듬은 신나는 곡을 바랐어요. 흥겨우면서 애달픈 노래랄까요』
 
  ―팬들이 왜 그렇게 「남행열차」를 좋아한 걸까요? 말씀하신 대로 경쾌함 속에 묻어 있는 슬픈 곡조, 그 背反(배반)의 미학은 분명해 보이구요. 김수희씨의 힘차지만 애조 띤 노래가 거기에 한몫한 거겠죠.
 
  『남국이 주는 묘한 향수가 통한 것 아닐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늘 남쪽으로 가고 싶은 본능이 있다고 봅니다. 잘 불렀느냐 못 불렀느냐를 떠나서 「남행열차」는 제 노래인생에서 가장 편하게 부른 곡이에요. 이 곡이 폭발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보고 역시 「편하게 부른 곡이 남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김수희의 빛나는 히트 궤적에서 1993년 한 해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빅 히트송 「애모」를 빼놓을 수 없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데/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남자/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여자…」
 
  알려진 지 어느덧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이 노랫말은 음악 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꺾다
 
   이 노래는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신승훈 등 신세대 톱 가수들이 爭覇(쟁패)하며 음악시장을 쥐락펴락하던 시절에 지상파 방송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를 꺾고 당당 1위를 차지했다.
 
  그게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것 같던 시점에 청춘음악의 정글을 헤치고 성인음악의 저력을 과시했던 것이다(트로트는 무려 12년이 흐른 올해 장윤정의 「어머나」로 방송차트 1위에 복귀한다).
 
  「애모」는 그해 연말 KBS 최고가수상을 비롯해 각종 신문과 방송이 선정하는 최고가요상을 독점했다. 그녀의 사무실 벽에는 1993년 KBS의 가요대상을 받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때가 김수희 노래 삶의 최고 순간이었던 셈이다.
 
  김수희는 『시상식 당일 내가 호명되었을 때 「나 맞나?」 했고, 다시 한 번 사회자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고 기억했다.
 
 
 
 생명이 긴 成人가요
 
최근 발매한 11집 앨범을 들고 있는 김수희.
  ―「애모」가 그처럼 전국적인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나요? 워낙 신세대 가수들이 판치던 때라 「트로트의 반격」이란 의미 때문에 암암리에 언론의 도움을 받았다고 보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호응은 예상했지만 그렇게 크게 히트 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그해에는 1990년대를 주름잡은 젊은 인기가수들이 다 쏟아져 나온 때였죠.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흥분됩니다. KBS에서 상을 받은 것은 방송의 공영성이 작용했다고 봐요. 너무 젊은 음악들 일색이라서 위축되고 있던 성인가요를 응원하는 심리가 생겨났다고 할까요.
 
  처음에 작사·작곡자인 유영건씨한테 곡을 받았을 때는 제목이 「바람의 소곡」이었어요. 조금 어렵고 修辭的(수사적)이잖아요. 그래서 유영건씨의 양해를 얻어 「애모」로 바꿨죠. 제목의 덕도 봤던 것 같습니다』
 
  ―1993년에 히트된 「애모」는 실상 1991년에 발표된 앨범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앨범에서 「서울여자」를 타이틀곡으로 내걸었죠. 성인 층에게 어필할 곡인 줄 몰랐을 리 없었을 텐데 왜 딴 곡을 밀었던 겁니까.
 
  『그게 묘한 저만의 전략이었어요. PR할 때 먼저 「서울여자」로 가고, 「애모」는 비장의 곡으로 남겨 두었던 거죠. 앨범을 충실히 들은 사람들은 분명히 숨겨진 「애모」를 찾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그래서 공연할 때는 먼저 「서울여자」를 부르고 사이드로 「애모」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곡이 바람을 타게 됐던 거죠』
 
  ―「애모」도 결국 2년이 지나서 어필한 셈인데요. 「너무합니다」도 그렇고 「남행열차」도 그렇고, 왜 김수희씨 노래는 늦깎이 히트 사례가 많은 건가요.
 
  『그 시점을 겨냥하는 젊은 가수의 노래에 비해 유행 절기가 상대적으로 긴 성인음악의 특징이 아닐까요. 트로트 중에 지각 히트가 많다는 것이 말해 주죠. 사실 언급한 곡들 외에도 빅 히트는 아니지만 뒤늦게 전파를 탔던 곡들이 있습니다. 앨범이 나오고 평균 3년 정도 지나서 반응이 오니까 언제부터인가 아주 느긋해지더라구요. 이번 앨범의 「사랑받고 싶은 여자」도 언제 히트할지 몰라요(웃음). 시간이 걸려서 좋은 결과를 맞이할 때 더 흐뭇합니다』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 가운데 가장 맘에 드는 앨범은.
 
