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의원은 이스라엘의 정책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지만, 미국 의원은 이스라엘의
對外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머빈 다이맬리 민주당 하원의원)
⊙ 미국 內 40개 대학과 자매결연, 장학금 지원 등 통해 親이스라엘 인맥 구축
⊙ 美 의회, AIPAC의 노력으로 매년 약 130건의 親유대 결의안 통과
⊙ 유대인에게 밉보여 大權도전 실패한 조지 맥거번, 하워드 딘
⊙ AIPAC, 최소한 상원의원 45명과 하원의원 200명의 고정적 지지를 확보
朴宰善 홍익대 초빙교수
⊙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 한양대 상학과 졸업. 프랑스 국제행정대학원 졸업.
⊙ 駐佛공사, 駐세네갈 대사, 외교통상부 구주국장, 駐보스턴 총영사, 駐모로코 대사,
美브랜다이스大 중동·유대연구소 객원교수 역임.
⊙ 저서: <세계사의 주역: 유대인> <제2의 가나안: 유대인의 미국>.
⊙ 상훈: 근정포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기사장, 프랑스 공로훈장 등.
로비란 개인이나 공동체가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정책 결정권자를 대상으로 벌이는 일종의 광범위한 정치행위다. 나라마다 개인 또는 단체가 제반 로비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로비의 天國(천국)’이라고 할 정도로 각종 로비가 성행하고 있다. 미국은 로비가 합법화되어 있고 로비스트들이 정부나 의회에 등록을 하고 투명하게 활동한다. 對外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머빈 다이맬리 민주당 하원의원)
⊙ 미국 內 40개 대학과 자매결연, 장학금 지원 등 통해 親이스라엘 인맥 구축
⊙ 美 의회, AIPAC의 노력으로 매년 약 130건의 親유대 결의안 통과
⊙ 유대인에게 밉보여 大權도전 실패한 조지 맥거번, 하워드 딘
⊙ AIPAC, 최소한 상원의원 45명과 하원의원 200명의 고정적 지지를 확보
朴宰善 홍익대 초빙교수
⊙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 한양대 상학과 졸업. 프랑스 국제행정대학원 졸업.
⊙ 駐佛공사, 駐세네갈 대사, 외교통상부 구주국장, 駐보스턴 총영사, 駐모로코 대사,
美브랜다이스大 중동·유대연구소 객원교수 역임.
⊙ 저서: <세계사의 주역: 유대인> <제2의 가나안: 유대인의 미국>.
⊙ 상훈: 근정포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기사장, 프랑스 공로훈장 등.
미국 의회나 정부의 각종 의사결정과정에는 반드시 관련 로비가 陰陽(음양)으로 개입한다. 미국은 광활한 국토 위에 多(다)민족이 만든 국가이므로 민족별·직종별·계층별 이해가 대립되는 경우가 많다. 로비는 이런 제반 갈등요인을 제도권 안에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하나의 화합형 정책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로비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미국 내 로비스트 활동의 대부분은 公共(공공)의 이익이 아닌 특정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로비 수행과정에서 여론의 감시는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로비는 거의 非(비)공식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 로비는 기득권층과 대기업 등 특수이익집단이 합법적으로 사회의 자원을 독점하고, 나아가 국가의 富(부)를 私有化(사유화)하는 작업을 도와주는 행위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공동체의 連帶(연대)의식과 力動性(역동성)을 현저하게 약화시키는 폐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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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로비단체 AIPAC에서 연설하는 미국 대권 주자들(좌로부터 오바마, 매케인, 힐러리). |
미국 로비시장 연간 50억 달러 규모
로비는 어디서 비롯됐는가. 현재 알려진 定說(정설)은 1215년 영국의 大憲章(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규정된 請願權(청원권)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미국에서 로비가 본격적으로 인정된 계기는 수정헌법 제1조의 국민청원권으로 보고 있다.
미국에서는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시절 알렉산더 해밀턴 전국산업진흥회장이 美(미)합중국은행 설립 認可(인가)를 위해 대통령 주변에 대해 로비를 한 것이 嚆矢(효시)로 알려지고 있다. 1936년 외국 로비스트의 법무부 등록의무를 골자로 한 법이 통과됐고, 1946년에는 로비스트의 투명성과 공개성을 규정한 연방로비규제법(FRLA)이 제정됐다. 1966년에는 로비스트의 활동과 소득을 6개월 단위로 공개하는 의무를 규정한 로비활동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한 개인이 노동시간 중 20 % 이상을 有給(유급)로비 활동에 할애할 경우 전문 로비스트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에서 로비가 활성화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이 시기부터 미국 내 로비는 보편적인 정치·사회적 수단으로 정착됐다. 이 시기 로비의 성격은 주로 사전 예방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로비단체나 로비스트들은 특별한 상황이 없더라도 로비대상에게 지속적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의 공통적인 활동지침이 됐다.
미국에는 등록된 로비스트만 20여 만명이 있다. 그중 의회가 있는 워싱턴DC와 수도권에만 3만명이 활동 중이다. 로비 시장은 연간 약 50억 달러 수준으로 추산된다. 미국의 주요 로비스트는 전직 상·하원 의원, 전직 행정부 고위 관료 및 의원보좌관 등이 주류를 이룬다. 연방 상·하원 의원의 경우는 퇴임 후 1년이 경과해야 로비스트 등록이 가능하지만, 행정부 출신 인사들은 이 규정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래서 의회 출신은 퇴임 후 1년 정도 로펌(Law Firm)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연방의원으로 퇴임한 자는 퇴임 후에도 의사당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으며 보안검색 면제, 의사당 내 무료주차 등의 特典(특전)이 주어진다.
미국의 로비스트는 세분화되어 있다. 즉 접촉담당, 전략담당, 조직동원담당, 정보담당, 감시담당 등으로 분업화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로비 법인에 고용된 형태로 일한다. 로비 수수료는 보통 총 거래액의 5 % 정도다. 미국의 로비 형태는 정보 수집과 제공을 중심으로 하는 직접로비와, 정치활동위원회(PAC)를 통한 저변 여론조성과 아울러 이익단체 간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등의 간접로비 두 가지로 나뉜다.
防産 로비와 유대인 로비가 가장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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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PAC의 로비에 따라 親이스라엘 정책을 펴는 미국 정치인들을 풍자한 만화. |
이런 로비단체들 가운데 방위산업 로비와 이스라엘 로비는 다른 로비에 비해 그 효율성이 두드러진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방위산업은 미국경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은 물론 미국의 국내정치, 나아가 국제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세계 제1·2차 대전과 한국전, 월남전을 치르면서 크게 성장한 미국의 방위산업은 월남전 이후 침체기를 맞는다. 생산된 무기의 在庫(재고)처리는 防産(방산)업체의 골칫거리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방위산업은 꾸준한 로비를 통해 해외 판매로 방향을 전환했다. 해외시장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은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기업자들은 무기생산지역 상·하원 의원을 대상으로 로비를 했고, 이 로비가 성공하면서 미국 방위산업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또 수 개의 TV 방송망(NBC, CBS 등)에는 방위산업 자본이 일부 참여하고 있어 이들 매체를 통한 집중적인 홍보도 방산업계의 중흥에 도움이 됐다.
1960년대 미국 무기의 對外(대외)수출은 20억 달러의 수준이었으나 1970년대 초에는 170억 달러로 늘어났다. 1969년 이란의 ‘샤’ 정권은 2억5000 만 달러어치의 미국 무기를 사들였다. 1975년 인도네시아는 5200만 달러어치의 미국 무기를 도입해 東(동)티모르를 침공했다. 1975~1976년간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8000만 달러어치의 미국 무기를 구입하여 군사독재체제를 강화했다. 1977년에는 국제정치 불안을 우려한 당시 대통령 카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방산업계는 120억 달러어치의 무기를 수출했다.