  『아무래도 「애모」가 수록된 8집 앨범이죠. 현재 남편과 결혼하고 나서 만든 앨범이기 때문에 더 애정이 갑니다』(남편은 제주 KBS 프로듀서 출신인 김태식씨로 현재 김수희씨와 함께 「희 엔터테인먼트 앤 코스메틱스」를 운영하고 있다)
 
  ―김수희가 부른 노래는 빠른 템포도 있지만 대부분 애조가 가득한 느린 노래들입니다. 요즘에는 감각적이고 경쾌한 비트 그러나 너무 직설적이고 경량화된 가사의 트로트, 이를테면 폭스 트로트 계열이 난무하고 있지요. 그래야 그나마 반응을 얻습니다. 왜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건가요.
 
  『다들 자기 스타일에 맞는 노래를 부르죠. 전 폭스 트로트의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봅니다. 또 저마저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 점에서는 의도적이죠. 喜가 있으면 哀도 있어야죠. 저는 哀 쪽에 있습니다』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없다』
 
   가수생활 32년의 기나긴 세월, 이제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요즘 음악과 가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수가 노래를 잘하면 심금을 울린다고 하는데 근래에는 심금을 울리는 음악이 없다. 그저 겉치장과 과대포장에만 익숙하다』고 꼬집었다.
 
  자신은 적어도 후배들에게 음악의 지표가 되는 선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려운 시점에 좌표가 될 수 있는 조언을 해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후배들로부터 「교주님」 소리를 듣고 있다며 크게 웃었다.
 
  ―가수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먼저 자기만의 것, 분명한 색깔이 있어야죠. 저도 그것을 갖추지 못해 긴 무명시절을 겪었잖아요. 그러기 위해선 고집을 가져야 합니다. 인기는 확률이지만 결코 확률에 의존해서는 안 돼요.
 
  저는 목이 강하거든요. 편도선이 걸려도 거뜬히 두 시간 동안 공연을 합니다. 그러려면 제가 잘 쓰는 용어로 목을 「담금질」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는 후배들이 거의 없죠. 훈련기간이 절대로 부족한 거예요. 자기 소리가 없으니 자꾸 他意(타의)에 의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눈에 띄는 후배가수가 있다면.
 
  『박화요비와 김범수가 노래를 잘하더라구요. 그들 노래에는 한국적인 맛이 느껴집니다. 누구나 외국노래 창법을 모방하지만 자기만의 컬러가 있다는 거죠. 언젠가 방송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만약 같이 음악작업을 한다면 솔리드 출신의 김조한과 하고 싶습니다』
 
  ―본인에게 가장 영향을 준 가수는 누구였습니까.
 
  『1960년대에 블루스를 부른 재니스 조플린입니다. 영혼으로 노래한 당찬 가수였지만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죠. 그런데 제가 「재니스 조플린을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또 오해할까 봐 지금껏 그런 얘기를 못 했어요. 32년 가수생활에서 오늘 처음 밝히네요. 재니스 조플린은 자기를 못 이긴 인물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개개인의 자기장이 악령이 되느냐 혼이 되느냐는 자기성찰에 달려 있어요. 그녀의 자기장은 음악한테는 혼이었지만 생활에는 악령이 되고만 거죠』
 
 
 
 사람 냄새가 나는 노래
 
  김수희는 마지막으로 『사람 냄새를 잘 만들어 가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가수다운 소리가 아니라 사람다운 소리를 꿈꾼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사람이 제대로 돼야 가수도 제대로 된다는 「先인간 後가수」론이었다.
 
  이미 가수로 데뷔한 바 있는 딸과 중학생 아들에게 재능보다는 마음 됨됨이를 강조한다고 한다. 그녀는 가수로서 성공했다. 「세상은 요지경」의 신신애, 「찬찬찬」의 편승엽을 키워 음반제작자로 성공했다. 이제는 엔터테인먼트·화장품·외식 등 사업가로 성공을 향해 가고 있다.
 
  김수희는 『집 밖에 나와야 연예인이고 사업가지, 집 안에서는 평범한 살림꾼』이라며 『「가장 스타가 되지 말았어야 할 스타」라는 소리를 자주 듣곤한다』고 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프로답게 인터뷰에 응해 준 김수희와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수 김수희보다는 인간 김수희에게 이끌렸다. 그녀 말대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노래를 팬들에게 선사해 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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