미국 무기산업은 레이건 8년 기간 동안 호황을 맞는다. 우선 1982년 한 해에만 미국은 F-16전투기를 주 아이템으로 하여 약 2000억 달러의 무기를 한국·베네수엘라·파키스탄 등에서 수주했다.
카터, 방산업체 요구 무시하다 再選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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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PAC 로고. |
미국 방산업계(보잉, 록히드 마틴, 제너럴 다이내믹스, 레이시온, GE, 휴스, 칼라일, 노스롭 등) 로비의 성공에는 풍부한 로비자금이라는 강점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다. 즉 무기의 생산기지가 전국 수십 개 州(주)에 걸쳐 있어 지역의 고용효과 하나만으로도 연방의회와 연방정부를 압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첨단 전투기 F-22(록히드 마틴)의 생산시설은 미국 47개 주에 걸쳐 있다.
현재 미국 방위산업의 對(대)의회 로비자금은 연간 약 1억 달러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로비 대상은 대체로 공화당 의원들이지만, 무기생산지 출신 민주당 의원이 있으면 이들도 로비 대상에 포함시킨다.
카터 대통령은 무기수출에 대한 방산업체의 요구를 무시한 것이 再選(재선)에 실패한 몇 가지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반면에 클린턴은 1997년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첨단무기 판매조치를 완화하여 방산업계의 폭넓은 지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미국에는 많은 로비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로비단체에 비할 바가 아니다. 미국의 유대 로비단체들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全(전) 유대인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는 중국·일본·대만·인도·중남미·동구권 등의 국가별·지역별 로비가 있다. 그러나 미국 내 이스라엘 로비는 다른 지역 로비에 비해 성격이 조금 다르다. 각국 로비는 대부분 정부 또는 정부와 민간 합작으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이스라엘 로비는 이스라엘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미국 내 자생적인 유대인 단체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미국과 캐나다 등 北美(북미)지역 전체에는 약 3500개의 유대 단체가 등록되어 있다. 이들 단체들은 단순한 친목, 문화관련, 국제유대사회와의 연대, 이스라엘 지원 등 설립 목적이 다양하다.
그런데 미국 유대인들에게 물어보면 “미국에는 유대 로비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에는 미국 유대인의 복지와 이익을 위한 로비단체는 없다. 유대인의 미국 내에서의 지위와 이익대변 같은 문제는 행정부나 의회가 도와주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안정된 기반을 갖고 있으므로 미국 내 다른 민족공동체와는 달리 국내문제는 미국 유대사회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스라엘 로비의 核 AIP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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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계의 막강한 로비에 침묵하는 미국 의원들을 비판한 머빈 다이맬리 하원의원. |
오늘날 미국과 이스라엘은 형제 나라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미국의 정찰비행에서도 이스라엘만은 제외된다고 알려질 정도로 兩國(양국)관계는 특수 관계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부터 이런 돈독한 관계가 성립된 것이 아니라 미국 내 이스라엘 로비단체들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다. 이들 단체 중 두각을 나타내는 기구는 AIPAC(American-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 미국-이스라엘 공무위원회)이다.
AIPAC은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온건진보 성향의 기자출신 유대인 이사이아 케넨이 설립했다. 초기에는 미국시온주의공무위원회(AZCPA: American Zionist Committee for Public Affairs)였다가, 3년 뒤 현재 이름으로 바꾸었다.
AIPAC 설립 초기에 케넨은 이 단체를 미국 유대사회와 의회 인사 간의 단순 친목모임 성격으로 운영했다. 그러다 4차에 걸친 중동전, 특히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여론이 악화하자 AIPAC은 이스라엘을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미국 의회에 대한 AIPAC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다. 1987년 7월 7일자 <뉴욕타임스>지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태생이며 캘리포니아州(주) 민주당 하원의원인 머빈 다이맬리의 “이스라엘의 크네세트(의회) 의원은 이스라엘의 정책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국의 정치인이 의회에서 이스라엘의 대외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소개했다.
어느 나라의 정치인이든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후원금과 언론의 지원이다. 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를 유대계가 제공할 힘이 있는 한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에 대한 非(비)우호적 발언이나 처신은 自害(자해)행위나 다름없다. 특히 유대인 강세지역인 뉴욕·뉴저지·캘리포니아·펜실베이니아·플로리다주 출신 정치인이 反(반)이스라엘적 견해를 떠들고 다니면 이는 낙선을 각오해야 한다.
일부 후보들은 선거기간 중 선거구 관심사항도 아닌 이스라엘 문제에 의도적으로 호의적인 발언을 하여 유대 로비의 환심을 사려는 경향도 있다. AIPAC은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반드시 민주·공화 양당후보를 초청해 각 후보의 對(대)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입장을 듣는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모두 정당을 초월해 누가 더 親(친)이스라엘적인가를 경쟁적으로 부각시키려 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反이스라엘·反유대 인사는 철저하게 낙선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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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다퉈 AIPAC에서 연설하려는 미국 대권 주자들을 풍자한 만화. |
오랫동안 유대 로비와 가까웠던 민주당 원로정객 조지 맥거번 의원은 당시 행정부가 추진한 F-15전투기의 對(대)사우디아라비아 판매에 동조했다. 그 결과 맥거번은 유대계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1980년 선거에서 낙선했다. 일리노이주 출신 공화당 하원의원인 폴 핀들리는 1982년 아라파트 PLO 의장을 만나고 나서 “중동문제 해결에는 보다 균형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발언한 후 22년에 걸친 의회 생활을 마감했다. 같은 해 있은 하원선거에서 AIPAC은 無名(무명)의 민주당 후보에게 많은 후원금을 지원하여 핀들리를 낙선시켰다.
같은 일리노이주 출신 공화당 원로정치인 찰스 퍼시 상원 외교위원장은 “미국은 PLO 와도 대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다 1984년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인 폴 사이먼 후보에게 패했다. AIPAC은 퍼시 의원을 표적 낙선시키기 위해 전국 규모의 ‘사이먼 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AIPAC 사무총장인 토마스 다인은 선거 후 “미국의 유대인은 퍼시의 낙선을 위해 뭉쳤다. 모든 정치인들은 그의 낙선을 교훈 삼아야 할 것”이라고 외쳤다.
AIPAC은 1981년 레이건 시절 미국 조기경보기(AWACS)의 對(대) 사우디 판매를 저지하려다 상원에서 한 차례 실패했다. 이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AIPAC은 이후 한층 강도 높은 對(대)의회 로비를 펼쳤다. 그 결과 1985년에는 75명의 상원의원이 對(대)요르단 무기 공여에 반대했고, 1987년에는 미 의회가 매버릭 미사일 1600기의 사우디 판매를 저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공공자금으로 이스라엘의 군수산업을 지원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1987년 이스라엘은 라비(Lavi)라는 신형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 전투기는 국제무기시장에서 미국의 F-16(제너럴 다이내믹스) 또는 F-20(노스롭) 등의 기종과 경쟁관계를 초래할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 하원은 막강한 로비를 자랑하는 미국의 노조(AFL-CIO)와 국방부, 전투기 제작사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79표(90%)의 압도적 지지로 라비 개발을 위한 5억5000만 달러의 對(대) 이스라엘 借款(차관) 제공을 의결했다. 이 사업은 당시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1987년 8월 자발적으로 폐기하여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지만, 미국 의회는 이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비슷한 액수의 차관을 별도로 승인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無償(무상)원조나 차관공여 문제는 미국 상·하원 소관 분과위에서 거의 토론 없이 의결되는 것이 관례다. 차관 외에도 매년 30억 달러 수준의 무상원조가 이스라엘에 공여되고 있다.
公職 인사에도 막강한 영향력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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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명칼럼을 통해 바비 인맨의 CIA국장 임명을 막은 윌리엄 새파이어. 그는 유대계 언론이다. |
2004년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였던 하워드 딘 버몬트 주지사는 경선 초기 유력한 대선후보로 점쳐졌다. 의사 출신인 딘 지사의 부인은 독실한 유대교도였다. 딘 지사는 경선 초기에는 유대사회의 폭넓은 지원을 받아 유력후보인 존 케리 상원의원을 앞질렀다. 2004년 1월 19일 아이오와주 코커스에서 예상을 깨고 딘이 1위를 하여 미국정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딘 지사가 많은 민주당 인사들과 함께 부시의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당시 미국 유대인 사회는 부시의 이라크전쟁을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딘 지사의 태도는 유대인 사회를 실망시켰다. 유대계의 헌금이 차차 줄어들면서 딘 지사는 약세를 보였고, 결국 경선에서 낙마했다.
2006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하원 외교위원장 자리에 존 머서 의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펠로시 하원의장은 머서 의원이 이라크전을 반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AIPAC의 반감을 의식해 유대인 정치인인 탐 랜토스 의원을 외교위원장으로 결정했다.
AIPAC의 위력에 대해서는 아랍권도 잘 알고 있다. 1984년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기조는 AIPAC이 설정한 범주를 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가령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착촌 문제만 해도 유대 로비에 따른 미국의 입장변화를 잘 알 수 있다. 카터 시절의 유대인 정착촌은 ‘불법’이었던 것이 레이건 시절에는 ‘평화의 장애물’로 한 발짝 후퇴했다. 그 이후에는 ‘복잡한 사정’이라는 표현으로 두루뭉술하게 변했다.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스라엘에 불리한 결의안을 막으려고 32회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는 다른 4개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행사한 거부권 행사 횟수보다 많았다.
2002년 4월 26일 에는 미국 상원의원 99명이 유럽과 중동국가들의 反(반)유대주의에 맞서 미국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 서신 서명자에는 당시 심장병수술로 입원 중이던 공화당 제시 헬름스 의원 1명만 빠졌다. 실제로는 상원의원 전원이 서명한 셈이다. 2002년 5월 2일 미국 상·하원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압도적(하원; 찬성 352 반대 21, 상원; 찬성 94 반대 2)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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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들에게 밉보여 낙마한 정치인과 공직자들. (1) 조지 맥거번, (2) 폴 핀들리, (3) 찰스 퍼시, (4) 하워드 딘, (5) 조지 볼, (6) 바비 인맨. |
이원복 교수의 만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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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 戰犯들을 추적하는데 평생을 바친 사이먼 비젠탈. |
미국 의회보좌관 또는 전문위원진에는 유대인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 AIPAC은 1998년 미국 내 40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장학금 지원 등의 사업을 통해 차세대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장기적인 親(친)이스라엘 인맥 구축에 진력하고 있다.
이러한 AIPAC의 노력으로 매년 약 130건의 크고 작은 친이스라엘 또는 친유대사회 법안이나 결의가 의회를 통과한다고 알려져 있다. AIPAC은 친이스라엘 로비활동을 통해 공화당이나 민주당을 막론하고 확고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다.
AIPAC을 위시한 로비단체의 이스라엘 지원은 미국의 대중동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부정적인 평가를 유발하는 부담이 있다. 하지만 미국 내 유대 로비는 이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항상 이스라엘에 대한 미 행정부와 의회의 전폭적 지지를 유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2007년 초 유명 만화가인 이원복 교수는 그의 베스트셀러 만화인 <먼 나라 이웃나라>에 실린, 미국 유대인을 소재로 한 만화 한 컷으로 인해 마음 고생을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문제된 그 만화는 내용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려다 보니 그렇게 그린 것일 뿐, 악의적인 반유대적 의도를 갖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원복 교수는 미국의 한 유대단체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얼마 전 서울평화상을 수상한 디펜스 포럼 회장 수잔 숄티 여사도 이 항의에 동참했다. 이원복 교수는 사건 초기에는 이들의 항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버티는 듯하더니, 결국 사과와 함께 개정판에서 문제된 내용을 고치기로 약속했다.
당시 이 문제를 제기한 유대인 단체는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사이먼 비젠탈 센터’였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사이먼 비젠탈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이다. 사이먼 비젠탈 센터는 주로 나치 戰犯(전범) 추적,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중립국에 은닉한 금괴 색출,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의 休眠(휴면)은행계좌 발굴과 자금회수 등의 사업을 펴고 있다.
ADL, ‘베니스의 상인’ 공연 금지시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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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L 로고. |
반유대주의를 예방하고 대응하는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펼치는 단체가 있다. 바로 ADL(Anti-Defamation League of B'nai B'rith; 反비방연맹)이다. ADL은 1913년 시카고 출신 독일계 유대 법조인 지그문트 리빙스턴이 창설했다. 본부는 뉴욕에 있다.
ADL은 기구의 성격상 법적 대응이 많기 때문에 구성원 대부분이 변호사다. ADL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반유대 활동을 모니터링하고 대응하는 기구다. ADL은 특히 출판물·연극·영화 등 문화예술 분야에서 반유대주의를 추방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ADL을 설립한 리빙스턴은 유대사회의 힘을 합친 로비를 통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守錢奴(수전노) 샤일록과 같은 부정적인 유대인상이 부각되지 않도록 중등교육기관 연극특활시간에 이 작품의 공연을 금지시켰다.
ADL은 미국 유대사회의 오랜 숙원이었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수도 워싱턴 심장부에 건립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홀로코스트가 인류사의 비극이라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념관을 미국 수도 한복판에 꼭 세울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ADL과 많은 유대 단체들은 집요한 로비를 통해 이 사업을 관철시켰다. 1980년 미국 의회는 이 사업을 승인했다. 미국 유대인 사회는 연방정부가 기증한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 단지 안에 있는 부지에 1억6800만 달러의 民資(민자)를 모금해 기념관을 건립했다. 1993년 4월 22일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 부부는 약 500명의 미국 내 유대 지도자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홀로코스트 기념관 개관축하 리셉션을 성대하게 열었다.
스필버그와 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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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코스트를 계속 기억토록 하기 위해 쇼아영상역사재단을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
반면 유대인이 지배적인 미국 영화계는 연평균 한편 꼴로 홀로코스트나 과거 유대인의 핍박상을 담은 대작 영화(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등)를 제작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폴란드계 유대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1995년 말 쇼아영상역사재단을 만들었다. ‘쇼아’는 히브리어로 대재앙이라는 의미로, 홀로코스트를 지칭한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재산 일부를 出捐(출연)하는 한편, 유대계 영화사 MCA-유니버설과 당시 MCA 회장인 루 웨서맨의 지원금, 그리고 유대계 미디어 그룹인 타임 워너 등의 찬조금을 모아 이 재단을 만들었다. 스필버그가 이 재단을 설립하면서 “현재 살아있는 ‘쇼아’의 생존자가 모두 사망하면 차세대에 가서는 이 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이 소멸될 우려가 있으므로 홀로코스트를 확고한 역사로 영구히 각인시키기 위해 이 재단을 만든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聖域化(성역화)’다.
스필버그는 이 재단의 첫 사업으로 당시 전 세계 49 개국에 흩어져 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대상으로 3만8569건의 증언을 비디오로 녹취했다. 이 영상자료는 로스앤젤레스 비젠탈센터,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뉴욕 유대유산박물관, 파리 유대문헌센터, 그리고 예루살렘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셈’ 등 5개소에 각 1부씩 보관되어 있다.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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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로비단체 AIPAC의 로비에 좌우되는 미국 의회를 풍자한 만화. |
돈을 至高(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유대인들이 자선사업과 사회단체에 돈을 쾌척하는 것은 일종의 장기적인 투자다. 미국에서는 각종 모금에서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이 발언권과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마련이다. 이러한 유대사회의 전통은 자손들에게도 계승되어 유대인이 계속 미국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제반 로비에서도 성공하는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200만명이나 되어도 미국 主流(주류)사회의 진출이 미미한 우리의 在美(재미)동포사회는 미국 유대인의 적극적인 자선문화에 대해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한마디로 로비를 모른다. 로비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매우 부정적이다. ‘로비’하면 음험한 관계와 검은 뒷거래를 먼저 떠올린다. 실제로 많은 로비스트와 로비대상자들이 비리로 인해 司法(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여기에 여성 로비스트까지 등장하면 추가적인 추문도 뒤따른다.
한국인의 성급한 기질은 로비의 성공을 어렵게 만든다. 미국이나 선진국에서 이루어지는 로비는 시급한 현안문제 해결보다는 로비스트와 그 대상간의 장기적으로 축적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출발한다.
우리는 매사에 조속한 성과를 내는 것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대상자와의 오랜 우호관계를 갖기보다는 일이 터질 때마다 가장 효과가 신속하다고 믿는 ‘돈’ 한 가지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 이것이 1인 독재국가나 개발도상국에서는 위력이 있을지 몰라도 선진 투명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런 형태의 로비는 필연적으로 실패하며, 국가 이미지를 추락시킨다.
우리는 로비의 생리를 잘 모른다. 로비는 ‘주고받을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뇌물 한 가지를 빼면 줄 것이 마땅치 않다 보니 받을 것에 매달리게 된다. 즉 상대가 필요로 하는 ‘적절한 수단’과 로비를 위한 기초 인프라가 전혀 없다.
로비 대상에 대한 정보도 모자란다. 로비는 우발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주도면밀한 기획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로비스트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개발도 필요하지만, 대상자에 대한 깊은 연구가 先行(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이런 정보를 도외시하다 정작 로비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면 매번 허둥지둥한다. 중구난방으로 얻어 듣는 그릇된 첩보로 인해 로비 대상을 잘못 선정하여 失機(실기)하거나, 불필요한 비용을 지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朴東宣 로비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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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5월 美의회 증언을 위해 출국하는 朴東宣(가운데 안경쓴 사람). |
成敗(성패)를 떠나 박동선 개인은 매우 능력있는 로비스트였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평가였다. 박씨는 자신을 로비스트가 아니라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사업촉진자)로 불러달라고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35년 평남에서 태어난 박동선씨는 16세 때 渡美(도미)해 미국 동부의 명문 조지타운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외국인이면서도 조지타운대학의 학생회장을 지낼 정도로 수완이 있는 인물이었다. 영어에 능통하고 사교성 있는 박씨는 짧은 시일 내 미국의 주류사회에 파고들었다. 이런 배경을 업고 박동선씨는 중국계 미국여성과 공동으로 사교 모임인 ‘조지타운클럽(The Historic Georgetown Club)’을 설립했다. 그는 이 클럽을 중심으로 미국 朝野(조야)의 주요 인사들과 교분을 쌓기 시작한다.
이 무렵 朴正熙(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駐韓美軍(주한미군) 감축 저지, 한국의 人權(인권)상황에 대한 미국 측의 비판 불식 등을 목적으로 對美(대미) 로비스트를 물색했다. 당시 한국 정보기관과 줄이 닿은 박동선씨는 로비스트 역할을 자청했다고 한다.
박동선씨는 한국 정부로부터 쌀 도입 중개인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는 미국 최대 곡물 메이저인 카길 등을 통해 한국에 米穀(미곡)을 공급하면서 받은 커미션으로 1972~75년 당시로는 적지 않은 금액의 뇌물과 선물을 미국 정치인에게 제공했다.
1976년 10월 15일자 <워싱턴포스트>지가 “한국 정부가 박씨를 내세워 32명의 전·현직 미국 상·하원의원에게 불법 정치후원금을 제공했다”고 보도하면서 이 사건이 미국 의회·정부·사법부로 飛火(비화)되기 시작했다.
朴正熙 정부의 對中東 정책에 대한 경고?
당시 한국 정부는 “박동선씨의 활동은 한국 정부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미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미국 측의 박씨 身柄(신병)인도요청을 거부했다. 이후 양국정부는 불편한 교섭을 통해 박씨에 대한 미국측의 전면 사면을 전제로 박씨가 미 의회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는 데 합의하면서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박동선씨는 1978년 4월 하원 프레지어 청문회에 출석해 자신이 미국 정치인을 대상으로 로비한 사실은 시인했으나, 로비대상자의 상세한 명단은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문제가 됐던 민주당 리처드 해너 하원의원은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기타 3명의 하원의원은 의회 차원의 경미한 징계를 받았다. 박동선씨는 그간 수령한 커미션에 대한 세금 탈루 부분을 추징당했다.
이 사건을 보면 자연인 박동선은 로비스트로서의 자질은 훌륭했다. 다만 그는 로비활동 과정에서 한국의 정보기관과 깊이 연루되어 있었으므로 외국인 로비스트의 등록, 로비활동이나 사례금 사용 내역에 대한 보고의무를 다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로비의 공개성과 투명성을 위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당시 한국의 對中東(대중동) 정책에 대한 이스라엘과 미국 유대인사회의 보이지 않는 기류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은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중동 문제에 있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의 정책을 전폭적으로 따르지 못했다. 당시 아랍 産油國(산유국)들은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이나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동조하는 국가(네덜란드 등)에 대해서는 原油(원유)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한국은 원유 공급을 중동산유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한국은 이 무렵부터 중동 건설로 적지 않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중동 문제에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권의 입장에 미온적으로나마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박동선 사건은 이 와중에서 일어났다. 한국의 대중동 정책 추이를 주시하던 미국 유대인 사회는 한국 정부에 불만을 품게 됐고, 한국 정부에 대해 간접적인 경고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유대계 언론과 유대계 곡물상의 합작
박동선씨가 거래했던 미국의 곡물업계나 국제 곡물메이저는 유대 자본이 참여하고 있다. 박동선씨가 이들 곡물기업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불법행위를 이들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박동선 사건을 최초로 폭로한 매체는 유대인이 설립하고, 주요 필진 대부분이 유대인인 <워싱턴 포스트>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1978년 이스라엘은 ‘기술적인 이유’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을 철수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박동선 로비의 실패는 불편한 한미관계나 로비활동에 관한 미국의 실정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박동선씨는 오랜 친분관계가 있는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의 배경을 업고 1990년대 말 이라크의 원유·식량사업(유엔 관리하에 1996~2003년 시행. 이라크 원유를 식량과 교환하는 프로젝트)에 개입하여 다시 로비활동을 벌였으나 결과는 역시 참패였다.
2006년 1월 박동선씨는 미국 휴스턴에서 FBI에 체포됐다. 미국 검찰은 불법로비 및 유엔 고위간부에 대한 뇌물공여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2007년 2월 뉴욕연방법원은 그에게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박동선씨는 건강악화와 모범수 특전으로 減刑(감형)을 받아 2008년 9월 출옥했다.
이라크의 원유·식량사업은 인도적인 목적의 사업이기는 하지만 유엔의 대이라크 경제제재의 테두리 안에서 시행된 매우 민감한 사업이었다. 당연히 미국의 이목이 집중됐을 것이다. 미국 정보당국은 미국과 관계가 불편했던 부트로스 갈리나 코피 아난 등 아프리카 출신 유엔사무총장의 주변 인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동선씨는 이에 개의치 않고 마당발적인 자신의 人的(인적) 네트워크와 개인적인 로비 역량을 과신하다가 낭패를 본 것이 아닌가 싶다.⊙
















































